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자연은 지금 자라고 있다
1
비다. 비가 왔다. 이상하다? 비가 오다니? 내가 살아 있을
까? 로뎅이 이런 말을 했다. 사랑하고 감동하고 희구하고
전율하며 사는 것, 이라고. 나는 이중에서 전율이 좋다.
2
오늘은 어젯밤 비와 따뜻한 기운으로 어제와는 다른 아
침을 보여주었다. 산이 뽀얀했다. 실가지 끝에 잎눈 꽃눈이
튼 것이다. 가지를 뚫고 나온 눈의 색들이 나타난 것이다.
하루종일 자연의 변화를 따라다니느라 바빴다. 어제와는
다른 오늘 아침, 내일 아침이 기대된다. 나는 지금 가슴이
뛴다. 나무들은 풀들은 씨앗들은 벌레들은 지금 쉬지 않고
내일을 만들고 있다. 저녁에 텔레비전을 보았는데 대나무
밭 죽순은 하루에 일 미터도 더 자란다는 말을 들었다. (내
키는 그때 뭐하고 있었을까?) 모든 자연은 지금 자라고 있
다. 크고 있다.
3
그 많던 물까치가 보이지 않는다. 겨울 동안 마을에서 살
더니 어딘가로 사라져서 이따금 몇 마리씩 보이다 만다. 산
에 먹이가 많고, 짝을 찾아 어딘가에 둥지를 틀고 알을 낳고
있을 것이다. 새들의 둥지는 아름답다. 둘이 들어가 있으면
온몸이 닿을 수 있게 작다. 비도 온다. 재수 없는 봄에는 눈
도 온다. 달이 지나간다. 별들이 들여다보기 좋다. 바람이
집을 흔들어준다.
풀, 새털, 우리집 마른 잔디, 잔디 뿌리, 어느 날 참새가 작
은 나뭇잎을 따 물고 전깃줄에 앉아 내 눈치를 살피고 있는
것을 보았다. 나는 새들의 다음 동작을 알아가고 있다.
4
좋은 생각이 그렇게 쉽지 않다. 신중하라. 확실하지 않
다. 건들지 마라. 기대게 하지 마라. 바깥바람같이 지나간
다. 나뭇가지와 새처럼, 몰래 구름 같아야 한다.
5
지혜는 일이 끝난 후에 찾아온 생각의 말이다. 내 깨달음
으로는 내 삶의 어떤 문제도 해결하지 못하였다. 그때 생각
대로 오늘이 해결되지 않는다. 아침에는 서리가 하얗게 깔
린 강길을 걸었다. 해는 뜨지 않았다. 나에게 집중하였다.
냉정하게 생각을 거부하는 정갈한 하늘이다. 발이 귀가 얼
굴이 시렸다. 집에 와서 따뜻한 이불 속에 발을 들이밀었
다. 천천히 몸이 녹았다. 정말, 아주, 좋았다. 누가 안아준,ㄴ
것처럼 포근하였다.
6
비가 오는 날이다. 유리창에 빗발이 들이친다. 차갑고, 어
지럽다. 나는 어디를 가는가. 무슨 생각을 하는가. 멈추어
라. 비야. 길바닥 작은 상처에 고인 빗물이 떨어지는 작은
빗방울이 만드는 파문을 보았다. 파문은 지워지고 나타나
고 지워졌다.
7
아침 산책 나왔다. 강 건너로 갔다. 해 뜨기 전이다. 서리
가 하얗게 내렸다. 마른 풀잎이나 실가지가 하얗다. 내 코
앞 작은 바위 둘레에서 수달이 놀고 있다. 바위 둘레에서 물
방울 거품이 뽀골뽀골 올라오고 있다. 가만히 보고 있었다.
수달이 물속에서 쏙 올라와 바위 위로 올라섰다. 나와 눈이
마주치자 기겁을 하고 물속으로 달아나버렸다. 귀엽고 예
쁜 어린 수달의 앳된 얼굴을 기억하게 되었다. 초롱초롱한
그 눈동자도, 놀라움이 순수하였다. 독립된 지 얼마 안 되어
보였다. 몸도 작았다.
8
마을 앞 커다란 느티나무 위에 집을 짓고 사는 까치가 집
을 수리중이다. 지붕 너머로 까치 집이 보인다. 시를 읽고
있었다. 까치가 뒤안 감나무 밑으로 날아가 앉는다. 시집을
들고 창가로 갔다. 까치가 무슨 일을 하고 있다. 아하. 땅에
떨어진 죽은 감나무 가지를 입에 물고 앉아 있닥 까치 집
을 향해 날아간다. 커다란 나뭇가지를 물고 날아가는 까치
의 몸이 무겁고 힘겨워 보인다. 우리 마을에 사는 새 중에
까치만이 작년 집을 수리하여 지낸다. 그렇게 집을 수리하
여 몇 년 살다가 집을 지은 나뭇가지들이 삭아버리면 다른
곳에 집을 짓는다. 집 뒤안 감나무 위에 몇 년 동안 집을 짓
고 살던 까치들이 오래되어 허물어진 집을 버리고 마을 앞
커다란 느티나무 위에 새집을 짓고 지금 몇 년을 살며 올해
를 지낼 집을 수리하고 있다. 봄이 오고 있다는 소식을 나는
까치가 집수리하는 것을 보고 있다.
9
의외의 일로 의외의 사람이 의외의 말을 한다. 한 수를 배
운다. 삶의 고난을 이겨내며 얻은 말은 누구의 것이든 뼈 아
프고 여기 와서 아름답다. 정신이 번쩍 들 때가 있다. 평범
은 마음을 씨 뿌릴 밭처럼 골라준다. 흙은 아름다운 인류의
미래다. 공기가 햇살이 비가 구름이 지나간다. 그것은 억
만의 생명이다. <현역가왕>이라는 연예 프로를 본다. 누
가 이야기했는지 모르겠다. 어떤 가수의 노래가 끝나고 어
떤 작곡가가 그 가수에 대한 평을 한다. “많은 것을 내려놓
고 노래하셨다. 편안하게 잘 들었다.” 편안하다는 말 속에
는 아름다운 생명의 가족들이 살고 있다. 그것이 인류를 지
탱시켜준다.
사랑 말고는 뛰지 말자
김용택, 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