阿庾正傳,또는 허송세월
전주의 한 여자 점쟁이가 내 관상을 보더니만
쯧쯧, 허송세월이야!
난 똥빛의 얼굴로 애써 억지 웃음을 지었다
허송세월…… 별것 아닌 것 같은 그 말이 은근히
두고두고 마음을 긁었다, 글쎄 내 직업 자체가 베
짱이,
허송세월 아닌가? 위안은 해보지만……
빌려준 비디테이프를 받으려고 진우형에게 전화했
더니,
대전의 한 비디오 가게 이름이 ‘허송세월’이래요
킬킬, 이름 한번 죽이는군요
지겨운 햇살과 백수의 그림자 놀이인 비디오와 虛送,
虛頌?
시간, 사랑, 마음, 청춘 따위들, 그래 난
그 헛되이 보낸 것들에게만 운명적으로 온 관심을 쏟
아왔다
정확하게 말하면, 난 허송세월에 매달려
헛됨을 기리는 자이다
단골 비디오 숍에서 테이프 반납 독촉 전화가 걸려
왔고
난 분실한 아비정전을 물어주겠다고 했다
유하 프로덕션 비디오테이프도 다수가 분실되었지
아마?
남들 다 일터에 나간 한낮에 시 한 수 끄적이거나
기껏 비디오 한 편 때리고 있노라면, 속이 허심허심
기어이 헛됨을 기리는 자의 불안이 밀려온다
이러다 나 또한 세상에셔 영영 분실되고 마는 건 아
닐까
그러나 그 불안감 역시 내가 애용하는 신발인 것이다
끈질기게, 허송세월을 걸어가기 위한
세운상가 키드의 사랑
유하, 문학과지성 시인선 17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