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현실의 옥좌 위에 높이 걸린 커다란 황금가지는 클레이튼 그리즈먼이 바람 언덕의 신목에서 목숨을 구한 이후 수세대에 걸쳐 엘그로브를 대표하는 가문의 상징으로 그 자리에 있었다. 사람들은 수사슴의 뿔처럼 하늘을 떠받듯이 벌어진 네 줄기 황금가지를 보며 용기와 지혜를 되새겼다. 벽면을 길게 채운 붉은 커튼을 배경으로 가지 전체에 금박을 입힌 신목의 가지는 천정에 맞닿은 긴 유리창으로 들어온 햇빛을 받아 영험한 기운이 서려 보였다.
쉬익 하고 알현실의 공기를 서늘하게 가르며 날아간 양날 도끼가 황금가지 중앙에 쾅 하고 박혔다. 단박에 둘로 갈라진 황금가지는 의식 없는 환자의 팔처럼 아래로 축 처졌다. 잔뜩 피칠을 한 도끼에서 붉은 선혈이 옥좌의 등받이 위로 뚝뚝 떨어졌다. 그 양옆으로 늘어선 검은 갑옷의 병사들이 붉은 전갈을 수놓은 검은 깃발을 들어 올렸다.
들소처럼 커다란 몸집에 검은 갑옷을 입은 남자가 묵직한 발걸음 소리를 내며 옥좌에 이르는 계단을 올랐다. 붉은 양탄자에 발을 디딜 때마다 피에 젖은 발자국이 선명하게 찍혔다. 옥좌에 앉은 그는 한 쪽 턱을 괴고 금방이라도 불똥이 튈 것 같은 두 눈으로 계단 아래에 무릎을 꿇고 있는 사람들을 하나하나 훑어봤다. 잔뜩 겁에 질린 노인과 여자와 아이들이 그와 눈을 마주치지 않으려고 고개를 숙였다.
며칠 전 일곱 번째 생일을 보낸 넬은 사람들 사이에서 고개를 빼꼼히 들어 할아버지의 자리에 앉은 남자를 몰래 보았다. 짧은 회색 머리에 두드러지게 돌출된 눈두덩이와 크고 각진 사각턱을 수염으로 덮은 남자의 시선이 넬에게 닿으려는 순간 유모가 얼른 넬의 머리를 눌러 아래로 숙였다.
넬은 유모의 딸인 마리의 옷을 입고 있는 것을 남자가 알아볼까 두려워 작은 심장이 터져버릴 것만 같았다. 마디가 굵은 유모의 손이 파르르 떠는 넬의 작은 손을 잡아주었다. 불쾌할 정도로 덜덜 떠는 축축한 손이었지만 그래도 잡아주는 것이 더 나았다.
“궁 안의 사람은 이들이 전부인가? 알리스터.”
검은 로브를 입고 가슴에 삼각형 고리를 걸고 있는 남자가 몸을 내밀고 대답했다.
“네, 전투에 투입되었던 자들을 제외하고 가솔들의 식구까지 전부 모아놨습니다. 전하.”
뒤에서 일사불란한 발걸음 소리에 맞춰 전갈 문양을 새긴 갑옷을 입은 병사들이 결박한 넬의 할아버지와 아빠를 끌고 왔다. 두 사람 모두 얼굴과 갑옷이 피와 재로 범벅이 되어있었다. 그 뒤로 큰 오빠와 두 명의 언니와 작은 오빠, 그리고 넬의 옷을 입은 유모의 딸 마리가 엄마의 손을 잡고 끌려 왔다. 뒤이어 사촌 어른들과 형제들이 연이어 계단 아래에 세워졌다.
넬은 모두들 헝클어진 머리에 슬픈 표정을 하고 있는 것을 보고 엄마가 마리의 옷을 입혀주며 한 말을 떠올렸다.
“지금부터 넌 엘그로브의 왕녀가 아니야. 유모를 따라가면 절대로 옆에서 떨어지지 마. 그리고 엄마랑 아빠를 보면 반드시 모른 척해야 돼. 알겠니?”
“왜? 엄마 이건 무슨 놀이야?”
엄마는 눈물이 가득 고인 눈으로 넬과 눈을 맞췄다.
“이건 놀이가 아니야, 아가. 그러니까 절대로 엄마, 아빠를 부르거나 소리를 내선 안돼. 무슨 일이 있어도, 아무리 무서워도 참아야 해. 할 수 있다고 약속해 주겠니?”
“응, 엄마. 약속해.”
사람들 앞에 선 엄마가 금방 넬을 알아보고 아주 살짝 고개를 저었다. 넬도 입을 꼭 다물고 엄마만 알 수 있게 고개를 끄덕였다.
“베르시온! 이 노망난 황제의 미친 개 같은 놈아!”
머리가 벗겨지고 검댕으로 얼룩진 백발의 수염을 한 노인의 호령이 알현실 안에 쩌렁쩌렁 울렸다. 넬은 할아버지가 저렇게 화난 모습을 보는 건 처음이었다. 옥좌에 앉은 베르시온이 옆에 있는 병사의 허리춤에서 검을 뽑아 남자를 향해 던졌다.
그의 오른쪽 허벅지를 뚫고 나온 장검의 끝이 바닥에 부딪혀 불꽃이 튀었다. 휘청이며 넘어질 뻔 한 노인은 입을 굳게 다물며 몸을 꼿꼿이 세웠고 모든 엘그로브 사람들이 놀라 소리를 질렀지만 넬은 두 손으로 입을 틀어막고 겨우 비명을 참아냈다.
“반역자 애버딘, 한 번만 더 폐하를 불경하게 부른다면 더러운 그 혀를 잘라버리겠다.”
