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롤스타즈’ 낳은, 도전과 극복의 슈퍼셀 개발 문화
게임을 하나 만드는데 몇 명의 개발자가 필요할까? 유비소프트는 매년 AAA급 오픈월드 게임 개발을 위해 1,000명이 넘는 인원을 동원한다. 일반적인 대형 PC MMORPG는 1~300명 정도로 팀을 꾸린다. 비교적 규모가 작은 모바일 수집형 RPG라면 40명에서 100명 이하로도 가능할 것이다. 그런데 핀란드 게임사 슈퍼셀(Supercell)은 10명이 채 안되는 팀으로 세계적인 흥행작을 배출해냈다. 그것도 반짝 행운이 아니라 벌써 몇 개째. 그야말로 소수정예의 대명사라 할만하다.
누구 말마따나 회사 지하에서 외계인을 고문하는 것도 아닐 텐데, 도대체 어떻게 남들은 수백 명씩 달라붙어도 어려운 성과를 소규모 팀이 척척 낼까. 그 비결은 바로 문화에 있다. 모든 훌륭한 게임사에는 그에 걸맞은 훌륭한 개발 문화가 있기 마련이다. 과연 슈퍼셀이 자랑하는 도전과 극복의 문화란 무엇일지, 25일(목) 판교에서 열린 넥슨 개발자 컨퍼런스(NDC)를 통해 슈퍼셀 김우현 게임 아티스트의 살아있는 경험담을 보다 가까이서 들어볼 수 있었다.
슈퍼셀의 가치, 자유 평등 독립
김우현 아티스트가 슈퍼셀에 입사하기 전, 그의 경력은 썩 잘 풀리지 않았다. 회사도 다니고 창업까지 해봤지만 평균 근속 8개월을 못 넘기고 갈수록 구렁텅이로 빠졌다. 그사이 이리저리 손댄 장르만 슈팅, 액션, 퍼즐, RPG, MOBA 하다못해 슬롯까지 가지각색. 물론 뭣하나 대박이 터지는 일은 없었고 끝에는 게임 업계를 영원히 등지리라 다짐했다. 그런데 그 전에 가보고 싶은 외국 회사들 막 찔러나보자고 이력서를 뿌렸다. 그랬더니 슈퍼셀에서 연락이 왔다.
국내 기업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조직 모델은 마치 피라미드와 같다. 맨 꼭대기에 대표가 서있고 아래로 갈수록 더 많은 인원이 더 적은 권한과 보상을 갖는다. 그런데 슈퍼셀은 모든 결정은 일선 개발자에게 나온다는 우리와 정반대 모델을 갖췄다고 한다. 처음에는 믿지 않았다. 이미 국내에서 실리콘밸리 따라한다고 호격 없애고 영어 이름으로 부르는 곳을 다니며 그 허와 실을 뼈저리게 느낀 탓이다. 슈퍼셀 역시 그냥 외부 홍보용 이미지메이킹이겠거니 싶었다.
그런데 막상 입사해보니 정말로 달랐다. 국내에서는 허울뿐인 자율근무가 제대로 자리 잡혀 있었다. 우리가 우스갯소리로 하는 ‘연차 쓰고 싶어요. 마음이 아파서…’가 여기서는 농담이 아니었다. 본인이나 가족이 아픈 건 그렇다 치고, 반려 동물이 아프다고 쉬고, 택배 받아야 된다고 쉰다. 심지어 WFH(Work From Home, 집에서 일함) 세 글자 날려 놓고 안 나오기까지. 그러거나 말거나 슈퍼셀은 직원의 출퇴근 시간과 휴무를 트래킹하지 않는다. 이것이 슈퍼셀의 자유다.
국내 기업의 대표는 평소 쾌적한 사장실을 전유하고 어디를 함께 가더라도 따로 고급 좌석에 타는 일이 흔하다. 차라리 그게 서로 편하다는 직원도 있고. 반면 슈퍼셀은 어디에도 상급자를 위한 특별 장소나 대우가 존재치 않는다. 대표라도 다른 개발자들과 같은 공간에서 일하고 출장을 가도 모두가 동일한 수준의 좌석을 받는다. 회의실에도 임원석 따윈 없다. 눈에 보이지 않는 위계를 없애고 싶으면 일단 눈에 보이는 위계부터 없애야 한다. 이것이 슈퍼셀의 평등이다.
