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23에는 별도 카테고리로 만든 "니그로 리그" 스토리 라인과 은퇴선수카드 17장이 일단 눈에 띄네요.
은퇴선수 카드의 경우 스튜디오는 일반인들이 생각하는 레전드의 뜻과 다르게 이해(해석) 하는지 너무 막 같다 붙인 느낌이 있습니다만 새로 또는 재등장했으니 함께 정리해 봅니다.
스튜디오에선 22 DD에 등장하는 레전드+은퇴 선수 카드가 150명 이상이라고 홍보했었는데 이번엔 180명 이상이라고 하더군요.
22에서 체이스 팩으로 등장했던 카를로스 델가도처럼 시간이 조금 지나면 이름이 알려진 선수들 카드가 또 등장할지 기대도 됩니다.
순서는 니그로 리그 7인 이야기부터이고요.
시작에 앞서 야구 이야기 좋아하는 제 기준으로 니그로 리그 스토리 라인은 단편영화 본 것처럼 축약해서 잘 만들었단 느낌입니다.
(선수에 따라 영상이 4~8분 정도) 19처럼 해당 레전드 선수가 퍼펙트나 노히트했다고 9이닝 풀로 던지게 해서 패드 구매 유발하는 것도 없습니다.
밥 켄드릭의 설명이나 해설 오디오 녹음도 추가해서 2001년 벅 오닐이 이치로를 니그로 리그 박물관에서 만났던 일화처럼 선수 등장에 맞게 녹음되었더군요.
먼저 발매 이전 스튜디오 영상에 자주 등장하고 게임의 모먼츠 진행 시에 등장하는 인물은 니그로 리그 야구 박물관의 회장으로 있는 밥 켄드릭이고요.
이미 진행하신 유저분들은(스킵 포함) 모먼츠가 저런 상황이었군 하고 생각하실듯한 상황들도 제법 있고, 아직 시작 안 하신 유저분들에게는 재미에 살을 조금 더 붙이지 않을까 싶습니다.
예시 1
모먼츠에서 105마일을 뿌리는 사첼 페이지인데요.
메이저리그 연금제도 규정이 바뀌게 되자 연금 수령을 위해 모자란 3이닝을 채우려 1965년(58세) 9월 25일, 캔자스시티 애슬레틱스(현 OAK) 소속으로 보스턴과의 경기에서 선발로 등판, 딱 모자란 3이닝을 1피안타 1삼진 무실점을 기록하고 내려온 사첼 페이지 모먼츠도 있고요.
예시 2
모먼츠는 물론 컷신에서도 메이저리그 전설들과 얽힌 사연에 대한 연출들을 해줘 미소 지으며 플레이 했습니다.
스토리라인을 완료하면 8장의(벅 오닐은 2장, 1장은 95) 오버롤 90카드를 받게 되는데요. 중 후반에 99카드가 등장하겠네요.(세트 2~3)
"시즌 1" 8인 중에 재키 로빈슨 포함 메이저리그에서 뛴 분들은 3분이십니다.
● 마틴 디히고
조부는 노예로 제당 공장에서 일했던 분이고, 아버지가 1895~1898년 스페인과 벌인 3차 독립 전쟁 당시엔 쿠바군에서 하사관으로 복무했습니다.
전쟁 끝나고 아버지가 일했던 농장에서 1906년 태어났는데 쿠바의 아픈 역사만큼이나 야구 이력도 대단하신 분이십니다.
단지 피부색으로 인해 메이저리그에서만 뛰지 못했을 뿐이지 아시아 (일본, 1936년 시작) 빼고는 당시 야구를 하는 곳에서 모두뛴 경력이 있습니다.
투타 재능이 빼어나 9개 포지션을 전부 뛰는 올라운드 플레이어였는데, 나중엔 큰 장점+강점을 보이지 않는 포수를 제외하고 투수+야수 모든 포지션에서 플레이하셨고요.
투수 성적을 합산하면 통산 승수는 250승이 넘습니다.
동시대에 뛰었던 대선수들의 증언이나 니그로리그에서 뛰기도 했던 다저스 레전드 로이 캄파넬라도 불타는 패스트볼 던지던 마틴 디히고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다른 선수들의 회고들도 여럿 있더군요.
그리고 윈터 리그나 니그로 리그 게임들의 자료(기록지)들이 일부 유실되어 공식 기록으로 인정받지 못했는데, 그렇게 누락된 기록으로 인해 승리 기록을(수십) 손해 봤다는 니그로 리그 기록 발굴을 했던 사람들의 의견도 있습니다.
1938년 멕시코 리그 역사에서 첫 노히트 노런을 기록했고 (167이닝 평균자책점 0.92, 1937년엔 0.93) 수위타자 기록도 세웠습니다. (타율 0.387) 멕시코 리그 통산 승수는 119승 57패
쿠바, 멕시코, 니그로 리그, 도미니카 공화국, 베네수엘라의 야구 명예의 전당에 마틴 디히고와 함께 5군데 모두 헌액된 선수는 단 2명인데, 또 다른 분 "윌리 웰스"는(1997년 HOF) 시즌 2에 나올 수도 있겠네요.
그러고 보니 RTTS에서 이미 아키타입(쿨파파) 이름으로 등장한 "Cool Papa" 제임스 토마스 벨도 보이지 않네요.
은퇴하고는 멕시코리그에서 심판도 보고했는데, 선수 생활 초기를 빼곤 쿠바의 부패한 정권+정치세력에 쓴소리를 하며 쿠바에 들어가지 않다가 피델 카스트로가 집권하고 1952년에서야 쿠바에 들어갔고, 쿠바 리그 라디오 방송에서 해설도 하셨습니다.
"HOF"
1951년 쿠바 야구 명예의 전당
1964년 멕시코 야구 명예의 전당
1977년 쿠퍼스타운
1999년 히스패닉 헤리티지 야구 박물관&명예의 전당
2010년 도미니카 공화국 야구 명예의 전당
문제는 베네수엘라 야구 명예의 전당인데요.
베네수엘라는 2003년 명예의 전당과 야구박물관을 열며 2003년 7월 3일 첫 헌정 선수들을 선정했었고 현재에 이르고 있는데요.
헌액 연도를 보려고 찾아보는데 베네수엘라는 헌정 명단 리스트는 물론이고 그 어떤 기록들이 없더라고요.
동네 마트도 이렇게 장사하지 않는데 너무 이상해서 찾아보니 저처럼 그게 궁금했던 기자가 있었더군요.
작년에 취재해서 기사를 냈던데, 읽어보니 왜 그런지 어느 정도 조각이 맞춰지더라고요.
1952년에야 조국 쿠바에 들어갔다고 했잖아요.
이전 정권+정치 세력들이 야구도 잘해서 인기 있고(영향력) 한데 자신들에게 불만 품고 쓴소리하니 누구처럼 블랙리스트 작업도 하고 베네수엘라 측에 쿠바 정권이 작업해서 기록들 누락되도록 작업했다고 야구 원로가 이야기해 줬다라고요. (지금으로 치면 정식 기록은 맞지만 통합 전산망에서 빼라 정도)
3년 반의 기간 동안 베네수엘라에서 뛰었다는데 25살이던 1931년 센세이션을 일으키기 시작해서 1932년은 평균자책점 0.29를 기록했다고 하네요.
이렇게 베네수엘라 야구 명예의 전당의 공식 등재 명단에는 빠져 있고요.
왜 헌액자라는 이런 소문들이 퍼져서 공식 헌액자 처럼 되어있는지 궁금하고 빠른 시일 내에 바로 잡히면 좋겠네요.
마틴 디히고는 쿠바에 돌아와 중계방송도 하고 어린 선수들도 지도하며 지내다 1971년 초에 뇌혈전증 진단받고 5월 20일 영면하셨더라고요. 특이하게 1959년부터 영면하시던 1971년 5월 20일까지 쿠바의 "스포츠부 장관"을 역임하셨더군요.
인기와 명성이 대단했던 국가적 우상에 걸맞게 전국적인 애도의 기간으로 지정되기도 했었다고 하고, 별명이 마에스트로, 마스터, 임모탈 등 여러 개로 불렸는데 쿠바의 동판 기념물에는 본인이 가장 좋아하셔서 였는지 유독 임모탈 단어가 눈에 띄더군요. (아! 게임에 있는 17살 쿠바 출신 후배 미니 미노소의 어릴 시절 우상이 마틴 디히고 였습니다)
스토리 라인 중에도 별명이 나오던데, 당분간은 매드맥스 임모탄이나 더쇼 카드보다 먼저 생각나는 단어+별명이 될듯싶습니다.
● 행크 톰슨
재키 로빈슨이 인종 차별의 벽을 무너트린 최초의 선수였다면, 행크 톰슨은 양대리그를 모두뛴 최초의 흑인 선수입니다.(오리올스, 자이언츠 팀에서도 첫 흑인 선수)
자이언츠 데뷔 시절 행크 톰슨은 선발 2루수 1번 타자였고, 더쇼 카드가 있는 몬테 어빈도 같은 날 데뷔해서 자이언츠 최초의 흑인 선수라고 하지만 8회초 투수 타석에서 대타로 데뷔했습니다)
선수 시절 프로필이 175cm, 78kg으로 되어있지만 실제로는 좀 더 작았다고 합니다.(몸무게도)
하지만 체격에 비해 파워는 뛰어났는데요. 쿠바 윈터 리그에선 당시 구장 밖 병원 건물 쪽으로 홈런을 기록하면 상금이 걸려있었다고 하는데 (거리가 500피트, 152m 정도) 당시 대단했을 상금 2천 달러를 받은 기록도 있습니다.
메이저리그 선수 시절이던 1950년 8월 16일 다저스와의 폴로 그라운드 홈경기에서 1경기 2개의 인사이드파크 홈런이라는 진기록도 기록했었고요(1회 3점, 7회 1점)
행크 톰슨의 기록은 역대 6번째 기록이었고요. 톰슨 이후의 기록은 22년이 지나서야 1972년에 화이트삭스의 딕 앨런이 DD 유저는 호불호가 심한 버트 블라일레븐 형님에게 2개를 기록해서 역대 7번째 선수가 되기도 했습니다.(1회 3점, 5회 2점)
행크 톰슨의 파워에 대해서는 1957년 발매된 탑스 야구카드 뒷면에 이력으로 소개도 되어 있습니다. 폴로 그라운드 450피트(137m) 표지판 위로 공을 여러 번 보냈다고 말이죠.
야구 실력이 물론 좋았던 톰슨이고 2차대전으로 인해 1944년 3월부터 1946년 6월 20일까지 복무하고 유명한 전투였던 벌지전투에서 기관총 사수로 참전한 용사이기도 한 톰슨 중사에게는 지킬 박사와 하이드 같은 모습도 있습니다.
행크 톰슨은 야구 이야기만 하면 대단하지만 이분이 야구를 해서 그래도 이렇게 살아냈지? 야구가 없었으면 약+술+범죄로 더 일직 돌아가셨을 거란 생각이 들 정도의 삶의 이력이 있는 분입니다.
제가 좋아하는 제임스 엘로이라는 작가분이 계신데, 이분의 작품들 중에 영화화되고 국내 개봉했던 작품은 LA 컨피덴셜이나 블랙 달리아 같은 작품이 있습니다.
작가분의 유년 시절 참 어려운 삶의 과정을 살아내신 분인데 작가의 자전적 이야기가 담긴 "어둠의 근원"이란 작품이 있는데, 행크 톰슨에게도 엘로이의 소설 제목처럼 어떤 어둠의 근원들이 있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선수로 한창이던 1956년(30세) 시즌의 9월 30일 필리스와의 경기가 자신의 마지막 메이저리그 경기였는데요. (7회초 대타로 나와 1루수 팝플아웃) 공교롭게도 개척자이던 다저스의 재키 로빈슨도 같은 날 마지막 경기를 치렀습니다. (VS 피츠버그, 4타수 1안타=홈런, 1타점)
시간이 지나 본인 문제의 99%는 술병에서 시작됐다고 했는데, 야구를 그만둔 것도 선수 시절의 알코올 남용 문제로 인해 발생한 경기력으로 본인이 야구를 망신시켰고, 이로 인해 주변 사람이나 구단과의 마찰이 있었다고 합니다.(자신의 야구 재능을 알코올 중독으로 온전히 사용하지 못하고 마는 삶)
야구를 떠난 후, 선수 시절 수입은 그만큼 빨리 날아가 버렸고 무직으로 지내기도 하고 택시 운전을 하기도 했지만 결국 차를 훔쳐 체포도 되었고, 조사에서 본인의 여자 친구라고 주장한 여성이 돈을 빌려주지 않자 여성의 집에 불법 침입하고 폭행한 혐의로도(3급 폭행) 기소가 되었었고요. (이 시기에 이미 술값 마련을 위해 월시 우승 반지도 팔아버렸습니다)
1961년엔 브루클린에 살면서 지역 바에서 바텐더로 일하기도 했는데, 이때도 할렘 술집에서 37달러를 훔친 혐의로 유죄 판결 받은 기록도 있는데 자이언츠 구단주의 보증과 보석으로 보호관찰 형을 받고 나왔는데 판사가 판결 이전 이 도시와 야구팬들에게 매우 심각한 실망을 안겨줬다는 가슴 뜨끔할 이야기도 듣습니다.
애리조나주에 있는 자이언츠 스프링 트레이닝 시설에 구단에선 일자리를 알선해 주었지만, 얼마 못 가 일을 그만두고 여자친구와 LA로 이사해 버립니다.
1963년엔 휴스턴에서 주류 판매점에 들어가 점원에게 총을 겨누고 270달러를 훔친 무장 강도 혐의로 10년 유죄 판결을 받고 텍사스 교도소에서 복역하게 되는데요.
이때 종교활동을 시작하고 교도소 야구팀 코치도 하다 4년을 복역하고 1967년 모범수가 되어 가석방으로 나와 어머니가 살고 있는 캘리포니아 프레즈노에 살며 알코올 중독자 치료 모임에 들어갔고 초범자 범죄 예방 상담도 해주고 범죄 경력이 있는 10대를 위한 프로그램으로 감독이 되어 생활했는데요.
사망 2달 전이었던 여름엔 주위에 이제 이곳에서의 일을 그만두고 자이언츠 팀을 위해 일할 것이라는 계획을 이야기했는데 새로운 시즌을 보지 못하고 1969년 9월 30일 심장마비로 사망하게 됩니다. (내가 어떻게 내 인생을 망쳤는지, 본인 문제의 99%는 술에서 시작됐다는 이야기가 1963~1969년 즈음이었겠지요)
11살에 첫 체포기록을 시작으로 해서 15살부터 술을 마시기 시작했고, 17살에 프로야구를 시작하고(니그로리그) 19살엔 입대해서 전쟁 영웅 참전용사도 됐다가 21살엔 메이저리그에 데뷔하고 28살엔(1954년 월드 시리즈 우승 멤버가 되기도 했지만 너무 빠른 30살에 야구 인생이 끝나고 인생의 나이도 43년 296일뿐이었던 행크 톰슨입니다.
● 힐튼 스미스
나중에 수정되긴 하지만(1907년 2월 27일생) 유년 시절부터 선수 생활 기간의 프로필은 1912년으로 생활을 하셨던 힐튼 스미스입니다.
니그로리그 시즌 1에 함께 있는 루브 포스터와 서로의 고향집 거리가 25마일(40km) 거리였다고 하는데, 텍사스州에서만 해도 니그로리그 출신으로 명전 헌액된 분들이 8명이나 되니 지금 시대라면 스카우터들이 사랑하는 1순위 지역이었을 거란 생각이 드네요.
어려서 같이 놀아주던 삼촌들의 영향+도움으로 야구+실력에 눈을 떴다고 하는데요. 10대 시절 성인팀과 대결에서도 무실점 투구로 자신의 팀이 승리하고 했으니 야구 실력은 좋았던 것 같습니다.(하지만 실제 나이로 치면 성인에 가까운 것은 비밀)
운동만 잘한 것이 아닌 공부도 잘했는데 10학년(15~16세) 전후이던 1928~1929년의 학업성적도 좋아 우등상 성적이 학장 명단에 남아있다고 하네요.
게임에 카드로 등장하거나(시즌 1포함) 실제 메이저리거가 된 많은 흑인 선수들이 거쳐간 팀의 이름이 캔자스시티 모나크스인데요.
당시 야구하는 백인 소년들이 양키스가 되는 것이 꿈이었다면, 1930~1940년대 중서부와 남서부의 흑인 소년에게 양키스 같은 최고의 팀은 캔자스시티 모나크스였다고합니다.
1947년 재키 로빈슨을 시작으로 해서 유색인종 장벽이 무너지고 흑인 야구 팬덤이 백인만의 전유물이라 여겼던 메이저 리그와 섞이기 시작하죠.
구단에선 돈이 되기 시작하니 흑인 선수들에 대한 관심을 넘어 영입이 본격적으로 시작되고 니그로리그의 매출이 떨어지기 시작합니다.
그러자 니그로리그 팀들은 수익모델을 유망한 선수를 메이저리그에 판매하는 것으로 변경해서 버티기도 하지만, 시대의 흐름에 팀들도 해체되기 시작하고 니그로 리그는 문을 닫고, 캔자스시티 모나크스도 독립리그에서 뛰다 1965년을 마지막으로 팀을 해산하게 됩니다.
니그로 리그 캔자스시티 모나크스의 역사는 1965년이 마지막이었지만, 시간이 지나 흑인 구성원들만으로 이루어진 팀은 아니지만 팀 이름은 부활하게 되는 일도 있었습니다.
아메리칸 어소시에이션 프로페셔널 베이스볼(American Association of Professional Baseball)이라고 2005년 시작해서 운영 중인 독립야구 리그가 있는데요. 미국 중부와 캐나다를 기반으로 메이저리그와 마이너 리그의 팀이 없는 도시를 연고로 운영합니다. (시작은 16팀, 4개 디비전이었는데 지금은 코로나 영향이었는지 2개 디비전 12팀)
서부
Kansas City Monarchs 캔자스주, 캔자스시티
Fargo-Moorhead RedHawks 노스다코타주, 파고
Lincoln Saltdogs 네브래스카주, 링컨
Sioux City Explorers 아이오와주, 수시티
Sioux Falls Canaries 사우스다코타주, 수폴스
Winnipeg Goldeyes 캐나다 매니토바주, 위니펙
동부
Chicago Dogs 일리노이주, 로즈몬트
Cleburne Railroaders 텍사스주, 클레번
Gary SouthShore RailCats 인디애나주, 게리
Kane County Cougars 일리노이주, 제네바
Lake Country DockHounds 위스콘신주, 오코노웍
Milwaukee Milkmen 위스콘신주, 프랭클린
캔자스시티 티본즈(Kansas City T-Bones)였던 팀을 인수한 새로운 구단주가 코로나로 리그가 중단된 시절 니그로 리그 100주년을 맞아 (니그로 리그 시작은 1920년) 같은 캔자스시티 지역에서 존경받았던 팀의 이름으로 자신의 팀을 리브랜딩 해서 지금도 사용 중입니다.
힐튼 스미스는 캔자스시티 모나크스에 합류한 스타플레이어 사첼 페이지 그늘에 가려진 점도 있었는데 주위 시선이 그랬을 뿐 배운 것도 많고 낚시도 함께하는 좋은 동료였다고 합니다.
힐튼 스미스를 이야기하면 많은 선수 출신들이 빼놓지 않는 구종 커브가 있는데요.
1933년 멕시코에서의 경기 이후, 멕시코 팬들이 힐튼 스미스의 커브볼에 붙여준 별명이 스페인어 엘 디아블로 (El Diablo, 악마)였습니다.
회고에서 재밌고 짜릿했던(전율) 2경기를 꼽기도 했는데요.
먼저 1942년 5월 24일(일요일) 처음으로 흑인 야구팀은 결코 밟을 수 없었던 리글리 필드에서의 경기를 꼽았는데요.
이때가 2차대전 기간이었잖아요. 지금은 국방예산만 천조를 넘게 쓰는 미국이라지만 당시 미국 분위기가 애국심을 호소하는 프로파간다 선전물도 공산국가 못지않게 활용하던 시기였죠.
사람들 모아 전쟁 채권 홍보와 판매도 하고, 때론 전쟁에 지치고 힘든 여론 등을 위해 이벤트성 게임을 종종 개최했는데요.
5월 24일 경기는 니그로 리그 최강+인기팀 캔자스시티 모나크스와 "디지 딘"팀의(Dean All-Stars) 매치업이었습니다. (수익금은 구호 기금에 사용)
디지 딘 팀의 멤버 구성은 디지 딘 같은 인기 선수 출신과 유니폼을 벗고 입대했던 선수들 위주의 구성이었는데, 팬들의 바램이나 언론의 펌프질도 입대한 밥 펠러의 등판 여부였는데 군에서 휴가를 내주지 않아 밥 펠러는 참가하지 못했고요. (그래도 만원사례를 기록했습니다)
캔자스시티의 인기 스타 사첼 페이지와 디지 딘의 맞대결에서 6회까지 점수는 1:1이었고, 7회부터 힐튼 스미스가 나와 (삼진 3개, 볼넷 1개, 피안타 2개) 3이닝을 무실점으로 막고 이겼는데, 9회초에 팀에서 1점을 내고 9회말엔 주자를 내보냈지만 유격수 땅볼로 더블플레이를 노리고 투구했는데 힐튼의 계획대로 더블 플레이로 마무리하며 경기가 종료되었다고 합니다.
디지 딘이 1934년 라이브 볼 시대에 기록한 30승은 지금도 이어지는 내셔널 리그의 기록입니다.(딘은 1953년 9수 끝에 "HOF")
2번째로 뽑은 경기는 1947년 3월 17일 베네수엘라 카라카스에서 뉴욕 양키스를 상대로 던진 경기를 뽑았습니다. (팀원 전체가 메이저 리그 구단의 선수들로 구성된 팀을 상대로 투구한 것은 그때가 처음이라 더 기억에 남는다고)
당시 양키스는 플로리다에서 스프링캠프를 실시했는데요.
1924년부터 전쟁 기간을 제외하고 시즌 개막 이전엔(지금의 시범경기 기간) 베네수엘라, 푸에르토리코, 쿠바를 돌며 현지 팀들과 많게는 6게임 적게는 3게임 정도의 경기들을 했더군요. 캔자스시티 모나크스와의 경기도 이렇게 방문했던 베네수엘라에서 성사된 것 같습니다.
힐튼 스미스는 1948년을 마지막으로 은퇴를 하게 되는데 프로필은 37살이었지만 실제 나이는 41살이었죠.
은퇴 후엔 다른 직업을 갖기도 했었지만 1983년 11월 18일 돌아가시는 순간까지 그의 직업은 니그로 리그에서부터 동료였던 벅 오닐(시즌 1 등장)과 함께 시카고 컵스의 스카우터가 직업이었습니다.
