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배를 한 모금 머금었다 내뿜는다. 오늘따라 담배 맛이 왠지 더 역하다. 겨울 공기를 가르고 뿜어진 담배연기, 아무리 깊게 빨아들이려고 해도 아무래도 삼켜지지가 않아 계속 입담배질만 연거푸 하고 있는 희건이었다.
그것은 정말 간만에 찾아온 기회였다. 아니, 어쩌면 마지막으로 찾아온 기회일지도 몰랐다.
결국 부장으로 마감되려 했던 그의 월급쟁이 인생이 이렇게 극적인 반전을 맞이하게 될 줄을 누가 알았으랴. 그간 잘못된 동아줄이라고 생각했던 정철재 이사, 그로 인해 다시 살아나게 될 줄을 누가 알았으랴. 그가 먹었던 썩은 김밥이 그의 썩어가던 인생을 바꿔줄 계기가 될 줄 그 누가 알았으랴.
불과 두 달 전의 일이었다. 사장인 한병주와의 골프약속을 단 하루 앞두고 철재는 저녁으로 먹었던 김밥으로 인해 식중독으로 쓰러져 응급실로 실려갔고, 급성 장염 판정을 받은 채 그대로 입원해 버렸던 것이다. 하지만 차마 약속을 취소시키지 못한 철재는 급하게 희건을 대타로 필드에 내보냈다. 내심 그저 철재 본인의 빈자리를 겨우 메우는 정도만 해줬으면 했던 그의 바람과는 달리 희건의 프로를 외딴친 환상적인 샷과 그 동안의 영업경력을 보여주는 듯한 화려한 입담은 골프광이었던 병주의 마음을 완전히 뒤흔들어 놓았고, 그 날 이후로 병주는 주야장천 희건을 달고 다니다시피 했다. 하지만 병주의 그 괴팍한 성정 덕에, 희건에게는 그 시간들이 고역도 그런 고역이 아닐 수가 없었다. 정말, 이사 진급의 희망만 아니었더라도...
흐려지는 담배연기와 함께 희건의 회상도 흐려져 갔다. 어느새 필터까지 타들어간 담배의 맛은 그사이 곱절은 더 역해져 있었다. 신경질적으로 담배를 비벼 끈 희건은 손목시계를 바라보았다. 6시 반. 탑승수속을 밟기에 조금은 빠듯한 시간이었다. 6시까지 도착하기로 되어있었던 병주는 아직 보이지 않는다. 전화를 걸어보아도, 문자를 보내보아도 돌아오는 것은 그저 감감 무소식에 희건은 생각했다.
‘이런 X새끼, 하여튼 높으신 분들이라는 새끼들은 어떻게 하나같이 그저 자기 생각만 할 줄 아는지. 기다리는 사람도 좀 생각해줘야 할 거 아냐. 제기랄.’
혹시나 누가 들을까 뒤돌아서 들릴 듯 말 듯한 목소리로 욕설을 씨불거리려던 찰나, 그의 어깨를 치는 손에 희건은 내뱉어지던 말을 급하게 주워 삼켰다. 병주의 빙글거리는 얼굴이 희건의 눈에 들어온다. 30분이 훨씬 넘도록 늦게 도착했지만 미안함이라고는 전혀 찾아볼 수 없는 병주의 면상을 보며 희건은 다시 한 번 욕설을 눌러 담은 채로
“사장님. 나오셨습니까?”
깍듯이 90도로 인사를 했다. 그리곤 병주의 트렁크와 골프백을 받아 푸시카트에 실었다.
“그래, 최 부장. 내가 조금 늦었지? 오는데 차가 좀 막히더라고.”
빈말로도 미안하다는 소리가 없다. 새삼 다시 치솟는 짜증을 억지웃음으로 무마시키며 병주를 에스코트하려던 그 때, 병주의 뒤에서 외제차와 함께 서 있는 한 여인의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얼핏 보아도 머리부터 발끝까지 명품으로 도배를 하다시피 한, 돈 기백은 그냥 우습게 넘을 듯한 차림새와, 확실히 돈의 힘이 좋긴 좋은 듯 거짓말 조금 보태서 30대라고 해도 될 정도의, 소위 말하는 엄청난 동안의 미부인. 사실 희건의 기억 속에서 그다지 익숙하다고는 하기 힘든 얼굴이었지만...
