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투르니노 오르테스 아르마스 (미니) 미노소 아리에타
뉴욕 쿠반스—클리브랜드—시카고 화이트 삭스—세인트 루이스—워싱턴, 1946-1980
1950년대 위대한 외야수 중 한 명인 쿠바 혜성은 힘과 스피드 그리고 훌륭한 수비력을 갖추었다. 시카고에서 뛴 최초의 흑인 선수, 로베르토 클레멘테의 영웅. "그는 모든 라틴계 사람들의 재키 로빈슨이었습니다,"라고 올랜도 세페다는 말했다. 다른 다섯 십여년 동안 메이저리그에서 뛰었다.(주석 40년대(49)에서 50년대, 60년대, 70년대(76시즌), 80년대(80시즌) 이렇게 50년을 뛰었단 얘기입니다.) Played in the Major Leagues in five different decades.
미니 미노소?
그래, 맞다. 미니 미노소.
내 생각에 그의 비등재는 야구 명예의 전당에서 가장 큰 구멍이다. 그가 살아 있을 때 명예의 전당에 오르지 못했다는 점은 솔직히 충격적이고 끔찍한 일이다. 그리고 배리 본즈나 로저 클레멘스, 피트 로즈, 슈리스 조 잭슨이 왜 명예의 전당에 오르지 못했는지 강력히 주장할 수 있지만, 미노소에게는 그러한 의견이 존재하지 않는다. 그는 위대한 선수였고, 선구자였으며, 야구에서 선을 행하는 강력한 힘이었다.
그가 홀에 있지 않은 매일은 명예의 전당 자체의 권위가 떨어지는 날들이다.
미노소는 25살(또는 28세 - 그의 생년월일은 많은 논란이 있다)이 될 때까지 메이저리그에서 주전 선수가 되지 못했다. 그 해 그는 시카고 화이트 삭스에 입단하여 시카고에서 뛴 최초의 흑인 선수가 되었다. 당시 아메리카 리그의 클리블랜드만 흑인 선수를 받아들였다. (세인트 루이스 브라운스는 47년에 잠시 허용했지만 재빨리 두 명의 흑인 선수를 내보내고 다시 백인팀으로 돌아갔다.)
시카고에서의 야구의 흑백통합은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엄청나게 중요한 이야기이다. 시카고는 미국에서 두 번째로 큰 도시였고 아프리카계 미국인들의 삶의 중심지 중 하나였다. 50만 명 이상의 흑인들이 대이주 기간 동안 시카고로 이주했고, 시카고는 여러 면에서 니그로 리그의 심장부였다. -예를 들어, 매년 동서 올스타 게임이 열렸던 곳이다. 미노소는 클리블랜드와 계약하기 전에 1947년과 1948년 동서 올스타에서 선발로 출장하는 3루수였다.
클리블랜드에 미노소를 추천한 사람은 할렘 글로브트로터스의 설립자 에이브 세이퍼스타인이었다. 그는 50년대 중반에 클리블랜드에서 잠시 투구할 호세 산티아고라는 이름의 투수를 스카우트하기 위해 왔다. 하지만 푸에르토리코 출신인 산티아고는 쿠바 팀 동료 미노소에 대해 계속 이야기했다. 그는 미노소가 카디널스와 계약하기 위해 노력했지만, 팀은 흑인 선수와 계약하는 것은 6년 더 걸릴 것이라 말했다. 세이퍼스타인은 미노소가 뛰는 것을 보고 즉시 클리블랜드의 빌 비크에게 보고했고, 빌 비크는 두 선수를 모두 영입했다.
미노소는 클리블랜드가 그를 영입했을 때 거의 확실히 메이저 리그에 진출해 있었지만 클리블랜드는 49년에 월드 시리즈 챔피언인 강력한 팀이었고 미노소가 플레이할 위치는 어디에도 없었다. 그들은 미노소를 트리플 A 샌디에이고로 보냈고, 그곳에서 그는 힘과 스피드를 살려 타율 .297을 기록했다. 1950년까지도 클리블랜드에 아무 변화는 없었다. 그래서 그들은 미뇨소를 샌디에이고로 돌려보냈고, 이번에는 더 많은 힘과 더 빠른 스피드로 .339점을 쳤다.
