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se 1. 엘프 아가씨
0.
안개가 자옥한 산과 숲이 한폭의 그림처럼 끝없이 펼쳐져있다. 그리고 그 풍경을 바라보며 가파른 산길을
오르는 남자가 긴 한숨을 내쉬고 있었다. 남자의 입에서 아주 잠깐동안 온기를 머금고 뿜어져나온 그것은
하얗게 입 주위에서 퍼져나갔다가, 이내 어디에나 있는 안개의 일부분이 된듯 사라지고 말았다.
[...도저히 이곳만큼은.. 올때마다 해맬수밖에 없구만..]
그냥 털썩 주저앉아 쉴까 하면서 남자는 그렇게 중얼거렸다. 그러자 곧,
[어~이. 지노!]
낮익은 목소리가 들려오는 것이 아닌가.
남자가 헥헥거리면서 목소리가 나는 곳을 보자 그곳에는 상당히 보기드물게 배가 나올정도로 살이 찐 엘프가
손을 흔들며 내려오고 있었다. 뾰족한 귀는 엘프 특유의 모습으로 상식과 동일했지만 남다른 풍채는 보통 연상
되는 엘프의 그것이 아니었다. 이런 인물은 자기가 아는한 한명밖에 없다.
[여전히 건강해보여서 다행이군. 코룬.]
남자는 안도를 느끼며 씨익 웃어보였다.
1.
[하하하하. 여전히 시꺼먼 머리에 죽어가는 얼굴을 하고 있구만.]
[자네야말로 여전히 남다른 풍채를 과시하고 있군.]
[인기의 비결이지.]
[...사실이라면 역시 엘프들은 이해할수 없는 종족이라고 살짝 편견이 들어간 회화를 할수밖에 없구만.]
[하하하. 뭐 그렇지.]
코룬은 언제나 호탕하게 웃는 인상에 엘프지만 비만인 독특한 녀석으로 나와는 오랜 지인이기도 하다. 완전히 세상
밖에 나와 사회화된 엘프가 아니라 자신들의 영역인 [엘프 타운]에서 동족들과 함께 살아가는 엘프들. 그 중에서
나와 인연이 닿는 유일한 인물이기도 하다.
[칼베르트는 잘 지내나?]
[...그 아저씨는 10년전에 하늘나라로 갔다고 했잖아.]
[그랬던가... 좋은 녀석이었는데... 너희들의 시간은 너무 빨라. 잊고 있었네.]
[...]
칼베르트는 내가 오기전까지 [엘프 타운]에 사는 엘프들과 친분이 있던 유일한 인간이었다. 사회화되지 않고 그들만의
영역에서 동족들과 함께 고립된 왕국에서 지내려고 하는 이들에게 있어서 세상 밖과 교류할만한 인물은 적다. 특히
인간 중에서는 칼베르트와 내가 거의 유일하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너무 급한거 아니면 잠깐 앉아도 될까? 지쳤어. 쉬고싶다고...]
[...흠. 여전히 약골이구만.]
팔짱을 끼며 코룬이 뒤돌아보며 그렇게 말했다. 나는 그러거나 말거나 산길 안쪽으로 유독 큰 나무가 있는 곳에 풀썩
주저앉았다.
[뭐. 천천히 가자고. 일단 나는 휴식은 필요해. 무슨일이 있었는가 간단히 이야기도 들을 겸.]
[...]
계속 웃음기가 배여있던 코룬의 얼굴에서 미소가 잠깐 사라졌다. 늘 감고 다니는 것 같아 보이지 않던 그의 푸른눈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나의 옆에 털썩 주저앉았다. 가파른 산길 너머로 처음부터 계속 보였던 안개 자옥한 산과 숲들이 펼쳐져
있었다. 같은 풍경을 잠시동안 서로 보다가, 코룬이 입을 열었다.
2.
엘프 타운에 신분이 고귀한 한 엘프 아가씨가 있었다.
부모를 어릴적에 여윈 그녀에게는 쌍둥이 누나가 있었는데 누나는 자신과 성격이 정반대로 아랫사람들을 심하게 대했고 성질이
불같고 제멋대로였지만 머리가 좋았고 유능했으며 특히, 자신과는 다르게 건강한 신체를 가지고 있었다.
