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BL교의 지식과 역사가 녹아 있는 베히모스 등 꼭대기의 유적. 그 문화적 가치야 이루 말할 수 없지만, 지금에 있어서는 그저 한 사람을 상대로 펼쳐지는 추격전의 무대일 뿐이었다.
강대한 적을 묶어두기 위한 대주술의 흔적이 곳곳에 남아 있다. 그러나 모두 날카로운 것에 의해 파괴된 상태. 명예로운 숲의 전사, 켄타우로스들의 소행이라고 바람결에 흘려들었던가.
분홍 빛깔의 단발에서 땀을 훔치며, 여성 - 하급기사 레니는 생각했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키에에엑!!"
달려드는 괴상한 가면의 로브를 양단한 그녀의 검은 이미 궤적이 흔들리고 있었다. 무너진 신전의 돌기둥들은 진로를 방해했고, 곳곳에서 튀어나오는 신도들과 텐타클은 더욱더 빠르게 레니의 체력을 앗아갔다.
"하아, 하아......"
열심히 수련했다고 자부하는 그녀의 검은 밀려드는 적의 숫자에 속수무책으로 물러설 뿐. 하나를 베면 둘이 달려드는 데에 질려 도망다니는 것도 여기까지인 듯했다.
-이래서야, 그 분의 곁에는 다시 서지 못한다
그리 생각한 순간, 레니의 가녀린 어깨에 힘이 들어갔다.
“타앗!!”
검광이 텐타클과 지배당한 신도를 함께 베어갈랐다. 선두가 당하자 움츠러든 틈을 타, 레니는 돌무더기를 헤치고 직감적으로 아래를 향해 달렸다.
신도들은 놓칠 수 없다는 듯 추격해 왔지만 아이언울프의 고된 훈련을 견뎌낸 그녀의 다리가 조금 더 빨랐다.
“후...”
소름끼치는 가면들이 더 이상 보이지 않을 때쯤, 레니는 멈춰 섰다. 자연적으로 부서진 나무와 돌덩이가 켜켜이 쌓인, 어느 외진 공터였다.
당장의 위협이 사라지고 긴장이 풀리자, 누적되었던 피로가 한꺼번에 몰려왔다.
'하츠 부단장님...'
언제나 든든하던 리더의 뒷모습을 생각하며 울컥하려는 마음을, 레니는 고개를 세게 휘저어 털어냈다. 무사히 돌아가 그 분께 보고하는 것이 자신이 해야 할 일이다.
어쩌다 행렬에서 낙오되었던가... 잘은 생각나지 않는다. 그저 평소처럼 단원들과 순찰을 돌다가, 목소리를 들었다.
[나의 둥지에서 아직껏 버티다니. 재미있는 벌레로다.]
-그래, 지금 이런 목소리. 머릿속에 들어와 영혼을 후벼내는 듯한 섬뜩한 음성.
풀어졌던 자세에 일순간 힘을 불어넣고, 레니는 튕기듯 검을 놀려 사방으로 겨누었다. 허나 목소리는 그녀의 긴장 따위는 아랑곳 않는다는 듯 이야기를 계속했다.
[가벼운 여흥이었다만... 조금 더 가지고 놀 수 있을 것 같군.]
“시끄럽고 모습을 드러내! 네가 사도인가?!”
주변의 풍경은 처음 도착했을 때와 같았다. 하지만 목소리가 들리고부터 점점 일그러져, 방향조차 짐작할 수 없게 이리저리 색깔이 뒤섞여 갔다. 오감이 뒤틀리는 기분.
“윽... 비겁한 수를...”
[가장 존경하는 자가 있느냐?]
“...뭐라고?”
뜬금없는 질문에도, 레니의 마음에는 부단장의 이름이 차올라 갔다. 그것을 입 밖에 내려는 생각도 앖었지만, 목소리는 즐겁다는 듯 뇌까렸다.
[그렇군. 그 자가 지금, 너를 찾으려 이곳에 단신으로 올라오고 있다.]
“.....!!?”
[꽤나 지극한 부하 사랑이 아닌가. 너를 버려 두고 왔다며 상관과 말싸움도 한 모양인데, 걸작이지 않나.]
“거...짓말 하지 마...”
