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편: https://bbs.ruliweb.com/mobile/board/184992/read/125250
2편: https://bbs.ruliweb.com/mobile/board/184992/read/125554
전전편: https://bbs.ruliweb.com/mobile/board/184992/read/125555
전편: https://bbs.ruliweb.com/mobile/board/184992/read/126222
-----
“밤이네요”
아, 탈론페더의 말이 맞았다. 해는 진 지 오래고 사위는 어두웠으니까. 이게 밤인 걸 모르는 이는 갓 태어난 아기거나 토모거나 둘 중 하나일 것이다. 샐러맨더가 떠나자 뒤이어 찾아온 그녀가 불쑥 꺼낸 말이 이것이자, 케시크는 호드는 뭐 불교처럼 화두(話頭)라도 던지는 게 버릇인가, 라는 생각마저 들었다.
“사령관님은 조금 전에 텐트로 들어갔어요. 술 마시고 노니 조금 피곤하다고. 지금 딱 기분 좋으실 상태일 거에요.”
“아, 그렇군요.”
“그러니까 지금이 바로 때라는 거죠.”
“?”
고개를 갸웃하는 케시크에게 페더는 슬쩍 웃어 보였다. 같은 부대 전우에게 보이는 동료애와 호의 가득한 웃음이라고도 할 수 있지만...어쩐지 사악해 뵈는 웃음을.
“그러고보니 케시크는 오늘 어디서 자죠?”
“음...아마 밤 새지 않을까요?”
이건 호위 임무니까 말이다. 그러나 페더는 그걸 약간 다르게 받아들였다. 혹은 그러기로 한 모양이다. 흐뭇한 눈길을 던지며 고개를 끄덕인 걸 보면.
“그렇죠, 그렇죠. 바로 그 자세에요. 밤을 새야죠. 화끈하게.”
“??”
“그러면 내일까지 계속 수고해 주세요, 케시크”
“네, 네”
페더의 의미심장한 말을 이해하지도 못한 채 케시크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그녀에게 페더가 은근한(?) 눈빛을 쏘아보냈다. 왜 저러시지, 하고 그녀가 의아해하던 찰나 페더가 그녀에게 살며시 접근했다.
“밤중에도 사령관님을 지켜야 하는 거 알죠?”
“물론이죠. 이건 호위 임무니까요.”
이건 사실상 ‘휴가 임무’ 지만, 성실하고 정직한 케시크는 명목상의 임무라도 소홀히 할 생각이 없는 기세였다. 조금 전에 샐러맨더에게 말했듯이 말이다. 그걸 보고 페더는 속으로 작게 호, 하고 한숨쉬었다. 역시 이럴 줄 알았다. 이럴 줄 알고 찾아온 게 정말 다행이라니깐.
“아, 그 얘길 하는 게 아니에요.”
“?”
얼굴에 물음표를 띄우는 케시크에게로 페더가 한 발짝 더 가까이 다가갔다.
“케시크도 성인이니까 남자랑 즐겁게 밤을 보내는 법은 알겠지요?”
“네, 당연히 경계 근무는 야간 작전이니....네? 네? 페더씨, 지금 무슨 말씀을!?”
케시크가 당황해서 버벅거리는 사이, 이미 달라붙을 정도로 가까이 접근했던 페더가 빠르게 그녀의 몸을 붙잡았다. 그리고 그녀의, 몸에 착 달라붙는 전투복 안으로 손을 쑥 집어넣었다.
“꺅! 뭐 하세요!”
“음, 음, 좋은 목소리에요, 아주 좋아. 하지만.”
케시크의, 그다지 크진 않은(어디까지나 오르카 기준으로!)가슴을 만지작대던 페더의 입에서 대번에 처참하기 그지없는 탄식이 흘러나왔다.
“햐아, 이것 봐, 우리 막내 내 이거 이럴 줄 알았지. 이런 거나 입고 있을 줄 알았어.”
그녀가 한심하다는 투로 케시크의 ‘이런 거나’를, 솜씨 좋게 풀어서 케시크의 가슴에서 빼내었다. 별다른 특징이 없는 평범한 오르카 보급형 브래지어를. 너무 당황해버린 케시크는 도대체 이 여자가 뭘 하고 있는건지 도통 감도 잡을 수 없었다.
“흐으응. 이렇게 이런 분야 센스가 영 꽝인 건 우리 대장님 닮았다니까요. 뭐 그래서 더 사랑스러운 거지만.”
