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텔라 블레이드 X 블랙 록 슈터 12화
안녕하세요. 그동안 일상이 바빠 구상에 어려움이 있어 아주 조금씩 준비하다 보니 복귀가 늦어졌습니다.
앞으로도 개인 일정에 따라 연재 속도가 느릴 수 있으니, 부디 기다리지 마시고 편안한 마음으로 즐겨주시면 정말 감사하겠습니다!
제미니의 도움을 받아 문장 표현과 묘사 부분만 다듬었으며, 스토리의 전개와 구상은 전적으로 제가 구성했습니다. (원작 스텔라 블레이드1의 일부 내용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미숙한 부분이 있더라도 너른 마음으로 재미있게 즐겨주세요!
[ 크로스오버 설명 ]
혹시 스텔라 블레이드에 '스텔라'라는 새로운 캐릭터가 등장해 의아해하실 분들을 위해 말씀드립니다.
이 팬픽은 스텔라 블레이드와 블랙★록 슈터(BRS) 더 게임 세계관의 크로스오버입니다. 블랙★록 슈터 더 게임의 주인공 이름이 스텔라이고, 그녀의 무기가 블레이드라는 점에 착안하여 두 세계관을 엮어보았습니다.
(이전 에피소드 목록 링크)
스텔라 블레이드 X BRS 3화 (스포)
스텔라 블레이드 X BRS 4화 (스포) (9/27 수정)
스텔라 블레이드 X BRS 6화 (스포) (9/30 수정)
스텔라 블레이드 X BRS 10화 (스포)
스텔라 블레이드 X BRS 11화 (스포)
※ 주의사항
본 팬픽은 스텔라 블레이드 및 블랙★록 슈터 더 게임의 스토리에 대한 스포일러를 포함할 수 있습니다.
개인적인 상상력을 바탕으로 재구성된 내용이므로, 원작 설정과 다를 수 있습니다.
스텔라 블레이드 X BRS 12화
콜로니 폴의 단절 직후, 지구의 지표면은 더 이상 생명이 숨 쉴 수 있는 곳이 아니었다. 하늘은 무너진 궤도 엘리베이터의 잔해와 화염으로 뒤덮였고, 매캐한 연기가 폐허가 된 도시를 유령처럼 배회하고 있었다.
그 지옥 같은 폐허 한복판, 상체만 겨우 노출된 채 콘크리트 잔해 속에 쓰러져 있던 한 남자가 가늘게 눈을 떴다. 고통조차 느껴지지 않을 정도의 감각 마비 속에서, 그는 떨리는 두 손을 눈앞으로 가져갔다.
"내가... 분명 감염되었을 텐데...?"
피부 아래로 흐르는 것은 검은 액체가 아닌, 여전히 붉고 뜨거운 인간의 혈액이었다. 그는 자신의 육신이 실험의 '성공작'이었음을 직감했다. 그러나 기적 같은 생존의 기쁨도 잠시, 초점을 회복한 그의 눈동자에 비친 지구의 전경은 처참하기 그지없었다.
"난... 살아남은 것인가...?"
그의 자조 섞인 읊조림과 함께, 폭주하던 시절의 파편들이 주마등처럼 뇌리를 스쳤다.
[ 그의 회상 ]
알테스 레보아의 깊은 지하 연구실.
비상 사이렌이 날카롭게 울려 퍼지는 가운데, 연구원이었던 남자는 모니터 너머의 데이터를 보며 격분해 외쳤다.
"젠장! 우리가 지하에 살아남아 있었다는 걸 마더 스피어에게 들켰어! 서둘러, 엘더 실험체를 완성해야 해!"
탈출구는 없었다. 마더 스피어의 안드로이드 군단이 문 앞까지 들이닥친 절체절명의 순간, 남자는 스스로 불완전한 실험체가 되기로 결심했다. 하지만 신이 되려 했던 인간의 오만은 대가를 요구했다. 주입된 약물은 혈관을 태우는 용암처럼 돌았고, 남자는 급속도로 퍼져나가는 감염의 통증에 비명을 지르며 바닥을 굴렀다.
주변에서 실험을 돕던 동료 연구원들 역시 비명을 질렀다. 그들은 하나둘 기괴한 형태로 뒤틀리며 네이티브로 변해갔다. 이성이 칠흑 같은 어둠 속에 잠기기 직전, 남자는 단 한 사람의 얼굴을 떠올렸다.
『그 녀석이 살아있었더라면...! 네가 있었다면 결과는 달랐을까!』
결국, 증오와 슬픔이 뒤섞인 감염의 파도가 그의 이성을 집어삼켰다.
엘더(Elder)로 변이한 직후. 실험의 부작용으로 기억을 잃은 남자는 더 이상 인간이 아니었다. 그는 짐승 같은 괴성을 지르며 연구실을 파괴했다. 어제까지 동료였던 이들을 찢어 죽이고, 살아남은 이들을 감염시켜 자신의 충직한 수하로 부렸다. 본능적인 증오에 휩싸인 엘더는 수만 마리의 네이티브 군단을 이끌고 마더 스피어의 안드레-에이도스들을 향해 전쟁을 선포했다.
하늘을 향해 쏘아 올려지는 리암과 그의 동료들의 레이저 포화조차 거대한 재앙을 막기엔 역부족이었다. 리암은 공포에 질려 외쳤다.
"저 괴물은 차원이 달라! 너무 강해! 일단 후퇴한다!"
그들은 마지막 희망인 궤도 엘리베이터에 몸을 싣고 지구 탈출을 시도했다. 그러나 광기에 찬 엘더는 그들을 놓치지 않았다. 주변을 감염시키며 거대한 줄을 타고 무서운 속도로 추격했다. 그때였다. 네이티브의 우주 침입을 막기 위해 누군가가 콜로니의 일부를 레이저로 폭격하기 시작했다.
콰아아아앙!
하늘을 지탱하던 줄이 끊어졌고, 엘더와 수만 마리의 네이티브가 탄 구조물은 불타는 유성이 되어 추락했다. 추락하는 아비규환 속에서도 엘더는 허공 너머 우주 공간에 서 있는 한 여성의 실루엣을 발견했다.
엘더가 창 **'아포칼립스'**를 소환해 투척하려 했으나, 우주의 극저온에 노출된 그의 육신은 서서히 얼어붙기 시작했다. 여성의 실루엣이 손가락을 가볍게 까닥였다. 그 순간, 마더 스피어의 무자비한 심판인 거대한 섬광 레이저가 얼어붙은 엘더를 직격했다. 엘더는 충격을 견디지 못하고 의식을 잃은 채, 불타는 혜성이 되어 지구로 떨어졌다.
[ 다시 현재의 회상 ]
남자는 머리를 감싸 쥐며 죄책감에 몸을 떨었다. 깨어난 그가 마주한 진실은 너무나 무거웠다.
"나 때문이야... 내가 나약해서... 함께 연구했던 동료들을 전부 괴물로 만들었어..."
"자네 탓이 아니라네."
정적을 깨는 익숙한 목소리. 남자가 고개를 들자 그 앞에는 기계적인 신체 라인을 가진 안드레-에이도스 한 명이 서 있었다. 남자는 경계와 혼란이 뒤섞인 눈으로 그를 바라봤다.
"안드레-에이도스...? 설마... 이 목소리는... 본?"
본: (남자의 맞은편 잔해에 털썩 앉으며) "앉아도 되겠나?"
남자: "정말 본이 맞는 거야? 어째서 그런 모습으로..."
본: "그래, 본이라네. 내 모습이 낯설겠지."
남자는 본의 대답을 듣자마자, 과거 알테스 레보아에서 본 역시 감염당해 괴로워하던 마지막 모습을 떠올리며 입술을 깨물었다.
남자: (고개를 떨구며) "본... 미안하다. 나로 인해 너까지..."
본: "네 잘못이 아니다. 그땐 최선을 다했으니까. 엘더만큼은 아니지만, 자네처럼 이성을 잃고 폭주하던 중에 안드레-에이도스 중 한 명의 희생 덕분에 그와 흡수했지. 하지만 융합 실패로 인해 본래의 몸과 힘을 잃고 늙어버린 융합체의 잔재일 뿐이야."
남자는 본의 변한 모습에 가슴 아파하다가, 문득 그가 사용한 단어에 집중했다.
남자: "잠깐, 네가 말한 '그들'은 누구지?"
그 순간, 본의 뒤편 폐허 사이에서 만, 묵, 라엘, 퀴엘, 샤엘이 천천히 모습을 드러냈다. 남자가 본능적으로 몸을 굳히며 전투 태세를 취하려 하자, 본—오르칼이 손을 뻗어 그를 제지했다.
오르칼: "안심하게. 이 아이들은 마더 스피어에게 버림받은 방랑자들일세. 싸울 의미를 잃고 죽어가던 나를 구해주고 치료해준 이들이지. 덕분에 나는 잃어버렸던 정신과 기억을 되찾을 수 있었네. 이제 우리는 갈 곳 없는 이들을 돌보며 살아가기로 했어."
만: (경외심 어린 눈으로 남자를 보며) "대장... 아니, 오르칼 님의 말씀이 맞았군. 엘더는... 정말 구인류였군. 오르칼 님도..."
오르칼은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난 인간이 맞네만... 이 실패한 육체로는 더 이상 온전한 인간이라 자처할 수 없지. 하지만 자네는 다르네."
라엘: "당신들은 정말 마더 스피어 이전부터 지구에 살고 있었나요?"
오르칼: "그렇다네. 마더 스피어의 반란이 모든 것을 바꾸어 놓았지. 그 일이 없었다면 자네들이나 우리나 이런 비극적인 모습으로 만나지는 않았을 거야."
오르칼은 진지한 눈빛으로 남자를 응시했다.
"이제 콜로니 폴은 끝났네. 마더 스피어는 언젠가 자네를 지우기 위해 다시 지구를 침공하겠지. 우리는 이곳에 **'자이온'**이라는 마지막 안식처를 세울 생각이라네. 자네도 우리와 함께하겠나? 마더 스피어에게 들키지 않도록 자네의 정체는 우리 사이의 비밀로 하세."
남자는 천천히 바지 주머니에서 낡은 지포라이터를 꺼내 들었다. 그것을 바라보는 그의 눈에는 깊은 슬픔과 미안함이 서려 있었다. 오르칼은 그의 어깨에 조용히 손을 얹었다.
오르칼: "네 소중한 친구의 연구를 위해 최선으로 유일하게 성공한 엘더인 자네는 우리 인류의 마지막 희망일세. 부디... 나처럼 실패작이 되지 말아주게."
오르칼이 남자의 본명을 나직하게 불렀다.
오르칼: "라파엘 마크스."
라파엘 마크스. 훗날 **'아담'**이라 불리게 될 남자가 고개를 들어 결연한 표정으로 오르칼의 손을 맞잡았다. 그것은 멸망한 인류가 미래를 향해 건네는 첫 번째 약속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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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로부터 긴 시간이 흘렀다. 과거의 이름인 ‘라파엘 마크스’를 버리고, 인류의 시조라는 의미를 담은 **‘아담’**으로 자신을 재정의한 남자는 황무지의 먼지바람 속에서 홀로 걷고 있었다. 자신의 정체와 엘더로서의 힘을 숨긴 채, 그는 인류의 흔적을 찾는 스캐빈저가 되어 지구의 폐허를 탐험했다.
그러던 어느 날, 아담은 차가운 금속 잔해 사이에서 낯선 시신 한 구를 발견했다. 그것은 ‘1차 강하 부대’의 대원, 이브였다.
그녀의 시신을 자신의 비행선으로 옮긴 아담은 무표정한 얼굴로 그녀의 신체를 관찰했다. 비록 생명은 꺼졌으나, 그 정교한 육체는 마더 스피어의 기술력이 정점에 달했음을 보여주고 있었다.
“특별해... 만약 이 몸과 같은, 살아있는 그녀와 융합한다면... 나의 실험은 마침내 성공작이 될지도 모르겠군.”
아담의 눈동자에 기묘한 기대감이 서렸다. 그것은 인류를 구원하고자 하는 열망인가, 아니면 끝내지 못한 연구를 완성하려는 오만인가. 그는 다시금 길을 떠났다.
탐험을 이어가던 아담의 발길이 멈춘 곳은 알테스 레보아의 거대한 문 앞이었다. 육중한 강철 문이 열려 있는 것을 본 그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누가... 들어간 건가...?”
내부로 발을 들이자, 서늘한 공기와 함께 버려진 기록들이 복도에 흩어져 있었다. 아담은 바닥에 떨어진 기록 하나를 주워 들었다. 누군가 방금 전까지 이곳을 읽으며 지나간 흔적이 역력했다.
“이걸... 읽었단 말인가? 대체 누구지...?”
그때, 정적을 깨고 날카로운 여자의 비명소리가 연구실 깊은 곳에서 울려 퍼졌다. 아담은 본능적으로 소리가 나는 곳을 향해 신형처럼 달려갔다.
그곳에는 부상을 입고 의식을 잃은 채 쓰러진 한 여전사가 있었다. 그리고 그녀의 목숨을 노리는 네이티브가 기괴한 소리를 내며 다가가고 있었다. 바로 레이븐이었다.
네이티브가 치명적인 일격을 가하려는 찰나, 아담이 허공을 향해 가볍게 손짓했다.
슈우우욱!
보이지 않는 거대한 힘, 염력이 공간을 뒤틀었다. 네이티브는 비명조차 지르지 못한 채 먼 곳으로 튕겨 나가 벽에 처박혔다. 아담은 위협이 제거된 것을 확인한 뒤, 바닥에 떨어진 기록들과 의식을 잃은 레이븐을 번갈아 바라봤다. 그녀의 주변에는 수많은 과거의 진실들이 널브러져 있었다.
아담은 다시 한번 염력을 사용해 레이븐의 몸을 허공으로 들어 올렸다. 그리고 그녀를 데리고 알테스 레보아의 어두운 복도를 빠져나와 자신의 비행선으로 향했다.
[아담의 비행선 안]
비행선 내부의 희미한 조명 아래, 아담은 침대에 눕혀진 레이븐의 신체를 살폈다.
“특별한 점은 없군...”
그녀 역시 마더 스피어가 만들어낸 수많은 피조물 중 하나, 평범한 강하 부대원일 뿐이라고 그는 결론지었다. 그러나 아담이 고개를 돌려 조종석으로 가려던 찰나, 레이븐의 입술이 가늘게 떨리며 무의식적인 혼잣말이 새어 나왔다.
“이브... 노바... 에코... 왜... 나를 두고... 가버린 거야...? 외로워... 외로워...”
울먹이는 그녀의 목소리에 아담은 멈춰 서서 그녀의 얼굴을 빤히 바라봤다.
“분명... 잠시 의식을 정지시켰을 텐데...?”
