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고
그런 이상한 침묵은
자신도 모르게
의자에서 일어난 뒤
코난을 향해 다가오는
베르무트의
떨리는 목소리로 깨졌으니..........
"한...한 가지만 물어보자...
혹...혹시
4년 전........
멕시코 시티에서
진의 형과
그.......전........보스의 동생을 죽인 게
너....너니?"
그런
베르무트의 물음에
코난은
찻잔을 든 모습으로
태연하게
베르무트의 앞에 서더니,
"뭐,
그들은 암살자들이잖아요?
제 생각으로는
그 두 사람은
저와 제 사촌형에게
그렇게 죽은 것에 대해서
아니
그런 식으로 급살을 당해서
도쿄 스카이 트리에서서 떨어트린 호박처럼
완전히 짓이겨저서
얼굴도 알아보지 못하는
처참한 변사체가 된 것에 대해.....
개인적으로
그렇게.......
섭섭하게 받아들이거나
딱히 억울해하지는 않았을걸요?
그 부분은........
믿으셔도 될 거에요."
천진난만한 말투와
얼굴로
코난이 이야기를 끝내자마자
베르무트는
한 번도 보인 적이 없는
흥분된 모습으로
코난의 따귀를 후려갈기고,
베르무트의 따귀에
얼굴이 돌아간 코난은
곧
다시 고개를 돌리면서
드라이아이스보다
더욱 싸늘한 눈빛을 뿜으면서
들고 있던 찻잔을
조용히 테이블에 내려놓고
천천히
베르무트를 향해서 다가가자
베르무트는
자신도 모르게 뒷걸음질을 치기 시작하고
그런 그녀의 모습을
놀란 얼굴에 더해서
신기하다는 듯이 쳐다보는
아무로 토오루 ( 후루미 렌야 ) 는
그렇게 다가가는
코난의 얼굴을 보다가
코난의
온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듯한
한기에
자신도 모르게
이빨이 덜덜 떨리는 것을 느낄 수 있었고,
그런 오싹함은
다른 사람들도 공감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런 한기 속에서
뒷걸음질 치고 있는
베르무트와
다가가고 있는 코난은
공포와 비꼬움이 가득한 대화를
마치
탁구공을 치고 받는 것처럼
주고받고 있었으니.........
"너...너가 죽인
그 두 사람이
나에게 어떤 존재였는지 알고나 있어?
나...나는
그들을 존...경했었단 말이야...."
"오.
당신이 그렇게 미워하고 증오하는
그 두 사람을 향해
존경과 충성을 바쳤다라......"
"그..그들은
나의 침묵을 신용하고 믿어줬어.
그들 때문에
그나마
내가 그 조직에서
별 문제없이 출세를 할 수 있었단 말이야...
그들이
그렇게 비명횡사하고 나서
내가
진을 포함한
조직의 상급간부들에게
얼마나 시달림을 받았는지 알아.....?"
"뭐.......
이런 일을 하시면서
그 정도 위험 쯤은 감수하실 생각이 아니셨나요...."
"진.....진짜로
그 당시에
보스가 나를 눈여겨보지 않았다면
나는
진 아니
키안티나 코른의 손에
죽임을 당할 수도 있었단 말이야!
게...게다가
그런 상황을 모면하기 위해서
여러 조직원들에게
되려 내가 빚까지 졌고 말이야!
그거는 알고나 있니?"
"뭐 그거야
베르무트 당신 문제지
내 문제가 아니니까요.
게다가
미녀들은
그런 빚을 지는 위험에 대비한
자신만의 방어 수단을 가지고 있지 않나요?"
"이...이런 상황에서
내가 너를 믿을 것 같니?
지금 상황에서는
나는
누구도 믿을 수 없어......"
"그 마음 잘 알지요.
베르무트
당신은
아직 잘 느끼지 못하신 것 같은데,
이 세계는
적도 속여야 되고,
아군도 속여야 되고,
친구도 속여야 되고,
가족도 속여야 되고
믿을 수 있는 유일한 존재는
나 자신뿐이지만,
필요하다면
나 자신조차도 속여야 되는
진짜 만화경
아니
거울 나라 그 자체의 세계지요."
"아...아무래도
너는
그 조직의 조직원들
아...아니
진보다도
더 미치고 돌은 것도 모자라서
진보다 더 냉혹하고 차가운......
인간도 아닌
기계 그 자체인 것 같구나........"
"오.
진짜 베르무트 당신은
이 세계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뛰어난 본능을 가진 것 같군요.
몹시 존경스러운데요?"
"너...너는
진짜 죽고 싶어서 환장한 놈들보다
더 미친 놈 같구나.......?"
"당신과 같이 가는 것도 괜찮겠지요.
그 곳이
지옥이든 천국이든 간에 말이에요.
안 그런가요?
베르무트?"
"너...너란 아이는
진짜로 천의 마녀라고 불렸던
나를 능가하는
진짜로 교활한 여우...
아..아니
악마를 능가하는 지옥의 마귀 그 자체야....."
"러시아 식의
최고의 극찬으로 받아들이지요."
그런
두 사람의
만담 아닌 만담(?)이 계속되는 동안
결국
더 이상
뒷걸음질 할 수 있는 공간이
완전히 사라져 버리고
그렇게
벽에 몸을 기댄 베르무트는
곧
코난의 이어지는 말에
그나마
한 방 먹여줄 수 있다는 기회를 잡았다고 생각했지만,
그런 생각은
지옥불에 들어간 눈뭉치마냥
순식간에 사라졌으니.....
"그러나 저러나
이렇게
오랜 잠입 임무를 수행하시다 보면
가끔
가족 생각도 나셨을텐데.....
어떻게 견디셨나 궁금하네요."
그런
코난의 천진난만한 말투에
베르무트는
그나마
한 방 저 아이에게 먹여줄까 하는 생각을 품으면서
비꼬는 듯한 표정을 지으면서도
한편으로는
우울한 모습으로,
"내 부모님은
1968년에 자동차 사고로 돌아가시고,
하나 있는 오빠는
아프가니스탄 전쟁에 참전해서
소식조차도 몰라.
왜?
내 가족사를 듣고 동정심이라도 가지고 싶어서?"
라고 말하면서
그래도
저 건방진 코난에게 한 방 먹였구나 하고 생각했지만
곧
안되었다는 얼굴로 이야기하는
코난의 말에
완전히
경악 그 자체가 되었으니.......
"저기
얼이 완전히 나간 듯한 아무로 토오....
아니
버본이라고 불리는 후루미 렌야 씨도 그렇지만
베르무트 당신도
가족에 관한 사항이 나오니까
감정을 제대로 조절하지 못하시네요?
거짓말이라고 하는 게
딱 얼굴에
다 드러나보이시는데,
그런 식으로 거짓말하실 거라면
관두시는 게 좋을 것 같네요.
당신 부모님은
지금
러시아 국가근위대 소속 대 테러진압팀 ( СОБР(Специальный Отряд Быстрого Реагирования, SOBR) ) 소속의
중위인
여동생인 카티야와 함께
상트 페테르부르크 외곽의 전원 주택에서 잘 살고 있잖아요?
그런데
СОБР (Специальный Отряд Быстрого Реагирования, SOBR) 라........
거기는
말 그대로
한국의 경찰특공대나
일본의 SAT 를 능가한다고 할 수 있는
러시아의 경찰특공대에 해당하는 부대인데......
제가 알기로는
조직 범죄에 대항하기 위하여 창설되어
현재는 대테러부대 임무를 수행하는 특수부대로
국가근위대의 스페츠나츠라고 불리지요.
OMON이나
근위대 내의 다른 곳에서 복무하고 있던 장병들을 영입하여
다시 훈련시켜 소수 정예로 운용하는
진짜 엘리트 조직인데......
역시
그 언니에 그 동생이군요.
거기에
베르무트 당신 부모님도 마찬가지고 말이지요.
두 분 다
장군 연금까지 받으신다는 거는
당신 부모님도
러시아 군 고위급 장성이라는 건데.......
진정한 패밀리 비지니스를 실천하는
멋진 집안이군요.
뭐
사실
당신에 관한 모든 사항은
이미 다 알고 있지요.
어떤 식의 생활 습관을 가지고 있는지,
뭘 즐겨 먹는지,
심지어는
당신이 러시아에 있었을 때
잠깐 정도 사귀었던
프룬체 육군 사관학교 후보생을
밤에 어떻게 껴안고 즐길 때 나오는
신음소리 옥타브와
사소한 습관까지
전부 다 알지요."
까지 이야기하던
코난은
완전히
대낮에
귀신이나 부기맨이라도 본 것 같은
하얗게 질린 얼굴이 된
베르무트를 바라보면서,
"한 가지 격언을 알려드릴까요?
당신같은 정보전에 대한 실전경험이 부족한 장교에게
아주 잘 어울리는 금언이지요.
' 훈련은 쓰게 결투는 달게. '"
그런
코난의 말에
베르무트는
완전히 넉다운 된 것 같은 얼굴로
코난을 바라보다가,
곧
존경과 경의
그리고
공포가 뒤섞인 기묘한 표정으로
코난을 바라보면서,
"러시아 최고의 군인으로 칭송받는
수보로프 원수께서 즐겨 쓰셨던 금언인데
진...진짜로 대단하구나....
일본인으로서
러시아를 나보더 더 잘 알고 이해하는 사람이 있을 거라는 것은
도저히 상상도 못했는데.
