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 4시에 누웠지만 아침 7시에 일어났다. 열쇠로 복도 문을 여는 소리가 들렸기 때문이다. 나는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 밖으로 튀어나갔다. 복도 문이 활짝 열려있었고 마침 집사가 엘리베이터를 잡아탈 찰나였다.
“이봐!”
내 외침에 그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왜 어제 밤에 문을 잠갔지?”
“밤 12시가 되면 객실로 통하는 복도 문은 닫힙니다.”
“그게 규율이오? 우릴 감금한 거나 다름없잖소?”
“아뇨. 계약서의 세부 조항에 명시되어 있는데 보지 못하셨나요? 밤 12시부터 아침 7시까지는 복도문은 잠깁니다.”
난 잠시 얼빠진 얼굴로 서 있었다.
“그건 그렇다 치고 왜 여긴 전화가 안 됩니까? 인터넷도 잡히지 않던데요?”
“저택에 전파방해 장치가 있어요. 대부님께서 그런 것들을 싫어하시거든요.”
“전파방해 장치? 그것도 세부 조항 중 하나요?”
“아뇨, 그건 이곳의 규율입니다.”
“환장하겠네.”
“9시에 대부님과 아침식사가 준비되어 있으니 손님들께 전해 주시겠어요?”
“잠깐! 잠깐 내려가지 말고 그대로 기다려요.”
나는 어젯밤 타자기 옆에 놓아둔 원고를 들고 나와 집사에게 건넸다.
“감사합니다.”
“여섯 명이니까 한명씩 돌아가면서 쓰면 됩니까?”
“저도 그 부분은 모릅니다. 계약기간이 한 달이라는 것 외에는...”
“그러지 말고 귀띔이라도 해줘요. 대충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잖아요?”
“정말 모릅니다.”
그 자식은 미소를 띠며 태연하게 거짓말을 했다.
나는 침대로 돌아가 다시 잠을 청했다. 아침 8시, 복도에서 들려오는 육중한 발자국 소리가 날 깨울 때까지 말이다. 내 침대 맞은편에 벽시계가 걸려있어서 그 시간을 정확히 기억할 수 있었다. 갑자기 방문을 노크하는 소리가 들리더니 덩치 큰 하인 한 명이 들어왔다.
“청소 시간입니다.”“청소? 지금 말고 나중에 와요. 나중에!”
내가 이불 속에서 손사래를 쳤지만 그는 아랑곳 하지 않고 침대로 다가와 두 팔로 나를 번쩍 들어올렸다.
“미쳤어? 뭐하는 거야!”
그는 발버둥치는 나를 책상 옆 바닥에 내려놓더니 침대시트와 베개를 들고 복도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는 세탁함에 그것들을 넣어두고 새 침구류를 들고 다시 들어와 능숙한 솜씨로 침구류를 정리했다. 그리고 소독약으로 테이블과 소파의 방석들을 뿌리고 손걸레로 열심히 닦았다. 난 그 무지막지한 룸서비스에 마지못해 복도로 나와야 했다. 내 옆으로 방에서 쫓겨난 손님들이 잠에서 덜 깬 듯 눈을 비비고 하품을 해대며 이 어처구니없는 상황이 당연한 듯 그저 구경만 하고 있었다. 나는 사람들이 복도에 모여 있는 동안 9시에 식당으로 내려가 히치콕과 아침식사를 해야 한다는 사실을 전했다.
일사 분란한 청소는 8시 30분에 끝났다. 난장판이 된 응접실이 말끔하게 돌아왔다는 점만큼은 좋았지만 앞으로 매일 아침마다 이런 식으로 쳐들어올 거란 생각이 들자 끔찍한 기분이 들었다. 내겐 돈을 받을 수 있다는 확신이 필요했다.
8시 50분이 되자 우린 그 웃기는 엘리베이터를 타고 1층으로 내려갔다. 홀에는 집사가 어슬렁거리며 나오는 우리를 발견하고 다가와 식당으로 안내했다. 식당에 도착하자 히치콕이 그 기괴한 그림 아래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식탁에 앉자 네잎 클로버가 얹어진 감자스프가 올라와 있었다.
