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에는 신경도 쓰지 않았지만, 어느새 마음 한 구석에 자리 잡은 가장 위험한 변수 노예 가온.
만약 녀석이 하운드님을 배신하고 적으로 나타난다면 일이 어떻게 틀어질지 모른다.
막심은 입술을 깨문 채 다짐했다.
“가온, 만약 네 놈이 정말 나와 하운드 님을 배신한다면 네 놈만큼은 내 손으로 죽여주마.”
드드드득.
머릿속에서 수십 마리의 벌레가 기어 다니는 것 같은 불쾌한 감각이 들끓는다.
그뿐만이 아니라 온 몸이 불에 대인 듯 뜨겁고 따가웠다.
온 몸에서 느껴지는 아픔과 역겨움에 난 속으로 온갖 욕설을 내뱉었다.
‘빌어먹을, 이번 후유증은 더럽게 심하군.’
각인을 건드리면 운 좋게 살아남아도 그 후유증은 못해도 며칠은 간다.
당분간은 이 상태가 지속 될 거라는 사실에 나는 몸서리쳤다.
‘그런데 난 죽은 게 아니었나.’
생사여부는 물론 마지막으로 기억나는 게 뭐였는지조차 희미했다.
흐릿해져가는 기억의 파편들을 모으고 모아 간신히 장소 하나를 기억해냈다.
‘눈, 눈이 내리는 골목길이었던 거 같은데.’
어째서 자신이 거기에 있었는지 무슨 이유로 각인을 건드렸는지조차 기억이 나지 않는다.
애써 모은 파편들이 사라지자 보이는 건 암흑밖에 없었다.
쓰러지기 전 어떤 일들이 있었는지 기억조차 나지 않지만, 가지고 있는 지식만은 건재했다.
이렇게까지 기억들이 희미해진 건 분명 각인을 건드린 부작용 때문일 것이다.
‘남들은 한 번 잘못 건드리면 죽는 각인을 난 몇 번이고 건드렸으니 당연한 결과야.’
딱히 슬프거나 화나지도 않았다, 어차피 난 노예다.
짐승보다 천하고 모두에게 손가락질 받으며 평생을 부려 먹히다 죽을 운명인 노예.
이렇게 아무 생각 없이 그저 죽음을 기다리는 것도 노예로선 그렇게 나쁜 죽음도 아닐 것이다.
눈을 감고 생각하는 걸 완전히 그만두자, 곧 다가올 죽음을 맞이하기 위해.
-가온?
어느 여성의 목소리가 들렸다.
듣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포근해지고 몸이 따뜻해지는 목소리였다.
가온은 누구지, 저 여자는 누굴 부르는 걸까. 누군지는 몰라도 노예인 자신을 부르는 건 아닐 거다.
살면서 단 한 번도 누군가에게 따뜻한 말 한 마디를 들어본 적이 없던 만큼 지금 들려오는 따뜻한 목소리를 가진 여성이 자신을 부르는 것이 아님을 확신했다.
-가온! 내 말 들리는 거야? 너 또 늦잠자려고 일부러 그러는 거지? 다 알아! 나도 어릴 때 엄청 그랬다고!
그런데 이상하다, 여성의 목소리는 다른 이도 아닌 자신을 부르는 것만 같았다.
내 이름이 가온이었던가, 평범한 이름이다, 노예인 자신에게 그런 멀쩡한 이름을 붙였을 리가 없는데.
저 여자는 대체 누구지.
-어쭈, 계속 고집을 피워보겠다 이거지? 단번에 일어나게 해주겠어! 야얍!
여성의 목소리가 들린 직후 내 몸 구석구석 누군가 간지럽히는 것 마냥 근질거리기 시작했다.
‘으, 으으으그극.’
그저 고통이었다면 참을 수 있지만, 이건 달랐다.
노예로 살아오면서 온갖 끔찍한 고통을 견뎌야 했던 내게 이런 자극은 처음이었다.
고통을 주려는 게 아닌 애정이 담겨 있는 행동이었다.
살면서 처음 느껴보는 간지러움을 참지 못하고 나도 모르게 외쳤다.
“그, 그만!”
목청껏 외치는 순간 스파크가 터지듯이 환한 빛이 터짐과 동시에 시야가 드러났다.
눈을 뜩 직후 보인 건 어느 낡은 산장 안, 그곳에 놓인 침대에 내가 누워있었고 내 위로 올라탄 붉은 빛깔의 장발 여성은 날 간지럽히고 있었다.
스파크가 터질 때 사라졌던 기억들이 얼핏 돌아왔는지 기억이 조금은 난다, 여기고 어디고 내가 누구였는지.
머리의 지끈거림과 온 몸에서 느껴지는 통증은 어느새 사라졌다.
난 내가 일어난 걸 모르고 계속해서 간지럽히는 여성에게 자연스러운 미소를 지어보이며 말했다.
“나 일어났어, 미르, 이제 그만해도 돼.”
“뭐야, 언제 일어났어? 막 재밌어지려는 찰나였는데.”
“그만해줘, 더 하다가 아르실까지 참전하겠어.”
