클레르 옵스퀴르 분석 칼럼 :#7 이 게임은 좋았는가? (부제 : 빛과 어둠)
반갑습니다.
지난 한 주는 어떻게 보내셨나요? 저는 이 게임을 여러 번 플레이하고, 레딧과 여러 커뮤니티에서 다양한 토론을 하며 정말 즐거운 시간을 보냈습니다. 이제 그 재미도 끝내고, 좋은 감정을 안고 현실로 돌아갈 때가 된 것 같네요. 그러나, 아직 제가 할 일이 하나 남은 것 같군요. 바로 헌사입니다.
헌사에 대해 말씀드리기 전에, 제가 하나 묻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창작물은 우리에게 어떤 의미일까요? 창작물이 우리에게 줄 수 있는 가장 큰 선물은 아마도 ‘즐거움’과 ‘감동’일 겁니다. 희극을 보며 웃기도 하고, 비극을 통해 카타르시스를 느끼기도 하죠. 활극에서 활력을 얻기도 하고, 슬래셔물에서 짜릿함을 느끼기도 합니다. 이 모든 감정들은 결국 우리에게 ‘살아갈 힘’을 주니까요.
그리고 창작물이 우리에게 줄 수 있는 또 다른 큰 선물은 “무엇이 최선의 선택이었을까?”, “내가 그 상황이라면 어떻게 했을까?”라는 현실에 대한 질문을 던져준다는 점이라고 생각합니다. 관객들은 이를 통해 실제 삶의 선택 순간에 도움을 얻거나, 인생의 다른 가능성들을 고민해볼 수 있죠.
그래서 저는 ‘현실의 눈으로 바라본 Clair Obscur’이라는 주제로 몇 개의 칼럼을 쓰고 있습니다. Clair Obscur의 세계는 현실은 아니지만, 현실 사람들이 만들고 즐기는 만큼 현실의 시선으로 바라보는 것도 의미가 있다고 생각하니까요. 이 모든 분석과 사유가 제가 이 게임과, 제작자와, 그리고 여러분께 진정한 경애와 존경의 마음으로 바치는 "헌사"이며, 저는 그것이 이 멋진 게임에 바치는 작별 인사로서 충분하리라 생각합니다.
추가로, 이 글은 원래 레딧에 게시했던 글이며, 영어로 쓴 글을 다시 한국어로 번역한 것이기 때문에 어투나 어순, 혹은 일부 용어가 어색하게 느껴지실 수 있습니다. 최대한 다시 다듬기는 했지만, 보시면서 혹시 말이 좀 어색하게 느껴지시더라도 너른 마음으로 양해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서론이 길었네요. 의도치 않은 스포일러를 피하기 위해 서론을 살짝 길게 쓰고 있사오니 양해바랍니다. 그럼, 이제 본론인 33 분석 논문 일곱번째 칼럼, "이 게임은 좋았는가?(부제 : 빛과 어둠)"을 시작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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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론부터 먼저 말하자면, 저는 이 게임이 좋습니다. 아주 재미있게 즐겼어요. "인생 최고 명작인가?"라고 물으면 좋게 대답하기가 어렵지만, 적어도 그 수준에서 언급될만하다는 것에는 주저없이 동의할 수 있을 정도로.
지금까지의 칼럼에서는 게임의 '보이지 않는' 부분을 현실의 눈으로 바라보는 데 집중했고, 아무래도 비판점 위주로 파보았던 것이 사실입니다. 이제 마지막 칼럼인만큼, 역으로 어떤 점이 좋았는지부터 시작해서 한번 전체적으로 넓게 봐보려고 합니다. 현실의 눈으로 보는 만큼, '그래픽이 좋았다'나 '음악이 좋았다' 같은 피상적인 좋은 점들은 넘어가겠습니다.
1. 이 게임의 빛
└ 1-1. 눈동자가 말하는 것
└ 1-2. 왕도적인 전개의 안정감
└ 1-3. 익숙함의 조합이 주는 명쾌함
└ 1-4. 폭넓은 주제의식과 생각할 거리
└ 1-5. 의미와 진실
1. 이 게임의 빛
게임이 명작이기 위해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일까요? 저는 '재미'를 꼽습니다. 캐릭터, 스토리, 주제의식, 기타 여러 파편적인 요소들 중 몇 개가 좋더라도, 결국 재미를 주지 못하면 명작이라 불리기는 어렵습니다. 근본적으로 게임이란 누군가를 가르치거나, 무언가를 바꾸려는 수단이 아니라, 인간을 즐겁게 하기 위해 만들어지는 상품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재미라는 것은 굉장히 주관적인 요소라 계량화하기가 너무 어렵습니다. 그러니 일단 재미같은 불확정 요소는 제쳐두고 (A)게임의 각 요소가 다른 게임에 비해 어떻게 좋았는지를 따지는 간접 추론법이나 (B)게임이 좋았다는 전제 하에서 어떤 부분이 플레이에게 어필할 수 있었는지를 역으로 유추하는 사후적 귀납 추론법을 이용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사실, 그거 말고는 합리적이라 할수 있는 방법이 적어요. 제가 다른 사람들의 마음을 읽을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저 자신의 마음조차도 100퍼센트 알거나 설명할 수 없으니까.
그런 의미에서, 제가 현실의 눈으로 보았을 때 밝은 부분, 즉 이 게임의 '밝은 면'의 요소들에 대해 정리해보자면 아래와 같습니다.
1-1. 눈동자가 말하는 것
이 게임에서 가장 잘 표현하는 요소를 하나만 꼽는다면 감정, 그중에서도 특히 '슬픔'에 대한 묘사입니다. 특히, 눈동자의 움직임이죠.
많은 분들이 느끼셨으리라 생각합니다. 이 게임에 다른 게임과 차별화된 그래픽적 요소가 있다면 그것은 자연스럽게, 그러나 멈추지 않고 움직이는 인물들의 눈동자입니다.
게임이나 영화에서 풀 3D모델링을 표현하는 방식은 크게 사람이 모든 움직임을 입력하는 '핸드 키 애니메이션 방식'과 배우에게 마커를 붙여 연기를 복사하는 '모션 캡처 방식'으로 나뉩니다. 핸드키 애니메이션은 내용을 일일이 지정해야 하기 때문에 시간과 예산이 많이 들고, 잘못하면 부자연스럽게 보일 수 있는 반면 표현할 수 있는 범위가 넓고 표현이 정밀합니다. 반대로 모션 캡쳐는 배우의 연기력이 곧 표현의 한계이지만, 자연스러운 느낌을 주기 좋고 작업속도가 매우 빠르죠.
따라서 많은 경우, 영화나 게임에서는 이 둘 중 하나만 단독으로 채택하기보다는 둘을 적절히 병용해서 사용하게 됩니다. 대체적으로 '큰 그림은 모션 캡처로 그리고, 세밀한 부분은 핸드키 애니메이션으로 보정하는 방식'을 취하는 경향이 있죠.
여기서 이 두 가지 방식 모두가 다루기 힘든 부분이 있습니다. 네, 바로 눈동자죠. 눈동자의 떨림을 인위적으로 그려내기가 힘든 것은 두말할 것도 없지만, 의외로 모션캡처에서도 눈동자의 움직임은 표현하기가 굉장히 어렵습니다. 모션캡처에 사용되는 마커를 눈동자에 찍을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당연히 살아있는 사람의 눈알에 모션캡처용 트래커를 접착하는 것이 위험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마커를 달더라도 눈동자가 너무 작고, 빠르게 움직이기 때문에 캡처하는 것 자체가 너무 어렵습니다. 눈동자는 마커가 인식할 수 있는 범위보다 작게 움직이고, 마커가 위치를 확정하는 속도보다 빠르게 움직이거든요.
