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navercast.naver.com/contents.nhn?rid=197&contents_id=23683&leafId=197
칼날 위를 걷는 이야기꾼. 양영순 작가의 첫 장편이자 첫 웹툰 [1001]의 모티브이기도 한 [천일야화]의 주인공 세헤라자데에 대해 이렇게 말할 수 있지 않을까. 잘 알려진 것처럼, 그는 자신을 죽이려 하는 포악한 왕에게 매일 밤 재밌는 이야기를 들려주며 목숨을 연장한다. 이야기를 제대로 이어가지 못하거나, 재미가 없다면 그대로 끝나는 이 아슬아슬한 줄타기는, 하지만 어쩌면 독자를 상대로 한 모든 이야기꾼의 숙명일지 모른다. 3년이 넘는 시간 동안 주 3회로 [덴마]를 연재 중인 양영순 작가를 보며 느끼는 긴장감처럼. 어마무지하게 확장되어 버린 이야기와 수많은 복선을 어떻게 해결할지 걱정되어서만은 아니다. (물론 이것도 무시할 수 없는 요소긴 하다.) 이미 몇 번이나 중도에 이야기를 포기했던 안타까운 선례들 때문만도 아니다. (이것 역시 절대 무시할 수 없는 요소다.) 포악한 왕에게 내일을 기약하게 했던 세헤라자데처럼, [덴마]와 양영순 작가 역시 독자에게 섣부른 예측을 허락하지 않으며 매 회를 이어가고 있다. 독자를 만족시키되 또한 안달이 나게 만드는 것, 독자와 이야기꾼 사이의 진정한 긴장감이란 그런 것이리라. 아슬아슬하게 천일 하고도 하루를 이어가는 것이 아니라, 아슬아슬하기에 천일 하고도 하루 동안 독자를 붙잡아둘 수 있는 것이다. 과연 그 길의 끝에는 [천일야화]와 같은 해피엔딩이 기다리고 있을까. 알 수 없지만, 벌써 이렇게 멀리 왔다.
현재 연재 중인 [덴마]의 ‘a catnap’ 에피소드가 1년을 훌쩍 넘었다. 주인공 덴마는 언제 나오느냐는 반응이 있다.
1년이라니, 맙소사. (웃음) ‘a catnap’이 끝나면 바로 덴마가 나올 거다. 현재 에피소드가 끝나면 [덴마]의 배경 설명이 끝나는 거니까 그 이후에는 속도를 내서 이야기를 빨리 뽑아내야지.
세계관 설명에 대한 에피소드가 1년 넘게 연재된 건 그만큼 이야기가 거대하기 때문이다. 처음 구상할 때부터 이런 스페이스 오페라였나.
처음 시작할 때는 소년 만화 정도의 느낌이었다. 초능력을 가진 주인공이 택배 기사 일을 하며 만나는 사건들을 하나하나 해결하는 구성이었지. 일종의 패턴이 반복되는 만화들 있지 않나. 그런 걸 예상했는데 이야기가 진행되면서 다른 가지가 자꾸 뻗어 나오면서 이야기 전체가 무척 커져버렸다. 상상도 못했던 이야기가 나오기도 하고. 이야기 자체에 생명력이 있어 가는구나 싶기도 하다. 이 정도로 연재가 길어질 줄은 전혀 예상 못했다.
그런 새로운 이야기의 가지는 뿌려놓은 설정에서 나오는 것 같나, 캐릭터에서 나오는 것 같나.
둘 다인 것 같다. 가령 ‘식스틴’ 에피소드의 경우 이델의 과거를 보여주는 이야기인데, 그 전 에피소드인 ‘사보이 가알’에 이델이 처음 나올 때만 해도 그렇게 될 줄은 전혀 몰랐다. 그런데 자연스럽게, 이 캐릭터에 대한 이야기로 흘러갔다.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당연히 이 캐릭터에 대해 이야기해야 할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전작들의 세계도 함께 조합되고 있다. [쳘견무적]의 아비가일이 등장하고, [라미레코드]의 태모신교 이야기가 세계관에 포함되고.
그 캐릭터들에게 미안한 마음이 너무 컸다. 두 작품 모두 연재를 중단하며 이야기를 매듭짓지 못했는데 그게 너무 미안했다. 아비가일도 그렇고 라미도 그렇고. [라미레코드] 같은 경우도 처음에는 [덴마]와 연결될 게 없었는데, 이야기를 이어가다보니 미안한 마음에 끌어와서 넣으며 지금과 같은 형태가 됐다.
이야기가 때론 예측할 수 없게 확장되는 건데, 작가로서 그걸 컨트롤하기 쉽지 않을 것도 같다.
전에 황미나 선생님과 사석에서 만나 장편이 잘 안 풀리는 것에 대한 고민을 말씀드린 적이 있다. kk그때 선생님께서 마지막 장면만 가지고 있으면 어떻게든 이야기가 결말을 향해 간다고 말씀하셨는데, [덴마]를 연재하며 그게 어떤 뜻인지 좀 알 것 같다. ‘식스틴’ 에피소드를 연재하며 [덴마]의 마지막 장면, 어떤 이미지가 떠올랐는데, 그게 있으니까 이야기가 확장돼도 그 장면을 향해 전체 이야기가 가는 것 같다.
