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속과 금속이 부딪히는 소리, 그리고 금속이 찢어지는 듯한 소리가 터져 나오며 푸른 로봇의 주먹이 그것 중 하나의 몸통을 관통했다.
“장난 아니네. 금속이라는 게, 저렇게 쉽게 뚫리는 물건이었나?”
마치 그것들을 종잇장 찢든 박살 내는 푸른 로봇을 본 그는, 그저 속으로 감탄을 토해냈다. 커다랗게 뻥 뚫린 가슴을 내놓은 채 그것들은 하나, 둘 빠르게 쓰러져갔다. 그들을 둘러쌓던 그것들의 시선은 푸른 로봇에게 집중되었다.
‘이상하네. 나는 그렇다고 쳐도, 로제를 노리는 놈들이 없어.’
그는 생각했다. 그것들의 행동을 유심히 관찰했다. 그것들이 생명체의 범주를 벗어난 존재라는 것은 확실하게 인지했다. 단체로 행동하고, 무기를 이용해 공격한다. 인간과 같지만, 무언가 부족함을 깨달았다. 그것들의 시선이 이따금씩 자신을 향하는 것은 눈치챘지만, 자신이나 로젤리아를 우선으로 삼지 않는 것에 이상함을 느꼈다.
‘... 솔직히 말해서 나나 로제를 먼저 잡아 인질로 삼으면, 손님도 어쩔 수 없을 텐데 말이야…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는 다른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는 건가?’
그것들은 푸른 로봇을 우선시했다. 약자를 먼저 집어삼키는 것이 아닌, 강자를 우선 목표로 삼아, 협공했다. 한동안은 골똘히 생각하는 그였지만, 결국 그의 결론은 어찌 돼 든 상관없다였다. 그것들이 로젤리아를 먼저 노리지 않는다면, 일의 처리가 훨씬 수월할 것이라 그는 생각했다.
푸른 로봇이 앞장서 그것들의 수를 줄이는 사이, 몇몇의 다른 그것들은 푸른 로봇의 후방에 보이는 존재들을 향해 달렸다. 그 상황을 지켜보던 제이가 그것들의 앞을 가로막았고, 자신을 향해 날아오는 전기 몽둥이에 제이는 그저 몇 걸음 뒤로 가볍게 뛰었다.
“어이쿠야, 저거 맞으면 골로 가겠지?”
무기를 든 상대를 상대하는 법은 제이가 오르베도에게 가장 처음 배운 것이기도 했다. 제이는 자세를 다잡았다. 날붙이나 둔기와는 달랐다. 그저, 가볍게 스치는 정도로도 자신이 위험해질 것이라는 걸, 그는 자각했다.
“좋아, 그럼. 조금 다르게 나가볼까.”
제이는 그저 자세를 잡은 그대로, 자리를 지켰다. 그것들의 눈이 돌아가며 그를 관찰했다. 위협적인 행동이 아님으로 결과를 도출해냈고, 또 한 번 그를 향해 달려들었다. 그것 중 하나의 팔이 위에서 아래로 내리쳤다.
그때였다. 제이는 가볍게 오른쪽으로 한 바퀴 돌았다. 그리고 회전력을 실어, 주먹을 내리꽂았다. 그를 공격하며 상체를 숙였던 그것의 얼굴에 정확하게 주먹이 날아갔고, 그것의 머리통은 빠르게 바닥에 처박혔다.
“후우. 난 눈이 빨라서 좋아. 아니었으면, 벌써 통구이가 됐겠지? 응?”
방금 바닥에 내리꽂혔던 그것이 움찔거리자, 제이는 빠르게 몇 번 더 주먹을 내리꽂았다. 세, 네 번의 주먹질이 끝나자, 그것의 깜빡거리던 붉은 눈이 빛을 잃어갔다. 제이는 그제야 약간의 심호흡을 취했다.
“... 뭐야? 너희는 안 들어오냐? 눈알 굴러가는 소리가 여기까지 들리는데?”
