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중하게 말하며 손을 내미는 내 모습에 미르는 쿡쿡거리며 우아하게 내 손을 짚으며 말했다.
“그럼 어디 살면서 한 번 도 안 받아본 에스코트를 받아볼까?”
앞장은 내가 선 채 나와 미르는 산장 주위를 느긋하게 걸어 다녔다.
걷다보니 가장 먼저 보인 건 산장 뒤편에 높게 쌓여있는 장작더미들이었다.
산장 생활비 대신 해놓은 장작들을 가리키며 미르는 장난 맞게 물었다.
“가온, 오랜만에 장작 패기 다시 연습해 볼래? 요령만 알면 은근 쉽다니깐?”
“맨 손으로 장작을 쪼개는 게 쉽다니, 저번에 네 말 믿고 했다가 내 손가락 하나 나갔잖아.”
“아차차, 그랬지, 더 갈 데는 없는 거 같은데, 이제 산장으로 돌아갈까?”
“이번엔 좀 더 멀리까지 가보자.”
산장 근처를 벗어나 두 사람은 조금 더 먼 곳까지 걸어갔다.
목적지는 딱히 없었다, 그저 정처 없이 걸으며 눈이 잔뜩 쌓인 아름다운 겨울 산 풍경을 감상했다.
포장되어있지도 않은 험한 산길이지만, 이미 여러 번 걸었던 산길이기에 두 사람은 문제없이 걸었다.
뒤에서 느긋하게 따라오던 미르가 왼쪽 끄트머리에 튀어나온 입구를 가리킨 채 돌연 외쳤다.
“어라, 가온 저기 저 동굴 봐봐, 우리가 예전에 갔던 그 동굴 아니야?”
“맞네, 미르 네가 곰을 보고 싶다고 냅다 쳐들어가는 바람에 조용히 겨울잠 자고 있던 곰이 난리쳤었지, 또 깨우려고? 그때 내가 어떻게든 진정시킨다고 개고생 했는데 말이야.”
“으윽, 왜 아픈 데를 찌르고 그래, 진짜 야생에서의 곰이 보고 싶었다고, 큼큼, 빨리 지나가자.”
“그러면 흑역사로 가득한 동굴은 못 보고 지나간 거로 하자.”
“으으, 자꾸 놀릴래?”
미르는 자신의 흑역사를 밝히는 게 부끄러운지 걸음을 빨리 해 동굴을 지나치자 나 또한 급히 따라갔다.
잠시 추억에 잠길만한 장소는 동굴만이 아니었다.
걸어가던 도중 눈에 보이는 아직 얼어붙지 않은 개울가, 저곳에서 나와 미르는 물놀이도 했다.
‘살면서 처음 하는 물놀이였지, 재밌었어.’
미르와 함께하기 전만 해도 난 물, 특히 비를 싫어했다.
노예 시절 비오는 날 빗물 웅덩이를 밟기 싫어하는 주인을 위해 웅덩이에 몸을 담군 채 주인이 밟고 지나갈 때 까지 있어야 하는 것은 물론 때때로 성격 나쁜 주인은 내게 그 웅덩이를 다 마시라고 명령을 내리기도 했다.
전자의 경우 등이 조금 아플 뿐 견딜 만하지만, 온갖 세균이 섞인 웅덩이의 물을 마시면 며칠 간은 꼼짝도 못할 정도로 아팠었다.
미르 또한 기억났는지 개울가를 보곤 능글맞은 미소를 지은 채 한 마디 했다.
“가온 너 수영 엄청 못하더라, 물속에서 허우적대는 게 얼마나 웃겼는지 알아?”
“수영을 배운 적이 없는 데 당연히 허우적거리지.”
“무릎까지 안 오는 개울가였는데? 중간에 나타난 아르실도 그 모습 보고 엄청 웃었는데, 큭큭.”
“……큼큼, 빨리 가자.”
이번엔 내가 한 방 먹었기에 걸음을 빨리 해 개울가를 빠르게 건너갔다.
개울가를 건너면서 흘러가는 물에 비친 내 표정이 살짝이나마 보였다.
‘웃고 있네.’
조금은 부끄럽지만, 기분은 좋았다.
“우리 계속 이 산장에 계속 머무를 까?”
개울가를 건너던 도중 미르가 문득 던진 말이 내 귓가에 꽂혔다.
“계속? 또 우릴 잡으러 오는 놈들이 나타나면 어쩌려고.”
“하룬가 말하는 거야?”
미르의 말에 순간 난 나도 모르게 눈살이 찌푸려지며 날카롭게 물었다.
“하룬가가 뒷배에 있는 건 어떻게 안 거야?”
“으응? 그거야 뻔하잖아, 쳐들어 온 건 루 아케르와 쫄따구지만, 우릴 잡으라고 의뢰할 만한 자는 이방인인 나랑 가온 너에게 원한을 가진 하룬가의 하랄드 말고 누가 더 있겠어?”
“……미르 네가 직접 알아본 거야?”
“에이, 무슨 소리야, 가온 네가 알려줬잖아.”
“내가?”
미르의 물음에도 난 입을 꾹 다물었다.
알려준 적이 있을 리가 없다.
내 복잡한 심정을 모른 채 미르는 희희낙락하며 자기 할 말만 했다.
“나랑 가온 우리 둘이서 막을 수 있어, 루 아케르도 가온 네가 물리쳤는걸.”
“내가, 그 자를 물리쳤다고?”
“응, 기억 안나?”