그 후 51년에도 여전히 클리블랜드는 여전히 미노소가 뛸 수 있는 곳이 없었다. 하지만 아메리칸 리그의 다른 팀에는 흑인이 없었기 때문에 트레이드 시장은 제한적이었다. 화이트 삭스는 흑백통합에 가장 가까운 팀이었다 - 전 니그로 리그 스타 밥 보이드와 샘 헤어스턴은 스프링 캠프 동안 팀을 감동시켰고 어느 시점 엔트리에 합류하는 것이 결정되었다 - 그래서 클리블랜드는 왼손잡이 투수이자 전쟁 영웅인 루 브리시를 다시 데려오는 삼각 트레이드로 미노소를 시카고로 이적시켰다.
마침내 매일 자유롭게 야구를 할 수 있게 된 미노소는 화이트 삭스에서의 첫 타석에서 홈런을 치며 자축했다.
어떻게 미노소가 1951년 길 맥도걸드에게 올해의 신인상을 빼앗겼는지는 여전히 불분명하다. 미노소는 .326/.422/.500을 기록하여 3개의 슬래시 라인 모두 맥도걸드보다 현저히 더 나았다. 40득점을 더 기록했고, 더 많은2루타, 더 많은3루타(14개로 리그 선두), 17개의 도루를 더 얻었다.(31도루로 리그 선두), 더 많은 볼넷, 더 적은 삼진을 얻고 5개의 포지션을 소화하며 화이트삭스가 필요로 하는 곳이면 어디든 갔다.
월드시리즈 우승 양키스에서 좋은 시즌을 보낸 맥도걸드에게 상이 돌아갔을 때, 화이트 삭스의 감독 프랭크 레인은 이성을 잃었다. 그는 미노소가 올해의 신인상을 수상할 뿐만 아니라 MVP투표에서도 요기 베라보다 더 낫다고 생각했다.
"물론 베라는 MVP를 타지 말았어야 했어요,"라고 레인은 말했다. “그는 최악의 날을 보냈어요. 안타도 못 쳤고, 던질 수도 없었어요."
베라는 타율 0.294에 27홈런, 타점과 득점으로 양키스를 이끌었지만 미노소가 더 가치 있는 타자였다는 것은 틀린 말이 아니었다. 레인의 요점은 그 상은 항상 페넌트 우승 팀의 선수들에게만 돌아가는 것처럼 보였고, 그는 그것이 불공평하다고 생각했다. 생각해보면 그것은 미노소의 경력에서 다룰만한 또 다른 주제이다. 그는 시카고의 선구자 어니 뱅크스와 함께 월드 시리즈에서 뛰지 않은 최고의 선수들 중 한 명으로 페넌트 우승 팀에서 뛰지 못했다.
그러나 뱅크스와는 달리 미노소의 업적은 간과되는 듯했다.
그는 53년에 .313의 타율, 100득점, 100타점 그리고 도루 리그 3위라는 멋진 한 해를 보냈다.
54년에, 그는 아메리칸 리그에서 최고의 선수였다 - 그는 타율 0.320/.411/.535, 119 득점, 119 타점을 기록했고 19개의 3루타로 리그 선두였다.
그는 56년에 .316을 치고, 다시 3루타로 리그 선두였고, 21개의 홈런을 쳤다.
그는 .310의 타율을 기록했고, 57년에 36개의 2루타로 리그에서 탑이었으며 골든글러브가 만들어진 첫해에 그 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그는 그 다음 해에 클리블랜드로 돌아가 .302의 타율과 24개의 홈런을 쳤다. 그 다음해에는 타율 0.302에 21홈런 92타점을 기록했다.
그리고 나서 그는 1960년에 시카고로 돌아가 또 다시 MVP에 근접한 시즌을 보냈고, 184개의 안타, 20개의 홈런, 105개의 타점과 함께 .311점을 쳤다.
그는 MVP를 받은 적도 없었고, 그렇게 근접한 적도 없었다. 이 상은 그 당시 거의 독점적으로 페넌트레이스 우승팀들에게 돌아갔고 정규 시즌 우승은 거의 양키스였다. 베라는 미뇨소가 MVP가 되었어야 했던 해인 54년에 다시 수상했다. 게다가, 이것은 모두를 무색하게 했던 미키 맨틀의 전성기였다.
1951년부터 1960년까지, 10 시즌에서 미노소는 .397의 출루율과 함께 .307의 타율을 기록였다. 그 기간 동안, 맨틀만 더 많은 득점을 했고, 맨틀과 베라만 더 많은 타점을 올렸고, 루이스 아파리시오만 더 많은 도루를 했고, 넬리 폭스만 더 많은 안타를 기록했다. 그들 모두는 명예의 전당 헌액자이다. 그는 그 중 어느 누구보다도 2루타를 많이 쳤다.