제이는 마치 자신을 관찰하듯 바라보고 있는 다른 그것들을 향해 도발했다. 자신에게 시선을 집중시키는 게 목적이었지만, 마치 자신을 실험실 쥐처럼 훑어보는 시선이 맘에 들지 않는 것도 있었다. 그의 도발이 먹힌 것인지, 다른 두 기의 그것이 한꺼번에 그를 향해 달려들었다.
제이는 자신을 향해 뛰어오르는 그것들의 팔을 피해 또 한 번 뒤로 물러났다. 그것들의 팔은 바닥을 내리쳤고, 제이는 그새를 노려 땅을 박차고 그것들에게 뛰어들었다.
금속이 찢어지는 소리가 또 한 번 울려 퍼진다. 그 소리에 맞춰, 로젤리아는 온몸을 움찔거린다. 조금 전까지의 두려움은 공포가 되었고, 이따금씩 제이와 싸우는 그것들의 붉은 눈이 자신을 향하는 것을 알아차리고는 다리에 힘이 풀렸다. 그런 그녀는 땅바닥에 스르륵 주저앉았다.
“... 어째서, 어쩌다 이런 일이 일어난 거지. 난 그저 모두에게 인정받고 싶었을 뿐이었는데… 왜 맨날 실패만 하는 거지…?”
그녀는 자신의 운명을 책망하듯 불평을 쏟아내었다. 그런 그녀의 옆에 서 있던 네모난 로봇은 그런 그녀의 모습을 내려다보고는 말을 걸어왔다.
“... 부정적인 감정 감지. 추측 중. 원망. 부정. 다른 이를 향한 불만이 아님. 걱정. 부정. 걱정이라는 하나의 감정으로 판단 불가. 실망. 불평. 두려움. 공포. 복합적.”
로젤리아는 찔끔 나오는 눈물을 멈추고는 네모난 로봇을 올려다보았다. 그것들과는 다른 노란색의 눈이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음을 알아차렸다. 자신에 대한 걱정 같기도 한 그 로봇의 발언은 그저 무너져가는 그녀의 마음속 관심을 얻기에는 충분했다.
“본 기체. 도시 주민의 삶의 질 향상 또한 담당. 도시의 방문자는 4등급 주민으로 분류. 일행의 대표. 슬퍼 마라. 삶은 무너져 가는 것보다. 만들어 가는 것이 더 많다.”
“... 그게 무슨…”
“도시의 대표 표어. 탑을 선물한 존재가 말함. 본 기체는 뜻을 알지 못함. 하지만 정해진 안내서에 맞춘 조언은 가능.”
“... 하하… 저는 무얼 기대한 걸까요… 결국, 주위에서 아부하는 사람들과 다른 게 없는 걸까요. 제가 만들어낸 건, 그저 파도에 휩쓸려가는 모래성 인걸요.”
그녀는 조금 쓸쓸한 표정을 지었다. 그녀의 직책이, 자리가, 이름에 주어지는 기대감과 무게감이 그녀의 어깨를 짓눌렀다. 한쪽 팔을 잃은 어떤 남자와 다리가 불편한 어떤 여자의 삶을 부러워하는 부잣집 아가씨의 마음속 고독을 이해해 주는 건, 그녀 스스로뿐이었다.
“긍정. 모래로 지은 구조물. 실용성. 부족. 견고함. 부족. 추천하지 않음.”
“... 그런 의미로 말한 건 아닌데 말이죠. 그들이 원한 건, 거친 파도에도 무너지지 않는 그런 거지만, 제 능력으로는 모래성이 한계랍니다. 파도가 오면 사라지고, 발로 차면 무너지는 그런 결과물뿐인걸요. 아무리 높게 쌓으려고 해도, 그건 그저 모래성인걸요.”
그녀가 지하도시의 발견에 열광하는 이유도, 이를 통해 얻을 명성에 집착하는 것도, 네모난 로봇은 이해하지 못했다.
“... 그저, 그저 그들의 눈에는 초라하고 덧없는 걸요.”
