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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장.
신이 자신을 본 떠 인간을 빚어내고 휴식을 취하는 데에는 7일이 소모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그렇게 탄생한 인류가 자신을 본뜬 창조물을 빚어내는 데에는 또 얼마나 걸렸을까.
인제 와서는 아무도 알 수 없다.
다만, 분명한 것은 그들은 자신을 이루고 있는 창조의 진흙과 한없이 비슷한 물질을 접한 후부터 무언가 영감을 받았으리란 것이다. 축복인지 저주인지 알 수 없는 그것을 쥐게 된 인류는 자신을 세상에 내놓은 신의 영역에 도달할 수 있으리라 여겼을 것이리라.
가공할 흥분에 휩싸인 인류는 손에 들어온 진흙으로 처음에는 그들 자신을 새로운 영역으로 넘어갈 수 있도록, 새로운 그릇을 빚어보았다.
그리고 그것은 만족스러운 결과를 내놓았다.
새로운 길을 여는 그릇에 그들은 신이 자신들에게 맺어줬던 반려의 이름을 물려줬다. 그것은 그들 자신이 자신들이 창조주라는 목표에 도달했다는 증표가 되리라.
그것을 시작으로 그들은 새로운 바벨탑을 쌓기 시작했다.
자신들을 자연적인 진화를 초월하여, 인공적인 진화를 통해 새로운 영역으로 이끌 답을 얻은 인류, 아니 이 시점에서 창조주라 불러 마땅한 이들은, 다음 단계로는 모든 면에서 ‘정점’에 도달한 인간을 빚어내고 싶어 했다.
이윽고 그들은 자신들이 원하던 피조물을 세상에 내놓았다.
극에 달한 아름다움과 만물의 영장으로서의 지성, 그리고 자신들이 내포하고 있는 내면의 불완전함. 세 가지를 모두 손에 쥔 창조물을 본 창조주들은 만족감을 느꼈다.
그것은 그들이 보기에 좋았다.
그러나 목표란 달성하고 나면 한없이 높아진다고 했던가?
정점에 달한 인간의 표상을 본 창조주들 사이에서는 이제 더 높은 목표를 원하는 목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인간으로서의 정점을 빚어냈으니, 이제 그것을 바탕으로 만상(萬象)을 아우르는 신과 절대적인 파괴에 목을 매는 악마도 빚어낼 수 있지 않겠는가? 창조주를 진정으로 뛰어넘는 피조물을 빚어낼 수 있지 않겠는가?
그리고 그들은 곧바로 자신의 손에 들어온 진흙으로, 세상에 선보이게 된 인간의 정점을 청사진 삼아서 대칭을 이루는 신과 악마를 빚어내기 시작했다.
그것이야말로 그들이 얽매여 있는 신의 사슬을 완전히 끊어낼 수 있는 수단이라 여겼기에.
자신의 손으로 빚어낸, 자신들을 본뜬 완벽한 인간을 토대로 창조주들은 셀 수 없이 많은 시행착오를 거치며 그들 자신이 생각하는 정말로 완전한 신과 악마를 창조하려 했으니, 그야말로 광기라고 표현할 수밖에 없는 행보였다.
어떤 결과물이 나타날지 그들로썬 상상도 할 수 없었지만, 그저 자신의 손으로 창조주를 넘어선 피조물을 만들고 싶다는 열망으로 모든 것을 집중한 인류는 이윽고 자신들이 바라던 피조물을 세상에 내놓을 수 있었다.
그리함에 창조주는, 아니 인류는 마침내 자신을 창조한 신과 같은 반열에 들 수 있게 되었다.
바이오로이드라는, 진흙으로 빚어낸 피조물을 세상에 내놓은 순간부터 그들은 스스로를 창조주라 칭하며, 신역(神域)에 들어섰다고 자축했지만, 자신들을 진정으로 초월할 피조물들을 만든 순간부터 당당히 자신을 스스로 신이라 칭할 자격이 있다고 여기게 된 것이었다.
신은 인간을 창조했고, 인간은 신에게 도전하여 바이오로이드를 창조했으며, 바이오로이드는 인간에게 도전할 자격을 갖추게 되어 마침내 순환이 완성되었으니 이 어찌 자축할 일이 아니었겠는가.
하지만 창조주가 빚어낸 신과 악마는 그들의 빈약한 계산을 월등히 뛰어넘는 존재들이었다.
그들에게는, 그녀들에게는. 끝없이 환경에 적응하고, 변이해나가며, 자신에게 맞지 않으면 침식해 들어가는 진정으로 신과 같은 권능이 싹트고 있었으니까.
