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저 앞산을 끝내 모르리라
○
자연이 아름다운 것은 서로의 모습이 서로에게 방해가
되지 않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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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무가 이룬 아름다운 세상에는 이 세상의 모든 것이 다
찾아간다. 비, 바람, 눈, 새, 벌레 들, 해와 달과 별 들이 찾아
간다. 그리고 사람들도 나무 아래 들어가 그늘 속에 눕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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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세상에 그 누구도 파란만장하지 않은 인생 없고 우리
산야에 푸른 소나무치고 가만히 보면 상처 없는 소나무는
없다. 오히려 옹이가 많고 상처가 깊은 소나무일수록 더 웅
장하게 자라고 푸름을 세상에 자랑한다. 사람들도 자라면
서 만고풍상을 견디고 이겨낸 사람일수록 어려운 일 앞에
한 점 흔들림이 없는 큰 사람이 된다. 어려운 곡절을 넘기고
나면 세상을 이해하는 새 눈이 트이고 사랑이 무엇인지 인
생이 무엇인지도 터득하게 되어 산같이 크고 넓은 마음을
갖게 된다. 강 건너 앞에 서 있는 푸른 소나무처럼 너는
살아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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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앞산 하나만 평생을 바라보고 오르며 생각하며 살아
도 나는 저 앞산을 끝내 모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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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둠이 산에 내린다. 강에 내린다. 산그늘이 한 사람과 또
한 사람을 깊이 덮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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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아엎어지기를 기다리는 땅은 이슬과 물기를 머금고 햇
살 아래 반짝인다. 농부가 땅을 고르듯, 마음을 고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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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물을 바로 보는 일은 삶의 기본이다. 사물을 바로 본다
는 것은 세상의 옳고 그름과 삶의 가치를 판단하는 일이다.
자연만큼 큰 스승은 없다. 자연을 자세히 보는 것, 그것이
세상을 자세히 보는 일이다. 산의 능선 하나, 산골짜기의 논
다랑이 하나, 저 빈들에 서 있는 겨울나무 한 그루, 작은 들
을 돌아나가는 작은 시냇물, 겨울 언덕에 희게 나부끼는 억
새들, 마을 앞에 서 있는 마을 어른같이 든든한 느티나무 한
그루를 보는 일은 큰 공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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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는 풀과 나무와 물과 흙으로 집을 지으셨고, 풀과
나무로 흙에 곡식을 가꾸고 집짐승을 길러 우리들을 키우
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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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는 자연과 일에서 세상 이치를 배우신 분다. 농
부들이 다 그렇다. ‘경우 바르다’는 말이 있는데, 이 말은 우
리 어머니들을 두고 한 말이다. 그분들은 평생 한동네에 살
면서 동네 사람들 사이에서 일어나는 갈등과 화해를 적절
하게 조절하는 가운데 사람 도리를 알게 되었다. 그분들의
인격은 변하지 않는 인간성이 되었다.
○
옛날에 내가 괭이질과 호미질을 배울 때 아버지가 늘 힘
을 빼야 한다, 힘이 너무 들어갔다고 내게 말씀하셨다. 모를
심을 때도 지게를 지고 비탈길을 오르내릴 때도 거름을 뿌
릴 때도 늘 힘을 빼라, 힘이 너무 들어갔다고 했다. 모든 일
에 힘을 빼라. 힘이란 다른 욕심이다. 사심이다. 힘이 들어
간 모든 인간 행위는 무리를 가져온다.
○
평생을 자연 속에서 한 그루 나무처럼, 한 포기의 풀잎처
럼 자연으로 사신 어머니, 어머니는 콩이 다닥다닥 달린 콩
을 따면서, 벼알들이 찰랑거리는 벼를 베면서, 다닥다닥 달
린 고추를 따면서 늘 이렇게 말씀하셨다.
“콩 한 개를 심어 이렇게 콩이 다닥다닥 열렸는데도, 사람
들이 이렇게 못산다고 아우성이다.”
