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소이유서
장백산 줄기줄기 피어린 자욱
압록강 굽이굽이 피어린 자욱
……
28살 무렵 ‘한라산 필화사건’으로 구속되었을 때
적의 심장부에 두번째 폭탄을 던지는 심정으로
항소이유서에 ‘김일성 장군의 노래’ 가사를 썼다.
담당 변호사가 급히 교도소로 달려와 말을 더듬거리며
“다,당신, 주, 죽으려고 환장했느냐.
지금 검찰과 법원까지 발칵 뒤집혀 황교안 공안검사가
이자는 손목을 잘라 평생 콩밥을 먹이겠다고 난리”라며
잔뜩 흥분해 소리쳤다.
그리고 여죄를 캐며 추가조사에 들어간다고 했다.
난 아무 말 없이 창문 밖의 하얀 자작나무만 쳐다보며
저 백척간두의 꼭대기로 망명하고 싶다고 생각했다.
얼마 전 김수영 시인의 미발표 유고시 발굴 기사가 나왔다.
표현의 자유를 개탄한 ‘김일성 만세’라는 작품이었는데
4ㆍ19혁명 뒤에 썼다가 발표되지 않고 50년 후 공개되었다.
유통기한이 지난 약처럼 공개되어도 안전할 때 공개되었다.
허용된 무기는 이미 무기가 아니다.
모두 김수영 신화만 덧칠할 뿐 썩은 사과라고 말하지 않았다.
아마 그때 129번째쯤 자작나무 잎을 세다가 멈춘 것 같은데
갑자기 상처 입은 새 한 마리가 날아와 가지에 앉더니
나에게 항소하듯 잠시 눈부시게 피어올랐다가
이내 담장 너머로 이송되었다.
담장 안에는 아직도 하얀 유골 같은 자작나무들이 자라고
있고
난 여전히 망명도 못한 채 혼자 불을 피우고 혼자 불을 끄며
저 지극한 난공불락의 자작나무 꼭대기만 쳐다보고 있다.
악의 평범성
이산하, 창비시선 45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