게...게다가
나에 대한 모든 것을
어떻게 그렇게 빠삭하게 알고 있는 건지............"
하면서
코난을
완전히 존경하는 듯한 모습으로 바라보고
그런 그녀의 모습을
멍한 얼굴로 바라보던
아무로 토오루 (후루미 렌야 ) 는
만약에
이런 모습을
진이 보고
놀라는 얼굴을 볼 수만 있다면,
자신의 1년치 월급이라도
당장 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코난을
완전히 괴물 보듯이 바라만 볼 뿐이었다.
그리고
그런 베르무트를
3년 전에
코고로를 시험해 본 것 처럼
장난꾸러기 같은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던 코난은
곧,
베르무트를
날카로운 눈빛으로 쳐다보면서
"모든 전쟁의 기본은 속임수이다.
적을 알아야 전쟁에서 승리하는 법.
친구가 되고 믿음을 얻으면서
자신이 대적해야만 하는 적을 상대해야 한다.
친구는
나의 가까이에 두고
적은
나의 친구보다 더욱 가까이에 두어라.
적이 만약에 나보다 강하다면
그 적을 피하고,
적이 만약에 화가 나 있다면 더욱 자극시켜라."
라고 말하자,
그 방에 있던 사람들은
지금 저 아이가
도대체 뭔 소리를 하는 것인가 하는 표정으로
코난을 바라보고,
신이치(?)와 코고로는
또 저 소년만의 시험이 시작된 건가 하는 기대하는 모습으로
베르무트를 바라보자,
그런
그들의 시선을
눈을 꿈벅이면서 바라보던
베르무트는
뭔가 장난기가 섞인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코난을 보자
가볍게 한숨을 내쉰 뒤,
선생께
구두시험의 답변을 이야기하는
학생처럼,
"손자병법.
손무가 지은
인류 최고의 병법서에 있는 내용이구나."
라고 이야기한 뒤
코난이 쏜
강 스파이크를 블로킹하는 것처럼
자신만만한 말투로,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해서는
자신이 가진 모든 힘을
적의 중심에 집결시켜서
단번에 공격을 해야 한다."
라고 맞받아치자
코난은
제법인데 하는 눈빛으로
베르무트를 바라보면서,
"전쟁론.
칼 폰 클라우제비츠가 쓴
서양의 손자병법이자
전쟁 그 자체를 훌륭하게 묘사한
전쟁 철학 서적의 최고봉이지요."
라고 말하면서
조금은
존경한다는 얼굴로,
"역시......
러시아의 군인들은
미국의 군인들보다
훨씬
전쟁론을 잘 이해하는 것 같네요.
과연,
프룬체 러시아 육군 사관학교 역사상
최연소 수석 졸업생 다운
뛰어난 실력과 재능이시군요.
졸업논문이 아마
'전쟁론의 본질, 그리고 전쟁론의 허와 실의 구분' 이었던가........"
그런
코난의 감탄하는 듯한 태도에 더불어
한 방 먹었네 하는
감탄하는 모습을 보면서
베르무트는
드디어
한 방 저 소년에게 먹였네 하는 만족감과
자신이
러시아 프룬체 육군 사관학교에서 썼던 졸업논문까지
전부 다 알고 있는
코난의 엄청난 정보력에 대한 두려움이 뒤섞인
묘한 표정으로
코난을 바라만 보기만 했고,
제임스 블랙과 조디 요원을 포함한
다른 FBI 요원들과
세라의 어머니인
메리 세라는
자신들의 레벨을 완전히 능가하는
최고의 고수들만이 즐긴다는
고도의 심리전에
완전히 질렸다는 모습으로
그 둘을 바라보기만 했고,
아무로 토오루 ( 후루미 렌야 ) 조차도
완전히 말을 하는 법을 잊은 듯한 얼굴로
멍하니
그들을 바라만 볼 뿐이었다.
알렉산드르 수보로프
알렉산드르 바실리예비치 수보로프(Алекса?ндр Васи?льевич Суво?ров)
1729. 11. 24~1800. 5. 18
러시아군 전략의 아버지.[1]
프리드리히 대왕, 나폴레옹 보나파르트 사이의 유럽의 먼치킨.
그리고 러시아군의 인명경시 전설을 스타트찍은 사람
프리드리히 대왕, 나폴레옹 보나파르트 사이의 유럽의 먼치킨.
그리고 러시아군의 인명경시 전설을 스타트찍은 사람
제정 러시아의 마지막 대원수이자, 생에 단 한번도 패배하지 않은 불패의 장군이다, 그리고 알프스를 넘은 세명의 전설 중 한명.
목차
1. 생애
2. 평가
3. 서훈 내역과 기타 이력
1. 생애[편집]
수보로프는 노브고로드 공화국 시기부터 전해져 오던 유서깊은 귀족 가문의 후예로 태어났다.
그는 바실리 수보로프의 외아들이었으며, 바실리는 당시 러시아 귀족들의 전통과는 달리 위험한 군인보다는 안전한 관리로 키우려고 했다.
그는 바실리 수보로프의 외아들이었으며, 바실리는 당시 러시아 귀족들의 전통과는 달리 위험한 군인보다는 안전한 관리로 키우려고 했다.
하지만 그러한 아버지의 바램과는 달리 수보로프는 어릴적부터 군대에 지대한 관심을 보였으며, 군인이 되는 것을 꿈꾸었다. 아버지는 그의 관심을 다른 분야로 돌리려 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그런 그가 11세가 되던 해에 아브람 페트로비치 간니발[2]이 집에 방문했고, 그 아버지의 하소연을 들었던 간니발은 수보로프와 오랫동안 군사에 대해 토의하고는 바실리에게 아들의 천직은 군인이라 말하고, 결국 하는수 없이 그의 아버지는 수보로프를 군대에 입대시킨다.
그런 그가 11세가 되던 해에 아브람 페트로비치 간니발[2]이 집에 방문했고, 그 아버지의 하소연을 들었던 간니발은 수보로프와 오랫동안 군사에 대해 토의하고는 바실리에게 아들의 천직은 군인이라 말하고, 결국 하는수 없이 그의 아버지는 수보로프를 군대에 입대시킨다.
그렇게 군에 입대한 수보로프는 1741년의 러시아-스웨덴 전쟁, 7년 전쟁 등에 종군하였다. 그렇게 종군하면서 활약하던 수보로프는 33세의 나이로 대령이 되었다.
그 후 폴란드 전역에서 폴란드군을 대파하고 크라쿠프를 함락시켜 러시아가 프로이센, 오스트리아와 함께 폴란드 영토를 분할해 강점하는 데에 일조했으며, 그 공으로 소장이 된다. 또한 1787년에 벌어진 오스만 투르크와의 전쟁(러시아 - 투르크 전쟁)에서도 무수한 전공을 세워 예카테리나 2세와 오스트리아의 요제프 2세에게 각각 백작 작위를 서훈받았다.
투르크를 굴복시킨 후에는 타데우쉬 코시치우쉬코가 폴란드 해방 투쟁을 일으키자 폴란드로 파견되어 폴란드 저항세력을 개발살(...)[3]내고 코시치우쉬코를 포로로 잡는 등의 무공을 세웠으나, 전투 후 귀환하던 중에 예카테리나 2세가 사망하고 파벨 1세가 즉위하면서 찬밥 신세가 된다. 파벨 1세는 자신의 성장과정으로 인해 모친의 유산(여제의 가신이나 측근, 그녀가 확립해 놓은 대외정책 등)에 대해 강한 거부감을 드러내는데 이는 예카테리나에게 신임받던 수보로프도 예외가 아니었고, 수보로프도 파벨 1세의 지리멸렬한 행동에 대해 경멸감을 감추지 않았기에 파벨 1세는 수보로프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는 등 노골적으로 견제를 가했다.
그러다가 프랑스 혁명전쟁이 일어난 뒤 1799년에 이탈리아로 파견되어 거기에서 프랑스 혁명군을 격파해 프랑스 세력을 이탈리아에서 일시적으로 몰아내는 데 성공한다. 이듬해 코르사코프 장군의 군대가 앙드레 마세나가 이끄는 프랑스군에게 격파당하고 동맹이던 오스트리아군이 러시아군의 위기를 외면하자 군의 재정비를 위해 알프스를 넘는 과감한 기동을 강행한다. 프랑스군도 이를 요격하기 위해 따라붙었으나, 수보로프가 이끄는 러시아군의 진용이 견고하여 결국 요격에 실패하고 놓쳤고, 이 전공으로 역사상 4번째이자 마지막 러시아 대원수에 임명되었다.
이러한 전공으로 인해 수보로프는 당초 러시아에서 개선식을 거행할 수 있다는 약속을 받아냈으나, 변덕스러운데다 수보로프를 싫어하던 파벨 1세는 이내 이를 취소해 버렸고, 수도로 귀환한 수보로프와의 면담조차 거부했다. 오랫동안 전쟁터를 전전하면서 건강을 해친데다 파벨 1세의 연이은 푸대접으로 인해 실의에 빠져 결국 며칠 후 사망하고 만다. 그의 시신은 알렉산드르 네프스키 수도원에 매장됐으며, 파벨 1세의 방해로 인해 그의 장례식은 러시아의 전쟁 영웅의 명성에 걸맞지 않게 초라하게 치러졌으나, 훗날 알렉산드르 1세가 상트페테르부르크의 마르스 광장에 수보로프를 기념하는 거대 조각상을 세운다.
