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강진 3
내가 처음 만주 봉천에 들른 것은
1989년 깊은 겨울날이었다
공항에서 시내로 들어가는 밤길
가로등 불빛 하나 보이지 않았다
칠흑의 어둠
사회주의 중국
아홉살에 처음 이 도시의 이름을 듣고 이십칠년 만에 찾
아왔다
행운 탐험 모험 아웃사이더 혈육 지평선
마음에 떠오르는 단어들이 다 좋았다
호텔 복무원이 포트에 뜨거운 물 가져다주었다
침낭과 이불 둘러쓰고도 추운 밤
포트 속 뜨거운 물이 아침에 꽁꽁 얼어 있었다
잉크병 얼어드는 밤, 이용악의 시가 생각났다
뜨거운 물이 얼음으로 변하는 신비한 호텔의 아침
복무원이 뜨거운 물을 가져다주며 환하게 웃었다
남조선 사람은 처음 본다고 재스민차 두봉지를 내주었다
지상에서 처음 마시는 차
초원 냄새와 꽃향기
거리에 눈발 날린다
차고 따뜻하고 눈물겹다
하얀 솜옷 무명버선 세켤레 겹쳐 신고
어머니가 삶은 옥수수 팔던 날도
봉천 하늘에 눈발 펑펑 내렸을 것이다
지상에 없는 그리운 혈족들이
나의 봉천 입성을 환영해주는 느낌이 있었다
심양시 인민정부 청사
거대한 조각 군상이 눈에 들어온다
중국 내 56개 소수민족을 형상화한 기념 동상
군상은 112명 소수민족 남녀 한쌍을 새겼다
일만 이천 킬로미터 대장정을 마친
중국 홍군의 위대한 여정을 형상화한 작품
군상 주위를 천천히 한바퀴 돌았다
저고리와 치마, 흰옷 입은 조선 처녀 총각의 모습
깊은 울림과 함께 아쉬움이 있었다
만약 내가 이 기념 군상의 공동창작에 참여했다면
오른쪽 어깨에 총을 메고
왼쪽 어깨에 얼후를 두르고
말달리는 외삼촌의 모습을 새겼을 것이다
머리에 진달래꽃 꽂은 조선 처녀가
한 손으로 외삼촌 허리를 안고
한 손에 총을 들고
함께 세상의 끝
달려나가는 모습 새겼을 것이다
꽃으로 엮은 방패
곽재구, 창비시선 45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