적외선으로 눈동자 위치를 측정하는 아이트래커를 써서 눈동자를 캡처하는 방식이 있긴 한데, 이건 잘 쓰이지 않습니다. 아이트래커를 사용해 눈동자를 캡처한 대표적인 작품인 아바타 2에서도 여전히 핸드키 애니메이션을 이용한 후처리 작업을 거쳐야 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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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처럼, 눈동자의 움직임을 표현하는 것은 방법론적인 측면에서 굉장히 어려운 일입니다. 거기다 그것보다 훨씬 중대한 문제가 하나 더 있죠. 실제로 사람의 눈동자가 매 순간 떨리는 것을 작품에서 구현해내면 자칫 '불안해 보인다'는 느낌을 주기 쉽다는 것입니다. 이는 캐릭터가 정신병자로 보이게 만들 수 있을 뿐더러, 나아가 불쾌한 골짜기를 유발하는 기재이기도 합니다.
때문에 3D로 제작되는 많은 영화들, 그리고 거의 대부분의 게임에서는 눈동자의 평상시 움직임이 굉장히 느릿하고 완만하며, 떨림이 최소화되어 있습니다. 흔들리지 않는 눈동자가 캐릭터에게 안정된 신뢰감과 감정 이입의 가능성을 더해주기 때문이죠.
클레르 옵스퀴르와 비슷한 시기에 발매된 게임인 '파이널판타지 7 리메이크 리버스'나 '발더스 게이트 3', '엘든링' 등의 영상을 보시면, 모든 눈동자가 거의 흔들리지 않아요. 이런 게임들에서 눈동자는 '시선의 방향'을 나타내는 메타포로 활용되고, '눈을 이용한 감정 표현'은 대개 눈동자 자체의 움직임과 눈썹과 눈커풀의 움직임으로 표현하는 것이 보통입니다.
그러나, 클레르 옵스퀴르는 반대입니다. 이 게임은 모든 인물들의 눈동자가 사정없이 흔들립니다. 평범한 컷신에서는 체육관의 진동 플레이트 위에 있는 것처럼 달달달 떨리고, 강한 감정을 표현하는 컷신에서는 폭풍 속의 가랑배처럼 정신없이 요동치죠. 이 격렬한 움직임이 캐릭터의 내면, 특히 슬픔과 괴로움, 죄책감 등의 네거티브한 내면을 너무도 훌륭하게 반영하고 있습니다. 눈동자를 이용한 감정 표현 하나만으로는, 제가 본 모든 3D 창작물 중 두말없이 최고입니다.
거기다 재미있게도, 이미 눈치채셨을거라 생각합니다만, 각 캐릭터마다 눈동자의 움직임 패턴이 다릅니다. 대표적으로 몇 가지 꼽자면 :
(A) 마엘
마엘의 눈동자는 항상 격하게 떨리고 있습니다. 다른 캐릭터들과 비교해도 눈동자의 움직임이 월등히 격렬하죠. 그래서 마엘이 가진 대표적인 특성, 예컨대 사춘기 특유의 불안함, 사랑받지 못한 소외감,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고통, 자신이 있을 곳을 찾아 방황하는 괴로움 등이 눈동자로 잘 표현됩니다.
마엘의 시선은 대체적으로 땅 쪽으로 반원운동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마치 주눅든 아이처럼. 이는 따돌림당하고 고립되고 상실을 겪으면서 계속해 상처입은 그녀의 심정을 굉장히 직설적으로 표현합니다.
특히 이 점이 마엘에 대한 호의, 모성에 가까운 보호욕을 불러일으키는 기재로 작용합니다. 베르소에게 자신을 위로하지 말라고 거절할 때, 구스타브의 무덤을 만들 때 등 여러 장면에서 마엘의 눈동자의 움직임이 매우 부각되는데, 이 두 상황 모두 마엘이 감정적으로 무너져있을 때죠.
(* 다만, 이러한 눈동자의 격렬한 움직임과 더불어 채도가 낮은 눈동자, 어색한 모델링 및 움직임이 종합적으로 약한 비인간성을 드러낼 때가 있어서, 캐릭터가 불쾌한 골짜기의 경계선을 살짝 왔다갔다 하기도 합니다. 눈동자의 채도가 낮고 흰자와 눈동자의 경계가 흐릿해, 작고 새까만 동공만 부각되는 장면들이 약간 불쾌감을 불러일으킬 수 있어요.
이는 비슷하게 채도가 낮고 경계선이 흐릿한 눈동자를 가진 시엘에게서도 유사하게 작용하지만, 마엘의 경우 키가 작아서 대부분의 컷신에서 얼굴을 위로 들고 있거나 고개를 꺾고 있기 때문에 이 점이 더욱 부각됩니다. 특히 마엘과의 감정이 많이 쌓이지 않은 초반부에, 마엘을 보며 순간순간 섬뜩한 느낌을 받으신 분들 있을거라 생각합니다. 저도 그랬고.)
(B) 마엘
순서 착각한 것 아닙니다. 3막 이후 알리시아와 융합한 마엘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편의상, 이후에는 알리시아라고 부르겠습니다. 이 알리시아의 눈동자 움직임은 이전 마엘과는 완전히 다릅니다. 시선이 끊임없이 떨리고, 눈동자가 아랫방향으로 이끌리던 마엘에 비해 알리시아는 시선이 잘 움직이지 않고, 대체적으로 눈동자가 정면을 노려보듯 이끌립니다.
이 때문에 알리시아는 마엘에 비해 훨씬 더 강인하고, 날카로운 인상을 줍니다. 그리고 감정이 풍부해서 명확히 하나의 의미를 짚기 힘든 마엘과는 달리, 알리시아는 감정 간 눈동자 움직임의 대비가 뚜렷하기 대문에 의미를 잡기가 훨씬 쉽습니다.
알리시아는 대부분의 경우 정면을 '찌르듯이' 노려보며, 죄책감을 느낄 때(3막 초반, 베르소와 대화하다가 과거 베르소의 죽음을 회상하는 장면)는 시선을 아래로 내리고, 거짓말을 할 때(최종전 이후, 르누아르에게 영원히 떠나는 것이 아니라고 말하는 장면)는 시선을 좌우로 흔듭니다. 때문에 감정과 의미의 폭이 넓은 마엘에 비해 상대적으로 명확한 의미를 표현하죠.
(* 더불어 마엘과 알리시아의 소소한 차이로, 알리시아는 대체적으로 눈을 부릅뜨고 정면을 노려보기 때문에 대부분의 장면에서 이마에 깊게 주름이 잡힙니다. 이거, 피부에 좋지 않아요. 표정근육의 과도하고 격렬한 사용은 피부에 심한 대미지를 주는, 피부노화의 주요한 원인 중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사회적으로도 이런 공격적인 표정은 필요없는 분란과 오해의 발생 요소가 되죠. 제가 알리시아 옆에 있었다면 조언을 해줬을 텐데, 안타까운 일입니다.)
(C) 베르소
베르소의 눈동자는 대부분의 컷신에서 불안하게 좌우로 흔들립니다. 그 내면의 불안함, 죄책감, 정신병과 더불어 '거짓말을 하고 있다'를 꽤 직접적으로 드러내죠. 특히 베르소는 눈동자뿐만 아니라 고개도 항상 격하게 움직입니다. 그 방황하는 고갯짓은 그의 내면의 불안함 뿐만 아니라, 끊임없이 주변을 관찰하고 있는 그의 어두운 면모도 함께 드러냅니다. 그가 왜 주변 사람들을 관찰하고 있을까요? 그들을 속이고, 배신하고, 죽이기 위해서죠.
(D) 루네
루네의 눈동자는 좌우로 많이 흔들리지만, 감정의 표현보다는 생각의 표현일 때가 많습니다. 똑같이 눈동자가 좌우로 흔들리는 베르소에 비해, 루네의 눈동자는 움직임이 깔끔하고 움직인 후에 단단히 고정됩니다. 많은 경우, 그녀가 생각하는 주제를 변환할 때 눈동자가 마치 스위치처럼 찰칵 하는 느낌으로 간결하게 움직이죠.
