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켓몬스터 유성의 7일 11화 화산재
온 몸이 모래 범벅이다. 머리에 팔다리에 모래가 안 붙은 곳이 없다.
“우와, 이걸 건너네요.”
치아나는 고글을 벗으면서 지나온 사막을 돌아봤다. 고개를 돌린 곳에는 모래만 세차게 휘날리고 있다.
“아, 이거 잘 썼어요. 자, 여기.”
“조금만 더 가지고 계세요. 어차피 좀 있다 또 쓸 거니까.”
“네? 이런 사막이 또 있어요?”
“사막은 아니지만.”
허리를 펴고 저 멀리 단풍마을 옆을 바라본다. 치아나도 따라서 까치발을 들었다. 그렇게까지 안 해도 보일 텐데.
고개를 살짝 들기만 해도 굴뚝산에서 하얀 게 피어나오는 게 보인다. 사막에서도 말한 화산재다.
“단풍마을로 가는 113번 도로에는 굴뚝산에서 화산재가 잔뜩 내려오거든요.
피부나 눈에 화산재가 들어가서 좋을 게 없으니까. 고글을 일단 가지고 계세요. 바람막이도.”
“그럼 조금만 더 빌리고 있을게요. 헤헤.”
“113번 도로는 바로 요 앞이고, 그리 길지도 않으니까. 얼마 안 가서 단풍마을에 도착할 겁니다. 거기서 돌려주세요.”
“단풍마을!”
“알고 계시겠지만, 단풍마을에서 조금만 내려가면 유성의 폭포입니다.”
“오오!”
기운차게 오른손을 치켜올리는 치아나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유성의 민족, 레쿠쟈, 치아나의 의뢰. 아버지의 죽음.
유성의 폭포에서, 난 대체 무슨 이야기를 듣게 되는 걸까.
“자! 그렇게 있지 말고 어서 가죠! 이제 금방이라고요!”
“그렇네요. 서두르죠.”
“후후후, 아! 저기 보인다. 113번 도로.”
걷기 시작하고 얼마 안 가, 회색으로 물든 길이 눈에 들어왔다.
***
113번 도로는 늘 그렇듯 잿빛으로 뒤덮여 있었다.
“와아, 이거 생각보다 예쁘네요. 따듯한 눈이 쌓여 있는 것 같아!”
“맨손으로 만지거나 하진 마세요.”
어린애처럼 방방 뛰는 치아나를 겨우 말리며 가방에서 장갑을 꺼냈다.
“잘못해서 눈에 들어가거나 하면 위험해요.”
“에이~ 제가 무슨 애에요?”
“애는 아니지만, 버섯꼬를 쓰다듬다가 쓰러지긴 했었죠.”
“윽,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죠.”
“그게 그거거든요.”
내 말에 입을 쭉 내미는 치아나였지만, 고분고분 장갑을 받아 들었다. 그러더니, 치아나는 장갑 낀 손으로 화산재가 쌓인 여기저기를 만져댔다.
“그건 그렇고 신기하네요.”
치아나는 풀들을 만지다 말고 하늘 쪽을 쳐다봤다. 햇빛은 화산재에 가려 잘 보이지 않았다.
“이렇게 쌓여대면 풀 한 포기 못 자랄 것 같은데.”
“자연의 신비라는 거죠.”
내 말을 듣고는 치아나가 갑자기 나를 빤히 바라봤다. 먹이를 기다리는 포챠나처럼.
“......왜요?”
치아나는 머뭇거리다가 겨우 입을 열었다.
“그, 이번엔 설명 안 해줘요?”
“설명?”
“지금까진 뭐가 궁금하다 하면 바로바로 대답해주시더니. 이번엔 ‘자연의 신비라는 거죠.’ 로 끝났잖아요.”
“자연의 신비라는 말이면 충분해서 그런 거예요.
