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niel Kendall, "Ready Aim Carry On (mashup)"
프롤로그: https://bbs.ruliweb.com/mobile/board/184992/read/80416
1편 (그리폰의 마음): https://bbs.ruliweb.com/mobile/board/184992/read/80417
2편 (안무 계획): https://bbs.ruliweb.com/mobile/board/184992/read/80675
3편 (요가): https://bbs.ruliweb.com/mobile/board/184992/read/80898
4편 (노래, 그리고 하르페이아의 마음): https://bbs.ruliweb.com/game/84992/read/81154
5편 (블랙 하운드의 마음): https://bbs.ruliweb.com/game/84992/read/81560
6편 (체력단련): https://bbs.ruliweb.com/game/84992/read/81561
7-1편 (흐레스벨그의 마음 上): https://bbs.ruliweb.com/game/84992/read/820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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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숭배하는 우상(idol)이 있는 자가, 다른 누군가의 우상이 될 수 있는가?
낑낑거리며, 땀을 뻘뻘 흘리며 연습실에서 뒹군 흐레스벨그는 고민했다. 원래의 그녀는 아이돌이라기보다는 그 아이돌을 보고 환호하는 팬이다. 우상이 아니라 우상 앞에 절하는 신도다. 그런 그녀가 다른 누군가의 아이돌 노릇을 할 필요가 있는가?
“난...그냥 모모쟝 덕질만 하면 되는데....”
그녀는 홀로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냥...그냥 방구석에 틀어박혀서 모모 애니만 틀어놔도 난 충분히 행복한데. 그거면 되는데. 무대 위에서 빛나지 않아도 되는데.
과연 그런 그녀에게, 아이돌이 어울리는 것일까? 밖에서는 고압적이고 딱딱한 군인, 안에서는 뱅글이 안경 끼고 모모베개 껴안고 망상하는 오타쿠. 안팎 어느 쪽을 봐도 그녀에게 아이돌과 어울리는 면모는 없지 않은가? 어느 쪽을 봐도 누군가에게 사랑받을 만한 모습은 아니지 않은가. 어느 쪽을 봐도....환영받을 만한 삶의 방식은 아니지 않은가.
‘어차피 난 누군가가 좋아해줄 만한 애도 아니고...’
남들에게 고압적인 태도는, 그녀 자신도 잘 알다시피, 그다지 친근한 모습은 아니다. 남들과 화기애애해지기에 좋은 행동방식은 아니다. 그러나 어쩔 수 없었다. 그녀는 지대공 위협으로부터 동료들을 지키기 위해 태어난 전자전기다. 그녀는 그렇게 만들어져 있다. 모두의 안전과 효율을 위해. 스카이나이츠들의 안전을 책임지기 위해. 거리감이 느껴질 만한 성격으로 만들어진 것은 그러한 역할을 갖고 태어난 그녀의 운명이다. 그녀는 애초에 남들로부터 사랑받는 건 체념한 지 오래였다. 이럴진대 언감생심 인간님이 이런 자신을 - 무뚝뚝한 군인으로서의 자신이든, 키모오타쿠로서의 자신이든 - 좋아해 주는 건 지나쳐도 너무 지나친 욕망이리라.
‘뭐..됐어. 거리두기가 익숙하지. 사랑은...사랑은 모모쟝만이 해주는 걸로도 충분해.’
그녀는 애써 합리화했다. 어쩌면 그래서 오타쿠 취미에 더 쉽게 빠져든 건지도 모른다. 모름지기 오타쿠란 스스로 사회에 거리를 두든 사회가 거리두기를 하든 혼자서 즐기고 사는 종자들이니까.
그런데 사령관과 전대장이 갑자기 인싸, 그것도 인싸짓의 대표 중의 대표격인 아이돌을 하란다. 모모가 매니징을 해준다는 것에 순간 혹해서 덥석 물긴 했지만, 그리고 그래서 모모 앞에서는 정말 신나서 (모든 시선은 모모와 덴세츠 바이오로이드들에게 고정한 채) 참여하긴 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눈치 빠른 모모님은 알아차리셨던 모양이다(정말 위대하시지 않은가. 역시 마법소녀다). 흐레스벨그에게 아이돌은 그저 명분에 불과했다는 것을. 모모님 때문에 이 일을 하지만, 속으로는 괴리감과 떨떠름함을 느끼고 있다는 것을.
