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인계의 여왕
경민은 태양이 쨍쨍 내려 쬐는 나리타 공항 택시 승강장에 서서 연신 땀을 훔치느라 여념이 없었다. 10월인데도 열도답게 덥고 습한 날씨에 반소매 와이셔츠를 가지고 오지 않은 것이 새삼 후회가 되었다.
“혹시 이경민상입니까?”
갑자기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뒤를 돌아 보니 키가 작고 약간 통통해 보이는 남자가 서 있었다. 경민은, 이 남자가 미수가 말한 그 사람인가 싶어 물어 본다.
“야노 & #49804;스케씨?”
“아! 맞군요. 이거 반갑습니다. 야노 & #49804;스케라고 합니다”
“처음 뵙겠습니다. 국제그룹의 이경민입니다”
“주차장에 차가 있으니 가실까요”
“신세 지겠습니다”
공항 주차장 쪽으로 걸어가니 콤팩트 타입의 소형차가 서 있다. 700cc가 안 되는 소형 엔진으로도 강력한 파워, 게다가 4륜 구동. 조그마한 것에서 무언가를 활용하려고 하는 일본의 정신이 느껴지는 차체를 보며 경민은 일본이라는 냄새를 느꼈다. 나리타 시내를 벗어나 도쿄까지 논스톱으로 연결 된 수도고속도로에 들어서니 야노가 먼저 입을 뗀다.
“정말 깨끗한 일본어를 구사하시는군요. 일본에서 사신적이 있나요?”
설마, 前世에서 오랫동안 공부했다고 할 순 없겠지- 라고 생각하며 경민이 대답한다.
“산적은 없지만 열심히 했습니다. 주변에 일본인 지인들도 있어서요”
“산적도 없는데 그 정도면 정말 대단합니다”
하지만, 일본어를 네이티브로 잘하는 것이 비즈니스에 도움이 되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을 경민은 이미 前世에서 체험한 터였다. 일본어를 잘하면 잘할수록 미묘한 감정의 변화나 언어적인 매너를 상대가 액면 그대로 받아 들이게 되기 때문에 때로는 일본어가 서툴다고 상대가 인식해주는 편이 감정의 미묘한 흐름을 컨트롤 하기가 쉬워지는 것이었다.
“미수씨에게 들었습니다만 직장 상사시라고요”
“네, 이번에 새로운 부서에 같이 배속 되었죠”
“게임 만드는 게…… 쉬운 일은 아닐 텐데, 국제그룹이라면 원래 테레비나 냉장고 등을 만드는 기업 아닌가요?”
“여러 가지를 하지요. 보험 사업이라든지, 컴퓨터에 들어가는 IC칩도 생산합니다”
“그런 큰 회사에서 게임을 만들려면 어렵겠군요”
“야노씨는 게임을 만들어 본 적이 있습니까?”
“슈퍼패밀리까진 만들었었지요. 처음에 장기나 퍼즐 게임을 만들어서 재미가 좋았는데 RPG를 만들어 보려고 무리하게 추진하다가 회사가 도산하고 말았지요. 하하, RPG라는 게 얼마나 어려운지 모르고 달려들던 시절이었으니 원……”
경민은 게임을 만들다가 실패한자에게 발산 되는 시니컬한 향기가 그에게서 느껴진다고 생각했다.
“지금 만나려고 하는 타카하시씨는 일본 동인계에서 여왕이라 불릴 정도로 최고의 크리에이터지요. 경민씨 혹시 일본의 동인계에 대해서 좀 압니까?”
경민은 이미 前世에 동인 쪽에 대해 여러 번 참관하고 교섭도 해봤기 때문에 모르지는 않았다. 하지만 지금의 자신이라면 어느 정도 새로운 정보를 습득할 필요도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잘 모르겠군요”
“일본의 동인 문화라는 건 외국인이 섣불리 이해하기 힘든 측면이 있어서 타카하시씨를 만나기 전에 몇 가지는 알아 둬야 할겁니다. 일단 이건 상업용 게임을 만들거나 하는 것과는 상당히 틀리지요. 처음에 시작도 그랬지만 어떤 특정 시나리오나 설정, 캐릭터를 좋아하는 집단이 모여서 그것을 흉내내기 시작합니다. 그러다가 그 중에서 실력이 돋보이는 친구들이 모여서 남에게 보여 주기 위해 동인지를 만들어서 뿌리거나 시연회를 열거나 하는데 그것이 발전해서 지금은 정기적으로 코믹마켓이라는 것을 주최하게 되었지요. 줄여서 코미케라고 부릅니다”
“참가 규모가 어느 정도나 되나요?”
“작년에는 50만 명 정도였지요. 올해는 조금 더 늘어나는 수준일까요”
前世에도 그런 정도의 규모로 진행되던 때가 있기는 했다. 하지만 지금의 세계에서는 타이밍이 약간 틀어져 있는 것이겠지, 경민은 그렇게 생각했다.