똑같이 생겼지만 상대적으로 낮을 가리고 조용히 혼자 있는 시간이 좋았던 그녀는 누나와는 달리 실수투성이에 뭣보다 병약해서
늘 누워있어야 했다. 여러모로 반대였던터라 자연스레 누나와도 멀어지고 집안의 사람들과도 멀어지게 되었다. 혼자 있는 시간은
그 나름대로 자신의 성격과 맞았지만 원인모를 병은 발전해서, 어느날 문득 한가지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그것은 말을 할 수 없는 것, 벙어리가 되고 말았다는 것이다.
그녀는 갑작스럽게 찾아온 불행에 대해 어찌해야할지를 몰랐고 그러다 우연히 아랫사람들이 눈치채게 되어 그 사실을 누나에게
전하기에 이르렀다.
많은 사람들의 의논과 토론이 어어지고, 다음날부터 온갖 약재와 의사, 마법사들이 찾아와 그녀를 살피고 진찰했다. 목소리가
있을때도 서로 이야기하는 일 없어 늘 멀게 지냈던 누나와의 사이는 서먹서먹하나 미묘한 거리감에서 더욱 벌어졌고 원래부터
누나에 비해 영향력이 없던 자신의 주변에는 진심으로 따르는 사람들도 거의 사라지게 되었다.
일년, 이년, 십년. 이십년...
긴 세월동안 갖은 방법을 다했지만 그녀의 목소리는 돌아오지 않았다. 원래부터 말수가 적었으니 사실 없어지나 마나 생활에는
큰 변함이 없었다. 하지만 슬픈것은 당연해서, 잘 지내다가도 문득 가슴이 답답해져 눈물이 나오거나 자기전 밤하늘을 바라보다
가도 문득 서글퍼져 혼자 울고는 했다.
...엘프의 시간은 상대적으로 느리게 흐른다.
그녀의 모습은 그날 이후로도 그다지 변하지 않았지만 시간은 많이 흘러 모든것을 담담하게 받아들이는 지점까지 오게 되었다.
문득 정신을 차려보면 어릴적처럼 그녀는 혼자 있는일이 많았고 사무적으로 대하는 사람들이 있었을뿐 주위에 그녀와 교감을
가질만한 존재는 아무도 없었다. 효과를 보이지 않자 차츰차츰 주변에 안부를 묻는 지인들과 의사들도 떠났고 그저 방치된 체로
기약없는 매일을 그녀는 홀로 맞이하고, 바라보고 사색하다가, 잠이 들기를 반복했다.
그녀의 방에는 점점 더 많은 책과 인형들이 가득차게 되었다.
꽃이 피고, 지고, 계절이 바뀌고 다시 꽃이 피고... 그런 하루하루를 보내다가 지금으로부터 약 3개월 전.
그녀에게 한 이변이 일어나게 된다.
계절은 아직 겨울. 아직 숲은 녹지 않은 눈으로 새하얗게 물들여져 있었다. 자신의 방 안에 틀어박혀 사람을 피하며 홀로 시간을
보내던 그녀에게는 때때로 답답한 마음을 떨쳐내고 신선한 공기를 마시기위해 방에서 나오게 하는 곳이 하나 있었는데 그곳
은 자신의 방에서 가까운 작은 정원이었다.
자신의 방에서 이어져 있으면서 외곽쪽이고 크기가 작아서 아무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 그곳은 때문에 찾는 사람도 거의
없다시피 해서 어렸을적부터 그녀가 자주 찾는 유일한 외부공간이기도 했다. 그 날도, 그녀는 답답한 마음을 찬 공기 속에
토해내기 위해 정원으로 나섰다.
정원도 나무는 앙상하게 말라있었고 바닥은 하얗게 눈이 덮혀있었지만 곳곳에는 미끄럽게 얼어붙은 곳도 있었다.
배려를 한것인지 관심이 없는건지 정원사도 자주 찾아오지 않았기 때문에 조금 초라한 느낌이 들기도 했지만 그것이 오히려
그녀에게는 익숙하고, 또 묘한 안도감을 주기도 했다.
너무 무리하지 않으며 조심조심 걷는데, 평소에는 없던 광경이 보였다. 굉장히 눈부신 꽃이 하나 펴있었던 것이다.
지금까지 한번도 본적이 없는 작은 꽃이었다. 아무것도 없이 새하얀 눈덮힌 땅에 오직 한그루 황금빛으로 빛나는 작은 꽃이
\활짝 펴있는 것이 아닌가.
