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것도 Rozen 님이 올리신 삼국지 관련 이야기입니다.
조조의 둘째 아들(첫째는 장수와의 싸움에서 죽은 조앙)이자 위의 첫 황제인 조비.
삼국지 관련 게임 등등으로 능력은 좋았으나 명이 짧은 군주로 꼽히는 조비지만 그 실상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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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나라 문제 조비.
그가 얼마나 배은망덕하고 쪼잔하고 사치스럽고 백성들을 쥐어짜던 군주였는지 일일히 열거하면 책 한 권 거뜬히 나올 거라고 함.
그 중에서 그가 저지른 막장 행각들을 소개해 보고자 합니다.
1. 예의와 개념이 없는 조비
(1)(220년) 갑오일에 왕(조비)이 초(조비의 고향)에가서 6군과 초지역의 부로들에게 읍의 동쪽에서 크게 향연을 베풀고 기악을 늘어놓고 여러 가지 놀이도 열게 하였는데, 관리들과 백성들이 축수를 하였고, 날이 저물어 저녁이 되어서야 파하였다. -자치통감-
잔치 열고 논 것 자체는 좋은데, 문제는 저 때가 아버지 조조의 삼년상 기간이었다는 겁니다.
상주 신분에 사람들 모아다 날새도록 놀아재낀 조비...
역사가 손성이 논평하길
'위의 왕이 이미 한의 제도를 따라 그 대례를 바꾸어 막중한 슬픔에 처해 있으면서도(상주신분 이면서도) 향연을 베푸는 음악을 전설하였으니, 이것으로 시작하는 위치에 있으면서도(조조의 후계자이자 황제의 신분이면서도) 왕도의 교화를 이루는 기초를 타락시켰으며, 선양을 받기에 이르러서는 한나라 황제의 두 딸을 취했으니,(조비는 자신이 폐위시킨 한나라 헌제의 두 딸을 취했습니다.) 이로써 왕조가 계속될 햇수가 멀리 가지 못할 것을 알겠고, 그 세대의 기한이 촉박함도 점칠 수 있었다.'
그 다음해에는
(221년 6월) 황제는(조비는) 종묘(조조의 무덤)가 업에 있기 때문에 낙양에 있는 건시전에서 태자에게 제사지내는데, 민가의 제례처럼 지냈다. -자치통감-
당신 아버지 위왕이었거든요...
(2)형주 뒷치기 이후 촉과 불구대천의 원수지간이 된 손권은 조비와 화친하고 오왕으로 책봉 받았습니다. 손권은 책봉에 대한 감사를 표하기 위해 신하 조자를 위나라로 파견합니다. 조자를 만난 조비는 손권의 사람됨과 오의 인재, 군사력에 대해 상당히 까칠하게 물은 다음 갖가지 귀중품들을 진상할 것을 요구했습니다.
작두향(약초), 큰 조개, 맑은 구슬, 상아, 물소 뿔, 대모(거북이), 공작, 비취, 쌈 오리, 장명계(닭)등 값비싼 사치품들이었는데, 오의 중신들은 기존에 진상하던 물품에는 규정이 있는데 조비가 요구하는 물품들은 예법에 맞지 않는다면서 일제히 반대의사를 개진했습니다.
그랬더니 손권 曰 '서촉과 일을 벌인 상황에서 위의 주군에 의지하여 생명을 부지하고 있소. 그가 구하려는것이 나에겐 기와장이나 돌일 뿐인데 어찌 아끼겠소? 또한 저 사람은 양암(제왕의 복상기간) 중인데도 구하는 것이 이와 같다면 어찌 함께 의를 말할 수 있겠소?'
권중달 교수(한글판 자치통감 번역자)가 주석달기를 '조조가 죽어서 탈상을 하지 않은 상태이므로 조비에게는 복상 기간이다. 이런 상황에서 사치품을 구하는 조비는 근본적으로 예의를 모르는 사람이므로 예의를 가지고 따진다는 것이 의미 없다는 말이다.'
2. 신하들을 괴롭히는 조비
(1) 조홍
애초에 조홍의 집안은 부유했으나 성정이 인색하여 문제(조비)가 젊었을때 재물을 빌리고자 했으나 거절당해서 이를 늘 원망했는데, 마침내 조홍의 빈객이 법을 위반했다는 이유로 옥에 가두고 죽이려고 했다. 군신들이 함께 조홍을 구하려고 했으나 구할 수가 없었다. 변태후(조비 어머니)가 곽후(조비 둘째 마누라)에게 말했다. "오늘 조홍이 죽는다면 내일 황제에게 조칙을 내려 너를 황후에서 폐하겠노라." 그래서 곽후가 울면서 여러 번 청하자 면직되고 관작과 봉토가 깎이는 것으로 그치게 되었다. -조홍전-
일찍이 조조가 서영에게 참패했을때 '천하에 저 홍은 없어도 되나 주공은 없으면 안 됩니다.' 라는 명언과 함께 조조를 구출했던 조홍. 그런 개국공신 5촌 아저씨가 젊었을때 돈 좀 안 빌려준 걸 황제가 될 때까지 잊지 않고 죽이려 든 조비...이 일로 조비는 인심을 꽤 많이 잃었다고 기록은 전합니다.
(2) 우금
7군을 이끌고 방덕과 함께 북상하는 관우를 공격했던 우금은 참패하여 사로잡히게 됩니다(포로만 3만이었다니 말년에 크게 날려먹긴 했습니다.). 이때 방덕은 당당히 죽음을 맞았으나 그는 목숨을 구걸하여 살아남았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조조는 우금을 30년간 알고 지냈지만 그럴 줄은 몰랐다며 탄식을 금치 못했지요.