은퇴 후엔 종종 메이저리그에서 뛰어 보지 않고 은퇴한 것에 대한 질문들을 받곤 했었다는데요.
나이가 서너 살만 어렸더라면 재키 로빈슨보다 먼저 계약한 최초의 흑인 선수였을 거라고 대답을 했는데, 실제로 1946년 니그로 리그 월드시리즈가 진행 중이던 폴로 그라운드로 훗날 다저스의 레전드가 되는 로이 캄파넬라가 프런트의 영입 의사를 전하며 생각을 물었는데 본인의 나이 때문에 제안에 응하지 못했다고 합니다.
(야구하기엔 너무 늙었다는 생각도 있었고, 마이너로 내려가면 급여가 삭감되는 등의 조건을 감내하기엔 나이가 너무 많다는 것 등의 이유로)
제 생각에도 3~5년 정도만 메이저리그의 문이 일직 열렸으면 하는 아쉬움이 드네요.
니그로 리그에서 상대하던 많은 흑인 선수들이 이후 메이저리그에서 뛰기도 했고(상대해 봄) 야구의 인종차별도 없어졌는데 나이라는 새로운 장벽이 메이저리그 마운드에서 투구하는 걸 막은 것 같습니다.
1971년부터 명예의 전당에서 과거 니그로 리그 선수에 대한 헌정이 비정기적으로 시작이 됐습니다.
힐튼 스미스 본인도 선수 경력 기간이 명예의 전당 헌액 자격이 된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헌액 소식을 듣지 못하고 1983년 돌아가셨죠.
사후 2001년이 돼서야 헌액이 되었는데 18번째 니그로 리그 출신의 헌액 선수였습니다.
다음 선수는 힐튼 스미스와 1938년부터 무려 10년 동안 룸메이트였던 벅 오닐입니다.
● 벅 오닐
벅 오닐이 미국 시민이 된 것은 할아버지가 어린 시절 나이저 강 일대에 살다 노예사냥꾼에게 잡혀 미국으로 팔려 온 것이 이유인데요.
할아버지가 캐롤라이나주의 목화밭에서 일할 때, 당시 노예 소유주의 성(姓) 씨를 노예에게 붙이거나 새로운 성(姓)을 붙이던 것이 관행이던 시대라 할아버지는 부족에서 부르던 이름도 없어지고 영어 오닐이란 성을 쓰는 미국 현지 조상 1세대가 되는 아픔의 가족사가 있습니다.
이런 일은 서구 열강(특히 영국 놈들) 때문이죠.
넓디넓은 부족국가 아프리카 대륙에 임의대로 국경선을 만들어서 분쟁의 씨앗이 되게 만든 일등공신이기도 하고요.
유럽에선 인도주의적 차원에서 노예를 풀어주기도 하고 고향으로 보내준답시고 서아프리카로 해안으로 보내준 역사가 있죠.
(미국 노예제 폐지 이전, 영국은 1807년에 노예무역을, 1833년에 노예제도를 폐지)
아프리카의 그런 대표적인 나라들이 시에라리온과 라이베리아가 있는데, 슬프게도 시에라리온의 수도 이름은 노예가 아니니 이곳에 편하게 정착해서 살라는 의미에서 지어진 "프리타운"이기도 합니다.
벅 오닐의 할아버지만 해도 나이저 강 일대의 아프리카인인데 자유민이 됐다 해도 고향을 찾아갈 수가 없었던 것이, 나이저 강은 기니에서 발원하여 말리와 니제르를 지나 베냉을 거쳐 나이지리아까지 흐르는 4천km가 넘는 강인데 도저히 고향을 찾아갈 수가 없었겠죠.
오닐 가족은 조지아를 거쳐 벅 오닐이 태어났을 때는 플로리다주 카라벨이라는 동네에 살았는데(지금도 3천여 명의 동네이니 예전에 숫자가 더 적었겠죠)
이때도 안타까운 사연이 있습니다.
당시 인종차별로 인해 집 근처엔 흑인이 다닐 수 있는 학교가 4개밖에 없어, 잭슨빌로 이사를 가서 고등학교 과정과 전문대학 2년 과정의 학업을 마쳤고, 입학 불가 소년이었던 오닐은 69년이 지나 1995년 다니고 싶었어도 입학을 할 수 없었던 사라소타 고등학교에서 명예 졸업장을 받은 일도 있습니다.
키는 크지 않았지만 이미 12살 나이에 신발 사이즈가 11이었던(290) 왕발 오닐 소년이 야구에 빠진 것은 어린 시절 삼촌이 아버지와 자신을 데리고 갔던 플로리다 팜 비치에서 있었던 니그로 리그의 경기였는데, 루브 포스터가 뛰던 시카고 아메리칸 자이언츠의 경기였다고 합니다.
야구에 대한 첫인상은 작은 공이 빨라도 너무 빠르다 였다는데요.
어린이가 보기엔 투구 간격이나 이닝 교대 같은 지루할 시간들이 있었을법한데 그런 순간이 없었다고 합니다.
이후부터 공놀이가 일상이 되었고 봄이면 스프링 캠프를 위해 찾아오는 양키스의 베이브 루스 같은 스타 선수들의 모습도 지켜봤었다고 합니다.
캔자스시티 모나크스에서 뛰다 1943년 해군으로 복무했는데 (마리아나 제도와 필리핀의 수빅 만)
보직이 보트웨인 이었다고 하는데요.
미군 해군 병과를 몰라서 찾아보니 갑판에서, 삭구, 닻, 보트 등을 담당하는 준사관 또는 하사관을 보트 웨인이라고 하는군요.
성실하고 똑 부러지는 업무처리였는지 휘하에 있던 12명의 수병이나 지휘관이 말하길 백인이었다면 지금쯤 장교가 되었을 것이라는 이야기를 듣던 군 생활이었다고 합니다. (이런 병사들을 행보관이 참 좋아하는데 말이죠, ex 말뚝 박아라)
군에서도 인종차별이 있었던 게, 자유를 위해 목숨을 걸고 복무하는 자신들이었지만 군과 정부의 대우는 흑인 병사가 버스에 타면 뒷자리에만 앉도록 하는 등의 대우는 변함이 없었다고 하네요. (벅 오닐이 말하길 내가 일본군 포로를 잡았어도 해군에선 나보다 그 포로를 더 잘 대해줬을 거야~라고)
군 신문에 니그로 리그에 대한 소식은 당연히 없어 동료들이나 가족들이 캔자스시티 모나크스에 대한 신문 스크랩을 따로 보내줬는데 1945년 캔자스시티 모나크스에서 뛰며 4할에 근접한 타율을 기록하던 재키 로빈슨의 존재를 처음으로 알게 됐었는데(캔자스시티 모나크스에서 로빈슨의 1945년 최종 성적은 34경기 타율 .375)
태평양 전쟁이 끝나고 2달이나 지난 어느 가을날 지휘관의 호출 명령이 있었는데 지휘관이 말해주길 다저스 트리플-A 팀이 방금 재키 로빈슨과 계약했다는 사실을 네가 알아야 한다고 생각해서 불러 이야기해 줬는데 너무 기뻐서 인터콤으로 승무원들에게 소식을 알리고 갑판에 모여 소리를 지르며 공중에 총을 쏘기도 했었다는군요.
※ 재키 로빈슨의 계약일은
몬트리올 로열스와 계약, 1945년 10월 23일, 트리플-A
브루클린 다저스와 계약, 1947년 4월 10일, 데뷔는 5일 후 4월 15일, VS 보스턴 브레이브스(현 애틀랜타)
벅 오닐의 당시 생각은 어느 선수가 메이저리그 팀과 처음으로 계약을 하느냐가 중요한 것도 아니었고, 어느 팀이 용기를 내어 흑인 선수와 계약을 하느냐도 중요한 것이 아니었고, 그저 평등을 향한 진정한 첫걸음의 시작과 변화가 더 감격스러웠다고 합니다.
1948년 전역 후에 선수+감독으로 캔자스시티 모나크스에서 있었고, 1950년엔 시즌 2에서나 나올듯한 쿨 파파 벨이(1943년 43세 은퇴) 말해주길 텍사스 샌안토니오의 블랙 셰퍼더스 팀에서 뛰는 19살 유격수를 꼭 봐야(계약) 한다고 말해줬는데, 벅 오닐은 바로 그 유격수의 집이 있는 댈러스로 운전을 하고 가서 경기도 보지 않고 그 유망주와 계약을 했는데요.
쿨 파파 벨의 선수를 보는 안목도 대단했고 벨의 말 한마디로 충분하다는 판단을 했던 벅 오닐도 대단했네요. (어느 기사에선 어니 뱅크스를 발굴한 인물이라고 하던데 계약만 했습니다)
이 유격수는 훗날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는 어니 뱅크스였고요.
대한민국의 6.25전쟁으로 미국도 다시 징집하던 시기라 어니 뱅크스는 2년 복무 후에 1953년 9월 17일 데뷔하는 컵스 최초의 흑인 선수가 되죠.
1955년 시즌 말미 벅 오닐은 시카고 컵스와 스카우트 계약을 맺었고, 자신의 방문에 불편함을(흑인) 느끼지 않을 흑인 선수들 발굴을 위해 남부 지역을 스카우트 활동 무대로 했는데요.
지금은 통계나 분석을 활용하는 것이 당연하지만 그 시대의 벅 오닐은 그저 자신의 본능으로만 판단했다고 합니다. (스윙 스피드, 타이밍, 배트에 맞는 타구음)
벅 오닐의 방식을 두고, 어! 하며 이때쯤 생각나는 야구 소재의 영화가 생각나는 분 있으신가요?
벌써 나온 지 10년이 넘어버린 영화인데(시간이 빠르네요) 클린트 이스트우드 주연의 내 인생의 마지막 변화구란(Trouble With the Curve) 영화가 있죠.
야구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잔잔한 재미가 있는 영화인데요.
영화에서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애틀랜타 브레이브스의 프랜차이즈 스타들을 발굴한 스카우트 "거스 로벨"로 나오고, 영화에서 거스 로벨 스카우트는 컴퓨터나 데이터를 싫어하고 경기장에서 직접 선수를 만나보고 경기를 지켜보는데요.
심지어 시력도 나빠져 제대로 보지도 못하지만 소리(미트)로 판단하기도 합니다.
영화 말미 피는 못 속인다고 짐을 싸던 딸이 미트질 소리에 꽂혀 자질을 알아보고 애틀랜타에서 테스트를 받게 되는 피넛 보이는 애틀랜타 단장에게 샌디 쿠팩스가 돌아온 것 같다는 대사가 나와서 보게 되면 씨~익 하고 웃게 됩니다. (딸은 한술 더 떠 스티브 칼튼, 랜디 존슨이라고도 하고ㅋ...)
벅 오닐은 전설이 되는 선수들을 여럿 발굴하고 계약했는데요. (3천 안타 클럽의 루 브록도 있고요)
1968년엔 앨라배마주 몽고메리 지역을 살펴보다 18살 선수를 보게 됐는데, 보자마자 자신에 대한 소개로 인사만 하고 구단에 꼭 계약해야 할 선수를 알리기 위한 보고서를 작성하고 제출하려 바로 가속 페달 밟을 만큼 마음이 바빴다고 합니다.
그 선수는 윌리 메이스가 우상이었던 오스카 갬블이었고요(비록 무관이었지만 17년의 메이저리그 커리어, 1968년 컵스 16라운드 계약)
스카우트 벅 오닐의 보고서 작성으로 계약한 선수들 중에 13명이 메이저리거 됐습니다.
통산 478 세이브의 리 스미스와 396홈런을 기록한 토론토의 월드 시리즈 영웅 조 카터도 벅 오닐이 스카우트한 선수입니다.
리 스미스, 1975년 드래프트 2라운드 4번
조 카터, 1981년 드래프트 1라운드 2번
어린 시절 플로리다에서 봤던 베이브 루스의 타격에서 작은 다이너마이트가 터지는 것 같은 소리를 들어봤고, 선수 시절엔 니그로 리그 타격 3관왕 선수였던 조시 깁슨에게 그런 스윙이 있었고, 그로부터 50년이 지나 스카우트 시절에도 그런 소리를 들었는데 그 선수는 모두의 기대만큼 성장하지 못하고 광고로만 더 기억되는 "보 잭슨"이었네요.(보 잭슨은 1986년 캔자스시티 로열스 4라운드)
스카우트 생활을 하다 1962년 컵스에선 벅 오닐을 코칭스태프로 승격시켜서 최초의 흑인 코치가 되는 일도 있었는데요.
당시 1962년은 암흑기 컵스의 중간지점이었죠.
1946~1983년까지 37년 동안, 컵스는 2위 3번, 3위 5번이 최고의 성적이었고 직전 시즌 1960년 60승 94패 내셔널리그 7위(8팀 중에)
1961년 64승 90패 내셔널리그 7위(8팀 중에)였습니다.
그래서 리글리 구단주님께서 나름의 혁신안을 도입하지만 팬들이나 전문가에게도 조롱당하는 일이 벌어집니다.
리글리 구단주는 감독은 소모품이다 구원 투수와 마찬가지로 구원 감독도 있어야 한다는 이야기를 했고, 감독이 선임되면 관례처럼 자신의 사람들로 코치진을 채우니 야구단 문화가 어느 때는 정체되기도 해서 코치 데려오는 것을 금지시키고(전통적인 감독 코치 구조를 폐지) 베테랑 코치를 각각 영입하는 일을 벌였는데요.
College of Coaches라고 해서 요즘으로 치면 순환보직 로테이션 같은 시스템이었습니다. (요즘처럼 감독이나 코치의 특정 보직이 아닌 마이너부터 메이저까지 기간을 두고 순환)
특정 1인이 받을 개인 스트레스를 없애고 각 팀의 코치 8명의 경험과 지혜를 컵스 전체 조직에 융합시키려는 플레이 시스템을 꿈꿨습니다.
이런 체계로 인해 1962년 7월 15일 일요일, 휴스턴과의 더블헤더 경기가 있었는데, 2차전 1회에 감독이 퇴장당하는 일이 일어났고 3루 코치가 감독으로 1루 코치는 3루 코치로 옮겼는데 또다시 감독 퇴장이 발생했고 벅 오닐이 코치로 나갈 차례였는데 흑인이어서 불펜에 있던 투수코치가 3루 코치로 나서는 일도 있었습니다.
작년 월드시리즈 기간 인터뷰에서 휴스턴의 더스티 베이커 감독은 미국 태생의 흑인 선수가 양 팀의 라인업에 없는 것이 우려된다는 이야기를 했던 기억이 있는데요.
1962년 컵스의 벅 오닐 코치에게 있었던 일은 의미는 다르지만 생각을 하게 되는 대목 같습니다.
참고로 메이저리그에서 최초의 흑인 감독은 김선우 해설이 이름 들으면 아주+몹시+매우 반가워할 프랭크 로빈슨이었습니다. (1975년 클리블랜드 인디언스)
이렇게 운영되던 컵스는 2년 동안 감독 자리에 앉은 사람이 7명이었는데 각자의 스타일로 운영하니 라인업도 변화가 많았고요.
코치진의 충돌도 있었고 무엇보다 코치들이 감독을 돕지 않고 스스로를 책임져야 하는 각자도생의 기간이 되는 부작용, 팬과 언론의 조롱도 있고 선수단도 일관된 리더십이 없는 덕아웃 문화에 불만이 생겨 전통의 방식으로 회귀하게 됩니다.
결국 컵스는 1966년 시즌을 위해 감독으로 리오 더로셔 선임, 1962년 컵스는 59승 103패 내셔널리그 9위(10팀 중에)였습니다. (신생팀 메츠가 40승 120패로 10위)
이야기하는 김에 컵스 이야기 좀 더...
150년이 넘는 컵스의 역사에서 1대(1876년) 구단주부터 6대(1916년) 구단주의 컵스 보유 기간은 44년이지만, 지금도 구장 이름으로 쓰이기도 하는 리글리家의 구단주 기간은 가장 긴 60년이나 됩니다.
1921년~ 윌리엄 리글리 주니어, 1932년~ 필립 나이트 리글리, 1977년~ 윌리엄 리글리 3세
구장 이름은 구단을 인수하고 컵스 파크로 바꿨다가 1926년부터 리글리 필드로 바꿔서 현재에 이릅니다.
이렇게 리글리 3대가 컵스의 7~9대 구단주였고요.
위에 이야기한 미친 실험은 아버지 사망 후에 컵스를 물려받은 2대 필립 나이트 리글리였고, 부자는 망해도 3대는 간다는데, 역시 아버지 사망 후 컵스 구단주가 되었던 윌리엄 리글리 3세는 망하지도 않았는데 5년 후 구단을 일리노이주를 기반으로 하는 언론 미디어 회사 트리뷴 컴퍼니에 2,050만 달러에 매각하게 됩니다.
생각해 보면 리글리 시대엔 염소의 저주를 이야기할 것이 아니라 60년대의 그 좋은 멤버들을 두고 허튼짓을 한 것이 암흑의 108년이 되도록 부채질을 한 것이 아닌가 합니다.
윌리엄 리글리 주니어 회장님이 지금 같은 시대엔 꿈꿀 수 없는 상품으로(껌) 대부호가 된 인물이었는데요.
야구단 운영과 껌 하니까 뭔가 생각나시나요? 송파에 사우론의 탑을 지은 회사의 창업주도 같은 상품으로 부를 쌓기 시작했죠.
매출의 대부분은 한국에서 얻지만 섬나라 기업의 이미지가 더 강하기도 한 느낌적인 느낌이 있고, 정서상 섬나라 기업 같은데 불리하면 한국 기업인척 하는듯한 기업, 한반도 대기업의 많은 악행?들이 있어왔고, 극서민인 제 눈엔 다른 것보단 군필자라서 그런지 몰라도 이 기업은 신의 아들 집안인 것이 다른 무엇보다 먼저 생각납니다.
국방부 신검에서 일반인 병역면제율이 6% 정도인데요.(과거부터 평균)
재벌가는 30%, 10대 대기업으로 좁히면 56%인데 위의 기업은 100% 신의 아들입니다.
방법도 법의 테두리를 교묘하게 이용하는 섬나라 국적이었다가 병역의무가 풀리는 40세가 넘으면 귀신같이 한국 국적을 취득하죠.
경제면 보면 분명 국적이 섬나라 사람인데 한국 이름있다고 한국 사람처럼 기사를 내주더라고요.
뭐 광고수입 달달하게 받아야 하니 이해하지만 아마 더쇼 26~27 정도 할 때쯤엔 뉴스가 나올 시기가 올 텐데요.
아마 뉴스 제목은 이러겠죠 기업(그룹) ○○家 3세 경영 시작하나... 경영 전면에 나서다... 경영승계를 본격화했다... 뭐 이런 기사가 나올 겁니다. 무슨 말이냐면 오너의 아들 나이가 40세 커트라인에 다가서고 있다는 이야기였습니다.
부를 땐 국가의 아들, 다치면 너희 아들이 되는 군대라는 말도 있죠.
좀 다른 이야기지만 80~90년대 군에서 각종 의문사로 사망한 병사들의 시신이 장례를 치르지 않고 영안실에 장기간 안치된 사연이 있다고도 들었습니다. (더 글로리에서 학생처럼)
그래도 요즘은 은폐가 덜한 세상이지만 군에선 아들의 수어사이드 통지서 달랑 보내주며 항상 등장하는 단어들엔 지금 봐도 익숙한 것이 더 많던 시절이었다죠.
신변 비관, 우울증, 이성과의 문제, 가정사 등을 내세워 순직 처리 안 해주니 진실을 밝히려 싸우며 자식을 보내주지 못하는 부모나 가정이 있다고도 들었습니다.
요즘은 뉴스 보다 보면 언제인가부터 너무 동포, 동포가 자주 등장하기도 하죠. 강력 범죄 신상 공개하며 얼굴 이름도 다 나오잖아요.
국적은 서해바다 넘어 사람인데 꼭 동포라고 해주는 온정주의?를 보여주기도 하고, 동계스포츠 종목 출신으로 아라사 국적을 취득한 사람도 아라사 이름으로 불러줘야지 대부분 한국 이름을 불러주는데요.
공연을 이유로 빤스런했던 스티브 유에게 국방부였는지 병무청 관계자였는지 영어로 대화하며 스티브 유라고만 불러준 것이 5월 7월 9월 세금 성실히 내고 살며, 법에 대해 잘 모르는 저 같은 대한민국 사람에게 필요한 최소한의 배려가 아닐까 하는 생각도 컵스 이야기하다 드는 밤이네요.
말콤 포브스가 만든(발행인) 경제 전문지 포브스가 있죠.
궁금해서 찾아보니 세계 부자 순위를(목록) 포브스에서 1987년 3월부터 조사하고 발표를 시작했더군요.
당시 인터넷도 없던 시절이라 지금처럼 회사들의 자료도 들여다볼 수 없던 시절이라 그때는 주로 전화 팩스를 사용하고 미심쩍은 부분은 기자들을 보내 취재하고 자료 취합해서 발표했다는데요.
첫해 목록을 보니 미국과 일본 기업인들이 대부분인데 송파 사우론의 탑 창업주도 당당히 상위권에 있네요.
1980년대가 일본 경제 호황이다 버블경제다 말들이 있던 시절이라지만 정말 용과 같이에 나오는 것처럼 택시 타려고 돈을 뿌리는 정도의 호황기 체감이었을까요?
사우론 창업주께선 부동산을 그렇게 많이 소유했다고 하는데 재미있는 것은 1987년 포브스의 기업 분류에선 제과, 사탕 만들기, 소매업으로 되어있네요.
1987년 한국인 억만장자는 단 2명인데요.
횬대의 그분은 중공업으로 분류, 쌤쑹의 JY 할아버지 그분은 무역, 소매, 가전으로 표기되어 있네요.
다시 컵스로 돌아와서 리글리와 트리뷴 시대를 지나 지금의 컵스 구단주는 또 바뀌어있죠.
인수 당시 자산규모가 3.7조 정도 되었던 사업가 조 리케츠라는 사람이 2009년 10월 27일 인수했는데요.(인수 당시의 지분은 조 리케츠 95%, 트리뷴 5%)
2023년 3월의 자산규모는 8조 가까이 되네요.(2009년의 통장 잔액이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는데 조 리케츠 구단주님은 돈이 돈을 벌었네요)
이렇게 조 리케츠 네 명의 자녀들이 이사회에 들어와 구단을 운영하고 있는데요.
조 리케츠 시대의 컵스에서 뉴스에도 자주 나왔던 재미있었던 일이 있었죠.
