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지(冬至)
그때.
(작은 냄비에 두 개의 라면을 끓여야 했던 일을 열락[悅
樂]이나 가는귀라 불러도 좋았을 때, 동짓날 아침 미안한
ㅏ음에 “난 귀신도 아닌데 팥죽이 싫더라” 하거나 “라면
국물의 간이 비슷하게 맞는다는 것은 서로 핏속의 염분이
비슷하다는 뜻이야”라는 말이나 해야 했을 때, 혹은 당신
이 “배 속에 거지가 들어앉아 있나봐” 하고 말해올 때, 배
속에 거지가 들어앉아 있어서 출출하고 춥고 더럽다가 금
세 더부룩해질 때, 밥상을 밀어두고 그대로 누워 당신에
게 이것저것 물을 것도 많았을 때, 그러다 배가 아프고 손
이 저리고 얼굴이 창백해질 때, 어린 당신이 서랍에서 바
늘을 꺼낼 때, 등을 두딜고 팔을 쓰다듬고 귓불을 꼬집
을 때, 맥을 잘못 짚어올 때, “맥박이 흐린데? 심하게 체
한 것 같아” 바늘 끝으로 머리를 긁는 당신의 모습이 낯설
지 않을 때, 열 개의 손가락을 다 땄을 때, 그 피가 아까워
아름다울 가[佳] 자나 비칠 영[映] 자를 적어볼 때, 당신
을 인천으로 내보내고 누웠던 자리에 그대로 누웠을 때,
손으로 손을 주무를 때, 눈을 꼭 감을 때, 눈을 꼭 감아서
나는 꿈도 보일 때, 새 봄이 온 꿈속 들판에도 당신의 긴 머
리카락이 군데군데 떨어져 있을 때)
당신의 이름을 지어다가 며칠은 먹었다
박준, 문학동네시인선 03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