2. 평가[편집]
러시아군 전략의 아버지라는 명성에 걸맞게 신중하고 상세한 전략 구상과 과감한 전술기동을 통해 승리를 쟁취해내는 법을 알던 장군으로, 자신의 저서에서도 이러한 부분들을 강조하는 구절이 나온다. 또한 강도높은 훈련을 통한 군의 정예화와 단결력 고양을 중시하던 인물로 본인도 체력 단련에 노력을 아끼지 않아 강건한 신체를 자랑했다고 전한다.[4]
다만 전쟁에 있어서 아군의 승리를 이끌어내는 게 지나쳐 적에게 무자비한 희생을 자주 강요했다. 투르크의 전쟁 막바지에 투르크군이 농성하던 이스마일 요새를 함락시킬 때에는 요새 내의 무슬림들을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3일에 걸쳐 학살했는데, 이 당시 학살당한 무슬림의 수가 4만 명에 달하며, 생존자는 수백 명에 지나지 않을 정도의 참상이었다. 또한, 폴란드의 해방 투쟁을 분쇄할 당시에 자치도시 중 하나인 프라가를 함락시키면서 약 2만 명의 폴란드인들을 학살했다. 이러한 무자비한 처분은 적의 저항의지를 분쇄하는 데에 탁월한 효과를 발휘했으나, 후세에게는 당연히 비판의 대상이 되었다. 다만 이에 대한 수보로프의 자세한 정황이 남아있지 않기 때문에, 그가 이러한 학살을 주도적으로 일으켰는지에는 역사가들마다 의견이 엇갈린다.
총평을 내리자면 어떤 쪽으로 보던 그야말로 러시아스러운 장군이라고 할 수 있다.
인명을 장식으로 취급하는 과감한 움직임도 그렇고...[5]
인명을 장식으로 취급하는 과감한 움직임도 그렇고...[5]
서양 역덕들 사이에서는 러시아 장군치고 상당히 높게 평가받는다. 거의 나폴레옹이나 한니발급으로 쳐주는 듯.[6]
3. 서훈 내역과 기타 이력[편집]
러시아 제국 육해군 대원수
이탈리아 공작
신성 로마 제국 백작[7]
오스트리아, 사르데냐의 야전원수
[1] 실제로 제정러시아는 러일전쟁까지도 수보로프의 전략과 전술을 답습했다. 그야말로 좋은 의미로던 나쁜 의미로던 러시아군 전략의 아버지, 그리고 그 제정 러시아군의 전략 전술이 소련에게 이어진 것을 생각하면 공산권의 전략의 아버지라고 할 수 있을듯?
[2] 대 문호인 푸슈킨의 증조부이며, 표트르 1세의 흑인 측근 중 한명. 참고로 간니발은 한니발에서 파생된 이름이다. 전설의 그이름
[3] 이 과정에서 표트르 바그라티온을 만나게 된다. 자세한건 바그라티온 문서 참조.
[4] 당장 말년에 직접 말타고 알프스를 넘던 양반이다.
[5] 당장 그의 저서에서부터 러시아의 강점은 인구라고 적어놓고 있다. 그리고 위에서 말했다시피 이건 제정러시아는 물론 소련시절까지 그대로 이어진다.러시아 인명경시 전통의 선구자
[6] 실제로 수보로프는 나폴레옹의 이탈리아 전역을 보고는 "나라면 나폴레옹을 이길수 있다" 라고 했다고(...)
[7] 폴란드 전역에서 요제프 2세가 수여한 작위.
클라우제비츠
목차
1. 프로이센의 군인
1.1. 생애
1.2. 전쟁론
1.3. 그 외
1. 프로이센의 군인[편집]
본명은 카를 폰 클라우제비츠(Carl von Clausewitz).
전쟁론의 저자이자 나폴레옹 시대의 탁월한 전략가 중 한 명이자 서양 최초의 군사 사상가이자 철학자라 불리는 인물.
1.1. 생애[편집]
프로이센 중류층 집안에서 태어났다. 고조부 증조부는 목사였고 할아버지는 역시 목사이며 유명한 신학교수였다고 한다. 삼촌중에 한 명도 목사였다하고 한다. 훗날 전쟁론 집필때 철학적 사유와 서술 방식엔 신학교수였던 할아버지의 학문적 영향도 있었다고 한다. 목사 집안 이었지만 클라우제비츠의 아버지는 프리드리히 대왕 밑에서 하급장교 중위를 지냈는데 전쟁이 끝나고 프리드리히 대왕의 엄명에 따라 군대에서 쫓겨난다. 원래 프리드리히 대왕은 부르주아들을 경멸해서 장교단에 받아들이지 않았는데 전쟁시엔 귀족수가 크게 모잘라서 어쩔 수 없이 받아들였다가 전쟁이 끝나자 귀족 출신이 아닌 자들을 모두 쫓아낸 것... 그의 아버지는 전역 하고 나서도 장교출신임을 들어 Von를 쓰고 다녔다고 한다. 그런고로 아버지의 영향을 받아서 신분상승 욕구와 군복무를 갈망했고 그의 형제중 3명이 같이 입대 했다고...
당시 12세에 참전[1]하여(…) 15세에 사관학교에 들어갔으며, 샤른호르스트에게 군사학을 배웠다. 그의 능력이 출중하여, 프로이센 왕실의 하인리히 왕자 직속 부관이 되어 왕자에게 전쟁에 관한 것을 가르쳤다. 훗날 하인리히 왕자와의 연줄 덕으로 국왕이 되는 왕세자 프리드리히 빌헬름 4세와 둘째 왕자 빌헬름(빌헬름 1세)도 가르쳤다고 한다...
그런 그가 살았던 시기가 프랑스 혁명 시기인지라, 인생의 상당부분을 나폴레옹 전쟁에 종군하게 된다. 1806년 예나 전투에서 후위대를 맡아 나폴레옹군을 저지하다가 사로잡혀, 파리에서 포로생활을 하기도 했다. 이후 귀국하여 샤른호르스트를 도와 군 개혁에 몸담았으나 1812년 패전한 프로이센이 프랑스의 요구에 의해 동맹을 맺고[2] 대러시아 원정에 꼬붕으로 끌려가 참전하자, 탈영을 감행 프로이센 출신 탈영병 2만명을 모아 러시아군에 종군한다. 클라우제비츠는 '나폴레옹 군대와 대적하여 이긴 세력이 없으니, 나폴레옹의 군대보단, 나폴레옹의 군대를 유지하는 것을 상대해야 한다'는 게릴라전이나 물자 보급을 약화시키는 지연전을 주장하고, 이것이 먹혀들어 1812년 보로디노 전투 이후 나폴레옹이 몰락하는 한 주축을 담당하였다. 그리고 1813년 프로이센군과 접촉하여 프로이센이 대불동맹에 가담하는 계기가 된 프로이센 - 러시아 협력을 구축하였다. 러시아군 신분으로!
이후 해방전쟁의 결과 나폴레옹이 패배하고 귀향을 떠난 1815년에서야, 지난 군영 무단이탈과 적군에 대한 종군혐의로 찍혀있던 그는 프로이센 왕이 귀국을 허락해 사관학교 교장이 되었다. 이후 육군대학 교장과 포병감 등을 지내고, 이 시기부터 《전쟁론》에 손을 대어, 6-7장을 제외한 장의 초고를 사망하기 전까지 완성한다.
그나이제나우 장군 휘하의 참모장을 역임하다가 유럽 콜레라에 걸려 51세의 비교적 젋은 나이에 사망하고 만다. 참고로 이 때 이 콜레라로 그 유명한 프리드리히 헤겔과 클라우제비츠 등 여러 석학들이 사망했다. ㅎㄷㄷ. 사후에 그의 부인이 전쟁론을 출판하였다.
1.2. 전쟁론[편집]
그의 저서 《전쟁론》은 아시아의 《손자병법》과 더불어 시대를 초월한 군사전략서로 꼽힌다. '전쟁은 정치의 연장선에 있다' 라는 내용은 전쟁의 본질을 꿰뚫는 핵심적인 언급으로, 전쟁론을 읽지 않은 사람들도 많이 아는 말 중 하나다. 사실 꽤 많은 이들이 이 문장 하나만 보고 전쟁론을 접어버리곤 한다. 더불어 책의 문구 자체가 직접적인 내용보다는 문학적인 표현 등을 주로 사용했으며, 무엇보다도 클라우제비츠 본인이 이 책을 미처 완성하지 못하고 사망하는 바람에 방대하고 철학적이기까지 한 내용이 정리가 덜 되어(...) 이해하기가 어려운 면도 있다. 군인들도 전쟁론을 어려워 하는데 민간인 에게는 군사학적 지식이 없어서 군인은 철학적 사유 방식의 이해 부족으로 명성에 비해 깊이 정독한 사람은 물론 전문가 까지도 흔치 않다.
참조 문서: 샤른호르스트
1.3. 그 외[편집]
?히틀러가 마지막으로 내린 초토화 작전명이기도 하다. 고인드립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군의 클라우제비츠 사단.
?간혹 군대에서 정신교육 관련 문제가 나올때 정훈 장교들이 이 사람 이름을 묻는 경우도 있다. 장병들의 정신교육 교재들 대부분의 첫 페이지에는 이 사람 명언이 적혀있기 때문(...) 하지만 엘랑 비탈식 정신력 주의와 전쟁론의 "전쟁 의지"는 전혀 다르다.
?소설 혼블로워에서 주인공을 더 빛나게 하는 조연으로 나온다. 이론만 아는 백면서생으로 위급한 상황에서 혼블로워만 바라보는 안습한 역할이다.