“하아...모르겠다”
결국 지 혼자 머릿속에서 그런 고민을 하다 제풀에 지쳐버린 그녀는 – 그렇다. 혼자서 뇌내회로 씨게 돌리는 것도 오타쿠의 종특이다 – 연습실 바닥 위에 늘어지고 말았다. 모모쟝이 없는 연습실에서 이렇게 고생하는 건 처음인 것 같았다. 모모가 있을 때, 그러니까 그녀가 멤버들을 봐줄 때 흐레스벨그는 참으로 열심히 한다. 모모가 자기를 봐주길 바라니까. 모모가 매니저로서 뭔가 지도를 해줄 때 그녀는 침을 꼴깍꼴깍 삼켜가며 경청한다. 그분의 목소리와 몸짓 하나하나를 다 봐야 하니까.
하지만 모모가 퇴근하고 나면, 더 이상 그녀가 연습실에 남을 이유도 사라진다. 모모쟝이 없는데 여기서 아이돌이니 뭐니 하는 게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지금처럼 말이다. 그녀의 우상께서 제대로 된 모습을, 합당한 성과를 보여주지 못하면 덕질을 금지한다는 이야기를 하지만 않았어도...
“잠깐, 그럼 모모쟝은 내가 자기 덕질을 한다는 걸 이미 알고 있었...”
“레스벨! 여기서 혼자 뭐해!”
“흐르즉!”
어쩌면 모모가 자신의 추악한(?) 덕질 - 어, 뭐, 그녀가 남몰래 숨기고 있는 모모 19금 최면세뇌능욕 동인지를 생각하면 아주 틀린 표현은 아니다 - 의 전말을 이미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소름이 돋는 와중에, 갑자기 연습실 문이 벌컥 열리자 흐레스벨그의 입에서 자신의 이름 같은 괴상한 신음이 터져나왔다. 방금 전까지 자신의 부하가 자신의 더러운 취향이 아웃팅당했을 가능성에 공포에 질려있었다는 사실도 모른 채, 제비는 고개를 갸웃했다.
“점심시간은 휴식시간일 텐데? 휴식시간에도 연습한 거야?”
“아, 네...네”
“역시 레스벨, 언제나 근면해! 요새는 특히나 더 열심히야, 으응?”
제비는 뿌듯하단 표정을 지으며 팔꿈치로 흐레스벨그를 툭툭 찔렀다. 거기에 그녀는 약간의 죄책감을 느꼈다.
“역시 리더인 내가 진심을 다하면 그 마음이 전해지는구나. 정말 기뻐!”
“네에에....”
프니르는 활짝 웃었다. 그녀는 언제나 태양처럼 밝다. 흐레스벨그완 다르게. 그 모습에 문득 흐레스벨그는 거리감을 느꼈다.
“얘들아! 빨리 와! 소대장이 이렇게 열심히 하는데 너넨 부끄럽지도 않니!”
“시끄러, 리더. 밥 먹고 바로 뛰면 체해”
연습실로 블어오는 문 바깥을 바라보며 열심히 손을 흔드는 제비와, 그런 그녀에게 퉁명스럽게, 하지만 활기차게 응답하며 걸어오는 멤버들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녀는 갑자기 멤버들과의 거리감이 느껴졌다. 그녀와 다른 동료들과의 실제 거리는 수 미터도 되지 않았음에도, 느껴지는 거리감에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살짝 몸을 떨었다.
‘같은 스카이나이츠인데도, 이렇게나 다를 수 있는 걸까’
물론 스카이나이츠들은 다들 다르다. 각자 개성 확실하고 확 튄다. 하지만 그녀들에게는 공통점이 있다. 모두들, 십대 소녀처럼, 생기발랄하고 밝다는 것. 흐레스벨그만 빼고.
그녀는 자신의 두 가지 모습, 그러니까 늘 딱딱하고 고압적인 군인인 자신과, 음침한 키모오타쿠인 자신을, 저 바깥에서 활발하게 웃고 떠드는 동료들을 비교해보았다. 어쩐지 부자연스러워 보였다. 어울리지 않아 보였다. 인싸들 노는 데 잘못 끼어든 아싸 오타쿠 같아 보였다.
