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텔 할름 콘스탄츠(Hotel Halm Konstanz)는
독일과 스위스 사이의 국경도시 콘스탄츠를 대표하는 호텔이었다.
올드타운 중심가에 자리 잡은
이 오래된 호텔은
최신 설비를 갖춘 신축 호텔에 비하면
시설이 노후화되었다는 단점이 있었지만,
접근성 하나만으로
콘스탄츠 최고의 호텔 지위를 차지하고 있었다.
독일과 스위스를 연결하는
콘스탄츠 중앙역이
호텔 바로 앞에 자리하고 있었고,
프리드리히스하펜과 페리로 연결되는 콘스탄츠 항(港)도
도보 3분 거리에 있었다.
그 말은
호텔에서 3분만 걸어 나가면
보덴호수에 도달한다는 의미였고,
호숫가를 따라
몇 분만 더 걸어 나가면,
스위스라는 의미였다.
그러한 장점을 바탕으로
할름 콘스탄츠 호텔은
콘스탄츠를 찾는 관광객들에게 사랑받는 호텔이었다.
아직 해도 떠오르지 않은 이른 새벽,
4층에 있는 슈페리어 객실에
한 남자가 서 있었다.
전날,
장크트갈렌에서 부동산 매물을 확인하던
카가 토키사다였다.
카가 토키사다는 창가에 서서,
창문 너머로
동쪽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짙은 어둠이 내려앉은 호수 표면과는 달리,
동쪽 하늘에서는
여명이 조금씩 그 빛을 더해 가고 있었다.
여명을 바라보는
카가 토키사다의 얼굴에는
대자연의 아름다움에 대한 경탄은 담겨 있지 않았다.
그저 싸움을 준비하는
투사의 각오가 서려 있을 뿐이었다.
카가 토키사다는
유럽에 온 이후,
단 하루도 평화로운 아침을 맞이하지 못했다.
특히 지난 1주 동안
최고 수준의 긴장 상태를 유지하고 있었다.
바티칸 협력자로부터
스위스 장크트갈렌이라는 지명을 전달받은 것이
1주 전이었다.
일본 증권회사의 의뢰를 받아
폴란드 바르샤바에서 오피스빌딩을 매입하기 위한 협상을 진행하고 있을 때였다.
바티칸으로부터 연락을 받은 순간,
매입가 5천 100만 유로,
한화로 700억 원의 금액이 오가는 거래 같은 것은 내던져 버리고,
바로 그곳으로 달려가고 싶다는 충동을 느꼈다.
바티칸에서 연락이 왔다는 것은
이번 작전이
마지막 단계에 접어들었다는 의미였다.
장크트갈렌이라는 이름을 가진 그 장소가
이번 작전의 최종 스테이지라는 의미였다.
긴 한달 이었다.
미노베 키도를 죽였던
그 날
코우가 홀딩스 본사 빌딩을 나와서
자신만이 아는 비밀 아지트로 몸을 숨기려고 한
카가 토키사다는
그 코우가 홀딩스 건물 안에서 무슨 일이 터지고 있는지
미리 설치해둔 도청기로
그 모든 상황을 엿듣던 중
도청기 발신전파를 추적해서 온
잇토키의 대역요원의 기습으로
그 곳에서 정신을 잃고
어디론가로 끌려간 뒤
요코스카 주일미군기지 사령부 내의 밀실에서
잇토키의 상관이라고 할 수 있는
삼인위와 면담을 가진 뒤
나중에 원한다면
안인이든
일본 정부이든
무조건적인 면책권을 받게 해 주겠다는 약속을 받은 뒤
잇토키의 최종 승부를 지원하는 작전에 들어간다는
삼인위의
지시 아니 명령을 받고,
자신의 신분을 세탁하는 데
12시간이 걸렸다.
그 직후
두 개의 위장 신분으로 3국을 경유해 미국으로 갔고,
그곳에서
다시 유럽에서 활동하는
부동산 브로커로 완벽하게 위장하기 위한 준비 작업으로
일주일을 소요했다.