방금 만지셨던 풀은 적은 빛으로도 광합성을 할 수 있는 종이에요. 음지식물이라는 건데. 으음, 좀 어렵나.
아무튼 이 근처에는 이렇게 햇빛이 많지 않아도 살 수 있는 종들만 있어요. 또 저기 보세요.”
가리킨 곳에는 모래두지가 손톱으로 땅을 파 들어가고 있었다.
“모래두지는 건조한 몸으로 주위의 수분을 끌어 모아요. 그래서 이런 곳에서도 생존할 수 있죠.”
머리 위로 무장조가 강철날개를 빛내며 날아갔다.
“다른 생물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런 곳에서도 다 자기만의 살아가는 방식이 있습니다....... 이거면 설명이 됐나요?”
치아나는 팔짱을 끼고 살짝 불만스레 말했다.
“왠지 엎드려 절 받기 같은데, 그래도 고마워요. 호기심이 풀렸네요.”
치아나는 빙글 돌아서 단풍마을을 향해 걸어갔다. 아직 장갑을 끼고 있는 손으로는 화산재가 쌓인 풀들을 휘휘 헤치고 있었다.
***
113번 도로는 금방 끝이 났다. 그 말인즉슨.
“단풍마을! 이제 거의 다 왔네요.”
옷에 묻은 화산재를 툴툴 털어낸다. 아까는 모래, 이번엔 화산재. 옷이 고생이 많다.
“관장님. 우선 포켓몬센터에 들려요. 가져가야 할 것도 있고.”
“네, 좋아요. 사실 조금 지치긴 했어요.”
센터에 들어가기 전에 바람막이를 벗어 다시 한 번 크게 화산재를 털어냈다. 혹시 남아 있는 화산재가 센터에 떨어지면 민폐다.
치아나가 벗어 준 장갑과 고글, 바람막이를 주섬주섬 개서 가방에 넣었다. 지쳐서 그런지 평소보다 무거운 느낌도 들었다.
“어서 오세요. 단풍마을 포켓몬센터입니다.”
“휴, 살겠네. 근데 가져가야 할 것이란 게 뭐예요?”
“아, 혹시 잊으셨나요? 인형이요. 루리리 인형!”
“아! 루리리인형! 까먹고 있었네.”
잠시 치아나를 뒤로 하고, 컴퓨터 쪽으로 걸어갔다.
“물건 보관 시스템에........”
적당히 컴퓨터를 조작해 잿빛도시에서 넣어놨던 물건을 꺼냈다.
“여기 인형....... 치아나씨?”
잠깐 안 본 사이에 치아나는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어, 어라라? 어라?”
“뭐야? 왜 그래요?”
“팔찌가 없어요!”
“팔찌?”
그러고 보니, 늘 팔에 차고 다니던 푸른빛 팔찌가 보이지 않는다.
“그게 없으면, 안 되는데....... 이게 어디갔지?”
“많이 중요한 거예요?”
“네.......”
안 어울리게 침울한 표정을 짓는 치아나였다.
“으음, 언제 잃어버렸는지는 기억나요?”
“으, 그러니까. 사막을 건넌 후까진 있었어요. 고글을 벗으려 할 때, 음, 분명해요.”
“그럼, 113번 도로에서 떨어뜨렸나?”
“저! 찾으러 갈게요!”
치아나는 벌떡 일어나 센터 밖으로 나가려 했다.
“잠시만요! 찾더라도 장갑은 끼고!”
그때 번뜩였다. 무언가 떠오른 나는 가방 속을 뒤져보았다. 역시
“치아나씨! 찾았어요! 팔찌!”
“네? 어디요?”
나는 가방에서 치아나가 썼던 오른손 장갑을 꺼내들었다. 아까 치아나에게 받아들 때 평소보다 무게감이 있었다.
혹시나 한 게 정답이었나 보다.
장갑을 툭툭 털자 안에서 푸른빛 팔찌가 내 손으로 톡 하고 떨어졌다.