그녀의 한탄. 네모난 로봇은 다음으로 나아갔다. 그녀의 부정에도 말을 멈추지 않았다. 그녀에게 이제 로봇의 말은 그리 중요하지 않았다. 이미 바닥을 향한 그녀의 시선은 그저 바닥만을 향했다.
“긍정. 외부적인 요인으로 인한 구조물의 파괴. 영원한 건 없음. 모든 것은 무너짐. 그리고 사라짐.”
“... 그건, 잘 안답니다. 그저 모래성이라도 튼튼하게 짓고 싶다는 거죠. 다른 이들에게 인정받을 수 있는 그런...”
“부정. 모래성 하나로는 불가능. 긍정. 필요한 것은 구조물을 지키기 위한 구조물. 파도가 성을 무너뜨린다면, 벽을 세움. 누군가가 성을 힘으로 무너뜨린다면, 그를 막을 함정을 팜.”
그녀는 고개를 들었다. 로봇을 또 한 번. 로봇을 올려다봤다. 어쩌면 이라는 생각이 그녀의 머리를 흔들었다. 없어져 가던 희망에 또 한 번 불이 붙었다.
“초라하고 덧없는 것. 계속 쌓아가면 큰 성이 완성됨. 벽돌을 쌓음. 모래성을 두름. 벽을 세움. 그러면 파도를 막고 침략자들에게서 버텨낼 성이 완성됨. 그 누구도 함부로 대할 수 없으며 그 무엇도 쉽사리 부술 수 없음.”
그녀는 침을 꿀꺽 삼켰다. 어릴 적 동화책을 읽던 어린아이와 같은 모습이 되었다. 다음을 기대하면, 이제는 빛나는 눈으로 로봇의 말을 기다렸다.
“완성된 거대한 성은 그 누구도 무시할 수 없음. 많은 이가 성을 보기 위해 들름. 튼튼한 성벽 안에 보호받기 위해 모임. 여행자들은 성의 기이한 모습에 감탄할 것임. 주민들은 성벽의 튼튼함에 노래를 부를 것임.”
“... 이런 저라도 가능할까요…? 벽을 짓는 것을, 함정을 파는 것을...”
“부정. 일행의 대표자. 연약함. 타인을 이끌 매력 없음. 쉽게 무릎을 꿇음. 눈물을 흘림. 대표자의 자질 의심.”
그녀의 기대에 날아오는 것은 냉정한 평가였다. 그녀 또한 알고 있었다. 스스로가 쉽게 포기하고, 또 쉽게 운다는 것을 말이다. 긴장되면 말을 더듬고, 힘든 일은 피하고 싶어 하지만, 인정은 받고 싶었다.
“긍정. 혼자서의 힘일 필요는 없음.”
그녀는 쥐똥 같은 눈물을 머금으며, 정면을 바라봤다. 지금도 자신을 위해 싸우고 있는 한 명의 남자가 보였다. 자신이 로봇과 말을 나누는 사이, 계속해서 싸우는 그를 말이다. 몹시 지쳐 보였다. 땀으로 흠뻑 젖었고, 거친 숨을 내뱉었다.
그런데도 멈추지 않았다. 금속으로 된 오른팔은 거의 망가지기 직전이었고, 피로가 쌓인 탓인지 걸음과 동작이 처음과는 다르게 느려진 것이 한눈에 보였다.
“도움이 필요하다면, 도움을 요청하면 됨. 성벽을 건설하는 동안 파도를 막을 이를 구하면 됨. 성을 부수러 오는 존재를 막을 함정을 구상할 이를 고용하면 됨. 그들과 함께 만들고, 함께 지키면 됨. 자신의 부족함을 채우는 일에 혼자일 필요는 없음.”