그렇게 열심히 따라다녔는데도, 그분을 닮기 위해 온 힘을 다해 노력했는데도, 따뜻한 눈길 한 번 주지 않았던 차가운 사람이다. 그래서 더욱 존경했고, 따랐다. 이제 와서, 자기 같은 쓸모 없는 낙오자를 구하러 올 이유가 없는 것이다.
이 목소리의 정체는 사도다. 정신 지배에 특화된 바다의 최강자, 긴 발의 로터스. 그의 눈이 어디까지 미칠 수 있는지는 인간이 상상할 수 있는 범주를 뛰어넘을 터다. 사실 그 전부터 알고 있었던 적의 정체를 되뇌며 레니는 고개를 저었다.
어느샌가 몸이 움직이지 않았다. 점점 흐려지는 시야에 잡힌 것은, 온 몸을 휘감은 붉은색의 촉수. 바위처럼 단단한 껍질에서 돋아나오는 섬세한 신경. 그것이, 온몸의 피부로 스며들고 있었다.
“안 돼... 싫...어......”
[내가 조종하는 너의 육체와, 네가 존경하는 자가 어찌 싸울지 기대되는군.]
“으...극....... 흡...”
레니는 온 힘을 다해 저항했다. 혼자 죽는 건 상관없다. 하지만 그 분에게 폐를 끼친다면 죽음보다 더한 고통이다.
이 악마 같은 사도는 자신의 이런 속마음까지 꿰뚫어보고 이러한 유흥을 즐기는 것인가.
전혀 움직일 수 없는 몸 대신, 필사적으로 무슨 생각이든 떠올리려 노력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여 오는 로터스의 신경 촉수는 천천히, 하지만 확실하게 레니의 신체 지배권을 앗아 가고 있었다.
'싫어, 싫어, 싫어, 싫...'
입술을 피가 나도록 깨무는 것을 마지막으로, 레니의 의식은 까마득한 어둠 속으로 잠겨들었다.
“......”
거대한 장창을 든 남자는 혀를 찼다. 지금껏 텐타클과 신도들의 공격이 거의 없다시피 한 것은 이를 위함이었던가.
“무슨 장난질이냐.”
아이언울프 기사단의 부단장, 하츠 폰 크루거. 그의 무미건조한 입에서 뱉어지는 말이 닿은 곳은, 검은색 제복 위로 부조화스런 신경 촉수가 돋아나 있는 레니였다.
“......하...”
“말을 알아들을 수 있는 상태 같지는 않지만, 너...”
하츠는 말을 끝맺지 못했다. 믿을 수 없는 도약력으로 달려든 레니가 배틀 소드를 내리쳐 왔기 때문이었다. 급히 장창을 올려쳐 막아냈다.
“큭?!”
어느 정도는 긴장하고 있었음에도 대응이 늦었을 만큼 빨랐다. 튕겨 나가고도 지면에 내려서자마자 다시 돌진해 오는 레니를, 하츠는 무거운 창으로 견제했다.
“하아...!”
“쯧.”
몇십 합이나 주고받았을까, 하츠의 숨이 조금씩 거칠어지는 반면 레니는 등에 달린 신경 촉수가 더욱 부풀어올랐을 뿐이었다.
“정신 차려라.”
쉴 틈 없이 쇄도하는 검에 원형의 궤도로 창날을 세우며, 그는 일갈했다.
"그러고도 아이언울프인가?! 네녀석이 그렇게나 열심히 훈련에 임한 것이 고작 이 따위 결과를 만들어 내기 위함이었냔 말이다!!"
창의 길이에서 생기는 빈틈을 파고든 검날을, 두 손 사이의 창대가 막아냈다. 아무 감정 없이 공허한 그녀의 루비색 눈동자에 희미하게 그의 모습이 비쳤다. 하츠가 이를 가는 동시에, 레니가 낙엽처럼 날아갔다.
“오냐. 끝까지 내 말을 듣지 않을 셈이라면, 여기서 죽어라. 이 하츠 폰 크루거의 손에!”
다시, 레니는 기계적으로 달려들었다. 확연히 바뀐 기도를 갈무리한 하츠가 검을 쳐내기 위해 창을 내지른 순간-
푹, 하고 이질적인 감각이 손끝에 머물렀다.