“아, 사모님. 안녕하십니까? 이번 출장에 사장님을 모시게 된 제2자재영업부장 최희건입니다. 예전에 필드에 사장님과 함께 나오셨을 때 한번 뵈었던 것 같은데 혹시 기억하시는지요?”
하지만 귀부인은 희건의 접객성 인사에 아무런 대꾸도 없이 그저 고개만 슬쩍 까닥하곤 곧 얼굴을 돌려버린다. 희건의 시선을 피하면서도 정작 본인은 곁눈질로 선글라스 너머로 희건을 슬슬 흘겨보는 것이 아무래도 무언가 단단히 기분이 나쁜 것 같은 모양새였다. 무안해진 희건이 병주를 괜히 재촉했다.
“사장님, 수속 밟으시고 하시려면 조금 서두르셔야겠습니다. 그만 들어가시지요.”
“응, 그래. 가도록 하지.”
병주는 고개를 끄덕이곤 발걸음을 옮기려다가 조금은 냉랭하게 들리는 목소리로 귀부인에게 말했다.
“됐으니까 들어가 봐. 핸드폰 로밍되니까 무슨 일 있으면 전화하고.”
귀부인은 여전히 아무 말도 없이 가만히 희건을 흘겨보다가 입술을 작게 깨물었다. 무에 그리 분노한 것인지, 타인의 눈앞에서 숨기려다 차마 다 숨기지 못한 귀부인의 부들거림을 희건은 읽을 수 있었지만, 본능이 외치는 경고에 차마 언급하지 못하고 애써 모른 척 카트를 밀기 시작했다. 결국 그녀는 병주와 희건이 떠나는 그 순간까지도 한 마디도 않은 채 그저 그 자리에 둘의 뒷모습을 쳐다보며 서 있었다.
“저기, 외람스런 말이지만 말입니다. 사장님. 혹시 사모님...”
“아아, 별 거 아냐. 신경 쓰지 마. 요즘 그 년 의부증이 도를 넘어서...”
희건이 궁금함을 끝내 다 삼키지 못하고 꺼낸 말의 말머리조차 채 듣지도 않고 병주는 시선도 주지 않은 채 내뱉은 욕설로 잘라버렸다.
“아니 그게...저...그런 말이 아니라...죄송합니다.”
“아냐 아냐. 자네 잘못이 뭐가 있나. 마누라가 이상한거지. 잡을 사람이 없어서 어디 생사람을 잡는 건지. 이번 일도 자네랑 같이 출장 가는 거라고 몇 번을 말하는 데도 얼마나 꼬치꼬치 캐묻던지 아주 그냥 진저리가 나서 원...”
그 말을 듣고 희건은 속으로 쓴웃음을 지었다. 생사람이라니. 누구, 병주가? 다른 사람이면 몰라도 병주의 평소 행실을 생각한다면 당연히 의처증이 생길만 하지. 이 늙은이는 그쯤하면 힘이 없어서라도 그만 밝힐 때가 된 것 같은데, 어찌 된 것이 한참은 젊은 희건보다도 성욕이 더 왕성하니 거 참...아닌 게 아니라 당장 이번 필리핀 출장만 하더라도 밤에 무슨 일이 벌어질지는 불 보듯 뻔한 게 아닌가. 거기에까지 생각이 미치자 희건은 집에 남겨두고 온 아내에게 새삼 미안함을 느꼈다. 하지만 어쩔쏘냐, 그것이 회사원 인생인 것을.
“그래도 자네도 봤듯이 그 때 공항까지 따라 나왔지 않나. 뭐, 성깔이 조금 풀려서 꼴에 배웅이랍시고 나온 건지, 아니면 제 눈으로 직접 확인하려는 건지는 모르겠다만...하여튼 자네는 그냥 오늘 라운드에만 집중하게. 내가 요즘 자네 덕분에 실력이 얼마나 늘었는지 아나? 근래 들어서는 자네 종종 내게 지지 않나. 크헛헛헛.”