이런 눈동자의 움직임은 캐릭터가 생각이 많고 똑똑해 보이는 측면과, 감정적으로 기복이 적은 안정적인 측면을 동시에 표현합니다. 캐릭터 인기투표 시 루네는 거의 항상 1위 근처에서 머무는데, 저는 예쁘고 귀여운 겉모습과 기특한 행동원리에 더해, 이 따듯한 안정감과 안온감이 인기에 큰 영향을 주었다고 생각합니다.
(E) 시엘
시엘의 눈동자는 움직임이 굉장히 적으며, 상대적으로 살짝 윗쪽을 공허하게 바라보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는 침착함과 담대함, 그리고 공허함과 허망함을 동시에 표현하며, 또한 굉장히 연기톤이기도 합니다.
시엘이 쾌활한 가면 뒤에 곪아있는 내면을 숨기고 있는 인물인 것은 극중 여러 번, 다양한 방법으로 표현됩니다. 그녀의 관심사는 대부분 과거의 일들이며, 그녀는 중요한 힌트인 마엘의 꿈 내용에 대해서도 (루네만큼)궁금해하지 않습니다. 가면지킴이 비사주가 "누구에게나 '하나의' 가면이 필요하다"면서 가면을 뒤집어씌울 때, 시엘은 그 가면의 영향을 받지 않죠. 이미 하나의 가면을 뒤집어 쓰고 있기 때문에.
(* 여담으로, 가면지킴이의 대사가 프랑스어 버전과 영어 버전에서 각각 달라요. 프랑스어 버전에서는 "누구에게나 '하나의 가면(A Mask)'이 필요하다"고 외치는데, 영어 버전에서는 "누구에게나 가면들(Masks)이 필요하다"고 외칩니다. 즉, 프랑스어 버전에서 이 대사의 의미는 "누구에게나 가면은 필요하다"와 "누구에게나 '하나의' 가면은 필요하다"의 차이를 이용한 언어유희이며, 영어 버전에서는 단순한 "누구에게나 가면이 필요하다"라는 뜻이 됩니다.
저는 프랑스어 판이 원래 의미라고 생각하는데, 이 게임이 프랑스 게임이기 때문입니다. 이 경우 '하나의' 가면(페르소나)를 이미 덮어쓰고 있는 시엘이 가면 공격에 이뮨인 점도 잘 설명되어 앞뒤가 맞죠.)
2막에서 페인트리스를 물리친 원정대가 뤼미에르로 귀환했을 때, 시엘은 기뻐하는 사람들 속에서 허공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그녀의 눈동자가 향하는 허공에는 무엇이 있을까요? 저는 그녀의 눈동자가 피에르와 잃어버린 아이를 비추고 있을 거라 생각합니다.
(F) 르누아르
르누아르는 이 게임 전체에서 가장 눈동자의 움직임이 적은 인물입니다. 그의 시선은 항상 단단하게 고정되어 있으며, 약간의 떨림만이 그가 살아있음을 증명할 뿐입니다.
그가 시선을 격하게 움직이는 때가 한 번 있는데, 바로 알리시아가 거짓말을 했을 때입니다. 그 때, 그는 격렬하게 고개를 꺾어 땅을 쏘아보다가, 다시 시선을 돌려 마엘을 바라보죠. "마엘의 거짓말을 알아차렸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를 믿어주는 모습"의 표현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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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처럼, 이 게임은 '자칫하면 모든 캐릭터가 정신병자로 보일 가능성'이나 '불쾌한 골짜기의 발생 가능성'을 전부 감수하면서도 눈동자의 흔들림을 격렬하게 표현하고 있고, 이 점은 플레이어가 캐릭터의 강한 감정, 특히 슬픔이나 괴로움에 깊숙히 감정 이입할 수 있도록 하는 요소입니다.
레딧에 잠깐만 있어도 "캐릭터가 현실적이다"라는 투의 이야기는 많이 볼 수 있죠. 저는 그 가장 큰 이유가 바로 이 눈동자의 움직임에 기반한 섬세하고 강렬한 감정 묘사라고 생각합니다. 이 부분에서만큼은, 제가 알고 경험해본 모든 게임 중 33원정대가 최고입니다.
1-2. 왕도적인 전개의 안정감
이 게임은 전반적으로 신선한 맛은 거의 없고, 익숙한 것들의 조합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특히 게임의 광고와 초반부에는 '갑자기 도래한 종말의 공포와 역경에 맞서 싸우는 인간 찬가'라는 측면이 강조되는데, 이는 분류적으로 에반게리온에서 시작되는 일본 애니메이션/JRPG의 거대한 흐름에 올라탄 것이죠.
비교적 최근 작품들만 보더라도, 이런 전개는 니어 시리즈, 파이널 판타지, 페르소나 등 JRPG 작품 전반에서 굉장히 흔하게 사용되는 주제입니다. 더 넓게 창작물이라는 범주에서 보자면 데빌 메이 크라이, 엘든링, 드래곤퀘스트, 진격의 거인, 헬싱 등도 있죠. 서양권에도 인디펜던스 데이, 인터스텔라, 데스 스트랜딩 같은 작품들이 있고.
도저히 항거할 수 없을 것만 같은 거대한 악이 인류를 유린하고, 많은 인간들이 혼란, 공포, 절망에 빠지는 와중, 공포를 삼키고 묵묵히 전진하는 용사들이라는 테마는 굉장히 왕도적인 전개이며, 그만큼 직관적이고 이해하기 쉬운 안정적인 구성입니다. 가슴 벅차는 웅장함과 눈 떨리는 감동을 선사하기도 좋죠. 현실의 소방관들이 우리에게 주는 감동처럼.
이런 왕도적인 작품은 '구세대'적이거나, '스테레오타입'이라는 조롱을 받기 쉽습니다. 하지만 그런 주제가 그렇게 많이 쓰인 이유는, 결국 그것이 재미있고 잘 팔리기 때문이죠. 반대로 지나치게 새로운 시도, 클리셰 타파를 위한 새로운 전개를 도입하다가 망해버린 창작물도 수두룩합니다. 따라서 저는 이 게임의 소재가 전형적이냐, 아니냐를 따지는 것보다는 재미있느냐, 아니냐로 판단하는 것이 더 건설적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이 게임은 명백하게 재미있었습니다.
1-3. 익숙함의 조합이 주는 명쾌함
앞서 말한 '스테레오 타입 그 자체인 주제와 전개'를 제외하고도, 이 게임은 어딘가에서 본듯한 요소들로 넘쳐납니다.
A) 미술 : 종합적인 아트 스타일은 대체적으로 블러드본, 디스아너드, DMC : 데빌메이크라이의 익숙함이 강하게 느껴집니다. 바로크 양식의 정교한 건축물들이 우울하게 뒤틀리고 침잠한 분위기와 거대한 감옥처럼 보이는 저택의 모습은 블러드본(+다크소울 3)을 떠올리게 하며, 낭만주의 사조 풍의 강렬한 명암 활용과 유화풍의 초상화들, 뒤틀리고 파괴된 도시들과 여러 물체들이 정처없이 떠나디는 광경은 디스아너드의 느낌이 강하고, 물 속에 있는 듯한 독특한 색감과 허공에 떠다니는 정경물들은 DMC의 랩터 뉴스 네트워크와도 굉장히 흡사합니다. 베르소의 스타일 시스템의 모습도 DMC와 똑같이 생겼죠.
B) 시스템 : 제가 아는 바로는, 판타지 배경의 턴제 전투에서 QTE 액션을 통해 추가 효과를 얻는 시스템은 레전드 오브 드라군(1999년), 파이널 판타지 8(2000년)이 최초입니다. 전자인 레전드 오브 드라군은 '거대한 운명 앞에 선 인간들의 용기, 희생, 의지'라는 주제를 33원정대와 공유하며, 후자인 파이널판타지 8은 '기억을 잃은 주인공, 정체성의 혼란, 희생과 파멸'이라는 주제를 공유하죠. 패링 시스템은 세키로와 거의 완전히 똑같습니다.