또, 스캇 심커스라는 SABR 연구원은 덧붙인다. 그는 미노소의 메이저 리그 안타, 마이너 리그 안타, 쿠바 리그 안타, 멕시코 리그 안타, 그리고 니그로 리그 안타를 합치자 4,073이며 이는 역대 7번째라고. 다음은 총 4,000개 이상의 프로 통산 안타를 기록한 선수 목록이다.
1. 피트 로즈, 4,769명
2. 타이 콥, 4,379
3. 스즈키 이치로, 4367
4. 헨리 행크 아론, 4,245명
5. 지거 스타즈 Jigger Statz, 4,093
6. 훌리오 프랑코, 4,074
7. 미니 미노소, 4,073
8. 데릭 지터, 4,059
9. 스탠 뮤지얼, 4,023
어떤가? 프랑코와 스타츠에 대한 에세이는 다음 기회에 얘기하겠다.
그리고 미노소는 시카고 최초의 흑인 선수이자 메이저 리그 최초의 흑인 라틴계 스타라는 엄청난 부담을 자랑스럽게 짊어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 모든 것을 해냈다. 데이비드 마라니스가 그의 훌륭한 책 "클레멘테"에서 지적했듯이, 전설적인 아프리카계 미국인 작가 웬델 스미스는 미노소가 플로리다 스프링 캠프에 갔을 때 그가 마주하는 것에 대해 썼다.
당신은 팀원들과 함께 지낼 수 없다.
당신은 운동 선수가 필요로 하는 종류의 음식을 먹을 수 없다.
당신은 흑인이 운전하지 않으면, 야구장에 가기 위해 아침에 택시를 잡을 수 없다.
당신은 먼저 특별한 허가를 받지 않고는 감독이 거주하는 호텔에 들어갈 수 없다.
당신은 시내 중심부에 있는 영화나 나이트클럽에 갈 수도 없고, 백인 팀원들이 즐기는 다른 일반적인 레크리에이션 시설도 즐길 수 없다.
당신이 수감된 곳에서는 숙박 시설이 제공되지 않기 때문에 훈련 중인 마을에 아내와 아이들을 데려올 수 없다.
당신은 설령 시설이 있다 하더라도, "흑인 전용"으로 지정되지 않는 한, 도시의 널찍한 해변이나 공원으로 데리고 갈 수는 없다.
당신은 여름 동안 먹고 지내는 메이저 리그의 도시에서는 보통 하는 어떤 것도 할 수 없다.
당신은 평소 같으면 눈에 띄기 부끄러울 동네에 살고 있다.
또한 미노소와 다른 흑인 선수들은 전화기가 없는 집에서 살았고 백인 호텔에 지내는 트레이너들의 치료를 받을 수 없었다. 백인 팀 동료들과 함께 어울릴 수도 없었다. 왜냐하면 그들은 일반적으로 흑인선수들이 머물고 있는 동네에 오지 않기 때문이다.
미노소는 너무나 유쾌하게 인내했다. 사람들이 야구와 역사에서 흑인이 얼마나 힘들었는지 종종 간과해오던 인생의 굴욕을 극복했다.
로베르토 클레멘테에 대해 말하며 그가 야구에 미친 엄청난 영향력 때문에 모든 팀에서 그의 번호를 영구결번하자는 의견들이 있다. 미노소는 클레멘테의 영웅이었다 미노소는 명예의 전당 토니 페레스의 영웅이었다. 명예의 전당 헌액자 올랜도 세페다는 라틴 아메리카인의 재키 로빈슨이라고 미노소를 칭했다.
미니 미노소가 명예의 전당에 없다는 것은 전혀 상상할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정말로 헌액 투표율에 가까워진 적이 없다. 그는 BBWAA 투표에서 심지어 25%도 받지 못했다. 퍼즐을 맞추려고 노력하며, 나(조 포스난스키)는 그의 명예의 전당 기록을 자세히 보았다. 그는 1969년 은퇴 후 처음으로 투표에 들어갔다.
