낭만주의
저 변산반도의 사타구니 곰소함에 가면
바다로부터 등 돌린 폐선들,
나는 그 낡은 배들이 뭍으로 기어오르고 싶어할지도 모른
다고 생각한 적이 있다
뭣이? 바다가 지겹다고?
나는 시집을 내고 받은 인세를 모아서
바다에 발 묶인 배 한 척을 샀던 것이다
세상에, 아직도 시를 읽는 사람이 있나, 하고
너는 마치 고장난 엔진처럼 툴툴거리겠지
하지만 말이야, 배를 천천히 뭍으로 올려놓는 순간,
그 어둡던 바다도 배도 단번에 환해졌단다
그때 덩달아 끼룩끼룩 울어준 것은 갈매기들이었고
너는 이해할 수 없다고, 바다만 바라보겠지
나는 배를 데리고 갈 방도를 생각하느라
이십 년 동안이나 끙끙대며 시를 쓴 것 같다
배를 분해해서 옮기는 일은 재미가 없을 테고
트럭 짐칸에다 배를 통째로 태우는 건 더 우스꽝스런 짓이지
그래서 밀고 가기로 한 것이다
귓불이 연하고 빨간 아이들이 조기떼처럼 재잘대며 배를
따라왔던 거야
생각해봐, 여러 개의 손들이 한꺼번에 배를 민다고 생각해봐
배도 힘이 났던 거야
국도를 타고 가다가
지치면 미끄러운 보리밭으로도 가고……
배를 밀고 가는 나를 보았다면, 너는
시계를 들여다보며 핑계를 대거나, 미친 짓이라며 손가락
질했겠지
나는 배를 잠시 멈추고 네 귓구멍이 뻥 뚫리도록 뱃고동을
울려주었을 거야
詩를 읽는 시간에 자신을 투자할 줄 모르는 인간하고는
놀지 않겠다, 절교다, 하고 말이야
나는 장차 배를 밀어 산꼭대기에 올려놓을 것이다
무엇 때문에 배를 산꼭대기로 밀고 올라가느냐고?
다 알고 있겠지만, 나는 시인이거든
내가 항해사였다면 배를 데리고 수평선을 꼴깍, 넘어갔을
거야
아무것도 아닌 것에 대하여
안도현, 문학동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