관우를 죽이고 형주를 얻은 손권은 우금을 위나라로 송환시켰는데 마음고생이 심했는지 수염과 머리카락이 새하얗게 변한 상태였습니다. 조비는 그를 위로하고 장군직에 임명한 다음 손권에게 사신으로 보낼건데 그전에 무제(조조)의 무덤에 참배하라며 그를 업으로 보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미리 사람을 보내 능옥에 관우가 싸움에서 이기고 방덕이 분노하며 우금이 항복하는 그림을 그리게 했다.우금이 이를 보고 부끄러운 마음에 병을 얻어 죽었다. -우금전-
우금이 한 행동은 죽어도 할말 없는 짓이었고, 저 개인적으로도 우금은 남에게는 가혹하고 자신에겐 너그러웠던 소인배라고 생각합니다만, 처벌을 하려면 그냥 그 자리에서 정식으로 처벌해야 했지 저런 식으로 치졸하게 죽게 만드는건 군주로서 할 짓이 아니었습니다. 나 치사한 인간이니 알아서 기어라도 아니고...
우금 사후 우금에게 내려진 시호(예: 이순신의 '충무')는 여(厲)후. 시호를 짓는데 쓰이는 글자에는 저마다 다른 뜻이 담겨 있는데 이 '여(厲)'는 殺戮無辜曰厲 해석하면, 무고한 이를 마구 죽인 사람에게 붙는 시호입니다. 우금을 2번 죽인거죠.
(3)포훈
포훈은 매우 공정한 인물로 왕자 시절의 조비에게도 아첨하지 앉고 늘 공정한 태도를 유지해서 조비가 몹시 못마땅하게 여겼습니다. 그것 때문에 한번 면직 당하기도 했으나 그 마음가짐은 변함이 없었고 후에도 사냥을 즐기고 잦은 원정(전부 망했습니다.)으로 국력을 소진시키는 조비에게 바른 말로 직언을 아끼지 않자 조비는 그를 지방으로 좌천시켰습니다.
좌천당한 후 그가 저지른 아주 사소한 잘못이 조비에게 보고되었는데 조비는 그가 황제를 능멸한다며 잡아들이게 했습니다.
법에 따르면 '벌금'으로 끝날 죄에 징역 5년이 선고되자 신하들이 반박했는데
"포훈은 살려줄 만한 여지가 없거늘, 너희들이 감히 그에게 관용을 베풀려고 하다니 삼관 이하의 담당 관원을 체포하여 자간으로 넘기고 열 마리의 쥐와 같은 동굴에 있도록 하라." 태위 종요, 사도 화흠, 진군대장군 진군, 시중 신비, 상서 위진, 수연의 고유 등이 공동으로 표를 올려서 "포훈의 아버지 포신은 태조(조조)를 위해 공을 세웠습니다."라면서 포훈의 죄를 사면해줄 것을 청했다. 문제는 받아들이지 않고 포훈을 처형했다. -포훈전-
포훈은 굉장히 청렴한 사람이라 죽기 전 집에 남은 재산이 없었다고 합니다.
포훈이 죽고 20일후 조비도 죽었는데 역시 많은 사람들이 조비를 원망했다고 사서는 전합니다.
(4) 소칙
소칙이 문제를 수행하여 사냥을 나갔을 때, 나무 울타리가 공고하지 못하여 사슴이 달아나자 문제는 매우 노여워하며 교의(접의자)에 앉아 칼을 뽑아서 감독하는 관리들을 전부 잡아들여 죽이려고 했다. 소칙이 머리를 조아리고 말했다.
"신이 듣건대, 옛날의 성스러운 왕은 금수로 인해서 사람을 해치지는 않았습니다. 지금 폐하께서는 당요의 교화를 융성하게 하려고 하시면서, 오히려 사냥놀이를 하면서 이처럼 많은 관리들을 죽이려고 하시니, 우둔한 신하로서는 생각할 수조차 없는 일입니다. 저는 감히 죽음을 각오하고 사면할 것을 청합니다."
문제가 말했다. "그대는 충직한 신하로다." -소칙전-
충직한 신하라고 해놓고는 얼마후 타지로 좌천시켜버렸습니다. 소칙은 임지로 가던 길에 사망했습니다.
(5)양준
조비의 동생 조식과 친한 편이었던 양준은 조조가 태자를 세우지 않은채 신하들에게 둘에 관해 물었을 때 어느 편에도 들지 않은채 둘의 재능을 모두 언급하며 중립을 지켰습니다. 다만 조식의 재주가 아름답다고 언급한 적이 있었는데 조비는 그걸 절대로 잊지 않았습니다.
(222년) 문제(조비)의 수레가 완(宛)에 도착했을 때, 저자의 열기가 가득하지 않다고 생각하여 화를 내며 양준을 잡아들였다. 사마선왕(사마의)과 왕상, 순위가 양준을 구해주도록 청하며 머리를 조아리고 피를 흘렸으나 문제는 허락하지 않았다. 양준이 말했다. “나는 죄를 압니다.” 마침내 ■■했다. 사람들은 그의 억울한 죽음을 애통해 했다. -양준전-
그리고 저자거리가 한산하다는 이유로 양준을 기어이 죽이고 맙니다. 정말 뒤끝 하난 끝내줍니다.