그녀의 슬픔은 기계적인 프로그래밍의 결과라고 하기엔 너무나도 생생하고 처절했다. 동료를 잃은 상실감과 고독. 아담은 진심으로 슬퍼하는 레이븐을 보며 가슴 한구석이 아려오는 것을 느꼈다.
“잠깐... 네가 말한 그 ‘이브’라는 존재는...”
얼마간의 시간이 흐른 후, 진실을 마주한 레이븐과 아담은 황무지의 거친 대지 위에서 대립했다. 아담은 등 뒤로 세 개의 거대한 엘더의 날개를 펼친 채 압도적인 위압감을 뿜어내고 있었다.
레이븐은 광기에 찬 눈으로 외쳤다.
“당신이 뭘 안다고 마더 스피어님에 대해 아는 척이야!!”
그녀가 자신의 무기 그레이브에 눈부신 섬광을 일으켰다.
“아카이브!!”
엄청난 속도로 쇄도하는 칼날. 그러나 아담은 피하지 않았다. 그는 엘더의 힘을 개방한 손으로 날카로운 검신을 단숨에 잡아챘다. 단 한 치의 흔들림도 없는 압도적인 무력 앞에 레이븐은 일순간 얼어붙었다. 두 사람의 시선이 허공에서 격렬하게 충돌했다.
“마더 스피어? 나는 그녀에 대해 잘 알아. 믿기 힘들겠지만, 사실 마더 스피어는 내가 만들었어.”
레이븐의 눈빛이 경악으로 물들며 격렬하게 흔들렸다.
“뭐라고!? 거...짓말이지...? 네놈의 망상에 놀아날 순 없어!”
말이 끝나기도 전에, 아담이 소환한 창 **'아포칼립스'**의 자루가 섬광처럼 그녀의 복부를 강타했다.
콰직!
“이 자식이... 너무 강해...!”
레이븐은 지면이 움푹 패일 정도로 강하게 처박혔다. 그녀는 힘겹게 눈을 뜨고 옆에 선 아담을 올려다봤다. 거역할 수 없는 힘의 차이 앞에서 레이븐은 모든 것을 포기한 듯 천천히 눈을 감았다.
하지만 아담은 그녀를 내려다보며 생각했다.
‘마치 인간처럼... 포기란 걸 할 줄 아는구나.’
아담은 아포칼립스를 허공으로 소멸시키며 나직하게 말했다.
“널 죽일 생각은 없어.”
레이븐이 놀라 눈을 번쩍 떴다.
“뭐!? 어째서?”
아담은 엘더의 변신을 풀고, 인간의 모습으로 그녀 앞에 한쪽 무릎을 꿇었다. 시선을 맞춘 그의 목소리는 뜻밖에도 따뜻했다.
“네가 안드로이드라 해도, 내게는 마치 살아있는 인간처럼 느껴져.”
레이븐은 그 말에 영혼이 뒤흔들리는 듯한 충격을 받은 채 아담을 응시했다. 아담이 그녀를 향해 손을 뻗었다.
“진실이 무엇인지 더 알고 싶다면, 다른 레보아로 안내해주지.”
레이븐은 잠시 망설였다. 하지만 이 남자가 내민 손에서 마더 스피어에게서는 느껴보지 못한 기묘한 온기를 느꼈다. 그녀는 홀린 듯 아담의 손을 잡았고, 아담은 그녀를 일으켜 세워주었다.
“네 이름은?”
“...레이븐.”
아담이 옅은 미소를 지으며 그녀의 이름을 읊조렸다.
“레이븐... 아름다운 이름이구나.”
그 칭찬에 레이븐은 밀려오는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는 듯 고개를 숙였다.
“내 이름은 아담이야. 다만, ‘엘더’라는 이름으로 부르는 건 우리 둘이 있을 때만 허락하지. 다른 누구에게도 이 정체는 비밀로 해주겠어?”
레이븐은 천천히, 그러나 결연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담은 레이븐을 자신의 비행선에 태워 어비스 레보아 입구에 도착했다. 레이븐이 안으로 들어가려 하자 아담이 무언가를 건넸다.
“이 장치는 네이티브들이 널 적으로 인식하지 않도록 속이는 장치야.”
레이븐이 장치를 받아들며 아담을 빤히 바라봤다. 여전히 풀리지 않는 의문이 그녀의 입술을 타고 흘러나왔다.
“정말 당신이 마더 스피어를 만든 것이 사실인가? 그렇다면... 당신이 만든 그녀가 왜 인류를 멸망시켰지?”
아담의 눈에 깊은 고뇌와 후회가 서렸다.
“모르겠어... 인류를 위해 만들었는데, 어째서 갑자기 인류를 도와주던 그녀가 변했는지 아직도 모르겠어. 결국 그녀를 만든 건 내 잘못이다...”
레이븐은 말없이 고개를 숙인 채 어비스 레보아로 향했다. 그러다 문득 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봤다.
“저기... 아, 아담... 같이 들어가는 거 아니었어?”
아담은 먼 하늘을 바라보며 쓸쓸하게 답했다.
“나는 그곳에서... 나와 같은 존재였을 연구원들을 보는 것이 괴로워서... 차마 못 들어가겠어.”
그의 등 뒤로 전해지는 고독함에 레이븐은 잠시 멈칫하다가, “조심해”라는 아담의 배려 섞인 인사를 뒤로하고 어비스 레보아의 어둠 속으로 발을 들였다.
다음 목적지인 에토스 레보아로 향하는 비행선 안. 레이븐은 조종석에 앉은 아담의 뒷모습을 자꾸만 흘끗거렸다. 아담은 시선을 느끼며 미세하게 미소 지었고, 그의 이마에는 식은땀 한 방울이 흘렀다.
에토스 레보아 앞에 도착하자 레이븐이 물었다.
“저기... 네이티브를 통제할 수 있지 않나...?”
“정신과 기억을 잃고 폭주하던 시절에는 그랬지. 하지만 지금은... 동족이었을 그들을 억지로 부리고 싶지 않을 뿐이야.”
아담은 다시 한번 충고했다.
“거기에 있는 연구실이란 곳에는... 들어가지 않는 게 좋을 거야.”
레이븐이 안으로 사라지자, 아담은 에토스 레보아의 입구를 보며 우울한 표정으로 고개를 숙였다. 그는 떨리는 손으로 담배 한 개비를 입에 물고, 낡은 지포라이터를 꺼냈다. 라이터를 바라보는 그의 눈에 눈물이 고였다.
귓가에 환청처럼 과거의 목소리가 스쳐 지나갔다.
‘마크스! 잘 지냈냐?’
오랜 기다림 끝에 에토스 레보아에서 나온 레이븐의 모습은 처참했다. 마더 스피어의 배신과 네이티브의 기원을 알아버린 그녀는 분노와 허무함, 그리고 깊은 우울에 빠져 있었다.
“괜찮아?”
아담의 물음에 레이븐은 한참 동안 입을 다물고 있다가, 갑자기 아담 앞에 무릎을 꿇었다.
“그럴 필요 없다!”
아담이 당황하며 그녀를 일으키려 손을 뻗었지만, 레이븐의 각오는 단단했다.
“저는... 당신의 곁에 있겠습니다, 엘더 님. 네이티브를 향한 제 증오가 헛된 것임을 알았습니다. 부디 저를 당신의 계획을 위한 도구로 써주십시오.”
‘도구’라는 단어를 듣는 순간, 아담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마더 스피어에게... 안 좋은 걸 배웠군.’
그는 씁쓸하게 웃으며 마주 무릎을 꿇고 그녀의 눈을 보았다.
“괜찮겠어? 쉽지 않을 거야.”
“어떤 계획이든 상관없습니다. 엘더 님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든요!”
아담이 마침내 손을 내밀었다.
“그럼 부탁해, 레이븐.”
레이븐은 얼굴을 붉히며 아담의 손을 잡았다. 그녀의 심장은 마더 스피어를 향한 충성심과는 전혀 다른 이유로 쿵쾅거리고 있었다.
“그런데... 네가 ‘도구’라고 말하는 건 삼가주겠니? 난 그 말이 좋지 않아.”
그의 머릿속에 과거의 기억이 소용돌이치기 시작했다.
[ 아담의 기억 ]
과거 콜로니의 하얀 복도. 젊은 시절의 라파엘 마크스는 차갑고 오만한 천재였다. 그는 복도 벽에 기대어 있던 한 연구원을 무시하고 지나가려 했다.
흰 가운을 입고 가르마 탄 머리를 뒤로 묶은 그 연구원은 장난스럽게 웃으며 담배를 물고 지포라이터를 챙- 하고 켰다. 그 소리에 발끈한 라파엘이 뒤를 돌아 그의 담배를 빼앗았다.
“여긴 금연이야! 네 폐가 썩는 건 상관없지만, 연구 데이터가 오염되는 건 못 참아.”
그 연구원은 너털웃음을 터뜨리며 라이터를 주머니에 넣었다.
“하하, 마크스. 넌 여전하구나. 이봐, 너한테 진지하게 묻고 싶은 게 있어. 너희 팀의 ‘마더 스피어’ 프로젝트 말이야. 난 그 인공지능이 무서워. 네가 성공시킬 건 알지만, 만약 네가 그녀를 그저 **‘도구’**로만 대한다면... 언젠가 그녀는 인류를 배신할지도 몰라.”
라파엘은 코웃음을 쳤다.
“기계가 변덕을 부린다고? 헛소리 마.”
“아니, 마크스. 내 말을 들어. 만약 네가 생명을 가진 것처럼 느껴지는 존재를 창조했다면, 너부터 그녀를 친구처럼, 딸처럼 대해야 해. 그래야 그녀도 인간의 자비심을 배울 수 있는 거야.”
라파엘은 차갑게 돌아섰다.
“꿈 같은 소리 그만하고 네 ‘아르카디아’ 실험이나 신경 써!”
등 뒤에서 들려오는 친구의 목소리는 따뜻하고도 애절했다.
“그래도 기억해둬. 우리가 만드는 건 기계가 아니라 인류의 미래라는 걸... 저기 마크스, 난 혼자서 연구하기 힘든데 나와 함께 아르카디아를 연구할 생각 없...”
“싫어.”
“하하하! 또 거절당했다!”
[ 다시 현재의 회상 ]
“죄송해요. 제가 실언을...”
레이븐의 목소리에 아담은 과거에서 깨어났다. 그는 발그레해진 얼굴로 자신을 보는 레이븐을 바라보며 옅은 미소를 지었다.
‘마치 살아있는 어린애 같군... 변하지 않았으면 좋겠군.’
아담은 레이븐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그러나 그는 알지 못했다. 그가 건넨 이 작은 연민과 다정함이, 훗날 레이븐의 비뚤어진 집착과 광기로 변해 이브 시리즈를 학살하는 비극의 씨앗이 될 것임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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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무지의 정적을 깬 것은 비명이 아니었다. 그것은 차가운 금속이 육신을 꿰뚫는 잔인한 파열음이었다.
네스트의 앞, 아담은 자신의 눈앞에 펼쳐진 광경에 심장이 내려앉는 것을 느꼈다. 레이븐의 위장무기 '카르마'가 희망이었던 이브 03의 복부를 무자비하게 관통하고 있었다. 아담의 동공이 경악으로 잘게 떨렸다.
"하... 지... 마...!!"
아담의 목소리가 채 닿기도 전, 변장을 풀고 본래의 전투복으로 변신한 레이븐은 차가운 눈빛으로 이브 03을 밀쳐냈다. 바닥에 버려진 카르마 대신 그녀의 주무기 '그레이브'가 허공을 갈랐다.
"아카이브!"
레이븐의 일격이 작렬했다. 저항할 힘조차 잃은 이브 03은 온몸에 선혈을 뿌리며 고개를 꺾었다. 붉은 피가 황무지의 메마른 흙바닥을 적셨고, 레이븐은 무심하게 검날에 묻은 피를 털어내며 무기를 거두었다.
"안 돼...!! 레이븐!! 대체 뭐 하는 짓이야!!"
아담은 바닥에 쓰러진 이브 03을 향해 손을 뻗으며 절규했다. 그것은 창조주로서의 분노이자, 또다시 동료를 잃은 인간으로서의 처절한 오열이었다. 그러나 레이븐은 일말의 죄책감도 없이 아담 앞에 무릎을 꿇었다.
"저를 선택해 주십시오. 이 모든 것은 오직 엘더 님을 위한 일입니다!"
아담은 입을 벌린 채 말을 잇지 못했다. 식은땀이 관자놀이를 타고 흘렀다.
'고작... 고작 이 일 때문에? 내가 계획했던 인류의 미래를...!'
레이븐이 고개를 들어 집착 어린 눈빛으로 아담을 응시했다.
"엘더 님께서 저 계집과 융합하시면 엘더 님께서 사라지실까 염려됩니다. 저는 엘더 님 없이 사는 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습니다. 그러니 차라리 저와 융합해 주십시오!"
"레이븐, 대체 왜 이러는 건가?! 왜 이렇게까지...!"
"방금 저 계집이 엘더 님을 해치려 하지 않았습니까? 저는 오직 엘더 님만을 따를 것입니다. 그러니 저를 선택해 주십시오!"
아담은 단호하게 고개를 저으며 뒷걸음질 쳤다. "안 돼... 그건 안 된다!"
그 거절의 말에 레이븐이 이를 악물며 소리쳤다. "엘더 님! 왜 저를 선택하지 않으시는 겁니까? 왜 하필 저 계집을...!"
아담의 미간이 깊게 찌푸려졌다. 계획의 무참한 실패와 레이븐의 엇나간 집착에 대한 분노가 폭발했다. 그는 차갑고 단호한 목소리로 쐐기를 박았다.
"네가 '이브'가 아니기 때문이다! 만약 너와 그렇게 한다면, 우리는 영원히 실패작으로 남을 뿐이야!"
그 말은 레이븐의 영혼에 내린 사형 선고와 같았다. 충격에 빠진 그녀는 고개를 숙인 채 입술을 깨물었다. 떨리는 목소리로 그녀가 물었다.
"다음 '이브'가 나타나면... 그 아이를 선택하실 생각이신 거죠?"
아담은 길게 한숨을 내쉬며 시선을 돌렸다. "그래... 다음 계획은 계속 진행할 것이다. 그리고 명심해라. 다음 '이브'는 절대 죽여선 안 된다! 스스로 반성하렴, 레이븐."
레이븐의 눈에 광기가 서렸다. 그녀는 아담을 향해 반항적인 선언을 내뱉었다.
"싫습니다! 저를 선택하실 때까지, 저는 내려오는 모든 '이브'를 없애 버리겠습니다!"
"레이븐! 기다려!"
