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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야, 네가 나를 몹시 빨아주던 낮과 밤들이 생각
난다. 거긴 새소리도 나지 않았고 눈을 뜨면 언제나
비가 오는 날 같았다. 내 이웃에 있는 것은 카프카와
라디오 한 대뿐이었는데, 하나는 내가 가야 했고 하
나는 내게로 오는 것이었다. 그것 이후와 이전으로
는 아무도 발자국을 남기지 않는 세월이었다. 호두
나무는 왼쪽에서 자라고 모란은 오른쪽과 등 뒤에서
피었다. 한 번도 시들지 않았다. 그냥 서서히 더러워
질 뿐이었다.
그러니까 S야, 네가 빨아주는 동안 나는 감사의
뜻으로 너를 핥아주기라도 했어야 옳았다. 그땐 내
가 형편없이 나빴다. 나는 너를 닦아주는 편이 우리
관계에 더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말은 안 했지만 그
냥 각자에게 좋은 방법대로 하는 게 옳다고 믿었던
것이다. 어차피 우리가 오래갈 수 없는 사이라는 것
을 서로 몰랐을 리 없다.
가끔은 문 앞에 여자가 서 있거나 남자가 서 있었
다. 용건은 늘 같은 거였으니까 눈살을 찌푸리며 굳
이 기억을 떠올리려 노력할 필요 따윈 없다. 네가 나
를 빨아줄 때마다 네게서 흘러나오던 소리들은 지금
껏 너무나 황홀하고 구체적이어서 놀랍다. 그건 이
지상에서 오직 너만 간직하고 있는 소리였다. 네가
소유한 모든 가능성들이 한꺼번에 작동해 쏟아져 나
오는 소리. 나는 네가 나를 기쁘게 해주기 위해 얼마
나 노력하고 있는지 언제나 잘 알 수 있었다. 최선을
다한다는 것이 무슨 뜻인지 그때 조금은 깨달을 수
있었다. 문 앞에 서 있는 여자와 남자는 그냥 문 앞
에 서 있는 여자와 남자일 뿐이었다. 너는 나를 빨아
줬고 나는 너를 닦아줬을 뿐이다.
마지막으로 나를 빨아주고 나서 너는 그만 모든
걸 멈추기라도 했던 것일까. 몸에서 뛰어내리기라도
했던 것일까. 마지막 링거줄이 뽑히듯 전원에서 풀
려난 채 너는 이동되었다. 나는 바닥에 아무렇게나
엎어져 아직 몸에 남은 물기를 어쩌지 못하고 흐느
낄 뿐이었다.
S야, 아직도 나는 네 안에서 꽉 채워져 한데 엉켜
빨리던 날들을 생각한다. 매콤하고 향기롭게 몸이
풀리던 날들이었다. 우리의 날들이 왜 거기서 시작
되고 거기서 그쳐야 했는지 알 도리 없다. 그건 우리
의 몫이 아니었다. 우린 그저 거기서 놓여진 존재대
로 존재할 뿐이었다. 마모되고 해질 뿐이었다. 비록
너는 치워졌지만 나에겐 아직도 빨리어야 할 날들이
남아 있다. 어쩌지 못한 채 나는 지금 또 새로운 구
멍 속으로 들어간다. 내 걸레의 나날을 기억해주렴.
그리운 나의 첫 드럼세탁기, 나의 S야.
어떻게든 이별
류근, 문학과지성 시인선 48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