(6)왕충
유비가 수저를 떨어뜨리는 명연기로 조조의 손아귀를 벗어났을때 조조의 명을 받고 유비를 공격했다 패한 적이 있는 왕충은(이때 유비가 조공이 직접 온다면 모를까 니들은 백명이 와도 어림도 없거든 이라고 했는데 진짜로 조조가 와버렸죠.) 젊은 시절 기근과 전란으로 굶주림에 시달리다 못해 인육을 먹은 적이 있었습니다.
조비가 왕충이 일찌기 사람을 먹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 때문에 어가가 출행하는 것을 수행할때, 광대를 시켜 무덤 사이에서 해골을 가져와 왕충의 말안장에 매달게 해 웃음거리로 삼았다. -위략-
신하의 아픈 과거를 웃음거리로 삼은 참으로 멋진 군주입니다.
(7)황권
유비의 한중전 승리의 공신 중 한 명으로 책략만 내면 크리티컬 히트였던 유비의 명참모 황권은 이릉패전때 길이 끊겨 퇴각할수 없게 되자 위에 투항합니다.
나중에 유비에게 황권의 가솔들을 잡아들이자고 건의하는 사람이 있었는데, 이에 유비는 '내가 황권을 저버렸지 황권이 나를 저버린 게 아니다.' 라는 명언과 함께 그의 가솔들을 전처럼 보살펴주었습니다. 황권이 촉에 남겨둔 아들 황숭은 훗날 제갈량의 아들 제갈첨, 장포의 아들 장준, 이회의 조카 이구와 함께 촉나라 최후의 항전을 이끌다 전사합니다.
황권은 위나라에서도 그 능력을 발휘해 사마의도 제갈량에게 보낸 서신에서 그를 칭찬한 바 있으며 거기장군까지 역임하게 됩니다.
유비가 죽었을 때 위나라 중신들은 모두 기뻐했지만 황권은 그렇지 못했습니다. 조비는 그가 도량이 있다고 생각하고 그를 놀려주려는 생각으로 사신을 보내 즉시 출두하란 명을 내린 다음 도착하기까지 계속 재촉하는 사자를 보냈습니다.
황권의 수하들은 조비의 의도대로 모두 놀라 혼비백산했으나 정작 황권은 안색이 전혀 변하지 않고 태연했다고 합니다.
(8)하후상
하후상이 애첩을 사랑하여 적실이 총애를 잃었다. 적실은 조씨였고 이 때문에 문제(조비)가 사람을 보내 애첩을 목졸라 죽였다. 하후상은 비탄에 빠져 제정신이 아니었고, 이미 첩을 매장했으나 다시 보고 싶은 마음을 이기지 못해 그녀를 보러 가기도 했다. -하후상전-
쓸데없이 남의 가정사에 참견한 조비 때문에 위나라의 숙장 하후상은 하루아침에 정신줄 놓고 네크로필리아(...)가 되었습니다. 결국 다음해에 병으로 사망했습니다.
3. 쪼잔한 조비
(1)조식이랑 친하면
순욱이 죽고, 순운(순욱 아들)은 조식과는 친하게 지내면서 하후상과는 화목하지 않았으므로 문제는 순운을 매우 미워했다. -순욱전-
동생이랑 친한 사람은 다 미워하는 정말 좋은 형님. 오죽했으면 자기 칭찬이 조비 귀에 들어갔다는 소식만 듣고도(조비의 동생들은 척박한 영지에서 평민들보다 크게 나을 거 없는 생활을 하면서 철저한 감시를 받았습니다.) 동생이 덜덜 떨까...
(2)유비의 사자
유비는 조공이 죽었다는 말을 듣고 속관 한염을 보내 글을 받들고 조문하게 하고 부중의 예물을 보냈다. 문제(조비)는 초상을 당한 것을 빌미로 화친을 구하는 것을 미워해 형주자사에게 명해 한염을 죽이고 사명을 끊었다. -위략-
유비는 위문하라고 보냈는데 조비는 화친을 청한다고 생각하고 죽여버렸습니다. 이해 못할 처사는 아니지만 솔직히 쪼잔해 보이는건 어쩔 수가 없네요. 유비가 듣고 참 기도 안찼을것 같습니다.
이때 유비가 보낸 물품이 그 이름높은 촉금(촉나라 비단. 위도 오도 그저 헤~하고 입 벌어지게 만들었던 명품)이었는데 그건 아마 지가 챙겼을 거라는데 올인.
4. 부인에 대한 태도
원래 원소의 아들 중 하나인 원희의 아내였지만 원소가 패하고 도망치면서 남겨졌다가 조비의 눈에 들어서 조비의 아내가 된 진씨(삼국무쌍의 견희).
일단 그 후에는 조비는 진씨를 무척 아꼈다고 합니다. 조예와 동향공주가 진씨에게서 나온 자식.
그러나 조비로부터의 총애는 점차 희미해져 갔고, 결국 후에 곽귀인(후의 곽황후)나 이귀인, 음귀인으로 조비의 관심이 돌아가지요.
또한 후한의 헌제의 두 딸을 입궁시킨 것도 있고. 이에 비탄한 진황후는 조비에 대해 원망하는 말을 했고, 조비는 이에 화가 나 황초(黃初) 2년 6월에 진황후에게 자결을 명합니다.
진황후는 조비가 죽은 후 제위를 이어받은 조예에 의해 명예가 회복되기는 하지만.