역시나, 희건이 제 실력에 맞춰주고 있다는 사실을 당연히 깨닫지 못하는군. 멍청한 늙은이. 희건은 가슴 속에 지었던 쓴웃음을 더욱 깊게 그리며 골프백을 매었다. 그리곤 다른 한편으로 저 추물의 아내인 그녀를 아주 깊이 동정했다.
마닐라에서의 시간이 어느덧 흘러 나흘째로 접어들 무렵의 새벽, 잠잠하던 병주의 핸드폰이 병주의 벗어놓은 바지 속 호주머니에서 요란하게 울렸다. 양쪽으로 필리핀 여인 둘을 끌어안고 있던 병주는 이를 무시하려고 했지만 거듭 울리는 벨소리에 짜증을 내며 핸드폰의 배터리를 뽑아버렸다.
한참 뒤, 누군가가 문을 노크했다. 문을 열자 필리핀인 직원이 서 있었고, 그는 잔뜩 뿔이 서 있던 병주의 표정에 쩔쩔매며 전화를 건네주었다.
“여보세요. 에이 X발, 누구야? 왜 전화한 거야?”
잠시 후, 병주의 얼굴에서는 표정이 사라졌다.
희건은 정신을 차리기가 힘들었다. 그 날 새벽, 병주는 술에 만취한 채 잠들어있던 그를 깨웠고, 바로 귀국행 비행기를 급하게 잡아탔고, 또한 바로 경찰에 출석요구를 받았으며, 그리고 지금은 영화에서만 보던 그 장면이 눈앞에 펼쳐져 있는 것이었다.
희건이 앉은 책상 위에는 사진이 몇 장 펼쳐져 있었고, 개중에는 보기만 해도 끔찍한 누군가의 시신을 담은 사진도 있었다. 시신의 얼굴은 고통으로 흉측하게 일그러진 데다 이미 부패가 어느 정도 진행되어 완전히 엉망이 되어 있었지만 희건은 그 시신이 입고 있던 옷만큼은 알아볼 수 있었다. 그것은 분명 출국 날 보았던, 보기만 해도 주눅이 들게 만들던 바로 옷들이었다. 희건은 떨리는 몸을 겨우 바루며 고개를 끄덕였다.
“예...맞습니다...”
요컨대 정리하면 이런 것이었다.
희건과 병주가 마닐라로 떠나고 나흘 째 되던 날, 즉 12월 17일 새벽, 병건의 주택에 고용된 가정부 백미진이 출근해 현관을 열었을 때 현관문은 평소와 달리 잠겨있지 않았고, 문을 열자마자 집안에 퍼져있던 너무나도 심한 악취에 무언가가 잘못된 것을 알아차리곤 집안을 둘러보았는데...집안은 온통 난장판이 되어 있었고 안방에서 부패하고 있던 여성의 시신이 있었더라는 것.
시신은 침대 위 전기장판 위에 누워 있었으며 전기장판이 켜져 있던 터라 부패가 생각보다 빠른 속도로 진행되었다고 했다. 덕분에 시신의 사망추정시각을 특정하기가 힘들었으나, 희건의 증언과 그 날 타고 나갔던 외제차의 블랙박스 시간으로 확인했을 때 최소 그 이후에 사망한 것으로 보이며 전기장판으로 인한 빠른 부패속도를 감안한다고 하더라도 늦어도 이틀 내지 사흘 전에는 이미 사망한 상태였을 것으로 보이므로, 결국 사망한 날짜는 희건과 병주가 마닐라로 떠난 날, 즉 14일 밤 전후로 추정된다고 했다.
시신의 사인은 질식사였는데 목에 있던 장갑 형태의 교흔으로 보아 가죽장갑을 낀 손으로 목을 졸라 교살된 것으로 추정된다고 한다. 또한 손 크기로 봤을 때 범인은 남자일 가능성이 아주 높다고 했다.
엉망이 된 집안은 누군가가 서랍 등을 마구잡이로 뒤진 모습이었고, 금고를 열려던 시도는 있었지만 실패한 것으로 보이며, 그 외에 드러났던 현금이나 패물들은 거의 대부분 도난당했다고 했다. 이에 경찰은 주변 보석상들과 장물아비 용의자들에게 염문해보았지만 도난품들은 아직 들어오지 않았다고 했다.
그리고 그 시신의 정체는 당연히 한병주의 아내, 박수정의 시신이었다.
