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이 시1발 파랗다.
천장에 뚫린 커다란 구멍 사이로
하얀 새들이 날아다닌다.
연구소를 습격한 괴물들이 뚫어놓은 구멍일까,
참 크게도 뚫어놨다.
그 녀석은 무사할까…
나처럼 다치면 안되는데...
윽!
가슴 속에 머물고있던 고통이
곧 전신을 향해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통증을 중화하기위한 엔도르핀이
뇌에서 분비되고있다.
정신이... 몽롱해진다...
…아… 아아아... 엘라… 엘...라... 하얀 새...
천장의 구멍 너머로 하얀 새들이 날아다닌다.
새들이… 날아간다… 하하…
참 자유롭게도 날아다닌다.
지상의 난장판따윈
걸리적거리지도 않는다는듯이.
… 어쩌다 이 지경이 된거지...?
왜 나는 날아가는 새들을 보고 있는거지...?
엘라... 하얀 새야...
넌 지금 어디 있는거니..?
“죄송합니다, 볼튼씨. 실패했습니다.”
엘라는 영혼없는 용서를 구했어요.
“제가 더 용감했더라면...”
“거짓 반성은 그만 됐다, 엘라.”
맞은편에 서있던
배불뚝이 대머리가
엘라의 자책을 끊으며 말했어요.
“이게 네 한계라는 뜻이겠지.
기대도 안 했다.”
볼튼 소장의 빈정거림에
엘라는 고개를 휙하고 돌렸어요.
“병1신같은 년.”
남자는 혀를 차며 작게 읋조리고는
문을 향해 걸어나갔어요.
“또 실패야? 짜증나게...”
“어련하시겠어?
지금이라도 성공했으면
그게 더 놀랄 일이지”
“들인 돈과 시간이 얼만데 아직도...”
“역시 열화판은 어쩔수가 없나봐?”
웅성웅성
주변에 있던 다른 연구원들이
저마다 한 마디씩 내뱉으며
배불뚝이 남자를 따라 나갔어요.
‘내 잘못이 아닌데...’
남겨진 엘라는 절로 부아가 치밀어 올랐어요.
‘못하는 이유가 있는데...
다들 듣지도 않아.
내 속사정은 궁금하지도 않다 이거지?
결과뿐이야.
내가 필요한게 아니라
그냥 좋은 결과 하나만 필요한거지.
그럼 난... 난 도대체 왜 여기있는거지?
꼭 내가 필요 한것도 아닌데.
왜... 왜 난 여기 있는거야...?
난 왜 태어난거지...?
왜... 대체 왜...?’
입술을 피가 나도록 물어뜯으며
애써 울음을 참고있는 엘라.
그녀도 알고있었어요.
울어도 소용없다.
어차피 누구도 쳐다보질 않는다.
혼자다. 나 혼자서만 슬퍼하는거다.
그러니 참아야 한다.
강해져야 한다.
내 편은 아무도 없으니 참아야만 한...
“수고했어, 엘라.”
한 남자가 그녀에게 손수건을 건내더니
아무 말 없이 실험실을 빠져나갔어요.
갑작스런 순간에 잔뜩 고조되었던
그녀의 긴장이 바람 빠진 풍선처럼
쉬익하고 풀려버렸어요.
볼을 타고 내려오는 눈물도 닦지 않고
그녀는 떠나간 남자의 자리를
바라보며 의문에 잠겼어요.
‘... 누구지, 저 사람은?’
난 사람이 아니다.
나의 절반이 사람은 아니라는 뜻이다.
사람의 자식이자
바이오로이드의 자식,
멀쩡하지 않은, 유전병에 걸린 혼혈아란 뜻이다.
사람과 이종간의 번식행위에서 나온
자식은 필연적으로 유전 장애가
발생하기 마련인데
하필 내가 그 장애를 가지고 태어났다.
증상은 내가 다섯 살 때 나타났다.
고열, 구토, 오한, 발진.
작은 병원에서 큰 병원으로 옮기고
일반 병실에서 중환자실로 옮겼고
약물 치료에서 대수술로 심해졌다.
돈도 없고 신용등급조차 낮았던
아버지에겐 막대한 양의 병원비를
지불할 여력이 없었다.
옆에서 울부짖는 어머니가 아니었다면
난 그대로 꼼짝도 못하고
죽을 목숨이었다.
어머니께선 매달리듯이 비셨다.
살려달라고.
한 번 품에 안았던 우리 아이
어떻게 포기할 수 있겠느냐고.
제발 우리 아들 죽게 놔두지 말아달라고.
그렇게 사정사정을 하며 매달리듯 애원하시니
마음이 약해진 아버지는 긴 고민 끝에
수술동의서에 싸인을 했다.
열 몇 번의 대수술이 끝난 후
난 가까스로 살아날 수 있었다.
어머니는 날 보곤 뛸듯이 기뻐하며 안아주셨지만
아버지는 날 보곤 깊은 한숨만을 내쉬었다.
그럴만도 하지.
날 살리기 위해 아버지는
산더미만한 빚을 지고말았으니.
말 그대로 온 가족이 절벽 끝트머리에
매달린 상황이나 다름없었다.
바닥조차 보이지 않는
무저갱보다도 깊은 절벽에 매달린것처럼...
“엘라? 엘라? 내 말이 안 들리는게냐?
실험이 시작하고 몇 시간이 지났는데
지금 뭘 하고 있는거냐!
뛰어내려! 어서 뛰어내려!”
이어폰에서 들리는 호통소리도 들리지 않는지
엘라는 절벽 앞에서 덜덜 떨며 서있었어요.
‘높아... 엄청 높아... 어지러워...
저번보다 높아... 어두워...
어쩌지... 무서워... 죽을꺼야...
이번엔 진짜...’
“멍청한 년아, 시간 잡아먹지 말고
빨리 뛰어내리라니깐!!”
떨리는 두 손은 꼭 잡으며
엘라는 자포자기 심정으로
눈 앞의 절벽을 향해
있는 힘껏 몸을 날렸어요.
휙!
곧 엘라의 눈 앞으로 깊은 어둠이 펼쳐졌어요.
하늘에서 비춰지는 빛 조차 삼켜버릴
깊고 어두운 골짜기가요.
그녀가 공포에 질리는것도 무리는 아니었죠.
“엘라, 좌익이 접혀있다! 좌익을 마저 펼쳐라!”
아차! 귓가의 이어폰에서 들리는 고함에
그녀는 가까스로 정신을 되찾았어요.
“정신차려, 엘라!
하부로부터 곡풍이 불어닥치고 있다! 주의해!”
엘라가 날개에 정신이 팔린 사이
절벽 아래에서 갑작스레 휘몰아치는
돌풍이 곧 엘라를 덮쳤어요.
휘이잉! 퍼억!
거센 바람으로 인해 엘라의 몸이
절벽에 세차게 부딪히고 말았어요.
강한 충격으로 인해 엘라는 정신을 잃고
곧장 아래로 떨어지기 시작했죠.
“엘라? 엘라?
정신차려라, 엘라!
겨우 그 정도 충격으로 기절한거냐?!
엘라?
엘라?!
엘라아아아!!!”
철컹!
속수무책으로 떨어지는 엘라의 몸을
실험실의 드론이 잽싸게 날아와 낚아챘어요.
그녀의 서른 한 번째 실험이
대실패로 끝나고 말자
지령실에서 엘라에게 명령을 내리고있던 볼튼은
책상을 세게 내리치며 분노를 곱씹었어요.
“쓰레기같은 년...”
그 한 마디 욕설이 잠시 정신을 차린
하얀 새의 가슴 속에 깊이도 파고들어갔어요.
“쓰레기 같은 놈...”
아버지가 술에 취할 때마다 내뱉던 소리였다.
어마어마한 빚을 갚기 위해서
아버지는 밤낮으로 일을 하셨다.