제이가 쓰러져 간다. 그 모습을 그녀의 두 눈이 보고 있었다. 푸른 로봇은 미처 그 상황을 알아차리지 못했고, 하늘에 둥둥 떠다니는 구체가 푸른 로봇을 향해 외치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들에게 도움을 주고 도움을 요청하면 그들은 답할 것임. 친구가 되고 동료가 될 것임. 그저 도움만 받아서는 안됨. 오는 것이 있으면 가는 것 또한 있어야 함. 그것이 돈이든 믿음이든 신뢰이든.”
반쯤 부서진 검은 그것 하나가 제이의 위에 올라탔다. 평소 같았으면 그것들을 집어 던지고 일어서려 했겠지만, 이미 그의 몸은 엉망이었다. 폐는 찢어질 듯 고통스러웠고, 뼈마디 모든 곳이 통증을 호소했다. 그는 거의 포기한 듯 그저 조용히 눈을 감았다.
그제야 상황을 알아차린 푸른 로봇이 제이를 향해 뛰어오려 했지만, 수많은 그것이 푸른 로봇의 주위를 가로막았다. 그리고 그것의 전기 몽둥이가 제이에게 부딪혔을 때, 그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그저 자신에게 주어지는 고통에 대해 그저 비명을 지르는 것뿐이었다.
제이의 비명, 푸른 로봇의 몸부림, 구체의 외침이 한대 어우러져 로젤리아의 머릿속을 어지럽게 했다. 그녀는 마치 그 순간, 시간이 멈춘 듯 그 모습들이 천천히 흘러갔다.
‘제이가 아파해. 카일 씨도 제이를 돕지 못해. 이대로 놔두면 제이가 죽는 게 아닐까. 나를 지키다? 저번에도 한 번 그랬는데? 또? 이번에는 진짜 죽을 거 같은데?’
천천히 흘러가는 시간 속에서 그녀가 가쁘게 쉬는 숨소리만이 그녀의 머릿속에 울려 퍼졌다.
‘토토 씨에게 부탁해야 하나? 어떻게 해야 하지? 왜 내가 관여하는 일은 잘되는 게 아무것도 없지?’
제이의 비명이 천천히 끊어지며 그녀의 귀를 지나갔다. 그가 땅바닥에 드러누웠다. 그의 위에는 그것이 있고, 그것의 팔에서 흘러나오는 전기가 그를 괴롭힌다. 그와 조금 떨어진 곳에 그가 들고 온 짐가방이 보였다.
‘... 내가 할 수 있을까? 아냐. 난 그저, 연약하고 나약해 빠진 겁쟁이일 뿐인걸…’
그때였다. 무언가에 홀린 듯, 그녀의 표정이 바뀌었다. 걱정과 두려움은, 하나의 결심으로 바뀌었고, 그 결심은 곧 행동이 되었다. 천천히 흐르던 시간이 제자리를 찾아갔다. 로젤리아는 땅을 박차고 달리기 시작했고, 그녀의 시선은 오직 정면만을 향하였다. 그런 그녀의 뒷모습을 흔들리는 작은 존재가 지켜보았다.
“젠자아아아앙!!”
그것은 한 남자의 울부짖음. 쌓여가는 피로와 싸움으로 무너져버린 신체를 의지가 채찍질했다. 하지만 그를 짓누르는 무게는 변함없이 무거웠다. 그의 오른팔은 이미 고장 나 움직이는 것을 멈췄고, 그의 왼팔은 그 상황을 해결하기에는 너무나도 평범했다.
그것을 향해 날리는 힘 빠진 주먹은 그저 그의 아픔만을 늘려갔다. 그를 내려다보는 그것은 전기 몽둥이로 그의 가슴 한가운데로 갖다 댔고, 순간 연푸른 전기가 그의 온몸에 흘렀다. 처음 겪어보는 고통의 종류 때문일까, 아니면 그저 현 상황을 타개할 방법이 없어서일까. 그의 의사는 꺾였고, 그의 마음은 무너져갔다.