“뭣?”
어느 새 배틀 소드를 내던진 레니가 자신의 배를 관통한 창을 천천히 쓰다듬었다. 충격에 굳은 하츠의 옆에 쓰러진 가녀린 몸이, 가쁜 숨을 내쉬었다.
“저에게는...... 영광...입니다”
부릅뜬 하츠의 눈에 레니의 슬픈 얼굴이 비춰졌다. 수많은 말이 목구멍 속에서 요동쳤지만 입 밖으로 나오는 건 한 마디 뿐이었다.
“레니.”
그저 이름을 불러 준 것만으로, 그녀는 웃었다. 세상에 더없이 밝고 기쁜 미소를 끝으로, 레니의 고개는 떨어졌다.
“......”
천천히 그녀의 시신을 안아 올린 하츠의 팔뚝에 물이 고였다. 의식의 끝자락까지 절대 보이고 싶지 않았을 차가운 눈물이 웃음짓던 레니의 눈가에서 흘러내리고 있었다.
“...로터스.”
돌아오는 대답은 없다. 하지만 이곳은 그 자의 둥지. 나무 하나, 돌조각 하나까지 눈과 귀다. 하츠는 낮고 건조하게 읊조렸다.
“지금 당장 네놈을 찢어죽이고 싶다. 하지만, 차례가 아니지. 곧 알량한 마법사 년의 술수를 등에 업은 자가 너의 숨통을 끊으러 올 것이다.”
주변의 공기가 잠시, 비웃음처럼 떨린 느낌이 들었다.
“시련에 연마한 칼날만이 사도를 죽음으로 인도하리라. 무너진 돌무더기에 깔려 죽을 제 8사도여. 네놈에게 걸맞는 쓰레기 같은 최후를 기다리고 있어라.”
뒤돌아 걸어가는 하츠에게는 그 어떤 방해도 없었다. 석양을 받으며 걷는 그의 품에, 창에 꿰뚫린 채 식어 가는 레니의 몸은 슬프도록 가벼웠다.
fin.
대전이 직후부터 관심이 있던 스토리인데, 하츠 하향 기념해 부족한 필력이지만 끄적여 봤습니다 하하...
강대한 적을 묶어두기 위한 대주술의 흔적이 곳곳에 남아 있다. 그러나 모두 날카로운 것에 의해 파괴된 상태. 명예로운 숲의 전사, 켄타우로스들의 소행이라고 바람결에 흘려들었던가.
분홍 빛깔의 단발에서 땀을 훔치며, 여성 - 하급기사 레니는 생각했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키에에엑!!"
달려드는 괴상한 가면의 로브를 양단한 그녀의 검은 이미 궤적이 흔들리고 있었다. 무너진 신전의 돌기둥들은 진로를 방해했고, 곳곳에서 튀어나오는 신도들과 텐타클은 더욱더 빠르게 레니의 체력을 앗아갔다.
"하아, 하아......"
열심히 수련했다고 자부하는 그녀의 검은 밀려드는 적의 숫자에 속수무책으로 물러설 뿐. 하나를 베면 둘이 달려드는 데에 질려 도망다니는 것도 여기까지인 듯했다.
-이래서야, 그 분의 곁에는 다시 서지 못한다
그리 생각한 순간, 레니의 가녀린 어깨에 힘이 들어갔다.
“타앗!!”
검광이 텐타클과 지배당한 신도를 함께 베어갈랐다. 선두가 당하자 움츠러든 틈을 타, 레니는 돌무더기를 헤치고 직감적으로 아래를 향해 달렸다.
신도들은 놓칠 수 없다는 듯 추격해 왔지만 아이언울프의 고된 훈련을 견뎌낸 그녀의 다리가 조금 더 빨랐다.
“후...”
소름끼치는 가면들이 더 이상 보이지 않을 때쯤, 레니는 멈춰 섰다. 자연적으로 부서진 나무와 돌덩이가 켜켜이 쌓인, 어느 외진 공터였다.
당장의 위협이 사라지고 긴장이 풀리자, 누적되었던 피로가 한꺼번에 몰려왔다.
'하츠 부단장님...'