5. 형제들에 대한 가혹한 대우
순욱이 죽고, 순운(순욱아들)은 조식과는 친하게 지내면서 하후상과는 화목하지 않았으므로 문제는 순운을 매우 미워했다. -순욱전-
조비는 후계자 선정에서 가장 큰 경쟁자였던 동생 조식을 몹시 미워했고, 조식과 친했던 신하들에 대해서도 전혀 우호적이지 않았습니다. 조식과 가까웠던 신하 중에 문재(文才)로 이름을 알렸던 정의(丁儀)가 있었는데 그 재주를 높이 산 조조가 그를 사위삼으려 한 적이 있었습니다.
조조가 딸을 정의에게 처로 삼게 하려고 하는데, 조비가 정의의 눈이 짝짝이라고 간언하여 이를 중지하게 하였다. 정의는 이 일로 말미암아 조비를 원망하게 되었으며, 동생인 황문시랑 정이, 승상부의 주부 양수와 함께 자주 임치후 조식이 재능이 있다고 칭찬하고, 조조에게 후사로 세울 것을 권고하였다. -자치통감-
핑계될게 없어서 눈 짝짝이라 안된다고 한 조비나 그런다고 진짜로 중단시킨 조조나... 조비가 황제가 된 후 정의는 동생 정이와 함께 죽음을 당했습니다. 조식 본인은 평생 외지에서 떠돌며 자신의 재주를 펼쳐보지 못했죠.
당대 백성들이 보기에도 너무 심하다 싶었던지 223년 수도에서 조비를 만난 후 병사한 조창을 두고 조비가 독살했다는 야사까지 나오게 됩니다.
조조의 아들들은 제후왕이 되어 각기 지정된 봉지에서 살아갔는데 호화로움과는 거리가 있었고 맘 편히 살 수도 없었습니다.
당시 제후왕은 모두 봉지에 살았으나 이름만 있을 뿐 실지가 없었다. 봉국에는 늙은 병사 1백여 명이 수위를 섰고 봉지 또한 경성에서 천리 밖에 떨어져 잇었는데 제후왕은 정기적으로 황제를 조빙(정기적으로 천자를 알현하는것)하는 것이 허락되지 않았다. 나아가 제후왕은 관원에 의해 모든 행동이 철저히 감시당했다.
각 제후왕은 비록 왕후의 봉호만 있었을 뿐 실제 생활은 평민과 거의 차이가 없었다. 나아가 평민이 되려고 해도 이 또한 허락되지 않았다. 법령이 가혹해 제후왕의 과실과 악행 소식은 날마다 모두 황제에게 보고되었다. -자치통감-
감시의 눈길이 어찌나 매서웠던지 조비의 배다른 동생이라 태후의 소생도 아니고 후계자 다툼을 벌인 적도 없는 조연조차도 관리들이 자신의 선행을 칭찬하는 내용의 보고를 올리자 대경실색하여 관리들을 나무랐다고 합니다.
이런 식으로 철저히 종실을 억압한 덕에 위나라에선 봉건제 국가에서 볼수 있는 번병(황실을 수호하는 변방지대감영이나 병영, 또는 제후의 나라)이 존재할 수가 없었습니다.
이는 중앙집권 강화라는 측면에선 긍정적이었지만 황권이 약해졌을 때는 약점으로 작용해서 조씨가 사마씨에게 아무런 저항도 못해보고 나라를 빼앗기는 요인이 되었습니다.
6. 말아먹은 원정
(1)오에 대한 유비의 복수전 이전에 손권과 동맹을 맺은 것 또한 유명합니다. 그러나 촉과 오가 싸움을 벌이는 걸 틈타서 세 갈래 군을 보내 오를 공격하는 조비. 물론 오의 사령관 육손은 이미 이걸 꿰뚫어보고 대비하고 있었습니다. 결국은 되려 패퇴하고 기껏 맺은 동맹을 말아먹은 조비.
(2)나중에 오가 촉과 손을 잡자, 이에 분노한 조비가 직접 군사를 몰고 오를 공격합니다. 한때 원소의 신하였다가 조조에게 귀순하고 나서 계속 있던 신하인 신비가 지금은 내정을 다지면서 장기적으로 채비해야 한다고 조언했지만 무시하고 오를 공격. 결국 오장 서성에 의해 되려 패퇴하는 굴욕만 맛봄.
덤 : 삼국지 마지막에서 위를 엎어버린 후, 진을 세우고 삼국통일을 이루는 사마염.
양호, 두예 등의 유능한 신하들도 있고 해서 연의 등에서 좋게 나오고, 한동안 나라를 잘 다스리긴 했지만 실은 조씨네 2, 3대처럼 병크짓을 꽤나 함.
강동미녀 3천명...결국 한 10년 즐기고 꼴까닥. 그 뒤를 이은 사마충은 그야말로 이뭐병 군주의 대표적 사례.
초창기부터 곪아들어가고 있었는데다 친지 간의 화목도 전혀 없었음.
이게 진을 사실상 멸망으로 몰아넣는 사태인 팔왕의 난으로 번지게 되지요.
덤2 : 정사 삼국지의 저자인 진수조차도 조비 관련 저술에서 은근히 조비를 깔 정도니 할 말 다했죠.
"그의 도량이 약간만 더 크고 공평한 마음 씀씀이에 힘쓰며 도의의 존립에 노력을 기울이고 덕망이 있는 마음을 더 넓힐 수 있었다면, 옛날의 군왕이 어찌 그로부터 멀리 있었겠는가."
한 마디로 진수도 조비의 사람됨을 두고 도량이 좁고, 마음 씀씀이도 쪼잔하고, 도의의 존립에 대해서도 꽝이고, 덕망에서도 안 좋다고 까고 있는 것.
