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덴호 남동쪽에 자리 잡고 있는
장크트갈렌-알텐하인 공항(Flugplatz St. Gallen-Altenrhein)은
정규 항로라고는 하나뿐인
작은 공항이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세스나 같은 소형 프로펠러 비행기나 뜨고 내리는
다른 지방 공항과는
확연히 구별되는 특징이 있었다.
바로 보덴호 인근에 별장을 가지고 있는 부호(富豪)들의 비즈니스 전용기가
이 공항의 주요 고객들이라는 것이었다.
그런 사실을 증명하듯,
에어버스에서 제작한 비즈니스 전용 제트기 ACJ319 한 기가
장크트갈렌-알텐하인 공항에 착륙하기 위해
보덴호 상공에서
10번 활주로에 기수를 맞추었다.
-착륙하겠습니다.
기장의 안내 방송이 나오는 것과 동시에
기체 하부에서 진동이 느껴졌다.
랜딩기어 수납부가 열리고,
랜딩기어가 내려가면서 발생하는 진동이었다.
“보덴호는 언제 봐도 아름답군요.”
크레디트 에우로파 그룹의 법무 이사
바이스 되블린이
창밖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 말에,
맞은편에 눈을 감고 앉아 있던 남자,
얀 베르그만도 눈을 뜨고,
창밖을 바라보았다.
그의 눈에 보덴호의 전경이 들어왔다.
보덴호의 수면은
늦은 오후의 햇살을 받아
마치 밤하늘의 별처럼 반짝이고 있었다.
아름다운 풍경이었지만,
얀 베르그만에게는 아무런 감흥도 주지 못했다.
당연한 이야기였다.
기억도 하지 못할 정도로 오랜 시간을 살아온 그에게는
자연의 아름다움을 느낄
감정 같은 것은 남아 있지 않았다.
얀 베르그만은
다시 눈을 감았다.
그렇게 눈을 감은 얀 베르그만은
가장 마지막으로 감정을 느꼈던 순간을 떠올렸다.
한달 전,
그날이 떠올랐다.
* * *
완이 산책하러 나가기 위해 준비할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저
외출용 신발로 갈아 신으면
끝이었다.
하지만
아이힝거 부인에게는,
정확히 말하면
아이힝거 부인과
저택 안에 머무는 세 명의 남자에게는
준비가 필요했다.
호숫가를 따라 이어진 산책로를
천천히 걷고 있는
완의 옆에는
아이힝거 부인이
같은 보폭으로 걷고 있었다.
그녀는
저택 안에서 입는
흰색 셔츠에 검은색 폼이 넓은 드레스 대신
스웨터와
베이지색 면바지 차림이었다.
산책이라는 행위에
자연스러워 보이는 복장으로 갈아입은 것이다.
완을 따르는 사람은
아이힝거 부인만이 아니었다.
완의 반경 20m 안에는
마찬가지로 평상복을 입고,
완과는 상관없는 사람인 것처럼 행동하는
세 명의 남자가 있었다.
완을 ‘경호’하기 위해서라고 했다.
주인의 귀한 손님인
완에게
무슨 일이 생기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그들은 완의 곁을 지키고 있었다.
하지만
당사자인 완은
‘경호’라는 느낌이 들지 않았다.
‘감시’.
그게
완이 느끼는 정확한 감정이었다.
사실 틀린 말도 아니었다.
그들은 완을 감시하고 있었다.
도망가지 않도록,
자해하지 않도록.
아이힝거 부인은 저택 관리인이었다.
메이드의 등급으로 보면
하우스키퍼(Housekeeper),
집안의 회계, 인사관리, 시설 관리를 책임지는
일종의 집사,
또는
메이드장(長)의 역할을 했다.
동시에
완의 곁에서 수발을 드는
레이디스 메이드(Lady's maid)의 역할도 수행했다.
물론 그녀가
빅토리아 시대의 레이디스 메이드처럼
완의 말동무가 되어 주거나
치장을 도와주는 것은 아니었지만,
완이 장크트갈렌의 고급 저택에서 지내는 동안
불편함이 없도록
가장 가까이서 수발을 들었다.
식사를 챙기고,
건강 상태를 파악했다.
세탁과 완의 침실 청소도 그녀가 직접 담당했다.
하지만
완은 그녀에게 고마움을 느끼지 않았다.
완의 입장에서
아이힝거 부인은
그저
그녀 주인의 애완동물을 관리하는
사육사일 뿐이었다.
완은
옆에서 걷고 있는 아이힝거 부인에게 들키지 않도록,
작게 숨을 들이마셨다.
답답한 마음에 산책을 나오기는 했지만,
이렇게
그녀가 옆에 붙어 있으니, 답답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완은
다시 시선을 움직여
호수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시애틀에 있는 워싱턴 호수(Washington lake)를 떠올렸다.
시애틀 머다이나에 있는 챔버가(家)도
워싱턴호숫가에 자리 잡고 있었다.
머다이나 쪽은 호숫가를 따라
산책로가 조성되어 있지는 않았지만,
남쪽으로 걸어서 10분 거리에
호수와 접한 작은 공원이 있었다.
공원에서 바라보는 워싱턴 호수가 그리웠다.
그 공원이 그리웠다.
그곳에는
신시아 챔버가 있었고,
앤이 있었다.
나란히 앉아
호수를 바라보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지금 눈앞에 보이는 보덴호보다 아름답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지금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행복했었다.
그때를 회상하자
완은 마음속에 자리 잡고 있는 어둠이
조금 커지는 것이 느껴졌다.
억지로 찍어 누르고 있었지만,
마음속의 어둠은
그녀를 잡아먹기 위해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아주 작은 방심만으로도
고개를 치켜들었다.
완은
그런 어둠을 떨쳐 내기 위해
작게 고개를 흔들었다.
하지만
한번 머리를 치켜든 어둠은
쉽게 물러가지 않겠다는 듯,
그녀의 마음을 야금야금 파고들고 있었다.
완은 다시 숨을 들이마셨다.
아이힝거 부인이 알아차리든 말든 상관없다는 듯,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어둠을 다시 몰아내기 위한
무언가가 필요했다.
그리고
그 무언가는 하나밖에 없었다.
완의 머릿속에
과거의 어떤 날이 떠올랐다.
사쿠라바 잇토키와 마지막 통화를 했던
한달 전
바로 그날이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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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유니콘 프로젝트 3 독립닌자요원 잇토키 (6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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