‘아이돌...이라.’
아이돌이라는 팀에서, 그녀의 자리는 어디일까. 점점 자신이 없어졌다. 모모와 함께하는 것은 좋지만. 그녀가 뒷받침해주는 것은 든든하지만. 자신이 잘 할 수 있을지 확신이 서지 않았다. 모모의 기대를 저버리고 못난 꼴만 보여주는 게 아닐까. 모모의 얼굴에, 그리고 스카이나이츠 동료들에게 부끄러운 결말을 가져다주는 건 아닐까. 어쩌면, 자신이 이걸 하는 것 자체가 모두에게 민폐일지도 모른다. 흐레스벨그는 의심했다. 자신이 너무 충동적이었던 게 아니었는지. 아이돌은, 그녀와는 정말 안 맞는 게 아닌지.
즐겁게 재잘거리는 동료들을 두고, 흐레스벨그는 말없이 뒷걸음질쳤다. 연습실에서 뒷걸음칠쳐봤자 어딜 가겠느냐마는, 갑자기 그녀는 여길 떠나고 싶어졌다. 혼자 있고 싶다. 혼자서...모모 동인지나 보면서 위로받고 싶다.
‘어울리지도 않는 아이돌 따위 하지 말고, 그냥, 조용히 덕질이나 하면 좋았을걸.’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떨구었다.
‘나는, 그런 바이오로이드인걸.’
...
흐레스벨그의 추진기가 으르렁거렸다. 단독으로 지상 병력의 지원을 나가는 건 오랜만이다. 그녀는 레이더에 뜬 호드 팀의 좌표를 재확인했다. 수색정찰을 나간 앵거 오브 호드에게서 지원 요청이 들어왔고, 사령관은 지난 번 도촬 건으로 탈론페더를 영창에 보낸 대신으로 흐레스벨그를 파견했다.
호드가 발신한 좌표가 점점 가까워 온다. 그녀는 호드 회선으로 주파수를 맞추고 통신을 시도했다.
“송신. 여기는 EB-48G 흐레스벨그, 코드 넘버 181. 입감 확인바람”
“하핫, 이게 누구야, 전장의 아이돌 아니야?”
“흐즈극”
대뜸 튀어나온 호탕한, 그리고 예상치 못한 대답에 흐레스벨그는 그만 자기 이름과 닮은 헛바람 새는 소리를 토했다. 아이돌이라니. 그리고 전장의 아이돌이라니. 어쩐지 굉장히 폭.풍.전.야.같은 느낌이 든다. 바로 얼마 전 연습실에서 했던 생각이 떠올라 그녀의 얼굴이 새빨개졌다. 아무도 보는 이 없는 단독 임무라 다행이다.
“야! 워울프! 이젠 통신 프로토콜도 까먹냐! 통신보안, 여기는 퀵 카멜 42번. 수신 양호...지만, 어, 뒷말은 잘 못 알아들었다고 알림.”
못 알아듣는게 당연하다. 당황해서 튀어나온 신음소리였으니까.
“무무무..무관한 메시지였다 알림. 그보다 상황은 어떻습니까?”
“어. 놈들이랑 대치중이야. 젠장. 목표물은 부쉈으니 빠져만 나가면 되는데.”
카멜이 워울프의 말을 받았다.
“놈들의 재퍼와 디텍터가 문제야. 지원사격은 해줄 테니 재머 한방 떨궈 줘.”
흐레스벨그는 입맛을 다셨다. 대공 무력화에 쓰는 장비들로 전파를 교란하면, 놈들의 레이더도 조준 시스템도 먹통이 될 터다. 그러면 호드가 날뛸 공간이 생기리라.
“라져 댓. 엄호해주세요”
“그래! 잘만 해주면 콘서트 꼭 갈 테니까! 아 물론 잘 안 해줘도 갈 거지만”
“넌 쫌 진짜 이런 상황에서도 놀 생각만 하냐!”
“그럼 안 놀면 대체 무슨 낙으로 싸우고 무슨 낙으로 살아가지, 카멜?”
“넌 너무 놀잖아!”
“헤! 오르카 제일의 노는 년이 나다!”
“자랑이다, 으휴”
“이 오르카 제일의 노는년이 그런 자리에 빠질소냐!”