언제나 든든하던 리더의 뒷모습을 생각하며 울컥하려는 마음을, 레니는 고개를 세게 휘저어 털어냈다. 무사히 돌아가 그 분께 보고하는 것이 자신이 해야 할 일이다.
어쩌다 행렬에서 낙오되었던가... 잘은 생각나지 않는다. 그저 평소처럼 단원들과 순찰을 돌다가, 목소리를 들었다.
[나의 둥지에서 아직껏 버티다니. 재미있는 벌레로다.]
-그래, 지금 이런 목소리. 머릿속에 들어와 영혼을 후벼내는 듯한 섬뜩한 음성.
풀어졌던 자세에 일순간 힘을 불어넣고, 레니는 튕기듯 검을 놀려 사방으로 겨누었다. 허나 목소리는 그녀의 긴장 따위는 아랑곳 않는다는 듯 이야기를 계속했다.
[가벼운 여흥이었다만... 조금 더 가지고 놀 수 있을 것 같군.]
“시끄럽고 모습을 드러내! 네가 사도인가?!”
주변의 풍경은 처음 도착했을 때와 같았다. 하지만 목소리가 들리고부터 점점 일그러져, 방향조차 짐작할 수 없게 이리저리 색깔이 뒤섞여 갔다. 오감이 뒤틀리는 기분.
“윽... 비겁한 수를...”
[가장 존경하는 자가 있느냐?]
“...뭐라고?”
뜬금없는 질문에도, 레니의 마음에는 부단장의 이름이 차올라 갔다. 그것을 입 밖에 내려는 생각도 앖었지만, 목소리는 즐겁다는 듯 뇌까렸다.
[그렇군. 그 자가 지금, 너를 찾으려 이곳에 단신으로 올라오고 있다.]
“.....!!?”
[꽤나 지극한 부하 사랑이 아닌가. 너를 버려 두고 왔다며 상관과 말싸움도 한 모양인데, 걸작이지 않나.]
“거...짓말 하지 마...”
그렇게 열심히 따라다녔는데도, 그분을 닮기 위해 온 힘을 다해 노력했는데도, 따뜻한 눈길 한 번 주지 않았던 차가운 사람이다. 그래서 더욱 존경했고, 따랐다. 이제 와서, 자기 같은 쓸모 없는 낙오자를 구하러 올 이유가 없는 것이다.
이 목소리의 정체는 사도다. 정신 지배에 특화된 바다의 최강자, 긴 발의 로터스. 그의 눈이 어디까지 미칠 수 있는지는 인간이 상상할 수 있는 범주를 뛰어넘을 터다. 사실 그 전부터 알고 있었던 적의 정체를 되뇌며 레니는 고개를 저었다.
어느샌가 몸이 움직이지 않았다. 점점 흐려지는 시야에 잡힌 것은, 온 몸을 휘감은 붉은색의 촉수. 바위처럼 단단한 껍질에서 돋아나오는 섬세한 신경. 그것이, 온몸의 피부로 스며들고 있었다.
“안 돼... 싫...어......”
[내가 조종하는 너의 육체와, 네가 존경하는 자가 어찌 싸울지 기대되는군.]
“으...극....... 흡...”
레니는 온 힘을 다해 저항했다. 혼자 죽는 건 상관없다. 하지만 그 분에게 폐를 끼친다면 죽음보다 더한 고통이다.
이 악마 같은 사도는 자신의 이런 속마음까지 꿰뚫어보고 이러한 유흥을 즐기는 것인가.
전혀 움직일 수 없는 몸 대신, 필사적으로 무슨 생각이든 떠올리려 노력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여 오는 로터스의 신경 촉수는 천천히, 하지만 확실하게 레니의 신체 지배권을 앗아 가고 있었다.
'싫어, 싫어, 싫어, 싫...'
입술을 피가 나도록 깨무는 것을 마지막으로, 레니의 의식은 까마득한 어둠 속으로 잠겨들었다.
“......”
거대한 장창을 든 남자는 혀를 찼다. 지금껏 텐타클과 신도들의 공격이 거의 없다시피 한 것은 이를 위함이었던가.
“무슨 장난질이냐.”