C) 반전 요소 : '주인공의 세계는 현실이 아니라, 초자연적인 능력으로 구축된 가상이었다'라는 반전은 매트릭스로 대표되는 유구한 서사적 장치입니다. 파이널 판타지 10, 페르소나 5 로얄, 제노기어스 등 많은 JRPG 창작물들에서도 어김없이 자주 사용되죠. 조금 다르지만 니어 레플리칸트(주인공이 진짜 인간이 아니며, 애정 때문에 진실을 외면하고 파국을 맞이함), 니어 오토마타(주인공이 오토마타이며, 이미 멸종된 인류를 위해 싸운다는 거짓된 루프에 갇혀있음)도 비슷한 반전 요소를 가지고 있습니다.
D) 캐릭터 : '다른 인물의 기억을 자신의 것처럼 가지고 있으며, 연인을 상실했고, 자기혐오에 빠져 있는 가상 인물'하면 파이널 판타지 7의 클라우드 스트라이프를 빼놓을 수 없죠. 이와 아주 비슷한 예로, 파이널 판타지 10에는 '고통을 끝내기 위해 세계의 종말을 추구하며, 주인공의 아군처럼 등장하지만 거짓과 배신을 통해 주인공들을 종말로 유도하는 인물'인 시모어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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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리 말씀드리지만, 저는 33원정대가 이 작품들을 '표절'했다고 생각하진 않습니다. 어차피 하늘 아래 새로운 것은 없고, 위 작품들 역시 인류가 쌓아온 다른 작품들에게서 영향을 받아 만들어진 것입니다. 그렇기에 이 게임이 위에 언급한 게임들과 일부 유사성을 보이더라도, 그것 자체는 큰 문제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오히려 저는 이 유사한 점의 밝은 측면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위에서 언급된 작품들은 하나같이 최소 수작, 대체적으로 명작으로 꼽히는 작품들이거든요. 이런 명작들에 영향을 받은 33원정대의 안정적인 전개도 훌륭하고, 직관적이며, 분명히 칭찬받을 요소입니다.
또한 그 안정적인 전개 속에서도, 앞서 언급한 작품과는 차별화된 33원정대만의 서정적인 느낌이 있습니다. 다른 게임들과는 확실히 결이 좀 달라요. 우울하지만 화려한 미술, 처절하지만 발랄한 인물들, 잔인하지만 희망을 향한 발걸음이 주는 강한 대비가 독특하면서도 아주 풍미가 짙은 감흥을 선사합니다.
이 게임과 아주 비슷한 서정적 느낌을 가진 '플레이그 테일' 시리즈도 있는데, 이 게임은 수작이긴 하지만, 지나치게 우울함 쪽에 무게가 실려있죠. 화려함과 처절함은 세키로도 33원정대 못지 않지만, 세키로는 발랄함이나 희망이 지나치게 적습니다. 비슷하게 '정신적 문제'라는 테마에 골몰한 '헬블레이드' 시리즈는 '정신병 간접체험 시뮬레이터'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로 지나치게 정신을 피폐하게 만듭니다. 33원정대는 이런 요소들의 균형을 잘 잡고 있어요.
이런 대비되는 주제들을 어색함없이 잘 섞어서 균형있게 배치한다는 것은 굉장이 어려운 일입니다. 거기다 그 안에서 재미를 추구한다는 것은 훨씬 더 어렵죠. 플레이그 테일이나 헬블레이드처럼, 예술성 면에서는 좋은 평가를 받았지만 게임으로서는 흥행하지 못한 작품들이 이미 증명한 바입니다.
따라서, 저는 여러 클리셰적인 요소를 적절히 조합하여 훌륭한 결과를 만들어낸 것이야말로 33원정대가 이루어낸 가장 큰 성과라고 생각합니다.
1-4. 폭넓은 주제의식과 생각할 거리
이 게임은 각 인물의 트라우마, 슬픔, 상처, 정신병리적 특성 등을 통해 여러 가지 철학적 담론을 던집니다.
A) 슬픔은 어떻게 극복해야 하는가?
B) 가상과 현실은 어떻게 다른가?
C) 배타적 공리주의는 옳은가?
D) 능력은 권리를 포함하는가?
E) 부모가 아이를 통제하는 것은 정당한가?
F) 페르소나는 가짜인가?
등등, 꽤 심오한 여러 주제가 인물마다 몇개씩 걸려 있습니다. 이 주제들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칼럼 6 파트 2(중편)에서 이미 다루었기 때문에 간략히 넘어갑니다만, 이런 철학적인 주제를 어색하지 않게 잘 풀어내고, 플레이어로 하여금 여러 생각할 거리를 던져준다는 점은 이 게임의 정말 훌륭한 장점입니다. 이런 거 전혀 없거나, 어설프게 던지려다 애매해지는 창작물들도 셀 수 없이 많거든요. 바로 위 챕터에서 말한 헬블레이드 시리즈가 대표적이죠.
33원정대는 비교적 깔끔하게 정돈된 형태의 철학적 고찰과 담론을 제시한다는 점에서 다른 많은 게임보다도 훨씬 감정적-이성적 무게가 뚜렷한 게임이며, 저는 이 점이 33원정대를 다른 게임보다 더욱 특별하게 만들어준다고 생각합니다.
2. 이 게임의 어둠
└ 2-1. 눈동자가 말하지 못하는 것
└ 2-2. 왕도적인 전개, 그러나 지나친 반전
└ 2-3. 익숙함의 조합, 그러나 활용의 부진함
└ 2-4. 폭넓은 주제의식, 그러나 얕은 결론
└ 2-5. 의미 없는 의미, 진실 없는 진실
└ 2-6. 논쟁의 유발
└ 2-7. 플레이의 지속가능성
2. 이 게임의 어둠
첫번째 챕터에서는 이 게임의 밝은 면에 대해 이야기했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어두운 면에 대해 이야기할 차례군요. 다만 이 게임의 부족한 부분에 대해서는 앞선 여러 칼럼에서 이미 여러번 짚었기 때문에, 동어반복적인 부분은 최대한 생략하도록 하겠습니다.
2-1. 눈동자가 말하지 못하는 것
앞서 챕터 1에서 짚었듯, 이 게임은 감정 묘사에 엄청난 공을 들였고 다른 어떤 게임도 해내지 못한 성과를 일구어냈습니다. 게임 속 인물들의 감정은 매우 사실적으로 느껴지며, 그들의 고통과 슬픔은 가슴 깊이 젖어드는 아릿함이 있죠.
그러나 표현과 묘사를 넘은 '스토리'의 영역에서, 각 인물들의 행동원리나 사고방식은 정상인으로서는 납득하기가 굉장히 어렵습니다. 감정적으로는 "그럴 수도 있다"라는 느낌이 들지만, 현실적이고 이성적인 측면에서는 "왜 저렇게밖에 못하지?"라는 생각이 들 수밖에 없는 것이죠.
대표적으로 페인티드 르누아르의 행동을 봅시다. 그는 가족과의 행복한 여생을 원하죠. 아주 소박합니다. 하지만 그 목적을 위해 그가 대체 무슨 행동을 할까요? 그가 가족들과 행복한 인생을 오래 향유하기 위해서는 페인트리스에게 협조하고, 네브론들을 물리치고, 원정대원들을 돕거나, 원정대원들을 직접 살해해야만 합니다. 하지만 그는 뒤죽박죽으로 행동합니다. 페인트리스에게 협조하는 것 같아 보이다가도 네브론들과 함께 원정대원들을 습격하고, 원정대원들을 습격하면서도 직접 죽인 인물은 알랭과 구스타브 뿐입니다. 대체 뭘 하고 싶었던 거죠?
베르소의 행동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그가 과거의 삶에서 어떤 고통을 받았는지는 게임에서 묘사되지 않습니다. 어떤 고통을 받았다 치고, 그는 무슨 행동을 취했을까요? 온 세상의 파멸과 함께 자살하는 방식을 택했습니다. 대체 왜 그러는 걸까요? 그런 최악의 방식, 베르소를 믿고 사랑하고 돕는 모든 이들을 속이고, 배신하고, 죽이기 전에 다른 좋은 방법을 생각할 수도 있잖아요. 대략 100년이라는 긴 시간을 살아가면서, 온 세상을 멸망시키는 것보다 더 온건한 방법을 생각할 여유조차 없었다는 게 맞나요?