이에 경찰은 급하게 연락을 했고, 필리핀에 있던 희건과 병주는 일정을 채 다 채우지 못하고 급하게 귀국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었다.
즉, 전형적인 특수강도사건으로 보이는 사건이었다. 이에 경찰은 1차 시나리오를 세웠다.
범인은 병주의 마닐라 행을 알고 있었음. 하지만 정보의 오류로 인해 수정이 병주와 함께 떠날 것으로 예상했을 것으로 보이며, 이에 빈집털이를 계획. 병주가 떠난 14일에 실행했으며 야간에 침입. 하지만 범인의 예상과 달리 수정은 안방 침대 위 전기장판에서 자고 있었기에 범인이 안방에 도달하자 수정이 깨어났고 이에 당황한 범인은 우발적으로 수정을 교살. 이 후 금품을 털어 문도 잠그지 않고 급하게 도망간 것으로 보임.
이렇게 가설을 세운 경찰은 사건을 강력계로 넘긴 후 수사를 시작했던 것이다.
희건은 지끈거리는 관자놀이를 눌렀다. 머릿속이 너무나도 복잡했다.
불과 며칠 전 보았던 사람인데 이렇게 시신이 되다니, 사람일은 참 모르는 것이라고. 그 정도 위치의 사람이, 세상 무서울 것 없이 살던 사람이 이렇게 비참하게 가는 것도 믿기지가 않노라고. 병주가 마닐라에서 추태를 보일 때마다 느꼈던 그녀에 대한 연민은 또 무엇이었단 말인가. 나는 지금 왜 이렇게 조사를 받고 있는 것일까. 제기랄, 인생 마지막으로 금밧줄 타보나 했는데 이렇게 또 꼬이는 건가. 사장, 아니 한병주...그 놈은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수정을 상당히 싫어하는 것 같아보였는데...속으로는 시원하다고 생각하고 있지 않을까. 아니, 아니 그게 아니야. 나는 왜 대체 지금에 와서 이렇게 아등바등 거리고 있는 것일까. X발, 이게 대체 무슨 짓이야.
연거푸 줄담배를 피워보아도 잡념들이 가시기는커녕 더 또렷해진다. 역시나, 오늘도 역할 뿐이다. 병주를 만나고 난 후부터 이 놈의 담배가 달게 느껴지는 날이 없다.
“X새끼.”
고개를 처박고 키보드를 두들기고 있던 형사가 고개를 들어 놀란 눈으로 희건을 쳐다본다. 에라, 듣건 말건, 이제야 그 동안 속에 담아뒀던 그 한마디를 꺼낸 것이다. 어차피 꼬인 일. 무엇을 할 수 있으랴. 결국 희건이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경찰을 믿고 기다리는 일밖에 없지 않은가.
하지만 수사가 본격적으로 진행되면서 경찰들은 곧 난관에 봉착했다.
가장 결정적인 증인이 되어줄 병주는 시신을 확인한 그 순간부터 심하게 충격을 받은 듯 침울한 얼굴로 아무런 말도 꺼내지 않았기에 결국 주변 인물들의 증언에서부터 조각을 맞춰갈 수밖에 없었다.
일단 병주 부부의 가택은 단독주택으로 넓은 정원과 연못이 있는 3층 복층구조의 고급저택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아무런 경비시설이나 사설 CCTV가 마련되어 있지 않았고, 또한 거리에 설치된 공공 CCTV 또한 병주의 집 주변 거리를 비추는 위치의 것은 없었다. 즉, 영상자료로서 증거는 사실상 하나 밖에 없었던 것인데, 이 유일하게 확보된 영상자료가 바로 병주 명의의 외제차 블랙박스 영상이었다.
이 블랙박스에는 병주가 마닐라로 떠난 뒤 저녁 8시에 가택의 차고로 운전되어 들어오기까지 공항으로의 왕복운전 과정이 녹화되어 있었다. 영상은 차량의 전면부를 촬영하는 모델이었고 다행히도 움직이는 물체가 없으면 녹화가 진행되지 않았기에 시간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삭제되거나 덮어 쓰여 지지 않은 영상을 확보할 수 있었다고 한다. 다만 경찰이 본 영상을 샅샅이 살펴보아도 영상에서 다른 특이한 점을 찾을 수는 없었다고 했다.