조조의 둘째 아들(첫째는 장수와의 싸움에서 죽은 조앙)이자 위의 첫 황제인 조비.
삼국지 관련 게임 등등으로 능력은 좋았으나 명이 짧은 군주로 꼽히는 조비지만 그 실상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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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나라 문제 조비.
그가 얼마나 배은망덕하고 쪼잔하고 사치스럽고 백성들을 쥐어짜던 군주였는지 일일히 열거하면 책 한 권 거뜬히 나올 거라고 함.
그 중에서 그가 저지른 막장 행각들을 소개해 보고자 합니다.
1. 예의와 개념이 없는 조비
(1)(220년) 갑오일에 왕(조비)이 초(조비의 고향)에가서 6군과 초지역의 부로들에게 읍의 동쪽에서 크게 향연을 베풀고 기악을 늘어놓고 여러 가지 놀이도 열게 하였는데, 관리들과 백성들이 축수를 하였고, 날이 저물어 저녁이 되어서야 파하였다. -자치통감-
잔치 열고 논 것 자체는 좋은데, 문제는 저 때가 아버지 조조의 삼년상 기간이었다는 겁니다.
상주 신분에 사람들 모아다 날새도록 놀아재낀 조비...
역사가 손성이 논평하길
'위의 왕이 이미 한의 제도를 따라 그 대례를 바꾸어 막중한 슬픔에 처해 있으면서도(상주신분 이면서도) 향연을 베푸는 음악을 전설하였으니, 이것으로 시작하는 위치에 있으면서도(조조의 후계자이자 황제의 신분이면서도) 왕도의 교화를 이루는 기초를 타락시켰으며, 선양을 받기에 이르러서는 한나라 황제의 두 딸을 취했으니,(조비는 자신이 폐위시킨 한나라 헌제의 두 딸을 취했습니다.) 이로써 왕조가 계속될 햇수가 멀리 가지 못할 것을 알겠고, 그 세대의 기한이 촉박함도 점칠 수 있었다.'
그 다음해에는
(221년 6월) 황제는(조비는) 종묘(조조의 무덤)가 업에 있기 때문에 낙양에 있는 건시전에서 태자에게 제사지내는데, 민가의 제례처럼 지냈다. -자치통감-
당신 아버지 위왕이었거든요...
(2)형주 뒷치기 이후 촉과 불구대천의 원수지간이 된 손권은 조비와 화친하고 오왕으로 책봉 받았습니다. 손권은 책봉에 대한 감사를 표하기 위해 신하 조자를 위나라로 파견합니다. 조자를 만난 조비는 손권의 사람됨과 오의 인재, 군사력에 대해 상당히 까칠하게 물은 다음 갖가지 귀중품들을 진상할 것을 요구했습니다.
작두향(약초), 큰 조개, 맑은 구슬, 상아, 물소 뿔, 대모(거북이), 공작, 비취, 쌈 오리, 장명계(닭)등 값비싼 사치품들이었는데, 오의 중신들은 기존에 진상하던 물품에는 규정이 있는데 조비가 요구하는 물품들은 예법에 맞지 않는다면서 일제히 반대의사를 개진했습니다.
그랬더니 손권 曰 '서촉과 일을 벌인 상황에서 위의 주군에 의지하여 생명을 부지하고 있소. 그가 구하려는것이 나에겐 기와장이나 돌일 뿐인데 어찌 아끼겠소? 또한 저 사람은 양암(제왕의 복상기간) 중인데도 구하는 것이 이와 같다면 어찌 함께 의를 말할 수 있겠소?'
권중달 교수(한글판 자치통감 번역자)가 주석달기를 '조조가 죽어서 탈상을 하지 않은 상태이므로 조비에게는 복상 기간이다. 이런 상황에서 사치품을 구하는 조비는 근본적으로 예의를 모르는 사람이므로 예의를 가지고 따진다는 것이 의미 없다는 말이다.'
2. 신하들을 괴롭히는 조비
(1) 조홍
애초에 조홍의 집안은 부유했으나 성정이 인색하여 문제(조비)가 젊었을때 재물을 빌리고자 했으나 거절당해서 이를 늘 원망했는데, 마침내 조홍의 빈객이 법을 위반했다는 이유로 옥에 가두고 죽이려고 했다. 군신들이 함께 조홍을 구하려고 했으나 구할 수가 없었다. 변태후(조비 어머니)가 곽후(조비 둘째 마누라)에게 말했다. "오늘 조홍이 죽는다면 내일 황제에게 조칙을 내려 너를 황후에서 폐하겠노라." 그래서 곽후가 울면서 여러 번 청하자 면직되고 관작과 봉토가 깎이는 것으로 그치게 되었다. -조홍전-
일찍이 조조가 서영에게 참패했을때 '천하에 저 홍은 없어도 되나 주공은 없으면 안 됩니다.' 라는 명언과 함께 조조를 구출했던 조홍. 그런 개국공신 5촌 아저씨가 젊었을때 돈 좀 안 빌려준 걸 황제가 될 때까지 잊지 않고 죽이려 든 조비...이 일로 조비는 인심을 꽤 많이 잃었다고 기록은 전합니다.
(2) 우금
7군을 이끌고 방덕과 함께 북상하는 관우를 공격했던 우금은 참패하여 사로잡히게 됩니다(포로만 3만이었다니 말년에 크게 날려먹긴 했습니다.). 이때 방덕은 당당히 죽음을 맞았으나 그는 목숨을 구걸하여 살아남았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조조는 우금을 30년간 알고 지냈지만 그럴 줄은 몰랐다며 탄식을 금치 못했지요.