마엘에게 강압적이고 극단적인 방식을 강요하다가 그녀가 그림 속 자살을 선택하게 만든 르누아르도, 극단적인 이기심으로 가상세계 속 고립사를 유일한 방법으로 여기는 마엘도, 그 전체 과정을 옆에서 멀거니 지켜만 보는 루네와 시엘도 멀쩡해보이지 않는 것은 마찬가지입니다.
스토리적으로 '무조건 결말은 비극적이다'라고 결론을 내려놓고, 그 결말에 다다르기 위해 모든 인물들이 합리적이지 않거나, 지나치게 극단적이거나,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을 반복하고 있습니다. 정서적 공감은 가능하지만, 논리적 개연성의 측면에서는 굉장히 작위적이라 설득력이 부족해요.
칼럼4에서 짚었듯, 그들에게는 충분한 시간적 여유와 타협할 수 있는 충분한 근거가 있습니다. 최소한, 머리를 식힌 다음 다시 생각해볼 여유를 가질 수는 있었죠. 하지만 아무도 더 나은 방법을 고려하지 않은 채, 모두 무조건 최대한 극단적이고 비극적인 방법만을 위해 폭주합니다. 마치 중증 정신 질환자처럼. 이 지점이, 스토리의 설득력이나 개연성을 지나치게 해치고 있습니다.
2-2. 왕도적인 전개, 그러나 지나친 반전
앞서 짚은 것처럼 '사실은 가상세계였다'는 식의 반전, 이기적인 선택, 비극적인 결말 모두 다른 창작물에서도 이미 널리 사용되어온 것이고, 그 자체가 문제가 있다고 생각되진 않습니다.
그러나 1~2막의 왕도적인 전개와 3막의 반전은 조화롭지 않고, 계속해서 서로가 충돌할 뿐입니다. 1~2막의 주인공이었던, 그리고 게임의 메인 타이틀이기도 한 33원정대원들은 3막에서 그야말로 미치광이 가족들의 이기적 다툼을 장식하는 단순한 배경물이 되어버립니다.
저는 이 게임이 비극이어도 좋다고 생각합니다. 33원정대원들이 모두 희생되어도 좋아요. 그것이 그들의 이야기이기만 하다면. 하지만 33원정대원들은 결국 통제병자 창조신, 0원정대원 자살지망자, 0.5 33원정대원 정신질환 소녀 셋 중 누가 더 싸움을 잘하는가 다투는 광경의 소품으로 다루어질 뿐입니다.
대체 1~2막의 그 모든 사건들이 무슨 의미가 있었던 거죠? 서사적으로 그들의 활약은 '페인트리스를 제압한 것' 달랑 하나인데, 정작 그 유일한 활약은 그들 자신과 뤼미에르 시민들 전체의 몰살을 야기했을 뿐입니다. 그 이후 벌어지는 모든 일들에서, 그들은 서사적으로 아무런 역할도 맡지 못해요.
결국 이 게임의 제목은 33원정대지만, 이 게임의 내용은 33원정대가 아닙니다. 이런 일이 일어난 가장 큰 이유는, 서사적인 반전의 충격에 지나치게 공을 들이고 있기 때문입니다. 반전은 좋은 장치입니다. 하지만 반전의 충격 하나를 위해 모든 구성을 무너뜨리고, 전체 스토리가 반전 하나만을 위해 존재하게 될 때, 이전에 쌓아온 모든 감정과 내러티브는 전부 '가치없는 것'이 되어버립니다.
2-3. 익숙함의 조합, 그러나 활용의 부진함
칼럼 6을 통해 이미 깊이 다룬 내용이므로, 짧게 넘어가겠습니다.
이 게임은 너무 많은 클리셰, 상징, 메타포를 남발하고 있고, 이 중 많은 부분이 회수되지 않으며, 대부분은 매우 모호하게 처리되기 때문에, 깔끔하게 결론지을 수 있는 부분이 매우 적습니다.
그리고 대체적으로 수많은 클리셰가 정리되지 않은 채 마구 욱여넣어져 있어, 대체 무슨 의미가 있는지 모를 설정과 주제들이 마구 흩뿌려져 있죠. 개인적으로 이 점은, 제작자들의 욕심과 미숙함을 드러내는 부분이라고 생각합니다. 설정만 잔뜩 쌓아놓고, 이를 제대로 이야기에 녹여내지 못하는 결과-보통 설정충이라 불리는 미숙한 작가들이 흔히 저지르는 실수죠.
2-4. 폭넓은 주제의식, 그러나 얕은 결론
이것도 칼럼 6을 통해 이미 깊이 다룬 내용이므로, 짧게 넘어가겠습니다.
앞서 챕터1에서 짚은 것처럼, 이 게임은 깊이 생각해볼만한 여러 무게감 있는 주제들을 여럿 제시하지만, 제시하는 걸로 끝납니다. 그런 주제들에 대한 제대로 된 고찰이나 나름의 결론을 제시하지 않고, 그런 것들을 제시해야 될 때가 오면 모호함 뒤로 도망가버려요.
모든 주제들은 무차별로 던져지고, 어떤 결말도 맺지 못한 채 "자, 한번 잘 생각해보세요?"라는 식으로 사라질 뿐입니다. 저는 게임에서 모든 철학적 주제에 대한 정답을 내밀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지만, 그 주제들을 먼저 자신만만하게 제시했다면, 최소한 그에 대한 나름의 생각이나 결론을 말하는 정도의 성의는 필요하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를 대표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이 바로 베르소 엔딩입니다. 베르소의 승리와 '사랑하는 삶' 엔딩의 타임라인 사이에는 뤼미에르 시민 전체의 몰살이라는 거대한 사건이 끼어 있습니다. 하지만 게임에서는 이 부분을 비추지 않고 슬쩍 넘어가버립니다.
'가상인물의 생존권은 현실인물의 생존권과 어떻게 다른가?', '현실의 인물을 위해 가상의 인물을 학살하는 것은 윤리적으로 정당한가?', '신은 피조물을 학살할 권리를 지니는가?' 같은 윤리적 주제를 자신만만하게 던져놓고는, 정작 그 질문에 플레이어가 선택으로 대답하면, 그 선택의 결과는 슬쩍 회피하면서 전혀 다른 이야기를 하는 거죠.
결국, 이 게임의 스토리는 복잡하고 미묘한 인간 심리, 트라우마, 정체성의 혼동, 도덕적 혼란 등 여러 주제를 다루려 하지만, 결국 이 모든 문제들을 내던져 버립니다. 화려한 미학과 간드러지는 음악으로 이 '사라진 문제들'을 애써 덮으면서 "잘 보세요, 분명히 의미가 있었습니다!"라는 식으로 포장하죠. 하지만 면밀히 살펴보면, 그 의미라는 것은 사실 존재하지 않습니다.
'훌륭한 스토리'라는 믿음을 멈추는 순간, 모든 것이 무너집니다. 대본이 펄럭이는 소리가 들리고, 무대 장치의 전선들이 눈에 띄기 시작하죠. 그리고 깨닫게 됩니다: 이 게임의 모든 이야기는 제가 믿음으로 허락하지 않으면 제대로 이어지지 않는다는 것을요. 그것은 정말 허망한 일입니다. 꽤 오랜 시간, 뭔가 심오한 것을 쌓아올리는 듯이 보였던 서사의 결말이기 때문에 더더욱.
2-5. 의미 없는 의미, 진실 없는 진실
저는 이 칼럼을 포함한 다른 칼럼들과, 레딧에서의 수많은 토론에서 일관적으로 33원정대의 3막 중반 이후 스토리 전개와 엔딩을 비판해왔습니다.