가슴에서 터져 나오는 고통에 지르는 비명과 자신의 마지막 발악이 덧없음을 안 그는 주먹을 땅에 털썩 내렸다. 그리고 포기하려 했다. 귓가에는 그저 심장이 빠르게 뛰는 소리만이 들려왔다. 멀리서 그를 지켜보고 있는 여자와 로봇들에게 둘러싸여 자신에게 접근하는 것조차 힘든 푸른 로봇도, 그리고 그 모든 것을 화면에 담고 있는 구체가 외치는 소리도 지금의 그는 그저 무시했다.
지금 자신이 처한 상황이 꿈이기를 빌었다. 자신을 괴롭히는 고통도, 그녀가 두려워하는 표정도 그저 눈을 뜨면 자신의 방 침대에서 보이는 나무 천장이 있기를. 어쩌면, 정말 이 모든 게 꿈인 것은 아닐까 그는 속으로 희망했다.
다른 세계에서 온 방문자도, 도시 지하의 도시도, 처음 보는 괴물들도, 실존할 리가 없다. 그런 건 다 오래된 전설이고, 도시에 퍼진 헛소문이고, 어린아이들의 상상일 뿐이다. 분명, 그럴 것이다. 아니 그래야만 한다.
자신의 누나가 자신의 옆구리를 꼬집고, 덤벙대는 친구가 또 한 번 가출하고, 자신은 거리를 거닐며 잡일을 처리하고, 집으로 돌아와 따뜻한 차를 마신다. 그것이 자신의 일상이고, 반복되어야 하는 평범이라고 생각했다.
‘그래, 이건 다 꿈이야. 눈을 감자. 그러면 이 악몽도 모두 끝나 있겠지?’
어둠이 흐른다. 그는 정적 속에서 가볍게 숨을 몇 번 쉬었다. 누군가 그의 이름을 여러 번 불렀다. 분명, 늦잠 자는 자신을 깨우는 목소리일 것이다.
‘다급하게 부르는 것을 보니, 오늘은 제대로 늦은 거 같네. 이제 눈을 뜨자. 그래, 분명 햇살이 나를 반겨주겠지. 그리고 항상 걷던 그 거리를 걷는 거야. 시시한 일거리와 도시 곳곳에 숨겨진 잡동사니를 찾으러 말이야.’
그는 생각했다. 그 거리의 냄새를, 모습을 말이다. 아이들은 자신의 뒤를 따라다니며 모험담을 묻고, 상점가의 어른들은 웃으며 과일 하나를 던져준다. 그리고 조금 멀리서 들려오는 목소리. 또 한 번 자신을 다급하게 부르는 목소리. 그립다고 표현하기는 그렇지만, 만남이 기대되는 그런 목소리.
‘또각거리는 구두 소리. 바보, 그렇게 뛰어오면 넘어질 텐데.’
“꺄악!!”
짧고 짧은 외마디의 비명이 텅 빈 지하 공간에 울려 퍼졌다. 바닥에 등 맞대고 쓰러져있던 남자 또한 그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조금 전까지 또각거리던 구두음은 사라지고, 무언가가 크게 부딪히는 소리가 이어졌다.
“쿠헠-.”
순간, 그를 짓누르던 무게가 사라졌다. 하지만 곧이어 또 다른 무게가 그에 가슴을 압박했다. 자신의 배에 들어오는 무게변화에 그는 가슴속 공기를 토해냈다. 그는 눈을 살며시 떴다. 무언가의 영향으로 상황이 변했다. 그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가 눈을 떠 처음 본 것은, 그가 염원하던 나무 천장도, 푹신한 침대의 감촉도 아니었다. 저 멀리 그저 빛나고 있는 지하도시의 천장과 그의 가슴에 얼굴을 박고 있는 익숙한 여자 하나만이 있었다.
그를 짓누르는 감촉이, 단단함에서 부드러움으로 바뀐 것만으로도 그의 상태는 훨씬 나아졌다. 그는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 그리고 올라온 가슴에서 그 숨을 내뱉으며, 자신의 가슴에 얼굴을 파묻고 있는 존재에게 조용히 말했다.
“야, 아파. 이러다가 너 때문에 먼저 죽겠다.”