관우를 죽이고 형주를 얻은 손권은 우금을 위나라로 송환시켰는데 마음고생이 심했는지 수염과 머리카락이 새하얗게 변한 상태였습니다. 조비는 그를 위로하고 장군직에 임명한 다음 손권에게 사신으로 보낼건데 그전에 무제(조조)의 무덤에 참배하라며 그를 업으로 보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미리 사람을 보내 능옥에 관우가 싸움에서 이기고 방덕이 분노하며 우금이 항복하는 그림을 그리게 했다.우금이 이를 보고 부끄러운 마음에 병을 얻어 죽었다. -우금전-
우금이 한 행동은 죽어도 할말 없는 짓이었고, 저 개인적으로도 우금은 남에게는 가혹하고 자신에겐 너그러웠던 소인배라고 생각합니다만, 처벌을 하려면 그냥 그 자리에서 정식으로 처벌해야 했지 저런 식으로 치졸하게 죽게 만드는건 군주로서 할 짓이 아니었습니다. 나 치사한 인간이니 알아서 기어라도 아니고...
우금 사후 우금에게 내려진 시호(예: 이순신의 '충무')는 여(厲)후. 시호를 짓는데 쓰이는 글자에는 저마다 다른 뜻이 담겨 있는데 이 '여(厲)'는 殺戮無辜曰厲 해석하면, 무고한 이를 마구 죽인 사람에게 붙는 시호입니다. 우금을 2번 죽인거죠.
(3)포훈
포훈은 매우 공정한 인물로 왕자 시절의 조비에게도 아첨하지 앉고 늘 공정한 태도를 유지해서 조비가 몹시 못마땅하게 여겼습니다. 그것 때문에 한번 면직 당하기도 했으나 그 마음가짐은 변함이 없었고 후에도 사냥을 즐기고 잦은 원정(전부 망했습니다.)으로 국력을 소진시키는 조비에게 바른 말로 직언을 아끼지 않자 조비는 그를 지방으로 좌천시켰습니다.
좌천당한 후 그가 저지른 아주 사소한 잘못이 조비에게 보고되었는데 조비는 그가 황제를 능멸한다며 잡아들이게 했습니다.
법에 따르면 '벌금'으로 끝날 죄에 징역 5년이 선고되자 신하들이 반박했는데
"포훈은 살려줄 만한 여지가 없거늘, 너희들이 감히 그에게 관용을 베풀려고 하다니 삼관 이하의 담당 관원을 체포하여 자간으로 넘기고 열 마리의 쥐와 같은 동굴에 있도록 하라." 태위 종요, 사도 화흠, 진군대장군 진군, 시중 신비, 상서 위진, 수연의 고유 등이 공동으로 표를 올려서 "포훈의 아버지 포신은 태조(조조)를 위해 공을 세웠습니다."라면서 포훈의 죄를 사면해줄 것을 청했다. 문제는 받아들이지 않고 포훈을 처형했다. -포훈전-
포훈은 굉장히 청렴한 사람이라 죽기 전 집에 남은 재산이 없었다고 합니다.
포훈이 죽고 20일후 조비도 죽었는데 역시 많은 사람들이 조비를 원망했다고 사서는 전합니다.
(4) 소칙
소칙이 문제를 수행하여 사냥을 나갔을 때, 나무 울타리가 공고하지 못하여 사슴이 달아나자 문제는 매우 노여워하며 교의(접의자)에 앉아 칼을 뽑아서 감독하는 관리들을 전부 잡아들여 죽이려고 했다. 소칙이 머리를 조아리고 말했다.
"신이 듣건대, 옛날의 성스러운 왕은 금수로 인해서 사람을 해치지는 않았습니다. 지금 폐하께서는 당요의 교화를 융성하게 하려고 하시면서, 오히려 사냥놀이를 하면서 이처럼 많은 관리들을 죽이려고 하시니, 우둔한 신하로서는 생각할 수조차 없는 일입니다. 저는 감히 죽음을 각오하고 사면할 것을 청합니다."
문제가 말했다. "그대는 충직한 신하로다." -소칙전-
충직한 신하라고 해놓고는 얼마후 타지로 좌천시켜버렸습니다. 소칙은 임지로 가던 길에 사망했습니다.
(5)양준
조비의 동생 조식과 친한 편이었던 양준은 조조가 태자를 세우지 않은채 신하들에게 둘에 관해 물었을 때 어느 편에도 들지 않은채 둘의 재능을 모두 언급하며 중립을 지켰습니다. 다만 조식의 재주가 아름답다고 언급한 적이 있었는데 조비는 그걸 절대로 잊지 않았습니다.
(222년) 문제(조비)의 수레가 완(宛)에 도착했을 때, 저자의 열기가 가득하지 않다고 생각하여 화를 내며 양준을 잡아들였다. 사마선왕(사마의)과 왕상, 순위가 양준을 구해주도록 청하며 머리를 조아리고 피를 흘렸으나 문제는 허락하지 않았다. 양준이 말했다. “나는 죄를 압니다.” 마침내 ■■했다. 사람들은 그의 억울한 죽음을 애통해 했다. -양준전-
그리고 저자거리가 한산하다는 이유로 양준을 기어이 죽이고 맙니다. 정말 뒤끝 하난 끝내줍니다.