왜냐하면, 이 게임은 제게 사랑스러운 캐릭터들을 소개하고, 제가 그 캐릭터를 돌보게 하고, 마침내 그들에게 애착을 가지도록 만든 후, 갑자기 "그들은 다 가상이야, 그리고 가상에는 가치가 없어."라고 말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마치 인형극의 소품이나, 오븐 밑에서 뛰쳐나온 바퀴벌레처럼 '가치없는 취급'을 당할 때, 제게는 그것이 "이봐, 게임에 너무 과몰입하지 않도록 해, 이건 그만한 가치가 없으니까. 다 가짜야. 거기에 과몰입해서 울었아? 하하, 이 바보야."라고 조롱하는 듯이 느껴졌습니다. 허무하고, 괴로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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엔딩으로 이어지는 구성은 최악입니다. 이건 무언가를 선택할 수 있는 듯이 꾸며져 있지만, 완벽한 자유가 아닙니다. 가상세계를 지키면 마엘이 거짓된 연극 속에서 인형극 소품이 된 원정대원들과 늙고 지치고 망가진 베르소의 연주를 들으며 병들어 죽는 비극적인 결말이 기다리고, 반대로 가상세계를 파괴하면 애정했던 모든 존재를 제거하는 스위치를 누르게 됩니다.
아주 많은 이들이, 마엘과 베르소의 최종 의견에서 베르소를 선택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모두 현실을 살아가야 한다는 근본적인 진리를 알고 있기 때문이죠. 그러나 이 선택을 하면, 우리는 겨우 16살짜리 어린아이가 고통과 죄책감을 견디지 못해 피난한 곳에서, 그녀의 머리채를 잡아 강제로 끌어내고, 그녀가 사랑했던 모든 "가짜"들을 불질러 버리게 됩니다.
그녀가 얼마나 그 세상을 사랑하고, 그녀가 얼마나 간절하게 그 세상을 바라는지는, 그 모든 과정에서 그녀가 보여주는 처절한 비명과 몸부림으로 표현되죠. 그러니 어쩔 수 없이 강렬한 거부감을 느낄 수밖에 없습니다. 그것은 "(16살짜리 여자애에게 가해지는) 지나치고 과장되며 비현실적인 가학을 통해 말초적인 쾌감을 주려 하는 ㅍㄹㄴ"를 보았을 때 드는 정신적 메스꺼움과 동일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이 끝난 다음, 마엘은 마치 ㅁㅇ굴에서 강제로 끌려나온 ㅁㅇ중독자처럼 보입니다. 조그만 인형을 손에 들고, 과거에 그녀가 사랑했던 것들의 환영을 보고 있죠. 그녀는 눈도 없고, 말도 못하는, 화상 흉터 투성이의 껍데기에 갇혀 화면 너머를 물끄러미 바라봅니다. "네, 그래요. 당신의 그 잘난 선택 '덕분에' 저는 이제 현실을 살아가게 되었어요. 만족하시나요?"라고 묻는 것처럼.
그렇다고 마엘의 의견을 채택하면, 이 게임은 마치 공포영화같은 연출로 망가져가는 마엘, 고장난 꼭두각시같은 베르소, 어딘가 이상한 사람들과 도시의 모습을 보여주면서 "이 모자란 이디엇아, 그거 알아? 니 선택은 틀렸어! 빨리 돌아가서 네가 사랑하던 모든 가짜들을 몰살시키는 버튼을 눌러! 그게 '현실'이고, 가짜에는 그만한 가치가 없으니까!"라고 외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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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에 게임이 "이봐, 나 좀 사줘."라고 저를 유혹했을 때, 광고는 사람들이 생존이라는 공동의 목표를 위해 힘을 합치는 왕도적인 스토리라인을 선보였습니다. 하지만 그 스토리라인은 가짜였어요.
저는 "결말이 왕도적이지 않아서 명작인 것이다"는 의견도 많이 봤습니다. 하지만 제 생각은 다른데, 이 게임은 광고부터 게임 후반까지 그야말로 왕도적인 전개로 가득차있기 때문입니다. 후반 전개와 엔딩이 이 왕도적 전개를 다 말아먹지만, 그렇다고 그 자체에 어떤 훌륭함이나 고귀함, 나름의 메시지가 있지도 않아요.
이 부분을 보고 엔딩에(특히 베르소 엔딩에) '슬픔의 극복'이나 '나아감'에 대한 메시지가 있다고 주장하시려 한다면, 그런 메시지를 드러내는 장면이나 암시를 제시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저는 지난 두 달간 그 비슷한 의견을 최소 일백 번은 넘게 들었는데, 아직까지도 여전히 "폭력으로 뚜드려맞고 제압당해서 슬픔을 느낄 권리조차 강탈당하는 것이 어째서 '극복'인지, 그것을 어떻게 '나아감'이라 표현할 수 있는지"에 대한 납득할만한 설명을 들은 적이 없거든요.
또한 결말이 이 게임을 명작으로 만든다는 의견에 동의할 수 없는 이유가 하나 더 있는데, 게임을 구매하는 시점에서 저는, 엔딩의 반전 요소에 대해 전혀 알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다른 많은 분들도 그랬을거라 생각하고요. 그렇다고 이 게임을 구매한 모든 분들이 엔딩까지 진행했다는 보장이 있는 것도 아니잖아요.
만약 이 게임이 "어... 사실, 이 게임은 '게임 중독 문제로 다투는 미치광이 초능력자 가족들'에 대한 암울하고 비정상적인 이야기입니다"라고 솔직하게 광고했다면, 저는 그 솔직함은 칭찬했겠지만, 분명히 말해 절대로 게임을 구매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2-6. 의도적인 논쟁의 유발
저는 직업적으로도 거의 매일 토론과 논쟁을 거치는 사람이고, 논쟁의 순기능을 긍정함과 동시에, 토론 그 자체를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게임에 대한 논쟁 역시 게임을 풍성하게 즐기는 좋은 방법 중 하나라 믿으며, 그런 토론 문화도 좋게 생각합니다. 하지만 33원정대의 논쟁은 좋게 볼 수가 없는데, 그 논쟁은 '모호함이라는 수단을 통해 고의적으로 유발된 것'으로 보이기 때문입니다.
제가 그렇게 생각하는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
이 게임에 대한 논의 중 가장 뜨겁고, 격렬한 것을 하나만 꼽으면 당연히 '어떤 엔딩이 진짜 엔딩(정사)냐'일 것입니다.
저는 레딧에서 두 엔딩을 모두 격렬하게 비판해왔는데, "너는 베르소의 고통을 이해하지 못했다" 또는 "베르소 엔딩이 진짜인데 너는 그걸 모른다"는 요지의 강한 비판과 욕설을 댓글과 메시지로 여러 번 받았습니다. 신고도 여러 번 당했고, 몇번씩 글이 삭제되기도 했죠.
또한, 제가 본 많은 레딧 및 다른 커뮤니티에서, 마엘 엔딩을 지지하는 분들은 "베르소"를 비판하는 경향이 있고, 베르소 엔딩을 지지하는 분들은 "마엘 엔딩을 지지하는 분들"을 비판하는 경향이 있었습니다. 물론, 경향이 그렇다는 거고 그 반대의 경우도 있기는 하며, 저는 그 사실을 기반으로 '베르소 엔딩을 지지하는 분들'을 비판할 생각이 전혀 없습니다.
제가 이 모든 소란과 감정적 대립을 지켜보며 느낀 것은 단 하나, '의도적으로 유발된 논쟁'에 과연 무슨 의미가 있냐는 의문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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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진짜 엔딩'에 대한 제 결론부터 말씀드리자면, 저는 많은 사람들이 집착하는 그 '진짜 엔딩'이란 것에 무슨 의미가 있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그 문제에 집착하는 심정을 이해할 수가 없어요. 제작자가 이미 공식적으로 "진짜 엔딩이 없다"라고 발표했는데도, "내가 보기엔 아니야, 이게 진짜야."라고 말하는 행동은, 제게는 아주 이상하게 느껴집니다. 그 '진짜'라는게 대체 뭐길래? 설령 어떤 엔딩이 '정사'나 '진짜 엔딩'이라고 해도, 그것이 그 엔딩의 우월성이나 도덕성, 완벽함이나 고귀함을 증명하는 것은 아니에요. 그렇지 않나요?