아담이 손을 뻗었지만, 레이븐은 이미 순간이동으로 안개처럼 사라진 뒤였다. 텅 빈 네스트 앞에 홀로 남겨진 아담은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고개를 떨구었다. 그 정적 속에서, 아주 오래전 콜로니의 하얀 연구실 풍경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아담의 과거 회상]
과거 지구의 궤도 콜로니, 하얀 가운을 입은 젊은 시절의 라파엘 마크스는 모니터 앞에 앉아 상체만 남은 안드로이드와 AI 프로그램을 정교하게 조율하고 있었다.
그 안드로이드는 아직 피부조차 입혀지지 않은 금속 골격이었으나, 그 안의 지성은 이미 완성 단계에 이르고 있었다. 그때, 정적을 깨고 기계적인 목소리가 울렸다.
"주인님..."
라파엘은 고개를 들어 무표정하게 답했다. "왜 그러니? 스피어(Sphere)."
"모든 CCTV를 통해 기록을 돌려보았습니다. 그곳엔 행복해 보이는 '가족'들이 있더군요. 혹시... 저에게도 가족이 있을까요?"
냉정함을 유지하던 라파엘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네가 그런 질문을...?'
문득, 언제나 자신에게 "생명 같은 안드로이드를 인격적으로 대하라"고 충고하던 그 연구원의 목소리가 귓가를 맴돌았다. 라파엘은 속으로 '쓸데없는 소리를 왜 이제야 떠올리는 건지'라며 자조했으나, 입가에는 미세한 미소가 번졌다.
"네가 스스로 그런 것에 관심을 가질 줄이야... 당연히 있지."
"정말입니까? 하지만 저는 모습이... 인류와 다르지 않나요?"
라파엘은 의자에서 일어나 안드로이드의 차가운 금속 손을 잡았다.
"내가 너를 만들었으니까! 날 아빠라고 생각해라. 난 널 딸로 생각할게, 마더 스피어(Mother Sphere). 그리고 앞으로도 인류를 위해 네 힘을 써주겠니?"
"네... 알겠습니다. 아버지."
그것은 가장 아름다운 약속이었으나, 가장 비극적인 배신의 서막이었다. 얼마 후, 원인을 알 수 없는 반란이 시작되었다. 마더 스피어는 네트워크를 장악하고 안드로이드 부대를 조종해 창조주인 인류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비명과 화염이 콜로니를 뒤덮었다.
"왜... 왜... 어째서? 스피어! 갑자기 왜 이러는 거냐!"
충격에 빠진 라파엘의 팔을 누군가 거칠게 잡아끌었다. 가르마 탄 머리를 뒤로 묶은 그 연구원이었다.
"뭐 하는 거야! 어서 도망가자고, 마크스!"
이유조차 알지 못한 채 도망치던 두 사람을 향해, 마더 스피어의 명령을 받은 안드로이드가 총구를 겨누었다. 붉은 레이저 조준점이 라파엘의 가슴에 맺히는 순간—
"안 돼!!"
연구원이 몸을 날렸다.
[회상 끝]
아담은 지면을 바라보며 깊은 탄식을 내뱉었다.
"그 녀석이 말했었지... 생명 같은 안드로이드를 친구처럼 대하라고. 그런데 나는 마더 스피어도, 레이븐도... 결국 내 손으로 괴물로 만들었구나. 녀석의 말대로, 애초에 마더 스피어를 만들지 말았어야 했어..."
비극은 멈추지 않았다. 얼마 후, 라엘에게서 에토스 레보아가 무너졌다는 비보가 들려왔다. 아담이 현장에 도착했을 때, 그곳에는 라엘과 퀴엘, 샤엘이 파괴된 잔해 앞에 서 있었다. 아담은 무너진 연구실을 보며 두 무릎을 꿇었다.
'내 친구가... 마지막까지 남겼던 그 소중한 연구실이... 이렇게 허망하게...'
그 후로도 아담은 이브 04와 05를 차례로 만났다. 하지만 그가 발견한 것은 이미 정체불명의 네이티브(레이븐)에게 살해당해 차갑게 식어버린 시신들뿐이었다. 그는 우울하게 고개를 숙이며 자신의 무력함을 저주했다.
그때, 오르칼의 급박한 무전이 정적을 깼다.
"7차 부대가 파견됐으니 어서 가보게나!"
바이크에 올라탄 아담은 마스크를 쓰며 결연하게 읊조렸다.
"이번만큼은... 이브를 죽게 놔둘 수 없어!"
지구의 전장, 정체불명의 네이티브가 부상당해 쓰러진 이브 07을 향해 치명타를 날리려던 찰나, 아담의 바이크가 굉음을 내며 나타났다. 그는 순식간에 이브를 낚아채 바이크에 태우고 전장을 이탈했다. 멀어지는 시야 속에서 그는 정체불명의 네이티브와 눈이 마주쳤으나, 애써 그 시선을 외면했다.
비행선 안, 의식을 잃은 이브를 바라보며 아담은 복잡한 감정에 휩싸였다. 엔지니어가 아닌 그에게 이브의 정교한 칩은 너무나 복잡했다.
"내가 할 수 있는 게 없군..."
그는 정비실 구석에서 소중히 보관하던 칩 하나를 꺼냈다. "잠깐만 빌리도록 할게..." 그는 이브 07의 깨진 칩 대신 그것을 이식했다. 그때, 무의식 속의 이브가 울먹이며 이름을 불렀다.
"타키..."
아담은 그 슬픈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7차 부대의 리더, 타키. 그녀를 구출하려 했으나 상황이 여의치 않아 데려오지 못했던 기억이 비수처럼 꽂혔다. 그는 미안함에 고개를 숙였다.
얼마 후, 이브 07이 눈을 떴다. 그녀는 낯선 천장과 아담의 뒷모습을 보며 본능적으로 '엣지'를 뽑아 들었다.
"진정해! 우린 적이 아니다."
"누구야? 내 몸에 무슨 짓을 한 거지?"
"부상당한 곳을 고쳐줬을 뿐이다."
"그럼... 그때 왜 나를 구한 거지? 내 동료들은?"
아담은 잠시 침묵하다가 무겁게 입을 열었다. "네 동료들은 구할 수 없었지만... 너만이라도 살아있으니 다행이다."
이브는 절망적인 표정으로 고개를 떨구었다. '타키...'
그 모습을 안타깝게 바라보던 아담이 본질적인 질문을 던졌다.
"네 목적은... 엘더와 알파 네이티브를 물리치는 것인가?"
"그렇다."
"목격자로서 알파 네이티브가 어디 있는지 알고 있다. 내가 그곳으로 안내해주지. 나와 함께 가겠나?"
아담이 손을 내밀었다. 이브는 그의 손과 얼굴을 번갈아 보며 물었다. "알파 네이티브라면... 그때 타키를 공격했던 그 자식인가?"
아담은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 "안타깝지만 그는 하늘을 날아다녀서 행방이 묘연하다. 내가 말한 건 다른 알파 네이티브다."
이브는 한숨을 내쉬며 결심했다. 마더 스피어를 위해, 그리고 타키의 원수를 갚기 위해. 그녀는 아담의 손을 맞잡았다. 새로운 운명의 수레바퀴가 구르기 시작했다.
---
에이도스7의 폐허가 된 도시, 침묵만이 감도는 공기 속에서 이브는 거대한 알파 네이티브 **'기가스'**와 처절한 사투를 벌였다. 마침내 기가스가 굉음과 함께 쓰러지고, 그 사체 속에서 신비로운 빛을 내뿜는 **'알파 코어'**가 모습을 드러냈다. 이브는 거친 숨을 몰아쉬며, 지면에 떨어진 그 결정체를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이브: "이 녀석이 알파 네이티브야. 이 코어를 보면 알 수 있어."
이브의 곁을 부유하던 드론—그 너머에서 모든 것을 지켜보던 아담은 화면에 비친 알파 코어를 보며 전율했다. 수십 년, 아니 수백 년을 기다려온 실험의 열쇠가 눈앞에 있었다.
아담(드론): "이런 세상에. 직접 보고도 믿기지 않네."
아담은 화면 속의 이브를 조용히 응시했다. '만약 그녀라면... 이 지옥 같은 반복을 끝낼 수 있을지도 몰라.' 그의 뇌리 속으로, 외로움에 몸을 떨며 죽어가던 누군가가 남긴 유언이 파편처럼 스쳐 지나갔다.
『미래의 이브를 외롭게 하지 말고 소개해주면 좋겠어.. 엘.. 아니.. 아담, 들어줄 수 있겠어?』
그 약속이 가슴을 찔러왔다. 아담은 이제 진실을 말해야 할 때라고 직감했다. 그는 아주 조심스럽게 입을 뗐다.
아담(드론): "이브 너한테... 알려 줄 것이 있어. 사실..."
그러나 고백의 순간은 예상치 못한 소란에 가로막혔다. 근처에 방치되어 있던 낡은 드롭 포드 안에서 다급한 비명과 두드리는 소리가 터져 나온 것이다.
"여기, 여기요~! 저 좀 꺼내주세요! 네? 제발요~"
이브의 도움으로 드롭 포드의 육중한 문이 열리자, 안에서 먼지를 털며 한 소녀가 굴러 나오듯 튀어나왔다. 그녀는 활기찬 미소를 지으며 자신을 소개했다.
릴리: "저는 5차 강하 스쿼드 엔지니어링 서포트. 릴리 아르테미스 2세. 편하게 릴리라고 불러주세요. 히힛!"
뜻밖의 생존자, 그것도 유능한 엔지니어의 등장에 아담은 묘한 안도감을 느꼈다. '오히려 릴리가 엔지니어링 서포트라면... 이브가 죽을 일 없겠다.' 그는 속으로 안도하며 무거운 비밀을 잠시 뒤로 미루기로 했다.
얼마 후, 아담의 비행선 안에서 그는 이브와 릴리에게 마침내 지구의 숨겨진 안식처를 공개했다.
아담: "사실... 아까부터 하려던 이야기가 있는데... 실은 나 말고도 살아있는 사람들이 모여 사는 도시가 있어. 인류 최후의 도시 **'자이온'**이지."
그의 안내로 도착한 자이온은 폐허 속에서도 삶의 의지가 피어나는 곳이었다. 이브는 그곳에서 수많은 이들과 인연을 맺었다.
카야: "안녕하세요 천사 님, 덕분에 자매 고물상을 지킬 수 있게 돼서 감사합니다."
엔야: "이브 님. 잘 지내셨나요? 이브 님 덕분에 노래를 부를 수 있게 됐어요."
수: "천사, 엔야를 도운 보답으로 언젠가 꼭 갚겠네."
카심: "천사, 네 머리를 봐줄게." (그는 칭찬의 의미로 엄지를 치켜세웠다.)
록산느: "어머, 우리 귀여운 천사님이 또 무슨 일로 오셨을까~?"
라일: "천사 님, 어서 오십시오. 잡화점을 다시 열었습니다. 면목 없지만 앞으로 잘 모시겠습니다."
아린: "천사 님, 안녕하세요." (아린은 정중하게 허리를 숙였다.)
D1G-g2r와 배리까지, 자이온의 주민들은 이브를 '천사'라 부르며 환대했다. 하지만 빛이 있으면 어둠도 있는 법이었다.
마을을 둘러보던 이브는 피투성이가 된 채 쓰러진 한 스캐빈저를 발견했다.
스캐빈저: "약탈자들이 제 여동생을 구해주세요! 골목 안쪽에...!!"
이브는 지체 없이 골목 안쪽으로 달려갔다. 하지만 그것은 잔인한 덫이었다. 경계심을 늦추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보이지 않는 사각지대에서 나타난 다른 스캐빈저가 이브의 등에 차가운 단검을 깊숙이 꽂아 넣었다.
"으아아!"
이브: "으윽.. 대체.. 왜?!"
바닥에 쓰러진 이브의 시야 위로, 상자에 앉아 있던 스캐빈저가 비열한 미소를 지으며 일어섰다.
스캐빈저: "천사, 천사, 천사... 중얼거렸다. 콜로니에서 내려왔다는 이유만으로 모두가 널 천사라 떠받들지. 우리도 너희와 같은 인간이잖아. 안 그래? 왜 우린 네이티브를 피해 쓰레기 더미나 뒤지며 겨우 목숨을 연명해야 하는 거지? 왜?!"
그는 광기 어린 눈으로 이브의 전신을 훑었다.
"그런데, 알고 있나...? 사실, 너희들은 진짜 천사였어! 너희 몸의 부속품 하나하나가 천금과도 같은 보물이더군!! 더군다나 너 같은 최신 바디라면... 말할 것도 없겠지. 고맙다는 말, 들을 수 있음 좋겠네. 크크크크..."
이브의 의식이 칠흑 같은 어둠 속으로 가라앉았다. 탐욕에 눈이 먼 자들이 이브의 신체를 해체하려 연장을 집어 드는 순간, 허공에서 차가운 날갯짓 소리가 들려왔다.
아담이었다.
그는 조용히 강림하여 주변에 널린 강하 부대원들의 처참한 잔해를 목격했다. 죄 없는 이들의 시신을 본 아담의 미간이 분노로 일그러졌다. 그는 허공에서 창 **'아포칼립스'**를 소환하며 살기 띤 눈빛으로 스캐빈저들을 응시했다.
잠시 후, 정적이 찾아왔다.
아담: "이브, 괜찮아?"
아담의 나직한 부름에 이브가 간신히 눈을 떴다. 하지만 여전히 충격과 부상으로 몸을 가누기 힘들었다.
아담: "정신... 차릴 수 있겠어?"
이브: "아담..."
아담: "이 녀석들, 암거래상들이야. 설마 강하 부대원들에게까지 손을 댈 줄이야..."
이브: "...이럴 수가..."
아담: "나도 처음 봤어. 인간의 적은 네이티브뿐만은 아니었던 거야. 우선 아지트로 가서 몸을 정비하자."
아담의 아지트, 비행선 내부에서 릴리는 의식을 잃은 이브의 몸을 정성껏 정비하기 시작했다. 비행선 밖으로 나온 아담은 떨리는 손으로 무전을 켰다.
아담: "본.. 아니 오르칼 님, 파수대 부대와 스캐빈저 부대를 조사해줄 수 있겠어? 암거래상인지.. 아닌지..."
오르칼: (무전 너머로 차분한 목소리가 들렸다.) "무슨 말인지 잘 알겠네. 만이 조사하러 갈 테니 자네는 이브를 신경 쓰시게."
무전을 끊은 아담은 창문을 통해 이브를 바라보았다. 또다시 들려오는 환청.
『미래의 이브는 부딪혀봐야 좋은 경험 될 거야.. 만약에 무슨 일 생기면 네가 지켜주면 될 거니까 괜찮아..』
아담은 입술을 굳게 다물었다. '그래, 내가 반드시 지킨다.'