(6)왕충
유비가 수저를 떨어뜨리는 명연기로 조조의 손아귀를 벗어났을때 조조의 명을 받고 유비를 공격했다 패한 적이 있는 왕충은(이때 유비가 조공이 직접 온다면 모를까 니들은 백명이 와도 어림도 없거든 이라고 했는데 진짜로 조조가 와버렸죠.) 젊은 시절 기근과 전란으로 굶주림에 시달리다 못해 인육을 먹은 적이 있었습니다.
조비가 왕충이 일찌기 사람을 먹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 때문에 어가가 출행하는 것을 수행할때, 광대를 시켜 무덤 사이에서 해골을 가져와 왕충의 말안장에 매달게 해 웃음거리로 삼았다. -위략-
신하의 아픈 과거를 웃음거리로 삼은 참으로 멋진 군주입니다.
(7)황권
유비의 한중전 승리의 공신 중 한 명으로 책략만 내면 크리티컬 히트였던 유비의 명참모 황권은 이릉패전때 길이 끊겨 퇴각할수 없게 되자 위에 투항합니다.
나중에 유비에게 황권의 가솔들을 잡아들이자고 건의하는 사람이 있었는데, 이에 유비는 '내가 황권을 저버렸지 황권이 나를 저버린 게 아니다.' 라는 명언과 함께 그의 가솔들을 전처럼 보살펴주었습니다. 황권이 촉에 남겨둔 아들 황숭은 훗날 제갈량의 아들 제갈첨, 장포의 아들 장준, 이회의 조카 이구와 함께 촉나라 최후의 항전을 이끌다 전사합니다.
황권은 위나라에서도 그 능력을 발휘해 사마의도 제갈량에게 보낸 서신에서 그를 칭찬한 바 있으며 거기장군까지 역임하게 됩니다.
유비가 죽었을 때 위나라 중신들은 모두 기뻐했지만 황권은 그렇지 못했습니다. 조비는 그가 도량이 있다고 생각하고 그를 놀려주려는 생각으로 사신을 보내 즉시 출두하란 명을 내린 다음 도착하기까지 계속 재촉하는 사자를 보냈습니다.
황권의 수하들은 조비의 의도대로 모두 놀라 혼비백산했으나 정작 황권은 안색이 전혀 변하지 않고 태연했다고 합니다.
(8)하후상
하후상이 애첩을 사랑하여 적실이 총애를 잃었다. 적실은 조씨였고 이 때문에 문제(조비)가 사람을 보내 애첩을 목졸라 죽였다. 하후상은 비탄에 빠져 제정신이 아니었고, 이미 첩을 매장했으나 다시 보고 싶은 마음을 이기지 못해 그녀를 보러 가기도 했다. -하후상전-
쓸데없이 남의 가정사에 참견한 조비 때문에 위나라의 숙장 하후상은 하루아침에 정신줄 놓고 네크로필리아(...)가 되었습니다. 결국 다음해에 병으로 사망했습니다.
3. 쪼잔한 조비
(1)조식이랑 친하면
순욱이 죽고, 순운(순욱 아들)은 조식과는 친하게 지내면서 하후상과는 화목하지 않았으므로 문제는 순운을 매우 미워했다. -순욱전-
동생이랑 친한 사람은 다 미워하는 정말 좋은 형님. 오죽했으면 자기 칭찬이 조비 귀에 들어갔다는 소식만 듣고도(조비의 동생들은 척박한 영지에서 평민들보다 크게 나을 거 없는 생활을 하면서 철저한 감시를 받았습니다.) 동생이 덜덜 떨까...
(2)유비의 사자
유비는 조공이 죽었다는 말을 듣고 속관 한염을 보내 글을 받들고 조문하게 하고 부중의 예물을 보냈다. 문제(조비)는 초상을 당한 것을 빌미로 화친을 구하는 것을 미워해 형주자사에게 명해 한염을 죽이고 사명을 끊었다. -위략-
유비는 위문하라고 보냈는데 조비는 화친을 청한다고 생각하고 죽여버렸습니다. 이해 못할 처사는 아니지만 솔직히 쪼잔해 보이는건 어쩔 수가 없네요. 유비가 듣고 참 기도 안찼을것 같습니다.
이때 유비가 보낸 물품이 그 이름높은 촉금(촉나라 비단. 위도 오도 그저 헤~하고 입 벌어지게 만들었던 명품)이었는데 그건 아마 지가 챙겼을 거라는데 올인.
4. 부인에 대한 태도
원래 원소의 아들 중 하나인 원희의 아내였지만 원소가 패하고 도망치면서 남겨졌다가 조비의 눈에 들어서 조비의 아내가 된 진씨(삼국무쌍의 견희).
일단 그 후에는 조비는 진씨를 무척 아꼈다고 합니다. 조예와 동향공주가 진씨에게서 나온 자식.
그러나 조비로부터의 총애는 점차 희미해져 갔고, 결국 후에 곽귀인(후의 곽황후)나 이귀인, 음귀인으로 조비의 관심이 돌아가지요.
또한 후한의 헌제의 두 딸을 입궁시킨 것도 있고. 이에 비탄한 진황후는 조비에 대해 원망하는 말을 했고, 조비는 이에 화가 나 황초(黃初) 2년 6월에 진황후에게 자결을 명합니다.
진황후는 조비가 죽은 후 제위를 이어받은 조예에 의해 명예가 회복되기는 하지만.
