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시가 되자, 우린 집사를 따라 홀 뒤편에 있는 지하계단으로 내려갔다. 가스램프가 켜진 어두운 나선형 계단을 내려가자 은은한 조명 아래로 작은 무대 앞에 앉은 히치콕의 뒷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그는 객석 중앙에 놓인 유독 커다랗고 푹신해 보이는 가죽소파에 앉아 있었다.
“안녕하세요. 대부님.”
피글렛이 명랑한 목소리로 인사를 건네자 히치콕은 옆에 놓인 딱딱한 나무 의자를 가리키며 앉으라고 손짓했다. 그녀는 그와 나란히 앉는 게 영광스러운 듯 미소를 머금으며 냉큼 자리에 앉았다.
우리는 히치콕의 좌우 자리에 늘어서 앉았다. 나는 맨 오른쪽 끝자리를 골랐다. 장막 너머로 부스럭 거리는 소리와 함께 서로 분주하게 지시를 내리는 작은 소리가 새어나왔다. 나는 목을 뒤로 빼고 왼편에 앉은 히치콕을 슬쩍 바라보았다. 그는 이제껏 보인 적 없는 해맑은 얼굴로 장막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진심으로 이 공연에 기대를 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도대체 뭘 준비했길래.
드디어 붉은 장막이 걷혔다. 작은 무대에는 대충 가난한 집안을 묘사한 듯 작은 나무식탁과 의자에 조잡하고 낡은 의상의 남녀가 앉아 있었다.
“으어르러르릭.”
“무어마르노스라”
난 내 귀를 의심했다.
그들은 대화를 나누는 게 아니라 옹알이를 하는 아이처럼 서로에게 흐물거리는 괴상한 음성을 주고받았다. 옆에 앉은 머저리들도 당황스러운 기색을 숨기지 못했다. 그들은 계속 그런 식으로 웅얼거리며 연기를 이어나갔다.
일단 그 충격에서 벗어나 이 어설픈 연극을 무언극이라 치고 무슨 내용인지 이해하려 노력했다. 미루어보건대 그들은 가난한 중년부부로 당장 먹을 끼니도 구하지 못해 한탄하고 있었다.그런데 왜 저렇게 웅얼거리지? 대사를 알아듣기 힘든 집주인을 위해 무성연극이라도 하는 건가? 그때 갑자기 무대 계단을 통해 칼을 든 남자가 뛰어올라왔다. 대략 강도인 듯 했다. 그 역시 아무렇게나 지껄이며 칼로 그들을 위협했다. 대충 가지고 있는 걸 내놓으라고 윽박지르는 것 같았다. 하지만 부부는 바구니의 사과를 가리키며 내놓을 게 이것 밖에 없다고 울상을 지었다. 강도는 잔뜩 화가 난 듯 쿵쿵 뛰며 길길이 날뛰었다. 그러자 부부는 뜬금없이 손을 맞잡고 춤을 추며 한바탕 쇼를 펼쳤다. 이후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그 모습에 감동한 강도가 칼을 무대 바닥에 칼을 내리 꽂더니 식탁에 놓인 사과로 저글링을 하는 게 아닌가!
헛웃음조차 나오지 않는 어처구니가 없는 전개였다. 다들 얼얼한 표정으로 서로의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 그때, 히치콕이 자지러지게 웃기 시작했다. 무대를 보니 강도와 가난한 부부는 이제 둘도 없는 이웃이라도 된 듯 손을 맞잡고 함께 경쾌한 춤을 추기 시작했다. 축제라도 펼쳐진 듯 신나는 몸놀림이었다. 그때, 또 다른 청년이 무대 위로 올라왔다. 그는 짐승의 고함소리 같은걸 내며 격하게 울어댔다. 그리고 강도를 향해 손가락질을 하며 또 고함을 질렀다. 가난한 부부는 청년에게 달려가 껴안으며 부둥켜 울었다. 아마 오랫동안 집을 떠나 있었던 아들이었던 것 같다.