“넌 좀 자중해도 될 것 같아”
“오르카 첫 아이돌 공연 보기 전엔 절대, 즈어어얼대 못 죽는다!”
“아 뒷부분은 인정.”
어차피 워울프에게 ‘살아가야 할 이유’를 대보라면 수천가지도 넘게 대겠지만, 아마 이번 공연 보고 나서는 ‘두 번째 공연을 보기 전엔 못 죽는다’고 할 거다. 통신으로 들려오는 둘의 꽁트를 들으며 흐레스벨그는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정작 그 ‘아이돌’할 자신은 그걸 별로 즐거워하지 않는데, 관객들이 자기들 혼자 저렇게 들떠서는...
“....이돌, 아이돌? 들려?”
아이돌 생각을 하느라 잠시 딴 데 가 있던 생각이, 아이돌을 부르는 소리에 퍼뜩 다시 전장으로 돌아왔다. 아, 이런. 군인 실격이다. 작전을 앞두고 허튼 생각이나 하다니. 흐레스벨그의 군인 쪽 인격이 오타쿠 쪽 인격을 질책했다.
“네, 들려요. 무슨 얘기입니까?”
“아, 이번 콘서트 때 칸 대장도 데려갈 거라고.”
작전과는 아무 상관없는 이야기였으나 흥미롭긴 했다. 타부대의 지휘관이 온다는 건 허투루 들을 일이 아니다. 군 장성이 방문한다 하면 언제나 발칵 뒤집히기 마련인 게 군대 아닌가.
“칸...대장님이오?”
“어. 지난 번에 사령관 따라 웬 도시에 갔다 온 이후로 대장이 어쩐지 의기소침하더란 말이지”
옆에서 한창 사격을 가하던 - 보이진 않아도 포성으로 알 수 있었다 - 카멜이 고개를 돌리고 대꾸하는 게 들렸다.
“뭐야, 너도 알고 있었냐”
“야씨. 너나 나나 대장 밑에서 짬밥 먹은 게 몇 년인데. 그런 것도 눈치 못 챌까”
“그래. 지난 번 그 폐허에서 돌아온 뒤로 좀 축 처져 보이더라. 그 칸 대장이.”
“우리한테 자세히는 말 안 하려는 것 같았지만, 헤, 차라리 늑대 코앞에서 고기를 구워라. 모를 수가 있나”
“그래서 같이 너네들 공연이라도 보여주면 좀 나아지지 않을까 했어”
“저희들요?”
“어어. 밝고 활기찬 애들이 조명빨 받으면서 뛰어다니면 칸 대장도 뭔가 느끼는 게 있지 않겠어?”
“자기도 뛰고 싶다는 욕구?”
“워울프 넌 생각이 그렇게 단순해서 안 되는 거야”
또다시 아웅다웅하는 둘을 두고 흐레스벨그는 생각에 잠겼다. 칸이라. 그녀가 이번에 사령관을 따라 마키나가 지배하는 도시로 갔던 것. 그녀도 모르지 않았다. 모를 수가 없다. 그녀 자신도 제로와 카엔을 데리고 영화 찍겠답시고 그 도시에 갔다가 온갖 이불킥 당할 일들을 저질렀으니까(그녀는 가급적 사령관이 자신의 그 모습을 잊어주길 바랬다). 칸 대장이 거기서 뭘 보았는지도 거기서 대충 들었다. 전쟁, 전우들, 사라지지 않는 상처들.
‘하지만, 밝고 활기차다라’
흐레스벨그가 거기에 포함될까. 물론 그녀가 좋아하는 것 - 예컨대 덴세츠 특촬물 시리즈 앞 - 에서는 누구보다도 신나서 방방 뛸 자신이 있지만, 그 외에서, 특히 무대 위에서 과연 그녀가 밝고 활기찰 수 있을까. 내가...내가 남들의 상처에 도움이 되어줄 수 있을까. 흐레스벨그는 그녀 자신을 의심했다.
“오케이, 아이돌, 여기는 워울프 331번, 육안으로 귀소 관측된다 알림. 입감했어?”
장난스럽게 느물느물하던 워울프의 말투에 예리하게 군기가 섰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호드 역시 군대고 또한 프로페셔널들이다. 그리고 그것이 의미하는 바는 하나였다. 재와 화약의 시간이 다가왔다는 것.