?패러독스사의 게임 빅토리아에서 전쟁술을 쓴 앙리 조미니식 사고와 함께 초기에 선택할 수 있다. 조미니는 사기 120, 조직력 104, 클라우제비츠는 사기 76, 조직력 133이 된다. 대부분의 인공지능 국가가 조미니를 고르는데, 화력이 강해질 수록 조직력이 중요해지기 때문에 나중에는 클라우제비츠가 더 좋다. 다만 초기의 클라우제비츠는 약소국에게도 사기 문제로 신나게 발려나간다는 게 문제.
[1] 지금이라면 소년병이니 뭐니 욕먹을 일이지만 당시에는 이런 건 흔했다. 일단 지금과 달리 당시는 최상류층마저도 평균 수명이 47세를 넘기지 못했던 시절이거니와 미국에서도 남북전쟁이나 필리핀 침략전쟁까지 10대 초반 꼬마들이 당번병으로 잡일을 하던 건 흔한 일이었다. 영화 워털루에서도 프랑스군에서 북치는 꼬맹이들이 등장한다..
[2] 틸지트 화약의 결과.
전쟁론
목차
1. 개요
2. 전쟁론이 미친 영향
3. 번역본
1. 개요[편집]
나폴레옹 전쟁을 겪은 프로이센의 군사학자 카를 폰 클라우제비츠의 저작...인데, 그는 완성하지 못하고 콜레라로 죽었다. 사후 클라우제비츠의 아내 마리 폰 클라우제비츠와 아내의 동생(카를 폰 클라우제비츠에게는 처남)인 프리드리히 폰 브륄 그리고 부하였던 프란츠 아우구스트 오에첼 소령 등이 클라우제비츠의 노트나 메모를 보고 보완해서 펴낸 책이다. 말하자면 미완성 유고 묶음집.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시대의 전법을 학문적으로 일반화한 것으로 평가받는다. 이 책에서 강조한 것은 '중심(center of gravity)'의 개념이다. 그리하여 "(쓸데없는 곳을 치는데 전력을 낭비하지 말고) 모든 전력을 집중하여 적의 중심을 유린해야 승리를 얻을 수 있다"는 어찌보면 너무나 당연하고도 명백한 사실을 강조했다. 반면, 당시 각광받던 조미니의 저술은 '결정적 지점(decisive point)'을 강조 했는데 적이 결집하거나 지형상 우세를 점하기 이전에 결정적 지점을 확보하는 것으로 군사 운용에서의 제약 조건인 병력과 그에 따른 보급, 화력 규모, 지형 같은 여러 변수들을 나폴레옹의 용병방식을 통해 해석, 설명했고, 이는 유럽 군사 전문가와 지식인들에게 널리 받아들여졌다.
그러나 클라우제비츠는 이런 식으로 전쟁을 계량적이고 합리적인 방식으로 재단 하는 것은 노력의 낭비라고 평가절하 했다. 클라우제비츠는 철학적인 방법론을 이용해서 전쟁을 설명하는데 전투라는 것은 수천 또는 그 이상 인간이 벌이는 '단체 결투'나 다름없다고 정의하며 전쟁의 3요소[1]로 '정치적 목적'(이성),[2] '폭력'(열정),[3] 우연성[4]을 들었다. 이 우연성이 전쟁을 계량적으로 판단 할 수 없음의 근거이다.
이런 서술 방식은 발표 당시와 상당 기간 후에도 전혀 받아들여지지 않았는데 군인이 읽기엔 너무 철학적이고, 군사 분야와 관련없는 일반인이 읽기엔 너무 전문적이라 누가 보더라도 이해하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그러나 후에 헬무트 폰 몰트케가 보불전쟁에서 승리한 뒤 그의 애독서로 전쟁론이 있었음이 소문이 나면서 전 유럽, 그리고 세계에 널리 퍼지게 되는데 독일말로 써놔도 알아먹기 어려운 난해함 때문에 한 번 이상 번역을 거친 타국에서는 물론 본국에서조차 저자의 의도를 다르게 받아들이거나 요상하게 확대 해석하는 식의 폐해가 있었다. 하지만 클라우제비츠가 전쟁의 본질을 다룬 집필방식은 처음에 의도했던 대로 그가 죽은 지 수십, 수백 년이 지난 현재까지 유용하다. 과거부터 현재, 그리고 미래까지 과학기술과 진보와 전쟁의 방식은 변화 하지만 전쟁의 본질은 그대로 이기 때문.
클라우제비츠의 저서 전쟁론은 훗날 후학들이 제1차 세계대전에서 보여준 지루한 참호전과 소모전을 넘어설 수 있는 이론으로 각광받았으며, 이후 독일과 소련은 각각 1920-30년대 공군과 기갑부대이론과 결합하여 새로운 교리체계를 개발하였다. 단 여기서 클라우제비츠의 전쟁론의 영향을 받았다는 것은 책을 문리대로 전술적 방식을 그대로 이식하는 것이 아니었다. 전쟁의 규모와 양상이 이전과 달라지면서 '정치적 목적성'이 매우 중요해졌기 때문에 이전의 전쟁 방식인 전선에서의 전투의 중요성이 뿐만 아니라 적지 깊숙한 곳을 타격[5]하게 되는데 전선에서 싸우는 기존의 전쟁에서 전쟁수행능력 자체에 타격을 주는 양상의 전쟁으로의 변모는 클라우제비츠가 예견했다기 보단 그의 책을 읽은 후학들이 당시 전장 현실을 클라우제비츠 식으로 해석한 것이다.
당시 전쟁이란 그저 군주와 군대와의 싸움으로 인식되었으나, 전쟁론은 '총력전'의 도래를 예언했으며, 결과적으로 나폴레옹 전쟁 이후의 전쟁은 그의 예언대로 맞아 떨어졌다. 즉 국력의 결집 유무가 전쟁의 승패에 영향을 끼친다는 예상이 맞아 떨어진 것이다.
읽어보면 알겠지만, 전쟁론은 상당히 읽기 힘든 책이다. 저자인 클라우제비츠부터가 "2, 3년이면 다 읽히고 잊혀질 책을 쓰는 것은 내 자존심이 허락하지 못한다."라는 학문적 각오(라고 쓰고 배배 꼬인 심사라 읽는다)로 자신의 반평생을 들여 집필한 데다, 그가 집필 도중 생각을 바꾸어서 다시 쓰다가 콜레라로 갑작스럽게 사망해 책 자체가 미완성인 것 때문이기도 하다.
그의 사후 원고를 정리한 아내 마리는 당대 여성으로서도 상당한 수준의 고급 교육을 받은 사람인데다가 남편의 사상적 이해자라는 평가를 받을 정도였기에 그녀가 정리한 지금의 전쟁론이 단순한 '미완성 원고'가 아닌 '완성된 책'의 가치를 지니는 것은 사실이다. 확실히 목차만 봐도 있을 건 다 있어 보인다.
하지만 여기에는 원고에선 보이지 않는 커다란 맹점이 있는데, 그건 바로 클라우제비츠가 책을 쓰던 중에 전쟁의 정의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크게 바꾸고 그에 해당하는 1, 2, 3장을 완전히 다시 썼다는 점이다. 전략과 전술에 대한 4장 이후의 내용들도 고쳐진 정의에 기반을 두어 다시 써져야 했지만 안타깝게도 클라우제비츠가 이 작업에 들어가려는 그 시점에 사망해버리는 바람에 이 부분들은 이전 원고 그대로 남게 되었다.
덕분에 안 그래도 '논리적 철학책' 따위의 말이나 듣는 전쟁론이 앞부분과 뒷부분에서 보이는 저자의 사상 변화 때문에 더 이해하고 읽기가 힘들어졌다. 그나마 남은 부분들이 원론적인 부분들을 기술했다기 보다는 기술적인 부분들에 해당했고, 그마저도 워낙에 잘 쓰인 덕에 아직까지도 많이 읽혀지고 쓰이기는 한다.
위에 언급된대로 전쟁론의 본질을 이해하지 못하고 확대해석했다가 크게 사고를 친 대표적인 사례도 있는데 전쟁으로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있다라는 잘못된 결론을 내린 독일제국 제국군 나치 독일 시대 국방군이다. 이들 군부집단은 군사적 모험으로 국내외 정치와 외교적 갈등을 전쟁이란 수단으로 해결 할 수 있을 거라는 환상에 젖어들었는데토탈워 쉬움 난이도, 전쟁론은 어디까지나 전쟁이 벌어질 것 같거나 전쟁을 벌이고 싶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에 관한 것을 다룰 뿐이지 전쟁이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있다고는 절대로 약속하지 않는다. 이 점을 주의해야 저런 잘못된 생각에 빠지지 않는다. 클라우제비츠 자신은 어디까지나 군국주의자라기보다는 고전적 현실주의자였다. 그는 절대로 전쟁 만능론을 설파한 적이 없으며, 도리어 "전쟁은 정치의 연장이다"라고 말했다. 이것을 생각해볼 때 전쟁은 정치적 목적성을 실현하는 수단으로 본 것은 맞지만, 전쟁 자체를 모든 문제의 해결책으로 제시한 것은 아니다.
