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떻게든 이별
어제 나는 많은 것들과 이별했다 작정하고 이별했
다 맘먹고 이별했고 이를 악물고 이별했다 내가 이
별하는 동안 빗방울은 구름의 자세와 이별했고 우산
은 나의 신발장과 이별했고 사소한 외상값은 현금지
급기와 이별했다 몇몇의 벌레들은 영영 목숨과 이별
하기도 하였다 어제는 어제와 이별하였고 오늘은 또
어제와 이별하였다 아무런 상처 없이 나는 오늘과
또 오늘의 약속들과 마주쳤으나 또 아무런 상처 없
이 그것들과 이별을 결심, 하였다
아아, 그럴 수 있을까 우리 동네 가난한 극장은 천
장이 무너져서 결국 문을 닫고 수리중,이다 로터리
에서 사라질 것 같다 그것은 어쩌면 극장에서 극장
이 이별당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 옛날 애인은 결국
초경 후 폐경하였다 이별이다 아아, 어떻게든 이 별!
나는 황소표 빨랫비누로 머리 감던 시절을 기억한
다 머리카락이 담벼락과 잘 결합하던 시절이었다 노
란 곰인형을 팔아서 우리 노란 전구를 살까 애인은
남영역으로 천천히 걸어간다 그때 인천행 전동차는
서울역과 이별하는 것이고 내 친구 김세연이는 망을
보는 것이고 삼표 국숫집 리어카는 나를 태우고 한
낮의 전봇대와 충돌하는 것이다 선생님, 더 이상 학
교 다니고 싶지 않아요. 부산항에서 민들레를 봤어
요. 노랗던데,
그러니 나의 이별을 애인들에 알리지 마라 너
빼놓곤 나조차 다 애인이다 부디, 이별하자
어떻게든 이별
류근, 문학과지성 시인선 48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