‘전투할 때는, 전투만 생각하자.’
흐레스벨그는 머리를 비웠다.
...
“헤에이! 전장의 아이돌~!”
“음, 그냥 흐레스벨그라 불러주세요”
“발음 어렵단 말이야. 꼭 흐즈믈르그라는 거 같고. 그리고 맞잖아? 하늘이라는 전장에서 싸우는 오르카의 아이돌! 스카이나이츠! 아냐?”
흐즈믈르그라. 사령관이 자신을 놀릴 때 쓰는 별명이 생각나 그녀는 골이 아파왔다.
재머가 명중하고 혼란에 빠진 철충 무리를 격퇴하는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빠져보이긴 해도 호드는 자기 할 줄 아는 건 제대로 할 줄 아는 군대고, 그 호드가 할 줄 아는 건 기동 타격전이다. 일단 흐레스벨그가 놈들의 조준장치와 레이더를 침묵시키고 호드가 적의 사격 걱정 없이 기동할 공간을 만들어 주자, 그 다음은 그녀가 뭐 손댈 것도 없었다. 내달릴 공간이 생긴 호드는 그 누구의 도움도 필요 없다.
워울프와 카멜이 만들어놓은 철층이었던 것들의 잔해 위에 흐레스벨그는 착륙했다. 워울프는 다시 예의 그 느물느물한 태도로 돌아와 스카이나이츠의 지원기를 맞았다. 그래도 타 부대의 군인이니 그에 맞는 예의범절을 차리려 애쓰는 흐레스벨그와는 너무도 딴판인 태도였다.
“헤! 덕분에 살았어. 까닥하다간 너네들 데뷔공연 못 볼 뻔했지 뭐야!"
“어...음, 다행이네요”
정작 흐레스벨그 자신은 그 아이돌이란 것에 떨떠름했지만.
“워울프! 다른 부대 애한테 너무 버릇없잖아! 자꾸 호드 이미지에 먹칠할래?”
짝하고 워울프의 등짝을 후려친 카멜이 흐레스벨그를 향해 미소지었다.
“미안, 보다시피 얘가 원래 좀 이렇게 막되어먹었어.”
“막돼먹다니! 그게 같은 부대 전우에게 할 소리...”
“그리고 도와줘서 고마워, 공연은, 음, 나도 기대하고 있으니까, 그때도 오늘처럼 멋있게 해줄 거지?”
“어....”
이 정도로 기대를 많이 받고 있을 줄은 몰랐는데. 흐레스벨그는 약간의 당혹감마저 느껴야 했다. 이 아이돌 프로젝트라는 거, 이렇게나 관심을 많이 받는 물건이었나? 그 기대 위에서 내가 춤추고 노래불러야 한다고? 남이 하는 걸 보는 게 아니라? 그녀는 얼마 전 연습실에서 느꼈던 것과 같은 두려움이 다시 한 번 와락 드는 것을 느꼈다. 연말 축제 때처럼, 영화감독을 하란다면 하겠다. 그녀 자신이 연기하는 게 아니니까. 모모가 무대 위에서 노래하는 것에 환호하라면 하겠다. 그녀 자신이 노래부르는 게 아니니까. 하지만...직접 하라니.
“저기...하지만...아무래도...”
그녀가 입을 옴죽였다. 한창 호드 이미지 문제로 카멜과 언성을 높이건 워울프의 고개가 흐레스벨그에게로 돌아갔다.
“응?”
“좀...부끄럽잖아요”
“뭐가?”
“그...아이돌....”
언제나 남들 앞에서 냉정한 포커페이스를 유지하는 그녀가 이렇게 우물쭈물하는 태도를 보이는 건 희귀한 일이다. 어차피 타부대 멤버니까 상관없겠지만...그만큼 그녀는 자신이 없었다.
군인으로서의 흐레스벨그와 오타쿠로서의 흐레스벨그 그 어느 쪽도 이런 것에 익숙하지도 적합하지도 않다. 흐레스벨그의 두 인격 중 어느 것도 이런 것에 어울리지 않는다. 군인으로서의 그녀도, 오타쿠로서의 그녀도 수치스러운 꼴만 맛보게 되는 것 아닐까. 그녀는...그녀는 모두를 실망시키게 되지 않을까.
“그게 왜 부끄러워?”