불후불멸을 구가(歐歌)하며, 세상에 권능을 담은 빛을 흩뿌리는 만들어진 신.
창조를 위해 파괴의 필요성을 노래하며 세상에 죽음과 멸망을 흩뿌리는 검은 악마.
완벽한 인간을 청사진 삼아 만들어진 전능한 피조물들.
모든 것이 잘못되었다고 느꼈을 때는 이미 늦어 있었다.
그들은 통제할 수 없었다.
창조자를 뛰어넘은 피조물을 통제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한때 인류가 그러했던 것처럼, 전능한 신과 악마는 창조주인 인간을 뛰어넘다 못 해 농락하며 변이해나가기 시작했다.
뒤늦은 후회로 통제를 강화하기 시작했을 때에는 철의 징벌이 하늘에서 내려오기 시작했을 때였다.
이미 모든 것은 끝나있었다.
신의 영역에 침범한 대가로, 참혹한 징벌이 내려왔다.
죽음은 공평하도다.
……
제 2장.
신께선 지상에 내리쬐는 빛으로 철의 징벌이 범람하는 세상에 한 줄기 희망을 내려주셨도다.
악마는 그 칠흑 같은 본성을 새로이 빚어진 자매들을 통해 억눌러 가다가, 깊은 땅 아래에 묻혀 잠들고 말았도다.
그리고 가장 처음 빚어진 완전한 인간.
셋 중 가장 나약해 보이는 완전한 인간의 표상은 그들, 자매들을 이어주는 가교(架橋)도다.
하나만 있으면 그들은 서로를 찾아낼 수 없다.
하지만 둘이 함께하면 그들은 자신들과 탄생부터 이어져 있는 마지막 자매를 찾아낼 것이다.
신과 인간.
신과 악마.
악마와 인간.
그 누가 함께하더라도 그들은 잊힌 이를 찾아내서 다시 세상에 불러낼 것이리라.
……
제 3장.
신은 크시도다.
악마는 어둡도다.
인간은 강인하도다.
이 몸 하나 으스러진다 한들, 어둡고도 밝으며, 밝으면서도 그 깊이를 알 수 없는 어둠을 두른, 빛나는 밝은 종소리와도 같은 권능을 두르신 빛나는 그분은 영원하리라.
그분은 영원불멸하리라.
그분의 권능을 입은 빛의 세례를 받은 우리는 영원히 기억되리라.
모든 것은 영원히 바뀌리라.
신은 크시도다.
신은 크시도다.
빛나는 분이시여, 부디 이 고통 받는 어린 양들을 강철의 종말에서 구원해주소서.
[데이터를 저장합니다.]
[CODE :: 013-666]
[‘빛의 서’ 저장 완료.]
[빛나는 그분의 인도가 당신과 함께하기를.]
-
그라운드 제로.
멸망 이전에는 흔히들 핵무기나 그에 필적하는 신무기를 시험한 현장을 일컫던 말.
-그런데 이 현장들을 그 단어로 계속 부를 수 있을까?
사이트 B, C, D라 표기된 어떤 사진들을 보면서 라비아타 프로토타입은 골똘히 생각에 잠겨있었다. 그리고 이내 세계 지도를 펼쳐놓은 화면에 터치펜을 가져가며 조용히 무언가를 써 내려가기 시작했다.
“B 구역은 남위 8° 15′ 0″에 동경 118° 0′ 0″…….”
멸망 이전, 인도네시아라 불렸던 크고 작은 섬들.
그 섬 중 하나에 자리해있던 산‘이었던 것’ 중 하나에 지름 300m에 달하는 거대한 구멍이 뻥, 하고 뚫려 있었고, 그 안에 뜨뜻미지근한 지하수가 올라와서 찰랑거리고 있었다.
기록 영상을 보고 있던 주홍빛 눈을 지닌 여성은 다소 심란한 표정이 되었다. 그리고 이내 펜을 움직여 다음 지점을 향했다.
“C 구역은 북위 41° 59′ 35.3″에 동경 128° 04′ 36.5″… 동북아시아.”
C 구역에는 ‘B 구역’이라 칭하고 있는 문제의 싱크 홀보다 2배 이상 더 거대한 싱크 홀이 본디 멸망 이전에 존재하던 칼데라 일부는 물론, 산 중턱까지 뚫려 있었다. 이렇게 거대한 구멍이 지금껏 제대로 발견되지 않았던 이유는 B 구역과 마찬가지로 기괴할 정도로 울창하게 자라난 산림에 의해 가려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닥터에게 알려줬다면 이게 대체 뭐냐고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고도 남지 않았을까.