“다들 어젯밤은 편안히 주무셨소?!”
고막을 찌르는 큰 고함소리에 잠을 확 깰 지경이었다. 다들 어색하게 웃으며 빈 말을 꿍얼거렸다. 그때, 하인과 하녀들이 식당으로 들어와 우리가 앉은 의자 뒤에 섰다.
“잠이 잘 오지 않더군요. 이 모든 게 헛짓거리가 아닐까 하는 생각 때문에.”
다들 치켜뜬 눈으로 날 쳐다봤다.
“막말로 한 달 동안 감금된 생활을 해야 하잖아요. 진짜 100만 달러를 받을 수 있다는 확신이 있다면 모를까...”
“그건 걱정 마시오. 난 약속은 꼭 지킵니다.”
“그래요. 대부님께서 보장하신 다잖아요. 게다가 감금이라뇨? 누가 우릴 감금했나요?”
“흥청망청 퍼마시느라 기억 못하나 본데 어제 밤에 저 집사가 복도 문을 잠갔다고요! 자정이 되면 우릴 가두는 조항이 계약서에 적혀있답디다! 게다가 여긴 통화조차 안돼요! 무슨 전파방해장치 같은 게 있다나?!”
내가 전원이 꺼진 폰을 흔들며 핏대를 세웠다. 히치콕 때문에 눈치가 보여 무어라 대답하지 못해 화를 삭이는 벅스 버니의 표정이 아주 볼만했다.
집사는 몸을 숙여 히치콕에게 귓속말로 내 말을 전달했다.
“돈 뭉치라도 보여줘요. 아니면 계약이고 나발이고 당장 떠나겠소.”
나는 내친김에 그렇게 질렀다. 히치콕은 나를 지그시 바라보더니 양 팔을 탁자 위로 얹었다.
“보여드리게.”
그의 말에 등 뒤에 있는 6명의 시종과 하녀들이 모두 식당 밖으로 빠져 나갔다. 잠시 후, 그들은 가죽으로 만든 서류 가방을 하나씩 들고 들어왔다. 그리고 식탁에 앉은 사람들 옆에 그걸 하나씩 올려두고 가방을 열었다. 거기엔 100달러 지폐뭉치가 가득 차 있었다. 조금 전 내 의심이 눈 녹듯 사라졌다. 다들 너무 놀라고 기쁜 나머지 경악을 금치 못했다. 그들의 얼굴은 눈앞의 요리를 탐할 때와 비슷하면서도 조금 달랐는데 저 돈으로 뭘 할 수 있을지 상상의 나래를 펼치는 듯 눈이 흐리멍덩했다. 다만 부랑자는 기괴한 방식으로 몸을 떨었다. 일종의 공포심을 느낀 것 같았다. 히치콕이 눈짓을 하자, 하인과 하녀들이 가방을 닫고 식당 밖으로 나갔다. 그들과 나는 마치 어린 아이를 멀리 떠나보내는 부모들처럼 식당 쪽 입구를 향해 눈을 떼지 못했다.
“정확히 29일 뒤에 이 가방을 가지고 나가실 수 있습니다.”
집사가 말했다.
“그 동안 시키는 대로만 하면 되는 거죠? 맞죠?”
피글렛이 치켜뜬 눈으로 집사를 향해 물었다.
“네, 협조해주십시오.”
집사의 너그러운 말에 그녀는 선생님에게 칭찬을 받은 어린아이처럼 순박한 미소를 띠었다. 정말 뭐든 할 것만 같았다. 예를 들어 살인이라든지... 난 ‘협조’라는 집사 자식의 단어가 심히 거슬렸다. 그래서 앞으로 무슨 ‘협조’를 해야 하는 지 따져볼까 고민하다 그만두었다. 아마 이 자리에서 그 말을 꺼냈다가는 감자 스프가 담긴 그릇이 내 얼굴을 향해 날아 올 테니까. 하긴 나 역시 돈다발을 보고 반쯤 정신이 나가버렸으니 무슨 말이 더 필요하랴.