잠시 후, 청년은 무대 바닥에 꽂힌 칼을 집어 들었다. 난 그가 진짜 뭔 짓을 벌이지 않을까 무서웠다. 그들의 연기는 어설펐지만 어딘가 필사적인 구석이 있었기 때문이다. 온 근육을 쥐어짜는 듯한 저 몸놀림은 마치 살기위해 발버둥치는 야생동물 같았다. 난 혹시 이 미친 작자가 사람을 찌르는 쇼를 보여주지 않을까 두려워졌다. 정말 그러고도 남을 작자니까. 칼을 든 청년은 강도를 향해 그르렁댔고 강도는 무어라 해명하려는 듯 의기소침한 소리로 웅얼댔다. 그 순간, 청년이 칼을 들고 달려들었다. 하지만 다행히도 가난한 부부가 청년을 막아내면서 사건은 일단락됐다. 그때, 천사날개를 단 여자 두 명이 무대에 올라와 청년을 둘러싸고 탬버린을 흔들며 즐겁게 춤을 추었다. 그러자 청년은 칼을 내려놓고 성호를 긋더니 서글픈 울음소리를 냈다. 가난한 부부와 청년, 강도가 머리를 맞대고 울면서 공연이 끝이 났다.
히치콕은 손수건을 꺼내 코를 풀며 퉁퉁 부운 얼굴로 닭똥 같은 눈물을 흘렸다. 돈 주고도 구경 못할 기상천외한 광경이었다. 장막이 내려가자, 그는 힘겹게 자리에서 일어나 격한 박수를 쳤다. 그러자 더 웃긴 상황이 벌어졌다. 머저리들도 그를 따라 다 함께 기립박수를 치는 것 아닌가. 히치콕은 하인의 부축을 받으며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다. 피글렛은 히치콕이 공연장을 나갈 때까지 그를 향해 박수를 쳤다.
“방금 뭐였지?”
내가 그들에게 말했다.
“몰라. 그냥 올라가서 와인이나 마실래.”
벅스 버니가 귀찮다는 듯이 손사래를 쳤다.
일어나려는데, 갑자기 장막이 올라가며 무대 조명의 환한 빛이 우릴 비췄다. 무대 위에는 집사가 홀로 서 있었다.
“잠시 그대로 앉아주시죠.”
무거운 엉덩이들이 다시 딱딱한 나무 의자에 달라붙었다. 뒤에 있던 하인 2명이 종이쪼가리를 우리에게 건넸다. <재판정>. 내가 쓴 원고의 제목이 눈에 들어왔다.
“어제 작가님께서 쓰신 이 대본으로 내일 저녁 9시에 공연을 하게 될 겁니다.”
“뭐라고요?”
벅스 버니가 이해하지 못한 듯 물었다.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물론, 대본 수정은 공연 전까지 얼마든지 가능하고 필요한 소품은 무대 뒤에 있습니다.”
그는 아랑곳하지 않고 외운 대사를 읊듯 계속 지껄였다.
“갑자기 무슨 말을 하는 거야!”
내가 외쳤다.
“제 말이 어렵나요?”
“연극이라면 아까 본 그...”
정신과 의사가 말을 흐리며 미간을 찌푸렸다.
“누가 어렵다고 물었어? 계약에 연극을 하란 내용은 없었잖아!”
나는 무대 위로 올라가 집사의 얼굴에 대고 고함을 쳤다.
“내려가시죠.”
그가 얼굴에 튄 내 침을 닦아내며 말했다.
“미친 졸부놈 딸랑이 주제에 누구한테 명령이야?!”
내가 그의 멱살을 잡자 내 뒤통수에 무언가 닿았다. 그리고 영화에서 많이 들었던 펌프액션의 ‘철컥’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하녀가 엽총을 내 머리통에 겨누고 있었다. 나는 놈의 멱살을 천천히 풀고 한동안 우두커니 서있었다.
“내려가세요.”