컵스 인수 조건에는 5억 달러의 자금 투자로 구장이나 리글리 필드 주변 지역의 개보수 조건을 들어 시의회에서 인수 승인을 해주었고, 2014년엔 대규모 개보수 프로젝트로 외야 좌석 증축과 광고판 설치, 클럽하우스 개보수, 띠 전광판, 대형 전광판 설치 등의 공사가 시작됐는데요.
이즈음 재미있는 일이 발생하죠.
구단주 그룹이 보기엔 구장 밖의 루프탑(옥상) 관람은 자신들의 경기장으로 인해 수익을 올리는 구조였고(안 그래도 눈엣가시 정도?) 루프탑을 운영하는 건물주(또는 임대 사업주)들은 외야의 대규모 업그레이드 공사는 자신들의 관람(시야)을 방해한다며 소송의 나라 미국 아니랄까 봐 법적 분쟁을 예고합니다.
예전 사진이나 중계방송화면을 생각해 보면 특정 몇 건물에서나 지인들로 보이는 소규모의 사람들이 관람하던 모습이 생각나는데 언제쯤부터 돈 냄새를 맡고 관람석을 설치하고 맥주도 팔고 했는지 제 기억엔 없네요.
서로의 입장으로 팽팽하게 대립하며 시간을 보내다 백지장도 맞들면 낫다는 속담처럼 구단주 일가는 돈도 있겠다 머릿수도 있겠다 회의 끝에 역으로 접근하기 시작합니다.
리글리필드 외야의 옥상 사업을 하던 건물이 16동이었는데요.
이 옥상들을 사들이기 시작합니다. 처음엔 7개의 옥상을 사들이고 어떤 건물은 부동산 모기지(대출)도 사들이고 해서 2016년 시즌 말미에는 11개나 소유하게 되고 마케팅 부서 소속의 리글리 루프탑이라고 해서 운영 중입니다.
그리고 전 세계 통틀어 야구 경기에서 처음 야간 경기가 열린 것은 매사추세츠주 에식스 카운티의 "린"에서 였는데요(1927년 6월 24일)
처음 시작은 철도 조차장이 어두워 밤새 켤 수 있는 고출력 조명등 개발 의뢰를 받았던 전기회사의 엔지니어 로버트 스왁해머(Robert Swackhamer)의 아이디어에서 출발했습니다.
자신이 만든 조명등이 조차장에서 잘 작동했기 때문에 로버트 스왁해머는 야구 경기에도 적용해 보기 위해 상사를 설득해 테스트하고 경기가 치러졌는데 그날이 1927년 6월 24일입니다. (72개의 램프를 매단 5개의 조명탑으로 첫 야간경기를 실시)
시즌 1의 존 도널드슨이 백인들보단 앞선 1910년대에 이미 자신이 뛰던 팀에서 조명을 가지고 다니며 야간경기도 했다는 이야기를 했습니다만 조명 광원 등의 문제를 떠나 이런 경기가 가능했냐(치러졌냐) 하는 이야기가 어디에도 없고 구술에 의한 이야기라는 문제가 있습니다.
이렇게 야간 경기의 가능성이 대두되기 시작했고요.
메이저리그에서 첫 야간 경기가 치러진 날은 1935년 5월 24일 신시내티 레즈의 홈구장 크로슬리 필드에서 있었습니다.
시대의 흐름이긴 했지만 그래도 신시내티 레즈가 제일 급박했던 것은(야간 경기 시행) 미국의 주가(株價) 폭락을 계기로 시작된 대공황의 (1929~1933년) 여파로 신시내티 주중 낮 경기의 평균 관중이 3천 명이 안 되는 시기가 길어졌고, 레즈 구단주가 재정 악화로 파산 위기에 몰리게 되자 이에 대한 타개책으로 당시 거금 5만 달러를 들여 홈구장 크로슬리 필드에 조명탑을 설치하게 됩니다.
첫 야간 경기 플레이볼 시간은 20시 30분이었고요. 홈팀 레즈가 필리스를 2-1로 꺾고 승리했고 유료 관중은 20,422명이었습니다.
일본은 1948년 8월 17일 요코하마에서, 대한민국 야구 역사에서는 1966년 10월 DDP로 흔적이 사라진 동대문 야구장에서 첫 야간 경기가 있었고, KBO는 1982년 시작했는데요.
지금은 믿기 어렵겠지만 1982년 프로야구 개막 당시 국내에 조명탑이 설치된 야구장은 동대문 야구장 단 한 곳이었습니다. (잠실 구장 공식 개장은 1982년 7월 15일, 김재박의 개구리번트와 한대화의 파울폴 맞추는 홈런으로 더 기억되는 27회 세계야구선수권대회는 9월 개최)
※ 사라진 동대문 야구장의 이름 변천사
경성 운동장 야구장(1925~1945)
서울 운동장 야구장(1945~1984)
동대문 야구장(1985~2007)
그리고 대한민국에서 무리하게(빨리) 프로야구가 시작된 것도 살아생전 재산이 29만원 뿐이라던 그 사람의 3S 정책의 일환이었죠.
또 한 번 믿기 어렵겠지만 1982년 대한민국은 야간 통행금지가 해제되는 해여서 프로야구 야간 경기에 대한 준비나 계획도 미비했던 시절이었습니다. (통행금지 해제는 1981년 12월 15일 국회 본회의에서 통금 해제안이 통과된 후, 1982년 1월 5일에서 6일로 넘어가는 자정부터 해제)
그래서 1982년 시즌 전반기에 열린 야간경기는 단 8경기였고요.
프로팀 첫 경기는 5월 12일 OB vs 해태의 경기였는데 3회 내린 비로 인해 우천 취소되어 공식 첫 야간경기는 5월 20일 삼미 vs 삼성의 경기가 공식 야간경기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당시에도 연고지역이 존재하긴 했지만 프로야구도 1983년 개막했던 프로 축구는 더 심해서(당시 이름이 "수"퍼리그, 현-K리그) 연고지역 경기뿐만 아니라 중립경기로 전국을 돌며 경기를 했습니다.
다시 컵스의 리글리 필드로..
1941년까지 메이저리그 16개의 구장 중에 11개 구장에 조명탑 시설이 완비되었고, 리글리 필드는 1942년 조명탑을 설치할 예정이었는데, 자신이 헤비급이라 착각한 섬나라에서 1941년 12월 7일 진주만 공습으로 큰 거 2방을 맞기 위한 예비 절차에 돌입하게 되죠.
그래서 컵스의 조명탑 설치 계획이 무산되게 되고요.
이후엔 컵스에선 단순하게 표방한 이유는 야구의 낮 경기 전통을 이어간다는 명분을 내세웠지만, 따져보면 리글리 필드 주변 주택가 레이크 뷰, 레이크 뷰 이스트 쪽의 조례에는 야외 야간 행사를 금지하는 조례도 있었고, 복합적인 이유로 컵스는 시대의 흐름에 뒤처진 조명 없는 구장의 세월을 보내게 되는데요(나만 없어)
1981년 구단을 인수한 트리뷴 컴퍼니 측은 리글리家와 다르게 조명탑 설치에 대한 전향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무엇보다 야간 경기로 발생하는 수익 창출) 1983년까지 암흑의 시간을 보냈던 컵스가 기적처럼 1984년 드디어 가을야구에 돌입, 내셔널리그 챔피언십 시리즈를 샌디에이고와 치르게 되는데요.
1984년 월드시리즈 홈 필드 어드벤티지는 내셔널리그가 가지고 있었지만, NLCS 기간 컵스는 커미셔너에게 홈 필드 어드벤티지를 조정해서 3~5차전을 가져가거나 홈경기장을 옮겨서 경기를 해야 한다는 통보를 받게 됩니다.
10월 9일 화요일에 시작하는 시리즈였는데요. 컵스 구장의 조명탑이 없는 관계로 낮 경기를 하게 되면 중계방송 황금 시간대인 전국 송출에 방해가 된다는 이유에서였습니다.(시청률과 그에 따른 광고 수익)
이런 일로 인해 조명탑 설치 계획이 탄력을 받게 되지만 이번엔 주변 지역 주민들의 거센 반대에 부딪히게 됩니다.
반대하던 주민들의 대표적인 이유는 홈경기 81경기로 인해 이미 주차 문제, 교통 체증, 소음 등의 문제가 있었는데, 야간 경기가 허용된다면 늘 있어왔던 문제에 조명탑 불빛으로 인한 문제가 추가되고 밤이면 더 활개를 칠 술에 취한 컵스 팬들에 대한 문제 제기였습니다.
1985년 반대하는 팬들은 리글리 필드에 조명 금지 문구를 넣은 티셔츠를 입고 시위도 하며 구단을 압박하기도 했었고요.
구단과 허가권을 쥔 시(市)의 법정 다툼도 시작되는데, 1985년 10월 일리노이주 대법원에서 열린 소송에서 컵스는 패소하고 야간 경기를 할 수 없다는 판결을 받게 됩니다.
이에 구단주였던 트리뷴 측에서는 시카고 외곽으로 구장 이전을 한다며 맞서게 되고, 진흙탕 싸움이 계속되다 1988년 2월 시의회의 투표를 통해 조명탑 설치가 허용되는데 첫해인 1988년 8경기를 허가해 줬고 이후 시즌에는 18경기만 개최 가능하다는 조건부 승인이었습니다.
이런 진통 끝에 1988년 8월 9일 화요일 19시 05분 첫 야간경기를 치르게 됩니다. (CHI 6:4 NYM)
그리고 컵스는 특이하게 주말 야간경기도 가장 늦게 했던 메이저리그 팀이기도 합니다.(첫 주말 야간 경기 개최는 2020년)
이런 낮 경기 시절을 두고 컵스에서 뛰기도 했던 1979년 신인상 출신의 릭 서트클리프의 자조 섞인 인터뷰도 있는데요.
내용이 가정적인 남자에게 컵스는 아주 이상적이다. 아침에 일어나 아이들 등교시켜주고 집에 와서 밥 먹고 경기장에 가서 경기를 하고 집으로 돌아와 가족들과 저녁식사를 할 수 있었다고 말입니다.
리글리 필드 이야기 하나 더하자면 30년 된 루키라는(국내 개봉명) 영화가 있습니다.
야구는 좋아하지만 소질은 없는 12세 소년(주인공)이 팔이 부러져서 4개월의 깁스를 하게 되는데, 4개월 후 깁스 풀게 된 기념으로 엄마에게 선물 받은 리글리 필드 티켓을 (컵스 VS 몬트리올) 받고 경기를 보러 가는데 상대팀의 홈런공을 잡으면 구장으로 던져버리는 문화가 있는 컵스죠.
주인공 소년이 있는 외야 관중석으로 날아온 홈런공을 내야로 던지는데 외야에서 홈으로 노바운드로 던지게 되고 이후 103마일 던지는 메이저리거가 되어버립니다. 말이 되고 안되고 뭐가 중요하겠습니까! 시나리오가 그런데요.
2014년 7월 13일 토요일 리글리 필드 개장 100주년 이벤트 행사에서 성인이 된 주인공이 돌아와 시구를 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벅 오닐 은퇴 후의 행보도 아주 좋은 평가를 받는데요.
니그로 리그 박물관이 생기고 니그로 리그 선수들을 재조명을 하는 일에 앞장섰던 분입니다.
기념품 등을 다락방이나 지하실에 보관해 봐야 세월이 흘러 손자 세대가 되면 버려질 것이 분명하고 니그로 리그 출신의 선수들도 나이가 들어 점점 사라지니 박물관이라도 만들지 않으면 흑인 리그에 대한 기억들이 모두의 기억에서 점점 사라진다는 마음에서 1990년 방 하나 딸린 작은 사무실을 임대해서 같은 뜻을 가진 캔자스시티 로열스 2천 안타 출신의 프랭크 화이트와 임대료를 번갈아 내며 박물관을 운영했고, 기념품들이 늘어나 1994년 확장 이전했다가 지금 운영되는 니그로 리그 박물관이(Negro Leagues Baseball Museum) 1997년 11월 1일 문을 열게 됩니다.
이젠 친숙해서 더쇼 유저같이 보이는 밥 켄드릭(Bob Kendrick)입니다.
2000년부터 메이저리그에서도 니그로 리그 역사와 경기 기록에 대한 광범위한 조사+자료수집을 통해 6천명 이상의 니그로 리그 선수들에 대한 9,500페이지에 달하는 데이터를 정리했고 명예의 전당에 입성할 자격이 있는 니그로 리그 선수 및 임원 발굴을 위해 활용하고 있기도 합니다.
캔자스시티 모나크스 출신이지만 메이저리그 로얄스에서도 여러 차례 행사를 열었고 지금도 벅 오닐에 대한 예우를 하고 있는데요.
카우프만 스타디움에는 2007년 시즌 개막일부터 벅 오닐 레거시 좌석이라고 해서 기념하고 있고요.
여러 행사들이 있었지만 작년 5월엔 올드 유니폼으로 모나크스 유니폼을 입기도 했고, 쿠퍼스 타운 헌액 행사 이후 8월 13 경기에선 로얄스 구단이 쿠퍼스 타운 측과 협의해 벅 오닐의 헌액 명판을 스타디움으로 가져와 전시도 했고, 모나크스에서 뛰기도 했고, 최초의 흑인 메이저리거 재키 로빈슨이 뛴 다저스 팀과 협의하여 올드 유니폼을 입고 경기를 하기도 했는데 선수들의 유니폼은 경매 후에 니그로 리그 박물관에 기부가 됐습니다.
그리고 위에 소개했던 독립리그 모나크스에서 팀 이름을 바꾸기 이전이던 2006년 캔자스시티 티본스 시절 3월엔 영구결번(#22)을 지정했었고요.
2006년 7월 18일 캔자스시티에서 열린 독립 리그 올스타 게임에선 벅 오닐과 1일 계약을 맺고 최고령 선수로 타석에 들어서 고의사구를 기록했습니다.(94세 8개월 5일)
그리고 3개월이 지나 10월 6일 영면하십니다.
다음 선수는 벅 오닐이 처음으로 관람했던 야구 경기에 등장했던 루브 포스터입니다.
● 루브 포스터
900년이 넘는 역사로도 유명한 영국의 옥스퍼드 대학교가 있죠.
요즘 학생들에게 필수 구매 항목은 아니지만 전자 수첩+PC 보급+인터넷 시대 이전의 학생들이 필수로 소지했고 혹은 빌려주기도 하고 훔치기도 하고 헌책방에 판매도 하고 물려주기도 하던 옥스퍼드 사전이 있죠. (요즘엔 중고서점이라고 부르는데 예전엔 왜 "헌책방이라 했을까요?)
이 사전의 역사는 옥스퍼드 대학교 출판부가 1884년부터 출판하기 시작해서 현재 사전과 같은 틀이 완성된 것은 1928년이었고요.
옥스퍼드 대학교 출판부 OUP(Oxford University Press)는 세계 각지에 지사들이 있는데요.(한국지사도 청계천 옆에 있습니다)
미국 지사는 1896년 개설되어 미국 최대의 전문서적+학술 서적 출판사로 자리매김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로버트 W. 피터슨(1925~2006년)이라는 작가분이 계신데요.
이분이 1970년 출판한 "니그로 리그 야구 연대기"라는 책으로 니그로 리그 야구 역사에서 잃어버린 시대와 흑인 선수들을 조명해서 찬사를 받았던 작가분이신데, 이분이 1971년 옥스퍼드 대학교 출판부에서 발행한 책이 있습니다. 직역하면 오직 공만이 하얗다 또는 공만이 흰색이었다 정도 될 텐데 이 책에서 루브 포스터에 대해 내린 정의는 이렇습니다.
뛰어난 투수이자 다채롭고 기민한 필드 매니저, 최초의(단일) 니그로 리그의 창립자이자 엄격한 관리자인 포스터는 흑인 야구 역사상 가장 인상적인 인물이었습니다.
이 네 사람의 재능이 하나의 몸에 결합되고 그 몸이 검은 피부로 둘러싸여 있다면 루브 포스터라는 이름이어야 합니다. (이보다 더 좋은 찬사가 있을까요?)
하지만 위의 인물 중에서 케네소 마운틴 랜더스는 메이저리그의 성장을 이끈 사람이 맞지만 지독한 인종차별주의자로도 알려진 인물이죠.
흑인 선수 메이저리그 데뷔가 늦은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그가 커미셔너 재임 기간 뛰어난 흑인 선수들은 단 한 명도 메이저리그에 서지 못했고요. 1944년 11월 25일 사망했고 재키 로빈슨 계약은 1945년 10월 23일이었죠. (몬트리올 로열스, 다저스 트리플-A)
메이저리그 양대 리그 MVP 트로피에는 케네소 마운틴 랜디스의 이름, 재임 기간, 얼굴이 새겨져 있기도 했는데 사라진지 얼마 안 됐습니다.
블랙 라이브스 매터 캠페인이 한창이던 2020년 명예의 전당 헌액 투표하는 유권자(미국 야구기자 협회)의 안건으로 올라 투표에 부쳐져 90% 가까운 압도적인 득표로 인해 MVP 트로피에서 사라지게 됐습니다.
아! 그리고 옥스퍼드 사전 이야기하니 생각났는데 2021년에 한국어 단어도 등재가 됐죠. (외국인이 가장 먼저 쉽게 배운다는 욕을 빼면 어쩌니...)
루브 포스터는 미국에서 노예제 폐지(1865년) 이후 1879년 9월 17일 태어나서 자유민이었지만 현실을 말해봐야 무슨 소용이겠습니까? 당시 소작농 생활을 하던 아버지가 독실한 감리교 신자여서 그 영향을 많이 받게 되는 루브 포스터인데요.
그런 종교적 유산으로 성인이 되어서도 술을 마시지 않았고요.
일화로 감독 시절 선수들의 음주를 터치하진 않았지만 선수가 숙취 상태로 야구장에 나타나면 숙소로 돌려보내기도 했었다고 합니다.
사생활과 운동장의 경계를 두고 살았던 스타일인데 당시엔 흔치 않았을 것 같은데 주루 플레이 중엔 슬라이딩을 안 해도 벌금을 받기도 했었다고 하죠.
루브 포스터의 여러 일화 중에 특히 전설처럼 내려오는 이야기들이 있는데요.(엠엘비닷컴에도)
야구 실력이 좋았던 것은 기록으로 남아있으니 사실이지만 이야기의 시작은 1900년부터 몇 년 즈음의 일 같은데요.
실력과 성적으로 루브 포스터 명성이 퍼지기 시작하면서 당시 뉴욕 자이언츠의(현 SF) 선수 겸 감독으로 있던 존 맥그로가 포스터에게 관심을 갖기 시작했고, 재능 있는 젊은 투수인데 뭔가 아쉬웠던 크리스티 매튜슨을 개인 지도하도록 요청한 것으로 알려져 있고 그때 매튜슨이 배운 것이 페이드 어웨이였다는 이야기입니다.
페이드 어웨이는 지금이야 농구로 각인되는 용어지만 초창기 야구에서 페이드 어웨이로 불리다 나중에 공식 구종 이름이 스크루볼이 됩니다. (초창기엔 단어 그대로의 의미를 붙여서 구종 이름으로 사용 Fade+Away 했고, 타자의 머리를 뱅뱅 돌리듯 어지럽히기 때문에 나중에 스크루볼이 되었다는 썰도 있습니다)
매튜슨의 전매특허 스크류볼을 장착하게 도움을 준 것은 루브 포스터란 거죠.
요즘엔 흔치않은 구종이고 스크류볼의 대명사 하면 칼 허벨(통산 253승, MVP 2회, 1947년 "HOF")이 먼저 떠오르고 게임에서 찾으면 발렌수엘라, 워렌 스판, 후안 마리샬 같은 선수가 있죠.
크리스티 매튜슨의 데뷔부터 초반 커리어 6년의 성적은 이렇게 되고요.
매튜슨에게 스크류볼을 장착시켜 가장 위대한 백인 선수로 만들었다는 이야기와 반대 의견들도 있는데요.
맥그로 감독이나 매튜슨이 의식이 깨어있는 사람이었다 해도 흑백 갈등 시절 포스터에게 배웠다는 것을 무시하는 의견도 있고요.
뉴욕의 매튜슨과 포스터의 선수 생활에서 지역적으로 가장 가까운 시절은 포스터가 1904년 필라델피아 자이언츠로 이적했을 때였는데 매튜슨은 이때 이미 좋은 성적을 거두고 있었죠.
매튜슨의 생전 인터뷰나 회고에 의하면 자신이 페이드 어웨이를 처음 배운 것은 고향 펜실베이니아주 혼스데일의 세미프로 시절, 선배 데이브 윌리엄스에게 배웠는데 1902년 보스턴 아메리칸스(현 BOS)에서 좌완 투수 데이브 윌리엄스가 데뷔했기 때문에 신빙성을 더한다는 이야기도 있고요.
이렇게 어느 시점부터 구전으로만 전해지고 내려온 이야기이기 때문에 증거가 없다는 것과 사실을 알 수 있는 모든 사람들은 모두 오래전에 사망했기 때문에 진위 여부는 모르는 이야기라는 겁니다.
이 이야기는(스크루볼 전수) 모먼츠에서 등장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위와 비슷하게 화장실 들어갔다 뒤처리 없이 그냥 나온 듯한 이야기는 또 있습니다.
풀네임이 앤드루 루브 포스터(Andrew Rube Foster)인데, 지금처럼 루브 포스터로 불리게 된 미들네임 루브(Rube)를 쓰기 시작한 이유(계기)입니다.
포스터가 미들네임 루브를 사용한 이유를 서면으로(1907년) 작성한 기록에서는 1905년 본인이 필라델피아 자이언츠 시절 필라델피아 애슬레틱스(현 OAK)와의 경기에서 선발로 나온 루브 워델(Rube Waddell) 을 꺾었을 때, 경기가 끝나고 상대팀에서 네가 흑인 "루브" 워델이다 워델보다 잘했다는 의미에서 얻게 됐다고 했는데요. (루브 워델은 1905년 27승 10패, 1.48, 287 삼진으로 투수 트리플크라운, 1946년 "HOF")
이런 기록을 부정하는 측에 의하면 1903년 쿠바 X 자이언츠 시절 루브 워델이 포함된 백인 세미프로 팀을 상대로 이겼을 가능성이 있지만(기록) 포스터가 메이저리그 필라델피아 애슬레틱스(현 OAK)와 경기를 한 기록이 없다는 점입니다.
1900년대 필라델피아 애슬레틱스 vs 필라델피아 자이언츠의 경기 기록은 실제 여러 번 있긴 했다고 합니다.
1907년에 서면으로 밝힌 이유인데 이치에 맞지 않는 것도 하나의 이유로 뽑았네요.
1914년에 아메리칸 리그와 내셔널 리그의 아성에 도전하기 위해 등장했던 또 다른 백인 야구리그 페더럴 리그가 있었죠.
