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채색
1
아침에 시언이가 할머니 할아버지 집에 나 혼자 비행기
타고 간다고 신발 신고 밖으로 나갔단다. 시언이는 여섯 살
내 손자. 지금 시드니에 있다.
2
아내는 날마다 저녁을 먹고, 민해하고 마을 회관에 간다.
따뜻한 방바닥에 몸을 누이고 논다. 점순이 엄마(83세) 큰
집 형수(72세) 주성이 엄마(74세)랑 아무 이야기나 하며 논
다. 고민 없는 대화가 아름답다. 우스울 때 맘놓고 크게 웃
을 수 있다.
3
마을회관에서 이따금 점심을 먹는다. 내가 그 자리에 들
고나는 흔적이 없을 때까지 나는 왔다. 그렇게 되었다. 내
모든 공부가, 아는 것이 다 마을에 소용없어지고 나는 마을
에 없어도 되는 사람이 되었다. 헌옷을 벗고 내 몸에 맞는
새 옷을 입은 듯 지나온 옷이 낡은 옷이 되어 내 사람이 전부
홀가분해졌다.
점심밥을 먹고 회관을 나와 앞산을 보고 서 있다. 앞산 앞
에 마을 사람으로 뒷산 나무처럼 서 있다. 산이 좋다. 처음
이다. 처음이다. 산이 좋다. 푸른 소나무 몇 그루, 참나무와
팽나무와 밤나무 느티나무 밑이 훤히 보이는 그곳에 옛사
람들, 겨울 산이 깨끗하다. 아름답다. 물소리는 바람 불 때
털어냈다.
사랑 말고는 뛰지 말자
김용택, 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