그렇게 준비를 마치고,
다시 세 개의 위장 신분과
다섯 개의 나라를 거쳐 유럽으로 들어왔다.
그 과정에서
또다시 일주일의 시간이 소요되었다.
흔적을 남기지 않고
유럽에 오는 데만
이 주의 시간이 걸린 것이다.
유럽에 도착한 카가 토키사다는
바로 부동산을 매입하는 작업에 들어갔다.
하는 척만 해서는
발각될 가능성이 있었다.
실제로
거래 실적을 만들어야 했다.
그리고
진짜 부동산 브로커처럼 일했다.
밥 먹는 시간을 아껴 가며
매물을 찾아다녔고,
자는 시간을 아껴 가며
매물을 확보했다.
그렇게 일을 시작하고,
불과 일주일 사이에 만들어진
세 건의 거래 실적은
전적으로
카가 토키사다의 뼈를 깎는 노력의 결과였다.
그리고
그런 결과가
5천만 유로 규모의 거래로 연결된 것이다.
만약
과거 이가 고속도로 휴개소에서 이렇게 일했다면
사쿠라바 잇토키의 어머니이자
이가 닌자 가문 18대 당주였던
사쿠라바 유미카와
모리야마 코조에게 쿠사리가 아닌 칭찬만 들었을 정도로
진짜 일을 열심히 했다.
하지만
카가 토키사다는
진짜 부동산 브로커가 아니었다.
5천만 유로의 거래 실적도,
거래 금액의 1.1%,
엔화로 7천만 엔이 넘어가는 거래 수수료도
그에게는 아무런 가치가 없었다.
그저 어서 빨리
이 작전을 끝내고
한달 가까이 떠나있는 일본으로 돌아가고 싶을 뿐이었다.
그러나
카가 토키사다는 서두르지 않았다.
아니, 서두를 수 없었다.
잠깐의 조바심 때문에
한달 동안 진행된 작전이
한순간에 망가질 수 있다는 사실을
그는 잘 알고 있었다.
카가 토키사다는
조바심을 애써 무시한 채로,
바르샤바에서 하루를 더 머물면서
협상을 마무리했다.
동시에
중부 유럽의 대표적인 겨울 휴양지인
장크트갈렌에 접근하기 위해서
일본의 스즈키 재벌 그룹 회장이
유럽 휴양지에 별장을 사들이려 한다는 시나리오를 만들었다.
계약의 마무리와 시나리오 집필을 끝낸
카가 토키사다가 향한 곳은 장크트갈렌이 아니었다.
크로아티아의 두브로브니크(Dubrovnik)였다.
두브로브니크,
크로아티아 남부에 있는 휴양도시,
일명 아드리아해의 진주라는 별명을 가진 해안도시에서
그는스무 개 가까운 매물을 확인하고 나서야
보덴호로 향했다.
보덴호로 향했지만
바로 장크트갈렌으로 간 것도 아니었다.
프리드리히스하펜에서 시작해
시계 방향을 따라
오스트리아를 거쳐
천천히 장크트갈렌으로 잠입해 들어갔다.
그리고 마침내
‘크레디트 에우로파’에 접근하게 된 것이다.
30km,
자동차로 40분 거리에,
한달 동안 진행된
이번 작전의 마지막 무대가 있었다.
점점 짙어지는 동쪽 하늘을 바라보며,
다시 한번 숨을 깊게 들이마신
카가 토키사다는 커튼을 치고,
창가에서 물러났다.
오늘은
콘스탄츠와 메어스부르크(Meersburg)의 매물을 둘러볼 계획이 잡혀 있었다.
그에게는 아무런 가치 없는 행동이었지만,
혹시라도 살 수 있는 의심을 피하기 위해
다시 작업에 들어가야 했다.
어제 그를 안내했던
부동산 에이전트 한스 마이네가
호텔로 찾아오기로 한 시간은
오전 9시 반,
융통성 없는 독일인인 그는
정확히
그 시간에 로비에 모습을 보일 것이다.
카가 토키사다는 시계를 바라보았다.
오전 6시 40분,
약속 시간까지는
약 세 시간이 남아 있었다.