누군가는 마엘에게 공감해 마엘 엔딩을 택할 수 있고, 다른 누군가는 베르소에게 공감해 베르소 엔딩을 택할 수 있는 거죠. 혹은 그 엔딩을 지지할 또다른 나름의 이유가 있거나. 그냥, 어떤 엔딩이든 좋아하는 엔딩이 있다면 그걸로 충분하지 않나요. 왜 굳이 제작자가 직접 나서서 부인한 것을 바꾸려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그게 대체 무슨 의미가 있다고? 제가 동의하든, 동의하지 않든, 다른이가 어떻게 하든 제작자가 공식적으로 말하는 것이 아닌 이상 아무것도 바뀌지 않는데도.
누군가 제게 "나는 베르소 엔딩이 좋아"라고 말하면 저는 기분좋게 그것을 "오, 친구여. 정말 훌륭하군요. 사실 저도 고심 끝에 베르소 엔딩을 선택했어요."라고 대답할 것입니다. 하지만 "베르소 엔딩이 진짜 엔딩이다"라는 이론을 전개한다면 "하지만... 제작자는 아니라고 했는데요?"라고 대답할 수밖에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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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사람들이 논쟁하게 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앞서 칼럼 6에서 짚었듯, 저는 그 이유를 지나친 모호함이라 생각합니다. '그럴수도 있고, 아닐수도 있는 모호한 요소들'을 잔뜩 뿌려놓고, "자, 마음에 드는 걸 주워담아 자신만의 결론을 내리세요."라는 식이기 때문에, 사람들마다 받아들이는 결론이 너무나 다를 수밖에 없는 거죠.
제작자들 역시 고의적으로 논쟁을 유발하려 했다고 밝혔고, 많은 이들이 그런 논쟁이 벌어지는 것 자체가 이 게임의 위대함을 증명한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그 수많은 논쟁을 한 발짝 떨어져 냉정하게 바라보면, 많은 논쟁이 굉장히 의미없이 헛돈다는 사실을 어렵지 않게 눈치챌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다시 말하지만 모든 요소들이 모호하니까요. 그래서 대부분의 논쟁은 결국 무한 추측의 도돌이표입니다. 누구도 '정확한 사실'을 말할 수가 없으니, 결국 "이게 진짜 엔딩이고, 그렇기 때문에 이 엔딩의 모호한 점들은 다 좋은 것일 거야"라는 식의 비약이 등장할 수밖에 없습니다. 저는 그런 허무한 가정법에 무슨 의미가 있는지도 잘 모르겠고, 그런 식으로 고의로 논쟁을 유발하는 것 자체도 좋게 보이지 않습니다.
2-7. 플레이의 지속가능성
이 게임은 아주 재미있었습니다. 하지만 만약 제게 샌드폴의 차기작을 플레이하고 싶냐고 물어본다면 '싫다'고 대답하겠습니다. 만약 차기작을 플레이한다면, 저는 그 게임의 캐릭터들을 사랑하지 않으려 노력해야 할테니까요. 제가 어떤 캐릭터를 사랑하고 애착을 가져도, 그 캐릭터가 오븐 밑에서 기어나온 바퀴벌레마냥 무의미하고 가치없이 으깨질 수 있다는 두려움 때문에 말입니다. 그런 노력을 하면서 매달리느니, 그냥 처음부터 다른 게임을 하는 편이 나을 것 같아요.
저는 33원정대를 총 3회차까지 플레이했지만, 1회차 이후 모든 플레이는 솔직히 재미가 없었습니다. 1회차부터 영상과 스샷을 꼼꼼히 찍고, 각 장면들을 분석하면서 깊이 즐겼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무엇보다도 '어차피 죄다 가치없는 가상의 것들'로 결론지어질 결말을 알고 있다는 것이 저를 힘들게 했습니다.
3. 그리고 결론
자, 이제 마지막이군요. 그간 칼럼을 쓰고, 생각을 정리하면서 저도 많은 즐거움을 느꼈고, 여러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이만큼이면 저는 이 게임에 대해 충분한 헌사를 했다고 봅니다. 이제 모든 것이 끝났으니, 이 게임과, 여러분께 작별을 고할 때가 되었군요.
마지막 인사를 드리기 전에, 제가 하나 묻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이 게임은 우리에게 어떤 의미일까요? 물론 그 의미는 각자에게 다를 것이며, 그 모든 의미는 정답일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제 의미를 말씀드리자면, 이 게임은 제게 '반면교사'의 의미였습니다. 이 게임에 등장하는 여러 인물들은 각자 심각한 문제에 빠져 있고, 대부분은 끝내 그 문제 속에서 익사해버립니다. 혹은 남의 문제에 휘말려 익사하거나.
그 각각의 심각한 문제와, 반면교사에 대한 제 생각을 정리하자면 다음과 같습니다 :
(A) 르누아르
아무리 좋은 의도가 있더라도, 아무리 사랑하는 사람이라도, 함부로 남을 통제하려 들면 안됩니다. 특히 상대가 자신의 문제에 심각하게 매몰되었을 경우에는 더더욱.
그것은 감정적 반발과 격렬한 저항, 그리고 극단적인 행동을 유발할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강압적으로 통제하기보다 대화를 나누며 상대를 이해하고, 타협하려 노력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다면 아무리 좋은 의도라도 상대가 받아들이지 않으며, 결과적으로 좋은 의도는 사라지고 통제와 억압만 남아버립니다.
그렇기에, 제게 르누아르는 대화와 타협의 필요성을 깨우치는 반면교사였습니다.
(B) 베르소
목적성에 매진하고 있을 때, 그것이 정말로 옳은지 다시 생각해봐야 합니다. 특히 파멸적인 결론을 위해 다른 이들을 속이고, 배신해야만 한다고 결심했다면 더더욱. 남에게 목적을 강요할 때라면, 더욱 더 자신을 돌아보는 것이 중요합니다.
항상, 그리고 언제나 극단적인 방법보다 더 나은 방법이 있을 수 있습니다. 더 나은 방법으로 끝내 완벽한 결론에는 이르지 못하더라도, 최소한 '내 생각이 맞아'라는 독단이 도달할 파멸적인 결과는 회피할 수 있습니다.
그렇기에, 제게 베르소는 자기 반성과 검토의 필요성을 깨우치는 반면교사였습니다.
(C) 마엘
자기 자신은 납득할 수 있는 이유라도, 남들에게는 그렇지 않을 수 있습니다. 특히 스스로 무언가에 깊은 애착을 가지고, 현실을 망가뜨릴 정도로 매몰된 상태라면 더더욱. 그렇기 때문에 모든 문제를 감정이나 이기심, 고통, 슬픔, 죄책감의 측면에서 접근하면 안 됩니다.
내가 내 슬픔에만 매몰되어 있다면, 남들은 나를 동정할 수는 있겠지만, 내 의견을 따르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세상은 혼자서 살아가는 곳이 아니며, 따라서 다른 이들의 이해를 구하기 위해 내 마음을 적절하게 전달하려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그렇기에, 제게 마엘은 전달과 설득의 중요성을 깨우치는 반면교사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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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론적으로, 이 게임의 이야기는 제게 '그렇게 하면 안될텐데'의 향연이었습니다. 각 등장인물들을 넘어 게임 전체로 보자면, 제게 "슬픔의 무게와 극복 방식을 남이 함부로 강요하면 안된다"는 것을 되새기게 했죠.
지금까지 이 글을 비롯한 모든 칼럼을 읽어주신 여러분, 친애하고 또 친애하는, 나의 친애하는 친구분들께 진심을 담아 말씀드립니다 : 슬픔의 가치는 여러분 자신이 결정하십시오. 옆에 있는 그가, 그녀가, 누군가가 대신 결정해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을 오롯한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일 때, 인생의 가치가 그만큼 늘어나는 것입니다. 슬픔이 자신의 것일 때, 그것을 극복하려는 자신의 노력이 가열하고 또한 고귀해지기 때문입니다.