"전투 의지"를 정신력 드립, 즉 엘랑 비탈로 이해하는 경우가 많으나, 1970년대 이후 영미권의 번역은 '전투 의지'를 '전투에 필요한 지성'으로 번역하는 경향이다. 현재 제일 최근판 한글번역(김만수 대전대 군사학 연구소)에서도 '국가의 의지'는 '정치적 목적'으로 해석하고 있다. 실제로 클라우제비츠는 "공격은 적극적이지만 약한 수단이고, 수비는 소극적이지만 강력한 수단이다" 라고 말하기도 했다. 1812년 자신이 직접 참전한 러시아 전역에서처럼 대규모의 적군은 국경 안으로 깊숙히 끌어들여 소모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2. 전쟁론이 미친 영향[편집]
'전쟁론을 제대로 공부한 러시아·독일 군사학계 >> 넘사벽 >> 영미 군사학계'라는 설이 있다.
일단 러시아. 전쟁론이 쓰여지고 이를 가장 적극적으로 받아들인 나라는 클라우제비츠의 나라인 프로이센(후의 독일)을 제외하면 러시아였다. 어느 정도냐면, 제2차 세계대전 때 독일군이 자신들이 점령한 러시아 도시들의 도서관을 뒤졌더니 모든 도서관에서 최소한 1권 이상의 전쟁론이 나오더라는 일화가 있을 정도다. 공산주의 혁명의 핵심이던 블라디미르 레닌조차 수차례 반복해 읽고는 세계적화를 위해선 반드시 정독하라고 권했을 정도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소련의 젊은 장교들은 전쟁론을 읽고 토론하면서 점차 붉은 군대를 '숫자만 많은 막장 군대'에서 그럴싸한 전술을 구사하는 군대로 발전시켜 나갔고, 이대로 제2차 세계대전 때까지 쭉 성장했다면 독일군과도 호각일 강한 붉은 군대가 만들어졌을 것이다. 그 놈의 스탈린이란 놈이 "전쟁론은 낡았다." 소리만 안 했어도... 많은 사람들이 2차대전 때 동부전선에서 초기에 소련군이 독일군에게 발렸던 가장 큰 원인을 대숙청에서 찾지만 이것도 무시 못 할 원인 중 하나다.
스탈린 사후에서야 러시아 내에서 전쟁론이 재평가되었으며, 전쟁학에 대한 심층적인 연구가 이뤄질 수 있었다. 한참 냉전이 심각할 때 소비에트의 전쟁학 연구는 그 연구 성과에서 적국인 미국을 앞서 있었다고 하며, 웨스트포인트에서 아직 전쟁학 석사과정 밖에 개설하지 못하고 있을 때, 전쟁학 박사가 발표한 논문들이 모스크바에서 서방으로 흘러나오기도 했다.
한편, 전쟁론이 나온 이후 영미 군사학계의 일반적인 태도는 '전쟁론? 그거 그렇게 대단한건 아님'과 '우리도 그 정돈 했다'로 압축해 볼 수 있다. 리델 하트의 전략론이 '우리도 그 정돈 했다'의 주된 증거로 쓰인다. 물론 개소리로 밝혀졌고 독일·러시아의 수준에 비하면 80년대 까지 개차반이었다.
머니볼의 저자 마이클 루이스의 말에 의하면 1980년대 월스트리트의 금융계에서도 유행하는 책이었다고 한다.
또한 2000년대 후반 금융 위기 때에도 다시 주목을 받기도 하는데, 전쟁론이 강조하는 전쟁요소 중 '우연성'이 인간 심리에 의해 요동치며 경제 이론과 다르게 움직이는 금융시장을 잘 설명할수 있는 대안으로 꼽힐 가능성이 있다 본다고...
또한 2000년대 후반 금융 위기 때에도 다시 주목을 받기도 하는데, 전쟁론이 강조하는 전쟁요소 중 '우연성'이 인간 심리에 의해 요동치며 경제 이론과 다르게 움직이는 금융시장을 잘 설명할수 있는 대안으로 꼽힐 가능성이 있다 본다고...
프랑스 감독인 베르트랑 보넬로 손에 영화화가 되기도 했다. ...물론 전기 영화나 그런 일반적인 영화는 절대 아니고 상당히 실험적인 스타일의 영화니 그냥 내용과 구성을 빌려왔다고 생각해고 보는게 좋다. 애시당초 영화의 배경이 현대다.
마오쩌둥도 이 책을 여러번 읽고 여기에 손자병법 등 중국의 전통의 병법을 결합하여 특유의 게릴라 이론을 만들었다고 한다.
3. 번역본[편집]
한국에도 꾸준히 번역판이 나왔지만 90년대 이전은 불쏘시개 수준이니 안보는게 좋다. 일본판 중역이거나 영어판 중역, 둘의 짬뽕 공식저자도 아닌 대학원생들의 번역기식 Ctrl+C,V 그리고도 그수준에서의 서로 베끼기 스킬로 전문가가 봐도 무슨 말인지 모를 지경이다.[6]
특히 1970년대 출판된 모 정치학자의 번역판이 나와 있지만 보지 않는게 좋다. 원래 내용도 어렵지만 번역이 잘 되지 않아서 읽어도 무슨 소리를 하는지 이해하기 힘들기 때문이다. 번역자의 독일어 실력이 문제라고 하기보다는 국어 실력을 키워야 할 정도라고 생각이 들 정도. 보통 전문 번역자가 아닌 사람이 번역하는 전문 서적에서 이런 일이 흔히 발생한다. 해당 분야 전공 지식은 있지만 국어 실력이 엉망이라, 제대로 표현을 못하기 때문이다. 번역자는 무엇보다도 국어 실력이 제일 중요하다. 게다가 책이 오래된 만큼 영어 번역판도 시대마다 다른 번역이 존재한다. 한국 대학 도서관에 있는 것들은 대체로 19세기 번역된 것이라서... 구글에서 구할 수 있는 PDF 영어판도 대체로 1900년 이전의 판들이다.[7] 이러한 번역본은 기존의 한국어 판만큼 신뢰하기 어렵다.
즉 영어판도 70년대 이전 번역은 신뢰하기 어렵다. 영어판이라고 해서 번역이 잘 되었다는것 이라는 생각은 편견이고 영어권 학자들도 기존의 오역과 중역으로 인한 폐해덕에 오히려 전쟁론의 가치가 묻히는것에 대해 개탄하고, 1970년대 이후 번역이 거의 갈아엎기 수준으로 새로 이루어졌다. 70년대부터 수정작업이 90년대까지 수정되었다.현대영역판은 이것을 의미한다.
현대 영역판에서 번역이 새로 이뤄진 부분은 대표적으로 프랑스군 항목에서 정신승리(?)의 영향[8]으로 지적되는 '의지'드립이 국가의 '정치적 목적' 또는 전쟁수행에 필요한 '지성'(intelligence)등 으로 번역하고 있다. 현대판에서 가장 권위있고 잘 번역 되었다고 평가 받는것은 피터 파렛(Peter Paret), 마이클 하워드(Michael Eliot Howard)의 공동 번역본?#이 가장 신뢰성이 높다고 평가받는다.[9]
국내판으로는 2005년에야 처음으로 완역본이 나왔는데 그걸 보면 된다. 1권이 2006년에 먼저 나오고 나머지 2,3권은 2009년에 같이 출판되었다. 당연히 이 책을 봐도 이해가 한번에 가지 않는 것은 있지만, 이것은 전문학자가 아닌 이상 당연한 것이며 최초판이 나온 이래로 군인들은 철학적 서술방법에 대한 부족. 일반인은 전문군사 지식의 부족으로 서로 장님 코끼리 다리 만지식으로 지금까지 계속 되어온 시행착오일 뿐이다. 최근 한국어 완역판은 적어도 번역가가 국어교육과 전공에 독일에서 강의도 했으며, 군사학도 가르치는 전문가라서 번역의 질이 다른 한국어 번역판보다 월등하게 높다. 이전판과 달리 1830년대 초판과 1840년 추가 발행판과 현대 독어판과 영역판을 모두 참고하여 번역했다고 하고 본문에서도 해설과 주석이 상세한 편이다. 이 완역판은 2016년 현재 전자책으로는 교보문고와 네이버 북스토어에서 판매되고 있다. 분량이 엄청나서 무거우니 가볍게 전자책으로 소장할 사람은 여기서 구매하면 된다. 이 완역판은 2016년 하반기에 전면개정되서 출간될 예정이라고 한다.
이 외에는 1998년 독일 유학파 육군 중장 류제승 (국방부 정책실장)이 번역해 밀리터리 클래식 시리즈로 출간한 한 전쟁론 축약판도 있다.
[1] 삼위일체(trinity)라고도 표현한다. 기독교의 그 삼위일체에서 따온 것이 맞다.
[2] 국가/정부의 결정 영역으로 규정했다. 전쟁이 단순히 '아방에 대한 무제한적 폭력행위'가 아닌, '또 다른 수단에 의한 정치의 연속'이 되는 것도 국가/정부가 군부를 지휘하며, 국익과 이성에 근거한 명확하고 한정적인 전쟁 목적과 지도를 해야 가능해짐을 뜻한다.
[3] 일반 국민, 민중의 영역이다. 클라우제비츠는 프랑스 대혁명, 나폴레옹의 점령에 대항한 스페인 국민들의 게릴라전을 통해 국민 다수의 열정이 전쟁을 얼마나 폭력적이고, 무제한적 양상으로 만들 수 있는지를 주목하여 전쟁의 3요소로 포함시켰다.
[4] '제복입은 전문가', 즉 군부(軍部)의 영역으로 규정했다.