“어..네?”
워울프는 도저히 이해 못 하겠단 표정을 지었다. 흐레스벨그는 갑자기 돌아온 반문에 그만 어버버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 그녀의 답변을 기다리지 않고 워울프는 자신의 권총을 빙글, 돌려 보였다.
“야, 내 취미가 영화보는 거거든?”
이해할 만한 취미다. 흐레스벨그도 종종 혼자 틀어박혀서 '시들어진 무로마치의 꽃' 극장판이나 마법소녀 극장판들을 챙겨 보니까. 뭐 물론 그걸 남들 앞에 대놓고 자랑하진 않지만...
“특히 난 B급 쌈마이한 서부극이나 해적영화에 껌뻑 죽는단 말이지. 근데 그거 호드 방에 종일 틀어놔도 부끄러울 이유는 없다고 생각하는데”
“넌 좀 부끄러워해도 될 거 같아. 영화가 아니라 워울프 니가 말야”
“아무튼 내 말은,”
워울프는 흐레스벨그의 뺨을 쓰다듬었다. 갑작스러운 터치에 흐레스벨그는 움찔했다. 타부대에 대해 지나치게 거리낌없는 태도였던지라 카멜은 입을 떡 벌리고 황급히 머릿속으로 오르카로 돌아가서 쓸 시말서를 구상하기 시작했고.
“네가 누구건, 뭘 좋아하건, 어떤 바이오로이드건 간에 상관 없다는 거지. 옷 홀딱 벗고 사령관실 문 두드리는 지휘관도 있고, 사령관에게 술 진탕 퍼먹여놓고 SM 플레이 거하게 즐기는 년도 있는데 뭐.”
“야....전자는 아스널 대장님 얘기고....후자는 니 얘기잖아!!”
“그런 거에 비하면 오타쿠 같은 건 약과고,”
“흐즈극”
아...알고 있었나? 역시 그 도시에서 너무 날뛰어서 들통난 건가! 이미 과거에 티를 내도너무 냈던 숨덕(이라고 스스로는 생각하는) 흐레스벨그는 몸을 떨었다. 그러나 워울프는 진짜로 그런 거에 신경쓰지 않는 거 같았다. 어쩌면, 오타쿠도 그냥 지나가다가 우연히 든 예시인지도 모른다. 워울프 본인도 어찌 보면 영화 오타쿠 같은 것이니...
“그리고 진짜 중요한 건 네 공연을 기다리는 년들이 있다는 거지.”
“예?”
“내가 멸망전 영화들을 왜 볼 거 같냐?”
다시 영화 이야기가 나왔다. 꼭 선문답 같다. 워울프가 선문답을 알 리가 없으니 이것도 어디 멸망전 B급 영화에서 본 게 틀림없다.
“당연히 너무 재밌기 때문이지. 매 한 편 한 편이 너무 기대되고 다음 영화는 뭘까, 하는 생각에 가슴이 두근거려. 가끔은 잠도 못 잘만큼.”
“탈론페더랑 비슷하네. 걔는 도촬사진에 야동이지만. 에휴. 우리 부대는 정상이 없어.”
고개를 감싸쥐는 카멜을 무시하고 워울프는 말을 계속했다.
“그래서 내가 죽을 수가 없는 거야. 당장 피토하고 쓰러져 죽을 거 같은 상황에서도, 난 돌아가서 씻고 장고(Django) 후속작을 봐야 하거든”
“네...네”
“알겠어? 너도 오르카 누군가의 장고라고.”
문득, 흐레스벨그는 기시감을 느꼈다. 이 비슷한 얘기를 어디서 들었었는데.
‘아, 이거, 프로듀서가 했던 밧줄 이야기다’
프로듀서가 그리폰에게도 해주었다던 그 이야기. 살면서 밧줄 하나만 잡고 있으면 안 된다는 이야기. 살아가기 위해서는, 붙잡은 밧줄 하나가 위태로울 때를 대비한 다른 밧줄이 필요하다는 이야기.
‘하지만, 그걸로 충분할까’
오르카의 바이오로이드들이 정말 보고 싶을까, 재수 없는 군인이 춤추는 걸? 음침한 오타쿠가 노래부르는 걸? 진뜩 기대한 그녀들을 실망시키는 게 아닐까? 그러나 워울프는 씩 웃었다.