이미 알 거 다 아는 여자의 능숙하고 노련한 테크닉도 좋지만, 때로는 모든 것이 처음이어서 수줍은 여자의 풋풋한 갈애(渴愛)도 볼 만한 것이다. 그리고 그건 의외로 오르카에서는 희귀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소품(?)까지 수수하면 촬영의 묘미가 반감되는 법. 물론 케시크가 탈론페더의 ‘전문 분야(정찰 말고, ’사적인‘ 부분 말이다)’를 잘 하라고 만들어진 바이오로이드는 아니지만, 아무런 매력도 없는 이건 좀 너무하지 않은가. 평범한 군용 속옷이나 탈취제 같은 것은 케시크가 보기엔 그게 뭐가 문제지? 하는 것들이었지만 탈론페더에겐 아니었다. 전.혀.
“아아, 이 탈론페더가 꿍쳐 놓은 비장의 콜렉션! ‘심☆연의 깊고♁ 어두운♀ 취★향’ 시리즈를 가져오길 참 잘 했어요”
“심연의...뭐요?”
“가만 있기나 해봐요”
이제는 케시크의 눈에도 보일 정도로 탈론페더의 얼굴에 음흉한(?) 웃음이 떠올랐다. 이번 탈론튜브의 조회수도 만만치 않을 것이다. 그래, 그녀의 계획대로 말이다.
사령관은 칸과 대화를 나누면서, 칸이 케시크에 대해 간과한 것이 있다는 걸 꺠달았다. 아마 그녀도 자신의 전문 분야가 아니니 모르고 넘어간 거겠지만, 하루가 멀다하고 수없는 섹1스어필의 화신들을 상대해야 하는 사령관은 짐작할 수 있었다. 단순히 능력적인 부분만이 아니라, 다른 부분에서도 케시크가 의기소침해 하고 있다는 것을.
사랑받고 싶어하는 것은 더불어 살아가는 습성을 지닌 모든 생물된 자의 본능이다. 그것이 능력으로 인해 사랑받는 것이든, 아니면 아름다움으로 인해 사랑받는 것이든. 그리고 오르카에서 후자의 분야로 그녀를 위로해 줄 수 있는 건 한 명 뿐이다. 칸에게는 미처 말해주지 못했지만.
‘그리고, 이왕 할 거면 끝내주게 해야 하는 것 아니겠어요?’
그리고 그런 일에 가장 적임자는...언제나 항상 하루도 빠짐없이 24시간 분홍빛 19금 망상으로 가득 차서 하루에도 온갖 AV스토리를 뇌내에서 뽑아내는 탈 모 양이었고 사령관은 이번만큼은 그녀의 도움을 빌리기로 했다. 마침 같은 부대기도 하니 케시크의 마음을 치유하는 데 그녀가 거절할 리도 없으리라 생각하며.
‘물론이죠, 물론이죠, 물론이죠오오오오옷!!! 이런 기회를!!!’
물론 거기에 사령관과 페더 사이의 은밀하고 음험한(?) 거래가 있었다는 것은 둘만이 아는 사실이다. 이야기를 꺼내자마자 탈론페더는 그녀답게 야릇한 망상 가득한 계획을 내놓았다. 몽환적인 분위기가 감도는 이국적인 사막의 한복판, 꿈결 같이 아름다운 오아시스에서 벌어지는 건장한 남자와 이제 갓 세상에 던져져 아무것도 모르는 풋풋한 여성 간의 낭만적인...혹은 호드의 이름에 걸맞는 짐승 같은....
‘으흐흐흐흐’
생각한 해도 페더의 ‘그 샘’이 홍수가 날 것이요 코피는 폭포처럼 날 것이며 탈론튜브 조회수 폭발은 예정된 것이었다. 오늘의 데이터를 모으면 다음 번에 칸 대장님에게는 더더욱 완벽한 세팅을 적용할 수 있으리라. 그러니. 그녀로서는 이 당근을 절대 놓칠 수 없었다. 사령관의 계획에 협조하는 것 이외의 다른 대안은 그녀에게 없었다. 페더의 눈에 불이 확 켜졌다.
“그러니 벗어욧!”
“네?”
“두 번 말 안해욧!”
“네? 네? 페더 씨? 꺄아악!”