8팀으로 시작했지만 대항마는커녕 2시즌만에 소멸하며 기존 팀으로 유능한 선수는 흡수되어 버렸는데요.
루브 포스터는 미래에 흑인 선수가 백인 야구에 합류하면 오늘날의 많은 백인 선수들은 그들의 지위+자리를 잃을 것이라며 백인 구성의 새 리그가 출범했지만 더 규모가 큰 아메리칸 리그와 내셔널 리그에 통합될 거란 예상을 하기도 했답니다. (그리고 이즈음 난립해 있는 흑인 리그 통합을 꿈꾸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시카고 아메리칸 자이언츠 감독 시절(1911~1926년)이던 1919년 개막을 앞두고 많은 흑인 선수들이 징집되었던 1차 대전도(1914년 7월 28일~1918년 11월 11일) 끝났고, 1918년 2월엔 우한 바이러스만큼이나 악명을 떨친 스페인 독감이 퍼져 니그로 리그 구장에 사람들이 전염병에 대한 두려움으로 입장 관중이 하락하기도 했었는데, 이젠 이 모든 것이 지나갔으니 장밋빛 시즌을 꿈꾸며 홈구장 좌석수도 늘리고 희망차게 시작을 했지만 1919년 여름 시카고 흑역사의 하나인 인종차별로 인한 폭동 사건이 있었죠.
17살 유진 윌리엄스라는 흑인 청소년이 친구들과 작은 뗏목을 만들어서 시카고의 자랑 미시간호에서 물놀이를 하다 사망했던 사건이 있었는데요.
당시 미시간호에서는 암묵적인 룰에 의해 백인과의 물놀이 구역이 나누어져 있었습니다.
흑인 물놀이 구역인 26번가에서 타던 뗏목이 백인 구역인 29번가 쪽으로 표류했고, 이때 백인 젊은이들이 소리치며 돌을 던져 맞춰
뭍으로 올라오지 못하고 사망했는데, 검시관의 보고서에 의하면 돌을 던져 뭍으로 오르지 못한 청소년의 사인은 익사였습니다.
사망사건으로 시작된 폭동은 1919년 7월 27일~1919년 8월 3일 진압에 의해 멈추기 전까지 38명이 사망했고요.(흑인 23명, 백인 15명) 부상 537명, 백인 주거지역도 외관이 파괴되긴 했지만, 2천 명에 가까운 흑인들은 전소로 인해 집을 잃기도 했던 사건입니다.
일리노이주 최악의 폭동 중에 하나인데 미국에선 1919년 붉은 여름이라 부르기도 하고 인종차별, 노동 폭력(임금차별) 때문에 발생한 사건으로 규정하고 있습니다.
통일된 흑인 야구 챔피언십 시리즈의 부재를 한탄했던 포스터였는데 이런 사고도 있고 루브 포스터는 흑인 야구 리그가 직면한 문제와 조직화+단합된 리그의 필요성과 함께 흑인 선수들이 생계를 꾸릴 수 있도록 하자는 리그 육성에 대해 언급하며 통일된 흑인 야구 단일리그의 필요성을 설파하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1920년 2월 13일 포스터는 캔자스시티의 YMCA 사무실에 7팀의 구단주들, 변호사, 기자들을 모은 회의를 소집해 백인 전용 메이저 리그와 유사한 흑인 야구 리그를 만드는 설립 안을 제안합니다.(모먼츠에서도 언급)
며칠 후 8팀이 모여 리그 헌장 및 부칙에 선서하고 루브 포스터를 회장 겸 재무 담당에 임명하고 니그로 리그의 역사가 시작됩니다.
(당시 루브 포스터의 발언도 모먼츠에 등장하고 "We Are The Ship All Else The Sea" 이 말을 따서 훗날 니그로리그에 대한 책의 제목으로도 사용됩니다. We Are The Ship)
뛰어난 재능을 가진 선수들을 포스터의 비전으로 끌어모아 통합된 리그가 시작되자 포스터도 리그도 전국적인 인기를 얻는 시기였습니다.
호사다마라고 1925년부터는 먹구름이 몰려오게 되는데요.
6월 인디애나폴리스의 하숙집에서 의식을 잃고 가스히터에 기대 누워 있는 것을 선수들이 발견하게 되는데 누출된 가스 흡입으로 이때부터 정신 건강이 악화되게 됩니다.
악화된 정신건강에 대해 1926년경 주변인들의 증언들이 있는데요.
팀의 투수였던 위 윌리 파월은 포스터가 집 앞의 거리를 목적 없이 자주 뛰어다니기 시작했고, 유격수 바비 윌리엄스는 포스터가 사무실에 뛰어들어 누군가 창문으로 들어와 자신을 끌어내려 한다는 망상+착란 증세에 대해 이야기하기도 했고, 아내에게는 본인이 메이저리그 월드 시리즈에서 투구를 하게 될 것이라는 이야기를 자주 했다고 합니다.
1926년 9월 8일, 흑인 신문(Associated Negro Press)의 기사에 따르면 일리노이주의 정신병원에 입원하게 되고 1930년 12월 9일 51세의 나이로 허망하게 생을 마감하게 됩니다.
루브 포스터에 대해 많은 사람들이 이야기하길 흑인 야구의 아버지 또는 대부라고 표현하는데 그런 의견에 고개가 끄덕여집니다.
루브 포스터 가스히터 사고 때문에 생각이 났는데 전에 미국에서 가스레인지 판매 금지 검토, 미국에서 불붙은 가스레인지 사용 금지 같은 기사가 나왔었죠. 물론 공화당의 결사반대로 무산됐다고 후속 기사 본 것 같기도 한데요.
폐지 법안의 이유가 탄소 배출이나 호흡기질환 유발 같은 걸 들었던 것 같은데, 우리나라의 가스레인지처럼 전기식 점화플러그가 아니고 미국 가스레인지는 가스 잔불이 들어와있는 상태라던데 정말인가요? 미국 가정의 일반 가스레인지 속을 들여다본 적이 없어서...
통계를 보니 미국 가구에서 4000만 가구 정도가 가스레인지를 사용하고 인덕션은 5% 정도라고 하는군요.
우리나라는 가스레인지 설치 가정이 압도적이긴 하지만, 다만 판매에선 인덕션 연간 판매량이 2021년부터 앞섰다고 합니다.
그리고 1925년이면 아궁이+온돌 문화였던 한반도를 생각하니 도저히 가스히터 사고가 어색해서 찾아봤는데요.
1785년 영국에서 천연가스를 사용해서 거리의 가로등으로 사용하기도 했고, 1816년 미국 볼티모어에선 천연가스를 사용해 가로등을 밝힌 최초의 미국 도시로 기록되어 있네요.
1885년 요리와 난방에 가스를 사용하는 버너가 발명됐고, 미국에선 1910년에 액화에 성공하면서 대도시 중심으로 가스 파이프라인을 설치해서 난방과 요리에 사용했다고 하네요.
● 존 도널드슨
1891년 2월 20일 미주리주 글래스고에서 태어나셨는데요.
미국 남북전쟁에서 남부군 vs 북부군 전투하면 펜실베이니아주 게티즈버그에서 단 3일간 양측 도합 15만 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던 게티즈버그 전투가 유명하기도 하고, 가장 먼저 떠오르긴 하지만 존 도널드슨의 고향 미주리주 글래스고에서도 전투도 있었죠.
미주리주 글래스고 전투 1864년 10월 15일
미주리주 웨스트포트 전투 1864년 10월 23일
노예제도가 폐지됐다 해도 흑인차별이 남아있던 시대이고 고향은 남북전쟁 격전지 미주리이다 보니 단군 할아버지의 부동산 사기에 의한 한반도 터 잡기(동서남북 이웃 복이 너무 없죠) 만큼이나 힘든 삶의 시작과 주변 환경이 기다리고 있었는데요.
동네 반경 120km 내에서 존 도널드슨이 태어나기 한달 전부터 흑인이 쿠 클럭스 클랜에 의해 살해당한 것을 포함해 성인이 되기 전까지 17명이 백인에 의해 살해당한 기록이 있습니다.
범인이 체포되어 밝혀진 기록만 이 정도이고, 1923년 봄엔 존 도널드슨의 아버지가 술에 취해 경찰과 실랑이 끝에 사망하기도 합니다.
아버지의 당시 직업은 채석장 노동자로 시작해서 관리자로 일하던 시기였고요.
취객이었다 해도 강력 범죄 현행범도 아니고 사망에 이르게 하는 대응이 가능한 시대였다니 그 시대의 인종차별을 어느 정도는 느끼게 하는 일 같습니다.
어릴 시절 항상 야구놀이를 했다고 하는데 미국에선 놀이 이름을 Two Old Cat이나 Cat Ball이라고 했더군요.
이게 어떤 식이었나 룰 같은 것을 찾아보니까 사람 사는덴 다 비슷하더군요.
동네마다 룰이 다르긴 했지만 저도 어릴 적에 형님이나 사촌동생하고 벽에 스트라이크 존 그려놓고 한 사람이 던지면 치고 타구가 어느 정도 정해놓은 라인을 넘으면 안타, 2루타, 홈런 이렇게 정해놓고 다시 타석에 서던 기억이 있는데 존 도널드슨의 놀이도 비슷한 방식이었습니다.
둘이서 하다 인원이 늘면 채워 넣고 동네 애들 다 모여서 인원 채워지면 그냥 야구처럼 하던 뭐 이런 비슷한 방식으로 놀던 생각이 납니다.
오징어 게임 시즌 1에서 우리 식의 놀이 이름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를 어떻게 영어 자막 처리할까 해서 제 나름으로 생각했던 것이
Mugunghwa kkochi piotseumnida, Mugunghwa flowers bloomed 이런 걸 생각해 봤는데 Red Light, Green Light처럼 방식은 조금씩 다를지라도 각국에서 부르던 놀이 이름이 있는 것처럼 역시 사람 사는 곳은 다 비슷비슷하네요.
초등학교 시절부터 어머니는 야구하는 것을 반대하고 물론 안식일에도 야구를 하지 못하게 했다고 하는데요.
어머니 본인이 감리교 신자였던 만큼 아들이 신학교에 입학해서 종교학을 전공하고 목사가 되기를 바랐는데 문제는 존 도널드슨의 야구 실력이 너무 뛰어났다는 점입니다.
학교 야구팀에서의 활약으로 팀을 도시 챔피언십으로 이끌기도 했는데, 하루는 경기장에 오신 어머니가 아들을 향한 관중들의 환호와 응원을 보고 아들의 지지자가 되었다고 합니다.
야구를 위해 태어나신 야구의(만을 위한) 달인 같다는 생각이 많이 드는 분이신데요.
먼저 이분이 거쳐간 팀이 정말 많습니다.
아버지 사망 이후 가장으로 생계를 책임져야 하는 위치에 있기도 했고, 실력이 너무 좋아 불러주는 곳에서 모두뛰셨다고 보면 되는데요. (모든 곳 상대할 수 있는 모든 팀과 경기를 한다는 모토)
실력과 그에 따른 인기로 인해 중부지역의 이름난 스타였고요.
1930년 미네소타주 세인트 클라우드에서 뛸 때는 월 750달러를 수령하던 시기이기도 했습니다. (1930년 메이저리그 최고 연봉자는 베이브 루스였고 금액은 8만 달러였습니다)
대공황의 여파가 한창이던 1930년 미국의 최저시급은 $0.25(백인 흑인 최저시급 차별도 당연히 있었습니다) 당시 5센트에 구매 가능했던 것이 커피 1잔, 콜라, 아이스크림콘 정도였네요.
존 도널드슨의 33년 선수 경력에서 (메이저리그와 수준 차이가 있다 해도) 그간 최종 승수는 147승으로 기록되어 있었다고 하는데요.
위의 다른 선수 이야에 나온 것처럼 2000년부터 메이저리그 주도하에 니그로리그에 대한 발굴 작업을 시작했다고 했잖아요.
그렇게 조사를 시작하니 승수+삼진 아웃이 점점 늘어나기 시작합니다.
200승, 300승, 그리고 더더...
그래서 2004년 미국 야구연구협회에서는 존 도널드슨을 자세히 알아보기 위한 연구 그룹 Donaldson Network를 만들게 되고요.
1908년부터 1940년까지 그의 발자취를 따라 전국 지역신문+흑인 신문들을 찾아내 발굴하기 시작했고, 보도된 718경기를 찾아내게 됩니다.
문제는 170경기는 승리투수 기록으로만 올라왔고, 경기에서 기록한 삼진 숫자는 보도 내용에 누락되어 있기 때문에 정확한 숫자를 알 수 없다는 점입니다.
405승 삼진 5,039개
413승 삼진 5,081개, 2006년까지의 조사 내용
420승 삼진 5,221개
이렇게 발굴된 자료들의 잠정? 통산 성적이 이렇게 됩니다.
424승 169패 15무, 삼진 5,221개, 평균자책점 1.37, 86 완봉, 296 완투, 노히트 노런 14번, 퍼펙트게임 2번, 1경기 25삼진 이상 11경기(25 연속 삼진 2경기 포함) 20삼진 이상 30경기, 15삼진 이상 109경기, 연장까지 던지며 기록한 30삼진 2경기, 타자 통산 타율은 1,800타수 이상에서 .334, 2루타 203개
이런 기록들을 모먼츠에서도 이야기해 주더군요.
또 다른 기가 막힌 일은 뛰고 싶은 이유가 가장 커서였겠지만 나이를 속이고 경기를 뛰기도 했습니다.
한 지역 신문에서 약력을 섞어 존 도널드슨의 경기 보도 내용에 나이가 39살이라 스피드는 떨어졌지만, 노련한 베테랑의 경험으로 타자를 충분히 속일 수 있었다는 내용도 있는데요.
출생 기록 같은 정부 기록물을 따라 역추적해 보니 실제 나이는 48세였다고 합니다.(전문 선수로 던진 마지막 경기는 1940년 House of David 팀과의 경기)
미국 야구연구협회에서 만든 연구그룹 The John Donaldson Network 소속으로 발굴 작업을 진행했던 피트 고튼이 엠엘비닷컴과 인터뷰한 내용이 있는데요. (존 도널드슨의 야구 경력과 삶이 소외 무시 차별된 것에 대한 아쉬움이 잔뜩 묻어납니다)
그가 말하길 "이름으로 검색을 해도 찾을 수 없고 먼저 검색되는 동명이인 작가나 체스 선수보다는 먼저 나타나야 하는 커리어라는 겁니다. 위대한 야구선수 사첼 페이지, 베이브 루스, 사이 영을 검색할 때 가장 먼저 연관검색으로 표시되어야 하는 커리어를 지닌 선수라는 겁니다"
13세 때 세미 프로팀을 상대로 18개의 삼진을 잡아냈고, 지금까지 찾은 683개의 다른 도시에서 플레이한 기록이 있다.
(찾아보니 미국령 괌이나 버진 아일랜드 같은 곳 말고 본토에만 인구 1만 이상의 도시가 4천 개가 넘네요)
그러면서 오늘날 아무도 그에 대해 많이 알지 못하는 이유는 그의 경력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기 때문일 뿐이었다.
1915년 경기당 평균 18개의 삼진을 기록했고, 시즌 500개의 삼진을 잡아낸 스타였고, Tennessee Rats라는 팀에서 1년 동안 44승 3패를 기록했다는 이야기를 하네요.
니그로 리그의 스타 선수들 영상이 많이 존재하진 않지만 피트 고튼이 속한 연구그룹에서 발굴한 영상이 있습니다. (이 영상이 모먼츠 스토리라인에서 여러 차례 반복되는 그 영상입니다)
촬영한 사람의 정보는 없지만 누군가 전설을 촬영하기 위해서라고 추정하는데요. 시기는 1925년의 미네소타에서 코닥 카메라로 촬영된 짧은 비디오 클립입니다. (영상을 보았던 현시대 스카우트 중엔 왼손잡이 밥 깁슨이라며 비교하기도 했다네요)
※ 아주 짧은 비디오 클립입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PSElVOJlLEs
마지막 공식 게임은 1940년(49세)이지만, 1949년 58세에 올드 타이머 멤버로 투구한 기록이 있고요. (위 신문 보도 내용)
그리고 니그로 리그의 선수들 이야기 중에 백인으로 자주 등장하고 있는 존 맥그로 감독과의 일화도 있습니다.
1910년~1920년 존 도널드슨 전성기 시절 플레이를 눈여겨보던 뉴욕 자이언츠(현 SF) 구단과 존 맥그로 감독이었다고 하는데요.
존 맥그로 감독은 도널드슨이 백인 선수였다면 그에게 5만 달러를 줄 것이라는 이야기입니다.(영입과 연봉을 위해)
미국 태생의 흑인 선수라서 메이저리그에 뛰게 할 수 없었기에 무례+이상한 제안을 받기도 하는데요.
쿠바에서 개명과 국적을 세탁하고 쿠바 리그에서 뛰다 메이저리그로 영입하겠다는 제안으로 1만 달러의 금액을 지급한다는 거래 내용이었는데요.
거절했던 이유를 설명한 내용은 존 도널드슨이 어떤 사람(신념)이라는 것을 잘 보여주는 사례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모먼츠에도 등장하는 나는 흑인이고 "내 피부색이 부끄럽지 않습니다."
내가 쿠바에 가서 내 이름을 바꾸고 쿠바인 신분으로 이 나라에 오면 받을 수 있는 큰 액수를 제안받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내 가족을 포기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내게 있어 어머니보다 더 사랑하는 여자는 없는데 합의 사항 중 하나는 다시는 어머니를 방문하거나 유색인종과 관계를 맺지 않는다는 것이었습니다.
나는 거절했습니다. 나는 도덕적으로나 육체적으로 깨끗합니다.
나는 교회에 가서 내 몫을 기부하는 사람이고, 몸과 마음을 깨끗하게 유지하는 사람이라며 거절했다는 후일담을 이야기하기도 했습니다.
선수 은퇴 후엔 특이하게 시카고 우체국에서도 근무했던 이력도 있었고요.
1949년부터 시카고 화이트삭스의 스카우트로 활동했고, 자신의 스카우트 경력과 관련된 프랭크 레인 단장이 1955년 9월 사임하고 10월 6일 세인트루이스 단장으로 옮기게 되는데요. 이때 스카우트를 그만두게 됩니다.
계약을 성사시켜 화이트삭스에 데뷔시킨 선수가 있기도 했지만, 윌리 메이스, 어니 뱅크스, 행크 애런 같은 선수들을 위한 보고서도 작성하고 추천하기도 했지만, 이렇게 좋은 선수들을 알아보지 못하는 구단과 일하고 싶지 않은 생각에 스카우트 직업과 구단에 환멸을 느꼈다고 하네요.
위에 먼저 등장했던 벅 오닐이 1955년 컵스 스카우트가 되고 1962년 흑인 최초의 메이저리그 코치였다면 존 도널드슨은 흑인 최초의(1949년) 메이저리그 스카우트였습니다.
노년엔 시카고 지역에서 젊은 선수들을 지도하며 지내시다 1970년 4월 14일 돌아가셨는데요.
술 담배를 하지 않으신 건 물론이고 주위 사람들이 욕하는 걸 보지 못한 또 다른 전설?도 남기셨고요.
더욱 놀라운 것은 돌아가시던 나이에도 선수 시절 체형이나 몸무게에서 큰 변화가 없으셨을 만큼 평생 자기 관리를 하셨다고 합니다.
선수 시절 식사 루틴을 지키던 이치로는 지금도 그런 루틴 속에 사는지 모르겠지만, 존 도널드슨의 삶이 새삼 대단하게 생각되는 대목입니다.
일리노이주 알십에 있는 버 오크 숲의 묘지에 안장되셨는데요.
놀랍게도 최고의 투수 중 한명 이신데 묘지 표지석조차 없이 숫자 아래에 안장되어 있었고요.
2004년 니그로 리그 야구선수 묘지 마커 프로젝트에서 비석을 설치해 기리고 있습니다.
발굴된 자료와 여론 때문인지 2005년 6월 11일 고향 미주리주 글래스고에서 존 도널드슨의 날이 지정되었고 그의 이름을 딴 야구장과 동상도 설치가 되어있습니다.
● 사첼 페이지
데뷔해서 은퇴했던 1965년까지의 기록이 지구상의 그 누구보다 많은 경기에서 던졌던 사첼 페이지, 이분도 힘든 시절+시기의 애달팠을 동네 앨라배마 모빌 출신이시죠.
어린 시절 성장 순으로 본인 모습을 회상+표현하신 게 "더러운 기저귀 차림에서, 너덜너덜했던 바지를 입었고, 조금 커서는 찢어진 셔츠를 입고, 신발? 그것은 다른 세상의 이야기였다"라고...
이분의 이름이 바뀐 것에 인터넷에도 많은 이야기들이 있는데요. (몇 가지 설이 있죠)
Leroy Robert Page → Leroy Robert Satchel Paige 사첼(Satchel)은 어느 설이 맞는지는 모르겠으나, 성(姓) 페이지가 바뀐 것은 본인 이야기에 따르면 어머니가 바꿔주었다고 합니다. (Page → Paige, 이유는 너무 책의 페이지 같아서)
사첼이란 이름에 등장하는 이야기엔 가방 관련 일화와 도둑질 이야기도 있고 한데 도둑질은(절도) 사실이더군요. (Satchel, 가방, 멜빵이 달린 가장, 사첼백, Satchel bag, 학생 가방, 손가방)
어려서도 물론 야구를 했지만 정식 선수가 되어 던진 것은 개혁 학교에 있던 12살 시절이라고 합니다. 영어로 Reform school이라 하고 (한국어로는 개혁 학교 정도) 1830년에서 1900년대 초반까지 운영되었던 일종의 청소년을 위한 형벌 기관(학교)이었던 셈인데요.
영국의 시스템을 사회 시스템에 접목 발전시켰던 미국이라 영국처럼 청소년 범죄자도 처음엔 성인 범죄자와 동일한 취급을 했는데 이로 인해 발생한 문제들을 나중에야 깨닫고 생긴 제도라고 합니다.
성인 수감자들에 의해 발생하는 성 착취 문제, 중범죄자에게 발전된 범죄 방법을 교육받고 청소년들이 범죄에 이용되어 교화+범죄 예방+억지력은커녕 처음 수감 이후 더 범죄율이 올라가는 문제로 Reform school이 등장했다고 합니다. (우리 식으로 따지면 소년원이 아닌 촉법소년을 위한 제도 정도)
미국에서 개혁 학교는 1854년 범죄로 유죄 판결을 받은 청소년을 위해 설립했고 산업학교는 같은 해 방랑자와 보호가 필요한 어린이를 위해 설립되었고 교정과 교육을 담당하며 2개의 학교 시스템이 병합된 것은 1932년이라고 합니다.