베르시온의 굵은 음성이 알현실에 어수선해진 공기를 무겁게 내리눌렀다.
“흥! 어차피 죽은 목숨이다. 넌 썩은 시궁창이나 지키며 배를 채우는 쥐새끼일 뿐이야.”
애버딘이 크르륵 하고 가래를 긁어 베르시온을 향해 퉤 하고 뱉었다. 피가 섞인 끈적한 가래가 미처 닿지 못하고 계단에 깔린 붉은 양탄자 위에 착 붙었다.
“제국의 국경을 지키는데 온 힘을 다해야 할 자가 나와 폐하를 이간질한 것도 모자라 감히 반역까지 꾀하다니 너를 죽여 다른 역도들의 본보기로 삼겠다.”
“나를 죽인다고 변할 것은 아무것도 없다. 황제의 시간은 이제 얼마 남지 않았어. 그리고 주인이 죽으면 키우던 개는 꼬리를 말고 쳐지는 법이지.”
“그럼 키우던 개를 먼저 죽이면 주인이 어떻게 되는지 한 번 볼까?”
베르시온이 손짓하자 검은 갑옷의 기사 하나가 넬의 아빠를 애버딘 앞으로 끌고 와 무릎을 꿇였다.
“저 반도의 목을 베어라. 마지막 숨을 쉴 때까지 자기 목이 잘리는 것을 똑똑히 느낄 수 있게 아주 천천히.”
넬은 깜짝 놀라 악 하고 소리를 질렀다. 다행히 다른 사람들도 소리를 내는 바람에 이목을 끌지 않았다. 명을 받은 기사가 검을 뽑아 아빠의 목에 대자 엄마가 안된다며 마구 소리를 질렀다. 할아버지는 입을 굳게 닫고 눈을 감았다. 기사는 검을 든 채로 잠시 동안 망설이다 검을 거두고 베르시온을 향해 무릎을 꿇었다.
“아무리 반역도라지만 아린 경도 긍지를 지닌 기사입니다. 단번에 목을 칠 수는 있을지언정 모욕을 줄 수는 없습니다. 제가 주군께서 말씀하신 대로 한다면 아린 경뿐 아니라 제 명예도 영원히 더럽혀질 것입니다. 부디 하명하신 것을 거두어 주시기 바랍니다.”
베르시온은 매서운 눈초리로 기사를 내려다봤다.
“지고한 기사 콘라드여, 자네는 역시 기사의 살아있는 표상이로군. 저런 불경한 자 때문에 자네의 고결한 명예를 더럽힐 수는 없지. 물러나게.”
콘라드가 예를 표하고 아린을 힐끗 돌아보고는 옆으로 물러났다. 엘그로브 사람들은 물론이고 발라스 사람들도 그의 명예롭고 용기 있는 행동에 깊은 감명을 받았다. 아린은 콘라드에게 나지막이 고개를 숙였고 애버딘은 껄껄 웃으며 소리 높여 말했다.
“발라스에도 의기 높은 자가 있었군. 감사하오, 콘라드 경.”
베르시온은 팔걸이를 손가락으로 두드리며 사람들을 돌아보았다.
“누가 내 명을 받겠는가!”
좌중에 있는 발라스의 기사들은 주군의 눈에 들 수 있는 좋은 기회란 것을 알고 있었지만 많은 사람들 앞에서 다른 기사를 고문하겠다고 선뜻 나설 수가 없었다. 베르시온의 명령이라면 어떤 더러운 일이라도 해내는 것을 인정받는다면 그의 최측근이 될 수 있겠지만 사냥개, 청소부라는 불명예가 가문에 뿌리박힐 것이기 때문이었다.
더구나 콘라드가 먼저 기사의 도를 지킨 뒤라 지금 나서는 것은 스스로 이마에 쓰레기라는 낙인을 찍는 것이나 다름없는 짓이었다. 다들 눈치만 보느라 침묵이 계속되자 베르시온이 미간을 찌푸렸다.
‘허울만 쫓는 불나방 같은 것들.’ 누구도 나서려고 하지 않자 베르시온은 슬슬 화가 치밀어 오르기 시작했다. 처형법을 바꾸면 서로 하겠다고 나서겠지만 반역자 처형이라는 엄중한 명령을 내리자마자 손바닥 뒤집듯이 바꿔서 스스로 위엄을 떨어뜨릴 수는 없었다. ‘그래, 네놈들의 명예는 중하고 나의 위엄은 그만 못하다는 거로군. 할 수 없지 내가 직접···.’
“제가 저 반역도를 처형하겠습니다!”
알현실 바닥에 무릎을 꿇은 사람들 중에서 한 남자가 일어섰다. 베르시온은 의외라는 표정을 짓고는 나오라고 손짓했다. 붉은 실로 별을 수놓은 조끼를 입은 남자가 걸어 나오는 것을 보며 사람들이 작은 소리로 수군거렸다.
“아니, 세상에!”, “저런 못돼먹은 놈!”, “개만도 못한 자식.”, “어떻게 저럴수가!”
넬은 남자를 보고 깜짝 놀랐다. 그는 늘 그녀에게 웃는 얼굴을 보이던 남자였다. 그가 웃을 때마다 가는 콧수염이 입꼬리를 따라 움직였는데 넬은 그것이 무척 재미있었다.
그는 사람들의 야유에도 아랑곳 않고 서글서글한 얼굴을 꼿꼿이 세우고 또박또박 걸어 계단 앞에 섰다. 베르시온은 당장이라도 잡아먹을 것 같은 눈으로 남자를 살펴보았다. 아무리 보아도 그저 샌님일 뿐 무인의 기질은 손톱만큼도 없어 보였다. 더구나 엘그로브의 사람이라니 갑자기 호기심이 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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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엘더사가 - 92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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