“타카하시씨는 원래 PC게임으로 출발했지만 지금은 아니메쪽에서 더 강세지요. 아무래도 PC게임보다는 아니메쪽이 지금 여러 가지로 규모가 나오니까 타카하시씨도 게임 쪽은 여간 해서 잘 하지 않으려 할겁니다. 하지만, 컨슈머 쪽은 대단히 관심을 갖고 있으니까 그 부분을 어필한다면 어떻게 될지도 모르겠군요. 그 다음 단점으로는 생소한 나라에서 왔다는 정도일까…… 아니 이건 어쩌면 장점이 될 수도 있으려나…… 잘 모르겠군요”
한참을 이야기하다 보니 차는 이케부쿠로의 선샤인 빌딩 앞을 지나고 있었다.
“곧 타카하시씨의 빌딩에 닿을 겁니다. 약속 시간 좀 전이긴 한데 미리 주차하고 자료 준비해서 들어가시죠”
“직접 빌딩을 소유하고 있는 건가요?”
“그렇죠. 이거 말고도 사실 한 채가 더 있어요. 모두 동인계에서 긁어 모은 돈이죠”
주차장에 차를 대고 자료 가방을 챙겨 나오면서 경민은 빌딩을 쳐다 보았다. 5층짜리 신축 빌딩. 이케부쿠로의 중심가에 이정도 규모라면 못해도 20억엔 정도는 할 것이다.
경민은 새삼 동인계에서 유명세를 탄다는 것이 얼마나 가치 있는 것인지 생각해 보며 야노를 따라 2층으로 올라 타카하시의 방으로 향했다.
“타카하시씨, 한국에서 온 이경민씨를 모시고 왔습니다”
“들어오세요”
야노와 함께 타카하시의 방에 들어 선 경민은 방이라기보다는 너저분한 작업실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 타카하시는 넓은 책상 위에 원고며 작화지를 수북이 쌓아 놓고 그림 그리는데 여념이 없었고 접대용 테이블이 있기는 했지만, 거기도 작화지 등이 겹겹이 쌓여 있어서 접대용 테이블이라고는 생각하기 힘든 분위기였다.
야노는 이런 분위기가 처음이 아니었는지, 먼저 접대용 테이블의 작화지 등을 차곡차곡 쌓아 구석에다 치우며 다시 말을 꺼냈다.
“타카하시씨, 그래도 멀리 한국에서 온 분이니까 하던 일 멈추고, 이야기나 들어 보지요”
타카하시는 야노의 말이 끝나고 나서도 한참 동안 작화에만 열중하다가 작업하던 작화 용지를 차곡차곡 옆에 밀어 놓고 테이블 쪽에 와서 앉았다. 키는 160cm정도로 작고 왜소한 체형이지만 귀여운 이미지가 느껴지는 여자로, 커다란 검은 뿔테 안경을 쓰고 있었는데 테가 너무 넓어서인지 고개를 돌리거나 숙일 때마다 안경테가 과도하게 밑으로 쏠리는 것이 보였다. 그럴 때마다 그녀는 안경테를 오른손 검지로 추켜 세우곤 했는데 경민은 그 포즈가 너무나 귀엽다고 생각했다.
“기가새턴용 슈팅 게임이라고 했는데 어디 어떤 타이틀인지 사양서를 좀 보여주시겠어요?”
“아, 네”
타카하시가 갑자기 자료를 보여 달라고 했기 때문에 경민은 그녀의 이미지에 대한 생각을 떨쳐 버리고 가방에서 시나리오와 대략의 컨셉 아트가 담긴 프린트를 꺼내 그녀에게 주었다. 하지만, 해외에서 온 의뢰인에게 통성명이나 간단한 인사치레도 하지 않고 바로 작업에 대한 이야기라니…… 이걸 프로 의식이라고 생각해야 하는지, 아니면 한국에서 왔기 때문에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는 것인지에 대해 약간 의구심이 들었다.
이윽고, 그녀가 4페이지에 걸친 프린트를 읽어 보고 테이블에 내려 놓으며 이야기했다.
“시나리오는…… 그렇군요. 슈팅게임에 미소녀 캐릭터라, 재미있을 것 같아요. 이제까지 그런 시도가 별로 없었으니까, 기가새턴 쪽에 슈팅 게임들은 모두 전쟁물 뿐이었죠? 그런데, 경민씨 죄송하지만 국제그룹이란 회사는 이제까지 기가새턴으로 게임을 만든 적이 있나요?”