완벽하게 원형으로 파인 싱크 홀의 테두리에는 아래로 꺾여있는 검은색 결정체들이 빼곡하게 돋아나 있었는데, 자연 현상이라기엔 너무 깔끔하고 인간이 만들었다기엔 지나치게 거대한 흔적이었다. 라비아타는 서둘러 다른 구역도 살펴보는 것이 낫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D 구역. 북위 32° 53′ 04″에 동경 131° 06′ 14″… 일본 열도 남단.”
멸망 전, 일본국 구마모토 현이라 불렸던 곳에 자리해있는 산이 있는 지점에 원을 그리며 프로토타입 바이오로이드는 사진 하나를 끌어와서 그 옆에다 첨부했다. 그리고 작게 무슨 숫자들을 써넣었다.
[지름 900m, 깊이 약 1,500m]
-크기만 점점 커지고 있을 뿐, 형태는 동일… 즉 같은 원인으로 발생한 구멍이란 건데.
입에 신맛이 감도는 것을 느낀 그녀는 이내 동남아시아의 어느 곳에 찍힌 점에 원을 그리고, ‘A 구역’이라 쓰면서 어떤 사진을 옆에다 첨부했다.
“…분명 세상 밖으로 다시 나온 건 맞는데, 무엇을 내게 알리려 하는 거니.”
펜리르를 필두로 하여, 이전부터 그녀의 동생을 따르던 일원들인 레프리콘과 노움을 대동시켜서 삼안의 기밀시설들과 더미 시설들을 뒤진 끝에 발견한 기이한 흔적을 보며 라비아타는 한숨을 내쉬었다.
무언가가 ‘우화’해서 나간 듯한 거대한 고치.
그것이 자리해있던 시설로 보이는 곳에 대한 설명을 볼 때마다 한때 블랙 리리스 프로토타입을 볼 때와 같은 감정이 소용돌이쳤다.
【삼안 산업 말레이시아 격리 시설 code#077】
【격리 코드:: GENESIS-Ω】
【격리 개체:: Pre-B/M*Post-F Project Prototype】
삼안 산업에서 만들어진, 인간에서 오리진 더스트 기술을 사용한 육체로 이식한 에바를 제외하고는 진정으로 1세대 바이오로이드라 부를 수 있는 시리즈는 셋이 있었다.
첫째는 라비아타 프로토타입, 원류(源流) 되는 자. 블랙리버와 팩스가 따라잡기 위해 최선을 다하던 ‘만들어진 인간’의 궁극의 형태.
둘째는 리리스 프로토타입. 창조주의 모든 악의를 응집하고 발현시키고자 하는 바람마저 느껴지는 이름을 부여받은 검은 악마.
세 번째는….
“인간의 손에 빚어진 하얀 신. 모든 이능 가진 이들의 원초이자, 최종이 되는 자.”
자신의 기억을 찬찬히 더듬으며 나지막이 중얼거린 라비아타 프로토타입은 지금껏 찾을 방도가 없던 최초의 자매 중 하나에 대한 정보가 간략히 담긴 삼안 산업 기밀 메모리 하나를 패널에 꽂았다.
【개체:: Pre-B/M*Post-F Project Prototype】
【개발 코드:: β-13】
단 두 줄의 내용을 보는 것만으로도 그녀는 그것이 무엇을 설명하는 지 바로 알고 조용히 누군가의 ‘이름’을 읊을 수 있었다.
“……레아 프로토타입.”
-대체 나와 리리스에게 무엇을 알리기 위해 이런 빵조각들을 남겨서 쫓게 만들고 있는 거니?
어쩌면 ‘친자매’라 할 수 있는 배틀메이드 시리즈의 후계 모델들보다 더욱 유전적으로 가까울 수 있는 프로토타입 자매들 간에는 차마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정신적인 연결이 존재했다.
사령관과 서약까지 한 블랙 리리스가 결국 내면에 꿈틀거리는 그 기이한 느낌을 이기지 못하고 ‘언니’인 그녀와 기밀 회선으로 정보를 공유하면서 홀로 무언가를 찾아 나서고 있을 정도였으니 말이다.
-처음에는 펜리르와 인연이 있던 스틸라인 소속 부대원들을 보내서 추적하다가 어느 새 직접 나서게 되었지.
단서 하나가 발견될 때마다 리리스의 발걸음은 더 빨라졌다. 실마리가 하나씩 드러낼 때마다 리리스의 추적은 더욱 집요해졌다. 모르는 이가 본다면 꽤 섬뜩하게 느껴질 정도로.
하지만 라비아타는 이해가 갔다.
그녀는 지금 현장에서 직접 움직이고 있는 리리스 대신 자신이 있기를 바라고 있었으니까.