새벽부터 저녁까지
상하차 노동자로서 일하셨고
저녁부터 밤까지
사설 용역 미화원으로서 일하셨고
밤부터 다시 새벽까지
파트타임 생산직 직원으로서 일하셨다.
살을 찢고 뼈를 깎는 고통을 매일 매일,
하루도 빠짐없이 겪으셨다.
그러던 어느날,
아버지의 몸에 이상이 찾아왔다.
몸이 돌처럼 딱딱하게 굳으시더니
호흡조차 제대로 가누지 못하시는게 아닌가.
급히 병원을 찾아갔고
다음과 같은 진단을 받으셨다.
후종인대 골화증.
후종인대가 돌처럼 딱딱하게 굳어
척추를 지나는 신경을 짖눌렀다.
앞으로 하루에 몇 번 씩
전신마비 증세가 찾아올 것이고
심심하면 호흡장애가 찾아와
목숨을 위협할 것이다.
의사로부터 수술 권고를 받는것도 당연했다.
1억 4천 정도 되는 수술비만 아니었다면
당연히 수술을 받았겠지만...
큰 절망에 빠진 아버지는 결국 모든것을
포기하고 매일같이 술을 퍼마셨다.
사회 복지사가 찾아와도
빚쟁이들이 찾아와 집안을 뒤집어도
아버지는 신경쓰지 않으셨다.
이미 모든것을 포기하셨으니.
어머니께선 포기하지 않으셨다.
푼돈 께라도 벌어보기위해
여기저기 돌아다니셨다.
허나 푼돈은 모아봐야 푼돈이라고
하루 벌어 이자를 갚고
하루 벌어 아버지 술값에 쓰고
하루 벌어 입에 풀칠이나 하고,
그 하루 하루가 지날수록
집안의 가세는 점점 기울어져갔다.
아버지의 병도 어머니의 절망도 더욱 깊어져갔다.
희망이 보이질 않았다.
아버지의 끝없을 절망은 곧 증오가 되어
나를 향해 퍼부어졌다.
쓰레기 같은 놈이라고,
너만 아니었으면
이렇게 망하진 않았을거라고.
솔직히 무서웠다.
저기 날 노려보며 서있는 아버지가 무서웠다.
날 죽일듯이 온갖 저주와 욕설을
퍼붓는 아버지가 무서웠다.
그런 아버지로부터 벗어나기위해
난 방 안의 낡은 옷장속에 숨어있곤 했다.
푹신한 이불 속에 파묻혀 있으면
마음이 절로 차분해졌다.
무서운 아버지도, 암울한 집안도,
어두운 앞날을 잊을 수 있는 그 곳이
내가 누릴 수 있는 유일한 안식처였다.
“역시 여기 있었구나.”
불이 꺼진 창고 안은 침묵이 감돌았어요.
방 한 구석의 크고 낡은 옷장 속엔
하얀 새가 숨어있었죠.
“어떻게... 아셨어요?”
그녀가 얼빠진 표정으로 물었어요.
“제가 여기에 있는건 아무도 모를텐데...”
“왠지 여기 있을것 같았어.”
남자가 말했어요.
“솜이불을 보관하는데는 여기밖에 없거든.
푹신한 이불 속에 있으면 마음이 안정되지?”
엘라가 말 없이 고개를 끄덕이자
남자가 손을 내밀며 말했어요.
“나도 그래. 자, 가자. 다들 널 찾고있어.”
“... 싫은데요?”
하얀 새가 조금도 움직이지 않고 말했어요.
“계속 찾으라고 해요. 난 가기 싫어요.”
엘라가 남자의 주먹을 살피며
건방진 태도를 보이고 있는데도
남자는 말없이 그녀를 쳐다보고 있었어요.
“때리든지 욕하든지 맘대로 하세요.
이제 그런것도 익숙해졌으니까...”
“...때렸어? 누가?”
남자가 조용히 말했어요.
하얀 새는 의외라는듯이
남자를 쳐다보더니
조심스레 말을 꺼냈어요.
“무슨 상관이에요?
어... 어차피 바이오로이드는
사람보다 튼튼하고 상처도 빨리 나으니깐...
얼마든지 때려보라 그래요.
샌님들 주먹질정도야 이젠 익숙하니까...”
남자가 한숨을 내쉬며 주저앉았어요.
그리고 그녀를 올려다 보며 말했어요.
“상관있어.”
“... 네?”
“익숙해지긴 개뿔이.
통각은 익숙해지는게 아니야.
육체가 고통에 굴복하는거지.
계속 스스로 괜찮다고
네 자신에게 거짓말을 하는거라고.
억울하지도 않아?
서럽지도 않고?
매주 서슬퍼런 절벽 위에서
뛰어내리라 강요당하고
그럴 때마다 여기저기
다치면서 돌아오고!”
“저... 전...”
“그런데도 너한테 돌아오는건 뭔데?
욕이나 얻어먹고 심하면
네가 말한대로 쥐어터지기나하고.
이게 정상적이라고 생각하는거야?
왜 당연하다는듯이 참고만 있는건데?”
“전...”
“왜 가만히 맞고만 있는거냐고?”
“저도...!”
“너 벙어리야?
말 못해?
왜 그렇게 바보처럼
가만히 맞고만 있냐니까?!”
“저도 안다고요!!!”
하얀 새가 마침내 터져버렸어요.
“저도 싫다고요! 다 때려치고 싶다고요!
무서워서 하기도 싫은 실험
억지로 하고 실패하면 뺨 맞고
욕 처먹고 진짜 거지같단 말이에요!!”
감정이 벅차올랐는지 엘라의 두 눈에서
눈물이 퍽하고 흘렀어요.
“근데 안 하면 더 심해지잖아요!
나 때문에 실험 결과가 반 년이나 지체됐는데
건방지다고, 싸가지없다고 하면서!
죄송하다고 빌어도 개 패듯 두들겨 패고는
방구석에 처박아 놓기나 하고!
나도 더 이상 하기 싫단말이에요!
다 꺼져버렸으면 좋겠다고요!!
씨1발 개새1끼들 다 죽여버리고싶다고요!!!”
남자는 엘라와 눈을 마주쳤어요.
푸른 수정같은 예쁜 눈망울에서
주륵주륵 흘러나오는 눈물들.
남자는 씩씩거리는 엘라에게
나긋나긋 조용히 말했어요.
“... 알고 있었잖아.
네 억울하고 슬픈 감정들
다 속에다 꾸역꾸역 억누르고 있었던거.
누구한테 말도 못하고
방구석에서 스스로
속만 썩이고 있는 것도.
네가 원해서 저지른 것도 아닌데
왜 너만 이렇게 고통받아야 하는거냐고.”
“... 흐윽... 흑... 으으으...”
“... 야, 꼬맹아.
괜찮아.
너도 알고 나도 알아.
네 잘못이 아니야.
저 개새1끼들이 아무리
지랄한다고 해도 변하는건 없어.
네 잘못이 아니야, 엘라.”
하얀 새는 눈물을 닦는 것도 잊은채
남자에게 달려들어 주먹질을 했어요.
“뭐냐고요, 진짜!
왜 이래요, 나한테 왜 이러냐고요!
울기 싫은데... 진짜 생각하기도 싫은데...
다 모른척 하고 싶은데 왜...
흐윽! 왜 생각나게 해요...
왜 나 아프게 하냐고요...
진짜, 흑! 진짜 싫어...
아저씨 진짜...
진짜... 으아앙!”
엘라는 그동안 억눌러왔던
모든 분노와 슬픔을 토해내듯
눈물을 터뜨렸어요.
그녀가 진정하기까지 몇 시간,
남자는 가만히 엘라를 안아주었어요.
끝내 완전히 지쳐버린 엘라는
남자의 품에 안겨 새근새근 잠을 청했어요.
하얀 새의 가슴 속엔
자신을 다정하게 안아주는 남자로부터
난생 처음 느껴보는 감정이
조용히 자리잡았음을 깨달았어요.