그 당시, 명예의 전당은 스포츠를 통합한 선구자들의 영향에 대해 완전히 근시안적이다. 빌어먹을, 그들은 여전히 사첼 페이지를 명예의 전당에 선출하지 않았다. 준비가 된 지 몇 년이 지나서야 기회가 주어졌고 35세가 된 후 급격히 쇠약해진 미노소는 당시 명예의 전당 유권자들이 신경 쓰는 숫자가 부족했다. 그는 2000안타를 치지 못했다. 그는 커리어 평균 3할을 기록하지 못했다. 그는 겨우 6표만 얻었고 고려대상에서 제외됐다.
그리고 나서, 여러분이 아는 것처럼 미노소는 야구선수로서 이상한 두번째 인생을 보냈다. 빌 비크는 미노소가 적어도 50 세였을 때, 1976년 그를 화이트삭스로 3경기동안 복귀시켰다. 이것은 쇼였다. 비크가 좋아했던 그런 종류의 쇼. 그리고 1980년, 미노소는 또 다른 비크 쇼를 위해 다시 돌아왔고, 이번에는 그가 50년만에 경기를 했다고 말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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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n, as you might know, Miñoso had a strange second life as a ballplayer — Bill Veeck had him return to the White Sox for three games in 1976, when Miñoso was (at least) 50. It was a stunt, the sort of thing Veeck loved. Then in 1980, Miñoso came back again for another Veeck stunt, this time so it could be said he played in five decades.
그 후 1986년 명예의 전당 투표에 복귀했지만 그가 전성기를 보낸지 거의 30년이 되었다. 미노소는 무려 90 표를 얻어 약간의 지지를 받았지만 그건 근거가 없었다. 그의 전성기를 본 유권자는 거의 없었다. 그리고 그때도 미노소가 의미하는 바를 완전히 이애하지 못했다. 명예의 전당 베테랑 위원회가 마침내 아메리카 리그에서 뛴 최초의 아프리카계 미국인인 래리 도비를 선출한 것은 1998년이 되어서였다.
내 생각에 미노소가 명예의 전당에 입성이 가장 유력했던 시기는 2006년이었다. 당시 특별 위원회는 헌액 자격이 있는 나머지 모든 니그로 리그 선수들을 선출하기 위해 구성되었다. 그들은 17명을 뽑았지만 미노소는 후보에 포함되었음에도 불구하고 탈락했다.
위원회는 미노소가 니그로 리그에서 3년 밖에 뛰지 않았기 때문에 그에게 투표하지 않았다고 발표했다. 나는 그들이 좀 더 개방적인 사고를 할 수 있었다면 좋았다고 생각했다. 그는 니그로 리그 투표에 이름을 올릴만큼 충분히 오래 뛰었고 짧은 기간 뛰어난 니그로 리그 선수였다. 나는 그들이 그의 인생 전반과 영향력을 살펴보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2007년 미노소는 다시 후보에 들었으며 이번에는 명예의 전당 헌액자에게 표를 받았다. 아무도 선출되지는 않았고 미노소는 15퍼센트 득표에 그쳤다.
2009년 역사적인 시대 투표 후보에 들었어야 했지만 어떤 이유로 인해 제외되었다. 그는 2012년 황금 시대 위원회에 의해 후보에 들었고 16표 중 9표를 얻었다. 꽤 좋은 점수였지만 헌액에는 충분하지 않았다.
그는 2015년 황금 시대 후보로 다시 투표에 참가했고 이번에는 16표 중 8표를 얻었다. 미노소는 몇 달 후 사망했다.
나는 솔직히 왜 이것이 누구의 마음속에 있는 질문인지 이해할 수 없다. 모든 사람들이 마침내 깨어나 래리 도비를 명예의 전당에 선출한 지 23년이 지났는데,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린 것은 수치스러운 일이었다.
자, 얼마나 더 수치스러운 일일까? 미뇨소는 도비보다 더 나은 선수였고, 그는 같은 편견을 극복하고 마찬가지로 엄청난 영향을 끼쳤다. 그는 야구를 더 나은 경기로 만들었고 경기 역사상 사랑받은 몇 안되는 인물이었다. 로즈와 본즈, 클레멘스 및 나머지 위대한 인물들에 대해서는 논쟁할 수 있지만, 분명히 하자. 그들은 모두 미니 미노소 뒤에 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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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OUTSIDER 100은 스포츠 웹진 디 어슬레틱에서 조 포스난스키가 연재했던 연재물입니다. 명예의 전당에 들지 못한 선수 중 최고으
선수 100명을 뽑은 연재물입니다. 그 중 헤드라이너로 나왔던 미니 미노소를 올려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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