자유와 평등은 딱히 직원에게 불리할 구석이 없지만 마지막 독립은 양면성이 있다. 슈퍼셀은 막 입사한 개발자에게 프로젝트를 하달하거나 기획서를 주거나 하지 않는다. 대신 본인이 스스로 합류할 프로젝트를 찾고 역량을 발휘하기 위한 길을 뚫어야 한다. 기존의 탑다운(Top-down, 수직적 명령체계) 방식에 익숙한 개발자라면 어안이 벙벙할 수밖에 없다. 실제로 이 슈퍼셀 특유의 독립성 때문에 회사를 떠나는 사람도 적잖다. 그러나 실은 이야말로 슈퍼셀이 자랑하는 개발 문화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가치라 할 수 있다
도전하는 것도 포기하는 것도 알아서
독립성에 대해 더 알아보자. 슈퍼셀에서 신작 프로젝트는 두어 명이 모여 아이디어를 내면서 시작된다. 이들은 기획서를 꾸며 대표에게 내밀고 일단 결제가 떨어지면 그 프로젝트에 있어서는 완전히 독립적인 권한을 얻는다. OK 사인을 마친 대표는 개발자들을 전적으로 믿고 더이상 중간 보고를 받지도, 점검을 하지도 않는다. 내 프로젝트의 주도권을 완전히 잡은 개발자는 자연스레 의욕적으로 업무에 매진하며 구체적인 미래를 그리게 된다.
그렇게 어느정도 핵심 게임 플레이가 완성되면 사내 테스트를 진행한다. 여기에는 개발자뿐 아니라 법무, 재무, 인재채용 등 모든 분야의 임직원이 참여하여 다양한 국가와 연령대의 피드백을 받을 수 있다. 그러다 완성도가 일정 수준을 넘으면 소프트론칭을 하고, 성과가 좋으면 본격적인 글로벌 서비스에 돌입한다. 다만 개발이 자유로운 것과 별개로 글로벌 서비스 단계까지 가는 내부 기준은 매우 빡빡한 편이다. 단순한 재미와 매출을 떠나 사행성과 도덕적 잣대까지 제대로 ‘슈퍼셀 퀄리티’를 만족해야 소프트론칭에 나설 수 있다.
이 슈퍼셀의 독립성을 잘 보여주는 사례가 김우현 아티스트가 참여한 ‘브롤스타즈’와 그 사내 경쟁작이었던 ‘스매쉬랜드’다. 두 작품 모두 소프트론칭까지는 무난히 갔는데, 이후 ‘브롤스타즈’가 죽을 쑤는 동안 ‘스매쉬랜드’는 그리 인상적이진 않아도 나름 무난한 지표를 보여줬다. 거기다 당시 성과 그래프를 보면 가면 갈수록 지표 개선의 실마리를 찾아가는 것처럼 보이기까지 했다. 슈퍼셀에 아무도 ‘스매쉬랜드’를 포기해야 한다고 생각치 않았고 눈총이나 압력도 없었다. 그런데 어느날 한자리에 모인 ‘스매쉬랜드’ 개발팀은 치열한 회의 끝에 개발을 접는다고 선언해버렸다. 프로젝트 시작도 알아서 하더니 그 끝도 자유롭게 결정한 것이다.
이에 반해 ‘브롤스타즈’ 개발팀은 어떻게든 프로젝트를 회생시키고 싶었다. 모바일로 즐기는 실시간 다대다 PvP 게임인 ‘브롤스타즈’는 그때까지 슈퍼셀이 경험해보지 콘텐츠 규모와 플레이 스타일을 지향했다. 최초 명칭은 ‘프로젝트 레이저’로 외계 괴물을 퇴치하는 SF물이었는데 지금과는 비교도 안되게 조잡했다. ‘클래시 로얄’과 같이 세로 화면에서 터치로 움직이고 사격은 자동으로 이루어졌다. 이 버전은 지나치게 재미가 없었고 얼마 안가 폐기되었다.
곧 새로운 조작 방식이 나왔다. 터치로 움직이고 스와이프로 사격하자는 아이디어였다. 개발팀은 조작의 손맛에 만족했지만 피드백은 전혀 딴판이었다. 일단 모바일 게임치고 조작이 너무 피로한데다 화면 위를 분주히 오가는 두 손가락 때문에 뭐가 뭔지 보이지도 않는다는 혹평이었다. 손가락이 제자리에 있도록 이동을 터치에서 가상패드로 대체했으나 여전히 불만족스러웠다. 결국 이동과 사격 모두 바꿨더니 이제는 가상패드가 너무 커져버렸고. 이를 충분히 수용할 수 있도록 가로 화면으로 변경하고서야 지금 우리가 아는 ‘브롤스타즈’의 윤곽이 잡혔다.
고민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개발팀은 지표를 반전시킬 세 가지 수를 준비했다. 첫째, 안드로이드 출시. 그때까지 소프트론칭은 iOS만 진행했으나 슈퍼셀 팬덤의 분포를 고려할 때 안드로이드 버전이 꼭 필요했다. 둘째, 아시아 마켓 진출. 이미 기존 유저들은 개발팀이 뭘 해도 부정적인 단계에 다다른 터라 새로운 피드백이 필요했다. 아시아 유저들이 PvP를 좋아하기도 하고. 셋째, 신규 모드와 캐릭터를 포함한 대규모 업데이트. 이즈음 ‘브롤스타즈’는 게임 플레이를 뜯어고치느라 콘텐츠 업데이트는 잊은 지 오래되었다. 새로운 콘텐츠도 없으면서 매일 갈아엎기만 하는 게임을 누가 견뎌낼 수 있을까. 이제라도 진짜 업데이트가 필요한 시점이었다.