따뜻하고 포근하고 든든하게 보호받는듯한 이 느낌,
콩콩 뛰는 엘라의 심장박동으로 보아
어쩐지 싫지만은 않은 감정인가봐요.
가슴이 뜨겁게 달궈지는 느낌을 아는가?
인간의 심장은 위기에 처했을 때
분당 100회 이상을 뛴다고 한다.
아버지가 내 가슴을 무자비하게
짖밟는 바람에 내 심장박동은
아마 분당 140회까지
뛰어오르지 않았을까 싶다.
부러진 갈비뼈가 폐를 찌르는 바람에
고통의 비명조차 지르지 못했다.
폐를 찌른 늑골의 틈으로 기흉이 발생한 탓에
내 입에선 거친 쇳소리만이 나왔을 뿐이었다.
그렇게 짓밟히는 와중에도
내 머릿속엔 단 한 가지 생각만이 떠다녔다.
어떻게 하면 아버지께서 용서해주실까,
어떻게 하면 아버지께서 날 살려주실까,
어떻게 하면... 어떻게 하면...
무엇을 잘못했는지도 모르면서
일단 용서부터 구할 생각을 했다.
감당할 수 없는 고통이
내 마음을 꺾어버린것이다.
그러던 중 갑자기 현관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심신이 지친 상태로 돌아온 어머니셨다.
그 분께 나와 아버지는 참 좋은 광경을 보여드렸다.
어머니께서 처참한 모습으로 누워있는
날 보시더니 비명을 지르며 달려와
아버지를 세게 밀어 넘어뜨리곤
다친 나를 꼭 끌어안으셨다.
아버지는 넘어진 채로 버둥거리며
어머니를 향해 믿을 수 없다는듯이 말하셨다.
지금 날 밀친거냐고,
어떻게 감히 자신을 해치려 든거냐고.
어머니께선 말이 없으셨다.
아버지는 가까스로 일어서시더니
조용히 다가와 명령을 내렸다.
가만히 있으라고.
씨1발 배은망덕한 년이라고 하면서
어머니의 머리카락을 쥐곤
사정없이 주먹을 갈기셨다.
코뼈는 터지고 이빨이 부러져도
어머니께선 조금도 움직이지 않으셨다.
상처입은 날 꼭 끌어안은 채
아버지의 폭력을 가만히 받아들이셨다.
아버지께선 주먹을 휘두르며 소리쳤다.
널 위해 모든걸 버렸다고,
부모고 형제고 집안사람이고 뭐고
다 버리고 너와 함께 했다고,
모두가 손가락질하고 비웃었어도
너만 있다면 다 상관없었다고.
그런데 씨1발 애새끼 하날 싸지르더니
이제와서 날 배신하는거냐고 소리치셨다.
눈물을 흘리시면서
병1신이 된 네 남편따윈 잊어버린거냐고,
대답해보라고,
말 좀 해보라고 소리치셨다.
괴물같았던 아버지의 모습은 온데간데 없이
그곳엔 어린애처럼 울며불며
소리를 지르는 한 남자가
곁에 서있었을 뿐이었다.
어머니께서 조용히 말하셨다.
자긴 누구도 잊어버리지 않았다고,
당신을 버린 적도 없다고 하셨다.
그리 말하시곤 나를 꼭 끌어안으셨다.
지쳐버린 아버지께서 힘없이 중얼거리셨다.
날 보라고, 내 눈 피하지 말라고.
어머니께서 고갤 들어 아버지를 보셨다.
웃으라고 말하시니
어머니께서 힘없이 웃음을 지으셨다.
사랑한다고 말하라 하시니
어머니께서 기계적으로 사랑한다고 말하셨다.
아버지는 웃었다.
눈물을 흘리며 허탈하게 웃으셨다.
모든것을 잃은 표정이었다.
어머니와의 깊은 사랑이
한 순간의 꿈처럼 사라진듯이.
아버지는 고개를 들고 잠시 눈을 감더니
생각에 잠긴듯 가만히 있었다.
그리고 다시 눈을 뜨며 말했다.
죽이라고,
네 품에 안긴 아들을 죽이라고.
어머니의 숨소리가 순간 멈췄다.
어머니의 손은, 어머니의 손이
점차 내 목을 향해 다가오기 시작했다.
엘라가 카드 뭉치로 손을 뻗더니
잽싸게 카드 한 장을 뽑았어요.
착!
“3!”
맞은편의 남자 역시 한 장 뽑았어요.
“A. 이런, 또 졌네.”
“헤헤! 질문 들어가요!”
하얀 새와 남자가 블랙잭으로
진실게임을 하고 있었어요.
옷장에서의 만남 이후로
두 사람은 꽤 친해진것 같았어요.
“좋아하는 음식이 뭐에요?”
“짜장면.”
“짜장면?”
남자가 입맛을 다시며 말했어요.
“잡지에서 한 번 봤는데
되게 맛있어보이더라고.
한 번 쯤은 먹어보고 싶어.”
“에이, 그게 뭐에요.”
“시끄럽고 패나 돌려.
내가 이기면 난감한 질문을 할 줄 알아.”
남자의 말에 엘라는 킥킥거리며 패를 돌렸어요.
엘라가 패를 건내자 남자가 잽싸게 뽑았어요.
착!
“8! 무조건 이겼다.”
“음... 저런, 9 에요!”
“아이 씨...”
남자가 카드를 내동댕이 치자
엘라가 웃으며 질문했어요.
“아저씨는 예전에 무슨 일을 하셨어요?”
남자가 머리를 벅벅 긁으며
엘라의 질문에 답했어요.
“무슨 일이고 한 적 없어. 일곱 살 때 이후로
여기 실험실에 쭉 박혀있었거든.”
“? 그렇게 어릴 때부터 여기 있으셨다구요?
왜요?”
남자는 엘라의 질문에 답하지도 않고
카드를 향해 손가락질을 했어요.
“물어볼꺼면 카드로 이긴 다음에 물어봐.”
남자의 말이 끝나자마자 엘라가 카드를 뽑았어요.
“6 이요.”
남자가 씩 웃었어요.
“운수가 다 떨어지셨구만?
자, 음... 아이 씨...”
남자가 카드를 놨어요.
2.
엘라가 풋하고 웃자
남자가 툴툴거리며 말했어요.
“그래서... 질문이 뭐였지?
왜 그렇게 어린 나이에 여기 온거냐 였나?”
“음... 아뇨!
아저씨는...아저씨는
이곳 사람들이 관심을 가질 만큼
특별한 사람이셨나요?”
남자가 말없이 엘라를 쳐다보자
하얀 새는 긴장한듯 침을 꿀꺽 삼켰어요.
“... 얘기하자면 길어.
한 번 더 이기면 두 배로 말해주마.
자, 뽑아.”
“흠...”
착!
엘라가 카드를 뽑았어요.
“... 10이요.”
착!
“... 9.
특별한 병을 앓고 있었지.
유전병이야.
어머니가 바이오로이드셨거든.”
“그럼 치료 하시려고 여기 오신거에요?”
“치료는 끝났어.
더럽게 큰 병원에서.
그 때문에 아버지가 무리하게
대출을 받았지만.”
“그럼 빚 때문에...
어쩔수 없이 이 곳에 기증되셨...?”
턱!
남자가 패를 건냈어요.
엘라가 재빠르게 한 장 뽑고
남자가 마저 한장 뽑았어요.
“7 이요.”
“한 번을 못이기네... 4.”
“아싸! 어서 말씀해주세요!”
남자가 카드를 다시 섞으며 말했어요.
“아버지가 날 죽이려 했거든.”
“아, 그렇구나... 예?”
턱!
남자가 또 패를 건냈으나 엘라는 카드를 뽑지도 않고
남자를 쳐다보고만 있었어요.
“... 뭐 ... 뭐라고 하셨어요? 방금...”
“질문은 나중에.
뽑아.”
표정이 살짝 어두워진 엘라가
떨리는 손으로 카드를 뽑았어요.
“... 4 에요.”
남자도 카드를 뽑았어요.