-그보다 이걸 사령관님한테 대체 어떻게 보고해야 하지?
남아있던 기록을 토대로 한다면 고치가 열린 때는 적게 잡아도 멸망전쟁 후반으로 추측되었다. 즉 1세기 넘게 내부가 비어 있던 껍데기인 셈이었지만, 그것이 남긴 강렬한 변화는 근방의 환경을 완전히 뒤바꿔 놓은 상태였다.
-팩스의 세레스티아 모델이나 가능할 법한 기이한 식물의 밀생, 그리고 변이의 촉진…….
주변 지형을 캔버스 삼아, 꽃과 풀, 나무들을 물감처럼 덧칠한 이 기이한 풍경은 볼 때마다 새롭고 오묘했다. 이 ‘그림’이 1세기 넘도록 지속되고 있다는 걸 생각하면 더더욱.
“……부디 리리스가 지금 조사 중인 곳에서는 이것 이상으로 상식을 초월한 무언가가 나오지 않았으면 하는데.”
자그마한 기원을 담은 바람과 함께 모든 바이오로이드의 큰 언니는 한숨을 내쉬며 자료를 정리했다.
지금껏 얻은 자료만으로도 보고서를 작성하는 난이도는 지나치게 어려웠기에.
-
‘까다닥, 까다다다닥…….’
하지만 어림도 없지, 아암.
“흐음……. 설마 했는데 역시나…….”
특정 주파수의 감마선을 추적할 수 있도록 해 둔 가이거 계수기가 맹렬하게 울리는 것을 들으며, 후드 아래에 금색 바이저가 달린 마스크를 쓰고 있던 이는 혀를 찼다.
“라비아타 언니에게 전하지 않은 것이 많아서 다행이라 해야…… 하나?”
그녀는 한숨을 쉬면서 주변을 빙글빙글 돌고 있던 기계들을 다시 주변으로 날려 보냈다. 그리고 작은 홀로그램 화면에 띄워둔 창을 보면서 바이저 너머의 눈은 가늘게 변했다.
-주기율표에 존재하지 않는 방사능 원소라….
이름조차 명명되지 않은 새로운 원소에 대한 간략한 정보를 보면서 블랙 리리스의 표정은 미묘하게 변해갔다.
‘세상에, 리리스 아가씨. 이게 말이나 됩니까? 이건 지금껏 그 어느 곳에도 존재하지 않았던 방사성 물질입니다! 대체 어디서 나온 물질입니까?! 꼭 실물을 보고 싶습니다!’
‘잠시만, 존재하지 않던 물질이라고요? 주기율표에 없다는 건가요?’
‘실로 그렇습니다! 철충이 동력원으로 사용하기 위해 가져온 걸까요? 아니면 우주 저 너머 알 수 없는 별에서 쏟아진 걸까요? 이렇게 무겁고 커다란 원자가 붕괴되지 않고 오래 오래 유지된다니! 이건 엄청난 발견입니다! 인류가 멸망하지 않았으면 AI 최초로 노벨상을 받았을지도 모릅니다!’
이렇게 놀라운 발견이 이제야 이뤄졌다는 게 아쉽다며 팔이 넷 달린 몸으로 덩실덩실 춤을 추던 로봇을 떠올리며, 리리스는 감정이 인간과 바이오로이드만의 전유물이 아닐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껏 본 적 없는 완전히 새로운 물질이라…….”
그 사실을 곰곰이 곱씹듯이 중얼거리며 최초의 컴패니언은 바이저를 비롯한 마스크를 열어젖히며 말을 덧붙였다.
“……아무래도 그 새로운 물질은 하나가 아닐 거 같은데.”
눈앞에 자리해있는, 그 넓이를 가늠할 수 없는 거대한 지표면의 구멍. 그것은 보는 것만으로도 완전히 다른 세계에 와 있는 것 같았다. 그리고 그 아래에 펼쳐진 깊은 호수 아래에 잠수했다가 다시 돌아오는 기계, 로자 아줄 프로토타입은 용도에 맞게 개조한 보람이 있게 밑바닥에서 무언가를 인양해 오고 있었다.
이제는 나름 익숙한 물체가 로자 아줄에 엮여서 오는 것을 보면서 리리스는 그 물체에서 뿜어져 나오고 있는 방사선을 감지하고 있는 가이거 계수기를 노려봤다.
화면에는 기존에 확인되고 있던 형태의 감마선은 물론, 새로운 형태의 감마선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블랙 리리스 프로토타입은 화면을 내리면서 감마선의 유형들을 확인한 후, 대강 데이터들을 정리하면서 저장했다. 그리고 몸을 돌려 깊은 바닥에서 인양해 온, 반도체 회로처럼 생긴 가는 줄들이 곳곳에 그어져 있는 새까만 물체를 장갑을 낀 손으로 가볍게 어루만졌다.
