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고만 있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어. 무슨일인지 말하렴."
남자는 한쪽 무릎을 꿇고 아이의 등을 잡아 가슴에 안았다.
아이의 울음소리는 남자의 웃옷을 반쯤 적시고나서야 잦아들었다.
그럼에도 모자란지 아이의 떨리는 어꺠는 멈출줄을 몰랐다.
"우는 것도 힘들지? 물을 마시러 가자."
남자는 아이를 안아올려 팔로 엉덩이를 받쳐주었다.
남자가 우물까지 터벅터벅 내려오는동안 아이는 여전히 남자의 어깨를 적시기를 멈추지 않았다.
"호두가아... 나더러 애미없는 년이라고 했다고오."
울음을 멈추고 겨우 꺼낸 첫마디가 끝나기 무섭게 서러움을 못이겨 다시 울음이 나왔다.
"호두가 그랬어? 애미없는 년이라고? 그 냇가에 사는 호두가?"
두레박에 얼굴을 묻은채 하염없이 마시는 것이 끝나자 남자가 물었다.
"응. 냇가에 사는 호두가."
차디찬 우물물에 기운을 차렸는지 떨림없는 목소리로 아이가 대답했다.
하지만 아이의 두 볼에는 우물물로 식힐 수 없는 뜨거운 방울들이 여전히 흘러내렸다.
"가자. 호두네로."
"싫어. 호두 보기 싫어."
"그럼 호두 안볼거야?"
"응. 안볼거야."
"영원히?"
"영원히."
"정말로?"
"..."
"..."
"...그치만 호두가."
말이 채 끝나지 않았지만 남자는 기다리지 않고 아이를 안아올렸다.
냇가로 향하는 그의 발걸음은 우물에 갈 때보다 좀더 무겁고 빨랐다.
아이가 만든 눈물자죽들이 마르기 전에 냇가의 흐르는 물소리가 귓가를 맴돌기 시작하자 우물만큼이나 찬 바람이 등을 두들겨서인지 호두의 시린 말소리가 가슴을 때려서인지 아이의 어깨는 다시금 떨리기 시작했다.
남자는 아이를 평상에 앉히고 문을 향해 입을 열었다.
"개암이 있냐. 우리 딸아이때문에 왔다."
이윽고 문이 열리며 안에서 잿빛을 띄는 거구의 사내가 나왔다.
"고사리, 무슨일이야. 달래가 아픈가?"
"무척 아프지. 네 아들녀석 덕분에 말이야."
"우리 호두? 호두가 왜. 무슨일이 있었나?"
"호두가 우리 달래한테 아주 심한말을 했다고 들었지. 혹시 호두한테도 들어볼 수 있을까?"
"호두야. 나와라."
그러자 안에서 아이가 천천히 걸어나왔다.
사내의 뒤에 숨어서 쭈뼛거리는 꼴이 여간 죄인이 아니었다.
달래는 그 꼴이 보이자 고개를 냇가로 돌렸다.
"호두. 네가 달래에게 어떤 말을 했는지 이 아저씨에게도 말해줄 수 있겠니."
"..."
호두의 입은 쉽사리 열리지 않았다.
마치 그가 뱉은 말의 무게가 그의 입을 짓누르는 것처럼.
"호두."
개암이 그의 서슬퍼런 이를 드러내며 호두에게 부르짖었다.
"말해라."
"그게요."
"호두."
호두는 개암이 드러낸 이가 내는 빛에 찔리기라도 한듯 눈을 질끈 감았다.
침을 한번 삼키고 나서야 그를 마주 할 수 있으리라.
"호두."
"달래한테 애미가 없는 년이라고."
힘겹게 눈꺼풀을 들어올린 호두의 눈에 다시금 개암의 어금니가 비치자 말을 잇지 못했다.
개암의 두껍고 거친 손이 호두의 어깨에 올라가자 아프게 짓누르는 듯 했다.
"달래한텐 해도 되지만 다른 사람한테 들켜선 안된다고 생각한거야?"