그리곤 씨익 웃으며 카드를 내려놓았죠.
5.
“아깝네, 이제 내 차례다.
갑자기 내 과거를 캐묻는 이유가 뭐야?”
“...”
“궁금해서라고 해도 좀 당황스럽네.
내 과거를 캐묻는 사람은
이곳에선 네가 처음이거든.
왜 물어본거냐? 그냥 궁금한게 다야?”
하얀 새가 우물쭈물거리며 망설이자
남자는 자세를 가다듬곤 숨을 내쉬었어요.
그리곤 조용히, 엘라가 말을 하기를 기다렸죠.
잠시 뒤 생각을 정리한 엘라가
입을 열었어요.
“여기 사람이 아니시니까요...”
남자가 무슨 소리냐는듯 입을 벌리자
곧 엘라가 말했어요.
“여기 연구원들은 하나같이... 하나같이...
제 눈을 피하고... 말을 걸어도 무시했어요.
필요할 때만 한 두마디 건내고.
아무도... 제 말을 들어주질 않았어요...
아저씨만 빼고요.”
“그래서... 내가 누군지 궁금하다?
연구원도 아닌데 이곳에서 살고있으니까?”
엘라는 말없이 남자를 쳐다봤어요.
남자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어요.
“큭큭큭. 애도 아니고, 참...”
턱!
엘라가 남자의 손에서 카드 뭉치를 낚아채더니
곧 엄청난 속도로 카드를 섞기 시작했어요.
착착착착착착착착착!
그러더니 뚱한 표정으로 카드 뭉치를 내밀었어요.
탁!
“... 뽑아요.”
남자가 머쩍은 듯 뒤통수를 긁적이며 한 장 뽑았어요.
“어... 2.”
착!
“Q. 아저씨가 졌어요.”
엘라가 카드를 내려놓으며 단호히 말했어요.
“아저씨 차례에요.
아버지가 죽이려 들었다니,
그게 무슨소리에요?”
남자가 씁쓸한 표정으로 웃더니
엘라의 카드 뭉치를 건내받았어요.
“다음부터...”
착!
“밑장 빼기는 좀 연습하고 해라.
손이 빨라도 빈틈이 다 보여.”
남자의 손엔 카드 K가 들려있었어요.
엘라가 민망한듯 얼굴을 붉히며 딴 곳을 쳐다보자
남자가 카드를 만지작거리며 말했어요.
“뭐... 좋아.
딱히 말하고 싶진 않지만
진건 진거니까...말해줄게,
도대체 어떻게 된건지...”
“레프리콘, 내 말이 안들리는거냐?
네가 안고있는 놈을 죽이라니까!”
바이오로이드에게 주인의 명령은 절대적이다.
어머니의 주인은 아버지셨다.
“나보다 네 자식이 더 중요하다는거냐?
어서 죽여!”
어머니는 날 내려다보셨다.
감정이 담겨있지 않은,
텅 빈 시선이 느껴졌다.
“이 씨1발 병1신같은 바이오로이드년아!
멍청히 있지 말고 어서 죽이라고!”
어머니의 손은 내 볼을 쓰다듬고 있었다.
곧 그녀의 눈에서 한 줄기 눈물이 흘렀다.
“...하! 흐하하하...!
고작 이딴 바이오로이드와 결혼하려고
내 인생을... 내 앞날을...
좋아, 그대로 가만히 있어라.
내 손으로 직접 죽여버릴테니까.
...
가만히 있으라고 했을... 너, 너!”
어머니는 결단을 내리셨다.
“윽! 끅... 이거... 놓지 못해... 이 씨1발년이...”
나는 어머니를 사랑했다.
“커억! 사... 살려... 크륵...!”
어머니도 그러셨을까?
“...”
...
“... 엄마...?”
그녀는 말이 없었다.
현관문을 두드리는 사람들의 고함소리에도
어머니를 부르는 내 울먹임에도
어머니는 가만히,
죽은 아버지를 내려다보고있었다.
모든 것을 잃은 표정을 지으면서.
“아...”
엘라는 아무말도 할 수 없었어요.
“어머니는 날 위해 아버지를 죽인거야.”
남자가 씁쓸한 표정으로 말했어요.
“바이오로이드로서 최대의 금기를 저지른거지.”
“그럼 어머니께선 지금...”
엘라의 말에 남자가 엘라를 쳐다봤어요.
“돌아가셨겠지.
비명소리를 듣고 쳐들어온
시티가드들 때문에
어머니와 나 둘 다 잡혀갔거든.
나처럼 실험실 뺑뺑이를 돌고있으실지도 모르겠네.”
남자가 슬픈 표정으로 카드뭉치를 집었어요.
“만약 거기서 아버지가 아닌 내가 죽었더라면
지금쯤 어머니는 아버지랑
행복하게 사셨을텐데...
나만 아니었으면... 그러면...”
“아뇨...”
엘라가 잠시 머뭇거리더니 조심스레 말을 꺼냈어요.
“아저씨가 죽었으면 어머님께선
절대로 행복해지지 못하셨을거에요.”
“...”
남자가 말없이 엘라를 쳐다봤어요.
하얀 새가 손가락으로 책상을 톡톡치며 말을 이었어요.
“아저씨를 살리기위해
금기까지 저지르신 분이잖아요..”
남자는 여전히 말이 없었어요.
“제가 어머님이 아니라서 확신할순 없지만
만약 다시 그 때로 돌아간다 한들
어머님께선 같은 선택을 하셨을것 같아요.”
“똑같다는거네, 결국.
나 때문에 아버지가 죽고
나 때문에 어머니가 살인을 저지른다는거잖아.
결국 다 내...”
“... 도대체 아저씨가 뭘 잘못했는데요?!”
엘라가 화를 참지 못하고
남자의 손을 강하게 쥐며 말했어요.
“그게 왜 아저씨 탓이라는거에요?
아저씨가 어머님더러 죽여버리라고 명령했어요?
아저씨가 일부러 병에 걸리고 싶어서 걸린거에요?
생각을 좀 해봐요, 생각을!
조금만 생각해봐도 답이 딱 나오는데
왜 자꾸 스스로 자책을 하고있는거냐고요!”
남자가 남은 한 손으로 얼굴을 가리려 하자
엘라가 재빠르게 남자의 손을 낚아챘어요.
그리고 그와 마주보며 앉아 말했어요.
“아저씨, 아저씨에게 일어난 일들은 정말 유감이에요.
제가 무슨 소리를 해도 아저씨께
힘이 되어드릴순 없을거고요.
제가 아저씨를 완전히 알고 있는것도 아니고
무슨 조언같은걸 할 만큼 똑똑하지도 않으니까요.
그래도 이것만큼은 분명히 알아요.
아저씨 잘못이 아니에요.”
남자가 피하려는듯 엘라의 시선을 외면했어요.
“아저씨 잘못이 아니에요.”
“... 글쎄.”
“날 봐요.”
엘라가 남자의 팔을 강제로 당기며
어떻게든 시선을 맞추려고 노력했어요.
“내 눈을 보라고요. 시선 피하지 말고.”
“...그만해.”
“아뇨, 안돼요. 외면하지 말아요.
아저씨 잘못이 아니에요.”
“그만 하라고...”
“아저씨 잘못이 아니에요.”
“그만해... 제발...”
“아저씨...”
엘라가 눈물을 흘리며 말했어요.
“아저씨도 알잖아요?
제발 죄책감 때문에 스스로를 해치려들지 말아요.
아저씨의 아픈 기억들이
아저씨를 좀먹게 두지 말라고요.”
“...”
“이제 그만 놓아줘요...
이미 충분히 고통받았잖아요?”
“...”
“아저씨 잘못이 아니에요.”
결국 남자는 무너지고 말았어요.
엘라의 손을 부여잡으며
남자는 감정을 표했어요.
“... ...
난... 나는... 정말...”
엘라는 아무 말 없이
남자를 따뜻하게 안아주었어요.
한 시간 후...