가장 큰 문제로, 사건현장에선 족적은 물론이고 아무런 지문조차 찾을 수가 없었다. 병주 가족들의 흔적들은 남아 있는 것으로 보아 범행 후 닦아내거나 한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남기지 않은 듯 보였다. 현관의 도어락도 범인이 비밀번호를 알고 있었는지 강제로 뜯어내거나 한 흔적도 없었고, 창문은 모두 닫힌 채 잠겨있었다.
그나마 집안에서 찾을 수 있었던 단서는 체모였는데, 사장 부부의 것을 제외하고 발견된 체모는 남자 셋 여자 셋, 이렇게 총 6명의 체모를 찾을 수가 있었다.
분석 결과 여자는 가정부 백미진, 그리고 병주의 외동딸 한정아의 것이었고, 나머지 하나는 신원미상의 여성체모였다. 이는 미진의 증언으로 말미암아, 10일에 병주의 집에 찾아왔던 여성손님의 것으로 추정되었다. 다만 미진은 그녀가 누군지 알지는 못하고, 또한 청소를 하느라 멀리서 보았을 뿐 마주치지는 못했으나, 설핏 보았을 때 처음 보는 인물이었다고 했다. 대충 대화소리를 들어보아 사업계획에 대한 얘기를 했는데, 은행권 금융과 관련되어 초대된 손님이 아닐까 생각한다고 했다. 그 손님은 3시간 정도 머물다가 돌아갔다고 했다.
또한 미진 본인은 일주일마다 병주의 집에 출근하며, 그 외엔 수요일을 제외하고는 각자 다 다른 집으로 출근하는데, 14일엔 다른 지역의 아파트로 일을 나간 것이 확인되었다. 그 외의 인물들에 대한 주관적인 평가는 말을 아끼는 모습을 보였다.
대학원생인 정아의 증언으로는 사실 수정은 정아의 친모가 아니라 친모의 사고사 이후 병주와 십여 년 전 재혼한 계모였고, 정아와는 노골적으로 싫어하는 사이는 아니었지만 서로 마음을 열지 못한 불편한 사이였었다고 했다. 오히려 친부인 병주와의 관계가 최악의 상태였는데, 오래전부터 병주의 문란한 사생활에 대해서 어렴풋이 깨닫고 있었고, 이에 병주에 대해 사실상 혐오에 가까운 감정을 가지고 있었다고 했다. 하지만 사건 전후의 상황에 대해서는 더 이상 대답하지 않았다.
남자의 체모는 수정과 불륜 관계가 의심되는 골프클럽의 강사 김정재, 다른 하나는 정아의 남자친구 임재현, 나머지 하나는 희건의 것이었다.
김정재는 14일 밤에 친구들과 함께 술집에서 술을 마시고 있었으며, 수정과의 불륜 행위 자체에 대해서는 부정했다. 체모의 존재에 대해서는 13일 날 오전 수정의 개인레슨을 마친 뒤, 수정이 상담을 요청, 집에 초대되어 차를 마시며 한정아의 일로 이야기를 했다고 했는데, 그 때 빠진 것이 아닌가라는 의견을 보였다. 상담을 마친 후엔 근처의 식당에서 점심식사를 함께 한 뒤 헤어졌다고 했다.
임재현의 경우, 수차례의 추궁 끝에 정아에게서 듣지 못한 행적을 들을 수 있었는데, 12일 날 병주 부부가 집을 비운 사이 정아가 재현을 집에 데려와 성행위를 하던 중 수정이 생각보다 일찍 돌아왔고, 이 상황을 들킨 후 정아와 수정이 심한 말싸움을 벌였으며, 그 이후 수정은 가출해 집과의 연락을 끊은 채 지금까지 재현이 자취하는 아파트에서 같이 살고 있다는 증언을 이끌어 내었다. 14일에는 정아와 함께 쇼핑을 하러 나갔다고 했으며 확인 결과 백화점 및 재현의 아파트 CCTV에서 증언과 일치하게 두 사람이 출입하는 모습이 확인되었다.