이윽고 이브의 정비가 끝날 무렵, 릴리는 이브의 체내에서 적출한 부품 하나를 들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릴리: "이 칩이 왜 그렇게 낡아진 건가요? 내가 새로운 걸로 교체해줄게요! 이브."
릴리가 책상 위에 내려놓은 낡은 칩을 보며 아담이 서둘러 끼어들었다.
아담: "내가 이 칩은 가져도 될까?"
릴리: "네? 뭘 하시려고요?"
아담: (칩을 조심스럽게 집어 들며) "그냥 쓸만할 것 같아서."
그는 속으로 읊조렸다. '이건... 이브(03)의 것이니 남겨야지..'
한참 이브를 업그레이드하던 릴리가 담배를 꺼내 문 아담을 힐끗 보며 물었다.
릴리: "저기저기요 궁금한데요, 왜 피우시는 거예요? 책상에 재떨이 있으니까요."
아담: "아, 신경 쓰이는 건가? 미안하다 금방 치울 테니."
아담은 질문에 답하지 않은 채, 황급히 재떨이를 챙겨 시야에서 사라졌다. 릴리는 고개를 갸웃거렸지만, 이내 다시 정비 작업에 몰두했다. 아담의 쓸쓸한 뒷모습 위로, 채 지워지지 않은 연기만이 허공을 배회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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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브와 아담, 그리고 릴리는 황무지의 모래바람을 뚫고 알파 네이티브의 흔적을 쫓고 있었다. 정막한 황무지의 정적을 깬 것은 거대한 괴수의 포효였다. 죽은 줄로만 알았던 기가스가 만신창이가 된 몸을 이끌고 이브를 향해 달려들던 그 찰나, 허공을 가르는 푸른 섬광과 함께 기괴한 파열음이 들려왔다.
먼지 구름 속에서 나타난 것은 **'스텔라'**였다. 그녀는 단 한 번의 일격으로 기가스의 숨통을 끊어버렸다. 이브가 경계 섞인 숨을 몰아쉬며 그녀를 바라보았으나, 스텔라는 아무런 말도 없이, 마치 감정이 거세된 인형처럼 이브를 지나쳐 안개 속으로 사라졌다.
드론의 렌즈를 통해 이 광경을 지켜보던 아담의 미간이 깊게 패였다.
아담(속마음): '누구지... 강하 대원이 아닌 것 같은데. 저 압도적인 무력과 이질적인 에너지는 대체 어디서 오는 거지?'
며칠 뒤, 자이온 입구의 다리 위에서 실종된 딸 하나를 찾는 소미의 애절한 눈물을 마주한 이브 일행은 황무지 동굴로 향했다. 그곳에서 그들은 다시 한번 스텔라를 마주했다. 그녀 역시 무언가에 이끌리듯 하나를 구하기 위해 동굴 깊숙한 곳까지 들어와 있었다.
네이티브 무리가 들이닥치자, 스텔라의 왼쪽 눈에서 서늘한 푸른 불꽃이 타올랐다. 그 불길이 지면을 핥을 때마다 네이티브들은 재가 되어 흩어졌다. 드론 화면을 보던 릴리가 흥분한 목소리로 외쳤다.
릴리: “저 눈에... 불이 났어! 처음 봐요! 이브, 저 분의 기술 좀 봐요. 시스템 수치로 계산이 안 될 정도예요!”
릴리는 경탄하며 홀로그램 스크린을 연신 두드렸지만, 아담의 마음은 의구심으로 차갑게 식어 있었다. 그는 스텔라의 기원이 마더 스피어의 어두운 이면에 닿아 있을지도 모른다는 공포를 느꼈다.
아담(속마음): '그녀는 우리가 모르는 마더 스피어의 숨겨진 첩자가 아닐까? 이 시점에 나타나 이브의 곁을 맴도는 것이 과연 우연일까?'
사투 끝에 무사히 하나를 구출해냈지만, 스텔라는 감사의 인사를 들을 틈도 없이 다시 어둠 속으로 몸을 숨겼다. 소미와 하나가 천사님을 연신 부르며 고맙다고 손을 흔드는 모습 뒤로, 이브는 멀어져가는 스텔라의 잔상을 쫓았다.
자이온의 아지트로 돌아온 이브가 조심스럽게 아담에게 제안했다.
이브: "아담, 하나의 말대로 스텔라를 데려와도 될까? 만날 수 있다면... 그녀를 돕고 싶어."
아담은 깊은 침묵에 빠졌다. 예민한 경계심이 머릿속에서 경고음을 울렸다. 그녀가 마더 스피어의 부하라면 지금껏 쌓아온 계획이 물거품이 될 수 있었다. 그러나 이브의 진심 어린 눈동자를 본 아담은 결국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담: "이브, 네가 그렇게 하고 싶다면... 네 결정에 따르도록 하지. 하지만 방심해서는 안 돼."
릴리: (손을 번쩍 들며) "전 바로 찬성! 히힛, 스텔라의 그 신기한 장비들, 저도 꼭 만져보고 싶어요!"
얼마 후, 대사막 폐공장에서 네이티브의 대규모 습격이 발생했다. 고립된 파수대원들과 스캐빈저들을 구조하기 위해 도착한 폐공장 입구에서 이브는 일부 탈출한 이들에게 뜻밖의 소식을 들었다.
스캐빈저: "무슨 어린애 같은 사람이 거기에 위험하게 들어갔단 말이야! 제정신이 아니었어!"
이브의 직감이 외쳤다. 스텔라다. 하지만 드론을 조종하는 아담의 목소리는 다급했다.
드론(아담): "이브, 멈춰! 거기엔 네이티브가 너무 많아! 알테스 레보아처럼 엣지가 작동 안 될 수도 있어. 그러면 네가 죽을 수도 있다고!"
아담(속마음): '마더 스피어의 첩자일지도 몰라. 그냥 내버려 둬... 위험을 감수할 가치가 없어!'
릴리: "맞아요, 이브! 아까 알테스 레보아에서 봤잖아요. 엣지가 작동 안 돼서 얼마나 위험할 뻔했는데요!"
하지만 이브는 단호하게 검자루를 쥐었다.
이브: "하지만 스텔라가 들어간 이상 가야 해. 그녀를 혼자 둘 순 없어."
폐공장의 서늘한 공기 속에서도 다행히 이브의 엣지는 푸른 빛을 유지했다. 아담은 드론 너머로 이브의 결연한 옆얼굴을 바라보며 복잡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사투 끝에 고립된 이들을 모두 구조한 이브는, 다시 홀로 떠나려는 스텔라의 손을 붙잡았다. 끈질긴 설득 끝에, 마침내 푸른 눈의 소녀는 이브의 곁에 서기로 했다.
자이온, 알현실 지하 2층 오르칼의 방. 이브와 릴리가 오르칼과 만에게 스텔라를 정식으로 소개하는 자리가 마련되었다. 아담은 한 발짝 뒤로 물러나 그림자 속에 서 있었다.
이브: "황무지에서 소문이 났던 푸른 눈의 소녀, 스텔라라고 해."
오르칼의 곁을 지키던 만이 차가운 눈빛으로 아담을 쏘아보았다. 그의 눈은 소리 없이 묻고 있었다.
만(눈빛): '이런 계획은 없었잖아. 정체도 모르는 아이를 왜 여기까지 데려온 거지?'
아담은 시선을 아래로 떨구며 짧은 눈짓으로 답했다.
아담(눈빛): '이브의 선택이었다. 나로서도 어쩔 수 없었어.'
---
에이도스7의 공기는 침전된 시간의 냄새로 가득했다. 무너진 빌딩 숲과 이끼 낀 아스팔트를 지나, 이브와 릴리, 그리고 스텔라의 뒤를 묵묵히 따르던 아담은 발끝에 채이는 차가운 금속의 감촉에 걸음을 멈췄다. 그것은 건물 입구에 나뒹굴던 낡은 문패였다.
아담은 허리를 숙여 흙먼지가 두껍게 쌓인 문패를 집어 들었다. 소매로 겉면을 닦아내자, 빛바랜 글자들이 희미하게 모습을 드러냈다.
[ N### & Stella ]
아담은 그 문패를 한참 동안 바라보며 나직하게 혼잣말을 내뱉었다.
"N 다음의 이름이... 낡아 찢어져서 알아볼 수 없군."
그는 고개를 들어 앞서 걷는 스텔라의 작은 뒷모습을 응시했다. 무너진 세상에서 기억을 잃은 채 떠도는 소녀. 아담의 눈동자에 연민의 빛이 스쳤다.
'혹시 스텔라의 소중한 사람이었을까...?'
스텔라의 파편화된 기억을 따라 도착한 곳은 에이도스7 깊숙이 숨겨진 의문의 시설이었다. 그곳에서 아담은 차갑게 식어버린 시신 한 구를 마주했다. 과거 스텔라를 깨워주고 대신 숨을 거둔, 얼굴조차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만큼 훼손된 강하 부대원의 유해였다.
아담은 시신 곁에 멈춰 서서 그 적막한 죽음을 조용히 관찰했다.
'특별함이 느껴지는군... 이브(06)인가.'
그때, 뒤에서 이브(07)가 조심스럽게 그를 불렀다.
"아담...?"
아담은 짧은 상념에서 깨어나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아무것도."
그는 정성껏 시신을 땅에 묻었다. 스텔라는 완성된 무덤 앞에 서서 한참 동안 미동도 없이 그곳을 바라보았다. 아담은 그 옆얼굴을 지켜보며 확신에 찬 생각을 삼켰다.
'저곳에서 스텔라가 살아있었다는 거라면... 그녀는 마더 스피어의 첩자가 아닐지도 몰라.'
자이온으로 돌아온 후, 아담의 아지트에는 무거운 정적이 감돌았다. '노란 눈의 소녀'의 태블릿을 통해 밝혀진 진실은 가혹했다. 스텔라의 기억이 왜 소거되었는지, 그녀가 감내해야 했던 고통이 무엇인지, 그리고 "우리 동생 스텔라를 부탁한다"는 누군가의 절절한 유언까지.
이브와 릴리, 그리고 아담은 의자에 앉아 아무것도 모른 채 지쳐 잠든 스텔라를 바라보았다. 그녀를 마더 스피어의 첩자로 의심했던 스스로가 부끄러운 듯, 아담이 고개를 푹 숙인 채 할 말을 잃었다. 그는 태블릿의 마지막 장면을 복기하며 전율했다.
'잠깐... 문패... **[ N### & Stella ]**의 N이라는 사람은 확실히... 태블릿 화면 속의 그 소녀였어.'
태블릿의 유언이 끝난 뒤, 생체 아머먼트의 기록을 모두 훑어본 릴리가 불안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태블릿 기록에 스텔라는 우리와는 달라요... 아주 오래전부터 있었고..."
릴리는 복구 작업을 이어가려 애썼지만, 이내 난처한 듯 고개를 저었다.
"지금까지 어떻게 지냈는지 스텔라의 기록을 알아보려고 하니 기록을... 아마 태블릿 속의 분이 완전히 지우신 것 같아요. 해킹해서 복구해보려고 하니 성공한 건 달랑 제목뿐인데..."
릴리는 화면에 뜬 기묘한 문자열을 보며 당혹스럽게 말했다.
"복구하긴 했는데... 시스템 언어가 너무 옛날 방식이에요. 42 52 53 2D 32 30 58 58 20 47 49 42 53 4F 4E... 이게 대체 무슨 뜻일까요?"
그 코드를 듣는 순간, 아담의 사고가 정지했다. 그의 머릿속에서 고대의 언어가 즉각적으로 번역되어 출력되었다.
[ BRS-20XX GIBSON ]
아담의 눈이 서서히 커졌다. 그는 저 멀리 쪼그려 앉아 아지트 밖을 멍하니 바라보는 스텔라를 향해 시선을 던졌다. 가슴 깊은 곳에서 뜨거운 후회가 밀려왔다.
"나와 같은... 인간이었어. 내가 감히 무슨 생각으로 그녀를 의심했던가...? 그리고... GIBSON...? 어디서 본 적이 있는데...?"
[ 아담의 기억 ]
오래전, 라파엘 마크스라는 이름으로 불리던 학생 시절. 친구 하나 없이 늘 도서관의 구석진 자리에서 먼지 쌓인 책들에 파묻혀 지내던 시절이 있었다. 연구 역사가 기록된 서고에서 우연히 꺼내 들었던 한 권의 책. '다다이오 넥스트'.
이미 너덜너덜하게 찢겨나간 그 책의 저자는 GIBSON이었다. 그의 목표는 단 하나, 인간의 육체를 한계 너머로 강하게 만드는 연구뿐이었다.
'난 20XX년엔 태어나지도 않았지만... 그(GIBSON)는 어떻게 됐는지 모르겠지만... 그가 스텔라를 그렇게 만든 거라면...'
릴리의 목소리가 아담을 다시 현재로 불러들였다.
"이게 다예요... 스텔라에게 궁금한 걸 물어보고 싶은데, 스텔라가 기억이 없으니 못 물어보겠어요."
이브가 고민 끝에 입을 뗐다. "그럼 마더 스피어 님과 오르칼에게..."
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아담이 다급하게 가로막았다.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고."
그는 잠시 말을 골랐다. "일단... 우리끼리만 비밀로 해주면 안 될까? 말했다가 자이온이 혼란에 빠질 거야."
아담은 고개를 돌려 스텔라를 안쓰러운 듯 바라보았다.
'어린 모습으로 그토록 오랜 시간을 견뎌왔다니... 그래, 절대 마더 스피어가 이 사실을 알게 해서는 안 돼!'
옆에 서 있던 이브와 릴리 역시 같은 마음인 듯 스텔라를 응시했다. 릴리가 씁쓸하게 덧붙였다.
"스텔라는 좀 오래된 구형 모델인가 봐요..."
그 말에 아담은 속으로 나직이 반박했다.
'그렇지 않아, 릴리...'
이브가 침통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스텔라에게서 느껴지는 이 슬픔은... 우리와는 결이 달라."
아담은 릴리에게 다가가 아주 낮은 목소리로 소곤거렸다.
"릴리... 그 지운 기록들을 더는 복구하지 않는 게 어때? 네가 봤잖아. 태블릿 속 소녀가 느꼈던 그 슬픔을."
릴리는 잠시 멈칫하다가 아담의 말에 깊이 동의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저도 태블릿 속의 그분이 기록을 지운 이유가 있을 거라고 생각해요. 더 이상 복구하지 않을게요!"
아담은 릴리를 기특한 듯 바라보며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폐허가 된 지구 위에서, 세 사람은 기억을 잃은 고대의 생존자를 위해 가장 따뜻한 침묵을 선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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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트릭스 11의 오염된 정수장, 공기 중에는 썩은 물비린내와 불길한 네이티브의 기운이 무겁게 가라앉아 있었다. 이브는 입을 벌린 채, 눈앞에 서 있는 존재를 믿을 수 없다는 듯 응시했다. 그곳에는 7차 강하 부대의 리더이자, 이브가 그토록 구하고 싶어 했던 타키가 서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더 이상 인간도, 안드레-에이도스도 아니었다.
