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가시관을 쓴 망명정부의 왕이다
나의 작은 다락방으로 나는 망명한다
스스로를 유폐한다 스스로 고립된다
고독은 나의 가시관
아아, 나는 가시관을 쓴 망명정부의 왕이다
*
'먹을 수 있는가?'와 '먹으면 죽는가?'
는 음식물을 구분하는 기준이 아니라
삶을 구분하는 기준이라 나는 믿는다
나는 아직도 하루에 세 끼를 꼬박 챙기면서도
무언가를 안다고 여기는 사람들을 혐오 한다
하루 세 끼의 식습관은 나를 가둔 괴뢰정부
나는 망명을 자처한 가시관을 쓴 왕이다
풍부한 가난과 높은 외로움이
나에게 죽과 우유가 되어준다
부끄럽지 않게 살고 있다
나는 만주로 떠나는 백석이다
*
백 그램 단위로 포장되는 욕망의 무게
바코드를 찍는 손도 상품을 끌어당기는 손도
모두 욕망 때문에 불행하다
모든 욕망을 금지하고 싶다는 게 아니다
그저 욕망으로부터 도피하고 싶을 뿐
나는 욕망으로부터 도피하는 가시관의 왕
티브이 광고가 말한다, 부자되세요
나는 옆에서 말한다
우리 모두 적당히 가난합시다
부족함의 미덕을 전파하는 가난한 석가모니가 되고 싶다
나는 나의 왕궁을 탈출한 석가모니
나의 왕국은 이미 작은 다락방이다
*
먹지 않으면 죽는다는 것은 존재에 대한 신의 조롱이다 라고
왕은 생각했다 그래서 한 달째 하루에 컵라면 하나만 먹고
나머지는 아무 것도 먹지 않았다
(컵라면은 어떻게 보아도 음식이 아니라 사료 같다)
거식증과는 다르다
이는 나의 신에게 존재로서 보내는 조롱이다
나는 신으로부터 도피한 망명정부의 왕
존재는 나의 가시관이다
*
배가 홀쭉해졌다
시를 지어 밥을 해 먹을 수 있으면 좋겠다 라는
생각마저 부질없이 느껴질 때 즈음이 딱 좋다
삶에게 짓궂은 농지거리 툭 던지기 좋은 시간이다
산책하러가자
가방에 노트 한 권, 시집 한 권, 담배 한 갑 넣고
옆구리에 고장 난 노트북 ‘ElChe viva'를 끼고
방을 나선다 국경을 통과하는 것이다
이 작은 다락방은 모든 욕망으로부터의 도피를 위한
나의 작은 망명정부
나는 가시관을 쓴 망명정부의 왕이다
*
담배를 피워 물고 가능한 넓고 조용한 곳을 찾아 발을 옮긴다
그럴 때 나의 망명정부는 한없이 넓어지는 것이다
여기에 깃발을 세우고 진을 세우라
라고 명령을 해도 듣는 이도 없고 깃발도 없다
나의 망명정부는 깃발 같은 건 원래 없었다
깃발에서 욕망을 발견한 건 촛불의 시대
그 이후 나는 내 망명정부의 깃발을 없앨 것을 선언했다
*
어릴 적 나의 장래희망은 산책가였다 이유는 당연히
산책하는 것이 가장 즐거운 일이었기 때문
하지만 산책가라는 직업은 세상에 존재하는 게 아닐뿐더러
그것은 건달과 다를 바 없는 것이라고 초등학교 선생은 말했다
굳이 산책가에 속하는 직업군을 고르자면 시인
그럼 또 누군가 말하겠지 그것도 직업이 아닐 뿐더러
건달과 다를 바 없는 것이라고
나는 이미 산책가
나는 이미 시인
나는 이미 가시관을 쓴 망명정부의 왕
*
조금만 더 멀리 가보자, 칭기즈칸처럼
나의 영토가 지금 수백 배 불어나고 동시에 수백 배
줄어들고 있다 이동하는 만큼 줄어드는 것이다
오늘 산책의 목표 지점은 고장 난 노트북의 수리
일부로 먼 곳을 빙빙 돌아서 가는 것 또한 산책의 목표
*
지금 왕은 길을 잃었다
예약했던 수리점에 전화를 건다
나의 위치를 묻는 컴퓨터 수리점의 수상(首相), 하지만
지금 내가 어디에 있는 가에 대한 설명은 언제나 어려운 일
감(感)이 원해는대로 흐르는 물줄기를 따라 걷기로 한다
감(感)은 이 망명정부의 실세, 나는 허수아비 가시관의 왕
*
왕은 후궁으로 맞고 싶은 여자가 있었다
왕은 지독하게 짝사랑을 하였다, 지독하게 차이고도
잊지 못한 왕은 그 여자를 6년이나 짝사랑을 하였다
그리고 처녀성을 잃은 여자가 성애에 몸을 맡기듯이
고독에 깊이 빠져들었고
사랑했던 것이 여자였는지 환상이었는지 그리움이었는지
구분할 수 있을 때 즈음엔 이미 왕은 고독에 중독되어버렸다
깨달을 다음에야 떠나야했던 사랑은 나의 자금성
나는 자금성을 떠나야하는 불쌍한 황제 푸이
*
왕은 무척이나 서정적인 얼굴이 되었다
그리움을 떠올리는 것일까
옛사랑을 떠올리는 것일까
왕 자신마저도 그것이 무엇인지
아직까지 알 수 없다고 한다
*
감(感)은 역시 실세답게 능력을 보여준다
컴퓨터 수리점의 국경이 눈앞이다
왕은 국경을 기웃대며 수상(首相)과 눈인사를 한다
왕은 최대한 절박한 표정으로 하드 안에 남겨진
시와 야한 동영상의 안위를 걱정한다
수리점의 수상은 나만 믿으셔 라는 표정을 지으며
두 시간 쯤 뒤에 찾으러 오라 하신다
*
산책은 이어 진다 나의 산책의 종착점은 언제나 서점
나는 왕임에도 불구하고 왕 대접을 못 받지만 서점에서
만큼은 왕이다 왕은 서점의 플레티넘 회원이기 때문이다
누적된 포인트 덕분에 왕은 책을 부담 없이 살 수 있다
서점은 망명정부의 대사관(大使館)
책은 가시관의 왕의 몇 안되는 유희(遊戲)
*
망명정부의 재정(財政)은 언제나 적자(赤字)다.