놈이 너그럽게 말했고 나는 군말 없이 자리로 돌아가 앉았다. 엽총을 맨 하녀 둘이 집사의 등 뒤에 섰다.
“말했다시피 대본 수정은 공연 전까지 얼마든 가능합니다. 무대 뒤에 소품이 있으니 필요한 것들을 미리 확인해보셔도 됩니다.”
***
우린 3층 객실로 돌아왔다. 다들 이 개 같은 연극을 해야만 한다는 사실에 동의했다. 그들은 내 대본을 보고 일단 무대에 오르는 인원이 11명이 된다는 사실을 지적했고 나는 짜증을 참지 못하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내가 이 개짓거리를 하게 될 줄 알았어? 고치고 싶으면 당신네들이 직접 고쳐!”
“우리 중 글을 쓰는 사람은 당신뿐이잖아. 안 그래?”
부랑자가 그렇게 말하고 다른 사람들을 둘러봤다. 다들 별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손가락 하나 까딱하기 싫은 병신들만 모아놨네.”
“뭐라고? 병신? 우릴 더러 지금 병신이라고 했어?”
피글렛이 대본을 바닥에 패대기치며 소리쳤다.
“다들 진정해요. 등장인물을 6명으로 줄이기만 하면 해결될 일이잖아요.”
정신과 의사가 나서 애써 상황을 수습했다.
“작가님, 그러지 말고 마저 대본 수정을 맡아줘요. 어쨌든 이 대본은 작가님 작품이잖아요.”
“난 그런 ‘작품’ 쓴 적 없는데요.”
“맞아. 작품이 아니라 쓰레기지. 읽다가 지루해서 토할 뻔했거든.”
소파에 파묻힌 벅스 버니가 눈을 비비며 말했다. 더 이상 화를 낼 기운조차 없었다. 그때, 의사가 나를 붙잡고 응접실 창가로 이끌었다.
“까놓고 말해 저 인간들은 수준이하에요. 당신말대로 병신이 따로 없죠. 한 달 간 함께 지내야 하니 어쩔 수 없이 맞춰주는 것뿐이지.”
그가 응접실에서 모여 있는 사람들을 향해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이봐요. 지금 그게 문제가 아니에요. 계약에 없던 걸 요구하며 총으로 위협했잖아요. 이대로 있다가 험한 꼴을 당할지 누가 압니까?”
“설마 진짜 죽이기야 하겠어요. 그래도 시키는 대로만 하면 백만 달러를...”
나는 걸쇠를 풀고 양쪽 창문을 열었다. 서늘한 가을바람이 안으로 스며들었다.
“우리 둘이라도 이곳에서 나갑시다. 밤에 침대 시트를 몇 개 묶어서 연결하면 창문으로 내려갈 수 있어요. 담벼락도 서로 도우면 넘을 수 있고.”
“미쳤어요? 그런 객기를 부리다 목뼈가 부러지는 겁니다. 첫 해부실습 시간에 나온 시체의 사인이 바로 그거였다고요!”
“목뼈고 나발이고 갈수록 심한 요구를 할 게 눈에 선하잖아요. 무대에 오른 사람들이 무슨 짓까지 하는지 제대로 못 봤어요? 이러다 그 미친 작자의 발을 핥아야 할지도 모른다고요!”
의사 양반은 곤란한 표정을 지으며 안경을 고쳐 썼다.
“그럼 그쪽 계획은 최후의 수단으로 두고 일단 며칠 상황을 지켜보죠. 솔직히 나도 뭔가 잘못 돌아가고 있다는 느낌은 듭니다. 아까 공연도 꺼림칙하고... 작가님은 인원에 맞춰서 수정원고를 쓰세요. 저 인간들은 연기지도는 제가 담당 하죠.”
“나 혼자라도 나갈 겁니다.”
의사 양반은 나를 바라보며 한숨을 쉬었다.
“맘대로 하세요.”
그리고는 머저리들에게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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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드렁크 타이핑 6화 - 귀머거리의 저택(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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