끄라스끼노
국경 마을의 햇빛은
자작나무 이파리 위에서 푸르다
끄라스끼노
여기서 북쪽으로는 블라지보스또끄와 우스리스끄가 나
오고
여기서 서쪽으로는 훈춘과 도문 연길이 나오고
여기서 남쪽으로는 나진 선봉 청진이 나온다지
동쪽으로는 끝없이 푸른 북태평양
붉은 벽돌 위 아직도 레닌의 초상화가 남아 있는
국영상점에서는 한국산 라면과 식용유가 팔리고
올해 아홉살 러시아 소년이 다가와
담배 한 개비만 달라고 손을 내민다
개펄 내음 씽씽 번지는 바닷가에서
해삼을 말리고 있는 조선 사내의 원적지는 회령
선 굵은 함경도 사투리로
남선과 북선이 왜 하나 될 수 없는가 묻는다
할 말이 없는 나는
회령에 친척들이 남아 있는가 묻고
홀어머니와 할아버지가 살아 계신다며
그는 눈물을 글썽인다
그래도 일년에 한번 식량과
돈을 마련해 고향땅을 밟을 수 있는 자신은 행복하다고
헤어지며 그는 내 손에 장백산 담배 한 갑을 쥐여주었다
끄라스끼노
백년 전 이쪽 땅에 둥지를 틀었던
흰옷 입은 사람들 흔적은 없고
타지크스탄에서 우즈베키스타에서 카자흐스탄에서
그보다 더 멀리는 흑해 연안에서
말 잃고 글 잃고 재산과 노력영웅 칭호도 다 잃은 사람들
얼굴빛만 그대로 남아 원동 땅으로 돌아오는데
끄라스끼노
국경 마을의 햇살은
살빛 맑은 바닷가 모래 위에 빛난다
와온 바다
곽재구, 창비시선 34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