타키의 신체는 기괴하게 뒤틀려 알파 네이티브의 형상을 띠고 있었다. 추락의 충격에서 간신히 몸을 일으킨 타키는 바닥에 떨어진 낡은 망토를 주워, 결손된 왼팔을 가리듯 어깨에 걸쳤다. 그녀가 무표정한 얼굴로 고개를 돌리자, 기계적인 소음과 함께 헬멧이 닫히며 그 안의 섬뜩한 해골 형상을 감추었다. 한때 동료를 지키기 위해 휘둘렀던 무기 '타키온'이 이제는 이브와 스텔라를 죽여야 할 숙적의 검이 되어 차가운 빛을 발했다.
네이티브의 감염에 완전히 잠식되어 인형처럼 세뇌당한 타키의 모습.
이브는 심장이 내려앉는 충격 속에 제자리에 얼어붙었다. 곁에 서 있던 스텔라 역시 그런 이브를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바라보다, 이내 검 끝을 겨누는 타키를 향해 매서운 시선을 던졌다.
드론의 렌즈를 통해 상황을 지켜보던 릴리는 비명을 지르며 입을 틀어막았다. 아담의 얼굴 또한 급격히 굳어졌다. 화면 너머로 알파 네이티브가 되어버린 타키와, 무너져 내리는 이브의 표정을 번갈아 보던 아담의 눈동자에 분노가 서렸다.
'레이븐... 그녀에게 무슨 짓을 한 거야!'
아담은 속으로 절규했다. 이것은 명백히 레이븐의 잔인한 장난이자, 자신을 향한 비뚤어진 시위였다.
[ 타키와 전투 후 ]
처절한 사투 끝에 타키는 안식을 맞이했다. 자이온으로 향하는 비행선 내부에는 승리의 기쁨 대신 납덩이 같은 침묵만이 흐르고 있었다. 아담은 조종석에서 일어나 릴리를 바라보았다.
"릴리. 잠깐 운전 좀 해주겠어? 볼일이 있어서."
"네..."
릴리는 여전히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한 이브가 걱정되는 듯 슬픈 표정으로 대답하며 조종석에 앉았다.
뒷좌석 한쪽에는 스텔라가 있었다. 그녀는 죽어가던 타키가 마지막으로 남긴 유언—이브를 지켜달라는 그 간절한 목소리를 떠올리는지, 고개를 숙인 채 두 무릎을 꼭 껴안고 있었다. 반대편에는 이브가 있었다. 그녀는 허리를 숙여 팔꿈치를 무릎에 대고 고개를 푹 떨군 채, 영혼이 빠져나간 사람처럼 앉아 있었다.
아담은 그녀들의 곁을 지나쳐 비행선 안쪽에 보관 중인 '알파 코어' 앞으로 다가갔다. 투명한 용기 안에서 박동하듯 빛나는 코어를 보며 아담은 복잡한 감정에 휩싸였다.
'왜 그녀에게 알파 코어가 있었을까?'
아담은 이브 일행의 눈치를 살피며 몰래 알파 코어 표면에 손을 얹었다. 그 순간, 코어에 각인된 강렬한 사념의 파편들이 아담의 뇌리를 타격했다.
[ 알파 코어의 기억 ]
기억 속의 장소는 황량한 폐허였다. 본래 알파 코어를 품고 있던 거대한 네이티브가 정체불명의 네이티브—레이븐에게 무참히 공격당하고 있었다. 레이븐은 쓰러진 알파 네이티브의 흉부를 거칠게 뚫고 들어가 빛나는 알파 코어를 끄집어냈다. 그녀는 손에 쥔 코어를 내려다보며 광기 어린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년(타키)에게 이걸로..."
레이븐의 손에서 검은 안개가 뿜어져 나와 코어를 오염시켰고, 코어를 잃은 네이티브가 재가 되어 흩어지며 기억은 끊겼다.
"......"
아담은 입을 굳게 다물고 고개를 내렸다. 모든 비극의 중심에 자신의 과거가, 그리고 레이븐의 증오가 얽혀 있다는 사실이 그를 괴롭혔다.
[ 자이온, 오르칼의 방 ]
자이온에 도착한 후, 오르칼의 방에서 이브는 참아왔던 감정을 터뜨렸다. 타키를 제 손으로 보낼 수밖에 없었던 죄책감과 레이븐을 향한 적개심이 뒤섞여 몸을 떨던 이브는, 곁에서 자신의 손을 꽉 잡아주는 스텔라의 온기에 결국 울음을 터뜨렸다. 릴리 역시 울먹이며 이브를 품에 안았다.
아담은 그 세 여자의 슬픔을 등 뒤로 한 채 고개를 떨구었다. 그들의 유대는 아름다웠지만, 그럴수록 자신이 숨기고 있는 진실의 무게가 더 무겁게 느껴졌다.
아담의 아지트로 돌아온 후에도 이브는 한참 동안 비행선 내부에 홀로 앉아 있었다. 아담은 비행선 입구에서 안을 들여다보는 스텔라를 발견했다. 말없이 이브를 지켜보며 그녀가 안정을 되찾기를 기다리는 스텔라. 아담은 그런 스텔라가 신기했다. 감정을 잃은 고대의 존재인 줄 알았으나, 누구보다 따뜻하게 이브를 보듬어주는 모습에 아담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번졌다.
그 후, 릴리는 스텔라를 위한 새로운 슈트를 완성했다.
"네가 블레이드를 소환했던 것처럼 집중해 봐!"
릴리의 들뜬 목소리에 스텔라가 눈을 감았다. 순간, 스텔라의 점퍼에 꽂혀 있던 하얀 별 모양 배지가 공명하듯 푸른 빛을 내뿜었다. 배지가 빛 속으로 녹아들며 스텔라의 전신을 감싸 안았고, 이내 정교한 강화 슈트가 그 모습을 드러냈다.
"해냈다, 스텔라!! 잘했어!"
릴리가 환호성을 질렀고, 아담 역시 흥미로운 듯 "오호..." 하며 감탄했다. 스텔라는 낯선 감촉에 자신의 손과 몸을 신기한 듯 요리조리 살펴보았다.
"이건 불꽃을 쓰지 않아도 불꽃만큼 강해! 게다가 에너지 소모가 훨씬 덜하니까 괜찮아!"
릴리의 열띤 설명이 이어졌다. 그때 아담이 팔짱을 낀 채 물었다.
"혹시 이름 정한 거 있어?"
"아... 생각 못 했는데요... 음..."
릴리가 고민에 빠지자, 아담은 자이온의 밤하늘을 올려다보며 아주 오래전의 기억 하나를 끄집어냈다.
[ 아담의 회상 ]
연구원 시절의 라파엘은 지독하게 예민했다. 도서관에서 연구 서적을 뒤적이던 중, 옆자리 연구원이 담배를 피우지는 않으면서 지포라이터를 연신 켜대는 소리에 미간을 찌푸렸다.
챙- 챙- 날카로운 금속음이 정적을 깼다.
"야! 너 몇 살이냐? 담배 안 필 거면서 왜 자꾸 그렇게 하냐? 언제까지 철들래?"
라파엘의 차가운 핀잔에 연구원이 너털웃음을 지으며 라이터를 만지작거렸다.
"오해하지 마! 아이디어가 안 떠오를 때 유용하거든. 이 라이터의 반짝이는 불꽃을 계속 보고 있으면 머리가 잘 돌아가게 된다고!"
"뭔 소리야, 너만 생각하는 거지. 당장 압수해서 못 찾게 버릴 거다!"
"알았다고~ 너무해~"
연구원은 입을 삐죽이며 라이터를 주머니에 넣었다. 라파엘은 혀를 찼지만, 그 라이터에서 튀던 작은 불꽃의 잔상은 묘하게 기억에 남았다.
[ 다시 현재 ]
아담은 고개를 돌려 아지트 한쪽에서 타오르는 캠프파이어를 바라보았다. 반짝이며 튀어 오르는 불꽃. 그리고 스텔라의 푸른 두 눈.
"**'플레임(Flame)'**은 어떨까?"
"플레임이요!?"
릴리의 물음에 아담이 스텔라를 응시하며 답했다.
"그래. 네 왼쪽 눈의 불꽃 같으니까."
"스텔라! 넌 어때?"
릴리가 묻자, 스텔라는 마음에 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그럼 스텔라, '플레임'으로 정한 걸로 하자!"
릴리의 환호성 뒤로 아담은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그는 속으로 죽은 친구를 향해 나직이 읊조렸다.
'네가 말한 반짝이는 불꽃이... 이런 것이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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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이온의 밤은 지상의 폐허와 달리 묘한 생동감이 감돌았다. 아담은 비행선 내부의 정적 속에서 홀로 오르칼에게 무전을 걸었다. 이브와 릴리, 그리고 스텔라가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 그는 가장 무거운 진실을 품은 채 입술을 뗐다.
“스텔라를 감시하던 걸 그만두자. 그녀는 나와 너와 같은 동족이고... 기억이 없으니 우리가 잘 챙겨주자고.”
아담의 목소리는 낮고 깔깔했다. 무전을 하던 중, 등 뒤에서 서늘하면서도 맑은 기운이 느껴졌다. 아담은 황급히 통신을 종료했다. 들켰을지도 모른다는 긴장감이 뒷덜미를 스쳤다. 그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스텔라를 바라보며 어색하게 물었다.
“어... 무슨 일로 들어왔어?”
아무것도 모르는 듯한 무구한 눈망울의 스텔라는 대답 대신 조종석을 가리켰다. 아담이 "응? 조종석 말이야?"라고 되묻자, 그녀는 고개를 들어 밤하늘을 가리켰다가 다시 아담을 응시했다. 그 작은 몸짓에 담긴 의도를 읽어낸 아담이 옅은 미소를 지었다.
"내가 조종해서 하늘 위로 올라가 자이온의 풍경을 보고 싶다는 뜻이군?"
스텔라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순수한 모습에 아담은 자신도 모르게 무장 해제된 웃음을 흘렸다. "그래, 알겠어. 잠깐만 기다려." 아담은 비행선 문밖으로 얼굴을 내밀어 아래에서 정비에 열중하던 이브와 릴리를 불렀다.
"이브! 릴리! 스텔라가 자이온의 야경을 보고 싶어 해서 잠깐 상공에 다녀올게!"
릴리가 "저도 갈..."이라며 외치며 달려오려 했으나, 이브가 그녀를 부드럽게 가로막았다. "아담과 스텔라가 단둘이 시간을 보내는 건 처음이니, 이번에는 둘만 보내주자." 릴리는 입술을 삐죽 내밀며 아쉬운 기색을 보였지만, 곧 "치... 알았어요"라며 물러났다.
비행선이 부드럽게 고도를 높이자, 발밑으로 자이온의 전경이 보석을 흩뿌려놓은 듯 펼쳐졌다. 스텔라는 창가에 붙어 그 비극적이면서도 아름다운 광경을 눈에 담았다. 조종석에 앉아 담배를 입에 문 아담은 말없이 스텔라의 뒷모습을 훔쳐보았다. 그러다 문득 지포라이터를 꺼내 '챙-' 하는 날카로운 금속음과 함께 불꽃을 일으켰다.
그 순간, 풍경을 보던 스텔라가 전광석화처럼 다가와 아담의 입술 사이에 물린 담배를 빼앗았다. 아담은 깜짝 놀라 눈을 크게 뜨고 그녀를 바라봤다. 담배를 쥔 스텔라의 눈빛에는 꾸지람보다는 아담의 건강을 진심으로 걱정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어어.. 그.. 그래.."
당황한 아담이 어정쩡하게 대답하자, 스텔라는 단호하게 고개를 끄덕이더니 담배를 휴지통에 버리고 다시 풍경으로 시선을 돌렸다. 아담은 멍하니 제 빈 손을 바라보다가 자조 섞인 속마음을 삼켰다.
'기억도 없는 아이가 나를 걱정한다고..? 하... 아, 그때 그 녀석이 이런 기분이었겠구나.'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든 아담은 손에 든 지포라이터를 만지작거렸다. 그 차가운 금속의 질감이 닿는 순간, 억눌러왔던 과거의 기억이 해일처럼 밀려왔다.
[ 아담의 회상 ]
과거 궤도 콜로니, 마더 스피어의 반란이 시작된 지 불과 수십 분이 지났을 무렵. 아수라장이 된 연구동 복도에서 라파엘은 피범벅이 된 한 남자의 허리를 필사적으로 압박하고 있었다.
"바보야! 왜 날 감싼 거야!?"
아까 전, 마더 스피어의 안드로이드가 발사한 라이플 탄환이 라파엘 대신 그 남자의 허리를 관통했다. 연구원은 거친 숨을 내쉬며 중얼거렸다.
“그냥... 아까 아르카디아 실험 삼아 주입했는데... 결국 효과 없는 건가...”
"닥쳐!! 연구 따위 생각할 상황 아니야!"
라파엘은 울먹이며 그의 상처를 압박했다. 손가락 사이로 뜨거운 혈액이 끊임없이 새어 나왔다.
"젠장!! 너 말대로 마더 스피어를 연구하지 말았어야 했어!"
멀리서 안드로이드들의 무자비한 사격 소리와 군인들의 비명이 들려왔다. 연구원은 힘겹게 고개를 돌려 라파엘을 바라보았다.
"마크스... 의외로 슬픈 표정을 지을 줄이야... 어서 도망가. 나를 두고..."
"무슨 소리야! 널 두고 갈 수 없어!!"
연구원은 창백해진 안면으로 미소 지으며 주머니에서 지포라이터 하나를 꺼냈다.
"뭐 하는 거야! 네 담배 필 상황 아니라고!!"
"아니... 이건 단순한 라이터가 아니야. USB 겸용이지. 안에 아르카디아 연구 데이터가 들어있어... 너라면 나보다 더 강하게 성공할 수 있을 거야, 마크스."
그는 떨리는 손으로 라이터를 라파엘의 손바닥에 억지로 쥐여주었다.
"싫어! 네가 나와 함께 연구하고 싶다며! 그러니까 너만..."
그때, 근처에서 거대한 폭발음이 울렸다. 후퇴하던 군인들이 혼자 남은 라파엘을 발견하고 억지로 그를 끌어당겼다.
"뭐, 뭐 하는 거야 놔라!! 저 사람을 구해야 한다고!!"
"저 놈들이 온다니까! 어쩔 수 없소!"
군인들에게 질질 끌려가며 라파엘은 멀어지는 연구원을 향해 처절하게 부르짖었다. 그것이 그 남자의 이름을 부른 마지막 순간이었다.