아이언울프 기사단의 부단장, 하츠 폰 크루거. 그의 무미건조한 입에서 뱉어지는 말이 닿은 곳은, 검은색 제복 위로 부조화스런 신경 촉수가 돋아나 있는 레니였다.
“......하...”
“말을 알아들을 수 있는 상태 같지는 않지만, 너...”
하츠는 말을 끝맺지 못했다. 믿을 수 없는 도약력으로 달려든 레니가 배틀 소드를 내리쳐 왔기 때문이었다. 급히 장창을 올려쳐 막아냈다.
“큭?!”
어느 정도는 긴장하고 있었음에도 대응이 늦었을 만큼 빨랐다. 튕겨 나가고도 지면에 내려서자마자 다시 돌진해 오는 레니를, 하츠는 무거운 창으로 견제했다.
“하아...!”
“쯧.”
몇십 합이나 주고받았을까, 하츠의 숨이 조금씩 거칠어지는 반면 레니는 등에 달린 신경 촉수가 더욱 부풀어올랐을 뿐이었다.
“정신 차려라.”
쉴 틈 없이 쇄도하는 검에 원형의 궤도로 창날을 세우며, 그는 일갈했다.
"그러고도 아이언울프인가?! 네녀석이 그렇게나 열심히 훈련에 임한 것이 고작 이 따위 결과를 만들어 내기 위함이었냔 말이다!!"
창의 길이에서 생기는 빈틈을 파고든 검날을, 두 손 사이의 창대가 막아냈다. 아무 감정 없이 공허한 그녀의 루비색 눈동자에 희미하게 그의 모습이 비쳤다. 하츠가 이를 가는 동시에, 레니가 낙엽처럼 날아갔다.
“오냐. 끝까지 내 말을 듣지 않을 셈이라면, 여기서 죽어라. 이 하츠 폰 크루거의 손에!”
다시, 레니는 기계적으로 달려들었다. 확연히 바뀐 기도를 갈무리한 하츠가 검을 쳐내기 위해 창을 내지른 순간-
푹, 하고 이질적인 감각이 손끝에 머물렀다.
“뭣?”
어느 새 배틀 소드를 내던진 레니가 자신의 배를 관통한 창을 천천히 쓰다듬었다. 충격에 굳은 하츠의 옆에 쓰러진 가녀린 몸이, 가쁜 숨을 내쉬었다.
“저에게는...... 영광...입니다”
부릅뜬 하츠의 눈에 레니의 슬픈 얼굴이 비춰졌다. 수많은 말이 목구멍 속에서 요동쳤지만 입 밖으로 나오는 건 한 마디 뿐이었다.
“레니.”
그저 이름을 불러 준 것만으로, 그녀는 웃었다. 세상에 더없이 밝고 기쁜 미소를 끝으로, 레니의 고개는 떨어졌다.
“......”
천천히 그녀의 시신을 안아 올린 하츠의 팔뚝에 물이 고였다. 의식의 끝자락까지 절대 보이고 싶지 않았을 차가운 눈물이 웃음짓던 레니의 눈가에서 흘러내리고 있었다.
“...로터스.”
돌아오는 대답은 없다. 하지만 이곳은 그 자의 둥지. 나무 하나, 돌조각 하나까지 눈과 귀다. 하츠는 낮고 건조하게 읊조렸다.
“지금 당장 네놈을 찢어죽이고 싶다. 하지만, 차례가 아니지. 곧 알량한 마법사 년의 술수를 등에 업은 자가 너의 숨통을 끊으러 올 것이다.”
주변의 공기가 잠시, 비웃음처럼 떨린 느낌이 들었다.
“시련에 연마한 칼날만이 사도를 죽음으로 인도하리라. 무너진 돌무더기에 깔려 죽을 제 8사도여. 네놈에게 걸맞는 쓰레기 같은 최후를 기다리고 있어라.”
뒤돌아 걸어가는 하츠에게는 그 어떤 방해도 없었다. 석양을 받으며 걷는 그의 품에, 창에 꿰뚫린 채 식어 가는 레니의 몸은 슬프도록 가벼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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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이 직후부터 관심이 있던 스토리인데, 하츠 하향 기념해 부족한 필력이지만 끄적여 봤습니다 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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