그리고 희건. 희건은 말할 것도 없이 사건기간 동안 병주와 함께 있었으며, 사건 발생 전 병주 부부의 모습을 가장 마지막으로 확인한 사람이었고 공항에서 촬영된 CCTV 역시 그의 증언에 힘을 실어주고 주고 있었다. 희건은 11날 새벽에 만취되어 귀가하는 병주에게 자신의 트렌치코트를 빌려주었고, 그 코트는 아직 돌려받지 못했으며, 체모가 발견된 장소가 코트가 걸려있던 행거 옷걸이 밑인 것을 보아 희건의 체모는 코트에 묻어있다 떨어진 것이 분명했다.
뿌연 CCTV 화면을 15시간 째 바라보고 있던 진우는 죽을 맛이었다. 옆에 쌓인 에너지 음료수 캔은 이미 산을 이루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눈꺼풀이 무거워 도저히 들리지 않았지만, 지금 눈을 감아버리면 아마도 오늘 내로는 다시 눈을 뜨지 못할 것 같다는 생각에 진우는 도리짓을 하며 억지로 억지로 쏟아지는 잠을 쫓아내었다. 그리고 피로로 삐걱거리는 머리를 굴리기 시작했다.
확인된 용의자들의 알리바이는 하나같이 다 확실했다. 분명히 표면적으로 비치는 모습은 특수강도사건,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하지만 무언가 이상했다. 20년 형사생활의 직감은 이 사건에서 묘한 위화감을 알려오고 있었다.
강도 시나리오대로라면 범인은 족적, 지문, 체모조차 남기지 않는 치밀함을 보이는 녀석이었다. 현금은 그렇다손 치더라도, 훔쳐간 금품 역시 소재가 확인되지 않은 것을 본다면 추적을 피하기 위해 아직 현금화하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았다. 그렇다면 녀석은, 분명 만반의 준비를 하고 일을 벌였으리라.
그런데, 그런 녀석이 빈집털이를 계획하면서 수정의 존재여부에 대해서는 정확하게 알지는 못한 채 범행을 계획했다? 아니, 애초에 그간 봐왔던 사건들 중, 이 정도로 깔끔한 강도사건을 본 일이 있던가? 당황해서 우발적으로 수정을 살해했고, 허둥지둥 문도 잠그지 않고 도망간 것으로 보기에는 남겨놓은 다른 단서들이 너무나도 없었기에 오히려 더 작위적으로 느껴지는 것이다.
진우는 부수다시피 전원버튼을 눌러 모니터를 꺼 버렸다. 결국 등받이에 기댄 채 눈을 감는다.
의식이 사라지기 전, 그간 세워두었던 시나리오 따윈 내다버리고 다시 한 번 주어진 단서만을 토대로 사건을 그려본다. 심증은 일단 젖혀두자. 물증은 결국 부패한 시신과 없어진 금품, 블랙박스 영상과 체모뿐.
시신은 침대 위 전기장판 위에서 발견되었으며 켜져 있던 전기장판으로 인해 부패가 빠른 속도로 진행되었기에 정확한 범행시간을 추정할 수가 없었다. 남겨진 손자국은 그 크기나 아귀힘을 봤을 때 남자의 것은 분명했다.
집안의 서랍이란 서랍은 마구 뒤집어져 있었고, 상당량의 금품이 사라졌으며 패물류는 아직 소재가 확인되지 않았다.
현장에서 발견된 체모는 병주 부부와 그들의 딸 한정아, 그리고 그 남자친구 임재현. 고용된 가정부 백미진. 골프강사 김정재. 병주의 회사직원 최희건. 마지막으로 신원불명의 여성 손님.
시간대를 그려보자.
10일, 백미진과 신원불명의 여성이 집에 찾아왔고, 미진의 청소로 인해 그 전에 찾아온 사람의 단서는 남아있지 않겠지.
11일, 희건과 병주는 새벽에 술을 마셨고, 희건이 코트를 빌려주었다.
12일, 병주와 수정은 집을 비웠고, 정아가 재현을 데려왔다가 돌아온 수정에게 발각, 심한 말싸움 끝에 정아는 집을 나갔다. 그 이후 귀가하지 않았고.
13일, 수정은 정재와의 만남을 가졌다. 정재는 점심식사를 한 뒤 떠났다고 했다.