[5] 뜻 그대로 종심은(縱深, Depth)은 전선에서 떨어진 적이나 아군의 깊숙한 지역을 의미한다. 러시아(소련)가 종심을 목표로 규정함으로써 타격 교리를 완성도 있게 만든건 맞지만, 영국나 프랑스도 19세기부터 포격의 사거리 증가와 철도시설 등의 새로운 수단으로인해 새로운 개념의 작전이 나올 것이라는 점은 어느 정도 예상하고 있었다. 그 영향력과 방식에 따라 각론이 갈렸을 뿐이다.
[6] 2005년도 완역자 김만수의 평
[7] 저작자 사후 50년이 지나서 저작권 소멸 된 것만 풀리니 당연히 그렇다.
[8] 휴스트레이천은 애초에 20세기 초반 당시 불어 번역판은 독일어나 철학적 사유방식의 이해부족으로 오역이라고 평가한다.
[9] 옥스퍼드 대학 사학과(전쟁사) 석좌교수 -휴 스트레이천(Hew Strachan)- 의 저서 '전쟁론 이펙트'에서의 평가
손무
孫武
Sun Wu/Sun Tzu
목차
1. 개요
2. 상세
3. 업적과 평가
1. 개요[편집]
춘추시대 오나라의 인물. 자는 장경(長卿).
제나라 낙안 출신. 그 유명한 손자병법 13편의 저자. 생몰연대에 대해서는 추측이 있는데 BC 544년~BC 496년이라는 것이있다. 다만 공자와 비슷한 시기를 살았던 인물이 아닌가 추정된다.[1]
조상은 진나라 왕족으로 본래 성은 규성. 기원전 627년 공자 완이 제나라로 망명해 정착했을 때 전田으로 씨를 바꾸고 100여년 동안 전씨 일족이 번성했는데, 손무의 조부인 전서가 거 땅을 정벌하는데 공을 세움으로써 손이라는 성을 받았다고 한다. 이후 손무도 조상이 그러했듯 제나라에서 살았으나 손무가 장성했을 때 제나라에서 내란이 일어나자 전국을 정처없이 떠돌아다닌 것으로 추정된다.
2. 상세[편집]
손무가 오자서의 추천을 받아 오왕 합려에게 13편의 병법서를 보인 것은 이 무렵의 일로, 이에 대한 일화는 사기에 실려져 있다.
일화에 따르면 합려는 손무의 병법 13편을 읽은 뒤 손무에게 자신의 역량을 증명할 것을 제안하고 손무는 이 제안에 따라 180명의 궁녀를 즉석에서 조련해보인다. 이 과정에서 손무가 처음으로 한 것은 전권위임과 부대의 분리, 부대장 임명, 명령체계와 신호를 약속하는 것이었다. 이후 손무는 합려에게 전권을 위임받았다는 증표인 도끼를 걸고, 합려가 가장 총애하는 궁녀 2명을 부대장으로 한 2개의 부대에게 명령을 내렸으나 궁녀들은 처음 이 명령을 따르지 않고 웃기만 했다고 한다.
이에 손무는 이를 명령이 철처하지 못하고 신호를 똑바로 하지 못한 장수인 자신에게 책임이 있다고 하며 다시금 명령체계와 신호를 확실히 한 뒤 또 한 번 명령을 내린다. 하지만 다시금 궁녀들은 명령에 따르지 않았고 이에 손무는
장수의 명령과 신호가 올바랐음에도 명령이 실행되지 않은 것은 부대장의 죄이다
라며 부대장 둘을 처형을 명령. 이를 본 합려가 손무를 만류하자
장수가 군대를 이끌 때에는 아무리 군주의 명령이라 할지라도 받아들일 수 없는게 있는 법입니다.
라며 뿌리치고 궁녀 둘을 처형. 직후 다시 명령을 내리자 궁녀들은 손무의 명령에 한치에 오차도 없이 따랐다고 한다. 하지만 이를 본 합려는 손무의 능력보다는 총애하는 궁녀 둘을 잃었다는 사실에 슬퍼하는데, 손무는
왕께서는 병서의 글자만 좋아할 뿐, 병서의 내용을 활용하시지 못하십니다.
라며 합려를 비난, 합려는 손무의 뛰어남을 알고 손무를 등용하였다고 한다.
하지만 이 일화 후 손무의 행적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극히 적은데, 사기에서는 오나라가 당대의 최강국 초나라를 쳐부수고 제후들을 아우르는데 있어서 손무의 공이 컸다고만 표현할 뿐 그 뒤 손무가 어찌 되었는지는 언급하고 있지 않다.
때문에 손무의 말년에 대해서는 설이 분분해 이에 대해서 손무의 이름이 초나라 전투 이후에 언급되지 않는 것을 근거로, 오왕 합려의 동생 부개가 오왕을 자처하여 오나라 내에서 내분이 일어났을 때 오군이 초에서 철수하던 도중 초군의 정규군의 반격을 받는 과정에서 손무가 전사, 혹은 내분 과정에서 전사하거나 은거했을 것이라 추정된다.
또 한편으로는 오왕 합려의 뒤를 이은 부차가 월을 이기고 자만에 빠져 향락을 일삼자,[2] 이에 실망한 손무는 오를 떠나 은거하였으리라 추정하는 사람도 있다. 상당히 많은 중국 드라마에서 바로 이 학설을 따르고 있다. 대표적인 예가 케이블 채널 CHING에서 방송하는 손자병법(원래 명칭은 병성(兵聖)). 고우영 열국지에서는 초나라 전투 직후 손무가 전란으로 가득한 세상에 회의를 느끼고 은거한 것으로 설정하였다.
이와 같이 손무의 행적에 밝혀진 부분이 너무나 적어 과거 손무와 손빈, 그리고 두 개의 손자병법의 존재가 명확해지기 전에는 일부에게 실존하지 않는 환상의 인물이라 평가받은 적이 있었으나, 손빈병법이 확인됨으로써 현재 이 논란은 종식되었다.
3. 업적과 평가[편집]
춘추시대의 최강자
손무는 춘추시대의 전쟁의 패러다임을 바꾸었다고 평가되는 인물로 전차가 위주였던 당시의 전투체계가 보병 위주로 전환되던 시대상황을 가속화한데 큰 역할을 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는 중원에 전차를 운행하기 편리한 평원이 많았던 반면, 오나라는 습지가 많아 전차를 운용하기에 좋은 지형이 아니었고 문화권이 중원과 달랐다는 것에 영향을 받은 것이기도 하였다.[3]지형에 알맞은 전술을 사용함에 따라 오나라의 정복을 가속화 시킨 명장이라 해도 과언은 아닐듯하다.
손무는 춘추시대의 전쟁의 패러다임을 바꾸었다고 평가되는 인물로 전차가 위주였던 당시의 전투체계가 보병 위주로 전환되던 시대상황을 가속화한데 큰 역할을 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는 중원에 전차를 운행하기 편리한 평원이 많았던 반면, 오나라는 습지가 많아 전차를 운용하기에 좋은 지형이 아니었고 문화권이 중원과 달랐다는 것에 영향을 받은 것이기도 하였다.[3]지형에 알맞은 전술을 사용함에 따라 오나라의 정복을 가속화 시킨 명장이라 해도 과언은 아닐듯하다.
특히 비록 보병의 역할이 점점 강화되고 있었으나, 그럼에도 보병이 전력의 보조역할에 머물렀던 중원과는 달리 보병이 독립부대로써 주력이 된 오나라는 전차로는 넘을 수 없던 산악과 숲 등을 통과하는 등 폭넓은 진군이 가능해졌고 전차에 비해 군의 은폐성도 상대적으로 높아졌다. 이로써 효율적인 양동작전과 분진합격, 기습, 매복이 가능해졌고 장거리 원정 및 빠른 기동전이 가능해지게 되어 전쟁의 패러다임을 한 차례 바꾸어낸 것이다.
또한 손무가 저술한 손자병법은 서양 군사학에서는 근대에 들어서야 등장한 대전략의 개념을 일부나마 나타내고 있을 뿐만 아니라, 단순한 용병술을 넘어 전쟁술 그 자체를 논함에 따라 2천년 이상의 시대 속에서 동양의 병법사상에 막대한 영향을 끼쳤을 뿐더러 현재에 이르러서도 사상적 가치가 퇴색하지 않는 동양군사학 최고의 고전으로 평가받고 있다.
한편, 시대 흐름의 변화에 따라 춘추시대와 달리 공성전의 중요성이 높아지고 기병의 주목성이 높아짐에 따라 손무의 후손인 손빈은 기존의 손자병법에서 공성전이나 기병의 운용 등을 첨가, 또한 구체적인 진법에 대해 언급함으로써 손자병법을 한차례 발전시켰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1] 80년대 정비석의 소설 손자병법이나 새소년에 연재한 이두호의 만화 손자병법에서는 서로의 존재를 알고 평생을 만나고 싶어하는 사이로 그리고 있다.막상 손자병법의 진가를 공자가 알았을때는 공자는 이미 사망크리
[2] 이두호의 만화에서는 합려가 향락을 일삼는 것으로 그린다
[3] 물론 오나라에서 전차가 운용되지 않은 것은 아니다. 기원전 584년, 신공무신의 아들 호용이 오나라에 전차 운용술을 전수했고 오나라는 오나라 특유의 지형에서의 전차 운용법에 대한 연구 등을 거쳐 전차를 운용한 것으로 추정된다. 춘추좌씨전에 오자서가 오나라 군대를 이끌고 초나라를 침공했을 때, 초나라 중신 중 하나가 자신들의 전차는 오나라에 비해 약하니 속전속결로 가야 한다는 주장을 하는 대목이 나오기도 한다.