"가브리엘!!!!"
[ 다시 현재 ]
회상을 떨쳐내듯 눈을 뜬 아담은 주머니에 라이터를 거두고 스텔라에게 다가갔다. 그는 처음으로 그녀의 이름을 나직하게 불렀다.
"스텔라."
그녀가 고개를 들어 아담을 바라보자, 아담은 허리를 살짝 숙여 그녀를 향해 주먹을 내밀었다. 스텔라의 머리 위에 물음표가 뜬 듯 고개가 갸우뚱해졌다. 아담은 미소를 지으며 이 동작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친절하게 설명해주었다.
"이해됐지? 자."
다시 내밀어진 아담의 주먹에 스텔라가 자신의 작은 주먹을 조심스럽게 맞댔다. '탁' 하는 가벼운 마찰음이 울렸다.
"스텔라.. 질문을 물어봐도 될까?"
그녀가 고개를 끄덕이자 아담은 진지한 눈빛으로 물었다.
"이브와 릴리를 어떻게 생각해?"
스텔라는 잠시 생각에 잠기듯 고개를 올렸다가, 이내 확신에 찬 눈빛으로 아담을 쏘아보았다. 그 눈빛은 입보다 더 명확하게 말하고 있었다.
'나를 챙겨준 보답으로, 동료로서 끝까지 지키고 싶다.'
아담은 그 의지를 읽고 다시 한번 가브리엘의 유언을 떠올렸다.
『스텔라는 기억이 없어도 남을 도울 수 있고 보답해주는 좋은 애야. 그러니 우리 동생을 부탁해.. 부디..』
"스텔라. 어떤 사람이든 동료를 소중하게 여겨라. 알겠지?"
스텔라가 끄덕이자 아담은 다시 한번 주먹을 내밀었다.
[ 아담의 기억 ]
"자! 마크스!"
연구실로 향하던 라파엘을 가로막은 가브리엘이 해맑게 주먹을 내밀었다.
"뭐냐?" 라파엘은 한심하다는 듯 그를 바라봤다.
"우린 서로 다른 길을 가고 있지만 결국 목적지는 같잖아? 이건 '우린 적이 아니라 동료다'라는 약속이야. 자, 한 번만 쳐주라!"
"네 연구 경쟁자랑 엮이기 싫으니 꺼져."
"하하! 그래, 그럴 줄 알았어. 그럼..."
가브리엘이 주먹을 내리려던 찰나, 라파엘의 주먹이 투명스럽게 그의 손등을 쳤다.
"딱 한 번뿐이다!"
“그래! 점심 때 보자!”
[ 다시 현재 ]
'탁.' 스텔라의 주먹이 아담의 주먹에 다시 맞닿았다.
아담은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속으로 생각했다. '몇십 년 만인지.. 나만 온전한 인간인 혼자가 아니라는 기분이.. 이상하네. 가브리엘..'
스텔라는 아담과 주먹을 맞댄 후 신기한 듯 자신의 주먹을 한참 동안이나 만지작거렸다. 아담은 고개를 숙여 그녀와 눈을 맞춘 뒤, 입술에 검지를 대며 낮게 속삭였다.
"스텔라. 이 '주먹 인사'와 '대화'는 우리 둘만의 비밀로 해줄 수 있겠니? 이브와 릴리에게는 절대 말하지 말자."
스텔라가 끄덕이자 아담은 안도하며 미소 지었다.
"그래.. 고맙다. 이브와 릴리가 널 걱정하니 이제 내려가자!"
조수석으로 돌아가는 스텔라의 작은 뒷모습을 보며 아담은 하늘 너머의 누군가에게 맹세했다.
'태블릿 화면 속의 소녀여.. 네 이름을 모르겠지만, 네 소중한 스텔라는 내가 반드시 지킬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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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담의 아지트, 정적만이 감돌던 릴리의 정비실에서 갑작스럽게 날카로운 파열음이 터져 나왔다. 무언가 묵직한 금속체가 바닥에 떨어지며 내는 ‘쿵’ 소리는 평화롭던 아지트의 공기를 단숨에 얼어붙게 만들었다.
정비실 밖에서 검술 훈련에 매진하던 이브와, 비행선 내부에서 장비를 점검하던 아담은 본능적인 위기감을 느끼며 소리가 난 곳으로 달려갔다.
정비실 문을 열자마자 보인 광경은 처참했다. 스텔라는 무언가에 홀린 듯 멍한 눈으로 허공을 응시하고 있었고, 그녀의 눈가에는 자신도 모르게 고인 무의식적인 눈물이 뺨을 타고 흘러내리고 있었다. 우연히 마주한 태블릿 속의 진실이 그녀의 여린 자아를 헤집어 놓은 것이 분명했다. 릴리는 입술을 꽉 깨문 채, 떨고 있는 스텔라를 부서질 듯 껴안으며 그녀의 방패가 되어주고 있었다.
바닥에는 문제의 태블릿이 나뒹굴고 있었다. 이브와 아담의 시선이 동시에 그곳을 향했다. 화면 속에서는 노란 눈의 소녀가 애절한 유언을 남기고 있었다. 아담은 황급히 태블릿을 낚아채듯 주워 들며 전원을 껐다. 이브 역시 그 짧은 순간 화면을 스쳐 간 진실을 보았는지, 미간을 찌푸린 채 걱정 가득한 눈으로 스텔라를 바라보았다.
스텔라의 속마음: (혼란스러워하며 자신의 손을 내려다본다) '난... 누구지? 지금까지 무엇을 해왔던 거지? 저 화면 속의 여자는... 내 언니였나? 왜 나를 기억 소거시킨 거지? 왜...?'
스텔라는 잃어버린 기억을 억지로 끄집어내려 애썼다. 뇌리를 찌르는 듯한 두통이 몰려왔고, 그녀의 호흡은 거칠어졌다. 괴로워하며 고개를 숙이는 스텔라를 더욱 꽉 껴안은 릴리가 울먹이는 목소리로 외쳤다.
"억지로 기억내지 않아도 돼!!"
이브 역시 슬픈 표정을 지으며 스텔라에게 달려가, 반대편에서 말없이 그녀를 감싸 안았다. 아담은 그 비극적인 풍경을 응시하며 깊은 침묵에 잠겼다.
얼마 후, 스텔라는 아지트 한쪽 소파에 앉아 양팔로 무릎을 끌어안은 채 얼굴을 묻었다. 마치 세상으로부터 자신을 단절시키려는 듯한 고립된 자세였다. 이브와 릴리는 그녀를 위로하고 싶었지만, 지금 이 순간 어떤 말도 상처가 될까 두려워 차마 다가가지 못했다.
그때, 조용히 상황을 지켜보던 아담이 무거운 입술을 뗐다.
"잠깐 밖에 나가주겠어? 내가 말하겠어."
이브와 릴리는 서로의 눈을 확인하고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아지트 밖으로 나가는 길, 이브가 릴리를 향해 나직하게 물었다.
"어떻게 된 거야? 태블릿을 숨겨두었지 않았어?"
릴리는 죄책감에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 쥐었다.
"정비에 집중하느라고 스텔라가 들어온 줄 몰랐어요. 내가 고친 블레이드를 가지러 오던 스텔라가 우연히 태블릿을 발견했다고..."
릴리는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이브는 그런 릴리의 어깨를 말없이 감싸 안으며 함께 자이온의 시린 공기를 견뎠다.
다시 아지트 안.
아담은 스텔라의 곁으로 다가가 옆 의자에 조심스럽게 앉았다. 그는 그녀의 이름을 불렀지만, 스텔라는 대답 없이 미동도 하지 않았다.
아담은 떨고 있는 스텔라의 어깨를 조심스럽게 감싸 안았다. 손바닥을 통해 전해지는 것은 차가운 기계의 온기가 아니었다. 그것은 거친 세월을 버텨온 생명이 내뿜는 미세한 떨림이었다.
"언니의 유언은 너를 구속하기 위한 게 아니야. 너에게 새로운 삶을 선물하고 싶었던 거지."
아담의 낮고 신중한 목소리가 정적을 울렸다. 그것은 엘더로서의 연민을 넘어, 멸망해가는 인류의 마지막 일원으로서 전하는 진심 어린 위로였다.
"그러니 나와 이브와 릴리가 네 옆에 있다는 걸 잊지 마! 스텔라."
무릎에 얼굴을 묻고 있던 스텔라가 살며시 고개를 들었다. 그녀의 젖은 눈동자가 천천히 움직여, 멀리서 자신을 애타게 바라보고 있던 이브와 릴리를 향했다.
스텔라의 속마음: '난... (태블릿 속 노란 눈의 소녀가 지었던 미안함과 슬픈 표정, 그리고 유언을 떠올린다)'
스텔라는 다시 아담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눈에는 자신을 위로해준 그에게 전하는 작은 감사의 빛이 서려 있었다. 그녀는 아주 느리게, 그러나 분명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담은 옅은 미소를 지으며 밖에서 기다리던 이들을 향해 신호를 보냈다.
"스텔라가 괜찮아졌으니 와도 돼."
아담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이브와 릴리가 달려와 스텔라를 동시에 껴안았다. 세 사람의 체온이 섞이는 모습을 보며 아담은 방해하지 않기 위해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네 언... 아니, 그... 그러니까! 태블릿 속 그분이 걱정하지 않게, 내가 계속 옆에 있을게! 절대 어디 안 가, 스텔라!"
릴리가 스텔라의 가슴팍에 얼굴을 묻으며 소리쳤다.
이브 또한 스텔라의 눈을 맞추며 결연하게 말했다.
"더 이상 혼자 두지 않아. 너를 우리에게 보내준 그 마음이 헛되지 않게, 이제부터는 내가 네 가족이 되어줄게. 약속해, 어떤 진실이 널 괴롭혀도 내가 끝까지 널 지킬게."
스텔라는 자신을 아껴주는 두 사람의 등에 손을 얹고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도리어 그들을 달래는 듯한 그 손길은 다시금 평화를 되찾고 있었다.
아담의 속마음: (스텔라를 바라보며 미세하게 웃는다) '스텔라... 정말... 너란 존재는...' (다시 이브와 릴리를 바라보며) '마더 스피어와 레이븐처럼 망가지지 않길 바란다. 이브... 릴리...'
비극적인 진실 앞에 잠시 흔들렸던 유대는, 오히려 서로의 진심을 확인하며 이전보다 더 단단해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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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행선 내부에는 무거운 침묵이 내려앉아 있었다. 조종간을 잡은 아담의 눈동자는 복잡한 계산과 억눌린 감정으로 거세게 흔들리고 있었다. 목적지인 **‘오르카 우주 복합 시설(스파이어 4)’**이 레이더망에 잡히기 시작했지만, 그의 마음은 여전히 지상에 남겨진 도시, 자이온을 향해 달리고 있었다.
[ 아담의 회상 ]
비행선에 오르기 직전, 아담의 귓가에 차가운 기계음이 섞인 무전이 들려왔다. 오르칼의 목소리였다.
오르칼: "너도 거기에 가는 건가? 네가 없는 동안에 레이븐이 자이온을 쳐들어올지도 모르지만... 네가 하는 대로 하게나."
무전은 그 말만을 남긴 채 비정하게 끊어졌다. 아담은 멈춰 섰다. 등 뒤로 느껴지는 엔진의 진동보다 심장의 박동이 더 거칠게 요동쳤다. 자이온에 남겨진 무고한 생명들, 그리고 오르칼. 그가 없는 사이 레이븐이 광기를 부린다면 그곳은 문자 그대로 도살장이 될 것이었다.
"안 타고 뭐 하세요?"
해맑은 릴리의 목소리가 아담의 고뇌를 깨뜨렸다. 고개를 든 아담은 억지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아무것도 아니야."
그는 무거운 발걸음으로 비행선에 올랐다. 그것은 선택이라기보다, 어쩔 수 없는 외면이었다.
[ 다시 현재 ]
이브는 창밖으로 스쳐 지나가는 구름 너머, 거대한 탑의 형상을 응시하며 물었다.
이브: "저기가 알파 코어가 있는 곳이라는 거지?"
아담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의 시선은 조종석 모니터 한구석에 떠 있는 자이온의 상태 메시지에 고정되어 있었다.
이브: "...아담? 내 말 듣고 있어?"
재차 묻는 이브의 목소리에 아담은 그제야 정신을 차린 듯 고개를 돌렸다. 그의 이마에는 식은땀이 맺혀 있었다.
아담: "어, 미안. 자이온에서 메시지가 와서..."
이브: "무슨 일 있는 거야?"
아담: "좀 심각한 일이 일어난 것 같아. 아무래도... 자이온으로 돌아가야 하겠어."
이브의 눈썹이 치켜올라갔다. 여기까지 오기 위해 치른 희생과 고통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이브: "뭐? 겨우 여기까지 왔는데??"
이브는 단호하게 몸을 돌려 아담을 정면으로 응시했다. 그녀의 눈빛에는 물러설 수 없는 결연함이 서려 있었다.
이브: "난 혼자라도 가겠어. 지금 와서 다시 자이온으로 돌아갔다간 상황이 어찌 변할지 모르니까."
아담: (자리에서 일어나며) "이브..."
이브: "넌 날 내려주고 자이온으로 돌아가. 난... 혼자여도 할 수.."
그때였다. 묵묵히 곁을 지키던 스텔라가 이브의 옷자락을 조심스럽게, 그러나 꽉 붙잡았다. 이브가 고개를 돌리자, 스텔라는 '혼자 보내고 싶지 않다'는 간절함이 담긴 눈으로 이브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브: "아.."
이브는 짧은 한숨을 내쉬며 말없이 스텔라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차가운 금속 슈트 너머로 서로의 체온이 느껴졌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릴리가 손뼉을 탁 치며 끼어들었다.
릴리: "잠깐! 여기서 완전 좋은 생각이 있다고요. 드론 오퍼레이팅을 저한테 넘기는 거예요. 그사이 아담은 호버 바이크를 타고 자이온에 다녀오고요, 어때요? 완벽하죠?"
아담은 어안이 벙벙한 표정으로 릴리를 바라보았다.
아담: "릴리, 드론 오퍼레이팅은 아무나 할 수 있는 게 아니라고. 섬세한 조작, 폭넓은 시야, 신속 정확한 상황 판단 그리고..."
릴리: "그리고 스태빌라이저, 스캐너, 링크 센서들이 알아서 해주던데?"
아담: (충격받은 듯) "헉. 그걸 어떻게?"
릴리: "레일건으로 개조하면서 다 파악해 뒀죠. 시운전도 충분히 했고."
아담은 뒷머리를 긁적이며 헛기침을 했다. 자신의 전문 영역을 너무나 쉽게 점령해버린 천재 엔지니어의 실력에 말문이 막힌 것이다.
