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교 1학년
도서관에서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초판본을 훔쳤지*
밤새 경찰들이
내가 살던 판잣집을 포위하고
도적은 나와라
도적은 나와라
마이크로 부르는 악몽에 시달렸지
다음날 아침
도서관 서가에 가만히 동주를 세워두고
다음날도
다음날도
그 앞에 서서 보았네
보다가
보다가
당신만큼 쓸쓸하고 순정한 시를 쓰리라
혼자 다짐했네
* 내가 다닌 고등학교의 도서관은 개가식이었다. 어느 날 책꽂이 뒤
에서 먼지와 쥐똥 범벅인 책 한 권을 보았다. 윤동주의『하늘과 바
람과 별과 시』초판본이었다. 교복 안에 시집을 숨겨 도서관을 나오
는데 천둥과 벼락이 함께 몰아치는 느낌이었다. 밤새 경찰에 쫓기는
꿈을 꾸다 다음날 시집을 책꽂이 맨 아랫줄 모퉁이에 꽂아두고 나오
니 마음이 편안해졌다. 그뒤로 사흘 동안 시집이 제자리에 꽂혀 있
는 걸 보았고 나흘 뒤부터 시집은 보이지 않았다. 나와 동주의 짧
은 인연이라 할 것이다.
푸른 용과 강과 착한 물고기들의 노래
곽재구, 문학동네시인선 1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