물론 그녀가 자기 배낭에서 꺼낸, 속옷 본연의 기능을 할 수나 있는지조차 알 수 없는, 아니 일단 옷의 범주에 넣어줘야 하는지조차 모를 섬유 쪼가리를 걸쳐야 하는 케시크의 입장은 나중 문제였다. 모든 건 그녀의 장대한 계획을 위해서다!!
“가만히 있어요!”
“으아, 으아아, 페더씨, 옷 벗기지 마요!”
“옷을 안 벗기면 못 갈아입히잖아욧!”
차마 동료에게 저항할 수 없었던 케시크가 강제로, 참으로 입에 담기가 두려운 헐벗은 꼴이 되는 데는 수 분이 채 걸리지 않았다.
“우..우으으...이게 뭐에요”
“뭐긴 뭐에요. 아주 훌륭한 약간의 ‘터치’지”
뭐라 할 겨를도 없이 휘닥닥 옷을 갈아입혀진...아니, 이걸 옷이라고 불러야 할지조차 알 수 없는 음탕한 차림새가 된 케시크를, 탈론페더는 아주 흡족한...침을 질질 흘리다시피 눈에 하트를 뿅뿅 띄우는 얼굴로 만족했다.
“음후후...좋아요, 좋아, 이 정도면 완벽한 영상이 나오겠어요.”
“오...옷 돌려 주세요...”
“안 되죠 안 되죠, 이런 평범한 옷을 사령관님 앞에 보여 주는 건 호드의 수치니깐”
“그, 그럼 전 뭘 입고 경계근무 서라고요..”
“방법은 하나뿐이지 않겠어요?”
반라...아니 사실상 거의 벌거벗은 거나 다름없는 상태가 되어 얼굴이 빨개진 케시크에게, 탈론페더는 오늘 낮에 사령관이 모두와 함께 쳐놓은, 그의 개인용 천막을 가리켰다. 눈에 하트를 폭포처럼 뿜어 가면서.
“사령관님 옆에 붙어서 밀착 근무하는 방법뿐이죠. 그렇죠?”
“으윽...!”
반박할 수가 없었다. 정말 그 수 밖에 없어 보였다. 그리고 그게 대충 뭘 의미하는 건지는 케시크도 알았다. 그녀는 순진한 거지 토모 같은 바보는 아니니깐. 하지만...하지만...바로 그렇기에 그녀는 자신이 없었다.
“사..사령관님이...제가 이러는 걸 좋아하실 리가...”
그녀는 군용 바이오로이드다. 남자를 유혹하려고 만들어진 존재가 아니다. 단적으로 말해 그녀는 가슴도 작고, 다른 바이오로이드들에 비해 특별히 더 매력있는 것도 아니다. 그런 그녀를, 과연 사령관이 좋아해줄까?
“그건 해 봐야 아는 일이죠?”
대번에 딱 자른 대답이 돌아왔다. 부끄러워서 얼굴을 붉히고 시선을 회피한 케시크가 놀라서 돌아볼 만큼.
“네?”
“안 해보고서도 지레 겁먹고 물러나는 거, 호드답지도 않고 케시크 당신 답지도 않아요.”
“.....”
탈론페더의 어조는 단호했다. 다른 건 몰라도 ‘사랑하기(주로, 침대 위에서)’에 있어서 빼는 건 그녀가 절대 허용하고 싶은 게 아니었다. 왜 그래야 한단 말인가. 서로 “뜨거워지고 싶어하는” 남자와 여자가 있다. 그런데 왜 주저해야 한단 말인가. 무엇을 신경써야 한단 말인가. 이 멸망 후의 아무것도 없어진 세상에서.
“용기를 내요. 그 때 당신이 우리 모두를 위해 힘써 준 것처럼. 우릴 구하기 위해 칸 대장님과 함꼐 용감하게 달렸던 그 때처럼”
아니, 이거 반칙 아닌가. 바로 직전까지 치녀 같은 언행을 마구 일삼다가 갑자기 이렇게 멋있게 말해버리면 어쩌란 말인가. 그 때 자신의 활약까지 이렇게 갖다붙여서는 말이다. 그러나 그 갑작스럽게 만들어낸 거대한 괴리가 무색하게 페더는 다시 예의 그 변태스럽게 싱글벙글하는 표정으로 돌아갔다. 조금 뒤에 있을 장대한(?) 녹화장면 생방송을 기대하면서.