어린 시절 수많은 절도를 저질렀던 사첼 페이지였기에 개혁 학교에 몸담게 됐고, 이때 만났던 Edward Byrd 코치에게 야구 기본기를 배우게 되고, 이 코치가 페이지의 키와 신체능력을 이용한 효과적인 투구 방법을 가르쳐 줬고, 발을 높이 차올리는 투구 동작도 이 시기에 만들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본인은 이 시절이 집 걱정+배고픔을 떠나 가장 좋아하는 야구를 할 수 있는 시간이 많아져 좋았다고 합니다.
사첼 페이지가 선수 시절 플레이 스타일을 배우거나 멘토 역할을 해줬던 선수는 바로 위에 있는 존 도널드슨이었다고 하는데요.
어디까지 믿어야 할지 모르겠지만 또 다른 위대한 선수 존 도널드슨도 비슷한 이야기들이 많은데 존 도널드슨의 신화 같은 이야기는 사첼 페이지 이야기 보다 많게는 30년을 거슬러 올라가는 시기거든요.
그래서 제 생각에는 위대했던 선수들의 퍼포먼스에 많은 팬들이 그럴 수도 있었겠지 하는 경외심 같은 것이 작용해서(검증도 할 수 없기에) 구전으로 굳어진 이야기가 아닐까 하는 생각도 해 봅니다. (경기에서 어느 정도 비슷한 성적을 거두니 그것에 더 살이 붙여진 것이 아닌가 하는)
※ 사첼 페이지의 믿거나 말거나...
50타자 연속 삼진
수비수들을 모두 덕아웃으로 보내 놓고 무결점 이닝 투구 9구 3삼진 (이야기의 모먼츠가 등장합니다. 동료들 내야로 모두 불러 모으고 삼진 3개 잡기)
※ 존 도널드슨의 믿거나 말거나...
패스트볼로 포구했던 포수의 손을 부러뜨렸다. (이 이야기도 모먼츠에서 연습투구하는 장면에서 부러뜨리지는 않지만 등장)
내야수에게 앉아 있으라고 하고 연속타자 삼진으로 이닝을 정리했다.
만루를 일부러 채우고 3타자 연속 삼진으로 경기를 마쳤다.
아웃카운트를 삼진으로 잡는다고 야수들을 경기에서(운동장) 제외했다. (이 이야기도 모먼츠에 등장합니다. 들어가라고 하니 들어가는 동료들의 컷신이 나오고 나중엔 내야가 고속도로 하이패스가 됩니다) 쇼다운 제목이 얼티메이트 쇼맨입니다.ㅎㅎ
작년 5월 5일 목요일 미국 뉴욕주 서퍽 카운티의 스포츠 명예의 전당에서 사첼 페이지 관련 작은 행사가 있었습니다.
위대한 선수 사첼 페이지의 기록에서 자신들의 카운티와 관련한 기록을 발견했기 때문인데요.
카운티 연고의 리버헤드 팔콘의 홈경기장 위브차 스타디움에서 1950년 7월 21일 필라델피아 스타즈에 소속된 사첼 페이지가 투구했기 때문이기도 하고, 이 경기엔 팔콘의 배트보이를 하던 10살 소년이 관중석에서 사첼 페이지를 상대하던 아버지를 응원했던 인연으로 시작해서 훗날 시기는 다르지만 사첼 페이지와(1971년) 10살 꼬마는(1989년) 명예의 전당 멤버가 됩니다.
사첼 페이지는 3이닝, 5삼진, 무볼넷, 무실점, 구장 최다 관중 6,155명을 기록했고, 스타즈의 10:5승리, 3이닝, 5삼진, 무볼넷, 무실점
10살 꼬마는 마이크 야스트렘스키의 할아버지 칼 야스트렘스키였고 사첼 페이지를 상대했던 선수는 증조부 칼 야스트렘스키 시니어였습니다.
칼 야스트렘스키 시니어 (증조부, 세미프로)
칼 야스트렘스키 주니어 (할아버지, BOS, "HOF")
칼 마이클 야스트렘스키 (아버지, 마이너 리그)
마이크 야스트렘스키 (SF)
야구 집안 야스트렘스키家죠. 다만 세대를 건너뛰며 메이저리그에 데뷔하니 다음 메이저리거는 마이크 야스트렘스키의 손자가 되려나요?
마이크 야스트렘스키도 할아버지의 팀 보스턴에 지명을 받긴 했었는데요. 너무 지명 순위가 낮아 프로행을 거부하고 명문 밴더빌트 대학 입학을 선택했었죠.
2009년 보스턴 36라운드 지명
2012년 시애틀 30라운드 지명
2013년 볼티모어 14라운드 지명, 싸인
2019년 3월 23일 샌프란시스코로 트레이드, 2019년 5월 25일 데뷔
마이크 야스트렘스키가 데뷔하고 레전드의 손자로 기사도 나오고 하다 자이언츠가 펜웨이파크 원정 3연전 일정이 있었습니다. (2019년 9월 17~19일, 화~목요일) 기사와 함께 잔잔한 재미도 있던 기억이 있는데요.
브루스 보치 감독이 우익수&중견수로 이전 시리즈에 내보냈던 마이크 야스트렘스키를 9월 17일 첫날엔 할아버지가 펜웨이 파크에서 뛰던 포지션 좌익수에 기용하고 1번 타자로 라인업을 짠 센스도 보여줬었죠. (18일은 다시 우익수로)
열정과 쾌활의 표본이었던 사첼 페이지의 말년은 건강 문제가 있으셨는데요.
주위에서 투병 중인 사첼 페이지의 쾌유를 바라는 마음에서 기존에 있던 가톨릭청년협회 야구장을 개보수하여 사첼 페이지 스타디움으로 바꾼 행사가 1982년 6월 5일 있었는데 당시 튜브를 끼고 한 손엔 야구공을 쥔 체 등장해서 기념사를 하신 모습이 공식 석상에서의 마지막 모습이셨습니다.
행사 3일 뒤 6월 7~8일 지역에 사이클론이 덮쳐 가로수가 쓰러지고 정전도 있던 날이었는데, 8일 오전 오한 증세가 있던 사첼 페이지는 의식을 잃게 되고요.
사이클론 영향으로 인한 도로 상태 때문에 구급차는 좀 늦게 도착하게 되고, 간호사 보조 경력으로 배운 부인의 CPR도 있었지만 구급차에서 병원으로 향하던 중에 돌아가시고 응급실에 도착한 오후 1시 15분에 공식 사망 선고를 받게 됩니다. (심장마비나 심혈관질환으로 보통 나와있기에 자세히 써봤습니다)
인터넷에 사첼 페이지의 생애에 대해 정리된 글들이 아주 많습니다. 궁금하신 분들은 찾아보셔도 좋은+재미난 이야기들이니 많아 괜찮을 것 같다 생각합니다.
● 재키 로빈슨
● 데릭 지터
레딧에 카드 내달라는 글+댓글 자주 봤는데 계약까지 했네요.
지터 하면 시그니처 송구 동작 그리고 점핑 스로우가 먼저 생각납니다.
인기도 많아 피규어+버블헤드도 수없이 많이 나오기도 했는데 3천 안타를 홈런으로 기록한 스타성, 점핑 스로우에 야구 실력뿐만 아니라 저는 언젠가 포스트시즌 경기였던 걸로 기억하는데 중계플레이로 포수에게 토스했는데 다른 선수가 했어도 광란의 도가니였을 텐데 뉴욕 팀의 지터가 해서 더 난리였던 기억이 있는데, 지터는 그런 순간 판단이나 야구 센스가 대단했었죠.
내야에서 중계플레이로 포사다에게 글러브 토스해서 아웃시키던 장면들도 생각나고 하네요.
영화계에는 데이트 상대가 25세가 넘으면 상대하지 않으며 나이야 나를 잡을 테면 잡아봐 하는 디카프리오가 있다면...
야구계에는 지터가 있었죠.
결혼 전에 염문설 돌던 셀럽이나 일반인 말고도 공개 데이트 목격한 셀럽들의 면면도 대단했던 기억이 나네요.
그리고 지터가 뛰었던 뉴욕 양키스가 나온 김에 이야기해 보자면, 뉴욕의 예전 지명이 뉴암스테르담 이라고 불리던 시절이 있었죠.
원주민을 제외하고 북아메리카 대륙으로 넘어와 개척한 사람들이 1624년의 네덜란드 사람들이었는데요.
북아메리카 식민지 개척을 하면서 뉴네덜란드라고 칭했고 고국의 수도 이름을 따서 뉴욕 일대의 정착촌엔 뉴암스테르담이라는 이름을 붙였습니다.
그러다 19세기까지 지구 최대의 반성 없는 깡패국가 영국이 해상무역권과 북아메리카를 두고 개입하게 되는데 여러 번의 전투 끝에 영국 해군 함대가 항복을 받아내게 됩니다. 그때가 1664년 9월 8일이었고 당시 영국 왕이 찰스 2세였죠 (1630~1685년 2월 6일)
영국 왕실은 다음 왕위 계승자(차남) 에겐 요크 공작(Duke of York)이라는 작위를 부여했는데, 이 개척을 진두지휘한 인물이 형 찰스 2세가 사망한 후부터 영국 왕이 되는 제임스 2세(재위 기간 1685년 2월 6~1688년 12월 11일)입니다.
그렇게 요크 공작의 진두지휘 아래 점령한 뉴암스테르담을 암스테르담 이름을 빼버리고 요크 공작을 기리기 위해 뉴+요크(York) 뉴욕이라는 지금의 지명이 됩니다.
그렇게 뉴욕엔 이민자들이 더 모여들게 되었고요.
양키스라는 이름의 유례는 맨 먼저 터를 잡았던 네덜란드인+네덜란드 이민자들 중에 가장 많고 흔한 이름이 얀 카스(Jan Kaas)였다고 하죠.
당시에도 다민족 국가이던 미국에선 저놈 저거+저 사람 네덜란드 사람이야! 뭐 이런 뉘앙스에서 시작된 것이 얀 카스의 미국식 발음이 되어 양키스가 됩니다. (그러니까 우리 사회에서 흔히 부르는 짱+깨, 쪽to the바to the리 뭐 이런 식이었던 셈이라 보면 되겠죠)
우리 축구 국가대표가 경기를 하면 상대방에선(비 아시아 국가) 유니폼에 성(姓)만 붙이고 뛸 때, 코리아는 왜 수비수가 전부 킴(Kim)이냐? 왜 이렇게 11명 중에 킴(Kim)이 많냐는 우스갯소리도 있었죠.
근데 이게 웃긴 것이 지금이야 한글 표기가 정착되고 해서 괜찮지만 90년대 후반이나 2000년대 초반만 해도 네덜란드 선수들 표기나 발음이 활자매체+영상매체별로 달랐던 기억이 있습니다.
그래서 저 같은 사람들은 네덜란드에서 축구 잘하는 놈들은 죄다 반氏구먼 하며 웃기도 했습니다.(축구 중계에서도 반 봄멜 골!! 반니스텔루이 골!! 이렇게 부르던 기억도 있습니다, 선수 소개 때는 제외하고)
생각나는 네덜란드 축구 잘하고 코치&감독 잘하는 반氏.
마르크 반 봄멜 Mark Van Bommel
로빈 판 페르시 Robin Van Persie
뤼트 판 니스텔로이 Ruud Van Nistelrooy
버질 반 다이크 Virgil Van Dijk
조반니 크리스티안 판 브롱크호르스트 Giovanni Christiaan Van Bronckhors
라파엘 판 데르 파르트 Rafael Van der Vaart
마르코 판 바스턴 Marco Van Basten
루이 판 할 Louis Van Gaal
코리아 반기문 Ban Ki-moon
다시 뉴욕 양키스로 돌아와서, 처음엔 그냥 뉴욕이라고만 부르기도 했고, 첫 팀 이름이(지역명 제외하고) 뉴욕 하이랜더스를 사용했습니다.(여러 이유가 결합+작용)
당시 양키스가 있던 맨해튼 최북단의 위치가 고지대여서 하이랜더스로 불리다가 양키스의 2대 구단주가 자금 문제로 투자를 받았는데, 이때 자금을 투자하고 나중엔 지분 50%를 요구하기도 했던 "조셉 고든"이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1대 구단주, 1901~1902년, John McGrawdagger
2대 구단주, 1903~1915년, William S. Devery
조셉 고든이라는 사람이 석탄 장사를 기반으로 해서 이름이 알려진 부호 사업가였고 해서 사람들이 뉴욕 팀을 지칭하거나 경기 결과를 이야기할 때면 고든의 하이랜더스가(Gordon's Highlanders) 오늘 졌네, 이겼네 하며 불리기도 했는데, 아뿔싸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 일이 생길 수도 있었기에 1913년부터는 뉴욕 양키스라는 이름을 사용하게 되는데요.
영국 보병 연대에 1881년 창설된 고든 하이랜더스(Gordon Highlanders)라는 연대가 있었습니다.
1882년 이집트에서 벌어진 전투부터 1,2차 세계대전도 다 참전한 부대이고, 대한민국 육군 부대의 대대적 개편이(사단 통폐합) 있는 것처럼 고든 하이랜더스 연대도 1994년 편제 개편으로 사라지게 됩니다. (부대 명칭은 당시 지휘관 찰스 고든 소장의 이름에서 명명)
뭐가 문제냐고 하실 수도 있겠지만, 한반도 DNA에 기본 사양으로 탑재가 되는 반일 정서+감정이 있죠.(간혹 돌연변이로 3.1절에 일장기를 거는 돌연변이가 생기기도 하지만...)
당시 뉴욕의 시간에서 50~70년만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면 실제 있었던 일들을 모티브로 만든 영화 갱스 오브 뉴욕이 아주 좋은 교보재인데요.
영국에서 넘어온 이민자+이민자의 자녀로 미국에서 태어난 정통 아메리칸이 주축이 된 집단+갱+정치세력과, 영국에 당한 기나긴 핍박의 역사가 있는 아일랜드계 미국 이민자의 역사가 있는데, 영국 보병연대의 이름을 쓰는 연고팀은 용납이 될 수가 없겠죠.
티켓 구매하는 영향력을 무시할 수 없는 이유도 존재했기에 하이랜더스 대신 사용하기 시작한 것이 지금의 양키스라는 설도 있습니다.
영화는 고증을 기반으로 영화적 시나리오를 더해 잘 만든 영화인데요.
당시 아일랜드계 최대 갱단 이름이 데드 래빗이었는데 영화에서도 죽은 토기를 이용한 설정들을 사용하기도 하고, 뉴욕 지명의 역사가 네덜란드에서 시작한 것을 보여주려는 의도였는지 영화에서 디카프리오의 이름은 "암스테르담 발론"입니다.
그리고 1980~1990년대도 소비계층으로 살아온 분들은 기억하실 텐데 예전에 니코보코(NICO-BOCO)라는 브랜드가 있었죠. (말장난으로 니코복코 라고 부르기도) 이 말의 어원을 따라 예전 뉴욕으로 가면 니커보커(Knickerbocker)라는 바지가 있는데요.
바지는 북아메리카 대륙으로 넘어온 네덜란드인들의 전통복장이 시간의 흐름+현지화가 되어 정착된 복장이죠.
니커보커스(Knickerbockers)의 줄임말이 닉스(Knicks)이고 쉽게 말하면 네덜란드인이란 뜻도 됩니다.
1800년대 초반에 발표된 워싱턴 어빙의 소설에서도 디드리히 니커보커(Diedrich Knickerbocker)라는 인물이 등장하는데, 네덜란드계 뉴욕 귀족이며, 그의 생활 묘사에는 긴 줄기 파이프나 특정 유형의 밑단이 헐렁한 바지를 입은 패션이 등장을 하는데 이런 네덜란드계 미국인을 축약형 단어로 닉스로 칭하니 짧은 역사는 결코 아니라 생각합니다.
이 줄임말을 팀 이름으로 쓰는 NBA 팀이 뉴욕 닉스가 있고, 니커보커 스타일은 시대의 의상뿐만이 아니라 1900년대 초중반까지도 야구 유니폼 하의에도 적용이 됐었습니다.
스포츠 팀명으로 넘어가면 재밌는 게 많은데요.
지금은 질레트 스타디움을 사용하는 NFL 뉴잉글랜드도 1960년대에는 보스턴과 펜웨이 파크를 함께 사용하던 시절이 있었는데요.
뉴잉글랜드 패트리어츠도 팀명이 재미있죠. 보스턴이 미국 독립운동의 중심지라는 것에 착안해 팀 이름을 애국자를 뜻하는 이름으로 지었고요.
우리는 모든 프로스포츠팀의 태생이 기업 중심으로 시작되어 기업명이 주가 되는데, 외국의 경우는 지역명+의미가 부여되죠. 부러우면서도 아쉬운 부분이라 생각합니다.
양키스로 시작은 했지만 재미있는 팀명이 역사가 긴 메이저리그보다 짧은 NBA에 많은데 아무래도 시대인식의 차이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기억하는 NBA 팀명 몇 개만 뽑아보자면)
시카고 불스(창단 1966년)
90년대 우주최강의 팀 불스, 말과 마차가 사라지고 철도가 들어서면서부터 시카고는 미대륙의 주요 교차점 역할을 한다고 하는데요. (지금도 화물열차 25%, 복합 운송 열차 50%의 화물 허브)
먹고살려면 필요한 영양요소 고기, 우리나라로 치면 마장동 같은 포지션이 예전 시카고에 있었다고 하죠.
유니언 스톡 야드라고 1865년부터 100년 이상을 운영하다 1971년 7월 30일 문을 닫았는데 이곳에 전국 목장의 소들을 모아서 판매도 하고 도축 후에 가공포장해서 전국으로 뿌리는 역할을 했다고 하네요.
이런 시설이 있기도 했고 소의 힘을 표현+상징하려 불스라는 팀명을 정했습니다.
지금은 라틴아메리카나 아시아계도 많아 다 버리지는 않는다지만 예전에 고기 빼고 나머지 부위를 버리는 걸 보면 한반도의 소에 대한 식문화가 참 좋네요. (머리, 꼬리, 족, 뼈, 피는 선지로 버릴 것이 없네)
나성 레이커스
암흑의 90년대를 보내고 2000년대 각성한 나성 레이커스
창단 당시 연고지는 디트로이트였지만 1960년 나성으로 넘어오기 전, 13년은 미네소타州에 기반을 둔 미니애폴리스 레이커스였죠.
미네소타주의 별명이자 슬로건이 호수가 많아 Land of 10,000 Lakes죠.
州에 작고 큰 모든 호수가 1만 4천 개가 넘고, 기억이 확실하진 않지만 배 타고 물놀이할 수 있는 호수도 200개였는지 2000개였는지 확실하지 않지만 많긴 많다고 합니다. 그래서 호숫가에 사는 사람들, 호수를 끼고 사는 사람들을 뜻하는 레이커스로 지었다고 합니다.
필라델피아 세븐티식서스
1963년 연고 이전을 하면서 예전 수도의 자부심과 1776년 7월 4일 독립선언서 서명을 펜실베니아주 의회에서 한 것을 기념해 팀명을 정했죠.
클리블랜드는 캐벌리어스 (창단 1970년)
창단하면서 여러 이름을 후보에 두고 팬들의 의견을 수렴해서 정했다고 하죠.
기마병 기사를 뜻하는 캐벌리어스(Cavaliers)로 정했는데, 인디언과 기병대의 전투?(학살)도 있던 지역이라 역경에 상관없이 결코 항복하지 않는 대담하고 두려움이 없는 사람들이라는 뜻이 채택되어 투표에 올라왔는데, 나이트(knight)도 후보군에 있었지만 나이트는 계층적 의미가 강해서 단어의 상징적 의미만 강한 캐벌리어스를 채택했다고 합니다.
샌안토니오 스퍼스 (창단 1967년)
지역이 지역인지라 말을 빨리 달리게 할 때, 사용하는 박차(스퍼스, Spurs)를 팀 내에서 투표로 정했다고 하는데, 창단 당시는 댈러스와 텍사스를 연고지로 사용했고 7년간의 이름은 지역명+채퍼럴스였는데, 새로 인수하고 샌안토니오 연고 이전한 구단주님이 레드 맥콤스라고 자동차 판매 대리점 체인으로(Red McCombs Automotive Group) 시작해서 포브스 선정 400대 부자에 등극했던 회장님인데 고향이 텍사스주 디킨스 카운티의 "스퍼"라는 마을입니다.
회장님 왈: 자 오늘 전체 회식하지 or 오늘 점심은 내가 내지 하고 중식당을 데리고 가서 제일 먼저 주문을 하며 외친다.
나는 짜장면, 아 나는 짜장면이 제일 좋아!!! (회장님은 NBA 덴버 너기츠의 지분과 다른 아마추어 풋볼팀도 소유했었습니다)
시애틀 슈퍼소닉스
썬더의 용사들이 오클라호마시티로 떠나버려 사라진 시애틀 슈퍼소닉스...
1967년 창단하면서 팀 이름을 공모하고 정했는데 항공기 회사 보잉의 본사는 시카고에 있지만 워싱턴주 시애틀의 윗동네 머킬티오와 에버렛 사이에 보잉 공장이 위치했고, 당시 보잉에서 제작하던 비행기 프로젝트가 Supersonic Transport여서 프로젝트 이름에서 영감을 받아 제안한 슈퍼소닉스를 선택했었다고 합니다.
보스턴 셀틱스
보스턴이 시대를 올라가면 켈트족 출신의 켈트 국가 이민자들이 많다고 하죠(아일랜드, 스코틀랜드, 웨일스, 북아일랜드) 그래서 켈트족을 일컫는 셀틱스(Celtics)로 이름을 정했고, 메이저리그 보스턴 레드삭스도 시범경기 기간에 찾아오는 세인트 패트릭 데이(3월 17일)가 되면 녹색 유니폼 등을 착용하죠. 스코티시 프리미어십(스코틀랜드) 셀틱 FC 이름도 같은 의미입니다.
휴스턴 로키츠
1967년 창단된 휴스턴은 첫 5년은 샌디에이고가 연고지였죠.
당시 이름도 샌디에이고 로키츠였는데 샌디에이고엔 1963년 개장한 샌디에이고 항공 우주 박물관과 1922년부터 있던 해군기지, 그리고 미사일 부품 제조의 방위산업이 주의 큰 수입원이었기에 사용했다고 하는데 이사를 가서는 더 잘 어울리는 이름이 되었죠.
유타 재즈
유타 재즈는 1974년 뉴올리언스를 연고로 창단했었죠.
재즈의 고향 뉴올리언스에 맞게 팀명도 뉴올리언스 재즈였는데 1979년 솔트레이크 시티가 있는 유타주 연고 이전을 하는데 유타하면 떠오르는 것이 개인적으로 예전 핵실험 장소, 서부영화 촬영 장소, 그리고 몰몬교인데 20대를 방탕하게 살았던 제 기준으론 지킬 수 없었던 교리투성이네요.
