쇠파이프를 든 히나코의 강렬한 이미지 하나만 보고 구입했던 게임, 드디어 진 엔딩까지 봤습니다.
일단 결론은 꽤나 재밌었다는 것입니다. 물론 뭐랄까 게임 플레이와 스토리 텔링에서 삐걱거리는 부분이 있긴 했지만, 그것이 진 엔딩까지의 여정을 막지 않았다는 점에서 저에게 꽤나 취향인 게임이었나 봅니다.
평소에 3D 멀미와 자원 압박을 견디지 못 해서 공포 게임은 잘 안 하기 때문에 이번 작품이 사일런트 힐 시리즈 중에 처음한 게임이었는데요. 그래서 그런지 시리즈 전통이 이렇다 저렇다 하는 기준이 없어서 다른 분들보다 기준이 하나 더 적었던 것도, 지금 나오는 세간의 평을 봤을 때 다행이었던 것 같습니다.
게임 플레이 면에서는 타격감 하나는 일품이라서 싸우는 맛이 있었는데, 액션게임에서 기본인 록온과 호밍이 미묘해서 참 곤혹스러웠네요 ㅋㅋ 특히나 분명 맞을 만한 거리인 거 같은데 ‘혼신의 일격’의 호밍이 발동하지 않아 닿지 않았을 때의 좌절감이 굉장히 컸습니다…
후우, 거기다가 앞서 말씀드렸듯이 공포 게임 내성이 없어서 제가 몬스터가 돌아다니는 상황에서는 심리적 압박 때문에 퍼즐(길찾기 포함)을 잘 풀지 못 하다보니, 초중반에 마을이랑 숲에서 적극적으로 전투를 진행하다가 내구도가 간당거리는 것이 너무 압박이었네요.
난이도가 ‘이야기 중시’가 아니었다면 끝까지 못 했을 거 같아요.
그래도 회차 넘어가면서 광선검(!)과 영도, 그리고 내구도 관련 부적을 얻고 나서는 전투가 꽤 맛도리더라고요 ㅋㅋ 영도가 진짜 쓰는 맛이 좋았습니다.
스토리 면에서는, 저는 오컬트가 가미된 창작물에서 딱히 현실의 논리에 이야기를 맞추려고 하지 않는 경향을 가진 덕분에 물 흐르듯이 술술 진행했네요. 어차피 스토리 엔딩이 3개나 있으니 지금 모르는 얘기는 다음 회차에 나오겠거니, 하고 딱히 고민하지 않으면서 진행했습니다.
2회차부터 인간 하나를 둔 신과 신의 대리전이라는 소재가 펼쳐지면서 꽤 흥미로웠습니다. 한국 영화 중에 ‘사바하’ 생각이 났고, ‘곡성’도 생각이 났네요 ㅋㅋ
그리고 그렇게 ‘신’이라는 상위의 존재가 인간의 인생을 좌지우지하는 상황이, 두 가문의 ‘매매혼’이라는 히나코의 상황과 결부되는 것도 꽤 재밌는 연결이었다고 생각합니다.
회차진행이라는 방식 자체는 음… 이게 텍스트 위주 게임이었다면 용기사07의 능력이 십분 발휘됐겠지만, 이게 새로운 적, 새로운 공간 만드는 것에 돈이 어마어마하게 드는 3D 호러 액션이다보니 회차마다 정말 조금 연출이 바뀌는 정도고, 결국 문서 같은 컬렉터블 요소로 단서를 제시하는 게 아쉬웠습니다. 차라리 컷씬이 완전히 똑같으면 컷씬 스킵이라도 할텐데 정말 미묘하게 바뀌다보니 꾸역꾸역 전부 다 보느라 고역이었네요 ㅋㅋ 똑같은 퍼즐을 몇 번이고 다시 푸는 것도 너무 귀찮았고요.
하지만 그래도 회차진행으로 진 엔딩을 봤던 이유는… 히나코 때문이었네요.
나이를 먹어 가면서 적당적당히 사회적 스탠다드에 맞춰 레일대로 갈 수 있는 삶이 있다면, 그와 반대로 그 스탠다드에 맞출 수 없거나 맞추고 싶지 않고 싶어하는 삶도 있다는 것을 알게 되잖아요?
그리고 그걸 관조하는 쪽도 어떤 부분에서는 스탠다드에 맞다가도 어떤 부분에서는 스탠다드에 맞추지 못 하는 부분도 있기 마련이고요.
그걸 알다보니 히나코가 어떤 해답을 얻을 수 있을지, 그걸 제 손으로 보고 싶었어요.
물론 어떤 결론이 날지 대충 예상은 되긴 했습니다. 누가 이런 소재 가지고 ‘그냥 남이 하라는 대로 해라’라는 엔딩을 낼 수 있겠습니까…
그래도 진 엔딩 루트에서 각 등장인물들이 정도와 방향의 차이가 있지만 어떤 사회적 압박을 받고 있었는지, 그리고 그걸 어떻게 직시하고 있는지 풀어 줌으로써 1, 2회차에서처럼 히나코에게 압력을 가하려고만 하는 존재가 아니라 ‘모든 사람에게는 각자의 사정이 있고, 각자가 제각각의 사회적 압력을 받으며, 각자의 자리에서 할 수 있는 만큼 저항하려고 노력하고 있다’는 것을 차분히 알아가는 것은 좋은 흐름이었다고 생각합니다. 린코, 사쿠코, 엄마, 아빠 심지어는 여우(!)까지…
그리고 결론에서 ‘선택의 미덕은 가장 이득이 큰 결과를 고르는 게 아니라 자신이 주체성을 가지고 최선을 다해 고민하는 것 그 자체에 있다’는 메시지와, 그에 연계해서 ‘주변에서는 선택을 해야하는 당사자에게 자신을 투사하여 선택을 종용하지 말고 기다려라’는 의미로 ‘조용해진 에비스가오카’를 연결시키는 것도 꽤나 인상적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러기 위해서 히나코가 히나코를 설득하는 대사는 꽤나 구렸다는 생각이 듭니다…ㅋㅋㅋ ‘피가 섞이지 않은 엄마도 아빠를 이해하는데, 우리는 피가 섞였잖아!’라는 대사는 21세기에는 좀… 아무리 히나코가 20세기 사람이라지만… ‘납득은 하지만 이해와 용서는 하지 못 한다’는 결론은 마지막 남은 용기사07의 양심이었을까요? 흠… 60년대라서 경찰서 가는 선택지가 없었다는 것이 아쉽습니다.
휴, 거의 일주일을 사일런트 힐f만 했으니 이제 다른 게임도 좀 해봐야겠네요.
이제 소설판도 나온다는데, 게임도 재밌게 했으니 혹시라도 정발되면 한 번 읽어보고 싶습니다.
PS. 소설판에는 게임에선 반면교사로서 피상화된 히나코의 언니 얘기가 있었으면 좋겠네요. 디테일이 제일 궁금한 등장인물이에요. 다들 어떤 인물의 디테일이 궁금하신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