손자병법
知可以與戰 不可以與戰者勝
지가이여전 불가이여전자승 (싸울지 말지의 여부를 아는 자가 승리한다). - 손자
병법의 대명사.
孫子兵法, 영문 제목은 Sun-Tzu"s Art of war.[1]
목차
1. 개요
2. 내용
3. 근·현대의 손자병법
4. 삼십육계의 오해
5. 대중문화 속의 손자병법
6. 관련 문서
1. 개요[편집]
고대 중국의 병법서. 지피지기면 백전불태[2]나 풍림화산 등이 이 책에서 유래한 용어다.
춘추시대 오왕 합려를 섬기던 손무(孫武)의 저작으로 여겨진다. 손무의 손자로서 전국시대 제(齊)나라의 전략가 손빈(孫?)이 저자라거나 손무의 미완성 저작이 손빈대에 이르러 완성되었다는 설도 있었지만[3], 1972년 4월 중국의 산동성 임기현 남쪽에 위치한 은작산의 한나라 무덤에서 두 병법서가 89쪽의 죽간 형태로 발견되어 《손자병법》과 《손빈병법》이 별개의 책이라는 것이 밝혀졌다. 이후의 연구 연구결과 손무의 기록이 《손자병법》의 원본이며 손빈의 것은 제나라의 《손빈병법》이라는 것이 현재까지 주류 학계의 판단이다. 손무와 손빈 두 사람이 역사적으로 실재했으며 각각 병법을 남겼다는 사마천의 기록이 근거가 있었다는 사실이 확실해진 것이다.
사실 과거에도 일반적으로 손무가 쓴 손자병법과 손빈이 쓴 병서가 따로 있다고 알려져있긴 했으나 그동안 남아서 전승된 것은 "손자병법"이라는 이름으로 내려온 13편 밖에 없었기 때문에 이것이 도저히 손무가 쓴 것인지 손빈이 쓴 것인지 구별할 수가 없었다. 이와중에 심지어 모 학설에서는 손무가 실존하지 않는 인물었다고 주장하기에 이르렀다. 후대의 명성에 비해 당시에는 별로 안 유명했다던가 하는 것이 그 근거. 또한 사마천의 사기 등 각종 기록에서 손무의 행적에 대한 기록이 불충분하다.
여담으로 이때 중국의 양대 고고학계의 거장들이 이 손빈병법이 실재하는지 아닌지에 대해 평생에 걸쳐 자존심을 건 승부를 했는데, 결국 실재하는 것으로 밝혀져 패자는 그날로 목을 매었다는 카더라 통신이 있다.
손빈의 기록이 발견되기 전까지는 손무의 것을 조조가 주해한 《위무주손자》(魏武註孫子) 13편이 전해 내려오고 있었다. 지금 민간에서 읽을 수 있는 손자병법의 이름을 단 책들은 모두 다 위무주손자.[4] 흔히 13편이 전부라고 알기 쉬우나 그것은 총론편이고, 각론편이라 할 수 있는 다양한 상황에서의 용병술까지 포함한 82편이 과거에 있었다.[5] 1996년 중국 시안에서 발굴되어 실제 손자병법의 내용이 알려진 것보다 더 방대하다는 것이 알려졌다.?출처 그런데 진위여부를 조사를 해보니 위작으로 드러났다.?출처1, ?출처2
동북 아시아권에서 가장 중시하는 병법서인 무경칠서에서도 맨 앞에 놓인다.[6] 심지어 손자를 잘 이해하기만 하면 다른 병서는 읽을 필요가 없다는 말까지 있었다.
서점에 가면 다른 중국 고전은 없어도 《손자병법》만은 손쉽게 찾을 수 있을 정도.[7] 실제로 지금 현대전에 가서도 그의 이론은 거의 맞아 떨어지며 병법의 성서로 취급되고 있다. 손자병법에서 강조하는 것은 전쟁의 세부적인 방법이 아니라 전쟁과 관련된 외교, 정치, 심리, 천문, 지리 등 대전략의 수준인데, 이 중 외교, 정치, 심리의 경우 인간에 대한 깊은 통찰을 통해 나온 것들이다. 전쟁의 본질이란 단순한 싸움박질이 아닌 복합적인 인간의 활동이라는 것을 꿰뚫어 본 것. 때문에 말이 병법이지 철학 고전의 일종으로써 민간인들 사이에서도 기초교양 삼아 널리 읽힌다.
2. 내용[편집]
순서는 1. 시계 2. 작전 3. 모공 4. 군형 5. 병세 6. 허실 7. 군쟁 8. 구변 9. 행군 10. 지형 11. 구지 12. 화공 13. 용간 으로 구성되어 있다.
손자가 생각하는 최상의 승리란 싸우지 않고 싸우는 것, 미리 이기고 싸우는 것이다. 미리 전략적으로 유리한 상황을 만들어서 승리가 확정된 상황을 만들고 싸우는 것. 손자병법에서는 의외로 전쟁을 추천하지 않는다. 전쟁 이전에 전쟁을 일으킬 상황을 만들지 않고[8], 전쟁을 결심했다면 전쟁의 명확한 목표와 그로 인한 이득이 있어야 하며, 상대방의 전력과 나의 전력을 파악해 승기가 있는지를 먼저 보고, 직접 군사력을 전개하기 전에 계략으로 싸우지 않거나 상대방을 무력화 시켜야 하며, 어쩔 수 없이 싸우게 된다면 최대한 빠르고 피해 없는 승리를 거두는 것이 손자병법이 설파하는 핵심내용이다.[9]또한 손자병법에선 군비로 국가 경제가 피폐해지는 것을 경계하고 있다. 전쟁에서 이긴다고 해도 국가는 막대한 지출에 의해 상당한 부담을 지게 되며, 전쟁에서 승리해도 얻은 것이 없다면 오히려 승리의 가치가 없다고 말한다. 이는 총력전의 원시적인 개념이라고 할 수 있다. 이와 거의 동일한 개념에 대해서는 피로스의 승리를 참고해볼 것.
창작물이나 세간의 인식에 따르면 명장은 불리한 상황을 기발한 전술로 뒤집는 사람이지만 손자에 따르면 진짜 명장이란 아예 불리한 상황에 빠지지 않는 사람이다. 손자는 1편 "시계"에서 아예 5가지만 따져보면 전쟁을 하기도 전에 승패를 알 수 있다고 하였다. 손자는 전쟁 전에 이미 충분히 수를 계산하여 충분히 이길 수 있는 전쟁만 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지휘관의 능력이라고 지적한다. 그러므로 범인들은 훌륭한 승리를 치열한 접전 끝에 멋지게 승리를 거두는 일이라고 생각하지만 진정으로 승리한 것은 겉보기에는 별다른 지혜나 용기가 없어보인다고 하였다.[10]
3. 근·현대의 손자병법[편집]
위무제 조조는 손자병법에 주석을 달 정도로 손자병법을 즐겨 읽었다.
일본 전국시대의 다이묘(大名) 다케다 신겐(武田信玄)은 손자병법을 즐겨 읽어 풍림화산 전술을 전투에서 적극적으로 응용했다.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도 읽었다는 말이 있고[11](?참고 사이트) 독일 황제 빌헬름 2세가 쫄딱 망한 뒤에 손자병법을 읽고 이 책을 빨리 읽었더라면 전쟁에서 지지는 않았을 거라고 한탄했다는 얘기도 있다. 에르빈 롬멜과 조지 S. 패튼도 손자병법을 봤다.
베트남 전쟁 이후 미군에서 전쟁의 상황을 평가할 때 손자병법을 기준으로 하니 딱 망할 전쟁이었다는 걸 안 뒤 손자병법에 대한 연구가 활발해졌다고 한다.
신기하게도 손자병법은 병서로만이 아니라 일반 사회 생활을 하는데도 유용한 비법서가 되기도 한다. 물론 일반 사회에서 치고 박고 싸운다는 건 절대 아니고(...) 손자병법의 내용이 사회생활이나 인간관계 등등 사회적인 것에 도움이 되는 신기함이 있다는 것이다.[12] 그야말로 만류귀종.
김병관 장군은 그가 7기동군단장 시절에 30년 넘는 군복무 기간 동안을 집대성해서 이를 손자병법에 접목시켜 현대전에서 유용하게 활용할 수 있는 손자병법 책자를 발간했다. 이 책자는 당시는 물론이고 지금도 7기동군단에서 장교로 복무하면 손에 넣을 수 있는 책자다.
4. 삼십육계의 오해[편집]
손자병법과 관련한 오해 중 하나가 바로 병법 36계가 여기서 유래했다는 오해인데, 병법 36계는 손자병법에 전혀 나오지 않는다. 믿기지 않는다면 손자병법을 한번 꼼꼼히 살펴보면 알 수 있을 것이다. 36계의 유래에는 많은 설이 있고, "36계 줄행랑(주위상)"은 남북조시대 송의 장군 단도제의 말을 인용한 제나라 장군 왕경칙의 고사에서 "삼십육계 주위상책(三十六計走爲上策, 줄행랑이 킹왕짱)"[13]이란 말이 나오기는 했지만, 단도제가 36계의 창안자인지도 불분명하다. 아무튼 36계의 출전에는 많은 설이 있지만, 손자병법에 나오는 이야기는 아니다.