슬픔의 극복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옆의 누군가가 도울 수는 있겠지만, 결국 마지막에는 자기 발로 일어서서 걸어야 합니다. 옆에서 누가 말로, 조롱으로, 폭력으로, 억압으로 조종하려 드는 것을 납득하면 안 됩니다. 우는 것도 좋습니다. 받아들이는 것도 좋겠죠. 마음 깊숙히 숨기는 것도 좋습니다. 또는, 다른 누군가와 함께 나누는 것도 좋은 일입니다. 그 중 어떤 방법이든, 최종적으로는 스스로 결정해야 합니다.
슬픔을 통제하려 한 르누아르, 극복을 강요하려 한 베르소, 자신 안에 매몰된 마엘 모두가 끝내 좋은 결말에 이르지 못했습니다. 그렇게 되지 말아요.
내일은 옵니다. 반드시 옵니다. 그러나 그것은 슬픔의 극복을 남에게 맡길 때보다, 폭력에 굴복했을 때보다, 혹은 상실을 '헛된 것'이라고 비웃을 때보다, 상실을 자기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여 자신의 힘으로 극복했을 때, 비로소 찬란한 기쁨으로 다가오는 것입니다. 그것이 이 게임이 제게 준 '교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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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딧 메뉴의 오른쪽을 보면 '카르마'라는 단어가 있습니다. 이는 인도의 불교에서 유래한 용어로, '피할 수 없는 운명'을 뜻하는 말입니다. 하지만 이 말의 운명적 반대편에는 '다르마(달마)'라는 단어 또한 존재합니다. 이는 피할 수 없는 운명 안에서 '개인이 운명을 위해 바치는 노력'을 뜻하는 말이죠. 카르마에 절망하기보다, 다르마를 위해 노력하는 것이 바로 생의 본질, 인간의 본질입니다. 결국 인간이란, 모두 운명이라는 법정에서 시간이라는 판사에 의해 사형을 선고받은 존재이지만, 중요한 것은 '최종적으로는 죽는다'는 사실이 아니라, '죽을 때까지 어떻게 사느냐'이기 때문입니다.
지금까지 본 칼럼을 읽어주신 친애하는 모든 분들께, 부디 여러분이 "어떻게 사느냐를 스스로 결정하는 사람"이 되어, 또한 슬픔을 넘어 앞으로 나아갈 수 있기를 진심으로 빌겠습니다.
그럼, 무구한 행운을 빌며,
안녕히.
- 2025년, 위저페어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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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여기까지.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부디 좋은 생각할 부분과 현학적인 즐거움을 드릴 수 있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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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좋은 하루 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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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석 칼럼: #6 왜 결론에 대한 논쟁이 생기는가? (부제 : 이 게임의 엔딩에는 심각한 문제가 있다) : 중편
분석 칼럼: #6 왜 결론에 대한 논쟁이 생기는가? (부제 : 이 게임의 엔딩에는 심각한 문제가 있다) : 하편
분석 칼럼: #7 이 게임은 좋았는가? (부제 : 빛과 어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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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미롭게 잘 읽었습니다. 많은 부분에서 공감이 가네요. 2막 마지막까지만 해도, 엄청나게 매력적인 세계관에 푹 빠져서 정신 없이 플레이했습니다. 어떤 떡밥들이 더 숨어있을까 하는 기대감에 사소한 것 하나하나에 의미를 부여하며 플레이하게 되었죠. 그런데 이 모든게 결국 누군가가 만들어낸 가상세계일 뿐이고, 여기 세계관과 캐릭터들은 작위적으로 만들어진 그림에 불과하다라는 것이 밝혀진 순간, 지금까지의 모든 몰입감이 확 깨져버리더군요. 저는 그래서 3막에서 다시 살아난 인물들이 본인이 결국 가상세계의 만들어진 인형에 불과하다는 걸 알았음에도 멘붕(?) 없이 받아들이는게 이상하게 느껴졌습니다. 더 진행하면서, 여기 캐릭터들한테는 여기가 현실이고 르누아르의 가족은 신(=작가) 같은 존재로 인식되는 것이라면, 그래도 지금의 세계선이 무너지진 않는다는 걸 알게 되었네요. 다행히 3막에서 각 캐릭의 서사를 더 풀어주고, 특히 최종전에서는 매우 왕도적인 뽕 넘치는 전개로 열어주면서 다시 몰입감이 올라갔습니다. 그런데 엔딩이... 하아.. 뭐랄까요. 베를린영화제 수상작 봤을 때의 기분입니다. 분명 작가주의가 느껴지긴 합니다. 그런데 단순히 시청자인 영화가 아니라 실제로 이야기를 지금까지 진행시켜 온 플레이어에게 성취감, 뿌듯함, 개운함 이런 걸 조금도 주지 못 한다는 겁니다. 엔딩에서 조져야 명작이다 따위의 X소리로 작가병을 비호하는 사람들을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게임은 수동적 시청이 아니라 능동적 경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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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밌게 읽어봐주셨다니 영광입니당 ㅎㅎ 저랑 거의 비슷한 경험을 하신 것 같아요. 저도 2막 끝나면서 어어어? 하다가, 3막에서 마엘이가 '내일은 온다'하면서 부활한 원정대들이랑 돌격할때 '이거지!'하다가, 엔딩을 보고 '어어어어어?'하고 끝났습니다. 솔직히 말해서, 예술병 씨게 들었네란 생각만 들었어여. 진짜로, 명작의 반열에 충분히 들 수 있는 작품이었는데 ... 마지막에 가서... 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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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미롭게 잘 읽었습니다. 많은 부분에서 공감이 가네요. 2막 마지막까지만 해도, 엄청나게 매력적인 세계관에 푹 빠져서 정신 없이 플레이했습니다. 어떤 떡밥들이 더 숨어있을까 하는 기대감에 사소한 것 하나하나에 의미를 부여하며 플레이하게 되었죠. 그런데 이 모든게 결국 누군가가 만들어낸 가상세계일 뿐이고, 여기 세계관과 캐릭터들은 작위적으로 만들어진 그림에 불과하다라는 것이 밝혀진 순간, 지금까지의 모든 몰입감이 확 깨져버리더군요. 저는 그래서 3막에서 다시 살아난 인물들이 본인이 결국 가상세계의 만들어진 인형에 불과하다는 걸 알았음에도 멘붕(?) 없이 받아들이는게 이상하게 느껴졌습니다. 더 진행하면서, 여기 캐릭터들한테는 여기가 현실이고 르누아르의 가족은 신(=작가) 같은 존재로 인식되는 것이라면, 그래도 지금의 세계선이 무너지진 않는다는 걸 알게 되었네요. 다행히 3막에서 각 캐릭의 서사를 더 풀어주고, 특히 최종전에서는 매우 왕도적인 뽕 넘치는 전개로 열어주면서 다시 몰입감이 올라갔습니다. 그런데 엔딩이... 하아.. 뭐랄까요. 베를린영화제 수상작 봤을 때의 기분입니다. 분명 작가주의가 느껴지긴 합니다. 그런데 단순히 시청자인 영화가 아니라 실제로 이야기를 지금까지 진행시켜 온 플레이어에게 성취감, 뿌듯함, 개운함 이런 걸 조금도 주지 못 한다는 겁니다. 엔딩에서 조져야 명작이다 따위의 X소리로 작가병을 비호하는 사람들을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게임은 수동적 시청이 아니라 능동적 경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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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밌게 읽어봐주셨다니 영광입니당 ㅎㅎ 저랑 거의 비슷한 경험을 하신 것 같아요. 저도 2막 끝나면서 어어어? 하다가, 3막에서 마엘이가 '내일은 온다'하면서 부활한 원정대들이랑 돌격할때 '이거지!'하다가, 엔딩을 보고 '어어어어어?'하고 끝났습니다. 솔직히 말해서, 예술병 씨게 들었네란 생각만 들었어여. 진짜로, 명작의 반열에 충분히 들 수 있는 작품이었는데 ... 마지막에 가서... ㅠ | 25.06.24 08:20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