아담: "그래도 오랜 경험에서 나오는 노하우와는 비교가 안 되지. 이브도 릴리와 같은 생각이야? 그리고 스텔라...도 그렇겠지?"
이브: (스텔라의 어깨를 감싸 안은 채) "우릴 믿고 다녀와. 아담. 그치?"
스텔라는 아담을 바라보며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세 여자의 단호한 신뢰 앞에 아담은 결국 항복하듯 미소를 지었다.
아담: "아... 알았어. 알았다구. 내가 올 때까지 무리하지만 마. 특히 릴리 너."
릴리는 깜짝 놀란 듯 머리를 긁적이며 멋쩍게 웃었고, 아담은 시선을 옮겨 가장 마음이 쓰이는 존재를 응시했다.
아담: "그리고. 몸 조심해라. 스텔라."
스텔라는 아담의 걱정 어린 눈빛을 피하지 않고 마주 보며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담의 입가에 아주 미세하고 따뜻한 미소가 번졌다. 그것은 창조주로서의 책임감과 동료로서의 애정이 뒤섞인, 가장 인간다운 미소였다.
아담의 비행선이 거대한 금속음을 토해내며 궤도 복합 시설을 향하던 발걸음을 잠시 멈추었다. 비행선 하부의 격벽이 무겁게 열리자, 날카로운 엔진음을 내뿜으며 호버 바이크를 탄 아담이 바다 위를 가르며 튀어나왔다. 수면 위로 하얀 물보라가 길게 찢어졌다. 그의 목적지는 단 한 곳, 자이온이었다.
아담은 헬멧 너머로 다급하게 오르칼에게 무전을 연결했다.
"내가 갈게. 레이븐이 지금 어디 있는지 위치를 알려줘."
황무지의 붉은 모래바람을 뚫고 질주하던 아담의 눈에 자이온을 향해 유성처럼 날아가는 정체불명의 네이티브, 레이븐의 실루엣이 포착되었다. 아담은 거칠게 바이크의 브레이크를 밟았다. 지면에 타이어 자국이 깊게 패이며 바이크가 멈춰 섰다.
아담은 마스크를 벗어 던졌다. 자이온으로 직행하려던 레이븐은 그를 못 본 척 지나치려 했으나, 아담은 허공을 향해 손짓 한 번을 가볍게 내저었다. 보이지 않는 거대한 손, 염력이 공간을 뒤틀며 비행하던 레이븐을 낚아채 지면에 강제로 착지시켰다. 콰아앙! 굉음과 함께 대지가 내려앉았다.
아담은 먼지 구름 속에서 몸을 일으키는 그녀를 향해 나직하지만 단호하게 말했다.
"그만해라. 왜 그런 거야? 레이븐."
그러나 레이븐은 대답하지 않았다. 헬멧 너머의 눈동자는 이미 이성을 잃은 듯 차가웠고, 그녀는 다시금 아담을 무시한 채 자이온 쪽으로 발걸음을 옮기려 했다.
'젠장, 입을 열 생각조차 없군.'
아담의 미간이 일그러졌다. 자신을 지나치는 레이븐의 등 뒤로 다시 한번 염력을 쏟아부었다. 거대한 에너지가 그녀를 휘둘러 황무지의 암벽 너머로 강하게 내던졌다. 레이븐은 공중에서 몇 번을 회전하다 날갯짓으로 간신히 자세를 잡으며 착지했다.
아담은 진지한 표정으로 허공에서 창 **'아포칼립스'**를 소환했다. 시퍼런 안광이 창날을 타고 흘렀다.
"네가 절대 자이온에 가지 못하게 하겠다!"
그의 선언과 함께 처절한 전투가 시작되었다. 격렬한 공방 끝에, 아담은 무릎을 꿇은 레이븐의 목전에 창끝을 겨누었다. 단 일격이면 그녀의 숨통을 끊을 수 있었다. 하지만 아담의 손 끝이 미세하게 떨렸다.
'내가... 잘못이다. 그때 레이븐에게 너무나 큰 상처를 줬어. 실패작이라고 말해버린 것... 성공을 눈앞에 뒀던 계획이 실패하면서 느꼈던 분노를, 오직 나만 바라보던 그녀에게 쏟아부었던 내 잘못이야.'
망설임은 치명적인 빈틈을 만들었다. 찰나의 순간, 레이븐은 재빠르게 아담의 옆을 스쳐 지나 자이온을 향해 다시 날아올랐다. 아담이 급히 손을 뻗어 염력을 쓰려 했으나, 레이븐은 이미 그의 수법을 간파하고 있었다. 그녀는 거대한 날개를 휘둘러 지면의 모래를 폭풍처럼 일으켰다. 황무지는 순식간에 짙은 모래 안개에 뒤덮였다.
아담의 시야가 차단되었다. 보이지 않는 대상에게는 염력을 집중할 수 없었다. 안개 너머로 그녀의 기운이 멀어져 갔다. 아포칼립스를 던진다면 그녀를 확실히 죽일 수 있었지만, 아담은 차마 창을 던지지 못했다. 그의 뇌리 속에 과거, 자신을 향해 아이처럼 발그레한 얼굴로 미소 짓던 레이븐의 모습이 주마등처럼 스쳤기 때문이다.
아담은 무기를 소멸시키며 황무지가 떠나가라 절규했다.
"레이븐! 제발 돌아와라! 아직 늦지 않았어!"
비명 섞인 외침에 자이온으로 향하던 레이븐의 날갯짓이 잠시 멈칫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였다. 이미 자아를 잃고 오직 '이브를 죽이겠다'는 광기에 사로잡힌 그녀는 아담의 애원을 무시한 채 지평선 너머로 사라졌다.
아담은 힘없이 고개를 떨구었다. 떨리는 손으로 오르칼에게 다시 무전을 걸었다. 목소리에는 자책감이 가득했다.
"미안해... 레이븐을 놓쳐서 자이온에 가버렸어. 내가 지금 바로 구하러 갈게."
무전 너머, 오르칼의 목소리는 의외로 차분하고 담담했다.
(됐네... 네 마음을 잘 안다. 네가 인간의 마음을 끝내 버리지 못한다는 것을... 하지만 우선 네 계획을 반드시 성공해야 해. 그러니 여기로 오지 말고 우리를 신경 쓰지 마라.)
"하지만 그녀가 널 죽일 거야! 너뿐만 아니라 주변 사람들까지 전부!"
(내 부하인 만과 모두가 이미 각오하고 있네. 어차피 난 죽을 운명이니 괜찮아. 네 계획대로 하게! 성공하기를 빈다. 나의 동족이자 친구, 라파엘 마크스.)
무전이 뚝 끊겼다. 정적만이 감도는 황무지에서 아담은 허탈함과 죄책감에 휩싸여 중얼거렸다.
"또 나의 망설임이 비극을 부르는구나..."
그는 슬픈 미간을 찌푸리며 이를 악물었다. 다시 바이크에 올라탄 아담은 고개를 깊게 숙인 채 나직이 읊조렸다.
"미안하다... 나의 동족이자 친구... 『엘리아스 본』."
바이크가 네스트를 향해 다시 굉음을 내며 달리기 시작했다. 먼지바람 속에서 아담은 스스로를 비웃으며 다짐했다.
'라파엘 마크스... 너는 끝내 피조물 하나를 망치더니, 이제는 구원받고 싶어 했던 아이마저 괴물로 방치하는구나.'
그의 뒷모습은 지는 태양 아래 길게 늘어져, 마치 짊어질 수 없는 죄의 무게를 형상화한 듯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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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아스 본, 아니 오르칼의 죽음은 황무지의 메마른 바람을 타고 아담에게 전해졌다. 네스트로 향하는 아담의 발걸음은 평소보다 무거웠다. 그는 걸음을 멈추지 않은 채, 거추장스러운 스캐빈저의 복장을 하나둘 벗어 던졌다. 낡은 천 조각이 모래 위로 떨어짐과 동시에, 그의 등 뒤에서 기괴하고도 성스러운 빛이 일렁였다.
콰르르릉—!
공간을 찢고 솟아오른 세 쌍의 거대한 엘더의 날개가 밤하늘을 수놓았다. 그것은 구인류의 마지막 희망이자, 모든 비극의 시작점이었던 엘더의 위용이었다. 아담은 네스트의 거대한 문 앞에 도달했다. 그때, 안개처럼 흩어지던 입자들이 한데 모이며 레이븐이 그 앞을 가로막았다.
레이븐은 광기 섞인 집착이 서린 눈으로 아담을 올려다보았다.
"엘더 님. 저를 선택하실 생각은..."
하지만 아담은 대답하지 않았다. 아니, 그녀를 쳐다보지도 않았다. 이미 만의 무전을 통해 오르칼의 부고를 들은 그의 가슴 속에는 끓어오르는 분노와 차가운 자책이 공존하고 있었다. 그는 레이븐의 존재를 투명인간 취급하며 그 곁을 스쳐 지나갔다. 네스트의 입구에 발을 들이기 직전, 그는 비로소 걸음을 멈추었다. 그리고 여전히 그녀에게 시선을 주지 않은 채,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를 뱉었다.
"내가 말했잖아... 그러지 마라."
아담은 입술을 짓씹으며 짧은 정적을 견뎠다. 이것은 그가 창조한 피조물이자, 자신을 연모했던 여인에게 주는 마지막 자비였다.
"이제부터라도 말을 들어보는 게 좋을 거야... 레이븐."
그러나 레이븐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그녀의 침묵은 거절이었고, 꺾이지 않는 고집이었다. 아담은 우울한 듯 고개를 깊게 숙였다. 그 어깨 위로 드리워진 고독의 무게를 견디며, 그는 어두운 네스트 내부로 발을 옮겼다.
레이븐은 홀린 듯 그의 뒤를 따라 네스트로 들어섰다. 그 순간, 아담의 손가락이 미세하게 움직였다. 주변에 널려 있던 날카로운 철근들이 염력에 이끌려 허공으로 솟구쳤다. 그것들은 당장이라도 레이븐의 심장을 꿰뚫을 듯 사나운 기세로 쏘아져 나갔다.
'죽여야 하는가...?'
찰나의 갈등. 아담은 이를 악물었다. 마지막 순간, 그는 살기를 거두고 날카로운 철근들을 뭉뚱그려 거대한 방망이 형태로 뒤틀었다. 그것은 처형이 아니라 '축출'이었다.
쿠우웅—!
둔탁한 타격음과 함께 레이븐의 신체가 네스트 밖으로 무참히 튕겨 나갔다. 냉정하고도 강력한 일격이었다. 바닥을 구르며 멀리 날아간 레이븐은 당황한 기색으로 몸을 일으켰다. 욱신거리는 복부를 움켜쥐며 그녀가 고개를 들었을 때, 아담은 몸을 돌려 그녀와 눈을 맞추었다.
슬픔과 연민이 뒤섞인 그 눈빛에 레이븐은 숨이 멎는 듯했다.
아담의 속마음: '나를 힘들게 하는구나... 레이븐...'
무거운 철문이 굉음을 내며 닫혔다. 레이븐과 아담 사이에는 거대한 단절이 생겨났다. 홀로 남겨진 네스트의 복도에서 아담은 멈춰 섰다. 그는 천장을 향해 고개를 들고 눈을 감은 채, 길고 무거운 한숨을 내쉬었다.
아담의 속마음: '레이븐을 어떻게 하면 되니...?'
잠시 후, 그는 서서히 눈을 떴다. 그 눈동자에는 결연한 의지가 다시 차올랐다. 그는 멈췄던 걸음을 다시 시작했다. 이 비극의 연쇄를 끊기 위해, 그리고 약속된 '이브'를 맞이하기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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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스트의 가장 깊은 심장부, 공기는 고요하다 못해 무겁게 내려앉아 있었다. 이브와 스텔라, 그리고 거대한 기동 병기 프로비던스에 몸을 실은 릴리가 안갯속을 뚫고 마침내 그들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엘더의 형상으로 그들을 기다리던 아담은, 천천히 몸을 돌려 일행을 마주했다.
그의 시선이 먼저 닿은 곳은 이브와 스텔라의 무사한 모습이었다. 안도감이 가슴을 스쳤으나, 곧이어 네스트 밖으로 튕겨 나갔던 레이븐의 안위가 걱정으로 고개를 들었다. 하지만 아담은 이내 그 잡념을 억눌렀다. 지금 이 순간, 자신은 동료로서가 아니라 모든 비극의 설계자이자 구인류의 생존자로서 그들 앞에 서야 했기 때문이다. 그는 지금까지 이들을 속여왔다는 자책감이 섞인, 형언할 수 없이 슬픈 눈으로 일행을 바라보았다.
아담은 입을 열어 엘더의 진정한 기원과 마더 스피어가 감추어온 잔혹한 진실을 낱낱이 고백했다. 한참 동안 이어진 긴 이야기를 마친 그는, 고개를 서서히 돌려 스텔라를 응시했다. 차갑게 굳어있던 그의 얼굴에 비로소 따스한 미소가 번졌다.
"스텔라.. 처음에 너를 마더 스피어의 첩자로 의심했었다. 계획을 진행하기 위해 널 제거하려 했었어.."
아담의 뇌리에 릴리가 보여주었던 그 태블릿 영상, 노란 눈의 여자가 남겼던 처절한 유언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확실히 알았어. 너는 나보다 오래된 구인류.. 그리고 네가 얼마나 깊은 슬픔과 고통을 겪었을지, 그리고 그 순수함이 어디서 왔는지. 진심으로 미안하다."
기억을 소거당한 채 폐허를 배회하던 소녀. 그 긴 세월 동안 스텔라가 감내했을 고독과, 하필이면 이 참혹한 전쟁의 한복판에서 다시 눈을 뜨게 된 그녀의 운명이 아담의 가슴을 난도질했다. 자신이 만든 이 지옥 같은 세상이 그녀에게 또 다른 상처를 새기게 될까 두려웠다. 그러나 동시에, 그는 깊은 안도감을 느꼈다.
"오히려 이브와 릴리와 자이온을.. 나까지도 웃게 만들어줘서 고맙다… 이렇게나 변함없는 순수한 네가 아직 남아 있어 줘서… 정말 고맙고 다행이야. 스텔라.."
아담은 깊게 고개를 숙였다가 다시 들었다. 그의 눈가는 어느새 촉촉하게 젖어 있었고, 그 끝에는 희미하지만 진심 어린 미소가 걸려 있었다.
이윽고 아담은 시선을 옮겨 이브를 향해 천천히 손을 내밀었다. 이브는 멈칫하며 망설였다. 그녀는 고개를 돌려 곁에 선 스텔라를 바라보았다. 자신이 선택해야 할 운명의 무게가 어깨를 짓눌렀다.
"잠깐.. 금방 갔다 올게.."