5. 형제들에 대한 가혹한 대우
순욱이 죽고, 순운(순욱아들)은 조식과는 친하게 지내면서 하후상과는 화목하지 않았으므로 문제는 순운을 매우 미워했다. -순욱전-
조비는 후계자 선정에서 가장 큰 경쟁자였던 동생 조식을 몹시 미워했고, 조식과 친했던 신하들에 대해서도 전혀 우호적이지 않았습니다. 조식과 가까웠던 신하 중에 문재(文才)로 이름을 알렸던 정의(丁儀)가 있었는데 그 재주를 높이 산 조조가 그를 사위삼으려 한 적이 있었습니다.
조조가 딸을 정의에게 처로 삼게 하려고 하는데, 조비가 정의의 눈이 짝짝이라고 간언하여 이를 중지하게 하였다. 정의는 이 일로 말미암아 조비를 원망하게 되었으며, 동생인 황문시랑 정이, 승상부의 주부 양수와 함께 자주 임치후 조식이 재능이 있다고 칭찬하고, 조조에게 후사로 세울 것을 권고하였다. -자치통감-
핑계될게 없어서 눈 짝짝이라 안된다고 한 조비나 그런다고 진짜로 중단시킨 조조나... 조비가 황제가 된 후 정의는 동생 정이와 함께 죽음을 당했습니다. 조식 본인은 평생 외지에서 떠돌며 자신의 재주를 펼쳐보지 못했죠.
당대 백성들이 보기에도 너무 심하다 싶었던지 223년 수도에서 조비를 만난 후 병사한 조창을 두고 조비가 독살했다는 야사까지 나오게 됩니다.
조조의 아들들은 제후왕이 되어 각기 지정된 봉지에서 살아갔는데 호화로움과는 거리가 있었고 맘 편히 살 수도 없었습니다.
당시 제후왕은 모두 봉지에 살았으나 이름만 있을 뿐 실지가 없었다. 봉국에는 늙은 병사 1백여 명이 수위를 섰고 봉지 또한 경성에서 천리 밖에 떨어져 잇었는데 제후왕은 정기적으로 황제를 조빙(정기적으로 천자를 알현하는것)하는 것이 허락되지 않았다. 나아가 제후왕은 관원에 의해 모든 행동이 철저히 감시당했다.
각 제후왕은 비록 왕후의 봉호만 있었을 뿐 실제 생활은 평민과 거의 차이가 없었다. 나아가 평민이 되려고 해도 이 또한 허락되지 않았다. 법령이 가혹해 제후왕의 과실과 악행 소식은 날마다 모두 황제에게 보고되었다. -자치통감-
감시의 눈길이 어찌나 매서웠던지 조비의 배다른 동생이라 태후의 소생도 아니고 후계자 다툼을 벌인 적도 없는 조연조차도 관리들이 자신의 선행을 칭찬하는 내용의 보고를 올리자 대경실색하여 관리들을 나무랐다고 합니다.
이런 식으로 철저히 종실을 억압한 덕에 위나라에선 봉건제 국가에서 볼수 있는 번병(황실을 수호하는 변방지대감영이나 병영, 또는 제후의 나라)이 존재할 수가 없었습니다.
이는 중앙집권 강화라는 측면에선 긍정적이었지만 황권이 약해졌을 때는 약점으로 작용해서 조씨가 사마씨에게 아무런 저항도 못해보고 나라를 빼앗기는 요인이 되었습니다.
6. 말아먹은 원정
(1)오에 대한 유비의 복수전 이전에 손권과 동맹을 맺은 것 또한 유명합니다. 그러나 촉과 오가 싸움을 벌이는 걸 틈타서 세 갈래 군을 보내 오를 공격하는 조비. 물론 오의 사령관 육손은 이미 이걸 꿰뚫어보고 대비하고 있었습니다. 결국은 되려 패퇴하고 기껏 맺은 동맹을 말아먹은 조비.
(2)나중에 오가 촉과 손을 잡자, 이에 분노한 조비가 직접 군사를 몰고 오를 공격합니다. 한때 원소의 신하였다가 조조에게 귀순하고 나서 계속 있던 신하인 신비가 지금은 내정을 다지면서 장기적으로 채비해야 한다고 조언했지만 무시하고 오를 공격. 결국 오장 서성에 의해 되려 패퇴하는 굴욕만 맛봄.
덤 : 삼국지 마지막에서 위를 엎어버린 후, 진을 세우고 삼국통일을 이루는 사마염.
양호, 두예 등의 유능한 신하들도 있고 해서 연의 등에서 좋게 나오고, 한동안 나라를 잘 다스리긴 했지만 실은 조씨네 2, 3대처럼 병크짓을 꽤나 함.
강동미녀 3천명...결국 한 10년 즐기고 꼴까닥. 그 뒤를 이은 사마충은 그야말로 이뭐병 군주의 대표적 사례.
초창기부터 곪아들어가고 있었는데다 친지 간의 화목도 전혀 없었음.
이게 진을 사실상 멸망으로 몰아넣는 사태인 팔왕의 난으로 번지게 되지요.
덤2 : 정사 삼국지의 저자인 진수조차도 조비 관련 저술에서 은근히 조비를 깔 정도니 할 말 다했죠.
"그의 도량이 약간만 더 크고 공평한 마음 씀씀이에 힘쓰며 도의의 존립에 노력을 기울이고 덕망이 있는 마음을 더 넓힐 수 있었다면, 옛날의 군왕이 어찌 그로부터 멀리 있었겠는가."
한 마디로 진수도 조비의 사람됨을 두고 도량이 좁고, 마음 씀씀이도 쪼잔하고, 도의의 존립에 대해서도 꽝이고, 덕망에서도 안 좋다고 까고 있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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