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으어—!”
목이 꽉 막힌 것 같은 비명을 지르며 넬이 벌떡 일어났다. 머리가 깨질 듯이 아프고 가슴이 답답해서 거칠게 숨을 헐떡였다. 약초 달이는 냄새와 향 피우는 냄새가 숨을 타고 몸으로 들어왔다.
주위를 둘러보니 흙벽에 원과 복잡한 도형이 담긴 그림들이 걸려있고 햇볕이 들어오는 창문 옆 선반에는 무엇인가를 담은 둥근 유리병들이 빼곡히 차있었다. 머리칼이며 가슴이며 할 것 없이 땀으로 흠뻑 젖어서 이불을 걷어보니 무명으로 만든 황토색 잠옷으로 갈아 입혀져 있었다. 많이 헐렁하긴 했지만 깨끗한 옷이었다.
“이제 정신이 들었니?”
후드가 달린 흑회색 로브를 입은 여자가 넬에게 다가왔다. 어깨에 낙엽이 내려앉은 것 같은 갈황색 머리칼에 눈 주위로 잔주름이 잡힌 중년 여자였다. 그녀는 넬의 안색을 살피고 손목을 잡아보더니 화덕에 올려진 솥에서 무언가를 한 국자 퍼서 사발에 담았다.
“마셔봐. 기운이 날 거야.”
여자가 내민 사발에는 짙은 흙냄새가 나는 흑갈색 액체가 모락모락 김을 내고 있었다. 잠시 동안 그릇 안을 보던 넬이 한 모금 마시자 여자가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고 문밖으로 나갔다. 넬은 재빨리 입에 있는 것을 사발에 뱉고 벽과 침대 사이의 틈에 쏟아버렸다.
밖을 살피려고 문 쪽으로 고개를 기울이는데 돌아오는 여자가 보였다. 얼른 한 손으로 입가를 닦는 시늉을 하고 여자에게 빈 그릇을 보였다. 여자는 히죽 웃으며 가져온 옷을 들어 보였다. 넬이 백작의 배에서 입었던 선원의 옷이었다
“너, 배에서 탈출한 노예지?”
넬은 사람들 앞에서 혼자 발가벗겨진 것 같은 기분이 들었지만 곧 표정을 감추고 고개를 저었다.
“네 옷을 갈아입힐 때 등에 있는 표식을 봤으니까 거짓말해도 소용없어. 주인을 둘이나 거쳤던데? 첫 번째는 어디더라···, 이름은 생각이 안 나는데 나름 알려진 가문이었고 두 번째는 어딘지 모르겠더라.”
‘멤피스의 마치니. 어우, 역겨운 위선자 새끼들. 특히 레지나 그 미친년은 아침 세숫물에 띄우는 꽃잎 한 장이 크기가 다르다고 매질을 해놓고 로저스 앞에서는 온갖 교양 있는 척을 했지. 그리고 뼈를 씹어도 시원치 않을 더러운 칼루네 족속들. 옥산나가 영감부터 손자 삼형제까지 전부가 날 범한 걸 알고도 팔지 않았다면 거기서 목을 매었을 거야.’
넬은 노예 상인에게 팔린 뒤 페렐리움으로 가는 동안 실낱같은 희망도 없는 현실에 복수고 뭐고 차라리 죽자는 마음으로 빵 부스러기조차 입에 대지도 않았다. 그러다 우연히 생긴 기회를 이용해 도망칠 수 있었고 애런을 만났다. ‘페렐리움에서 그놈들한테 다시 잡히면 자살할 생각이었는데···, 애런과 다른 사람들도 멜스트롬에서 살아남았을까? 착한 사람은 늘 당하기 마련이지만 이번에는 그러지 않았으면 좋겠다.’
“걱정하지 마. 너도 알겠지만 증서 없이는 주인이 될 수 없으니까. 그리고 난 노예를 둘 생각이 없단다.”
넬은 인자한 미소를 짓는 여자를 보며 생각했다. ‘거짓말을 하고 있어. 순수한 호의였다면 깨자마자 노예인 걸 먼저 밝혀서 기를 죽이려고 하진 않았겠지. 일단은 좀 더 살펴보자.’
“그런데 네가 탄 배는 어디서 왔지? 이 근처는 좀처럼 바깥세상의 배가 지나가지 않는 곳이란 말이야.”
넬은 으으 소리를 내며 입을 가리킨 뒤 손을 저어 보였다. 그러고는 적는 시늉을 하며 쓸 것을 달라고 손짓했다.
“뭐야? 노예가 글을 알아? 호오, 너 보통 노예가 아니구나?”
적을 것을 가져다주는 여자의 눈빛이 묘하게 바뀌는 것을 넬은 놓치지 않았다.
- 페렐리움, 커다란 소용돌이 -
“페렐리움이면···, 아! 세바고스에서 제일 큰 노예시장이 있는 곳이잖아. 쯧즈···. 테세이아로 가던 노예선이 멜스트롬을 만났나 보구나. 그 배에 탄 사람들한테는 불행이겠지만 너는 이렇게 살아서 자유를 얻었으니 천사께서 축복을 내리신 셈이로구나. 좋아. 이름은 뭐지?”
