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에게 죽은 것은 하나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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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에 핀 작은 풀꽃들은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의 흔적 같다.
나는 꽃들을 따라다니며, 이 작은 생명들 곁에 엎드려 시를
썼다. 아니, 내가 시를 쓴 것이 아니라 이 꽃들이 나를 불러,
내게 이렇게 저렇게 시를 쓰라 일러주었다. 나는 다만 그들
의 말을 받아 적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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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다보면 마음에 생각이 고일 때가 있다. 시인은 그 생각
이 말이 되기를 기다린다. 그러나 그 생각들이 말이 되었다
고 해서 바로 꺼내면 안 된다. 고인 말들이 익어 스스로 흘
러넘칠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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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은 만물의 소리를 다 듣는 귀와 세상을 다 보는 눈을
갖는다. 풀잎들이 바람을 타고, 풀잎에 새어드는 달빛의 소
리를 듣고, 별들이 움직이고, 산이 숨을 쉬고, 나무가 수액
을 빨아들이고, 낙엽이 뒤척이는 소리, 마른 잔디 위에 내려
앉는 싸락눈 소리도 다 듣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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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애와 무욕, 몰입과 해방, 추락과 상승, 생과 사를 걷잡
을 수 없이 넘나드는 무서운 속도와 정지, 세계를 향한 분노
와 막강한 사랑, 있는가 싶으면 없고 없는가 싶으면 있는 치
열한 자유, 저 충돌하는 빛의 세계, 빛처럼 사라졌다가 꺼져
버리는 것, 그것을 시인은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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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은 죽어가는 것을 살리는 생명력이다. 밥 한 알 놓여
있는 모양에서 전 우주의 이치와 질서, 그리고 그 엄연한 존
재들의 팽팽한 기운과 긴장, 존재들의 아름다운 조화를 읽
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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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는 반짝이지 않고 지긋한 것이다. 시 속에서 사는 그 어
떤 것도 탐하지 않는다. 우리는 세상을 살아가면서 천지 사
방팔방이 꽉 막혀 더는 어떻게 하지 못하고 아무데나 그냥
쭈그리고 앉아버리고픈 인생의 캄캄한 앞에서 이렇게 탄식
한다.
“인생아, 너를 어쩌럴 허끄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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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봄날, 달빛이 가득했던, 그 봄날 나는 비로소 툇마루
에 나와 앉아 강물에 죽고 사는 달빛을 바라보았다. 강굽이
를 돌며 부서지던 달빛과 물소리, 풀밭 위를 지나가는 바람
의 속삭임을, 바위 속 깊이 파고들던 달빛 울음과 달빛을 받
은 풀잎들의 그 노래를 들었다. 이유가 있을 리 없는 존재
의 아름다운 노래를 나는 들었다. 편했다. 나는 방에 누웠
다. 달빛이 내 몸을 덮어주었다. 나는 새벽잠 깊숙이 빠져
들었다. 강물로 무수히 뛰어들던 눈송이들을 보았다. 그때
두 눈을 뜨고 겁 없이 강물로 뛰어들던 그때, 긴 침묵을 뚫
고 시가 내게로 왔다. 내 지친 발등을 환하게 밝히며, 시가
내게로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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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는 삶의 핵심을 찾아가는 여정에서, 삶의 파편들이 서
로 맞부딪치며 일으키는 현란한 불꽃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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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은 늘 새로운 눈으로 세상을 해석한다. 거대한 사상
이나 거대 담론들도 시의 일상성에는 맥을 추지 못한다. 시
는 인류 앞에서 늘 최초의 말이다. 그 말을 가지고 사람들은
세상의 첫마디를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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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시를 쓴다기보다 시를 그리는 편이다. 가지에 하얀
눈을 가득 안고 있는 겨울 응달의 나무들은 아름답다. 그런
모습은 오래오래 내 가슴에 그려져 있다가 어느 날 문득 시
가 된다. 그 어느 날이 어느 날인지는 나는 모른다. 그러므
로 시인은 오래 기다릴 줄 아는 사람이다. 그 기다림이 오랜
세월 가슴에 묻혀 있다가 시로 살아난다. 시인에게 죽은 것
은 하나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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낡은 말은 세상을 죽인다. 새로운 말을 찾을 때다. 시는
세상을 살리는 말의 축제다. 축제를 잃은 말들이 시가 되어
세상을 두 번 죽인다. 치열함, 삶의 핵심을 간파하는, 살아
나는, 살려내는, 살아 있는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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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에게― 정중하리라. 말을 아끼리라. 조심스럽게 시작
하리라. 오래 참으리라. 오랜만에 오는 연인이리라. 너는
너무 깊고 깊은 데 있어서 내 손은 닿지 않고 내 영혼이 너
를 길어오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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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고급스럽고 점잖은 내실의 예술보다 걸판지고 걸쭉
하고 덜 세련되고 투박하고 서툴고, 그러면서도 그런 것까
지 다 살려 아우르는 민중의 예술을 사랑한다. 나는 심각해
지기를 극히 싫어한다. 어떤 사실의 이면을 될 수 있으면 무
시하고 또 잘 보지 못한다. 나는 그냥 눈에 보이는 것, 마음
에 그려지는 그 무엇을 좋아하고 읽으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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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지함과 진정성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준다. 삶이 그러
해야 하고, 예술이 그러해야 하고, 정치가 그러해야 한다.