“야야, 걱정하지 마. 니가 무슨 바이오로이드건 뭔 상관이야? 어차피 여기서 아이돌 해본 애 아무도 없어. 당당해져. 그거면 충분해”
“충분하다고요?”
“어어. 최선을 다해 빛나라. 왜, 갭모에란 것도 있잖아? 늘 딱딱하던 애가 하이텐션되는 걸 보는것도 맛이지”
“윽”
“나만 아니더라도 너네들 공연 기대하는 애들 많어. 너네들 노래 부르는 거 보겠다고 아득바득 살아가는 애들이.”
“.....”
“그러니까. 기운 내라. 부끄러워 할 일이 아니라고. 너네를 바라봐주는 애들이 있는 건 오히려 대단한 거지, 아냐?”
워울프는 흐레스벨그의 어깨를 탁 쳤다.
“한바탕 멋지게 보여주라구.”
“아 또 멋있는 척 한다. 야-! 너 때문에 내 작문 실력이 는다 늘어! 시말서 말이야!”
“쟤만 입 다물어 주면 아무도 모를 거야.”
“퍽이나”
워울프와 카멜이 아옹다옹하며 떠나간 자리에 흐레스벨그는 잠시 그대로 서 있었다. 고개를 숙이고서.
차가운 군인 흐레스벨그가, 숨덕 오타쿠 흐레스벨그가 무대 위에 오를 수 있는가? 무대 위에 그녀를 위한 자리가 마련되어 있는가? 그녀의 두 정체성 중 그 어느 것도 활기차고 명랑하지 않다. 하나는 냉정하고 하나는 음침하다. 그러나, 그래도, 무대 위에 선 동료든, 무대 바깥에서 환호하는 관객이건, 그래도 그녀를 기다려 주는 이들이 있다면...
그들이 흐레스벨그라는 밧줄을 잡을 가치가 있었다는 걸을 보여주어야 하리라. 그건, 군인으로서의 흐레스벨그도, 오타쿠로서의 흐레스벨그도 너무도 잘 이해하는 것이었다. 갑자기, 흐레스벨그에게, 아이돌, 누군가의 우상이 되는 것의 의미가,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던 ‘인싸’들의 그 감성이 이해되기 시작했다.
그녀는 지대공 위협으로부터 대원들을 지키는 소대장기다. 누군가가 그녀에게 의지해 살아간다면, 살기 위해 그녀를 필요로 한다면, 지키는 자, 군인으로서 흐레스벨그는 그 의무를 다해야 한다.
그녀는 오타쿠다. 그녀의 우상, 매지컬 모모와 덴세츠 시리즈가 있었기에 그녀는 살아올 수 있었다. 모모는 그 아름다움과 블링블링한 큐티 하트 매지컬 파워로 마법소녀 시리즈를 덕질하는 게 충분한 가치가 있음을, 적어도 흐레스벨그에게는 그녀를 사랑할 가치가 있음을 보여주었다. 그렇다면 누군가가 흐레스벨그를 우상으로서 사랑한다면, 어딘가에 흐레스벨그 오타쿠가 있다면, 그리고 그로서 그 누군가가 살아갈 힘을 얻는다면, 그녀 역시 보여주어야 한다. 그녀를 사랑하기 위해 사는 것이 헛되지 않음을.
지금 이 순간, 군인으로서의 흐레스벨그와 오타쿠로서의 흐레스벨그는 동시에 이해했다. 받아들였다. 그녀가 아이돌을 해야 할 이유를.
그녀는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하아, 호오, 그리고 고개를 들어, 두 손을 입에 모아, 마치 서부영화의 한장면인 양 석양을 등지고 벌써 아득하게 멀어져가는 - 과연 고속 기동이 장기인 부대다 - 두 호드 병사들에게 힘껏 소리쳤다.
“호드 여러분-!”
지금껏 한 번도 이렇게 크게 소리질러 본 적 없는 것 같다. 이렇게 속 시원하게, 목청껏 외쳐본 적은 아마 평생 없으리라. 군인 흐레스벨그도, 오타쿠 흐레스벨그도 그럴 필요가 없었으니까. 하지만, 미리 연습해두는 편이 좋으리라.
“고맙습니다-! 아이돌-! 열심히 해볼게요-!”