망명정부이기 때문이 아니라 경제활동이 거의 없기
때문이다 망명정부의 몇 안되는 경제활동은
책을 사거나 담배를 사거나 술을 사는 일 뿐이다
생각해보면 하는 일이 오직 그것 밖에 없다
*
망명정부의 자산은 책장 여섯 개를 가득 메운
책과 음악과 고양이 한 마리와 기타 한 마리,
노트북 한 마리 뿐이다.
나는 고양이에겐‘고독해’라는 이름을 주었고,
노트북에게는‘ElChe viva’라는 이름을 주었다
그래서 노트북을 열 때마다 나는 언제나 혁명을
꿈꾸게 되었고
고양이를 부를 때마다 나는 언제나 고독해졌다
*
서점을 나온 왕은 다시 컴퓨터 수리점으로 향한다
왕은 기분이 좋다 별다른 정보 없이 간 서점에서
박정대 시인의 새 시집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한 권의 시집은 모두 시인들의 망명정부
버스 안에서 시집을 펼치자 이국의 입구가 펼쳐 진다
파르동 박정대
메르시 박정대
고마워요 박정대
왕은 집단이니 단체니 일단 몰려다니는 건 질색이지만
무가당 담배 클럽은 동경한다 왕은 이미 자신도 모르는
사이 무가당 담배 클럽의 회원
고마워요 박정대
*
수리점에 도착해 수리불가 판정을 받은
여전히 고장 난 노트북 ‘ElChe viva'를 받는다
이는 오늘 처음으로 나의 예상을 벗어난 일이다
역시 모든 일정엔 이런 해프닝이 필요한 것이다
해프닝이 없다면 그것은 이야기가 되지 못한다
그것으로 이야기는 완성되는 거니까
*
다락방으로 돌아온 왕은 책상에 앉자마자
음악을 틀고 차가운 맥주를 꺼내어 마신다
음악을 들으며 따뜻한 음료나 차가운 맥주를
마시며 담배를 피워야 하는 건 이 망명정부의
규칙이다
담배를 꺼내 물고 왕은 생각에 잠긴다
그런데 이 시는 어디까지 이어지는 거지?
*
왕은 시를 쓰는 일 같은 건 뒤로 미루고, 영화를 보거나
책을 읽고 싶다고 생각 한다
두 번째 맥주 캔을 꺼내며 왕은 희극지왕의 디브이디를
꺼낸다 왕은 주성치의 영화를 좋아 한다 특히 희극지왕을
가장 좋아한다
정말 좋은 영화야, 희극지왕은……
이렇게 좋은 희극지왕을 같이 볼 여자가 없다는 게 아쉽네
*
엔딩 크레디트가 흐르고 책상 위엔 빈 맥주캔이 다섯 개
쌓여있다, 왕은 어느새 침대에서 자고 있다
왕은 항상 낮에 자고 밤에 일어난다
왕에겐 항상 밤이 낮이고 낮이 밤이다
망명정부에는 국경 뿐 아니라 시차(時差)도 존재하기
때문이다
*
시 같은 건 나중에 쓰면 되니까
*
확실히 시 같은 건 나중에 쓰면 된다
그보다 중요한 것은 얼마든지 있으니까
가령 코를 파거나 귀를 파거나 수음을 한다거나
하는 일들
어차피 시를 쓰는 일은 다른 일을 할 때 몰래 딴짓
하듯 써야 제맛이니까
나는 빈둥대는 일을 가장 열심히 하는 사람,
그 다음으로 열심히 하는 것은 고독을 생산 하는 일
이 작은 다락방은 나의 망명정부, 창문은 광활한 대지
입구는 나의 국경, 고독은 내게 꼭 맞는 가시관
나는 가시관을 쓴 망명정부의 왕이다
이에서
21세기 문학에 발표, 공모전 뺀찌 먹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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