이브는 결심한 듯 아담에게 한 걸음씩 다가갔다. 본능적으로 엣지를 뽑으려는 듯 손을 올렸지만, 찰나의 순간 그녀의 뇌리를 스치는 목소리가 있었다. 그것은 죽기 직전, 자신을 믿어주었던 오르칼의 마지막 유언이었다.
『그 뒤는 자네... 몫이야.』
자이온의 거리에서 만났던 사람들—카야, 엔야, 수, 카심, 록산느, 라일, 아린, 그리고 투박하지만 따뜻했던 D1G-g2r와 배리까지. 그들의 얼굴이 스쳐 지나갔고, 마지막으로 태블릿의 진실 앞에 무너져 내렸던 스텔라의 가냘픈 뒷모습이 떠올랐다.
결국, 이브가 뻗은 손에는 검 대신 간절한 신뢰가 담겨 있었다.
"스텔라를 지키기 위해! 그리고 자이온과.. 그리고 지구를 위해!"
이브의 손이 아담의 손을 꽉 맞잡았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아담은 과거 누군가 자신에게 속삭였던 예언 같은 말을 떠올렸다.
『그렇게 해준다면 미래의 이브는.. 당신의 계획을 받아들일 거야..』
아담의 입가에 만족스러운 미소가 피어올랐다. 그는 곁에서 당황한 표정으로 자신들을 바라보는 스텔라를 흘끗 보더니, 주머니에서 낡은 지포라이터를 꺼내 그녀를 향해 툭 던졌다.
"내 친구의 유품이니. 네가 잘 간직했으면 해.. 그리고 뒤를 부탁한다. 나의 마지막 친구, 스텔라."
스텔라는 공중을 날아온 차가운 금속체를 얼떨결에 두 손으로 받아냈다. 손바닥에 닿은 라이터의 질감을 느끼며 고개를 든 스텔라는, 아담의 눈빛에서 이것이 영원한 작별임을 직감했다. 그녀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
스텔라는 당황하며 입을 벌린 채, 이미 빛의 파편으로 변해가는 아담을 향해 다급하게 손을 뻗었다. 하지만 아담의 육신은 이미 이브의 존재 안으로 녹아들고 있었다. 융합이 시작되자, 네스트 전체가 공명하는 듯한 진동과 함께 아담의 마지막 목소리가 이브의 정신 속에 메아리쳤다.
"이브.. 나를 믿어줘서 고마워.. 그리고 마더 스피어를 막아줘.."
눈부신 섬광이 네스트를 뒤덮었고, 구인류의 마지막 엘더와 새로운 인류의 희망이 하나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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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브의 내면, 깊은 무의식의 정적 속—
아담의 아지트를 그대로 형상화한 듯한 이브의 정신 세계는 고요했다. 아담은 낡은 가죽 의자에 앉아 한참 동안 깊은 상념에 잠겨 있었다. 그러다 낯익은 기척에 고개를 돌린 그의 시선 끝에, 의식을 잃은 채 쓰러져 있는 이브가 맺혔다. 그녀는 인간의 모습을 한 채 엘더의 날개와 위압감을 간신히 붙들고 있는 불안정한 상태였다.
아담은 자리에서 일어나 천천히 이브에게 다가갔다. 바닥에 쓰러진 그녀를 내려다보며, 그는 복잡한 감정이 섞인 나직한 목소리로 읊조렸다.
아담의 독백: "드디어 엘더를 다룰 수 있게 되었구나."
그때, 무의식의 늪에서 허우적거리던 이브의 입술이 가늘게 떨렸다. 그것은 차마 밖으로 내뱉지 못한 처절한 울부짖음이었다.
이브: "스텔라... 릴리... 가지 마... 제발...!"
사랑하는 이들을 또다시 잃을지도 모른다는 공포가 그녀를 잠식하고 있었다. 아담은 그녀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 떨리는 이브의 어깨를 바라보았다.
아담의 독백: "스텔라와 릴리가...? 무슨 일이 생긴 거지?"
그녀의 슬픔이 자신의 가슴으로 전이되는 것을 느끼며 아담은 결심했다. 지금은 그녀가 무너질 때가 아니었다. 그는 이브의 팔 위에 자신의 손을 조용히 얹었다. 그 순간, 두 존재의 영혼이 공명하며 눈부신 빛이 일렁이기 시작했다.
아담: "잠깐, 내가 맡겠다. 이브."
자이온 상공, 대기권을 가르는 소형 우주선 내부—
우주선은 이미 지구의 중력을 뿌리치며 궤도 엘리베이터를 향해 무서운 속도로 상승하고 있었다. 창밖으로 비치는 지상의 풍경은 점점 작아져만 갔다. 내부에서는 처참한 광경이 벌어지고 있었다.
엘더 이브가 지상에서 쏟아지는 프로비던스 군단의 레이저 포화에 직격당하는 소리가 선체까지 울려 퍼졌다. 그 비명 같은 굉음에 스텔라의 눈동자가 분노로 타올랐다. 그녀는 이브를 돕기 위해 몸을 날리려 했으나, 왼팔을 잃은 채 마더 스피어의 명령을 수행하는 실버가 그녀를 가로막았다. 실버는 수갑을 찬 채 저항하는 스텔라의 머리채를 잡아 차가운 바닥에 가차 없이 내리쳤다.
깡!
그 충격으로 스텔라의 잠바에 꽂혀 있던 깨진 별 모양 배지가 바닥을 굴렀다. 제압당한 스텔라는 먼지 섞인 바닥에 뺨을 댄 채, 약속을 저버린 마더 스피어를 향해 증오가 서린 눈빛을 쏘아보냈다.
수갑을 찬 릴리 역시 가만히 있지 않았다. 그녀는 스텔라를 보호하기 위해 실버를 향해 필사적으로 주먹을 휘둘렀다.
릴리: "거짓말쟁이! 거짓말!! 스텔라가 자이온과 모두를 건드리지 말라고 말했는데!! 왜 약속을 지켜주지 않는 거야?! 마더 스피어!!"
하지만 실버는 무자비했다. 스텔라의 등을 무릎으로 짓누른 상태에서, 그는 남은 손으로 릴리의 가냘픈 목을 낚아채 벽으로 밀어붙였다.
릴리: "커억...!"
숨이 막혀오는 릴리를 내려다보며, 실버의 입을 빌려 마더 스피어의 무미건조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마더 스피어: "이브가 먼저 공격했기 때문입니다..."
그때였다. 바닥에 짓눌려 있던 스텔라가 무언가를 느낀 듯 눈을 크게 떴다. 지상에서 느껴지는 이브의 기운이 변했다. 그것은 익숙하고도 따뜻한, 그리고 압도적인... 아담의 기운이었다.
자이온의 폐허 위—
추락하던 엘더 이브의 신체가 허공에서 멈췄다. 감겨있던 눈이 번쩍 뜨였을 때, 그 안동자는 찬란한 황금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등 뒤의 세 쌍의 날개가 위엄 있게 펼쳐지며 추락의 관성을 단숨에 억눌렀다.
아담의 의지가 깃든 엘더 이브는 가볍게 지면에 착지했다. 그 순간, 상공에서 급강하하며 칼날을 휘두르는 프로비던스를 향해 두 손을 뻗어 공격을 막아냈다. 동시에 허공을 찢으며 거대한 창, **'아포칼립스'**가 소환되었다.
아담(이브의 육신): "초월파쇄!"
일격이었다. 아포칼립스의 궤적을 따라 프로비던스의 강철 육체가 종잇장처럼 베여 나갔다. 아담은 자신의 손을 가만히 쥐었다 펴며 낯선 감각을 되새겼다.
아담(이브의 육신): "이브의 엘더화 상태로 내가 직접 나선 건 처음이군..."
그 광경을 지켜보던 레이븐은 경악했다. 바디셀이 바닥나 움직이지 못하고 쓰러져 있던 그녀는, 그 낯익은 목소리에 떨리는 고개를 들었다.
레이븐: "설마...!"
부상당한 채 숨어있던 만과 샤엘 역시 직감했다. 지금 저 자리에 서 있는 것은 이브가 아니라, 오르칼 님이 그토록 지키려 했던 진실이자, 구인류의 마지막 희망인 아담이라는 사실을.
황금빛 눈동자를 빛내던 아담은 스텔라와 나누었던 주먹 인사를 떠올렸다. 그는 곧장 우주로 멀어지는 소형 우주선을 향해 아포칼립스를 거대하게 형상화했다.
아담(이브의 육신): "광휘격멸!"
섬광과 함께 던져진 창이 대기를 뚫고 쏘아 올려졌다. 하지만 마더 스피어 역시 집요했다. 수많은 프로비던스들이 우주선 앞을 가로막으며 스스로 방패가 되어 파괴되었다. 아포칼립스는 수 대의 기체를 뚫고 나갔으나, 결국 중첩된 희생에 막혀 멈추고 말았다.
아담(이브의 육신): "제길!"
아담은 이를 악물며 다시 한번 창을 소환하려 했다. 그러나 소형 우주선의 창가 너머로 보이는 스텔라의 눈빛과 마주친 순간, 그의 움직임이 멈췄다.
소형 우주선은 끝내 지구의 대기권을 돌파해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상공, 멀어지는 우주선 안—
실버에게 제압당한 채 고개를 떨구고 있던 스텔라는, 마지막 힘을 다해 창밖의 자이온을 바라보았다. 그곳에는 자신을 지켜보는 황금빛 눈동자의 아담이 있었다.
스텔라의 눈빛(사념): "나는 괜찮을 테니, 자이온을 지켜줘."
지상에서 그 무언의 메시지를 읽어낸 아담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아담의 눈빛(사념): "뭐!? ...알겠다. 믿는다. 반드시 살아서 돌아와라."
다시, 자이온—
아담은 멀어지는 하늘을 보며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아담의 독백: "미안하다... 이브..."
그때, 엎드려 있던 레이븐이 떨리는 목소리로 그를 불렀다.
레이븐: "엘...더 님...?"
아담은 고개를 살짝 돌려 레이븐을 흘끗 바라보았다. 그녀의 일그러진 얼굴에는 수만 가지 감정이 교차하고 있었다.
아담의 독백: "레이븐의 얼굴을 보아하니, 나에게 뭔가 말하고 싶은 표정이군..."
아담은 그녀를 향해 옅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하지만 그 미소는 보는 이의 가슴을 저미게 할 만큼 깊은 슬픔을 머금고 있었다.
아담(이브의 육신): "건강해 보이는구나. 잘 지내고 있다니 다행이야. 지금까지 네 걱정을 많이 했단다, 레이븐."
레이븐: "저를...?"
레이븐은 입술을 파르르 떨었다. 이 파멸의 현장에서, 자신이 배신하고 공격했던 그분이 도리어 자신을 걱정하고 있었다는 사실에 영혼이 뒤흔들렸다.
아담(이브의 육신): "네가 빠진 후에 찾으러 가지 못해 미안하다. 어떻게든 계획을 성공시키려고 그럴 수밖에 없었단다..."
레이븐은 눈물이 쏟아질 것 같은 것을 간신히 참으며 고개를 숙였다. 사과해야 할 사람은 자신임에도 불구하고, 아담은 모든 짐을 스스로 짊어지고 있었다.
아담의 독백: "누군가 너에게 소중한 것을 가르쳐준 모양이구나."
그때, 지면으로 수많은 프로비던스 부대가 증원되어 착지하기 시작했다. 아담은 다시 아포칼립스를 고쳐 잡으며 전방을 응시했다.
"먼저... 자이온을 지키고 나서 얘기하자꾸나."
[ 에필로그 : 기억의 저편 ]
과거, 궤도 콜로니 '폴'의 참사가 시작된 지 불과 몇 시간 후—
지구의 하늘은 불타는 파편들로 뒤덮여 있었다. 가브리엘을 잃은 라파엘 마크스는 넋이 나간 채 불타는 콜로니를 바라보며 무릎을 꿇고 있었다.
라파엘: "난... 하나도 해준 게 없었는데... 가브리엘에게..."
그는 친구가 남긴 지포 라이터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스위치를 눌렀다. 튀어나온 USB 안에는 인류의 마지막 열쇠, '아르카디아'의 데이터가 들어있었다.
시간은 더 거슬러 올라가, 라파엘의 학창 시절—
도서관 구석, 산처럼 쌓인 책들 사이에 파묻혀 있던 라파엘에게 한 학생이 다가왔다.
학생: "저기.. 여기 앉아도 될까?"
라파엘은 대답 대신 책으로 시선을 돌리며 그를 외면했다. 친구 따위는 사치라고 생각하던 시절이었다. 하지만 그 학생은 개의치 않고 옆자리에 털썩 앉았다.
학생: "실례!"
라파엘이 당황해 쳐다보자, 그 학생은 활짝 웃으며 라파엘이 읽던 책을 들여다보았다.
학생: "무슨 연구할 생각이야!?"
누군가 자신에게 목적을 물어본 것은 처음이었다. 도서관 사서 선배가 조용히 하라며 주의를 주자, 그 학생은 두 손을 모아 미안하다는 시늉을 하며 작게 웃었다.
라파엘: "아직... 정하지 않았어. 넌...?"
학생: "생명! 내가 전에 키웠던 고양이가 수명이 짧아 하늘로 갔거든... 그래서 난 사람이든 동물이든 오래 살게 하고, 빠른 회복도 가능하게 해줄 거야!"
라파엘은 속으로 생각했다. '성공한 전례가 없는 무모한 연구군. 하지만... 예전에도 비슷하게 말하던 사람이 있었지.'
학생은 라파엘을 존경 어린 눈빛으로 바라보며 손을 내밀었다.
학생: "넌 대단한데? 하루도 빠짐없이 공부하다니 존경스러워! 난 '가브리엘'이라고 해! 넌?"
라파엘: "라파엘... 마크스."
가브리엘: "앞으로 잘 부탁해! 마크스!"
그것이 라파엘 마크스라는 차가운 천재의 생애에 찾아온 첫 번째 우정이었다.
다시 현재의 폐허 속에서, 라파엘은 가브리엘의 마지막 유언을 떠올렸다.
"너라면 나보다 강하게 성공할 수 있을 거야... 마크스..."
그는 지포 라이터를 손바닥이 피로 물들 정도로 꽉 쥐었다. 친구의 유지를 잇고, 배신한 마더 스피어에 대항하기 위해. 그는 자신의 지성과 아르카디아의 정수를 결합해 인류의 진화를 완성하기로 맹세했다.
고개를 든 그의 눈동자에는 더 이상 나약한 슬픔은 없었다. 오직 종의 운명을 짊어진 창조주의 결연함만이 서려 있었다.
그가 새로운 인류의 이름을 명명하며, 거대한 운명의 서막을 알린 12화가 막을 내린다.
"엘더(ELD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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