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도나무 기르기 수업
또 다시 학교였다
이번에 새롭게 바뀐 규정에 의거하여…… 여러분을
집에 돌려보내지 않기로 했습니다
여러분들과 마찬가지로 저도 안타깝
그래
포도밭에 옹기종기 모여 포도나무 뿌리를 두드리는데
똑같은 옷을 입은 사람들이 많다. 똑같은 옷을 입었는데
다들 얼굴이 달라서 신기하다. 입술이 두껍고 무슨 어부
처럼 생긴 애. 눈이 찢어지고 볼에 장난기가 많은 애. 포도
알갱이를 몇 개나 따야 집에 돌아갈 수 있으려나. 야. 나 오
늘 이거 다 꿰매고 아이스크림 사 먹을 거야. 발치에 모종
삽을 던져 두고 장갑 열 손가락을 꿰매던 애가 말한다. 그
래. 실습이 끝나면 교실로 돌아가 이론 수업을 한다. 우리
는 포도나무가 자라기에 알맞은 계절, 알맞은 습도, 흙의
알맞은 부드러움의 정도, 포도나무가 좋아하는 노래와 노
래를 잘 부르기에 알맞은 호흡법을 배우고 후 하 후 하 리
듬에 맞추어 숨을 쉬어 본다. 고음이 안 되는 애는 잠을
안 재운다.
정원사가 될 것도 아닌데 이런 걸 시켜. 그런데 포도나
무 기르는 게 정원사 맞아?
나는 잠이 많은 편이라 목이 터져라 발성 연습을 하는
동안 아이스크림이 녹는 몇 번의 여름이 지나고 또 다시
지루한 알약들
미친
구름들
이민 가는 참새들…… 어느 날은
편하게 잠 좀 자자고 이 모든 짓을 매일
반복하는 것에 지쳐 버렸다
애초에
나무가 노래를 들을 수 있는 건가?
나는 포도를 좋아하지도 않아
싫어해
심지어 노래도……
그래
그걸로
끝이었다
밀린 방세 때문에 돌아갈 집은 애저녁에 없어졌고
어떻게 다시 집을 구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더 이상 교장의 분홍색 셔츠를 보지 않아도 되는 건
좋았다
후 하 후 하
이제부터는 아무것도 돌이킬 수가 없을 것이다
그래도
포도나무가 자랐지
다시 볼
일은
없겠지만
완벽한 개업 축하 시
강보원, 민음의 시 28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