무대 위에서는 이보다 더 크게, 더 뜨겁게, 더 찬란하게 외쳐야 할 테니까.
대평원 한복판에 선 흐레스벨그의 목소리가 멀리 울려퍼졌다. 이미 지평선 위의 점이 되어버린 그녀들이 흐레스벨그의 목소리를 들었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그래도 그녀는 미소지었다.
그녀도, 무대 위에서 빛날 수 있는 것이다.
그녀도, 사랑받아도 되는 것이다.
<계속: https://bbs.ruliweb.com/mobile/board/184992/read/828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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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삽입된 짤은 "황조롱이(kestrel)"님의 허락을 받고 삽입하였습니다(출처: https://bbs.ruliweb.com/mobile/board/184992/read/78001). 감사합니다!
삽입된 음악은 매쉬업(mashup, 두 개의 노래를 하나로 합쳐 편집한 곡)입니다. "Daniel Kendall" 이라는 아티스트가 작업한, "Ready Aim Carry On (mashup)" (2020) 이라는 곡인데요(출처: https://youtu.be/UVV9GX8R8oA), 원곡은 "Imagine dragons"의 "Ready Aim Fire" (2013)와 "The Score & AWOLNATION"의 "Carry on" (2020)입니다. 두 원곡 다 명곡이니 관심 가진다면 들어보시길. 저는 특히 후자를 좋아합니다.
중간에 언급된 흐레스벨그의 모모 19금 동인지 이야기는,
"정열폭발" 작가님의 이 짤에서 아이디어를 얻었습니다(출처: https://twitter.com/dickbomber/status/1330161673534115841)
(......)
1.
이번 편은 분위기가 좀 진지하고...좀 많이 길어졌습니다. 제가 흐레스벨그를 좋아하는 것도 있지만, 뭣보다 하필 겨울 이벤트 때 흐레스벨그가 비중 있게 나와버리는 바람에, 그리고 원래 소설에 들어가 있떤 호드 페어의 대장(칸이요)가 겨울 이벤트에서 너무 큰 인상을 남겨주는 바람에 이걸 반영하느라 길어진 감이 있습니다(소설을 읽어보시면 조금씩 반영되어 있는 게 보이실 겁니다).
사실, 겨울 이벤트 떄 연극이다, 모모 오타쿠 덕밍아웃이다 하고 워낙 족적을 크게 남기는 바람에, 그리고 칸이 워낙 임팩트를 크게 남겨버리는 바람에(워울프랑 카멜은 원래도 등장하기로 되어있었거든요) 이걸 소설에 어떻게 반영하지, 하고 고민해야 했습니다. 덕분에 흐레스벨그의 캐릭터성과 고민을 제대로 파악했는지, 제가 헷갈린 게 아닌지, 잘 되었는지 모르겠군요. 글이 굉장히 길어졌는데, 긴 글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흐레스벨그 편은 이것보다 훨씬 짧은 다음 편을 마지막으로 종료됩니다.
소설은 만화나 일러스트보다 접근이 힘든 콘텐츠입니다. 독자들이 문자를 읽고 스스로 상상하는 데 힘을 쏟아야 하거든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언제나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여러분의 호응해 주시는 덧글과 추천이 창작자들에게는 커다란 힘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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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오타쿠는....사회적 거리두기를 하기가 매우 쉽죠...원래도 그래왔거니와...사회가 알아서 거리를 두니까... 2. 칸의 PTSD가 너무 가슴 아파서 마키나를 고운 시선으로 못보는 사령관들이 많더군요 3. 그렇지요. 스카이나이츠 아이돌 하는 소설 시리즈는, 데뷔 공연 전까지 아이돌을 준비해가는 과정과 그러면서 한 명 한 명이 아이돌에 진심을 다하게 되는 모습이 중점이 됩니다. | 20.12.31 00:45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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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그러고보니 레스벨 너 소대원들 있잖아! 걔네 아이돌 2군 그룹으로 넣자!" "흐즈극" | 20.12.31 00:47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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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게...입에 착착 붙어서...그냥 써봤읍니다....ㅎㅎㅎㅎ | 20.12.31 13:15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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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정석이지요 ㅎㅎㅎ 좋아해수시니 정말 저도 기쁩니다 | 21.01.10 23:25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