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매일기
1
한 시대의 여물인 고통과 한 시대의
신발인 절망감 너는 날으는 물이요
웃는 물이요 너는 표현할 수 없었다
한 시대의 비행非行과 한 시대의 불감증을
한 시대의 길가에서 너는 사랑의 편지를
주웠지만 아무에게도 전하지 않았다
너는 사망했다 그리고 먹고 마셨다
한 시대의 습기와 한 시대의 노린내를
너는 두 개의 입으로 토해냈다 자고 나면
햇볕에 이불을 말리고 떠벌려 입을 말리고
시들어갔다
2
처음엔 물건이 사라지고 다음엔
물건에 대한 기억이 사라지고
한 세대가 오고 또 한 세대가 간다
처음엔 비 맞은 성냥이 안 켜지고 다음엔
비 맞은 해바라기가 빛난다 끔찍하다
비 맞은 공포여, 웃음과 신음의 화촉華燭
어떻든 살아야겠다는 마음이 어떻든
살 수 없다는 마음을 업고 발바닥이
땅을 업고 그림자가 실물을 업고 쓰레기가
밥상을 업고 입이 자꾸만, 항문을 빨고
천국은 유곽의 창窓이요 뜨물처럼 오르는
희망, 희망―늙은 권투 선수
처음엔 고통이 사라지고 다음엔
고통에 대한 기억이 사라지고
뒤집힌 눈, 잔물결 지는 눈썹, 영화는
끝났고 다시 시작된다
3
거룩한
거룩한 거룩한
지연遲延 지루한 사랑
마음이 물질이 될 때까지 견디기
못 견디기
고통은 제가 고통인 줄 모르고
고통은 제가 고통인 줄 미처, 모르고
여기는 아님
여기서
기쁨까지 거리, 파동
여기서 죽음까지 거리, 파동
껴안은 사람들 사이의 무한한 거리, 파동
여기는 아님
여기 있으면서 거기 가기
여기 있으면서 거기 안 가기
여기는 아님 거기 가기 안 가기
여기는 아님 피는 강물 소리를 꿈꾸기 달맞이꽃,
노오란 신음 소리를 꿈꾸기
한 고통이 다른 고통을 부르기
다른 고통이 대답하기 대답 안 하기 대답하기
여기는 아님
아님 아님
아님
뒹구는 돌은 언제 잠 깨는가
이성복, 문학과지성 시인선 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