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鶴)
오랫동안 미인은 돌아오지 않고 종이학은 미인의 방으로
들어가 날개를 접었다 미인을 좋아했던 남자들은 왜 하나
같이 안경을 쓰고 있지 않을까 궁금했지만 아무것도 적지
않은 종이를 접는 사람은 없을 거라 믿으며 미인의 방으
로 몰래 들어가 유리관 속의 종이학들을 펴기 시작했다
접힌 고개를 들고 닫힌 어깨를 열고 깨진 얼굴을 곧게 하
고 부러진 다리를 펴고 민자로 내려 접인 날개를 세웠다
학종이가 새로 열어 보인 금에서 일곱 번쯤 넘어져 여덟
번쯤 울고 싶었지만
몸의 피를 데우는 것이 아니라 피를 차갑게 식히는 것이
새들의 내한법(耐寒法)이라는 생각을 하다 말고 보일러
공기구멍을 조금 닫고, 미인의 속옷들을 개어두고, 안개
다 걷힌 강을 춥지 않게 건너는 물의 월동 같은 것들도 생
각해보고, 잘 펴진 학종이를 다시 학으로 접어 창밖으로
날려보내고
언제라도 미인의 방문을 열면 날씨가 꼭 지금 같을 거라
는 것을 알고 있다 숨을 한 번 크게 들이쉬고 방문을 열면
슬프지 않은 표정을 한 미인이 흰 무릎을 곧게 펴 보이고
훨훨
당신의 이름을 지어다가 며칠은 먹었다
박준, 문학동네시인선 03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