결과적으로 개발팀의 도전은 결실을 맺었고 ‘브롤스타즈’의 지표는 수직 상승하기 시작했다. 덕분에 글로벌 서비스를 허락 받아 ‘클래시 오브 클랜’과 ‘클래시 로얄’에 이은 새로운 성공 신화를 이어가고 있다. 만약 슈퍼셀이 여느 조직처럼 성과가 안 나오는 프로젝트를 채근하고 뒤흔들었다면 브롤스타즈는 진즉 접히고도 남았으리라. 지표가 괜찮은데도 포기한 ‘스매쉬랜드’나 지표가 나쁜데도 계속 버틴 ‘브롤스타즈’나 그만한 독립성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사례다.
떳떳한 실패자를 받쳐주는 안전망
성공과 실패는 동전의 양면과 같다. 성공을 포상하는 것과 실패를 징계하는 것은 결국 하나의 개발 문화로 귀결된다. 자유롭게 도전하라면서 그 결과를 성공과 실패로 엄정히 가려낸다면 과연 누가 정말로 온몸을 내던질까. 그래서 슈퍼셀은 떳떳한 실패자를 위한 여러 안정만을 만들어 두었다. 대표적으로 개인이 조직에 적응하지 못할 때, 팀이 성과를 내지 못할 때, 회사의 성장에 대한 과실을 나눌 때 이러한 안정망이 작동하여 누군가 도태되는 것을 방지한다.
슈퍼셀은 인재를 고르고 골라서 뽑는 만큼 쉬이 포기하지 않는다. 만약 새로 합류한 개발자가 팀에 적응하지 못한다면 자신에게 맞는 동료와 프로젝트를 찾아 옮겨 다닐 기회가 무제한 주어진다. 이것이 개인의 안전망이다. 그리고 슈퍼셀에는 주위에서 명물이라 부르는 실패 축하 샴페인 파티가 있다. 열심히 만든 게임이 망하거나 프로젝트가 접힌 걸 가지고 정말로 모두가 하하호호 술을 마신다. ‘내가 어떻게 이걸 말아먹었는지’를 주제로 강연도 시켜준다. 이것이 팀의 안전망이다. 끝으로 게임이 성공할 경우 대표부터 일선 개발자, 그리고 비개발 부서까지 모두가 동일한 성과금을 받는다. 누가 더 잘하고 말고 하는 인식이 없다. 이것이 보상의 안전망이다.
끝으로 김우현 아티스트는 “우리도 행복해질 수 있을까”라며 슈퍼셀의 가치는 어떻게 보면 슈퍼셀만의 가치일 수 있다고 선을 그었다. 북유럽과 우리는 오랜 역사 속에서 쌓아온 문화가 다르기에 무작정 따라하는 게 능사가 아니며, 그런 의도로 준비한 강연도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니 무작정 수평적 개발한다고 호격 없애고 영어 이름쓰기보다, 직원을 관리해야 할 대상이 아닌 어른으로 대하고 도구가 아닌 동료로 존중하는 것이 먼저라고 첨언했다.
● 자유로운 출퇴근 문화를 악용하는 자도 분명히 나올 텐데
: 나도 처음에는 그게 마음에 안 들었다. 쟤는 왜 맨날 없어 뭐 이런… 그런데 실제로는 악용하는 사람을 본 적이 없다. 인간은 기본적으로 게으른 존재라 생각했는데 다들 집에서도 열심히 일하더라.
● 성과금을 모두가 동일한 액수로 받는다면 무임승차자가 우려된다
: 모두가 각자 맡은 역할을 수행하고, 일손이 달리는 팀이 있으면 다들 모여서 도와주는 일이 흔하다. 그러다 보니 내가 무슨 팀이라 돈을 더 받아야 한다는 인식 자체가 없다. 무임승차할 차의 구분 자체가 없다고 할까.
● 슈퍼셀 한국 지사도 본사와 비슷한 문화를 지니고 있나
: 한국과 미국, 중국, 일본에 지사가 있는데 어느정도 각자 개성이 보이긴 하다. 그래도 입사하면 보름 정도 본사로 불러 교육을 시키며 전반적인 문화를 함께 공유한다. 전세계 직원이 참여하는 행사나 여행도 진행하려고 노력하는 중이고. 다만 본사는 게임 개발이 중심이고 지사는 마케팅 조직이라 거기서 오는 차이는 있다.
김영훈 기자 grazzy@ruliweb.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