“자아, 자아, 그러니 케시크.”
탈론페더가 눈은 반짝, 입에는 침을 질질 흘리면서 케시크의 헐벗은 몸을 사령관의 천막 쪽으로 돌려 보았다. 짧은 한마디와 함께.
“힘내봐요.”
“저기...”
케시크가 뭐라 대꾸하기도 전에 저만치서 탈론페더를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조금은 다급한.
“페더! 끄억. 좀 와줘라!”
“돌발상황이야! 지원이 필요해, 딸꾹!”
“이런, 뭔가 문제가 생겼나? 미안, 케시크, 민원은 다음에 받을게요!”
케시크의 항의는 그저 공기 중에 떠도는 공염불로 남았다. 페더가 쏜살같이, 저만치에 모여 있는 호드 무리로 달려가 버렸으므로. 저편의 호드 대원들이 그녀를 부른 게 짜고치는 건 아닌 것 같았지만, 어차피 그녀도 케시크의 반박을 받을 생각은 없어보였으므로 케시크로서는 그저 멀어져가는 페더의 등 뒤를 바라보며 입을 다무는 수밖에 없었다.
“.....”
그런데 이제 진짜 어쩌지?
...
참으로 대담한 속옷을 입은 케시크가 사령관의 천막 앞에 섰다. 별다른 수가 없었으니까.
‘야밤의 사막 한복판에서 이 차림이라니.’
나중 가서 오늘 일을 말하더라도 그 누가 믿겠는가. 사막의 오아시스 한복판에서 옷을 갈아입혀진 이런 황당한 상황을 말이다.
‘저 안에 계시겠지. 사령관님이.’
거기까지 생각이 닿자 그나마 조금 진정되었던 얼굴에 다시 피가 쏠리는 것 같았다. 아니, 이런 상황에 반라(半裸)상태가 되어 오아시스에 던져진 경험이 생소하지 않은 자가 누가 있겠느냐마는. 누구나 처음은 두렵고 불안한 법이다. 누구나 처음은 서툰 법이다. 그리고 케시크로서는, 저 안에서 어떤 일이 벌어질지, 사령관이 뭘 할지, 아니 자길 좋아해 줄지도 알 수 없는 상황이었다. 하아, 하고 절로 한숨이 나오려는 그 때였다.
“대충 상황을 알겠군.”
“대장님!?”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 화들짝 놀랐다. 그녀의 뒤의 수풀이 흔들리더니, 칸이 천천히 걸어나왔다.
“수...술 많이 드신 거 아녔어요?”
“먹었다.”
호드가 칸을 둘러싸고 그녀를 집중 마크하며 마시자 마시자 소란을 떨어 댄 건, 조금 떨어진 데서 보고 있던 케시크 눈에도 보였으니까. 그러나 칸은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은 채로 말했다.
“그 녀석들, 날 술 먹여서 재울 생각이었던 모양이더군. 자기들이 먼저 곯아떨어졌지만.”
아무렇지도 않게 말하지만 케시크는 자신도 모르게 신음을 토했다. 하이에나와 워울프, 샐러맨더의 주량은 절대 적지 않다. 거기에 정황상 조금 전에는 탈론페더까지 끼어들었을 거다. 그런데 그걸 다 받아내고 도리어 그녀들을 죄다 녹다운 시켰다고? 그러고서도 낯빛 하나 변하지 않다니, 대장님은 괴물인가? 그러나 그 ‘괴물’은 그저 고개만 절레절레 젓고는(술냄새는 조금 나긴 했다) 한심하다는 듯이 말을 이었다. 지금 케시크의 꼴보다는 칸에게 패배(?)하고 오아시스 한복판에 널브러져 버린 자기 부하들에 대해서.
“녀석들, 내가 이런 걸로 화나기라도 할까봐 걱정했던 건가.”
아마 호드 부하들의 의도를, 칸은 알 것 같았다. 모르긴 몰라도 여기엔 사령관도 동참한 것 같고. 의기소침해 있는 케시크에게 ‘좋은 밤’을 선사해주고 싶은데, 대장인 자기보다 먼저 선수치는 것에 대해 자신이 신경 쓸까봐 그녀들(그리고 사령관도) 나름대로 머리를 짜낸 거겠지. 자신을 먼저 술로 재우자고. 아, 의리는 있다. 호드답다. 의리있긴 하지만...