눈시울이 붉어진채로 남자는 엘라를 배웅했어요.
남자의 눈은 엘라가 싱긋 웃으며
인사를 하는 모습을 보고있었죠.
남자도 덩달아 입가에 웃음을 띄었어요.
“...고맙다.”
“뭐가요?”
“그냥... 다. 전부 다 고마워.”
남자의 얼버무림에 엘라는 피식 웃고말았어요.
“뭐야, 그게. 바보같아요.”
“... 엘라?”
엘라는 발길을 옮겨 떠나려다가
남자의 부름에 잠시 멈췄어요.
남자가 볼을 긁적이며 어색한 표정으로 말했어요.
“언제든지 상관없으니까...
오고싶음 또 와라.”
그 말을 듣고 엘라는 빵하고 웃음을 터뜨렸어요.
세상에서 가장 어이없는 말을 들은것 마냥.
“오지말라고 문 걸어잠궈도
부수고 들어갈거니까
블랙잭 연습이나 해둬요, 애송이 아저씨.
내일 또 봐요!”
엘라가 손을 흔들며 뛰어갔어요.
엘라가 저 너머 보이지 않을만큼 멀어지자
남자는 조용히 중얼거렸어요.
“참 이상하단 말이야.
왜 너에게 내 옛날 일을 말해준걸까?
...
넌 참...
뭐라 말하기 힘든 그게 있는거 같아.
고맙다, 하얀새야. 고마워.
정말 고마워.”
“죄송해요...”
어머니께서 잡혀가셨을 때
난 마지막으로 용서를 구했다.
못 들으셨는지 아니면 듣고도
모른 채 하신건지,
어머니께선 그저 세이프티의 인도하에
조용히 끌려가셨을 뿐이었다.
그 때 느꼈을 내 고통이 상상은 가는가?
응급실에 실려간 뒤 받은 치료로도
내 가슴 속의 상처만은 고치지 못했다.
위장이 뒤틀리는 고통이 밤마다 엄습했다.
하루에도 몇 번이나 죽고싶다는 생각을 했다.
어차피 내가 죽어도 누구 하나
슬퍼할 사람이 남아있지 않다는 사실이
나를 더욱 비참하게 만들었다.
그렇게 고통스러운 몇 일을 보내고나니
한 남자가 나를 찾아왔다.
한껏 벗겨진 머리의 남자는 자신을
어느 연구소의 소장이라고 소개했다.
병원에 연줄이 조금 있는 덕분에
나에 대해 ‘우연히’ 알게 되었다고 말하며
자신의 연구소에 들어오지 않겠느냐고 말했다.
만약 승락한다면 병원측과의 합의하에
나를 사망처리로 해주겠다고 했다.
그렇게 한다면 내 남은 인생을
빚갚는데 쓰지 않을 수 있을거라고 하면서.
달리 선택권이 있겠는가.
나는 그 날로 어느 작고 보잘것 없는
실험실에 끌려가게 되었다.
그곳에서 난 몇 가지 검사와 실험을 받았다.
검사, 실험, 검사, 실험, 또 검사, 또 실험...
이후 그들이 말했다.
후두정엽과 측두엽의 활동성이
타 실험체에 비해 네 배는 뛰어나다고,
이 정도의 잠재력으로 몇 년을 공부한다면
그 결과는 실로...
...
다음이 기억 안 나네.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날 미치게하는 이 죄책감으로부터
멀어질수만 있다면 난 무슨 짓이든 할 수 있었다.
그들이 원하는대로 미친듯이 공부했다.
내 머릿속에 새로운 지식들을 쑤셔박았다.
곁에 누가 있던 무슨 말을 하건
절대로 돌아보지 않았다.
오직 앞만 바라보았다.
약간의 틈만 주어도
과거의 악몽이 다시금
나를 집어삼키려 들테니까.
그렇게 세월이 흘러갔다.
내 나이가 내 키를 따라잡고
내 머릿속은 온갖 잡다한 지식들로 가득찼다.
볼품없던 연구소는 더욱 낡아졌고
한 소녀가 연구소의 새로운 가족이 되었다.
...
엘라...
“자네가 여기 온지 얼마나 되었지?”
“그거 하나 묻자고 이곳에 부르신겁니까?”
“입 조심하지 그러나,
나이를 먹다보면 자잘한 시비도
그냥 넘기기가 힘들단 말이지.”
대머리와 남자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어요.
볼튼이 손에 들고있던 시계를
이리저리 돌려보다가
이내 짜증 난다는 듯
쓰래기통에 쳐박아 버렸어요.
쿵!
“보기엔 멀쩡해 뵈는데요.”
남자가 말했어요.
“약이 다 됐어. 쓸모가 없으니 버려야지.”
볼튼이 품 속에서 담배를 꺼내 물었어요.
“다시 얘기로 돌아가서...
자네가 여기에 온지 얼마나 됐지?”
“십 하고 몇 년은 지났죠.”
볼튼이 담배에 불을 붙이며 웃음을 터뜨렸어요.
“허허, 세월 참 빠르구만. 너무 빨라.
그렇지 않은가?”
남자는 말없이 볼튼을 보고있었어요.
“ ‘시간의 걸음걸이엔 세 가지가 있다.
미래는 주저하면서 다가온다.
현재는 화살처럼 날아간다.
과거는...’ ”
“ ‘영원히 정지해 있다.’
실러의 명언이죠?”
“정확하네.”
볼튼이 빈정거리듯 영혼없는 박수를 보냈어요.
“참 좋은 명언이야.
참 좋은 말이지.
그래, 현재는 화살처럼 무심히 날아가지.
돌이킬 수 없는 인생, 그렇기에 우리는
현재를 낭비하지 않고 살아가야 하는 법.
그렇지, 그렇고 말고.”
“... 하고싶은 말씀이 도대체 뭡니까?”
남자의 반문에 볼튼이 품 속의 무언가를 꺼내
남자 앞에 툭하고 던졌어요.
“자네는 어떤 인생을 살고 있는가?”
남자와 엘라가 함께 웃으며
카드놀이를 하는 모습이 찍힌 사진이었어요.
“... 언제 찍으신겁니까?”
“자네가 질문할 처지는 아니지 않은가.
대답이나 하게.
어떤 인생을 살고 있지?”
볼튼이 사진을 손가락으로 툭툭 두드렸어요.
남자는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이내 입을 열었어요.
“나쁘지 않은 인생을 살고 있습니다.
그녀가 저를 일깨워준 덕분이죠.
딱히 상관 없지 않...”
툭
볼튼이 또 무언가를 내려놓았어요.
어려운 영어와 숫자가 뒤섞인 종이 한 면,
실험 결과표였죠.
“...지만도 않군요.”
“엘라에 이어 자네마저
실험 성적이 바닥을 치고 있네.”
볼튼이 험악한 표정으로 그를 노려봤어요.
“그 열화판이랑 놀아난 이후로
똑같이 곤두박질을 치고 있단 말일세.
이해가 가나?”
남자의 표정도 똑같이 어두워졌죠.
“자네가 처음 이곳에 왔을 때
내가 했던 경고, 기억하나?”
“알게 뭡니까, 이젠 기억도 안 납니다.”
남자의 말에 볼튼이 한숨을 푹 내쉬었어요.
“허어... 이런 얼간이를 믿고
그 많은 돈을 투자했다니...
염병할.”
볼튼이 물고있던 담배를 내던지더니
신경질적인 손가락질을 했어요.
“쫒겨나고싶지 않으면
대가리 굴리기를 맷돌에 기름칠 한 것마냥
잘 굴려야 한다고 말했었지, 아마.
자네 살리려고 자네 부모가 빚진 사체 빚,
그건 기억하겠지?
보통 한 두 푼이 아니라서
빚쟁이들이 아직까지도
자넬 잡으려 벼르고 있어.
제 자식 죽인 놈은 잊어도 빚지고 튄 놈은
죽을 때까지 쫒아 개박살 내는게
그 바닥 규칙이지.”