마지막 장면에 대한 구상이 연재에 대한 동력이 되는 것 같나.
그걸 쥐고 있는 게 중요하다는 생각이 요새 많이 든다. ‘God's lover’ 에피소드의 경우 고드가 도시 위를 날아가는 마지막 장면만을 생각해두고 에피소드를 진행했다. 그가 어떻게 고양이 이미지로 인공위성에 의식이 복제됐는지에 대해선 아직 이야기를 준비하지 못했는데, 마지막 장면이 있으니 어떻게든 그곳을 향해 찾아가더라. 신기하긴 신기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황미나 선생님이 말씀해주신 게 이런 거구나 싶고. 전에는 장편 연재가 너무너무 불안했는데, 이런 걸 한두 번 경험하니까 요즘은 불안감이 덜하다. 물론 당장 내일의 마감을 생각하면 갑갑하지만 (웃음) 그래도 어떻게든 가고 있다.
앞서 장편에 대한 어려움에 대해 이야기했는데, 예전에 했던 작품들에는 마지막 장면이 없었던 건가.
없던 거 같다. 그냥 즉흥적으로 이거 재밌지 않을까, 이런 식으로 접근하고 내질러서 쭉 가는 편이었는데 그러다보니 막히고 막히면서 연재 중단으로 이어졌던 것 같다. 이야기가 향해야 할 종착역이 없으니까. 지금은 그래도 마지막 장면이 있으니 끝까지 가지 않을까 기대하는 거고.
조금 민감한 얘기지만 앞서 말한 [철견무적] 등을 비롯해 연재 중단에 대해서는 이야기를 안 할 수 없다.
중간에 쉽게 지쳤던 것 같다. 콩트로 데뷔를 하다 보니 그때의 기질이 있다. 콩트는 한 방 터뜨리고, 반응 안 좋으면 그 다음날 또 터뜨리는 식이다. 독자 반응에 민감한 건데, 장편은 반응이 바로 안 오지 않나. 그럼 잘못 가고 있는 건가 싶다. 잘못 가니 소용없다, 빨리 정리하지 이런 마음이 들었던 거고. 길게 보고 덩어리를 가늠하는 훈련이 안 되어 있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잘하는 사람보다는 꾸준한 사람이 중요한 것 같다. 진짜 되게 성실한 작가가 되고 싶다.
그 생각은 언제 확고해졌나.
전작인 [플루타크 영웅전] 연재를 중단하고 나서다. 비록 당시 연재하던 스포츠 신문에서 먼저 연재 중단을 제의했지만, 작가고 좀 더 고집스럽게 밀고 나갈 수 있었어야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왜 그때 이야기를 끝까지 보고 말해보자고 말하지 못했을까. 왜요, 더할게요, 라고 작가답게 말하지 못했을까. 그런 생각이 들며 자괴감이 들었다. 자기 이야기에 믿음을 가지고 고집을 부리기도 해야 하는데 타협, 아니 일방적으로 순응했던 거다. 작가가 그러면 곤란하지 않나. 그런 부침을 겪으면서, 성실하게 끝내는 게 가장 중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 목소리에 고집을 부리면서.
과거 연재 중단이 많아서라는 걸 차치하고서라도, 이번 [덴마]는 작품에 대한 애정 때문에 대단원의 막이 제대로 내리길 바라는 사람들이 많다.
지금까지 했던 중 가장 길게 연재한 작품이다. 개인적으로도 [덴마]를 제대로 완결하면 작가로서 전환점이 될 것 같다. 앞서 말한 것처럼 뭔가를 시작할 때 항상 불안한 마음이 있었다. 내가 제대로 할 수 있을까, 얼마나 더 갈 수 있을까, 그런. 덴마를 마치고 나면 그런 걱정을 덜할 수 있을 것 같다. 다른 색깔의 이야기에도 좀 더 자신 있게 도전할 수 있을 것 같고. 반대로 이 작품을 마무리하지 못하면 작가로서 답이 없을 것 같다는 불안감과 공포 역시 있다.
출판 만화 시절부터 굉장히 오랜 시간 버텨온 작가인데도 작가 생명에 대한 불안감이 있나.
예전보다 더하다. 전에는 책임질 게 별로 없었지만 이젠 가족의 생활을 책임져야 하니까. 그래서 요즘은 다른 작품도 잘 안 본다. 잘하는 친구들이 너무 많아서. 후배들 중에도 보면 깜짝깜짝 놀라는 경우가 많다. 어떻게 이 나이에 이런 발상을 하지. 그런 사람이 많을수록 내가 살아남을 수 있을까 싶지. 불안의 연속이다.
그런 젊은 작가들이 나올 수 있는 환경은 웹툰 플랫폼의 발달 때문인데, 전작 [1001]로 강풀 작가 등과 함께 웹툰의 시대를 연 게 본인 아닌가.