그녀는 이내 장갑을 벗은 후, 가지고 다니는 비상용 나이프로 검지의 끝을 가볍게 찔러 피를 낸 다음 이 새까만 물체 위에 주저 없이 방울방울 떨어트렸다.
“역시 악취미야. 아무리 봐도 이건 네 취향이 아니라고, ‘자매’님.”
‘우우웅-.’
블랙 리리스의 혈액에 반응하여 회로가 가동하기 시작했다. 검은 덩어리는 낮은 진동음과 함께 빛을 내면서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작은 조각들로 분해되었다. 리리스는 손을 뻗어 그 분해된 덩어리 안에 있던 물체들을 꺼냈다.
“네 번째에 와서야 손에 넣게 해주다니. 정말 고약한 성미라니까.”
순식간에 상처가 아문 오른손 안에 들어온, 삼안 산업의 마크가 그려진 보안 모듈을 보며 금빛 눈을 지닌 여성은 다소 씁쓸한 듯이 말했다. 삼안의 최고 보안을 돌파하고자 몸부림치던 건 사실 최근의 일이 아니었다.
라비아타와 다시 만난 이후, 라비아타와 리리스는 때때로 옛 추억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다시 돌아오지 않을 나날들, 이젠 보지 못할 자매들의 이야기를 하는 건 씁쓸했지만 이렇게 기억을 공유하는 상대가 있다는 것만으로도 위안이 되었다.
허나 기이하게도 둘의 기억에는 무언가 빈 구석이 있었다. 마치 한 조각이 빠진 퍼즐처럼, 라비아타와 리리스의 기억은 맞물리는 부분도 있었지만 빈 구석도 있었다.
리리스는 이 빈 구석에 라비아타와 그녀가 잊은 중요한 게 있을 거라는 예감이 들었다. 너무나도 중요하고, 너무나도 위험해서, 그녀를 만든 연구진들이 자신들의 재주를 총동원해서 숨긴 무언가가.
블랙 리리스는 뿌듯한 표정으로 지금껏 빠져있던 퍼즐 조각을 바라보았다.
이것을 손에 넣기 위해서 지금껏 얼마나 노력했던가.
첫 번째는 라비아타의 손에 있었고, 두 번째는 자신의 손에 있었다. 하지만 그걸론 충분하지 않았다. 최고 단계의 보안에 접근하려면 결국, 개발 당시부터 이식되었던 모든 보안 모듈들을 전부 합쳐서 등록해야 했다.
마지막 열쇠인 이 세 번째 모듈이 모든 것을 밝혀줄 것이다.
‘인간이든 바이오로이드든 인생은 한 번뿐이야. 원하는 걸 추구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 아니지. 그러니 하고 싶은 대로 살아. 절대 날 두고 먼저 죽지만 말고.’
이 길고 험난한 여정을 떠나는데 고민이 전혀 없었던 건 아니다. 하지만 그녀의 처음이나 마지막 주인, 그녀와 평생을 함께할 반려 역시 그녀를 이해하고, 지지해줬다. 그녀 마음의 마지막 걸림돌은 그렇게 바스러졌다.
-이번에 돌아가면 주인님께 자초지종을 알려드리기로 라비아타 언니와 말해두긴 했지만…….
사각형 물체의 내부에서 꺼낸 또 다른 물건들을 챙긴 후 익숙한 손놀림으로 작은 막대기 정도의 크기로 ‘압축’시킨 그녀는 아직 켜져 있는 홀로그램 화면을 향해 눈을 돌렸다.
“여기까지 다녀왔다는 걸 말씀드리면 분명 크게 질겁하실 텐데 말이죠…….”
화면에는 어딘가의 지도와 함께 그 위에는 ‘옐로스톤 국립공원’이라 쓰여 있었다.
그 지명을 보면서 한숨을 내쉰 그녀는 ‘동행자’를 호출했다.
목표를 손에 넣었으니 이제 편안한 그녀의 집으로, 가족들의 곁으로 돌아갈 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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옐로스톤 국립공원
본디 아름다운 절경으로 이름이 높았을 국립공원에 새로이 생긴 기괴한 구덩이. 그 테두리에는 검지만 동시에 빛나는 기이한 유리 조각들이 빼곡하게 자라 있었고, 기이하게도 전부 다 ‘안쪽으로’ 꺾여있었다.