그의 불평에도 그녀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다행히 조금 전까지 그의 위에 있던 그것은 조금 멀리 굴러가 작동을 멈춘 것처럼 보였다. 그녀의 한 방이 강하게 먹힌 듯 보였다. 그 난장판 속에서 이제 그의 상대는 그것들이 아닌, 로젤리아 하나였다.
다른 그것들은 제이와 로젤리아의 제압을 불필요한 수준까지 인식했는지, 그저 푸른 로봇을 향해 달려들고 있었다. 제이 또한 자신의 상태가 엉망이라는 것을 자각하고 있었다. 지금이라면, 자신 위의 아가씨에게도 가볍게 질 것이라고 확신했다.
“... 우리 아가씨가 날 구해줬네. 정말 위험했는데 말이야. 아이고, 고마워라-.”
그는 가볍게 농담을 던졌다. 그제야 훌쩍거리는 소리와 함께, 로젤리아의 얼굴이 그의 가슴에서 떨어졌다. 울먹이는 목소리가, 그의 위에서 터져 나왔다.
“... 제이, 괜찮아? 그때처럼 아파했는걸. 소리쳤는걸. 이제 그런 건 싫어.”
로젤리아의 얼굴은 엉망이었다. 귀를 제외한 모든 구멍에서 물이 흘러나왔다. 흘러나온 콧물이 제이의 셔츠와 늘어졌고, 흔들리는 눈동자에서 떨어지는 눈물 또한 그의 셔츠를 적셨다. 제이는 그저, 뒤통수를 땅으로 내리고는 피식 웃었다.
“편하게 살 수만 있냐. 아프니깐 소리치는 거지. 일단, 내 가방 좀 들고 와 줘. 지금은 무시당하고 있지만, 저놈들이 언제 다시 공격해 올지 모르잖아.”
“... 가방이라면, 여기 있어. 들고왔어.”
그녀는 제이가 싸움을 시작하며 내던져놨던 가방을 들어 보였다. 그녀의 두 손은 그것을 꼭 쥐고 있었다. 그런 모습을 제이는 잠시 멍하니 보았다.
“야, 설마… 아까 부딪히는 소리가 난 게, 가방 가지고 박치기한 거 아니지…?”
“하지만, 들고 오다 넘어졌는걸… 어쩔 수 없었다고.”
“... 그래, 그것밖에 방법이 없었을 것 같긴 하다. 좋아, 일단 열어줘. 번호는 알지?”
“... 응. 잠시만 기다려줘.”
로젤리아는 짐가방을 내려놓았다. 그리고 그녀의 손가락이 잠금장치의 숫자를 돌려나갔다. 제이는 그사이, 잠시 옆으로 고개를 돌렸다. 푸른 로봇이 싸우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그것들의 공격이 푸른 로봇의 금속 몸에 큰 유효타를 날리지는 못하는 것 같았지만, 푸른 로봇은 계속해서 그 공격들을 피해 가며 싸웠다.
‘... 부수지는 못해도, 무언가 영향은 있나 보네. 저렇게 열심히 피하는 걸 보니까 말이야.’
제이의 옆에서 딸깍 소리가 들려왔다. 로젤리아가 잠금장치의 해제를 마치고, 가방을 가볍게 열었다. 그리고 그녀는 가방 속 내용물을 내려다봤다. 또 한 번, 안도감은 사라지고 걱정이라는 감정이 로젤리아에게 들이닥쳤다. 그녀의 표정은 조금 어두워졌고, 제이 또한 그 이유를 알았다.
“걱정마. 죽지는 않아. 아마도 말이야.”
“... 꼭 해야 하는 거야? 카일 씨가 충분히 해결할 수 있을 거 같은데… 우린 그저, 기다리는 거만 해도 되지 않을까? 어쩌면, 승강기도 얼마 남지 않았을지도 모르는데...”
“무서운 건 알겠는데 말이야. 그래도 해야 해. 빚지고는 못 사는 성격인 거 알잖아? 그리고 손님의 상태가 이상해. 아무래도 저 녀석들이랑 오래 싸우게 놔두면 안 될 거 같아.”