시기 문제였을 뿐이다. 당시 웹에 장편들이 많이 나오는 시기였는데 그게 맞아떨어졌을 뿐이다. 그게 의미 있을까.
하지만 당시 웹툰은 지금 같은 메이저 매체가 아니었다. 당시 본인은 출판과 스포츠 신문 모두에서 성공한 작가였고.
새로운 시도를 하기 위해 웹툰에 갔다기보다는 흐름상 그렇게 가는 분위기였다. 이미 스포츠 신문에서는 만화를 한두 개 씩 접는 상황이었고. 당시 [멜랑꼴리]의 비타민 작가와 강풀 작가 등과 ‘럽툰’이라는 모임을 함께 했는데 그 친구들과 어울리면서 웹툰으로 빨리 눈을 돌리게 된 것 같다. 사실 당시 웹툰 외에는 대안이 없었는데, 만약 그들을 만나지 않았다면 잡지에서 몇 년 더 버텼을 거다. 그래서 잡지 쪽에 있던 동기들은 나보고 얄밉다고 했다. 잡지에서 신문으로 신문에서 온라인으로 잘도 넘어간다고. 다른 사람 다 물에 빠지는데 혼자 잘 빠져나간다고. 그런데 내가 선견지명이 있어서 옮긴 게 아니라 그냥 운이 좋았던 거다. 온라인으로 눈을 돌리게 해준 비타민, 강풀 작가, 그리고 나중에 네이버와 연을 맺는데 도움을 준 김규삼 작가는 개인적인 은인인 셈이지.
천운 같나.
누가 도와줘서 여기까지 온 것 같다. 사실 경력에 비해 나는 제대로 된 작품 타이틀이 별로 없다. 책으로 꽂아 봐도 얼마 없다. 그런데도 지금까지 만화가로 먹고 살고 있는 걸 보면 스스로도 신기하다. [플루타크 영웅전]이 그렇게 연재 중단이 됐을 땐 정말 이렇게 작가 생명이 끝나는 건가 싶었다. 너무너무 기분도 다운됐고. 더는 갈 데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고. 그런데 다시 네이버에 [덴마]를 연재할 수 있게 됐으니 너무 감사한 일 아닌가.
운이 좋아서이기도 하지만 어쨌든 만화를 포기하지 않아서일 수도 있는데.
만화 말고는 할 수 있는 게 없다. 마감 제대로 못 지키고 그러면 기분이 축 처지는데 그렇다고 만화 말고 다른 걸 할 수 있나 생각해보면 정말 깜깜하다.
먹고 사는 문제인가.
가장이지 않나. 사실 과거에는 밥값을 한다는 말에 대해 크게 의미를 안 뒀는데 그게 정말 대단히 고귀한 일이라는 걸 알게 됐다. 먹고 살기 위해서 하는 거죠, 라는 말이 푸념 같은 게 아니다. 내가 만화가로서 먹고 사는 거지, 라고 생각해보면 그것만으로도 가치가 있다는 생각이 들더라.
그걸 꾸준히 오래 하려면 독자에게 만족을 주는 작가가 되어야 한다.
작가의 겸손함이 중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작가의 겸손이라는 건 사람들과 대화할 때 자신을 낮추거나, 독자를 배려하는 게 아니다. 독자에게 긴장감을 주고 자신의 이야기를 끝까지 해내는 게 겸손한 작가다. 강풀, 조석 작가처럼. 조석 작가의 경우 마감 시간을 계속 지키면서 한 타이틀을 5년 이상 이끌었는데 그건 정말 엄청난 거다. 개그 만화를 우습게 아는 사람들도 있는데 개그 만화를 5년 이상 하는 건, 어떤 타이틀과 붙여도 최고 수준이다. 그런 친구들이 정말 겸손한 거다.
바로 그 마감 시간이라는 부분에 있어 독자들의 아쉬움이 크다.
그런 면에서 나는 오만방자한 거다. 그걸 떨쳐내는 게 큰 화두다. 2013년은 칼마감을 지키는 한 해가 되도록 하는 것.
지금까지 독자에 대한 의무, 가장으로서의 의무를 이야기했는데, 그냥 만화가로서 본인이 하고 싶은 것은 없나.
중학교 2학년 때 소설 [데미안]을 읽었는데 그때의 가슴 벅찬 흥분을 잊지 못한다. 나도 만화로 누군가에게 그런 경험을 주고 싶다는 욕심이 있다. 가령 누군가에게 당신의 성장에 영향을 미친 작품이 있느냐고 물을 때 양영순 작가의 어떤 작품을 사춘기 때 보고 인생의 방향을 잡는데 도움을 받았다고 할 수 있는. 어쨌든 그것도 [덴마]를 끝낸 이후의 일이다.
여러모로 [덴마]의 완결이 중요하다.
이걸 완결해야 다음에 할 수 있는 게 생기는 거지. 사실 지금으로서는 만날 이야기해야 소용없다. 원고 마감을 잘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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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얼 웹툰계 진정한 원탑 덴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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