남자가 입을 다물고 가만히 듣고있자
볼튼이 새 담배를 찾아 품속을 뒤적였어요.
“어디있는거야, 옘병... 어쨌든,
어깨 너머로 배운 서당 개 마냥
계속 건방지게 주절 주절거렸다간...”
“말씀 끝나셨으면 이만 가보겠습니다.”
남자는 표정 하나 바뀌지 않고
자리에서 일어났어요.
볼튼의 협박따윈 두렵지도 않은가봐요.
그 모습을 본 볼튼이
있는대로 얼굴을 찡그리더니
이내 웃음을 띄우며 혼잣말을 했어요.
“그러고보니...
연구소에 오고나서 몇 년이 지나고
자네 생일을 맞이해서
테마파크에 데려 간 적이 있었지.
이건 기억하나?”
마침내 품 속에서 담배를 찾는데 성공한 볼튼은
담배를 물고 불을 붙였어요.
“모모인지 뭐시긴지
그 때 유행하던
매지컬 사무라이 쇼를 보고
감정을 표하던 자네의 모습,
아직도 기억이나.”
남자는 나가려던 기색도 없이
볼튼이 하는 말을 잠자코 듣고 있었어요.
“사무라이가 대마왕의 목을
단칼에 배던 쇼를 보고
울며불며 야단을 치던 자네가
어찌나 우스웠던지, 하하하!
죽은 바이오로이드가 사람인줄 알고
야단법석을 부리던 자네 모습을 말이야!”
“... 그게 답니까? 아직도 시시한 옛날 얘기를...”
“이것 참...
그 다음 일도 기억나지 않는 건가?
자네 기억력하고는... 쯧쯧쯧!
테마파크엔 여러 구역이 있었지, 아마.”
남자의 표정이 삽시간에 썩어들어갔어요.
“...!”
“한 가지 의문이 들었지.
바이오로이드만 봤다 하면
시덥잖은 감정을 들어내는 자네의 모습,
딱 한 번이라도 강한 자극을 준다면
어떻게 이용해먹을 수 있지 않을까 하고 말이네.”
볼튼이 여유롭게 담배연기를 내뿜으며 말을 멈추자
남자가 초조한듯 볼튼을 재촉했어요.
“그래서 이 얘기를 꺼내는 이유가 뭡니까?
무슨 말을 하고싶으신 거냐고요?!”
“거 좀 진정하게, 얘기가 아직 안 끝났으니.”
볼튼이 귓등을 긁적이며 천천히 말을 이었어요.
“실험해 볼만한 가치는 있었지.
원래대로라면 미성년자는
출입 금지인 구역이다만
내가 또 그 구역 VVIP 회원 아니겠는가?
불안해하는 자네를 이끌고
마침내 도착한 장소가 바로...”
볼튼은 남자의 입으로 직접 말하게끔
일부러 뜸을 들였어요.
남자는 어쩔수 없이
그 이름을 입에 담고 말았죠.
“... C 구역.”
남자가 증오를 가득담은 시선을
볼튼에게 보냈어요.
“왠일인가? 자네가 과거도 다 기억하고 말이야.”
“그 일을 어떻게 잊겠습니까.
바이오로이드들을 죽이고
잔혹하게 고문하던 그 장소를...
어떻게 잊을 수 있겠냐고요...!”
남자의 말에 볼튼이 기분나쁜 웃음을 터뜨렸어요.
남자는 거슬린다는듯 소리를 질렀죠.
“뭐가 우숩습니까, 예?”
볼튼의 웃음은 멈출 기세도 없이
되려 껄껄거리며 커져갔어요.
“으하하하하하하하!!!
으흐... 으흐흐흐...!
... 휴우~ 나이를 먹으니
웃는것도 힘들구만 그래.”
남자가 이를 뿌득갈며 노려보는 시선도
무시한 채 볼튼은 새 담배를 입에 물었어요.
“C 구역의 그 ‘놀이’를 보여주며
몇 가지 으름장을 섞어 협박하니
자네 입에서 바로 죽는 소리가 나왔지, 아마?
‘살려주세요, 볼튼씨!
제발 살려주세요!
저 사람들을 구해주세요!
저렇게 고통스럽게 죽어가고 있잖아요!
시키시는건 뭐든지 할게요, 볼튼씨! 제발요오!‘
으하하하하하하하!!!
그깟 싸구려 바이오로이드 몇에게
싸구려 온정을 표하는 꼬락서니라니?!
크하하하하!!!
그것들 몸값을 생각하면
그 눈깔에서 흘리는 눈물이 아까울 지경이었지.
왜 그따위 싸구려들에게 온정을 표하는지
아직도 이해가 안 가네.
혹 자네 친부모와 관련이 있어서...?
어이구, 엣헴! 미안하네.
내가 그만 아픈 곳을 건드리고 말았군.”
“... 뭐가 다른 겁니까?”
남자가 조용히 반문했어요.
“사람처럼 생각하고
사람처럼 아파하고
사람처럼 느끼고
사람처럼 행동하는 생물이,
도대체 어떻게 사람이 아니라는겁니까?”
“바이오로이드는 사람이 아니네.”
볼튼이 웃음을 뚝 그치고
선을 긋는듯 말했어요.
“바이오로이드는 인간의 지배욕을
충족하기 위한 소모품이지.
자네가 끔찍이도 여기는
그 소녀도 다를 바 없고.”
하얀 새가 언급되자 남자의 눈가가
꿈틀거리기 시작했어요,
“이 일에 엘라는 무슨 상관이 있다고 나옵니까?”
“상관 있지. 있고 말고.”
볼튼이 책상위의 먼지를
툭툭 쓸며 나지막히 말했어요.
“내가 C구역의 VVIP라고 했지 않나?
단순 단골이라는 이유만으론
VVIP가 될 순 없는 법이지.”
“... 설마...”
“그 설마일세.”
볼튼이 비열한 미소를 지었어요.
“쓸모가 없어지는
바이오로이드 실험체를
그곳에 공급해주고 있었지.
이 사실은 나와 자네말곤
극소수만이 알고 있네.”
남자가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볼튼을 바라봤어요.
“... 어떻게... 어떻게 당신이...”
“내 마지막으로 경고하지.”
볼튼이 남자를 향해 단호히 말했어요.
“내 명령 한 마디면
그 계집애는 약간의 ‘실수’ 한 번으로
C 구역에서 한껏 귀여움 받는
더미 한 구가 되고 말걸세.
잘 알았나?”
“... 알겠습니다.”
“뭘 말이지?”
“그녀와 어울리지 않겠습니다.
어떤 접촉도, 어떤 대화라도
일절 거부하겠습니다.
오직 실험에만 집중하겠습니다.
됐습니까?”
“좋아.”
볼튼이 만족스럽다는듯 씨익 웃었어요.
“그만 나가보게.
... 아 잠깐,하나만 더.”
나가려는 남자를 볼튼이 불러 세웠어요.
“지금 나눴던 대화가 밖으로 세나갈 일은
절대 없을거라 믿네. 잘 알겠나?”
“그럼 모르겠습니까...”
남자가 퉁명스레 대답한 후
문을 박차고 나갔어요.
“젠장할...”
남자는 복도를 성큼성큼 걸어가며
중얼거렸어요.
“엘라... 엘라...
미안하다. 정말 미안해...
네 잘못이 아닌데... 빌어먹을, 왜...
왜 그 아이만 고통받아야하는거냐고...
제기랄...”
엘라의 실험이 실패로 끝났을 때
모두가 그녀에게 물었다.
왜 뛰어내리지 않는거니.
그녀는 울면서 대답했다.
“무서워요... 하기 싫어요...”
연구원들은 다시 말했다.
무엇을 원하냐고.
장난감? 인형? 간식거리?
원하는건 무엇이든 줄테니 말해보라고 했다.
엘라는 눈물을 닦으며 조심스레 말했다.
“집에 가고싶어요...”
연구원들은 화를 냈다.
