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에 연남동 카페에서 처음 먹어보고 완전 마음에 들었던 토마토바질에이드.
그런데 유행이 지나서 그런지 요즘엔 이 메뉴가 올라와있는 카페도 많지 않고, 가끔 보이는 카페도 시판용 청을 사다가 탄산수만 부은 거라 마음에 들지 않습니다.
마침 허브 강연 끝나고 바질도 남았겠다, 직접 만들어 보기로 합니다.
우선 방울토마토의 꼭지를 따고 깨끗하게 씻어줍니다.
십자 모양으로 칼집을 낸 다음 끓는 물에 30초 가량 데치고 바로 찬물에 넣어 익는 걸 방지합니다.
이렇게 하면 껍질이 분리되어서 까는 게 굉장히 쉬워지지요.
하지만 너무 조금 데치면 껍질이 잘 안까지고, 너무 오래 데치면 토마토가 익어서 물렁해지니 언제나 '적당히' 하는 게 중요합니다.
방울토마토 껍질을 하나씩 까고 있으면 요리학교에서 커다란 토마토 손질하던 기억이 떠오릅니다.
그때도 이렇게 칼집 내서 데치고 껍질 벗긴 다음 잘라서 씨앗을 다 긁어내고 과육만 네모 모양으로 썰어서 준비하곤 했거든요.
"사랑은 바질 같은 걸까, 삼촌?"
"무슨 소리야?"
"한 여자가 죽은 연인의 몸을 떠나보낼 수가 없어서 머리를 베어내서 바질이 심어진 단지에 묻었대. 여자는 눈물을 물처럼 주다가 찢어지는 마음을 가누지 못해서 결국 죽고 말아. 거기서 그 어느 때보다 크고 싱싱하고 향이 강한 바질들이 자라나기 시작해서 먼 곳에서부터 사람들이 찾아왔대. (중략) 사랑은 강력한 거야, 삼촌."
"그래, 어쩌면."
"바질에도 사람 마음을 어지럽히는 성분이 들어 있다잖아. 그러니까 한꺼번에 너무 많이 먹으면 안 돼."
- 조경란 <혀>, p.278
설탕을 깔고, 껍질 벗긴 토마토를 넣고, 바질 잎을 깔아줍니다. 이렇게 반복해서 병의 주둥이까지 꽉 채워줍니다.
바질은 그 강력한 향기 만큼이나 매력적인 허브입니다. 그래서 그 이름도 '왕'을 뜻하는 그리스어인 바실레우스에서 비롯되었다고 하지요.
소설 '혀'에서는 조금 섬뜩한 바질 이야기가 나오기도 하고, 바질 잎사귀를 돌 밑에 놓아두면 전갈이 태어난다는 속설도 전해집니다.
한꺼번에 너무 많이 먹으면 안된다고는 하지만 어차피 청으로 만드는 거, 일회섭취량은 얼마 되지도 않을거라 아낌없이 팍팍 채워넣습니다.
개인적으로 청이나 피클 등을 만들 때 설탕 함량을 고전적인 미국 레시피 따라서 거의 1:1 수준으로 넣곤 합니다.
설탕이 몸에 안좋다는 걱정 때문에 청을 만들 때 설탕 함량을 줄인 레시피들이 많아지는데 잘못하면 변질될 우려가 있기 때문입니다.
차라리 설탕을 왕창 넣어서 숙성시킨 다음 나중에 에이드를 만들 때 청을 넣는 양을 줄이는 편이 낫습니다.
실온에서 하루 정도 숙성시키고 냉장실에 넣어둡니다. 하루에 한 번씩 바닥에 가라앉은 설탕을 긴 스푼으로 저어서 녹여줍니다.
4~5일쯤 지나면 설탕이 다 녹고 토마토는 쪼글쪼글해지면서 부피가 절반 가까이 줄어듭니다.
피클이나 잼, 다양한 과일청, 소시지나 훈제연어 등을 만들 때마다 느끼는 거지만 오랫동안 보존 가능한 식료품을 만들어서 냉장고와 창고를 채워넣는 것은 뭐랄까 예로부터 이어져 내려온 유전자 레벨에서 느끼는 즐거움이 있습니다.
시간이 지날수록 숙성되며 만들어지는 보존식 특유의 풍미, 제철이 아닌 음식을 맛보는 즐거움, 그리고 풍족한 저장식품이 주는 안도감까지.
스마트폰 터치 몇 번만 하면 집 앞으로 배달시킬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장을 담그고, 김장을 하고, 잼을 만들고, 청을 담그는 사람들이 있는 이유입니다.
부엌 문 앞에 바질 화분을 가져다놓은 건 파리를 쫓아준다는 얘기를 들었기 때문이다.
축대를 세우고 우물을 파는 동안 인부 한 명이 말벌에 쏘인 부위에 바질 잎을 으깨서 문지르는 걸 봤다. 그렇게 하면 통증이 싹 가신다고 했다.
화분 말고 조금 떨어진 넓은 터에서도 바질이 자란다. 자르면 자를수록 더 무성하게 자라는 것 같다.
잎을 그대로 샐러드에 넣고, 페스토도 많이 만들고, 호박이나 토마토 요리에도 듬뿍 넣는다.
많고 많은 허브 중에서 토스카나 여름의 정수를 담고 있는 건 바로 바질이다.
- 프랜시스 메이어스 <토스카나의 태양 아래서>, p.200
얼마 전에 읽은 책은 이탈리아 여행 생각이 물씬 들게 합니다. 미국의 한 부부가 이탈리아 토스카나 지방의 집을 한 채 구입하고 수리하면서 겪는 이야기를 담고 있는데, 책에서 묘사하는 풍경과 음식은 마치 천국의 일부분을 그려내는 것 같거든요.
별다른 관리 없어도 정원에서 무성하게 자라는 허브를 대충 뜯어 요리하고, 시장에서 사 온 와인 한 잔 곁들여 먹는 저녁식사는 부럽기 짝이 없습니다.
아쉬운 마음을 달랠 겸 토마토바질에이드를 만들어 마십니다.
청을 유리잔에 조금 담고, 얼음을 채운 다음 탄산수로 풀업하면 완성입니다.
얼핏 보면 빨대처럼 보이는 길다란 스푼은 청과 탄산수를 적절하게 - 둘이 잘 섞이면서도 탄산수의 김이 빠지지는 않게 - 섞을 때 뿐 아니라 수분을 잃고 젤리처럼 쫀득하게 변한 토마토를 건져먹을 때도 유용한 필수 아이템입니다.
달달하면서도 토마토의 풍미와 바질의 향이 살아있는, 시원하고 맛있는 음료입니다.
해 질 무렵 불어오는 선선한 가을바람을 맞으며, 이탈리아 시골 마을에 머물며 정원에서 뜯은 토마토와 바질로 만든 토마토바질에이드를 마시는 상상을 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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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탕을 넣는 이유가 단맛도 있지만 부패 방지를 위한거라서 스테비아 넣으면 썩지 않을까 싶습니당 | 25.09.24 13:50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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