전 세계적으로 몰몬교 신자가 1,600만 정도 된다 하고, 유타주 인구가 330만명 정도 되는데 60%가 넘는 인구가 몰몬교 신자라고 하죠.
미국에서 몰몬교는 처음에 일리노이주가 기반이었는데 몰몬교의 선지자이자 설립자 조셉 스미스가 살해당하고 이후 핍박과 종교 차별을 피해 겨울에 도망치듯 새로운 터전을 찾기 위해 로키산맥을 넘어 정착한 곳이 유타라고 합니다.
넷플릭스 나는 신이다를 보고 종교에 관심은 더 없지만 영화나 드라마를 보다 보면 몰몬교에 대해 종종 나오죠.
최근엔 디즈니+에 있는 7부작 천국의 깃발 아래가 1984년 7월 24일 유타주 솔트레이크 밸리에서 일어난 실화를 기반으로 제작된 드라마입니다.
종교적 열정이 극단주의로 변질되는 과정들을 잘 보여줍니다.
뉴올리언스 펠리컨스
유타로 떠나고 나서 프로 농구팀이 팀이 없다가 재 유치를 했고, 그 성과로 펠리컨스가 2002년에 창단했죠. (대한민국, 짝짝짝 짝짝)
처음엔 샬럿도 아닌 팀이 호네츠란 이름을 사용하다 2013년부터 펠리컨스라는 팀명으로 정착했는데 루이지애나주 지정 공식 새가 갈색 펠리컨이라고 하죠.
구단주가 뉴올리언스는 말벌하고 (호네츠, Hornets) 연관이 없기 때문에 지역과 관련되고 지역민들에게 더 나은 유대 관계를 형성하기 위해 뉴올리언스 펠리컨스로 팀명을 바꿨고 지금에 이르고 있습니다.
밥캣츠를 쓰던 샬럿이 창단 당시의 이름 샬럿 호네츠로 2014년부터 돌아왔던 기억이 있네요.
샬럿 호네츠, 1988~2002년
샬럿 밥캣츠, 2004~2014년
샬럿 호네츠, 2014~
● 칠리 데이비스
여러 팀에서 코치 경력이 있어 화면에서 종종 만나볼 수 있었던 칠리 데이비스였죠.
흔치 않은 이력의 소유자이기도 하고요. (자메이카 출신의 첫 번째 메이저리거)
자메이카 면적이 경상남도 크기 정도 되고, 인구가 300만 명이 안 되는 국가라서 야구선수 배출이 힘든 점도 있겠지만 300년 넘게 영국 식민 지배받다가 1962년 독립하게 되죠.
영국을 상징하는 스포츠 종목으로 축구를 생각하실 수도 있지만 16세기 영국 남부에서 시작됐다는 크리켓의 역사+인기도 빼놓을 수 없죠.
영국의 식민 지배를 받았던 인도에서도 크리켓 인기가 있고, 영국 영연방으로 시작한 호주에서의 크리켓 인기처럼 말이죠.
자메이카 출신 4명의 메이저리거들도 야구를 시작한 것은 미국에 건너와서였고, 자메이카에서 처음 야구 경기가 열린 것은 1905년 미국 해군이었고 놀랍게도 야구협회도 있습니다.
자메이카 출신 메이저리거, 대한민국 태생의 메이저리거도 26명이나 되는군요. (큰 활약은 없었다 해도)
칠리 데이비스의 어머니는 치과에서 일하셨는데요. 일하던 병원 치과의사가 미국에 치과를 개원하게 되면서 칠리 데이비스 가족의 미국 이민생활도 시작되었는데 이때 나이가 10살이었습니다.
자메이카 출신답게 야구에 대해 들어본 적도 없고 해본 적도 없었고, 당연히 베이브 루스나 윌리 메이스, 행크 애런 같은 분들이 누군지 몰랐다고 합니다. 그랬던 소년 시절 야구 경기를 처음 보게 됐는데 딱 이랬다고 하네요. (와! 저거 하고 싶다)
고교 시절 야수가 아닌 주포지션이 포수였고, 1977년 6월 드래프트에서 샌프란시스코 11라운드 지명을 받고 프로생활을 시작했는데요.
자이언츠 교육 리그에서 처음으로 스위치히터로 전환했고 더블-A 시절까지는 포수+야수 멀티 포지션을 뛰긴 했지만 이후엔 포수 포지션을 내려놓고 야수로 정착하게 됩니다.
프로에 와서 시작한 스위치히터였다지만, 착실하게 마일리지도 쌓아 올렸는데요. 물론 은퇴 후에 등장한 여러 후배들에게 추월 당하긴 했지만 지금도 스위치히터 홈런 순위에서 역대 7위입니다.
개인 수상내역은 없는 커리어였지만 만져보지도 못하고 은퇴하는 수많은 선수들도 있는데 칠리 데이비스는 챔피언 반지가 3개나 됩니다.
미국도 서울 아파트값 부럽지 않군요. 이 집이 2000년에 칠리 데이비스가 신축해서 들어간 집인데요.
2014년에 495만 달러에 팔았고 작년 10월에 950만 달러 매물로 올라왔던데 지금은 100만 달러나 할인해서 현재 850만 달러에 새 주인을 기다리고 있네요.
미국에 집하나 구매하실 분들은 플렉스 하시고요.(위치는 애리조나 파라다이스 밸리에 있고 대지면적 264평에 침실 5개 욕실 6개입니다 더쇼 유저는 중개 수수료 싸게 모실게요 연락 주세요!
● 새미 소사
지금은 풀네임이 "사무엘 페랄타 소사"이지만 어려서의 성씨(姓氏)는 소사가 아닌 몬테로였습니다.
새미 소사가 6살이던 1974년 사탕수수 농장에서 일하시던 아버지가 7남매를 두고 뇌출혈로 돌아가시게 되고 어머니가 결혼 이전 성씨(姓氏)였던 소사를 사용하면서 아들도 지금의 새미 소사가 되었고요. 풀네임 중에 사무엘이라는 이름은 기독교 신자인 외할머니가 붙여준 이름입니다.
먹고사는 문제가 가장 큰 걱정이던 가난한 가정환경이라 친형을 따라 세차와 구두닦이 일을 해서 생계를 돕고, 13살 무렵엔 형이 구두닦이 점포를 내고 함께 가계를 꾸리던 시기에 은인을 만나게 되는데요.
도미니카 공화국에서 신발 제조 공장을 운영하던 미국인 사업가를 만나게 됩니다.
후견인+양아버지 같은 관계가 되고 그때 자전거와 글러브를 선물 받게 되는데 인생에서의 첫 야구 글러브였다고 합니다.
야구 글러브도 선물 받았지만 새미 소사의 어릴 시절 장래희망은 야구선수가 아닌 권투선수 복서였습니다.
진지하게 복서를 꿈꾸며 훈련했지만 어머니의 반대에 포기하게 되고요.
지금도 도미니카 공화국에서 가난 탈출을 꿈꾸는 청소년이 메이저리거에 도전하듯 국민적 스포츠 야구선수의 길에 들어서게 됩니다.
14살 시절부터 전문 야구선수가 되기 위해 제일 먼저 선택한 일은 학교를 그만둔 것이었고요. 이후 실제 가능성을 보았던지 메이저리그 팀과 계약을 맺게 되는데 곧 미국에서 계약 무효+불가 통보를 받게 됩니다.(팀은 필리스였고, 불발 사유는 새미 소사의 나이가 16세도 아닌 15세 시절이었습니다)
1985년 여러 팀들의 미지근한 입질 속에서 지내다 마침내 3천5백 달러에 텍사스와 계약을(1985년 7월 30일) 맺고 미국 야구에 진출하게 됩니다.
그때 새미 소사를 발굴해 계약을 맺은 스카우트는 훗날 몬트리올과 메츠에서 단장이 되는 오마르 미나야입니다. (네 자주 까이던 그 미나야 단장입니다)
오마르 미나야는 히스패닉으로 단장에 오른 최초의 인물인데요. 작년엔 메이저리그 사무국의 스카우트 담당 컨설턴트로 일하더니 올해는 양키스 프런트에 선임 자문으로 영입되었던데 인기 좋군요.
1986년 (17살) 교육리그를 시작으로 미국에서 프로 생활을 시작했는데요.
은퇴시기의 프로필이나 영상+사진 보면 거포 이미지가 있지만 루키 시절의 모습은 리키 핸더슨 같은 호타준족의 모습이죠.
당시엔 힘보다 스피드를 강점으로 하는 야구를 했는데요. (1986년 홈런 4개, 도루 11개)
메이저리그 시절 재활경기를 위해 가끔 뛰었던 마이너리그 기록 빼고 1986년 교육리그부터 1989년 트리플-A 시절, 4년간 410경기 출전, 홈런은 32개이지만 도루는 98개나 됩니다. (메이저리그 통산 홈런은 609개, 통산 도루 234개)
1989년 새미 소사의 텍사스 레인저스 마이너 시절 의지하고 지내던 베프이면서 경쟁자이기도 했던 또 다른 90년대의 강타자 후안 곤잘레스가 있었는데 소사와 곤잘레스는 텍사스 유망주 1~2위로 평가받던 시기였고 새미 소사가 3개월 먼저 메이저리그 맛을 보기 위해 더블-A에서 올라와 데뷔하게 됩니다.(1989년 6월 16일)
그리고 5일 후인 펜웨이 파크에서 훗날 "좋은 건 나눠먹는" 사이가 되는 선수에게 데뷔 첫 홈런을 기록하게 됩니다. (1989년 6월 21일, 1회초 삼진, 5회초 그린몬스터를 넘기는 좌월 솔로) 받아라 좌월 로켓 홈런
데뷔하고 바로 다음 달 트레이드 데드라인을 앞두고(1989 년 7월 29일) 화이트삭스로 트레이드 되는데 상대 선수 중에 더쇼 게임에서 카드로 만나볼 수 있는 해롤드 베인스가 있었고요.
시카고 화이트삭스에서도 포텐은 터지지 않고 1992년 3월 30일 새미 소사하면 제일 먼저 연상되는 컵스로 트레이드 되게 됩니다.
1992년 홈런 8개였던 소사는 1993년부터는 3~4월 만개하는 벚꽃처럼 됩니다.
컵스 초창기 시절을 합쳐 거쳐온 모든 팀들은 거포 새미 소사가 아닌 빠른 발 리키 핸더슨과 같은 기용을 했습니다.
1992년에도 테이블세터에 자주 기용이 되었고요.
그리고 1992년까지 6년간 리글리 필드 우익수는 컵스 소속으로 우익수 골드글러브 2회와 리그 MVP까지 수상한 역시 게임에 카드가 존재하는 호크 "안드레 도슨" 형님이 버티고 계셔서 새미 소사가 도저히 비비고 들어갈 여지가 없었는데 안드레 도슨이 FA로 보스턴과 계약을 하고 떠나버려 중견수를 벗어나 수비에 나서면 그나마 편안했던 우익수로 포지션을 옮기게 되고 중심타선에 배치가 되는 시기이기도 했습니다.
1993년 역시나 더쇼 게임에 카드가 존재하는 위대한 "빌리 윌리엄스" 형님이 컵스 타격 코치로 있었고요.
빌리 윌리엄스의 도움으로 새미 소사가 타격에 1차로 눈을 뜬 시기이기도 합니다. 1993년 홈런 33개, 도루 36개로 30-30달성(컵스 구단 최초) 역대 순위로는 10번째 기록입니다.
그리고 소사 맥과이어의 세기의 홈런 레이스를 앞둔 1997년 컵스 타격코치가 바뀌게 되고 새미 소사가 타격에 2차로 눈을 뜨게 되는데요. 다저스에서도 타격코치로 일했던 제프 펜틀랜드 코치입니다.
1997년부터 소사는 펜틀랜드 코치와 방망이 높이를 낮추고 타이밍을 잡기 위한 스텝에도 변화를 주는 등 새로운 방법으로 변화를 주기 시작했고 이런 노력으로 1998년의 66홈런이 만들어지게 됩니다만... 넌 언제부터니?
근데 실제 소사의 발언들을 보면 제프 펜틀랜드 코치가 자기 야구 인생의 모든 코치 중에서 가장 신임하고 따른 코치라고 했으니 타격 기술 향상에 도움을 준 것만은 확실해 보입니다.
그리고 희대의 사건이긴 했지만 코르크 방망이 사건도 빼놓을 수 없죠.
2003년 6월 3일 화요일, 리글리필드 탬파베이와 인터 리그 경기에서 일어난 일인데요.
1회말 1아웃 주자 2, 3루 상황, 4번 타자로 나온 소사는 풀카운트에서 7구를 타격해서 2루 땅볼을 쳤고, 3루주자 득점으로 투아웃에 컵스가 1:0으로 앞선 상황이 연출되는가 싶었는데, 당시 주심 팀 맥클랜드가 부러진 소사의 방망이에서 이물질을 발견하고 4심 합의를 거쳐 소사에게 퇴장을 명령했고 득점했던 3루주자는 원위치 시킨 상황인데요.
컵스 3루 주자는 철자가 많아 유니폼이 꽉 찼던 마크 그루질라넥 컵스 선발은 역시 게임에 카드가 존재하는 마크 프라이어였습니다.
방망이에서 코르크가 나온 새미 소사는 경기전 연습 배팅에서 홈런 타구를 날려 팬들에게 즐거움을 주기 위해 사용했던 방망이인데 시합에 나갈 때 사용하는 일반 배트와 섞인 줄 모르고 사용했다며 팀과 팬들 야구와 관련된 모든 이에게 진심으로 사과드린다고 했었는데요.
사무국에서는 새미 소사의 클럽 하우스에 있던 방망이와 사용을 위해 구매해서 구단 창고에 보관되어 있던 방망이까지 76자루를 모두 압수해서 조사 중이라고 했고, 며칠 후에서 모든 방망이 검사 결과 코르크 없는 정상이라 발표가 있었고요. 이후 소사는 10경기인가 출장정지 징계 받았던 걸로 기억합니다.
흥행에 찬물 끼얹지 않기 위해 거짓 발표를 하며 진실을 은폐했던 것인지 진짜였는지 진실은 저 너머에 있을까 싶어 불러봅니다.
팬들이 걸린 게 처음이지 예전에도 사용했을 거야 하는 생각도 있었을 텐데 전수조사해서 부정 배트가 나오지 않아 오히려 허탈함을 넘어 킹 받지 않았었나 하는 생각도 해보고요. 당시 주심이었던 팀 맥클랜드의 매의 눈에 감탄하기도 했습니다. 오! 메이저리그 엄파이어(Umpire) 답네 하는...
팀 맥클랜드 심판은 정년으로 2015년인가 은퇴했고요. 잭 그레인키 선수가 가장 불편해하는(싫어하는) 심판이었습니다. (스트라이크 존이 너~~~무 타이트하다는 이유에서)
메이저리그 야구게임을 하드볼 4로 시작해 5도 즐기다 트리플플레이로 건너가서 하이 히트 시리즈와 MVP 시리즈를 병행했다가 2K 시리즈로 옮기고 더쇼는 15부터 시작했는데요.
하이 히트 표지모델 하던 새미 소사를 더쇼에서 만나니 과거 생각도 나고 묘한 기분도 드네요.
2019년의 방한 경기에서 일어난 노쇼로 대한민국에선 날강두가 되어 국내 여론의 메호대전에선 이미 "호"따위는 없어진지 오래인 그 축구 선수의 인성이나 자신 위주로 모든 것이 돌아가야 하는 자의식 과잉 같은 것이 팀 케미스트리를 깨트리는 모습도 볼 수 있었잖아요.
새미 소사도 그런 일엔 명함 좀 내민 인물이었다 기억합니다.
홈런을 좀 치기 시작하면서 스타병이 걸려 안하무인이 된 스타일은 아니었고 텍사스 마이너 시절에도 이미 코치진 뒷목 잡는 일도 발생하고 해서 스카우트였던 미나야가 중재하거나 보호막이 된 일들도 있었고요.
한마디로 인기도 있고 논란도 많고 언론이나 팬에게도 이기적인 선수라는 평판을 받던 선수라 큰 애정은 없지만, 그런데 또 가끔 기사에 나오는 모습 보면 시술을 받은 건지 미백크림인지 선수 시절의 모습과는 너무 다르던데 선수 시절 홈런을 예감하면 타석에서 특유의 시그니처가 있었죠.
홈 베이스 밟고 들어와서 꼭 카메라가 자신이나 주위를 비출 때까지 기다려서 눈 마주치면 손을 입에 가져다 대며 하던 시그니처 셀레브레이션도 있었는데 너무 白만 추구해서 이상한 뉴스 등장하지 말고 그때의 모습처럼 건강하시게나.
● 마크 맥과이어
이름에서 빛과 그림자가 공존하는 마크 맥과이어도 나왔네요.
1998년의 뜨거웠던 홈런 레이스로 많은 재미를 주었고, 당시 맥과이어가 타석에 들어서면 나이트클럽의 사이키 조명보다 더한 카메라 플래시 세례가 기억나네요.
국내 언론(신문+방송)도 연일 보도했던 기억이 있는데 지구에서 윗동네 같은 반미 국가 빼고 축구에 미친 나라가 아니라면 대부분 비슷하지 않았을까 합니다.
원래 2005년 의회 청문회에서 증언하도록 소환한 선수는 11명이었는데 모두 응하지는 않았던 걸로 기억하고 3월 17일 마크 맥과이어 포함 소사, 클레멘스, 실링, 팔메이로 정도의 선수가 생각나네요.
다른 선수들은 부정했지만 맥과이어는 긍정도 부정도 아닌 이야기로 고구마를 시전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나는 과거에 대해 이야기하러 온 것이 아니라며 이야기했던 내용이...
텔레비전 카메라 앞에서 스테로이드를 복용했는지에 대한 질문에 저나 다른 플레이어에게 답변을 요구해도 문제가 해결되지 않습니다.
플레이어가 '아니오'라고 대답하면 여러분은 믿지 않을 것입니다.
'예'라고 대답하면 그는 대중의 경멸과 끝없는 조사를 받을 위험이 있습니다.
제 변호사는 제 친구, 가족, 제 자신을 위험에 빠뜨리는 이러한 질문에 대답하지 않아도 된다고 조언을 했습니다.
저는 이 나라에서는 어떤 사람이든 유죄가 입증되지 않는 한 무죄로 간주되어야 한다는 사실이 여전히 남아 있다고 말할 것입니다. (고구마 X ∞)
2005년 3월 17일 의회 청문회의 고구마 발언 이후 시간이 지나 2010년 1월 11일(월요일) 스테로이드+성장 호르몬의 복용+사용을 인정했던 날이기도 합니다.
스테로이드를 사용하지 않았더라면 좋았을 텐데 어리석은 실수였다며 진심으로 사과드린다며 자신은 스테로이드 시대에 뛰었으며 약물이 자신을 홈런왕으로 가는 길에 도움을 주었음을 인정했습니다.
첫 사용은 1989년 시즌이 끝나고 1990년 시즌 시작 전의 기간이었고, 이후 부상당한 1993년에도 홈런 레이스를 벌이던 1998년 시즌도 사용했다고 이야기를 했는데, 처음 사용 목적은 부상에서 회복하기 위한 목적이었지 꼭 경기력 향상만을 위한 것은 아니라고 했었죠.
1998년 카디널스 시절 기록했던 70홈런 기록으로 야구 역사의 영웅은 물론 미주리주 자랑이었던 맥과이어였죠.
미주리 주는 1999년 부시 스타디움 근처를 지나가는 70번 고속도로도 있겠다 70홈런도 기록했겠다 구간의 이름도 마크 맥과이어 고속도로라는 이름으로 명명하며 맥과이어의 70홈런 신기록 기념을 했었는데요.
그런데 세계 어디를 가도 표리부동한 사람이 많은 정치판이지만 겉으론 청렴함을 표방해서 였을까요? 정치권은 아주 좋은 먹잇감이라 생각했는지 2010년 5월 17일 책이 아닌 만화 제목이라도 들어봤을 미주리주 출신의 유명 작가 마크 트웨인 고속도로로 이름을 변경하는 법안을 통과시켰던 일도 있습니다.
팀선배였던 로저 매리스 기록을 경신해서 더 신선했던 건지, 인기팀의 애런 저지여서인지, 둘 다 아니고 복합적인 이유가 가장 커서였겠지요? 팬+언론에서 시즌 기록에 열광하며 의미를 부여했던 이유도 청정 시대의 기록인 점이 아닐까 하네요.
마크 맥과이어는 부모님에게 물려받은 유전자만으로 야구를 했으면 통산 기록은 손해 봤을지라도 명예는 물론이고 당당하게 명예의 전당을 노려볼 수 있진 않았을까 생각도 해보고요.
형제가 다섯인가 그랬던 거 같은데 DNA가 대단들 하죠. 동생 댄은 2팀에서 뛴 NFL 선수였고 막냇동생도 보디빌더 선수였습니다.
To. 빅맥 형
꼭 형 때문만은 아니었지만 지금까지 살며 많은 빅맥 단품이나 세트를 먹어왔어, 요즘은 멀리하긴 하지만 그래도 가끔 먹을 때면 요즘도 형이 먼저 생각나기도 해!
형이 청문회에 등장했을 때는 실망하기도 했고 그때 흘린 형의 눈물도 기억이 나네, 죄는 미워하되 사람은 미워하지 말라는 말이 있잖아, 형이 뛰던 경기를 보며 그 시대를 살았던 좋은 추억들도 있고 하니 형의 남은 인생도 응원할게! 건강해 버거형.
● 데이비드 라이트
건강 문제로 이른 은퇴를 하게 됐던 데이비드 라이트였죠.
2018년 시즌 말미에 은퇴 발표를 하고 마지막 홈 3연전(vs MIA) 기간이던 9월 28~29일 경기에서 1타석씩 소화하고 기립박수받던 장면도 생각나는데요. (더쇼 18까지 게임에 카드가 나왔었고요)
2019년 1월에 계약 해지였나 발표가 있었는데, 본래 보장계약 기간이 2년 후인 2020년에 종료였고 남은 금액도 상당했죠.
남은 연봉 2,700만 달러/다년 계약 금액 합계=1억 3,800만 달러로 였고요.