그리고 결정적인 14일, 병주와 희건은 마닐라로 떠났고, 수정은 차를 타고 병주를 배웅했다. 이 모습은 희건의 증언과 공항 CCTV 영상으로 확보. 희건의 말로는 그 때도 둘의 사이가 그다지 좋지 않은 것처럼 보였다고 했다. 희건에게 들은 병주의 말로는 수정에게 의부증이 있었다고 했다. 그리고 20시, 차를 타고 귀가하는 주행과정이 블랙박스에 남아있었고. 따라서 수정은 최소 이 이후에 사망했겠지. 빠른 부패속도를 감안한다고 하더라도 발견날인 17일로부터 늦어도 2~3일 전에는 사망했을 듯하다고 하니 역시 14일. 그렇다면 역시 수정은 14일과 15일 사이 야간에 살해됐을 것이다. 이후 17일에 이르러서야 백미진에 의해 시신이 발견된 것이고.
하지만, 현재까지 알려진 용의자들의 그 시간대 알리바이는 모두 다 확실한 것이 아닌가. 역시 다른 용의자의 소행일 수밖에 없는 것일까.
잠이 마지막 남은 의식을 앗아가려고 하는 순간, 한 줄기 뇌광이 진우의 머리를 때렸다.
물증 가운데 우연으로 넘기기엔 무언가 이상한 점이 하나 있었다. 아 그렇군, 왜 진작 깨닫지 못했을까.
물론 지나친 비약일 수도 있다. 하지만 만약 그렇다면, 진우의 생각이 맞다면, 견고해 보이기만 하던 그들의 알리바이에 작은 틈이 생기는 인물이 나타나게 되는 것 아닌가.
진우의 심장이 마구잡이로 뛰었다. 유레카를 외치고 싶은 심정이었다. 진우는 극도로 상기된 얼굴로 문을 발로 차고 뛰어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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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인은 누구이며 어떤 트릭을 쓴 것일까?
음...엄청 오랜만에 써보는 이런 류의 글이라 생각보다 잘 써지지가 않네요^^;
루리웹 추리/퀴즈 게시판은 처음 들러보는데 생각보다 리젠율이 높지 않군요ㅠㅠ
앞으로 종종 들려서 얕은 실력에나마 조금씩 출제 해볼까 합니다.
잘 부탁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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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병주가 범인일 것 같습니다.. 병주가 범인이라면 외부인의 침입흔적이 없는 이유도 간단하게 설명되지요. 이미 그 집에서 생활하던 가족들이라면 체모와 지문이 나와도 이상하지 않을테니까요. 30분 늦은 것도 수정을 살해하고 현장을 조작하느라 시간이 걸렸던 것 같습니다. 공항에 마중나온 여자는 사실 수정이 아니라 병주와 바람을 피우던 신원미상의 여인이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둘의 관계가 발각된 뒤 수정을 살해하고, 수정의 옷차림을 하고 수정인 척 공항까지 따라 나왔을 것입니다. 일부러 눈에 띄는 옷차림을 한 것도 수정의 옷이라는 사실을 희건에게 각인시키기 위함이었겠지요. 이미 부패해버린 시신을 봐도 희건은 원래 수정의 얼굴을 모르니 옷만을 보고 공항에서 본 여인이라고 착각했을 것이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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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병주가 범인일 것 같습니다.. 병주가 범인이라면 외부인의 침입흔적이 없는 이유도 간단하게 설명되지요. 이미 그 집에서 생활하던 가족들이라면 체모와 지문이 나와도 이상하지 않을테니까요. 30분 늦은 것도 수정을 살해하고 현장을 조작하느라 시간이 걸렸던 것 같습니다. 공항에 마중나온 여자는 사실 수정이 아니라 병주와 바람을 피우던 신원미상의 여인이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둘의 관계가 발각된 뒤 수정을 살해하고, 수정의 옷차림을 하고 수정인 척 공항까지 따라 나왔을 것입니다. 일부러 눈에 띄는 옷차림을 한 것도 수정의 옷이라는 사실을 희건에게 각인시키기 위함이었겠지요. 이미 부패해버린 시신을 봐도 희건은 원래 수정의 얼굴을 모르니 옷만을 보고 공항에서 본 여인이라고 착각했을 것이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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