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면
어쩌면 나는 기계인지도 몰라
컨베이어에 밀려오는 부품을
정신없이 납땜하다 보면
수천 번이고 로버트처럼 반복동작하는
나는 기계가 되어 버렸는지도 몰라
어쩌면 우리는 양계장 닭인지도 몰라
라인마다 쪼르륵 일렬로 앉아
희끄무레한 불빛 아래 속도에 따라 손을 놀리고
빠른 음악을 틀어 주면 알을 더 많이 낳는
양계장 닭인지도 몰라
진이 빠져 더 이상 알을 못 낳으면
폐닭이 되어 켄터키치킨이 되는
양계장 닭인지도 몰라
늘씬한 정순이는 이렇게 살아 무엇하냐며
맥주홀로 울며 떠나고
영남이는 위장병에 괴로워하다
한 마리 폐닭이 되어 황폐한 고향으로 떠난다
3년 내내 아귀차게 이 악물며 야간학교 마친 재심이는
경리 자리라도 알아보다가 졸업장을 찢으며 주저앉는다
어쩌면 우리는 멍에 쓴 짐승인지도 몰라
저들은,
알 빼먹는 저들은
어쩌면 날강도인지도 몰라
인간을 기계로
소모품으로
상품으로 만들어 버리는
점잖고 합법적인 날강도인지도 몰라
저 자상한 미소도
세련된 아름다움과 교양도
부유하고 찬란한 광휘도
어쩌면 우리 것인지도 몰라
우리들의 피눈물과 절망과 고통 위에서
우리들의 웃음과 아름다움과 빛을
송두리째 빨아먹는
어쩌면 저들은 흡혈귀인지도 몰라
노동의 새벽
박노해, 느린걸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