"..."
"지금 달래에게는 미안하지도 않구나. 내가 무서운거지."
"..."
개암은 그의 어금니를 거두고 고사리에게 눈을 돌렸다.
호두에게 올려두었던 손도 거두었지만 호두는 여전히 그의 손이 올라가 있는 듯 어깨가 무거웠다.
"고사리. 내가 정말 미안해. 우리 아이가 버릇이 없었군."
"난 괜찮아. 다만 달래가 말이지."
"달래."
한껏 따뜻해진 개암의 목소리가 달래를 불렀다.
달래의 눈은 여전히 냇가의 흐르는 물줄기를 쫓고 있었다.
"이 아저씨가 호두를 혼내서 꼭 달래한테 사과하게 해줄게. 정말 미안하구나."
개암의 말이 끝나도 여전히 달래가 고개를 돌리지 않자 고사리가 달래의 앞에 섰다.
"달래야."
"..."
고사리의 표정이 냇물 가운데 우두커니 들어선 돌덩이만큼이나 어두워졌다.
그런 고사리의 맘을 아는지 모르는지 달래는 고사리를 보는 척도 하지 않았다.
"지금 이대로 가면 호두의 엉덩이에 불이 나도록 개암 아저씨가 때려줄거야."
"..."
"많이 아플거야. 달래가 보기 싫어질만큼."
"..."
고사리는 평상위로 올라가 뒤에서부터 달래를 끌어안았다.
냇가의 물바람에 차디차게 식은 달래의 등에 가슴을 붙여 데웠다.
"분명 호두가 먼저 그랬지만 정말 다시는 안볼거니."
달래는 등이 따스해지는 걸 느끼며 고사리에게 눈을 돌렸다.
"확실하게 정하렴."
고사리는 달래의 찬 손을 잡았다.
"다시 볼지 안볼지. 지금 확실하게 정하는 거야."
달래의 눈길이 개암에게 닿았다.
그리고 서서히 밑으로 내려가 호두를 쫓았다.
개암의 뒤에 있는 호두의 얼굴은 보이지 않았지만 옷자락을 하염없이 매만지는 꼴은 분명 시린 냇가의 바람때문이 아니리라.
"저 아무것도 모르는 호두를 가르쳐줄지 아님 그대로 내버려둘지."
고사리가 쥐어준 달래의 손은 더 이상 시리지 않았다.
그리고 단단하고 굳세게 주먹이 쥐어져있었다.
"이 미운 호두를 다시는 보지 않아도 좋고, 아니면 지금 호두가 뭘 해야하는지 알려주는 것도 좋아."
고사리는 왔을때처럼 달래를 들어안았다.
달래가 옷을 적신 자국은 바람에 말라 사라진지 오래였다.
"개암이. 우린 갈게. 호두야. 내일은 꼭 달래한테."
"내려줘."
내려진 달래는 숨을 들이켰다.
호두와 냇가를 달릴 적보다 더 크게.
그리고 그대로 호두의 코에 주먹을 박아 넣었다.
"애미없는 년이라고 한거 사과해!"
"우아아아아아아-."
호두는 아까 달래가 울던 것보다 더 큰 소리로 울음을 터뜨렸다.
그와 동시에 호두의 코에서도 피가 터져나왔다.
"놀려놓구 네가 왜 우는 건데!"
울며 쓰러지려는 호두를 개암이 붙잡았다.
그의 입가엔 옅은 웃음이 서렸다.
"호두."
낮지만 따뜻한 개암의 목소리가 호두를 불렀다.
"미안하다고 말해라."
개암의 거친 손이 호두의 등을 부드럽게 밀었다.
터져나오는 코피와 눈물을 닦지도 못한 채 젖은 입으로 힘겹게 말했다.
"달래야, 미안해. 내가 나쁜말 해서 아프게 해서 미안해."
"자 화해의 포옹도 하고."
고사리가 달래를 돌려 호두와 포옹시켰다.
"미안해애애애애-."
호두의 울음소리가 냇가에 울려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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