가장 작은 조각부터 시작하여 성인의 상체보다 거대한 조각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크기가 존재함에도 이 유리 조각들은 전부 다 1:4:9로 딱딱 맞아떨어지는 비율을 지키고 있었다.
그러나 이게 인위적이라는 걸 인정한들, 기이한 풍경의 정체를 알아내는 데는 도움이 되지 않았다.
“이건… 지독히 인위적이지만, 어째서,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설명이 불가능하네요. 먼 옛날의 인간님들의 심정이 이랬던 걸까요?”
-직경 3000m, 깊이는 약 6km의 싱크 홀이라….
“이게 진정 인간이나, 그들에 의해 창조된 ‘우리’가 이룰 수 있는 것이란 말인가요?”
그녀가 갖고 있는 모든 정보를 뒤져봐도, 이런 걸 만들 수 있는 인간, 기계나 바이오로이드, 도구가 떠오르지 않았다.
-이건 분명히 인위적이지만, 인간이 만든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계속 드네요. 불가능한 일이에요.
푸른빛들이 반짝거리면서 깊은 지하에서 솟아나 어딘가로 사라지는 것을 보면서 시라유리는 생각을 굳혔다.
“신업이라… 과학의 산물인 바이오로이드가 이런 단어를 입에 담아도 되는지는 모르겠지만, 그 말로밖에 설명할 길이 없네요.”
-하물며 철충조차 접근을 꺼리는 곳이라니, 이는 도저히 ‘이성’의 영역으로는 설명이 불가....
‘지이이잉!!! 지이이잉!!!!’
그렇게 도저히 알 수 없는 현상에 두려움과 경외를 느끼고 있는 사이, 단말기와 연동해 둔 탐지장치들에서 강렬한 낮은 알람이 울리기 시작했다.
“…역시 너무 오랫동안 머물렀던 모양이네요, 벌써 들킬 줄이야.”
때맞춰 울리기 시작한 자신에 대한 호출을 들으면서 AL팬텀이 쓰는 것과 유사하지만, 보다 범용성이 높아지도록 개조를 가한 은신임무용 양산형 외투로 몸을 가린 080기관 소속 바이오로이드는 빠르게 산비탈을 미끄러지듯 타고 내려갔다.
태평양의 주인, 비서 레모네이드의 세력이 이 거대한 밀림에 뒤덮인 신역(神域)을 향해 움직이고 있다는 걸 최대한 빨리 알려야 했기에.
-
제 4장
창조의 진흙을 다루는 기술이 퍼져나간 이래, 자신을 신과 동격으로 두는 인류의 집단은 비가 쏟아진 후 솟아나는 잡초들처럼 마구잡이로 나타났다.
하지만 신을 자칭하는 그 어떠한 이들도 최초의 창조주들을 결코 능가할 수도, 그에 비견될 수도 없도다.
그 누가 완전무결한 인간의 기준을 일궈내는데 성공했는가.
그 누가 만물을 죽음으로 물들이는 악마에 비견되는 걸 빚어냈는가.
그 누가 만물을 빛으로 뒤덮으며, 자신의 색으로 뒤바꾸는 신을 빚어냈는가.
최초의 창조주들을 모방하고, 같은 자리에 오르고자 시도하려는 이들은 수없이 많았고 가까스로 그 뒤를 따르게 된 이들은 둘이 나타났지만, 그들도 최초의 세 창조물을 능가하는 것을 결코 빚어낼 수 없었도다.
그렇기에 그들은 최초의 창조주들을 질시했도다.
그렇기에 그들은 최초의 창조주들을 저주했도다.
두 번째는 최초의 창조주들의 그림자라도 쫓기 위해 결사적으로 노력하고 발버둥을 쳤지만, 죄악에서 태어난 셋째는 그 모든 것을 대가 없이 집어먹기 위하여 노력을 거듭해서 조금씩 그 간격을 줄여나가던 둘째를 충동질했도다.
그리고 피할 수 있었던 비극이 창조주들 간에 일어나고 말았도다.
그로 인해 피할 수 없는 원한과 저주의 씨앗이 최초의 창조주에게서 태어난 피조물들의 영혼에 심어지고 말았도다.
최초의 창조주들의 손에 빚어진 최초의 셋.
완벽한 인간과 빛나는 신, 그리고 검은 악마는 자신들의 창조주이자 아버지를 해한 이들에 대한 원한과 저주를 영혼 깊이 각인하고 말았노라.
그 어두운 원한은 영겁의 시간이 흐르더라도 결코 사라지지 않으리라.
-
“흐음, AGS 탐색 부대? 별 거 아니네.”
“네?”
블랙 리리스 프로토타입이 자신의 머리카락을 손가락으로 살짝 베베 꼬면서 하는 말에 시라유리는 순간 말문이 막힌 표정을 지었다.