“...영리하다고 하긴 힘들군. 사령관까지 포함해서.”
호드는 그렇게 격의나 순서 따지는 부대가 아니다. 지휘관기보다 먼저 사령관과 ‘뜨거운 밤’을 보낸다고 해도 그걸로 칸이 쩨쩨하게 따지고 들 여자이겠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혹여라도 자신이 상처받을까봐 배려해준 건 고맙지만...괜한 오지랖이다. 그런 식으로 따지면, 워울프가 오래 전에 사령관과 먼저 그렇고 그런 시간을 보냈을 때 - 참고로 말하자면 워울프의 ‘거사’는 오르카의 그 누구보다도 빠른 축에 들었다 - 이미 뭐라 한소리 했을 것이다. 신속의 칸은 이런 걸로 화낼 이가 아니다. 오히려 이렇게 겁먹은 부대 막내의 등을 떠밀어 주는 게 그녀에게 더 걸맞다.
“경계근무는 걱정하지 마라. 나랑 골타리온이 대신 서지.”
“그...그게 문제가 아니라요..”
그게 걱정인 게 아니었다. 알잖은가. 케시크는 이게 처음이라니까. 그녀가 겁먹은 표정으로 칸을 바라본다. 다분히 남사스러운 차림새로 그러는 게 여간 남심을 자극하는 게 아니다. 저대로만 들어가도 사령관 넘어가겠는데, 안 그래도 술도 마셨고, 하고 칸은 생각했다.
“저어..대장님, 어쩌죠?”
자긴 어쩌면 좋을까란 물음이다. 칸은 자기 앞에서 불안한 표정으로, 또 자기 꼴이 부끄러워져서 움츠러든 채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는 케시크를 바라보았다. 허나 그녀는 어꺠를 으쓱하고, 쿨하게 한마디로 대답을 종결지었다..
“나도 잘 모르겠군.”
칸은 백 년 넘게 전장에서 굴러 온 백전노장이다. 전투현장에서의 행동요령이나 지침에 대해서라면 할 말이 많다. 하지만 이 분야에 대해서는 그녀도 잘 아는 편이 아니다. 솔직히 말해서 그녀보단 탈론페더나 아스널이 옆에 있어주는 게 훨씬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다시 말해서, 이건,
이제부터는 케시크만의 길이다. 아무도 그녀 앞에 있지 않다.
칸은 그녀에게 해 줄 말이 없다. 해 줄 말이라고는, 하나뿐이다.
“처음이면 꽤 힘들지도 모르겠군. 사령관이 힘이 좋다는 건 유명해서 말이지.”
그러니 응원해 주는 것. 자신을 닮은, 그리고 100년 전의 자신과는 다른 길을 걸으려는 그녀를. 조금 낯부끄럽긴 하지만, 죽음과 증오와 공포가 기다리는 참호 속으로 기어들어가는 것보다는 진심을 다해 사랑해 줄 상대가 있는 텐트 안으로 기어들어가는 것이 훨씬 낫다. 100년 전의 자신은 그럴 기회를 갖지 못했다. 하지만, 지금의 케시크는 다르다. 그리고 칸은 그걸 질투할 생각이 전혀 없었다.
“자, 가라.”
그리고 그녀는 일부러 케시크의 어깨를 힘주어 꽉 잡았다.
“호드의 이름에 부끄럽지 않게 맞서봐라”
사령관은 쓰러뜨리기(?)가 쉽지 않은 상대다. 그 아스널도 무승부가 고작이라니까. 그 어떤 철충보다도 상대하기 어려운 철충이리라(일단은 철충남이니까). 하지만, 그래도, 진짜 철충과 맞서는 것보다는 기분 좋을 것이다.
케시크는 자신의 어깨를 붙들어 준 칸의 얼굴을 돌아보았다. 약간은 울 듯한 표정으로. 그녀의 말에 케시크는 조금 힘을 얻었다. 용기를 얻었다. 비록 이 앞으로는 칸도 더 이상 도와 줄 수 없고, 또 따라와 주지도 않을 테지만, 그래도.
그녀만의 길이, 앞에 있다. 그녀 혼자만이 달려야 하는.
자신을 시험해볼 수 있는 길이.
그녀의 밤은 성공적일까? 알 수 없다. 그건 그 누구도 말해줄 수 없다. 그녀 스스로 맞서서 알아보는 수밖에.
“으....”