“... 그래. 그럼, 제발 더 이상의 무리는 안 되는 거 알지? 이건, 그만큼 너무나도 위험한 물건이잖아. 아버님도, 어째서 이런 걸 너한테 맡기신 건지…”
“글쎄, 아저씨는 자료수집을 위해서라지만, 난 그렇게 생각 안 해. 항상 어디선가 가출해서 돌아다니는 아이를 지켜줄 또 하나의 가능성 정도…?”
“... 그렇다고 해도, 너무나도 무모해. 이건 아직 그 누구의 머리로도 이해하지 못할 기술력이잖아… 미지의 물건이라고, 마치… 카일 씨처럼 말이야.”
“... 그렇지, 그래서 내가 직접 뛰어보고, 보고서 작성하고, 지원금 받는 거잖아? 난 좋아. 아직 이해하지 못한다면, 그냥 뛰어들래. 이게 어떤 결과를 낳을지는 몰라도, 써야만 할 때면 마음껏 쓰겠어.”
“... 정말로 무모해...”
“그렇지, 쓴소리라면 나중에 들을게. 일단, 이 오른팔부터 때 주라. 손가락 하나도 움직이지를 않아. 완전하게 고장 난 거 같아. 어차피 누나한테 혼나야 한다면, 이유가 하나 더 늘어도 상관없겠지.”
로젤리아는 침묵을 유지하며, 제이의 오른쪽 금속 팔에 두 손을 얹었다. 그리고 강하게 잡아당겼다. 이미 반쯤 부서지고, 긁힌 자국이 남아 고장 난 그 물건은 너무나도 쉽게 뜯어져 나왔다. 그리고 로젤리아는 그걸 가방 옆에 내려놓고는 가방 안 내용물에 손을 얹었다.
“... 정말로 무리는 안 된다. 잘못하면, 팔 하나로는 안 끝나는 거 알지?”
“예. 예. 잘 알죠. 공사장에서 벽돌 옮기는 거랑 짐승 몇 마리 때려잡을 때는 정말로 고생했지. 하지만, 지금은 해야만 해. 내 말 알지?”
“...”
또 한 번, 로젤리아는 침묵을 유지했다. 그녀는 내용물을 두 손으로 꺼냈다. 그것은 또 하나의 금속 팔이었다.
팔꿈치 밑으로 부드럽게 내려오는 팔뚝은 붉은빛이 돌았으며, 손목의 접합부를 지나, 그것에는 검은손이 달려있었다. 제이는 조용히 무언의 미소를 보였다. 로젤리아는 걱정과 두려움이 섞인 마음을 한구석으로 그저 몰아냈다. 그리고 자신의 손에 든 그것을 제이 쪽으로 가져갔다.
로젤리아는 그것을 제이의 오른쪽 팔꿈치에 갖다 대었다. 그러자 그 팔은 마치 강한 자력에 이끌리듯 부착되었고, 그리고 마치 한줄기의 전기 같은 힘이 제이의 온몸에 흘렀다. 그는 상체를 일으켜 세웠다. 그리고 로젤리아와 눈높이를 맞췄다.
“좋아. 이제 아가씨는 퇴장해. 저 토토 양반한테 딱 붙어있어. 알겠지? 아, 그리고 내 원래 팔도 들고 가 주고, 대충 가방 안에 쑤셔놔. 잃어버리면 누나한테 진짜 죽어.”
로젤리아는 조금 전까지 제이가 쓰던 고장 난 금속 팔을 가방에 집어넣고는 가방을 닫았다. 그리고 그 가방을 들고일어나, 기둥을 향해 조금을 뛰었다. 그러다 갑자기 자리에 멈춰 뒤돌아봤다. 그런 그녀를 바라보며 제이는 조심히 일어섰다.
“돌아가면, 맛있는 밥 해줄게!! 그러니깐, 꼭 멀쩡해야 한다!!”
