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령들의 밤 당구
“잔디밭이 곧 세계였다.”
―버지니아 울프,『등대로』*
모닝 당구장 회원들은 당구를 좋아하고 큐대가 닳아서
키 작은 아이만 해질 만큼 당구에 열심이고
부푼 마음속 녹색 잔디밭을 꿈꾸듯 누비고만 싶은데
알맞은 스핀과 적절한 구속이란 건…… 멀고 잔디밭은
끝나지도 사라지지도 않고 열심 말고 다른 걸 알기엔
머리를 못 쓴다 있는 힘껏
쟁이질을 하고 흰 울타리를 치고 맨날 울고
밥은 매일 똑같고
틈만 나면 분무기로 잡풀에 제초제를 뿌려 보지만
잔디만 다 죽이고
집 앞 아스팔트 밑바닥에 얼굴을
한 장
한 장 쌓아 올리다가
밤이면 와장창 다 깨뜨리고 구름이 훌쩍이는 소리나
듣겠지 듣다가 유령처럼 모여 이목구비 없는 민둥한
얼굴을 부드러운 녹색 당구대에 올려놓는 것이다
짜리몽땅 큐대를 허리 뒤로 쏙
뺐다가 단번에 밀어치면
데굴데굴
굴러가는 얼굴들이
부딪칠 때 나는
딱!
하는 소리가 중요하다 얼마나
맑고 투명했는지
1점부터 5점까지
점수가 높을수록 좋은 소리라고
한다면
1점: 너무 열심히 하셨습니다
2점: 너무 열심히 하셨습니다
3점: 너무 열심히 하셨습니다
4점: 당신은 정말이지 너무 열심히 하셨습니다
5점: 당신은……
이제 그만하셔도 되겠습니다
그만하지도 못하고
베레모를 쓰고 팔뚝에 흰 손수건을
묶은 선원이나
매일 아침 따돌림당하는
홀쭉한 배관공 꽃집 주인의 점수표는 매번
……
물론 밤은 길고 베갯잇이 젖고 서투른 마쎄이에 녹색
이마가 찢겨도 내일 밤은 오고 웃고 그렇지만 아무래도
다음번엔 꼭 더 좋은 경기를 하기로
모닝 당구장 회원들은 굳게 약속했다
약속했다 인생은 즐겁고 좋은 것이다 그러니까
녹색 잔디는 부드럽고
푹신하다 녹색 잔디밭에 누워서 내일을 생각하면
등이
따갑다
완벽한 개업 축하 시
강보원, 민음의 시 28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