“사실 몇 년 전에 기가드라이브용으로 만들다가 접힌 타이틀을 제외하고 없습니다”
“기가새턴은 CD게임기인데다가 제가 아는 업계 개발자들 이야기로는 만들기가 수월치 않다고 하던데, 카트리지 게임기인 기가드라이브로도 만들지 못했던 회사가 기가새턴용으로 게임을 만들 수 있을까요?”
“레퍼런스 측면에선 사실 드릴 말씀이 별로 없습니다. 하지만 이 외주의 의뢰는 국제그룹에서 정식으로 하는 것이고 국제그룹은 돈을 떼먹는다거나 타이틀이 나오지 않는다고 계약 내용을 뒤집을 회사는 아닌……”
“저에겐 돈도 중요하지만 공들여 만든 작품이 얼마나 시장에서 지명도를 차지하느냐가 더 중요해요. 그건 크리에이터로서 들인 시간에 대한 리턴이니까요”
경민의 개런티에 대한 설명을 중간에 막으며 타카하시가 강하고 짧게 이야기했다. 경민은 그녀의 말에 어떻게든 반박을 해야겠다고 생각했지만 마땅히 떠오르는 구실이 없었다. 레퍼런스가 없는 회사에서 만드는 첫 타이틀인 만큼 이 타이틀이 시장에서 성공할 것이라는 근거치가 부족했던 것이다.
“국제그룹이라는 회사가 돈을 떼어 먹지 않겠다고 말씀하시는 건 반대로 이야기하면 만들다가 접어도 좋으니까 해보겠다는 거 아닌가요? 전 크리에이터로서 10년 이상 일해왔지만 이경민씨처럼 넥타이 매고 비즈니스 쪽으로 점철 된 사람이 게임이나 작품 만들겠다고 돌아다녀서 결과물 나오는 경우를 본적이 없어요. 이쪽 세계는 작품에 대한 혼으로 이야기해야 하는데 당신에겐 그것이 부족한 것 같군요”
그제서야 경민은 자신의 복장을 다시 돌아 봤다. 넥타이에 약간 더워 보이는 가을 양복. 확실히 게임을 만드는 사람이나 뭔가 타오르는 사람의 이미지는 아니었다.
“내일부터 오다이바에서 코미케가 있어요. 거기에 출전할 작품 때문에 정신이 없으니 돌아가 주셨으면 좋겠네요. 이만……”
말이 끝나자마자 타카하시는 일어 서서 다시 자신이 작업하던 책상으로 돌아가 버렸다. 옆에서 야노가 뭐라고 말리는 모습이었지만 전혀 눈길도 주지 않았기 때문에 경민은 막연한 생각이 들었다.
‘귀엽다고 생각하다가 한방 먹었군’
돌아오는 차 안에서 경민은 야노에게 물었다.
“야노씨, 타카하시씨는 지금 나이가 어떻게 되나요?”
“지금 23살입니다. 중학교 때부터 그림 그리기 시작해서 시장에서 인정 받은 뒤부터는 고등학교도 중퇴해버리고 지금까지 쭈욱 그림만 그려 왔지요”
“내일부터 코미케 며칠 동안 하는 건가요?”
“일주일간 합니다. 다시 만나보시려면 일주 지나서 약속을 잡아 보도록 하지요”
경민은 깊은 생각에 잠겼다. 이주 정도 머무르면서 계속 졸라 보는 것도 하나의 방법일 것이다. 하지만 그녀가 걸어온 길로 유추해 보건 데, 한번 아니라고 한 것을 다시 뒤집기까지 어떤 결정적인 계기가 없으면 힘들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계기…… 계기란 게 뭐가 있을까……’
20여분 정도 고민하다가 갑자기 퍼뜩 하나의 생각이 떠 올랐고, 곧 바로 경민은 야노에게 물었다.
“야노씨 아키바쪽에 가면 코스프레 매장들 많죠”
“네…… 근데 그건 갑자기 왜?”
“저 아키바에서 좀 내려주십쇼”
“하아?”
야노의 반문에 대답도 않고 경민은 무언가를 계속 생각하는 눈치였다. 야노는 경민이 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궁금했지만, 일단 차를 아키바 쪽으로 돌렸고 얼마 안가 아키바 중앙 도로 변에 경민을 내려 주었다. 경민은 캐비닛 등을 챙겨서 내리며 차 문을 닫기 전에 야노에게 외쳤다.
“야노씨! 이따가 밤 8시쯤에 준비가 끝나면 연락 드릴 테니 그 때 몇 가지 더 부탁합시다”
“네? 준비라뇨? 무슨 준비를??”
“그때 설명 드릴게요. 아무튼 이따 연락 꼭 받아 줘요”
경민은 차문을 닫고 아키바 매장 쪽으로 달려 갔다. 대기업의 비즈니스맨으로 돌아 간 경민은 자신이 하려고 하는 비즈니스에 의해 또 다시 아키바의 뜨거운 공기와 맞닿게 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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