두 시간 눈을 붙이고,
샤워를 하면 되겠군.
카가 토키사다는
그렇게 생각하며 침대로 다가갔다.
그때, 그의 귀에,
이질적인 소리가 들려왔다.
문을 노크하는 소리였다.
카가 토키사다의 등줄기를 타고
강한 전류가 빠르게 흘렀다.
그를 찾아올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아니.
애초에 바티칸의 그 인물을 제외하고는
그가 여기 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한스 마이네?
아니다.
그가 올 시간이 아니었다.
카가 토키사다는 자세를 낮추고,
재빨리
방 한편에 놓아둔 여행용 가방을 바라보았다.
무기가 될 만한 것이 있을까?
빠르게 생각을 해 봤지만,
떠오르는 것이 없었다.
그의 가방 안에는
옷가지와 노트북이 들어 있을 뿐이었다.
카가 토키사다는
다시 문으로 시선을 돌렸다.
노크 소리는 다시 들려오지 않았다.
방을 잘못 찾은 것일까?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때, 또 다른 소리가 들려왔다.
자물쇠를 푸는 소리였다.
문에는
안전 고리가 걸려 있었다.
하지만
일자 형태의 구형 안전 고리는
완벽한 안전장치가 아니었다.
열려고만 한다면 곽용신도 열 수 있었다.
카가 토키사다는
천천히 발을 옮겼다.
그리고
객실 한쪽에 놓여 있는 의자를 집어 들면서 생각을 정리했다.
문이 열리고,
누군가가 들어오면 일단 제압한다.
턱을 치든,
목을 조르든 일단 제압한다.
그다음은?
옆 방에 있을
세 사람을 깨운 뒤
사전에 수립되어 있는 탈출 계획에 따라
패치 배럭(Patch Barracks),
독일 슈투트가르트에 있는
미군 유럽 지역 통합전투사령부로 빠르게 이동한다.
다른 교통편을 이용할 수는 없을 테니
차를 훔쳐야 하나?
거기까지 생각한
카가 토키사다는 작게 고개를 저었다.
그때 가서 생각하자,
제압,
그리고 노트북 확보, 패치 배럭.
그렇게 속으로 다시 한번 되뇐
카가 토키사다는
의자를 쥔 손에 힘을 주고 천천히 문을 향해 다가갔다.
그가 막 문 앞 1미터에 도달했을 때,
자물쇠가 풀리는 소리가 들리고
문이 살짝 열렸다.
그리고
작은 칼날 하나가
문틈으로 들어와 안전 고리를 무력화시켰고,
그제야 문이 활짝 열렸다.
카가 토키사다는
재빨리 들고 있는 의자 다리로
문을 열고 들어오는 괴한을 찔러 들어갔다.
그러나
괴한은 알고 있기라도 한 듯,
손으로 의자 다리를 잡아챘다.
카가 토키사다는
잡힌 의자를 잡아당겨
다시 공격하려고 했지만,
의자는
마치 단단한 바위에라도 박힌 것처럼
꼼짝도 하지 않았다.
카가 토키사다는 당황하지 않고,
오른발을 앞으로 내질렀다.
괴한의 국부가 있는 위치였다.
그러나
그 공격도 바로 막혀 버렸다.
괴한이 다른 한 손으로
곽용신의 발차기를 막아 낸 것이다.
모든 공격이 막힌 카가 토키사다는
의자를 놓았다.
그리고
모든 전력을 오른손에 실어
괴한의 얼굴이 있는 곳으로 날렸다.
하지만
그 주먹마저도
괴한에 손에 잡혀 버렸다.
모든 공격 루트를 차단당한 이후에야
카가 토키사다는
괴한의 얼굴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 눈에
가장 먼저 들어온 것은
괴한의 얼굴을 덮고 있는 수염이었다.
뒤이어
그 수염 안에 있는
입에 드리워진 미소가 보였다.
그 입이 열렸다.
“오랜만이네요. 삼촌.”
익숙한 목소리가
그 입에서 흘러나왔다.
본문
[연재] 유니콘 프로젝트 3 독립닌자요원 잇토키 (7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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