내 말이 끝나기도 전에 내가 누워있는 침대 한 구석에서 볼에 주근깨가 한가득 있는 금발머리 의 소녀 아르실이 튀어나오며 외쳤다.
“날 부른 거지? 가온이 날 그렇게까지 원한다면 어쩔 수 없지!”
“또 이상한 소리 한다, 괜히 나한테 들러붙지 말고 떨어져.”
“칫, 미르 언니는 가온 배 위에서 재밌게 놀고 있는데 나만 빼기야?”
“자꾸 이상한 소리 할래? 으윽.”
말하던 도중 머리가 지끈거리며 눈앞이 아찔해진다.
시야가 흔들리면서 눈앞에 있는 미르와 아르실의 모습이 여러개로 나뉘었다.
청각은 멀쩡한 지 당황한 아르실과 미르의 목소리가 들렸다.
“무리는 하지 마, 손가락 하나 까딱하기도 힘들 거야.”
“아르실에게 들었어, 각인까지 건드렸다며? 그거 잘못 건드리면 죽는 거라는 데 왜 건드린 거야 바보 같이.”
“미르 언니 너무 그러지 마, 가온이 그렇게 고생한 덕분에 언니가 무사한 거잖아? 루 아르케도 덕분에 물러났고.”
“그건 그러네, 고마워, 가온 네 덕에 우리 모두가 살았어, 지금은 푹 쉬어.”
들려오는 두 여성의 말에 지끈거리는 두통에도 난 의아함을 느꼈다.
‘내가 누구를 물리쳤다고?’
어렴풋이 돌아온 기억이 정확하다면 여기는 노인 핸슨과 아르실이 머무는 산장, 나와 미르는 우리를 노리는 정체모를 무리의 습격을 피해 이곳까지 도망 왔었다.
노예인 자신과 쫓기는 이방인인 미르를 받아준 핸슨의 산장에서 한 달 가까이 평화로운 일상을 보냈던 기억까지 난다.
마지막으로 기억나는 건 산장을 습격했던 괴한들의 우두머리인 불을 쓰는 변태남과 싸운 기억이었다.
두 사람의 말이 맞다면 내가 그 불을 쓰는 변태남을 물리쳤다는 건데, 내가 그를 이겼던가? 아니 이기기는커녕 난 그때…….
드드드득.
머릿속이 혼란스러운 와중에 처음 느꼈던 두통은 더욱 심해져간다.
“으, 으으윽.”
머리가 깨질 것만 같다.
노예로 살던 시절 주인에게 몽둥이로 머리를 흠씬 두들겨 맞았을 때도, 추운 겨울 고열에 시달려 약도 없이 헛간에서 목숨을 연명할 때보다도 심한 두통이었다.
고통스러워하는 날 보던 아르실은 잠시 말이 없더니 내 귓가로 조용히 속삭였다.
“깊게 생각 하지 마, 가온, 지금은 그냥 쉬어, 나랑 같이 있는 게 싫은 거야?”
“갑자기……무슨 소리야?”
“미르 언니도 함께 있어, 지금 이 상황을 계속 유지하고 싶으면 그만 생각 해.”
“으으윽.”
아르실의 알 수 없는 말에 난 정체모를 압박감을 느끼며 자연스레 생각하는 걸 그만두자 두통 또한 사라지며 눈앞이 다시 환해졌다.
아르실은 싱긋 웃으며 내 상태를 물었다.
“어때? 편하지? 지금은 깊게 생각하지 마.”
“……알겠어.”
“헤헤, 내 말을 이렇게나 잘 들어줄 줄이야, 좋아 이 아르실이 특별히 포상을 줄게, 오늘 하루만큼은 널 건드리지 않을 테니 미르 언니랑 놀아.”
“그게 무슨 포상이야.”
내가 어이없단 듯이 말해도 아르실은 개의치 않은 채 묘한 미소로 화답하곤 산장에서 나갔다.
이제 산장에는 미르와 나만이 남았다.
미르는 여전히 내 위에 올라탄 채 날 걱정하고 있었다.
“정말 괜찮은 거야?”
“으응, 이젠 괜찮아, 그나저나 이제 위에서 내려와 줄래? 은근 무거워.”
“너, 너 숙녀한테 무겁다라는 말은 실례인거 알아?”
“미르 너한테 거짓말하기 싫었어.”
“으윽, 그렇게 말하면 내가 할 말이 없잖아.”
내 말에 반박할 생각을 하지 못한 채 미르는 얼굴을 붉히며 침대에서 내려왔다.
온 몸을 짓누르는 고통과 두통은 착각이었던 걸까, 난 금세 침대에서 일어나 몸을 움직일 수 있게 되었다.
산장 창문 바깥으로 보이는 풍경은 내 기억과 동일했다.
미르와 불을 쓰는 변태남과 싸운 흔적이 그대로 남아있었다.
멀쩡히 움직이는 내 모습을 보던 미르는 환한 미소와 함께 손을 내밀며 제안했다.
“일어났으니 오랜만에 산책이라도 좀 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