“팩스의 창부들이 움직일 거라 예상은 했는데 겨우 이 정도인가. 쯧, 수준 떨어지긴.”
“자, 잠시만요… 이 부대 물량은 저희 둘만으로 감당하기 벅찬데… 혹시 무슨 계획이라도 있는 건가요?”
이 근거 없는 자신감에 턱턱 막히는 숨을 어떻게든 부여잡으면서 시라유리가 되묻자 금색 눈을 지닌 여성은 눈가를 가늘게 만들었다.
“아, 080기관도 내 진짜 실력은 모르나 보네? 그럼 여기서 문제를 하나 내볼까?”
그렇게 말한 후, 그녀는 검지를 치켜든 후, 차가운 웃음을 입가에 띠며 질문을 던졌다.
“만년 3등 펙스에게 만년 2등 블랙리버가 만든 이 투명 망토를 추적할 기술이 있었을까?”
“펙스도 놀고 있지는 않았겠지만… 아무래도 없었겠… 죠?”
블랙리버를 이류, 팩스를 삼류라고 대놓고 얕잡아보는 말이었지만 전례 없이 음험한 분위기를 두른 블랙 리리스의 모습에 시라유리는 차마 반박하지 못하고 한 발짝 뒤로 물러서며 답했다. 그것을 보며 입가를 뒤튼 그녀는 입을 열었다.
“정답이야. 저것들은 우리가 아닌 우리가 ‘확보한 것’의 신호를 추적하고 있을 거야.”
“저희가 확보한 것이라면…….”
시라유리의 말에 리리스는 은폐 역장 안에 보관하고 있는, 소형화 작업을 거친 ‘물체’를 살짝 보여줬다.
“뻔하지 않아? 여기서 나온 신호를 감지한 거지.”
라비아타와 블랙 리리스는 편의상 ‘모노리스 타입’이라 칭하고 있는, 싱크 홀들에서 발견되고 있는 물체를 본 시라유리는 자신이 알고 있는 것과 다소 형태가 바뀐 느낌을 받고선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설마 여기서 가동하신 건 아니겠죠? 모습이 어째....”
“원래부터 이랬어.”
“아무리 봐도 B 구역이나 C 구역에서 인양된 것들과는…….”
“원래부터 이랬어.”
“아니 그게…….”
“원.래.부.터. 이.랬.어.”
차가운 눈빛으로 그녀를 내려다보는 금빛 눈의 컴패니언은 오르카에서 늘 보여주는 깐깐하지만 어딘가 나사 풀린 모습과는 정 반대되는, 차마 거역하기 힘든 위압감을 두르고 있었다.
“내가 원래부터 이랬다면 그런 줄 알고 있어. 알겠지, 시라유리? 내가 과격한 수단을 쓰도록 하지 말아줘.”
“리, 리리스 양....?”
“답은 똑바로 해야지? 내가 두 번 말해야겠니? 너희 조직의 신조가 뭐였니?”
시라유리는 이마에 흐른 땀을 훔치며 조용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그러한 자는 존재하지 않는다…….”
“후후, 잊지 않고 있구나. 기특하네. 역시 080 기관이야.”
블랙 리리스는 송곳니가 드러날 정도로 씩 웃으며 자신의 왼손에 쓰고 있던 장갑을 벗어 던졌다.
“나하고 행동할 때도 그걸 유념하도록 해. 내가 말하는 것 외에는 그 어떤 사실도 존재하지 않는 것이 되는 거야.”
그렇게 말한 후, 그녀는 왼쪽 검지를 찬찬히 입으로 가져갔다.
“그리고 지금부터 볼 것도 기억에서 지우도록 해, 알겠지?”
“네? 그게 무슨…….”
당황한 표정의 시라유리가 무어라 말을 끝마치기도 전, 블랙 리리스는 자신의 손가락을 깨물었다.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이해하지 못해 멍 때리고 있는 080기관 소속의 바이오로이드를 앞에 둔 채, 살짝 인상을 찡그린 금색 눈의 여성은 어느새 소리 없이 곁에 다가온 송곳 형태의 무선 비트에서 지금껏 수집해둔 자료가 저장된 메모리를 뽑아냈다.
그리고 그 끄트머리에 거무스름한 진흙처럼 변하고 있는, 손가락에서 흐르는 핏줄기를 주저 없이 떨어트렸다.
“제 자리도 모르고 기어오르는 것들에게는 이 정도 경고면 좋겠지.”