- 뮬라. -
“음, 특이한 이름이군. 북부 출신인가? 성이야 당연히 없을 테고, 난 예르카야.”
넬은 꾸벅 고개를 숙여 구해준 것에 대한 감사와 인사를 겸했다.
- 다른 사람은? -
“다른 사람? 아, 널 찾은 해변에서 난쟁이 하나를 보았지. 엎어져 있는 모습이 꼭 빨간 목도리를 얹어 놓은 참나무 술통 같더라.”
예르카가 큭큭 소리를 내며 웃었다. 넬은 깜짝 놀라 으! 소리를 냈다. 소용돌이 속에서 뒤렉의 빨간 머리를 본 것이 마지막 기억이었다.
- 어디? -
“어디 있긴, 그 자리에 있겠지. 혹시라도 데리고 오라는 말은 하지마. 난 드워프라면 아주 질색이니까. 냄새나고 교양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없는 것들. 그놈은 아마 죽었을 거야. 지팡이로 몇 번을 찔러도 꼼짝도 안 했거든.”
‘아니야. 드워프는 인간보다 생명력이 더 강한 편이니 살아있을 거야. 뒤렉만 말하는 것으로 봐선 애런이나 나자리아는 없었나 보네. 그 둘도 같은 해류에 실려 왔다면 다른 해변에 있을 거야.’
- 여긴 어디? -
“이봐, 나야말로 너에게 묻고 싶은 게 산더미야. 넌 아주 오랜만에 만난 외부인이거든.”
눈을 동그랗게 뜬 넬에게 예르카가 아까 준 스프를 다시 내밀었다.
“궁금한 건 차차 알기로 하고 일단은 이걸 한 잔 쭈욱 먹으렴. 이번에는 버리지 말아, 청소하기 귀찮으니까.”
머쓱한 얼굴로 사발을 받아든 넬은 안을 들여다보며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이걸 얼굴에 확 끼얹고 도망칠까? 아냐, 해코지할 생각이었다면 이미 무슨 짓을 했을 거야.’ 이번에는 보란 듯이 단번에 주욱 마셨다.
시큼하고 떫은맛이 입안을 가득 채웠었지만 곧바로 속이 편안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어?’ 넬은 갑자기 눈앞이 흐려지더니 정신을 잃고 침대에 털썩 쓰러졌다.
다시 눈을 뜨자 은은한 빛을 내는 작은 촛불이 그녀에게 인사하듯 몸을 흔들었다. 배가 좀 고프긴 했지만 머릿 속과 몸은 전보다 훨씬 가볍고 상쾌했다. 방안에 자기 혼자뿐임을 확인한 넬은 살그머니 침대에서 내려와 소리가 나지 않게 아주 천천히 문을 열었다. 오래된 경첩이 끄으으 하고 앓는 소리를 냈다.
거실 중앙에 어린아이 키만 한 높이로 벽돌을 쌓아 만든 화덕이 있었다. 그 위에는 어른도 들어갈 만한 커다란 무쇠솥이 걸려 있었는데 넬의 팔뚝만 한 줄을 여러 개 꼬아서 만든 밧줄이 천정의 네 귀퉁이에서 내려와 솥을 붙잡고 있었다. 그 앞에는 넬의 키보다도 높은 사다리 의자가 놓여있었는데 다리부터 등받이까지 넝쿨이 얼기설기 감겨 있었다.
‘무슨 요리를 저렇게 불편한 데다가 하지?’
왼쪽 벽면에 달린 삼단 선반 위에 꼬리표가 붙은 유리 용기들이 빼곡히 채워져 있고 그 아래로 긴 책상 위에는 바닥이 둥글고 주둥이가 긴 유리병들이 유리관으로 연결되어 있었다. 오른쪽의 벽난로 위에는 말린 넝쿨과 약초들이 매달려 있고 그 옆 벽장에는 여러 동물들의 두개골이 놓여있었다.
‘혼자 있는 것 같으니 요리사는 아닐테고···, 혹시 약재사인가?’
옆에 보이는 문을 여니 방 안에는 벽마다 천정까지 닿은 책장에 촘촘하게 책들이 꽂혀있고 한가운데 놓인 책상에 예르카가 책을 펴놓고 의자에 기대어 눈을 감고 있었다. 책상에 놓인 등불에서 퍼진 빛이 둥글게 그녀의 주변을 감싸서 마치 사방에 놓인 책장들이 그녀를 내려다보는 것처럼 보였다.
‘라이트 헤이븐의 내 방도 이랬는데···.’ 책 옆에 놓인 사각형 고리가 반짝였다. ‘응? 저건 경사 인장?’ 라이트 헤이븐의 프리셉터들은 견습 학도를 제외하고 배움에 따라 가장 낮은 학사부터 대학사-경사-대사-종사-대종사까지 총 여섯 단계로 나뉘는데 사각형 고리는 그중 세 번째 단계인 경사를 가리키는 표식이었다.
보통은 학사에서 대학사가 되는데 10년, 대학사에서 경사가 되는 데는 20년 정도가 걸려서 경사 단계만 되어도 웬만한 명문가의 일을 책임지는 고문으로 위촉되었다. 한 번 인연을 맺은 가문을 위해 일하며 죽을 때까지 공부하는 것이 프리셉터의 삶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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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엘더사가 - 94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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