그렇게 나를 포함한 6명의 머저리들은 고분고분한 손님이 되었다. 아침식사를 마치고 우린 정원을 산책했다. 3미터 높이의 담장으로 둘러싸인 저택의 정문에는 전에 보지 못했던 건장한 하인 두 명이 지키고 서 있었는데, 허리춤에 칼집을 차고 있었다. 장식용인지 진짜 칼인지는 모르겠지만 정문에 다가오는 나를 주시한 채 금방이라도 달려들 것 같은 사냥개 같은 표정을 짓고 있어서 별수 없이 정문 쪽으로 다가가는 걸 포기하고 분수대 쪽에서 낄낄거리며 행복해하는 등신들을 향해 발길을 돌렸다.
그 날 점심과 저녁은 시종들이 트레이를 식당으로 끌고 와서 서빙을 했다. 그들은 어제와 비슷한 수준의 만찬에 흡족하며 내선전화기로 브랜디와 와인을 요구했다. 게걸스럽게 그걸 먹어치우고 또 고주망태도 되도록 술을 마셨다.
“작가 양반, 뭐가 그렇게 불만이야?”
술에 취한 피글렛이 내게 말했다. 작가 양반은 이제 내 공식 명칭이 되었다.
“맞아! 뭐가 불만이야? 말 해봐. 말 해봐!”
벅스 버니가 꼬인 혀로 말했다.
“당신들이 불만이 없는 게 불만이야.”
난 예민한 신경을 조금이나마 억누르기 위해 내 앞에 놓인 잭콕을 들이켰다.
“살면서 그런 해괴한 소리는 처음 듣는구먼. 작가 양반, 당신 성질에는 문제가 있어 보여. 성질 좀 죽여!”
이번에는 칠면조 다리를 손에 쥔 부랑자가 입을 열었다.
“그래! 맞아. 성질 좀 죽여!”
벅스 버니가 흐느적거리며 또 맞장구를 쳤다. 그러더니 옆에 앉은 정신과 의사의 어깨를 두들기며 물었다.
“의사 선생님. 저 사람의 정신적인 문제점이 뭐죠?”
정신과 의사가 내 눈치를 보며 멋쩍게 웃었다.
“딱히 문제점이랄 건 없지만 말하자면 스트레스 상태죠.”
“의사들은 늘 입만 열면 그저 스트레스 탓이지. 하지만 난 알아. 저 인간은 분명 치명적인 문제점이 있어. 오늘도 대부님 앞에서 날 모욕했잖아! 흥청망청 술을 마셨느니 뭐라느니!”
갑자기 그녀의 말투가 신경질적으로 변했다.
“그건 내가 사과하지.”
나는 못이기는 척 나지막이 말했다. 하지만 그들의 질책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당신은 너무 거만해. 너무 너무 거만해. 게다가 너무 이기적이야.”
이번에는 안경을 쓴 주황머리가 입을 열었다. 그녀는 ‘너무’라는 단어와 사랑에 빠진 게 틀리없었다.
“당신 때문에 우리가 불이익을 받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안 해봤어? 이건 인생을 바꿀 기회야. 그 큰돈을 주겠다는데 그냥 잠자코 있는 게 그렇게 어려워?”
이번에는 피글렛이 목소리를 높였다.
“그래. 닥치고 조용히 있는 게 그렇게 어려워?”
벅스 버니는 이번에도 내 신경을 긁었다. 타조처럼 생긴 그녀의 작은 두개골을 부여잡고 힘껏 박치기를 하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그때, 복도에서 발걸음소리가 들리더니 집사가 모습을 드러냈다.
“식사를 마치고 9시에 홀로 모여주시죠. 공연이 준비되어 있습니다.”
“공연이요?”
피글렛이 물었다.
“네, 지하 1층에 공연장이 있으니 홀로 내려오시면 안내해드리죠.”
난 이 미치광이 부자가 또 무슨 수작을 벌일 것 같은 느낌이 들어 불안해졌다. 하지만 이 멍청이들은 공연이란 단어에 설레며 자신들이 살면서 봤던 온갖 싸구려 쇼에 대한 경험담을 풀어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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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드렁크 타이핑 5화 - 귀머거리의 저택(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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