5. 대중문화 속의 손자병법[편집]
코에이의 삼국지 시리즈에서는 몇몇 시리즈를 제외하면 처음부터 손견이 가지고 있는 경우가 많다. 손견이 사망한 이후의 시나리오에서는 손책, 손책이 사망한 이후의 시나리오에서는 손권, 손권이 사망한 이후의 시나리오에서는 손량을 포함한 손권의 자손이 가지고 있다. 이것은 아마 손견이 손무의 후손이라는 가정하에 그랬던 것으로 보이는데[14] 확실한 증거가 없으므로 어쩌면 주석을 달았던 조조에게 주는게 나았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조조는 이미 의천검 + 조황비전 + 옥새[15] 삼신기에다 절영, 상황에 따라서 하후은에게서 몰수한 청강검, 맹덕신서 등까지 가지고 있는 보물 부자(?)여서 밸런스를 맞추기 위해 그랬을 수도 있다.
천하제일상 거상에서는 초기에는 최대 3마리까지 데리고 다니는 장수칸을 더 늘릴 수 있는 캐시 아이템으로 팔고 있다. 손자병법 하나의 가격은 무려 24000원(...). 손자병법 하나당 장수칸이 1개씩 늘어나고, 최대 4개까지 소모해서 장수를 7마리까지 데리고 다닐 수 있다. 여담으로 과거에는 장수칸이 늘어나는 것 이외에 메리트가 전혀 없었으나 패치로 손자병법을 소모하게 되면 주인공 캐릭터의 스탯이 100개씩 올라가게 되었다.[16]
문명 5에서 중국의 국가 특수능력의 이름이 바로 Art of War. 위대한 장군의 출현 확률과 보정치를 높여주는 능력인데, 다들 알다시피 초창기 중국을 개깡패로 만든 주범이었다. 물론 문명 5에서 중국이 개깡패가 된 것은 국가 특수능력인 손자병법과 특수 유닛인 추코누, 그리고 특수 건물인 제지소의 3박자가 아주 적절하게 어우러진 결과였는데, 자세한 것은 해당 항목 참고. 손자와 제갈량과 채륜의 그랜드 크로스!
어떤 바보는 이것을 성경과 매우 적절하게 섞어버렸다.[17] 게다가 손자를 "싸움꾼"으로 알고있고, 또한 손자가 싸움이란 것을 발명했다고 안다.(...) 그럼 노아는 어떻게 되는 거지?
모탈컴뱃 디셉션에서는 어째 무술 유파의 일종으로 등장한다. 카발의 권법이고 Sun Bin이라고 나온다. 고대 대륙의 특공무술?
서구권에서도 꽤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007 어나더데이에서는 Art of War로 나왔고 WOW에서도 징벌 성기사의 특성이 이걸로 나왔다. 그런데 번역은 전쟁의 기술 웨슬리 스나입스가 주연한 첩보액션 영화 중 하나는 아예 제목이 Art of War다. 2000년도작. 배틀쉽에서는 주인공 하퍼가 손자병법의 '빈곳을 노려라'라는걸 엉뚱하게 해석을 해서, 이걸 응용해 아이오와급 전함으로 외계인 모선의 사각을 노려 제대로 탈탈 털었다. 자위대 함장 나가타가 하퍼의 말을 듣고 '그거 아닌데? 원래 뜻은 정 반대야.'라고 하자 하퍼는 벙쪄했다. 꿈보다 해몽이랬더니
일부 매체에서는 묵가병법과 쌍벽으로 설정하기도 하는데 손자병법은 공격 전술, 묵가병법은 방어 전술에 해당된다.
6. 관련 문서[편집]
?스콜라리 - 손자병법 전술을 축구 전술에 적용시켰다.
?지피지기
?TV 손자병법
[1] 그냥 The Art of War라고도 하지만 The Art of War 자체는 전술 또는 병법을 의미하기 때문에 여기에 저자인 손자의 이름을 넣어서 구별한다. 하지만 손자병법이 가장 유명하기 때문에 그냥 관용적으로 The Art of War를 손자병법이라고 하기도 한다. 여기서의 Art는 "예술"이 아니라 "기술"이라는 의미다. 즉 영문 제목은 "전쟁의 기술" 정도. 문명 5의 중국의 특수능력 이름과 용호의 권 시리즈의 영문판 제목을 여기서 따왔다.
[2] 知彼知己, 百戰不殆. 흔히 백전백승으로 잘못 알고있는 단어. 이 때 殆는 "위태롭다"라는 뜻이다. 적을 알고 나를 알면 백번 싸워도 위태롭지 아니하다라는 의미다. 절대 백번싸워도 다 이긴다는 의미가 아니다! 손자병법 자체가 싸워 이기는 것보다는 싸우지 않고 이기는걸 더 중요시하는 방향으로 쓰여져 있다. 지피지기 백전백승 이야기는 훗날 위서로 밝혀진 관자에 나오는 것이며, 실제로 손자병법 모공편에서는 百戰百勝 非善之善也라고 밝혀 놓고 있다. 백전백승이 능사가 아니라는 말이다. 그런데 옛날 사람들 역시 상황에 따라서는 원문과 다르게 "백전백승"으로 쓰는 경우도 있었던 것 같다. 자세한 건 지피지기 참고.
[3] 손무나 손빈이나 존칭으로 부를 때에는 모두 "손자"이다. 그래서 손자라고만 했을 때에는 손빈인지 손무인지 전혀 구별할 수 없다.
[4] 흔히 접할 수 있는 손자병법의 조조주석판으로는 조조병법(유동환 저, 바다출판사, 1999)이 있다. 조조는 주석에 "내가 수많은 병서를 읽어봤는데 《손자병법》만이 가장 심오하다"라고 평했다.
[5] 한서 예문지(漢書藝文志)에서 각론편인 손자병법 82편이 있다고 하였다.
[6] 무경칠서(武經七書)는 손자(孫子), 오자(吳子), 육도(六韜), 삼략(三略), 사마법(司馬法), 위료자(尉?子), 이위공문대(李衛公問對)의 일곱 권을 말하고 흔히 알려진 36계는 들어가지 않는다. 무경칠서란 송나라 때 제정된 무과시험 시험범위 교재들이다.
[7] 삼국지연의의 경우 전집의 형태로 판매하고 있기 때문에 금액이 부담이 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여러 버전이 나와있기도 해서 사실 사서 읽기에는 부담이 너무 크다. 반면 "손자병법"은 단 한권으로 이뤄져 있을 뿐더러 무슨 버전도 없으니 부담없이 읽을 수 있다.
[8] "모든 것이 전쟁만으로 해결되는 것이 아니다." 라는 구절은 전쟁은 국가가 취할 수 있는 방법 중 하나일 뿐이며, 전쟁 이전에 정치, 외교적 방법을 통해 전쟁을 벌이지 않고 원하는 목표를 달성하라는 뜻이기도 하다.
[9] 현대전에 들어가면서 전면전에 드는 예산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고 국가의 역량 대부분이 전쟁에 들어가기 때문에 최대한 외교로 끝내려 하며 전쟁을 하더라도 제한전 상태에서 확실하게 준비하여 끝내려한다. 현대전에도 정확히 들어맞는 내용
[10] 옛날 사람들은 항우같은 사람들을 명장으로 쳐줬는데 이를 비판하는 것이다. 현대에는 '최소한의 피해로 전략적 목표 달성에 집중'이 너무 당연한 상식이 되서 이 부분을 읽으며 '갑자기 이런 말을 왜 하지?' 하며 의아해 하는 사람이 많다.
[11] 정확히는 프랑스 대령이 쓴 L'art militaire dans l'antiquite chinoise에서 나온 말이다. 진위는 알 수 없다.
[12] 특히 상업에 종사하는 기업체 총수들에게는 필독서와 같은 대접을 받고있다. 한국과 같이 수출주도형 경제체계를 갖고있는 상황에서는 전쟁에 관한 단어를 경영과 관련된 단어로 바꾸기만 하면 되기 때문이다.
[13] 왕경칙은 "단공의 36가지 계책 중 도망치는 게 최고의 계책이라고 했다"고 인용하고 있는데, 여기서 말하는 "단공"이 바로 단도제다.
[14] 정사 삼국지에는 아마 손자의 후손일 것이다라고 막연히 썰을 풀어 놓았다. 유비는 중산정왕 유승의 후손이다, 조조는 재상 조참의 후손이다 라고 확실하게 기록한 것과 대조적이다.
[15] 전국옥새는 200년 시나리오 이후
[16] 즉 손병을 1개 먹었다면 힘 스탯 100이 올라가고, 그 상태에서 또 하나를 먹으면 민첩 스탯이 100개가 올라가는 식으로, 4개를 모두 섭취(?)한다면 올스탯 100개가 늘어나는 것이다.
[17] 싸움으로 번 돈으로 동물들을 2쌍씩 산 뒤 배에다 쳐넣고 묵사발을 내벼렸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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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이야말로 진정한 최고수들만이 즐긴다는 진정한 심리전이군요! 대화가 이렇게 박진감과 쫄깃함을 동시에 맛보는것이 가능하다니... 작가님의 필력에 존경심이 드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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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이야말로 진정한 최고수들만이 즐긴다는 진정한 심리전이군요! 대화가 이렇게 박진감과 쫄깃함을 동시에 맛보는것이 가능하다니... 작가님의 필력에 존경심이 드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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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 | 21.04.11 22:17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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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진심으로 쓰고 싶은 부분을 이렇게 좋아해주시는 것만으로도 감사드립니다. | 21.04.11 22:18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