인간의 행위가 자연에 가장 가까워야 한다. 그래야 그 빛이
아름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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힘이 있는 글은 현실을 깊이 성찰하는 데서 나온다. 세상
과 같은 눈높이에서 길어올리는 힘있는 생각과 글은 사람
들 마음으로 옮겨가 그 마음을 움직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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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들이 만든 사회는 싱그러운 자연이어야 한다. 사회
를 지탱하는 것은 생명력이다. 이론과 이념의 죽은 말들이
많은 사회는 병든 사회다. 병이 깊으면 회생 불가능하다.
자정 능력이 있는 사회는 건강한 사회다. 그러하니, 죽임으
로부터 끊임없이 싸우는 시가, 철학이, 예술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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훌륭한 그림은 한 장의 그림 속에서 어떤 부분을 떼어놓
아도 독립된 한 세계를 완성해놓는다. 한번 그어내린 붓자
국이 다른 붓자국들과 긴장을 일으키며 동시에 어우러져야
한다. 새로운 세상을 창조해내지 못한 그림은 죽은 그림이
다. 나는 그림 속에 놓여 있는 사물들의 살아 있는 숨결과
그 긴장이 좋다. 그러나 좋은 화가는 다시 그 긴장을 풀어헤
치고 자유를 얻는다. 눈부신 자유를 얻는 일이야말로 모든
예술이 도달해야 할 그 어떤 경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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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명은 시가 아니다. 현상에 대한 즉각 반응은, 자연 현상
이든 역사적, 사회적 반응이든 어떤 것도 해석하고 설명하
게 된다. 소재주의는 시의 초보다. 그에겐 진기珍技가 있다.
그의 시에선 때때로 세계를 드는 무게가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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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은 혁명을 꿈꾸어야 한다. 시인은 본래 혁명가이고
시대를 거부하는 자들이다. 시인의 마음은 늘 메뚜기가 뛰
는 가을 들판 같아야 한다. 때로는 벌집을 건드리는 사람이
어야 한다. 기도가 다 이루어지지 않듯이 모든 혁명도 이루
어지지 않기 때문에 시인은 혁명을 꿈꾼다. 시인만이 진정
한 패배자가 될 수 있다. 패배를 해도 시인은 가을 하늘의
서쪽 노을을 바라볼 줄 안다. 시대에 절망해도 풀꽃이 핀 산
길을 시인은 걷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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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절한 것은 절실한 것이고 절실한 것은 다 절절하다. 그
리움을 가슴 가득 안고 보낸 가을밤의 사랑은 절절하다. 절
절한 것은 감추지 못하고 저절로 우러나온다. 저절로 우러
나와 타는 가슴을 적시는 다디단 생수, 그게 시다. 시여! 콸
콸 솟아라! 상처난 내 살에서.
이게 맞는지 모르겠다
노동은 온몸을 써서 질서를 찾아 완성해가는 일이다. 온
몸이 힘들게 일을 하는 것이다. 온몸에, 가장 많이 써야 하
는 몸에 무리가 가해지는 것이다. 특히 허리를 팔과 다리에
무리하게 가혹하게 쓰는 일이다. 그리하여 아프다. 그곳이
아픈 것이다. 몸을 다 써서 하는 일. 옛날 어른들이 내 몸이
쇠였다면 진즉 다 닳아져버렸을 것이다,라는 말을 많이 했
다. 쇠보다 더 강한 것이 사람의 몸뚱이다.
꽃밭 둘레석을 놓았다. 자연석이다. 아침에 손수레를 끌
고 마을을 돌아다니며 버려진 돌들을 주워 담아왔다. 모양
이 아무렇게 생긴 것들을 주웠다. 두 번 주워왔다. 둘레
석 놓을 자리를 먼저 대충 파놓고 차례차례 한쪽부터 돌을
놓아간다. 앞면과 윗면을 맞추어간다. 아무렇게나 생긴 돌
들을 이리저리 면과 면을 맞추다보면 희한하게도 조금씩
만 땅을 골라도 내가 원하는 모양이 나온다. 돌들을 다 놓
고 바라보면 어쩌면 돌들이 저렇게 서로 맞아떨어지는지
놀랍다.
마당 네 군데 꽃밭 테두리를 다 만들었다. 서로 선들이 잘
맞고 이어져 좋은 모양을 이루어 조화롭다. 마당이 완성되
었다. 전체적인 일관성이 통일을 이루어 체계를 만들어냈
다. 잘되었다. 철학이고 시다. 돌 하나하나가 다 아름다워
전체가 아름답다. 놀라운 성취다. 땅을 파다보면 이따금 개
구리들이 땅속에서 꼬무락거리면서 뛰어나온다. 놀라워 어
쩔 줄을 모르겠다. 지금 나와도 되나. 다른 곳으로 가져다
묻어준다. 이게 맞는지 모르겠다.
사랑 말고는 뛰지 말자
김용택, 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