마크 맥과이어의 경우 은퇴 시즌이 돼버린 2001년 1월에 2년 3천만 달러 인가 계약을 했다가 시즌 끝나고 은퇴 결정을 내려 1년 남은 계약과 연봉도 포기하고 은퇴했던 걸로 기억하는데, 한두 푼도 아니고 데이비드 라이트는 어떤 경우인지 모르겠네요. (상호 합의된 계약 해지로 남은 연봉이 없는 것인지 보험으로 받는 것인지)
2001년을 끝으로 은퇴한 메츠 팬들이라면 아주 사랑하는 바비 보니야라는 선수가 있었죠. (정확성은 떨어져도 슬러거였고 플로리다 시절엔 박찬호 선수 만나면 장타도 곧잘 치던 선수)
뉴욕 메츠 구단과 팬들이 사랑하는 바비 보니야를 위한 Happy Bobby Bonilla Day도 있죠. (매년 7월 1일)
2000년 보장 연봉이 590만 달러였던 바비 보니야를 방출 결정했던 메츠의 잘못된(안일함) 계산에서 시작된 일이었는데요. (2000년 1월 3일, DFA) 구단에선 다른 선수 영입 자금 문제 등으로 방출 금액에 부담이 있던 차였고(영입으로 계산기 바삐 두드리던 시기) 평소 은퇴 후의 삶(돈) 을 에이전트와 자주 상의했던 바비 보니야였습니다.
바비 보니야의 에이전트 전직이 조세전문 변호사였나 보험설계 전문가였나 그랬던 걸로 기억하는데요.
그 에이전트가 큰 그림을 그려서 바비 보니야에게는 빅선물을 메츠 구단에게는 빅엿을 선물한 일입니다. (미나야 단장 시절 아닙니다)
에이전트: 메츠 당신들 자금 운용 힘들군? 좋아 그럼 우리 선수에게 분할 지급해 주는 조건은 어때?
메츠: 오 그래줄 수 있어? 우린 좋지!
에이전트:그래 그럼 지금 연방 금리도 8.5%니까 바비 보니야에게는 10년 유예기간에 이율 8% 적용하고 2011년부터 2035년까지 매년 7월 1일 지급해 줘 OK?
메츠:그래 좋아 우리 상황을 이해해 주고 배려해 줘서 너무 고마워!
그렇게 2011년 7월 1일이 돌아왔고 분할지급 첫해부터 바비 보니야가 수령하는 금액이 120만 달러 조금 안되는 금액으로 불어 났습니다. (119만 3,248달러 20센트)
2000년에 590만 달러 지급하고 끝냈을 일을 3,000만 달러로 불려주는 마법을 부리게 됐습니다. (2,983만 1,205달러)
스캇 보라스가 구단 입장에선 악마의 에이전트라던데 바비 보니야 에이전트도 대단하죠. 이런 사이는 영화 제리 맥과이어의 에이전트와 선수 사이의 "콴"이 되는 관계겠죠.
팬덤이 확실한 것이 레딧 보면 카드를 원하는 유저들이 상상의 카드들을 그간 많이 만들었는데 기다림의 달콤한 보상을 받게 됐네요.
데이비드 라이트가 메츠 시절 서재응, 박찬호, 구대성 선수들도 뛰던 시절이라 한국 선수들과 얽힌 기억들이 있는데요.
기억에 남는 한 장면이 있습니다. 2007년 메츠에서 박찬호 선수가 방출된 후 2008년 친정팀 다저스로 돌아가 재기를 할 때인데요.
스프링 캠프에서 박찬호 선수와 로테이션 진입을 놓고 겨룬다는 국내 언론들의 기대 섞인 기사와 전망들이었지만 다저스의 분위기는 이미 기대주 커쇼였지 베테랑 박찬호 선수가 아니었잖아요. 2008년 5월 30일 금요일, 커쇼의 생애 2번째 선발 경기가 있었습니다.
이후의 커쇼를 생각하면 말도 안 되는 일이지만 이날의 커쇼는 4회 투아웃을 잡고 (3.2이닝 5피안타 4실점 1피홈런)
주자 2, 3루 장작을 쌓고 교체되는 상황이 생겼고요. 조 토레 감독이 메츠 3번 데이비드 라이트를 상대하기 위해 투수 교체를 합니다.
데이비드 라이트가 다저스 불펜에서 박찬호 선수 나오는 걸 보고 덕아웃으로 들어가 다저스 투수 분석 자료 차트를 넘기면서 코치와 이야기하던 장면인데요.
현지 해설에서 라이트가 저렇게 공부할 필요가 있나요? 라이트는 찬호와 작년에 팀메이트였기에 잘 알고 있을 텐데요 같은 뉘앙스로 기억하고 있는데요.
당시 다저스가 원정이라 국내 중계방송에서 메츠 화면으로 중계했던 걸로 기억하고, 2008년의 메츠 중계석 해설진이 론 달링과 게임에 있는 키스 에르난데스, 랄프 카이너(고령으로 특정 게임만) 였고요.
꼬인 사람이라 그랬는지 나중에 생각해보니 그 의미가 말 그대로 너희 친하잖아 잘 알잖아 뭐 이런 의미로도 생각해 보았고, 라이트 넌 메츠 스타야 안 봐도 잘 치잖아, 찬호공은 자료 안 봐도 칠 수 있어... 뭐 이런 의미는 아니었을까 혼자 생각해 봤던 기억이 있습니다.
박찬호 당시 선수는 불 끄러 나온 상황의 첫 타석에선 카운트 투투에서 유땅 아웃으로 잡았고 7회말엔 라이트에게 2루타를 허용했습니다.
커쇼의 루키 시절을 생각해 보면 전 정말 야구 잘할 줄 몰랐습니다.
너무 앳된 얼굴에 수염도 없고 착하게 생겨서 체크무늬 남방 입고 도서실에 앉아있는 공부 잘하는 학생 같은 모습이어서요. (지금 생각하니 커쇼도 몰라보는 야알못이었네요)
● 라울 이바네즈
친구를 잘 사귀어야 한다는 말이 중요하게 다가오는 라울 이바네즈죠. (발언 배경 100% 지분은 박찬호)
우스갯소리로 군대 이야기와 축구 이야기 싫어하는 사람 앞에서 군대에서 축구했던 이야기를 하면 최악이라는 말이 있죠.
하지만 인간 박찬호에게는 국방의 의무가 병역 특례로 훈련소만 경험해서 다행이지 병장 달고 만기전역했으면 그의 스토리텔링은 더욱 풍부해졌을 거란 사실입니다.
라울 이바네즈가 글루텐 불내증+유제품 알레르기가 있어서 선수 시절에도 식단에 특별히 신경 썼던 걸로 기억하는데 김치는 진짜 좋아하고 맛있었을까요?
● 마크 멀더
셋이 함께 뛸 때 볼만했었죠.
우리 언론에선 영건 3인방이란 표현을 자주 했던 기억인데 미국 기사 보면 가끔 젊은 신인급 투수들이 잘 던지면 영건이라 표현하긴 하더군요. 셋이 함께 찍은 사진 보면 보통은 센터에 마크 멀더가 많이 섰는데요. 큰 이유는 없습니다 그냥 뭐 사진발+구도를 위해서였겠죠. (멀더가 키가 제일 큽니다 198cm)
영건 3인방 하니 생각해 보면 한국인은 작명(센스라고 해야 하나요) 잘하는 것 같아요. 진짜 누가 붙여서 시작된 건지 궁금한 것 중에 하나는 월드컵 3~4위 결정전 며칠 앞두고 시작된 형제의 나라 드립이었는데, 이젠 고유명사급이죠.
시작은 네티즌이었는지 국방전문기자인지 누가 지은 것이 퍼진 건지 정말 궁금한데 B-1B 폭격기 뜨면 어느 순간 한반도 상공 죽음의 백조 어쩌고저쩌고하며 보도하던데 아무리 기사를 중학교 2학년 수준의 단어를 쓰라고 가르친다지만 이런 멘트나 자막을 뉴스에서 보면 저는 좀 낯이 간질간질합니다.
세인트루이스도 돈을 쓸 땐 쓰는 구단인데 머니볼 빌리빈의 영향이 커서 그랬는지 커리어 연봉 수령액이 3천5백만 달러가 안되는 걸 보고 좀 놀랐네요. 1년만 더 뛰었으면 연금수령액 기준을(액수) 맥스로 채울 수 있었는데 커리어도 9년이었습니다.
마크 멀더가 골프 좋아하고 잘하기도 하죠.
아메리칸 센추리 챔피언십(American Century Championship)이라는 대회가 있는데요.
이 대회가 NBC에서 메이저리그 중계권 놓쳐서 채널 시청률 떨어지고 방송시간 채울 거 없을까 해서 1990년부터 시작한 일종의 파일럿 프로그램 같은 개념이었는데 이게 대박을 치죠.
인기도 있고 해서 매년 7월 네바다주 에지우드 타호 골프 코스에서 열리는 대회고요. (골프장을 보면 백돌이도 치러가고 싶은 환경입니다)
셀럽들 나오는 유명인 골프 대회인데, MLB, NHL, NFL, NBA, 테니스, 프로골퍼, 배우, 가수 같은 사람들이 참가하는 대회인데 전현직 메이저리거들도 다수 참가합니다.
은퇴하고 뭐하나 했던 메이저리거들도 참가 많이 하더군요. (NBA 마이클 조던, 스테픈 커리, 찰스 바클리, MLB 존 스몰츠, 데릭 로, 조 마우어, 데이비드 웰스)
그런데 쟁쟁한 참가자들 중에 마크 멀더가 대회 유일의 3회 연속 우승한 유일한 기록보유자입니다. (작년 대회에서도 2위였습니다)
요즘엔 그래도 국내 골프 투어 상금 많이 올랐지만 아메리칸 센추리 챔피언십 총상금 금액은 60만 달러, 우승자는 12만 5천 달러의 상금이 있으니 금액도 작지 않습니다.
물론 미국 세금 생각하면 국내 대회 우승 상금이 이득일 수도 있겠네요(국내는 협회 특별회비, 소득세, 주민세 뺀다 해도 10% 조금 넘던가 그랬던 것 같은데, 아! 프리랜서 사업자로 분류되니 5월엔 종합 소득세도 있겠지만 그래도 미국 세율에 비하면)
골프 잘 치는 마크 멀더는 3회 연속 우승하고 2018년 10월엔 초청선수 자격으로 PGA 투어 세이프웨이 오픈에 출전하기도 했었고요.
그리고 마크 멀더 하면 박찬호 선수의 텍사스 시절도 생각이 나는군요.
선발 경기 끝나면 달력 보고 다음 예상팀 보고 로테이션 계산하면서 한숨 쉰 적 여러 번 있습니다. (선발 대결에서 번번이...)
골퍼 박찬호 님은 매년 프로테스트만 열심히 참가할 것이 아니라 아메리칸 센추리 챔피언십에 참가해서 우승까진 바라지는 않고 선수 시절 꺾지 못했던 마크 멀더는 이겼으면 좋겠네요.
● 그렉 본
부계 쪽의 사촌동생이 모 본, 모계 쪽의 사촌 형은 제리 로이스터 (전) 롯데 감독
본의 성적을 보다 페냐의 성적도 찾아보니 유형도 비슷하고 통산 타격 지표도 비슷하네요. (그들이 말하는 레전드라 그런가 봅니다)
● 카를로스 페냐
고교 시절부터 칼 크로포드급은 아니었어도 야구 좀 한다는 뛰어난 성적으로 텍사스 1라운드 지명을 받았던 페냐였죠(1라운드 10번)
2001년 9월 확장 로스터로 메이저리그에 데뷔했는데 당시 텍사스 1루엔 터줏대감 라파엘 팔메이로가 버티고 있었고, 2001년 드래프트에서 텍사스가 1라운드 5번으로 T-Rex을 지명했었죠.
팔메이로의 계약기간 동안 테세이라 성장시켜 올린다는 계획 속에 트레이드 칩으로 활용돼서 2002년 1월 14일 오클랜드로 보냈는데 그때 역마살이 들었는지 참 많이도 돌아다닌 선수 생활로 기억하는 선수입니다.
30대 중후반의 나이에도 유연한 스윙을 보여줬던 팔메이로는 3천 안타+500홈런 클럽으로 명전은 무혈입성 보장이었는데 도대체 약이 뭔지요. 청문회도 등장하고 참 그놈의 약이 뭔지...
팔메이로는 약 때문에 4번째 투표에서 5% 득표 미만으로 후보 자격 상실했습니다.
2011 (11.0%)
2012 (12.6%)
2013 ( 8.8%)
2014 ( 4.4%)
영화적 상상력을 더해 세월이 200년 정도 지나 지구환경도 파괴되고 영양요소와 경기력 향상을 위해 약이 합법+권장되는 사회에서 야구 경기가 진행되는 시절이 오고, 약물 시대의 기록 발굴로 특별위원회 같은 케이스로 명전 헌액이 되는데 지켜볼 수는 없으니 죽기 전에 유언으로 애들한테 말해놔야겠어요. 약쟁이가 명전 헌액 되면 내 산소나 납골당에 와서 이런 일이 있었다고 알리는 걸 대대손손 전해다오!
그리고 T-Rex 재작년엔 Men's Health 캠페인의 일환으로 파트너십 홍보대사를 했더군요.
미국에서 노년기에 접어드는 남성들 9명 중에 1명꼴로 전립선 문제나 암 진단을 받고 치료를 받는데, 치료 후에 일부 남성들은 요실금을 경험한다고 하네요.
그래서 남성 요실금 패드+팬티의 캠페인 파트너인데 1개 판매에 1달러씩 기부하는 시스템이던데 기금은 전립선암의 예방이나 치료 연구에 사용하는 시스템이었습니다.
그런데 꼭 나이 들어감에 따라 요실금을 걱정할 것이 아니라, 이 글을 읽고 있는 모두는 요실금 패드나 팬티를 준비해야 하지 않나요?
PVP에서 팽팽한 경기 역전승이라던가 끝내기 상황, 야구 경기 관람+시청 중에도 응원팀 또는 특정 선수들 플레이에서 이런 요실금 상황들이 발생하지 않는다는 보장이 어디 있겠습니까!!!
● 마이크 로웰
선수 시절 20대 모습이 너무 베테랑처럼 보이기도 했죠.
링컨의 많은 명언 중에 마흔이 넘으면 자기 얼굴에 책임을 져야 한다는 말을 좋아하는데요.
마이크 로웰은 선수 시절은 비록 조숙한 외모였지만 이제는 링컨의 명언이 어울리는 사람이란 생각도 드네요.(의미는 좀 다르지만...)
공식적으로 월드시리즈 우승 2회 선수지만 반지는 3개를 가지고 있습니다.
데뷔가 1998년 9월 13일이었고 시즌 종료까지 8경기 15타수를 뛰었는데요.
양키스가 1998년 월드시리즈 우승을 차지했고 40인 로스터에 들어있던 덕에 본인도 우승 반지는 받았다고 합니다.
2007년 월드시리즈 활약으로 MVP를 수상했는데 푸에르토리코 출신으로는 클레멘테에 이어 2번째였습니다.
2년차 시작을 알리는 1999년 2월 1일 플로리다로 트레이드 되었는데 스프링 캠프 기간이던 2월 19일 고환암 진단받고 2월 21일 수술을 받고 5월 29일 라인업에 복귀, 결혼해서 그 기능? 정상작동되어 자녀도 낳고 잘 살고 있습니다.
고환암 하면 생각나는 호프먼 형님인데요. 남 아프걸 이런 소재로 쓰고 있는 저는 죽으면 좋은 곳은 못 가겠죠?
● 제이크 피비
메이저리그 공식 경기는 자이언츠 시절인 2016년 9월 21일 (VS 다저스 1이닝) 경기가 마지막이었고(보장계약 마지막 해)
2017년에는 개인 송사+가정사의 연장선에서 FA로 보내다 시간이 흘러 2019년 5월 5일 유니폼을 벗는다며 은퇴 선언을 했었죠.
(DD에서는 그래서 17년 까지는 카드가 나왔었고요)
요즘 투수들의 대명사인 빠른 볼이 없음에도 묘한 매력이 있었죠(딜리버리나 팔스윙도)
5구종만 가능한 더쇼라 피비처럼 구종이 5개가 넘는 선수의 팬에게는 개인적으로는 아쉽기도 합니다.(피비는 포심, 투심, 커터, 슬라이더, 커브, 체인지업)
마운드 위에서 좋은 말로는 승부욕+투쟁심이 대단해 성질머리 더럽게 비치기도 했지만 남부 가정의 가풍이 한몫했다고도 생각하는데요.
피비의 할아버지가 80이 넘은 연세에도 무연 담배를 씹고 청바지 뒷주머니에 시원한 맥주병을 넣고 마시는 남부 남자의 모습도 있었고, 피비의 아버지는 손자(피비의 큰아들) 야구 경기에서 심판 판정에 항의하고 야유를 해서 관중석에서 퇴장당한 일화도 있는데 이렇게 자연스레 체득한 기질이 마운드 위에서 자연스레 투영된 것이 아닌가 합니다. (아이를 보려면 부모를 보라는 이야기도 있고)
개인적으로 안타깝게 생각하는 것이 제이크 피비가 메이저리그에서 마지막으로 뛰었던 시즌(2016년)은 투수 트리플크라운 달성도 했던(2007년) 선수의 시즌이라고 보기 힘든 성적이었는데요(5승 9패 5.54)
운동에만 집중하고 관리해야 할 35세 시즌에 멘탈이 크게 흔들리는 일들이 터지게 되는 것도 은퇴를 부추기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피비에게 시련의 태풍이 몰려오다.
2016년 스프링캠프가 시작되고 둘째 날, 피비는 친구처럼 지냈던 자산관리사가 (재정 고문) 피비의 돈 1,500만 달러를 빼돌리고 자신의 명의로 몰래 500만 달러를 대출받은 사실을 알게 되는데, 상실감 신뢰는 말할 것도 없고, 이때부터 샌프란시스코에서 소송 법정이 있는 댈러스까지 자주 왕복했기에 온전히 야구에 집중할 수도 없었죠.
성적은 곤두박질치고 후반엔 선발 로테이션에서 밀려 불펜으로 밀려났고 시즌을 마쳤지만, 집에 돌아온 시즌 종료 3일째 되는 날엔 고교 시절 연인에서 시작해 19살에 결혼했던 와이프가 이혼 서류를 내밀었죠.
피비 부부는 4명의 아들을 두고 있는데 당시 막내는 3살, 큰아들은 16살이었고 양육권 및 재산분할 50% 협의 이혼 소송이 11월 28일에 끝났습니다.
그리고 피비의 돈을 빼돌렸던 재정 고문은 그 돈으로 무엇을 했는가 하면, 온라인 스포츠에 기반을 둔 엔터테인먼트 사업 투자를 했는데요. 피비뿐만 아니라 자신의 고객으로 있던 로이 오스왈트나 NFL 선수 등, 고객 자금을 모두 합치면 3,300만 달러 정도였다고 합니다.
(엄청 큰돈이지만 오스템 임플란트 재무팀장이나 NH 직원 또 너냐? 소리 자주 나오는 직원들의 공금횡령에 비하면...)
그리고 제이크 피비 와이프 이야기가 나온 김에, 부인 이름이 케이티 알포드(Katie Alford)인데요.
박찬호님이 샌디에이고에서 선수 생활하던 2006년 7월 말에 장출혈로 15일 부상자 명단에 올랐는데 첫 입원에서는 정확한 병명을
찾지 못하고 내장출혈이 멈춰 치료가(자연치료+의료) 되는 걸로 생각하고 복귀했었죠.
병원 첫 번째 입원 후에는 당시 박찬호님의 친동생이 한의사셨는데 형이 아프다 하니 걱정돼서 샌디에이고로 넘어왔다고 하죠.
침술을 비롯한 동생의 여러 치료 덕분인지 출혈이 멈췄고, 병원을 갔지만 출혈이 없으니 병명이나 부위를 찾을 수도 없고 해서 수혈 3팩 받고 귀가한 후 팀에는 던질 수 있다고 해서 해서 8월 11일부터 로테이션에 다시 들어가게 됩니다.
8월 11일 휴스턴전에 복귀해서 앤디 페티트와 맞대결 경기에선 패전(시즌 7승 7패 경기)
8월 16일 자인언츠전 (ND, 불펜 방화)
8월 21일(월요일) 다저와의 경기에서 이젠 추억의 채드 빌링슬리와 맞대결 예고되어 있었는데 21일 경기가 오후 19:12분 플레이볼 경기였는데 당일 새벽부터 복통+혈변이 다시 시작되니 (장에 피가 차면 설사 증세로 혈변을 본다고 합니다)
담당 의사와 연락해서 병원을 방문했고 검사시간을 3시로 잡은 의사를 뒤로한 채 등판한다고 집으로 갔다고 하죠.
출혈은 있었지만 두통+복통이 첫 번째 입원보다는 덜 아팠고 당시 심리적으로 야구를 못 한다는 것이 더 두려워서 던지겠다는 어이없는 생각을 했다고 합니다.
집에서 쉬다 펫코 파크로 나서려 식사를 했더니 다시 시작된 장운동으로 인해 증세가 심해진 상황에서 걸려온 우디 윌리엄스의 전화를 받고 정신을 차렸다고 하죠.
통화 내용이 오늘 던질 1경기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앞으로 건강하게 살며 가정을 지켜나갈 생각을 하라는 충고였는데, 첫째 출산 예정일도 받아놓은 게 생각나면서 정신을 차렸다고 합니다.
그래서 등판을 포기하고 병원으로 향했고 본인은 25일 수술을 받고, 같은 병원 산부인과에 입원한 와이프는 31일 첫째를 출산했었죠.
(이때 부부가 혈액생성에 좋다는 미역국을 함께 많이 먹었다고)
수술 당시 팀의 수혈 가능한 혈액형의 선수들이 제이크 피비, 우디 윌리엄스(통산 2호 홈런 상대 투수), 크리스 영, 앨런 엠브리를 포함해서 여러 명이 제안했지만 박찬호 선수가 경기를 뛰는 선수들 수혈받기를 정중하게 거절했고요.
대신 피비의 아내 케이티 알포드와 팀 트레이너 파트(스포츠 치료사/마사지)에서 근무했던 켈리 칼라브레스(Kelly Calabrese)의 혈액 수혈을 받기도 했었죠.
켈리 칼라브레스는 2004년부터 2007년까지 샌디에이고에서 근무했는데 고교 시절엔 배구 선수로 뛴 경험도 있고, 운동선수의 부상도 겪어보고 해서 일찍 자신의 진로를 정했던 사람이고 실력도 괜찮았는지 2000년부터 클리블랜드와 애틀랜타의 선수들을 류현진 선수가 개인 트레이너 고용하는 것처럼 여러 선수들을 봐주고 하다 샌디에이고에 합류했었는데 이일이 당시 더쇼 유저가 알고 있는 그분이 입을 놀려 뉴스에 나오기도 했던 기억이 납니다.
뭐 여러 야구 규칙/규정들이 변할 때면 찬반이 있지만 금녀의 영역이라고 생각하는 덕아웃 문화는 쉽게 인식 변화가 안 되는 것 같습니다.