말을 마친 그녀는 곧바로 다시 뒤돌아 달려나갔다. 그런 그녀를 향해, 제이는 그저 피식 웃고는 그 또한 뒤돌아봤다. 새로 장착한 금속 팔을 왼손으로 어루만지며, 그는 지금도 계속해서 싸우고 있는 푸른 로봇을 향해 걸었다.
“좋아. 이 팔이 날 집어삼키는 게 먼저일까, 내가 이 팔을 집어삼키는 게 먼저일까나.”
그 순간, 제이의 금속 팔에서 방대한 힘이 방출되어 나왔다. 붉은 팔뚝이 네 갈래로 갈라져 몇 바퀴를 돌아 다시 합쳐졌다. 마치 번개가 내리치는 듯한 강렬한 힘이 제이의 몸에 요동쳤다. 그곳에 모든 그것과, 푸른 로봇 또한 한 곳으로 시선이 모였다.
그곳에는 한 남자가 서있었다. 방금까지, 모든 것을 쏟아부은 듯한 그가, 지금은 자신의 두 다리로 말이다. 입에선 하얀 연기 같은 것이 뿜어져 나왔고, 새로운 팔에서부터 시작되는 노란빛의 힘이 팔을 타고 그의 온몸에 흐르는 것이 흐릿하게 보였다.
“제이 씨…?”
제이는 금속 팔의 손가락 관절을 하나씩 움직이며 푸른 로봇을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 그리고 그의 모습은 순식간에 사라졌다.
‘콰앙-!’
갑자기 울려 퍼지는 금속음. 그곳에는 금속 장갑이 찌그러져 가는 그것이 하나 있었다. 그리고 그것을 상대로 주먹을 날리고 있는 제이를 푸른 로봇은 보았다. 열 걸음이 넘는 거리를, 제이는 순식간에 줄인 것이다.
“좋아, 상태는 완벽하네. 손님, 바톤터치야. 이제 손님이 잔반 처리 담당이야.”
“이건, 도대체…”
푸른 로봇의 어안이 벙벙해. 잠시 방심한 사이, 그것 중 하나가 푸른 로봇의 뒤를 공격하려 했다. 또 한 번, 제이가 빠르게 움직였다. 재빠르게 나아가는 그의 검은 주먹은 그것의 팔이 푸른 로봇에게 닿기도 전에, 그것을 박살 내어 날려 보냈다.
“설명은 나중에. 싸우는 거 보니까, 뭔가 안좋아 보이던데. 로젤리아를 지켜줘. 시간 끄는 건, 내 차례야.”
제이의 말을 들은 푸른 로봇은 더 이상의 대화를 멈추고, 빠르게 빈틈을 뒤집고 나왔다. 검은 그것들의 눈이 제이의 변화를 관측했고, 그런 그것들의 사이에 선 제이는 자신의 오른팔을 들고서는 가볍게 소리쳤다.
“자아, 생각해보니 내 새 친구를 소개 안 했었네. 이쪽은 ‘싸우는 팔’ 너네들을 박살낼 비장의 무기야. 눈알 돌리지 말고, 한꺼번에 덤벼. 이번에는 진짜로 전부 박살을 내 줄테니 말이야.”
그의 간단한 소개가 끝나자, 그것 중 하나가 새로운 관찰 결과를 도출해내었다. 그러면서 이번에는 제이를 둘러싸고, 제이 또한 담담히 자리를 지켰다.
“제압 대상의 장비에서 고출력 감지. 위험순위 갱신. 제압 대상들의 우선순위를 조정한다. 최우선 제압 목표 확정.”
“좋아, 이제야 내가 주인공인가? 합리적인 가격으로 모셔드립니다. 먼저 박살 나고 싶은 놈부터, 덤벼.”
노란빛의 힘을 두른 그가 자세를 다잡고 있을 때, 그것들이 그를 향해 한 번에 달려들었다. 제이는 그저, 자신에게 달려드는 그것들을 향해 크게 미소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