뒷짐을 진 채 웃으며 말하는 미르의 말에 난 입을 다물었다.
반박하고 싶은 게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그러나 억지로 참았다.
지금은 말할 때가 아니었다.
“그건 나중에 이야기하고 계속 산책이나 하자.”
“그래 이제 시간도 널널하니깐!”
동굴을 지나치고 걷고 또 걷자 험한 산길이 아닌 넓은 평원이 두 사람을 반겼다.
무리 지어 뛰어다니는 사슴들이나 작은 몸에 비해 긴 다리로 눈밭을 헤치는 눈 여우가 보일법도 하지만, 지금은 동물은커녕 초목 하나 보이지 않았다.
가온은 말없이 달라진 평원을 훑어보며 생각했다.
‘전부 박살이 났어.’
겨울철 나무들과 땅들은 흔적도 알기 힘들 정도로 뒤집혀 있었고 발목까지 올라올 정도로 차 있어야 할 눈밭은 없고 그 자리에는 거대한 구덩이가 있었다.
집 몇 채는 들어갈 법한 구덩이에는 거대한 얼음 가시들과 이 날씨에도 타오르는 불길이 언뜻 보였다.
저게 무엇인지는 굳이 말할 필요도 없다.
‘그 날의 싸움 흔적들이구나.’
수십 수백 개의 구덩이들이 주위에 널린 채 마치 땅에 구멍이 뚫린 것 마냥 기괴하고도 섬뜩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미르를 잡으러 온 불을 쓰는 변태남과의 싸움, 둘의 싸움은 산 정상에서만 이루어진 게 아닌 이곳 산 전체에서 벌어진 것이다.
어마어마한 싸움의 흔적에 놀랄 틈은 없었다.
난 힐끔 고개를 돌려 본 미르의 표정은 약간 굳어있었다.
“……미르.”
“으, 으응? 아하하, 여기는 왜 이렇게 난장판이 된 거람, 더 갈 데도 없는 거 같은데 이만 돌아갈까?”
미르는 서둘러 이 자리를 떠나고 싶어 하는 눈치였다.
그 날 싸움이 있기 전 날 혼자 두고 싸우러 간 미르, 그동안 자신의 능력에 대해 제대로 말하지도 않았던 미르, 항상 내게 따뜻하고 상냥하던 그녀였지만, 알게 모르게 숨겨온 게 많았던 그녀였다.
어쩔까, 지금이라도 물어볼까.
‘아니 의미 없는 질문이야.’
“그래 돌아가자.”
“이해해줘서 고마워, 가온.”
“뭘.”
산장 근처까지 오자 구수하고도 맛있는 냄새가 콧 끝을 자극하는 게 벌써부터 침샘이 고인다.
핸슨이 무언가 맛있는 음식을 준비한 게 틀림없다.
줄곧 뒤에서 조용히 따라오던 미르가 신난 발걸음으로 뛰기 시작했다.
“이 냄새! 저번에 먹었던 그 멧돼지 고기 아니야? 아싸!”
어린아이 같이 신나하며 뛰어가는 미르의 뒷모습을 보니 복잡했던 머릿속이 가라앉았다.
조금만, 조금만 더 있자, 아직은 때가 아니다.
그렇게 스스로를 다독이며 함께 산장 안으로 들어갔다.
핸슨과 아르실이 만든 저녁 식사는 저번과 같이 황홀할 정도로 맛있었다.
식사가 끝나자마자 나와 미르는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우며 맛을 칭찬했다.
“최고였어.”
“응응! 진짜 맛있었어.”
“허헛, 감사합니다, 이번 음식은 우리 공주님께서 더욱 힘썼습니다만…….”
핸슨은 한 쪽 눈을 찡긋거리며 내게 신호를 보냈다.
또 시작이다.
식사가 시작하고 나서 줄곧 내게 초롱초롱한 눈빛을 보내는 아르실의 시선이 부담스럽다 못해 따가울 지경이었다.
그래도 고마운 건 고마운 거다.
“잘 먹었어, 아르실, 다른 건 몰라도 음식 하나는 인정해줄게.”
“헤헤, 저번보다 칭찬을 더 해줬네.”
“대충했다간 네가 하루 종일 잔소리 할 게 뻔하니깐.”
“자, 잔소리라니! 내 이쁜 목소리가 그렇게도 듣기 싫은 거야?”
식탁을 탁치며 번쩍 일어나는 아르실의 외침을 들은 미르는 위트 있게 넘겼다.
“옥구슬처럼 아름다운 목소리도 하루 종일 들으면 질리는 법이야, 아르실, 가온은 네 목소리를 듣고 질릴까봐 그렇게 말한 걸 거야.”
“에헤헤 진짜? 에이 그런 거면 진즉에 말하지 가온, 앞으로는 적당히 할게, 히히.”
정말 잔소리를 듣기 싫어서 말한 건데 이상하게 왜곡되었다.
난 단번에 부정했다.
“진짜 듣기 싫어서 그런 거야.”
“헤헤헤, 부끄러워서 거짓말도 하네.”
“아니라니깐!”
“히히, 앞으로 일어날 때마다 내가 옆에서 목소리로 깨워줄 게.”
아르실은 잽싸게 내 옆에 찰싹 달라붙은 채 떨어질 생각을 안 한다.
달라붙은 아르실을 떼어내려는 나와 떨어지지 않으려는 아르실, 그런 우리를 미르와 핸슨은 흐뭇한 눈으로 지켜보는 가운데 식사 시간이 지나가고 밤이 찾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