바이오로이드에게 집이라니,
바보같은 소리를 하다니.
모두 엘라의 말을 진지하게 듣지 않았다.
단 한 사람도...
볼튼이 엘라를 소장실로 불러들였다.
몇 십 분이 흐르고
엘라는 볼튼과 함께 소장실에서 나왔다.
볼튼은 실험을 다시 재개하겠다고 말했다.
엘라의 표정은 썩 밝지 않았다.
안에서 무슨 소리를 들었을까.
그 날 이후로도 실험은 실패로 돌아갔다.
다음에도 다음에도
그 다음에도 다음에도 마찬가지였다.
엘라가 실험에 실패할수록
연구원들의 태도도 더욱 거칠어졌다.
병1신같다고, 열화판이라고
엘라 앞에서 고함을 치고 모욕을 했다.
그럴 때마다 엘라는 눈물을 흘리며
고개를 숙이고 죄송하다고 빌었다.
차가운 시선에, 날카로운 혐오에
깊은 상처를 받았을것이다.
계속해서 모두에게 미움을 받았던
엘라는 결국 스스로를 가둬버렸다.
누구에게도 마음의 문을 열지 않았고
누구에게도 다가가지 않았다.
곁에 누가 있더라도 무슨일이 있어도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
그녀는 처음부터 혼자였으나
이젠 정말로 혼자가 되어버렸다.
그녀 스스로가 스스로를 버렸으니.
... 어쩐지 익숙해보였다.
누구에게도 사랑받지 못하는
상처투성이의 고독한 꼬맹이라.
...
어느 날, 그녀가 실험에 실패하고
소장에게 욕을 처먹은 때가 있었다.
마음에 상처를 입고 다시 스스로를
가두려하는 그 때,
내가 손수건을 들고 그녀에게 다가갔다.
“수고했어, 엘라.”
더 이상 그녀를 내버려둘 수 가 없었다.
“잠깐만요, 아저씨!
잠깐만 기다려봐요!”
엘라가 소리를 지르며
남자를 쫒아갔어요.
남자는 그런 엘라를 무시하며 걸어갔죠.
“기다리라니깐요, 아저씨!”
탁!
엘라가 가까스로 남자를 붙잡았어요.
“왜 이래요, 갑자기?!
왜 무시하는거에요!
제가 뭐 잘못했어요?
저번에 카드 놀이 때
제가 이기고 막 놀려서 그런거에요?
갑자기 왜 그래요, 진짜!”
엘라를 보던 남자의 눈빛이 흔들리더니
곧 엘라의 팔을 뿌리치고
다시 걸어가기 시작했어요.
“아저씨!”
엘라는 다시 남자를 붙잡고
자신과 눈을 마주치게 만들었어요.
허나 남자는 시선을 떨궜어요.
“왜 그러냐구요, 진짜!
납득이 안 간다니까요!”
“... 놔라”
“말해요! 왜 그러는지!”
“놓으라고...”
“이유 들을 때까지 절대로 못 놔요.
빨리 말해보라고요!”
“놓으라고, 이 병1신같은 바이오로이드 새꺄!!”
엘라의 단호한 외침에
남자가 욕설을 퍼부었어요.
엘라는 순간 자신의 귀를 의심했어요.
“뭐... 뭐라고요...?”
“한 번 놀아준거 가지고 별 지랄을...
네가 뭐 특별해서 같이 놀아준거 같아?
그냥 하릴없이 심심해서 한 번 장난친건데
이래서 열화판은 어쩔수가 없구만?”
“예...?”
엘라가 절망적인 표정을 짓자
남자는 고개를 돌리며 말했어요.
“착각 좀 하지 마라.
거짓말 한 번 섞어서 어울려주니
금방 넘어와서는 아저씨, 아저씨거리며
해실해실 웃고나 다니고.
그리 멍청하니 매번 실험에 실패나 하는거지.”
“...”
엘라는 할 말을 잃은 채 남자를
붙잡은 손을 놓아버렸어요.
“난 내 일이 있고 넌 네 일이 있잖아.
제발 내 곁에 다가오지 좀 말라고.
방해되니까.”
“아니에요...”
엘라가 괴로운 표정으로 울고 있었어요.
그리곤 입을 열었죠.
“아저씬... 아저씬 그럴 사람 아니에요...
지금 어디 아파서 그러는거에요...
그런거야, 분명...”
“... 현실을 좀 파악해, 멍청아.
이제 지긋지긋하다고.
알았어?”
남자가 뒤를 돌며 차갑게 말했어요.
“넌 내 딸도 아니고
난 네 아버지도 아니라고...”
남자의 매정한 말 이후로
결국 모든것이 끝나고 말았어요
엘라의 웃음, 행복, 추억.
모든것이.
엘라는 오열을 하며
남자의 곁을 떠나갔고
남자는 제자리에 털썩 주저앉아
머리를 미친듯이 쥐어뜯으며 흐느꼈어요.
천벌이든 뭐든 다 달게 받을테니
지금 이 고통을 제발 잊게 해달라고요.
...
남자의 바람대로 ‘천벌’은
그리 멀리 있지 않았어요.
난 엘라를 버렸다...
그 아이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주고 말았지.
참 끔찍한 인간이 여기있었네.
이미 상처투성이인 아이에게
치명상을 입힌 꼴이었으니.
후우...
그 때 이후로 엘라를 멀리했다.
딱 한 번 소장 앞에서 욕설을 듣는,
완전히 부서진듯한 모습의
엘라를 보고 난 후 가슴이 너무 아파
차마 근처에도 있을 수 가 없었다.
밤마다 위장이 뒤틀리는 고통이
그 날 이후로 다시 찾아왔다.
부모님에 대한 죄악감에 더해
이젠 엘라에 대한 죄책감까지 들어왔다.
그래도 견뎌내야했다.
최소한, 최소한 그녀가
C구역으로 갈 일은 없었으니.
그녀가 날 원망한대도 좋았다.
날 평생 용서하지 않는데도,
그래도 상관없었다.
그녀를 지킬 수 만 있다면
난 뭐라도 할 수 있으니까.
“헉... 헉... 헉... 헉....”
남자가 급히 어딘갈 향해
달려가고 있었어요.
“거짓말... 거짓말이지...?
안돼... 안돼...!”
숨이 멎을듯 달려가던 남자는
마침내 어느 한 방에 다다랐어요.
쾅!
문을 박차고 들어가자
안에는 놀란 얼굴을 한
사람들이 몇 명 있었어요.
볼튼 소장 역시 그곳에 있었어요.
남자가 헉헉거리며 말했어요.
“허억... 소장... 이게... 무슨... 개... 같은...”
볼튼이 난감하다는듯
한 소녀의 앞을 가로막아 서며 말했어요.
“이 무슨... 자네 미쳤나?
귀한 손님들 앞에서 이게 무슨...”
“... 아저씨?”
볼튼의 뒤에서 여린 목소리가 들렸어요.
“개... 짓거리 하지마, 볼튼!
하라는대로... 했잖아!
엘라와의 사이도 정리했고...
더 다가오지 못하게... 상처까지 줬어!
그런데 왜 이제와서 약속을 어기는건데!”
“거 당연한 소리를.
실험체가 정상이 아닌데
우리로서 데리고 있을 이유가 있나?
이 년은 망가졌어.
자기 스스로 뭔갈 하고자 할
의지조차 남아있질 않다고!
나로서도 참 곤란한 상황이었는데
참으로 감사하게도
여기 테마파크 대리인께서
좋은 값에 그녀를 대려주신다고 하셨으니
이 얼마나 다행이지 않은가?”
“이 씨1발 개같은 돼지새1끼가...!”
“쯧쯧... 됐네 됐어, 그만 나가보게!
뭐하고있나, 이 사람 내보내지 않고!?”
남자는 자신을 붙잡는
보디가드들의 손을 뿌리치더니
볼튼에게 달려들어 멱살을 잡았어요.