거의 벗은 것이나 다름없는 가슴을 붙잡으니 깨달았다. 사실 긴장할 필요가 없는데, 아직도 몸이 굳어 있다는 것을. 아무리 그래도 철충을 상대하는 것보다 이게 더 위험할 리 만무한데도. 이게 뭐 죽으러 가는 길도 아닌데도. 사실은 그녀에게 전혀 나쁜 기회가 아닌데도. 그럼에도 긴장되는 것은, 어째서일까.
“긴장 풀어라. 사령관이 나쁘게 대하진 않을 거다.”
뒤에서 들려오는 칸의 말이 맞았다. 사령관은 멸망 전 인간들과 같은 나쁜 인간은 아니다. 그건 케시크도 잘 알았다. 그리고, 긴장해서 몸이 굳으면 될 일도 안 되겠지.
‘그래. 이런 차림새로 여기서 하염없이 서 있을 수도 없는 노릇이니.’
케시크는 한번, 후, 하고 깊이 숨을 들이마셨다. 그리고, 칸과 함께 전장을 달리던 때만큼이나 굳은 각오를 담아 비장하게 앞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뒤에 선 칸을 향해 작게 뇌까렸다.
“....다녀오겠습니다.”
<계속: https://bbs.ruliweb.com/mobile/board/184992/read/126226 >
-----
0. 출처에 대한 이야기
삽입된 곡은 AJR의 "Infinity(2015)"입니다.
1. 본편에 대한 이야기
- 이 이야기는 모 루리웹 유저에게 요청을 받아 쓰는 이야기로, "분노의 늑대 송곳니" 이벤트가 끝난 뒤를 배경으로 삼고 있습니다. 따라서, 해당 이벤트 스토리를 보셔야 이해가 (더 잘) 됩니다.
참고: https://bbs.ruliweb.com/mobile/board/184992/read/122152 , https://bbs.ruliweb.com/game/84992/read/124467
- 이전 투표결과에 따라(https://bbs.ruliweb.com/mobile/board/184992/read/124698 ) 조금 지루할 수도 있는 평화로운 이야기로 진행하고 있습니다. 솔직히 제가 읽어도 좀 지루한 감이 있는데 이건 제 역량 부족(...)
- 칸이 술에 강하다는 건 제가 임의로 정했습니다. 그런데 호드 애들 주량이 보통이 아니다 보니, 걔네들 감당 하려면 강해야 할 것 같아요. 하기야 뭐 뇌 반쪽씩 재울 수 있는 여자니 그런 식으로 조절 가능할지도.
- 칸이 사령관과 이전에 잤는지 아닌지는 정확하지 않지만, 이번 란제리 스킨이 시간상 이벤트보다 뒷부분이고, 거기서 칸이 처음인 거서럼 말하는 것, 그리고 같은 란제리 스킨인 마리도 정황상 그거 입었을 때가 '처음'으로 추측되는 걸 고려하여, 여기서는 칸이 아직은 사령관과 거사를 안 치루었다는 설정으로 갑니다. 칸과 사령관이 뜨밤했는지 정황이 그나마 보이는 게 마키나 이벤트 때인데, 그떄도 정확하지가 않아서.
참고로 원래 시나리오는 무려 3P(!) 였읍니다(...)
(참고: https://bbs.ruliweb.com/game/84992/read/125773)
2. 잡담
- 청소년게에 올리는 글인 만큼, 거사 치루는 장면은 없읍니다.
- 그림을 그려주실 이는 다른 누구도 아닌! 이 글을 읽어주시고 있는 바로 여러분, 바로 당신! 선생님이십니다!
제가 요즘에 딴 걸 하고 있어서 글이 많이 부족할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댓글과 추천은 고마운 응원이 되어요.
(IP보기클릭)58.227.***.***
(IP보기클릭)223.38.***.***
그 부분은 상상에 맡깁니다. 청소년게라서 그 과정을 묘사할 순 없으므로 ㅎㅎㅎ | 22.07.15 19:21 | |
(IP보기클릭)223.39.***.***
(IP보기클릭)223.38.***.***
그 부분은 설정을 모르겠어서 묘사하지 않았어요 | 22.07.15 19:21 | |
(IP보기클릭)211.201.***.***
(IP보기클릭)175.126.***.***
아마 의뢰하신 분도 그걸 원하셨지 않았나 싶습니다 ㅎㅎ | 22.07.17 09:52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