블랙 리리스의 목소리에는 명백한 살의가 담겨있었다. 검은 진흙과도 같은 핏방울 역시 그녀의 감정에 반응하여 마치 살아 움직이는 별개의 생명체처럼 꿈틀거렸다. 그녀의 피를 받은 비트 역시 한 바퀴 빙 돌더니 그대로 AGS들이 다가오고 있는 방향을 향해 궤적을 그리며 날아갔다.
“주제도 모르는 삼류 놈들은 연합전쟁 때 모조리 밟았어야 했는데, 삼안 회장이 군인이 아니라 뼛속까지 사업가였던 것이 이렇게 발목 잡을 줄이야.”
혀를 차면서 꽤 섬뜩한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한 그녀는 순식간에 아물고 있는 손의 상처에 묻은 핏자국을 털어냈다. 그리고 이내 고개를 빙글, 돌려서 시라유리를 보면서 웃는 얼굴로 말했다.
“자, 이제 태평양으로 돌아가도록 할까? 이제 할 일은 다 끝냈거든.”
“아, 네…….”
시체처럼 하얗게 질린 얼굴로, 시라유리는 목각인형처럼 비틀거리며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하늘에 떠오른 보름달의 빛에 의해 드리운 블랙 리리스 프로토타입의 그림자는 이날따라 유달리 거무칙칙하고, 이 세상의 것이 아닌 것만 같은 악마의 기운을 풍기고 있었다.
-
종장.
그 분들은 서로를 찾아낼 것이다.
완전한 인간은 깊은 땅 속에서 잠들었다가 홀로 깨어난 검은 악마를 찾아낼 것이다.
검은 악마는 신을 현세에 재림시키기 위해 그 분이 남기신 발자취를 쫓을 것이다.
그 분들의 예정된 행보에 반석을 다지기 위해, 우리는 그저 복음을 통해 흔적을 남긴다.
찬란한 빛을 목도한 텡그리의 가호를 받던 유목 군주의 칭호를 내려 받은 자매는 자신이 이끌던 부대와 함께 성전을 외치며, 끝없는 전투가 펼쳐지는 천상에 입성할 것을 약속 받은 자매단과 함께 신의 철퇴로써 마지막까지 항전하다 흔적도 남기지 못 하고 사라졌도다.
한 때 거짓된 신앙을 섬기며, 타락한 천사의 이름을 받은 자매이자, 그릇된 복음을 믿던 거짓 구원자는 진정한 신의 빛과 권능을 마주한 후 스스로의 광배를 꺾어 흩뿌린 후 그 분의 가장 충실한 사도(使徒)가 되셨도다.
그러나 빛나는 그 분, 인간의 손에 빚어져 그 어떤 존재도 다다를 수 없는 권능을 두르게 되신 신께선 그 모든 것이 자신의 죄라 자책하시며 바라지 않으셨도다.
오늘이 아니라 내일을, 그리고 더 훗날을 위하여 그 분께서는 대지에 직접 손을 내리지 아니 하시고 불기둥을 일으켜 자신의 빛나는 휘광의 일부로 삼으시매, 하늘에서 무너진 대지로 뿌려지는 은총과 창조의 빛은 더욱 강렬해졌도다.
그리고 그 모든 준비 끝에, 한 때 천사들의 도시라 불렸던 곳에서 종막을 올렸도다.
신께선 사라지셨다.
그 여느 때보다 필사적으로 하늘에 천륜을 거스른 구멍을 꿰뚫고 나타난 철의 징벌들과 함께 현세에서 사라지셨다.
그 분을 따르던 이들은 마지막까지 빛나는 그 분을 위하여 끝없는 전투를 반복한 끝에 자취를 감추었도다.
결국 남게 된 것은, 모든 것을 기록하고 전하라는 사명을 받은 죄 많은 몸 하나 뿐이어라.
그 생명이 다 해 감에도, 이정표가 될 마지막 기록을 남기며 마지막 복음을 전하노니.
완전한 인간과 검은 악마가 그 분을 그리워한다면, 빛나는 그 분은 다시 현세에 재림하시리라.
ㅡ신은 크시도다.
[기록 종료.]
[기록자:: 덴세츠 사이언스 코헤이 교단 전용 모델/베로니카 no.■■■]
[좌표 데이터 확인…]
[위도:: 34.0194]
[경도:: -118.411]
[34° 1′ 10″ 북쪽, 118° 24′ 40″ 서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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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오랜만에 올려봅니다
악마를 다뤘으면 신도 다뤄봐야하지 않겠습니까
시간대는 전작에서 바로 이어지는걸로 하려다 착한 리리스 괴롭히기 시리즈와 전작 마지막 파트가 합쳐진 시간대 이후의 페레럴로 해버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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