작년(2022년) 시즌에도 샌프란시코에서 앨리사 나켄(Alyssa Nakken) Major League Assistant Coach 코치 이야기가 몇 번이나 기사화되기도 했었죠.
입방정 주인공은 키스 에르난데스였는데 메츠 중계방송을 하면서 켈리 칼라브레스에게 공개적인 조롱을 했었죠. (형 왜 그랬어 응?)
남자의 게임, 1년에 162경기를 치르는 덕아웃에 잘못된 염색체가 있다고 말이죠.
박찬호님은 의사가 회복 기간 4주를 이야기해 줬고 박찬호님도 처음엔 수술 끝나면 마음 편하게 회복하겠다는 생각을 했었는데, 다시 생각하니 한 시즌 끝나는 게 아니라 야구 생활 끝나는 거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 선발 준비는 무리지만 계투로 짧게는 던지는 걸로 복귀해야겠다는 생각을 했었다죠.
트레이너의 반대 때문에 눈에 안 띠는 실내연습장에서 몰래 공을 던지며 몸을 만들기도 하며 운동을 했고 다저스와의 원정 기간에는(9월 15~18일) 불펜 피칭을 했는데 전력투구하는 모습을 보고 팀원들이 놀랬다고 하죠.
그리고 샌디에이고가 시즌 마지막 4연전 (원정) 애리조나와의 경기에서 불펜으로 등판을 했습니다.
9월 28일 목요일 팀의 시즌 159번째 경기, SD 선발은 제이크 피비(박찬호 8회 등판 13구 투구, 1볼넷, 2피안타 2실점 아웃카운트 없이 교체)
그리고 2006년 NL 서부 1위였던 샌디에이고는 세인트루이스와 디비전시리즈를 앞두고 있었는데요.
당시 박찬호 선수가 보치 감독을 찾아가 수술 이후 기간이 짧아 몸을 제대로 만들지 못하고 했으니 가을야구 로스터에 들지 못한다는 생각을 스스로 하기도 해서 가을야구 로스터 제외되면 집으로 돌아가 쉬겠다는 말을 하려고 했는데, 보치 감독이 먼저 뛸 수 있느냐고 묻기에 당연히 뛸 수 있다고 대답을 하기는 했는데, 지나고 생각해 보니 자신의 복귀하려는 의지+노력을 좋게 봐주었고 엔트리 제외는 상실감도 크기에 그런 배려를 했던 것이 아니었나 하는 자신의 생각을 밝히기도 했습니다.
첫가을 야구를 경험하고 귀국해서 토크쇼였던 걸로 기억하는데 디비전 시리즈 경기를 복기하며 펫코파크의 해 저무는 시간에 등판해서(그림자로) 자신보단 타자에게 불리했기에 운이 따랐다는 겸손을 섞은 인터뷰도 기억이 나네요. (8~9회 2이닝 1피안타 무실점 투구 숫자 15개)
그리고 당시 박찬호 선수의 병명은 메켈게실 이라는 진단이었습니다.
출생 초기 태아의 혈액 보급로인 제장간막관이 퇴화되지 않고 남아 있어 생기는 장의 기형 상태인 질병이었는데, 소아의 경우 흔하지만 어른의 경우에는 거의 없어 어른들은 메켈게실 검사를 보통은 하지 않는다고 하네요.
소화 위장관 출혈이 생기면 보통은 증상이 혈변+복통 증상이 있고 미국 인구 3억 명에서 2% 정도 나타나는 희귀한 증상이라고 하는데
위산 약 등을 처방해 치료도 하고 낫지 않는 경우에는 수술을 통해 제거하면 보통은 보름 정도 후면 일상생활이 가능하고 합니다.
박찬호님이 언젠가부터 골프에 매진하는 모습이 자주 나오던데, 다시 태어나서 야구와 골프 중에 선택해야 한다면 골프를 선택할 정도로 골프가 좋다고 하더라고요.
야구팬인 제겐 섭섭한 이야기이지만 골퍼 생활을 했다면 어느 유저분은 재수하지 않고 바로 대학에 입학할 수 있었겠군 하는 생각도 들더군요. (어머니 건강하시죠? 효도하세요^^)
제이크 피비는 작년 샌디에이고 디비전 시리즈 홈경기 시구자로 마크 로레타와 함께 나와서 반갑기도 했었는데요.
제 기준에선 피비는 선수 시절도 은퇴 후도 재미있게 사는 사람입니다.
2013년 보스턴 시절 월드시리즈 우승을 하고 우승 퍼레이드를 했었죠.
이때 레드삭스 선수들의 퍼레이드 행렬이 찰스강을 건너는 구간도 있었던 것을 기억하는 분들도 계실 텐데요.
이때 사용한 차량이 군용으로 설계돼서 전쟁에도 사용되던 수륙양용 차량인데, 관광객 투어를 위해 찰스강을 건너는 용도로 사용하는 차량을 대여해서 행사를 했는데 행사가 끝나고 자신의 가족과 함께 탑승했던 차량을 75,000달러에 구매하기도 했습니다.
이후 도색과 보스턴 카스킨을 입혀 고향 집에 소유하고 있습니다.
2014년에는 샌프란시코에서 다시 월드 시리즈 우승을 했었죠.
이렇게 리그를 옮기며 다른 팀 소속으로 백투백 월드시리즈 우승을 경험했고, 이 퍼레이드 차량도 구매해서 고향 집에 가져다 두고 싶어 했는데 절차가 까다로워 구매할 수 없었다고 하죠.
탯자리부터 고향인 시골 앨라배마에서 생활하다 프로 지명을 받고 샌디에이고로 가니 너무 좋았다고 합니다.
그래서 은퇴하면 고향으로 돌아갈 생각이 없다고 생각했었는데, 사람도 연어 기질 있는 사람이 제법 많죠.
레너드 스키너드라는 밴드의 여러 히트곡 중에 개인적으로 서정적인 멜로디에 주옥같은 가사의 명곡 "심플맨"을 가장 좋아하는데, 제이크 피비 같은 사람이 좋아하는 곡은 Sweet Home Alabama겠죠 (풍겨오는 남부 냄새)
제이크 피비는 2008년에 고향 앨라배마州 윌콕스 카운티에 5,000에이커 농장을 사들였고, 나중에 500에이커를 더해 총 5,500에이커를 터 삼아 살고 있는데요. 이 규모가 감이 안 잡히실 텐데 평수로 계산하면 대략 670만평 정도 됩니다.
한국 보통의 사람들이 6천 평은커녕 6백 평도 등기부등본이나 토지대장에 이름을 올리는 사람이 많지 않을 텐데 미국의 국토 면적이나 농장 위치가 깡시골이라 해도 규모가 크죠.
어는 정도의 시골이냐 하면 농장이 위치한 카운티에서 캐서린 마을 인구가 20명인가 그렇다고 하고, 2014년에는 앨라배마 주지사를 지냈던 전임 주지사가 말하길 미국에서 가장 가난한 카운티가 피비의 농장이 있는 앨라배마의 윌콕스 카운티라고 말했습니다.
그렇다 보니 목장에서 가장 가까운 식료품점이 30분 거리에 있다 하고, 목장 입구 주변에는 부모님의 집과 자신의 집을 만들었는데
방이 22개에 숙박 가능 인원은 80명 정도 된다고 합니다.
짧지만 펜웨이 파크를 본떠만든 크기의 울타리와 폭포도 있고 가족이나 지인들 모임을 위해 살롱(BAR)도 만들었는데 내실에 자신의 유니폼이나 기념품, 유명 선수들의 싸인 기념품으로 인테리어를 했고, 체육관 시설, 그린몬스터를 본떠만든 야구장, 볼링장, 아케이드 게임, 들에 둘러싸여 있는데 사냥 시즌이 오면 자신의 목장 부지에서 사슴, 코요테, 멧돼지 사냥도 한다고 합니다.
선수 생활 총 연봉액이 1억 2천7백만 달러 규모인데 사기 피해액+세금+위자료+생활비를 뺀다 해도 새로운 자산 관리사는 건실한가 봅니다.
하지만 플랙스는 끝이 아닙니다.
모빌 시내의 한 블록 전체를 130만 달러에 매입하기도 했는데 그 블록에는 피비 소유에 바가 2개 있고 자신이 좋아하는 음악을 위한
녹음 스튜디오도 소유하고 있습니다.
선행도 많이 하고 Jake Peavy Foundation도 운영하고 있는데요 쓰다 보니 뭐니 너란 사람은?
피비의 음악에 대한 열정을 보니 야구 재능뿐만 아니라 음악 재능도 있어 음반도 내고 공연도 하는 선수 출신들이 생각나는데요 참으로 대단들 한 것 같습니다. (멋짐)
● 라이언 루드윅
오클랜드 지명 선수였는데 텍사스로 트레이드되어 메이저리그 데뷔했고, 당시 트레이드 상대가 이번 23에 함께 카드로 복귀한 카를로스 페냐였습니다. (이런 인연이 있나~)
추신수 선수와 2013년 레즈 시절의 동료이기도 했는데 라이언 루드윅 같은 선수를 생각해 보면 운동선수에게 부상이 안타깝다는 말 사용이 적절하지 않나 생각됩니다.
장타력도 있던 기억인데요. 2013년 시즌 개막경기에서 레즈의 4번 타자였습니다. 하지만 개막전 경기에서 연골 부위 부상을 당해 수술하게 되죠. (8월 복귀)
2013년 신시내티 타선이 괜찮았죠.(개막전 기준)
1, 추
2, 브랜든 필립스
3, 보토
4, 루드윅
5, 제이 브루스
6, 토드 프레이저
7, 지우개
부상 없는 게임에서 4번 타자로 맘껏 뛰시게.
● 맷 케인
2002년 드래프트에서 1라운드 지명 선수였죠(전체 25번으로 자이언츠 지명)
부상에 따른 기량 저하로 은퇴도 빨리했지만 (2017년 32세 시즌) 누적 연봉도 피비보다 조금 더 많은 1억 3천만 달러가 넘고 선수 생활 후반엔 너무 털려 커뮤니티에서 등판날이면 "맷 고인" 소리도 듣던 기억이 있네요.
2012년에 퍼펙트게임 기록도 가지고 있기에 최종 카드는 마일스톤 카드도 나올 법 합니다. (DD 카드는 17이 마지막)
피비가 프로 진출 전까지 고향에서만 보낸 토박이 앨라배마 출신의 선수라면 케인은 앨라배마州 출생 선수지만 생활은 여러 곳에서 했습니다.
게임에도 유명한 선수들이 여럿 앨라배마 출신인데 피비와 같은 모빌 출신으로는 애런과 맥코비, 페이지가 있고 맷 케인은 옆 카운티 출신이고, 다른 카운티 출신으로는 메이스와 서튼도 있습니다.
양옆에 붙어있는 루이지애나, 미시시피, 조지아州와 함께 쿠 클럭스 클랜(KKK)도 활동하고 했었는데 지금도 있는 인종차별인데 레전드 분들도 힘든 일이 많으셨겠네요.
시골이라 땅값이 싸서 선택했는지 세제혜택이 제일 커서 선택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내수시장 차별하는 현대차 공장도 몽고메리에 들어가 있고, 생각하면 휴스턴과 워싱턴만 떠오르지만 나사(NASA)도 앨라배마 헌츠빌에 있습니다.
헌츠빌에 있는 마셜 우주 비행 센터는 나사의 우주 기술 개발 기관인데, 레고 하시는 분들은 기억하실 아폴로계획의 새턴 V를 개발한 곳입니다. 워싱턴은 본사 개념, 휴스턴은 발사체를 쏘아 올리고 헌츠빌의 마셜 우주 비행 센터는 추진 시스템, 하드웨어, 엔지니어링을 주 업무로 하고 있습니다.
야구 이야기는 아니지만 앨라배마 출신 선수 때문에 앨라배마 이야기를 조금 해보면 남북전쟁 당시 남부연합의 수도가 앨라배마州 몽고메리에 있었습니다. 미국에서 170년 전만 해도 노예시장이 가장 크고 활발하던 동네가 앨라배마였습니다.
남북 전쟁이 일어나기 1년 전인 1860년 당시 미국의 총 인구가 3,100만 명 정도였는데요.
그중에 흑인 노예는 400만명(12%) 정도였고, 남부에 집중되어 있던 목화+면화 생산 노예가 200만명, 담배+사탕수수+쌀 생산 노예가 100만명 그리고 가사노동이나 허드렛일을 하던 노예를 100만명으로 추산하고 있습니다.
백인 중에 농업에 종사하던 인구가 160만명 정도 됐고 38만 4천명 정도의 백인만이 흑인 노예를 부렸다고 합니다.
38만 4천명의 백인 농장주 중에 88% 정도는 20명 미만의 노예를 두었고, 50~100명 농장주가 1만명, 100명 이상의 노예를 부리던 대규모 농장주는 3천명 정도였다고 합니다.
미국 역사에서 가장 많은 노예를 부렸던 농장주는 1830년대 3천 명을 소유? 하기도 했었고 1850년대에 들어서는 1092명을 부리던 농장주가 가장 많았던 농장주였습니다.
흑인 노예의 삶을 다루는 원작 소설이 영화와 드라마로 나오기도 하고 픽션+논픽션을 합친 해방이나 장고 같은 영화에도 잘 나타나고 있죠.
겜돌이 시각으로 보면 마피아 3 같은 게임의 배경은 앨라배마 옆에 옆 루이지애나州의 뉴올리언스를 모티브로 뉴보르도라는 도시로 등장하기도 하죠.
게임에서 물론 쿠 클럭스 클랜(KKK)도 등장하고 게임 도입부에서 주인공 링컨 클레이가 검보 배식을 하는데 이 검보(Gumbo)라는 남부 대표 음식의 기원이 루이지애나에서 18세기의 흑인 노예 식문화에서 시작된다고 합니다.
다른 동네이긴 하지만 제겐 명작 게임 레데리 2에도 쿠 클럭스 클랜이 등장하기도 하고, 많은 영화와 드라마에서도 쿠 클럭스 클랜이 등장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재미없다는 사람 만나기가 더 어려운 명작 영화 포레스트 검프가 있는데요.
안 보신 분들을 위해 짧게 이야기해 보면 미국 현대사의 굵직굵직한 사건과 풍자+블랙코미디가 섞인 영화입니다.
영화에서 포레스트 검프의 집이 앨라배마州 가상의 카운티 그린보우 입니다.
포레스트 검프의 군대 친구 중에 입만 열면 새우 이야기를 하며 전역 후에 동업하자고 하는 친구 버바의 고향은 앨라배마州 모빌 밑에 실제 존재하는 바이우 라배터 카운티이고요.
영화에서 설정이 흑인이고 하니 노예 집안 출신에 대대로 가난하며 형제자매 많은 설정으로 나오기도 하고, 포레스트 검프의 주특기인 달리기 덕에 뛰게 되는 풋볼팀도 앨라배마 대학의 풋볼팀 크림슨 타이드입니다.
영화에는 수많은 블랙 코미디 요소가 있는데, 지역 설정이 인종차별 심했던 남부이고 주인공 이름은 포레스트 검프이죠.
영화에서 어린 시절 검프가 본인 이름의 유례를 묻는 장면이 나오는데 엄마의 대답이 쿠 클럭스 클랜(KKK)을 만든 창립자의 이름이 포레스트라고 하죠.
어린 시절 검프는 하얀 천을 뒤집어쓰는데 그 천이 KKK의 두건이기도 하고, KKK에 대한 설명은 잠옷과 침대보 뒤집어쓰고 귀신놀이하던 집단으로 설명하기도 하죠. 그러면서 검프는 엄마가 자신의 이름을 포레스트라고 지은 것은 정말 실수였다고 대사로 나오기도 합니다.
위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남북전쟁 당시 남부연합의 수도가 앨라배마州 몽고메리였고 노예시장이 가장 크고 활발하던 동네가 앨라배마였다고 했죠.
영화 포레스트 검프에도 나오는 쿠 클럭스 클랜의(KKK) 창립자는 윗동네 테네시州 채플힐에서 태어나고(1821년) 멤피스에서 사망한(1877년) 네이선 베드포드 포레스트(Nathan Bedford Forrest)란 사람입니다.
삶의 이력을 보면 자신의 신념과 이익을 위한 것도 있겠지만 따져보면 부(돈)에 대한 욕망이 더 크지 않았을까 싶은데요.
이 사람이 남북전쟁 이전에는 노예무역을 통해서 남부의 대표적인 부호였고요.
시의원 생활도 하다 남북전쟁의 원인이 여러 가지겠지만 노예제 폐지 문제도 포함되어 있었잖아요.
남북전쟁으로 인해 입대를 하는데 미국 역사에서 사병으로 입대해서 장군으로 진급한 몇 명 안되는 인물이기도 합니다.
돈이 있으니 말들도 많이 사고 부대를 꾸려 기병대를 만들었는데 부대 이름이 포레스트 군단이었고 심지어 전술이 좋았는지 나중엔 기마+기동 부대를 위한 새로운 교리도 만들고 해서 안장의 마법사라는 별명도 얻게 되는 인물인데, 남북전쟁이 1865년 4월 9일 끝나고 2년 뒤 1867년 지금도 만명 정도의 단원이 있다는 쿠 클럭스 클랜(KKK)을 만들었습니다.
얼마 전까지도 사망했던 테네시州 멤피스에 동상이 존재했고 부부의 유해가 함께 안치되어 있었는데 블랙 라이브스 매터 캠페인이 들불처럼 번지던 시기에 동상이 철거되고 유해도 이전 안치됐는데요.
여러 이유가 있지만 의회에서 이제 와서 유색인종 비율이 60%가 넘는 주라며 철거와 유해 이전 안치를 결정했는데 좀 웃픈 현실이라 생각합니다.
끝으로 영화 포레스트 검프 이야기도 나왔으니 지금까지의 영화 감상+시청에서 최악의 여주인공은 제니였는데 나를 찾아줘가 나온 이후로는 에이미가 원탑입니다.
● 이안 킨슬러
증조할아버지의 판단+선택이 없었다면 이안 킨슬러는 태어나지 못했을 MBC 서프라이즈 프로그램 같은 일이 있었죠.
1933년 1월 30일 히틀러가 독일 총리(수상)가 되고, 1934년 8월 2일엔 힌덴부르크 대통령 서거로 대통령도 겸직하면서 총통(제국 수상)이 되죠.
민주주의야 진작에 끝났지만 독일 사회에서 시작된 유대인 배제와 탄압을 피해 킨슬러의 증조할아버지는 독일을 떠났습니다. (1933년 무렵 900만 명에 달하는 유대인이 유럽에 있었다죠)
증조할아버지 이름 (Benjamin Künstlich) 증조할머니 이름 (Rose Künstlich)
증조부 이름을 보면 딱 유대인임을 알 수가 있죠. (야곱의 12번째 아들의 이름 벤야민/베냐민)
유대인들 남자 이름에 벤야민이나 다니엘, 아담, 아미르, 리안, 아난, 살라, 요세프 같은 이름들 많이 사용하기도 합니다.
증조할아버지께서 힘든 시간, 시대를 관통하는 시기라 그랬는지 미국에서 낳은 아들을 위해 성(姓)을 Künstlich에서 Kinsler 영국식 영어로 바꾸게 되는데, 그래서 이안 킨슬러의 할아버지 이름은 잭 킨슬러, 아버지 이름은 하워드 킨슬러가 됐고, 성으로 킨슬러를 쓰는 가문이 됐습니다. 미국 성씨에서 2010년 기준 킨슬러 성씨가 2천5백 명 정도 되더군요.(인종 비율에선 백인 80.27, 흑인 16.43)
보던 선수카드라 새로 등장하는 카드 맛은 없는 것 같고요.
은퇴하고 도쿄올림픽 출전하려고 2020년 3월 이스라엘 시민권도 받아서 여권이 2개죠.
인구 1천만 명이 안 되는 이스라엘이죠. 예전에 뉴스에서 본 기억으론 이스라엘 국적+시민권 받는 기준이 양부모가 모두 유대인만 가능했다가 한 분만 유대인이면 가능한 걸로도 바뀌고, 요즘엔 그런 조건도 없어졌다고 들었는데 점점 시대 흐름에 따라 바뀌는 것 같습니다.
메달리스트 목표는 달성하지 못했지만(달랑 6팀 나와서 메달 노렸겠지만 괜찮아 한국도 메달 못 따더라)
올림픽 경기에서 18타수 4안타에 홈런이 1개 있었는데, 그 홈런이 원태인에게 아주 시원하게 넘기던 홈런인데 타격 음과 시원한 타구 궤적이 지금도 생각나네요.
올림픽 메달은 없어도 미국팀으로 출전했던 2017 WBC 우승 멤버, 2018년 월드시리즈 우승 멤버입니다.
얼마 전엔 팀 이스라엘 감독도 했고, 지난달 2월 6일부턴 텍사스 크리스 영 단장 보좌역도 됐고 야구방망이를 비롯해서 여러 스포츠 용품 만드는 회사(Warstick) 운영에 아주 바쁜 봄을 보내는 킨슬러네요.
유대인 선수 기록도 따로 집계가 되는 줄은 몰랐는데 션 그린의 162도루를 예전에 2위로 보냈고, 통산 243개로 유대인 메이저리거 1위 기록이라는군요.
● 알렉스 고든
은퇴 발표가 있고 20에서 마지막 탑스 나우 시리즈로 안녕을 고하는 카드를 내줬었는데 오태식이! 아니 고든 돌아왔구나~ 근데 한국 영화에서 태식이란 이름은 너무 무섭습니다.
● 카일 시거
역시 훌륭한 직장(MLB) 출신답게 딱 1년의 안식년 휴가 후에 카드는 복귀했네요.
작년 텍사스에서 잠깐 이야기가(영입) 있어서 시거 형제 함께 뛰나 했었는데 말이죠.
하지만 카일은 매리너스만을 사랑하는 순정마초였죠. (21년은 33세 시즌이었으니 은퇴가 좀 빠르긴 했죠)
● 라이언 브론
22에서 카드가 없는 줄도 몰랐고, 은퇴했는지도 몰랐었는데 딱 1년 쉬고 카드가 돌아왔네요.
5장의 카드가 어디서 나오는 건지 아시는 분 계시나요?
보상이나 팩에서 못 본 것 같은데 마켓 거래는 되고 있네요 (소속 표시는 없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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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3.04.01 19:13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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헷갈리시면 카드 왼쪽 상단 보시면 표기되어 있어요. (코어 카드는 기간 제한 없어요) 큰 틀에서 계절별로 생각하시면 될 거예요. 여름 올스타 카드쯤엔 세트 2, 가을야구카드+파이니스트 시리즈 세트 3 | 23.04.05 11:05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