그녀는 호기심에 앞에 앉아 꽃을 한참동안 바라보았다.
꽃은 숨을 쉬는것처럼 바람에 살랑이듯 작게 움직이고 있었다. 너무나도 이질적인 모습에 감탄해서, 그녀는 무심코 그것에
손을 뻗었다. 꺾으려고 한것은 아니고, 그냥 그 아름다운 꽃과 비현실적인 모습에 이끌리듯.
그녀의 가느다른 손이 황금빛 꽃에 닿았다.
순간. 온 세상이 황금빛으로 물들여지는 것 같더니,
이내 사라졌다. 너무나도 기묘한 감각에 한동안 멍해있다가, 정신을 차려보니 자신이 보았던 빛나는 꽃은 아무데도 없었다.
...?
그녀는 어리둥절한체로 여기저기를 두리번거리다가, 이내 추위가 심해지는 것을 느끼고는 서둘러 집으로 돌아왔다.
그렇게 다시 이상한 꿈을 꾸고 만것처럼 넘어가고 언제나처럼의 일상이 시작되리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그 후로부터 그녀의 삶은 크게 바뀌게 되었다.
3.
[...그래서, 어떻게 된거지?]
담배를 꺼내물려고 하다가, 이곳이 그런것들을 허용하지 않은 곳임을 떠올리고 다시 집어넣으며 내가 물었다.
코룬은 말을 이었다.
[어쩐일인지 아가씨는 말을 할수있게 되었어. 목소리가 돌아온 거지.]
[그 빛나는 꽃을 본 후에?]
[본 후에.]
[...뭔지 몰라도 잘됐잖아. 이 세상은 마법도 존재하는 세상이니까. 그정도 기적. 있어도 좋잖아.]
[그렇지.]
[...뭔가 다른 이상한 증상은?]
[없었어. 목소리만 돌아왔을뿐. 건강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지. 다만...]
[다만?]
[다만 이상한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어.]
[이상한 이야기?]
[뭔가가 자꾸 말을 건다고 하더군. 예언을 하거나, 신에 대해 말하거나, 역사들을 말하거나.]
[...호오?]
[근데 그게 전혀 알수없는 허무맹랑한 소리라. 하여간 직접 만나뵈면 알거야.]
[...내가 뭔가 해결할 수 있는 일인가?]
[마법사, 의사, 하다못해 점술가, 식물, 약재에 대해 빠삭한 현자들도 불러보았지만 물음표 뿐이었어. 신화도
줄줄히 말하는데 그런 신이나 역사같은건 아무리 오래된 기록서에도, 이쪽에서는 전문가 수준인 노인들조차
도 고개를 갸우뚱거릴뿐이었지. 그녀는 명백히 존재하지 않는 것들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었어.]
[...그냥 너무 오랜만에 목소리가 돌아와서 신나서 아무런 말이나 다 하는게 아닐까?]
[모르지. 그걸 확인해보라고 자넬 부른거야]
[허무맹랑한 이야기하는거 정도야 아무래도 좋잖아. 목소리가 돌아온것만으로 감사하면 될텐데.]
[...엘프들에게도 신양과 전통성을 강조하는 파벌은 있어. 인간만큼은 아니지만 불쾌할만한 이들이 많지. 그녀
의 신분은 아무런 말이나 해도 되는 입장이 아니야. 나이와 상관없이 영향력을 갖고 있지. 이런 일들은 밖으로
퍼져나가는게 좋지 않아. 아가씨를 위해서도, 그들을 위해서도.]
[...요컨대 꽁꽁 숨겨놓고 해결될 날을 기다리고 있었다는 건가.]
[그렇지.]
어느순간 코룬은 언제나처럼 미소짓고 있었다.
그렇게나 높은 신분의 아가씨인가?
잘은 모르지만 엘프들은 엘프들 나름대로 뭔가 복잡해질 여지가 있는 모양이다.
어찌되었든 밥벌이이기도 하고. 보러는 가볼까.
[오케이. 대충 알았고 체력도 충전되었어. 출발하자고.]
[고맙군.]
우리들은 먼지를 털며 일어나 다시 걸었다.
코룬이 마중나온 덕분에 지름길도 있어 훨씬 빠르게 목적지에 도착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