생태와 순환의 이해는 어머니는 당대에 이루어진 일이
아니다. 오랫동안 농사를 지으며 대대로 이어받은 농사교
육과 자연교육의 덕분이었으리라. 그 전통이 점점 사라진
다. 동네 할머니 한 분이 돌아가시면 박물관 하나가 사라지
는 것과 같다.
○
‘사람이 그러면 못 쓴다’ 우리 어머니 말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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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내기를 하기 위해 물을 가득 잡아둔 논을 보면 마음이
평화로워진다. 그 논 위로 제비들이 난다. 물새들이 꽁지를
까불거리며 논둑에서 벌레를 찍어 먹는다. 그 논둑길로 농
부가 걸어가는 모습은 더없이 평화롭다. 논에 물을 잡아놓
고 하루쯤 지나면 물이 맑아지고 그 논물 속에는 산이 내려
와 잔잔하게 잠겨 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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곡식을 살리고 자기를 살리고 세상을 살리는 농부들의
농사야말로 그 어떤 예술보다 나에게 감동적인 예술이었
다. 허리를 굽혀 땅을 일구고 곡식을 가꾸어 세상을 살려온
농부들의 위대한 공동체적 삶이야말로 우리의 희망임으르 나
는 지금도 믿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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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악의 가락과 몸짓은 ‘거짓말’ 같아야 한다. 농악은 맺
고 풀고 전진과 후퇴, 훌훌 뛰고 뺑뺑 돌고, 예고 없이 치고
빠지고, 지근거리고, 추근거리고, 자발맞게 종종거리고, 장
중하고, 채근대고, 꼬시고, 까불고, 보채고, 지분대는 모든
삶의 형태와 언어를 닮은 농민들의 말이다. 농악놀이는 굳
게 입을 다문 농민들의 입술에서 핀 꽃이다. 농사일의 침
묵이 가락과 몸짓과 행렬과 행진으로 나타난다. 파서 뒤집
고 다독이고 공격하고 후퇴하고 진영을 잡고 힘을 모아 다
시 공격한다. 농악놀이의 공격은 때로 제자리를 탈환하는
전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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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이 알고 많이 배운다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생활과
생각과 행동을 단순화하는 것이라고 나는 믿는다. 침묵 속
에서만 진실이 보이고 세상이 바로 보인다. 내가 정지해야
움직이는 것이 보인다. 저 자연 속에서 내가 하나의 점처럼
있다. 침묵하는 법, 정지하는 법을 터득해가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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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르게 우거지는 산으로 꾀꼬리가 울며 난다. 자기처럼,
무심하게 날고 우는 일에만 열중하라고? 한번 그래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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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자연이 해주는 말들을 받아 적었다. 자연의 질서와
순리와 순환, 그 속의 무구한 사랑과 이유와 확신들, 그리고
거듭 죽었다가 다른 모습으로 살아나는 생명들, 모든 것은
자연에서 오고 자연으로 정리되고 다시 자연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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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생이란 자연과 내가 한몸이고 하나의 핏줄로 이어졌다
는 것에 대한 자각이다. 농부들은 예술가들이었고, 철학자
들이었고, 과학자들이었다. 그들은 자연의 위대한 힘을 믿
었던 위대한 자연주의자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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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내가 태어나 걸었던 강길과 그 길에서 만난 풀과 나
무와 봄과 여름의 풀꽃들과 비 오는 산과 눈이 내리는 강물
과 몸을 다 눕히는 봄 풀잎들, 새로 잎 피는 나무와 노을이
져버린 겨울 강에 떠 있는 하얀 억새들, 멀리 날아가는 새와
그 속에 허리 굽혀 땅에 씨를 뿌리고 농사를 짓고 사는 농부
들을 노래해왔다. 문학을 왜 하는가? 살아야지. 죽어도 괜
찮다는 하루를 나는 그냥 살 뿐이다. 내게 문학은 최고의 삶
을 사는 일이다.
사랑 말고는 뛰지 말자
김용택, 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