“여기 있네. 다음엔 조심하세요.”
“장갑 벗을 때 같이 빠졌었구나. 휴, 다행이다.”
푸른빛으로 빛나는 나선형의 팔찌. 자세히 보니 용 모양인 것 같았다.
“어라? 잠깐, 이거 혹시....... 레쿠쟈?”
기하학적인 무늬와 마디마디로 나뉜 긴 몸체. 문헌에 기록된 레쿠쟈의 모습이었다.
“오! 알아보시네요? 이 족장의 증표는 레쿠쟈님의 형상대로 만든 거죠. 으차!”
치아나는 팔찌를 받아 손목에 끼웠다. 손목에 비해 팔찌가 조금 큰지 약간 헐렁거렸다.
“손목에 끼우다 또 빠지는 거 아니에요?”
“확실히 그렇네요. 그래도 어릴 땐 더 심했어요! 당기기만 해도 휙 하고 빠졌다니까요? 아! 좋은 생각이 났어요. 이렇게 하죠.”
치아나는 손목에 끼웠던 팔찌를 꺼내더니 자리에 앉아 신발을 벗었다.
“짠, 어때요?”
팔찌는 그렇게 발찌가 되었다. 확실히 손목보단 안심일 것이다.
***
한바탕 소동이 있고, 겨우 센터에 짐을 풀었다. 사막에, 화산재에, 팔찌, 이젠 발찌지만, 어느새 저녁이 다 되어 있었다.
센터 창문으로 밖을 바라보았다. 저녁이 다 되어서인지 저 멀리 노을이 지고 있는 굴뚝산이 보였다.
유성의 폭포는 굴뚝산 한 가운데에 있다. 들어가려면 산 뒤쪽으로 들어가야 하는데, 길이 제법 험하다.
“그럼, 오늘은 그만 쉴까요? 푹 쉬고 내일 산에 오르죠.”
치아나가 먼저 말했다. 조금 의외였다.
“급한 거 아니었어요? 저는 분명, 금방이니까 바로 가죠!, 라고 할 줄 알았는데.”
처음 계획은 하루, 길어야 이틀 만에 가는 거였는데 생각보다 오래 걸렸다. 설마 사흘 꽉 채울 줄이야.
첫날 출발한 때가 저녁인 게 컸다.
“급한 건 맞아요. 그래도, 서두르면 일을 망치는 법이에요. 게다가.”
치아나는 내 옆에 서서 같이 굴뚝산을 바라보았다.
“굴뚝산을 만만히 보지 마세요? 저녁에 오르는 건 진짜 위험해요. 그러니 오늘은 여기서 쉬죠. 잘 쉬어둬야죠.”
치아나는 획 돌아서 고개만 이쪽을 보고 말했다.
“잊으셨어요? 저희는 지금 세계를 구하러 가는 거라고요?”
세계를 구한다는 말이 살짝 어색했다. 왠지 오랜만에 듣는 말이다. 솔직히 말해
“아직도 믿기지 않으시나요?”
흠칫 놀랐다. 또다. 대체 몇 번째 내 생각을 맞히는 건지.
“후후, 이해해요. 오히려 그런 말만 듣고 여기까지 와 주신 게 더 감사한 일이에요.”
치아나는 다시 획 돌아서 나를 똑바로 쳐다봤다.
“내일, 유성의 폭포에서, 모두 말씀드릴게요. 세계의 위험도, 레쿠쟈도, 그리고.”
치아나는 잠시 머뭇거리다 이내 입을 열었다.
“관장님의 아버님에 대한 것도.”
그 말을 끝으로 치아나는 가볍게 고개를 숙이고는 센터 안쪽 숙소로 들어갔다. 나는 멍하니 그 모습을 보다, 다시 창문 너머 굴뚝산을 바라보았다.
유성의 폭포. 내일 그곳에 도착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