“이 개새1끼야, 당장 취소해!
너 때문에 내가 애한테
무슨 소리까지 했는지 알아!?”
“컥! 이... 무슨...”
“씨1발 고통에 잠겨 슬퍼하고있던 애한테
거짓말만 늘어놓았어!
상처가 될 말들만 퍼부었다고!
나 때문에 눈물을 흘리던 엘라의 모습을
네가 알아? 아냐고!!”
“큭! 내가 알게 뭐야...
이봐, 뭘 보고만 있는겐가... 어서...!”
“이 개새...!”
퍽!
덩치 한 명이 남자의 뒷통수를 쳐 쓰러뜨리자
보디가드들이 일제히 달려들어
남자를 짖밟았어요.
오직 한 소녀, 엘라만이
재지를 위해 달려들었죠.
아저씨... 아저씨...
엘라의 목소리가 아득히 멀어져갈 수록
남자의 눈이 점점 감겨졌어요.
남자가 마지막으로 보았던 광경은
자신을 두들겨 패는 어깨들도,
목을 부여잡으며 기침을 하고 있는 볼튼도,
자신에게 뛰쳐오려는 엘라와
그녀를 제지하는 테마파크 대리인의
모습도 아니었어요.
창문 밖에서 날아오는
검은 물체의 모습을 끝으로
남자는 의식을 잃고 말았어요.
모두 그렇게 끝이 났다.
하늘은 시1발 파랗고
방 안은 시1발 씨뻘겋다.
내가 정신을 다시 차렸을 땐
이미 모두 갈기갈기 찢겨져나가고 난 후였다.
날 때리던 어깨들도,
테마파크에서 왔다는 놈도,
씨1발 역겨운 돼지새끼 볼튼도 모두.
하나 다행인 점은
시체들 사이에서 엘라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는 거.
무사히 도망쳤으면 좋겠... 윽...
끄아악!!!
...
허억... 허억...
아까 짖밟힌 가슴이...
으으으...
...
이제 끝인가?
내 인생은 이렇게 끝나는건가?
부모님을 죽게 만들고
시시한 연구소에 팔려오더니
한 소녀를 만나
그 아이를 웃게 만들고
울게도 만들고...
그러다 이렇게 죽어간다니.
참 병1신같은 삶이 따로 없네.
대체 무슨 의미가 있었던거지.
난... 내 인생은 도대체...
...
저... 저거...?
저거 설마...?
“아, 아저씨! 다행이다, 정신이 드세요?”
엘라가 구급통을 들고 오더니
남자의 곁에 앉았어요.
“도대체... 어떻게 된거니...?”
“그... 아저씨가 쓰러지고 나서
이상하게 생긴 괴물 같은게
갑자기 창문을 깨고 들어오더니...
그러더니 방안에 있는 사람들을
다... 다 쏴 죽였어요.”
엘라가 떨리는 손으로
구급통을 뒤적였어요.
“곁에 서있던 저는 안... 안 보였는지
내버려두곤 문을 부수고 나갔어요.
저는 무... 무서워서...
털썩 주저앉았어요.
근데 갑자기 고통스런 신음소리가 들려서
고개를 돌려보니까
아... 아저씨가 누워서...
피를 토하고...”
엘라가 진정이 되지 않는 듯
떨리는 손을 애써 부여잡았어요.
“그... 그래도 괜찮아요!
이거 봐요, 구급통을 찾아왔어요!
우린 살았다고요!
아저씨, 이제 다 괜찮아요.
아저씨가 예전에 했던 말들도
다 볼튼 때문이었잖아요?
저 괜찮아요. 상처 안 입었어요.
아저씨, 이제...”
정신없이 말하는 엘라의 손을
남자가 붙잡았어요.
그래, 아주 병1신같은 삶이었던 것만은 아니었군...
“엘라, 잘 들어...”
남자가 힘없이 말했어요.
“난... 곧 죽어... 오래는 못 버텨...”
“예... 예...?”
“아까 짖밟힌 가슴이... 커억!”
남자가 피를 토하며
가슴을 움켜쥐었어요.
“아저씨!”
엘라의 외침에도 남자는
말을 마저 이었어요.
“날... 날 치료하지마...
시간 낭비야...
그보다... 지금... 당장...”
“싫어요!”
남자의 말을 끊고 엘라가 외쳤어요.
“그런 말 하지 말아요! 무섭단 말예요!”
“엘라...!”
떨리는 남자의 손을 엘라가 붙잡았어요.
“이제 겨우 아저씨랑
있을 수 있게 됐는데...
왜... 왜 또 떠나려는거에요...”
엘라의 두 눈줄기로 눈물이 흘렀어요.
“이젠 다 싫어요...
더는 혼자있기 싫단 말이에요...
가지 말아요, 아저씨... 제발...”
... 이제 알 것 같네.
왜 내가 엘라에게 다가갔는지.
왜 이 아이를 버려두질 못했는지 말이야.
나 처럼 아파하던 그녀에게,
그녀에게 들려주고 싶었어...
내가 듣고싶었던 그 말들을,
그녀처럼 아파하던 나에게...
네 잘못이 아니라는 말을.
네 탓이 아니라는 그 말이 듣고싶었어...
너무... 너무 힘들었어...
너무 외로웠어...
너무... 아팠어...
분명... 너도 그랬을테지...?
... 고마워.
고마워 엘라.
정말 고마워...
내 탓이 아니라고 해줘서...
내 잘못이 아니라고 해줘서...
정말...
“엘라...”
남자가 힘없이 말했어요.
“괴물은 널... 허억...
우릴 건드리질... 않았어...
바이오로이드는...
살... 가능성이 있다는거야...”
“아저씨... 제발...”
“엘라...”
남자가 힘없이 손을 뻗어
엘라의 볼을 쓰다듬었어요.
“해 볼 만한... 윽... 도박이야...
넌... 살아남을 수 있어...”
“싫어... 싫어요, 아저씨.
차라리 그냥 죽을거에요.
나 혼자 살아서 뭐해요, 아저씨는 죽는데!”
엘라의 말에 남자의 손이
볼에서 어깨로 내려와 꽉 붙잡았어요.
“여기서 죽으면...
지옥에서... 너... 널 평생...
원망할거야...”
“...”
“죄 없는 네가... 허억... 죽으면 안돼...
넌... 허억... 넌 살 수 있어...”
“아저씨...”
“내가 널... 널 만날 수 있었던...
행운을 가졌던... 윽! 것처럼
네게도 좋은... 살아남은...
바이오로이드를 만날 수 있는...
행운이... 있... 있을꺼야.
그러니까... 포기하지마.
네겐 기회가 있잖아...
멍청히... 놓치지 말고...
잡아야지... 머뭇거리며 서있는...
눈 앞의 미래를...
... 울지 말고, 바보야...
자, 어서...
저기 날아가는... 저 하얀 새들처럼...
너의 그 날개를... 펼쳐...
저 하늘... 높이 날아오르렴...
넌 할 수 있으니까…
난 믿어…
널…
...
파란 하늘,
천장에 뚫린 커다란 구멍 사이로
하얀 새가 날아오르는 모습이 보였어요.
고통과 슬픔으로 가득했던
괴로운 과거를 극복하고
아름다운 날개를 펼쳐 힘껏 날아올라
저 푸른 하늘 너머로 떠나 사라져버렸답니다.
그녀가 날아오를 이 순간만을
나는 간절히 기다렸으니...
날아라, 하얀 새야. 날아!
아픔을 디딛고 일어선
너의 그 굳센 날개로
저 앞을 향해, 창공을 가르듯
힘차게, 당당히 나아가거라!
엘라!
이야기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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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노래 광고하려고 글 쓰는겁니다 ㅋㅋㅋ | 21.06.27 18:35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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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 창작을 위해서 고통받은 엘라 ㅜㅜ | 21.06.27 20:31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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ㅠㅠ | 21.06.28 00:29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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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림도 없다. 암! 아아아아아암!! | 21.07.07 12:41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