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르실은 그렇게 말하곤 다친 가온을 두곤 눈을 치워주는 렘 브란트와 함께 먼저 골목길을 빠져나갔다.
골목길을 빠져나가 여관으로 가는 길, 말튼 성의 거리 한복판은 조용했다.
거리만이 아니었다, 성벽, 성문, 하룬가의 본가, 저 멀리 내성까지 말튼 성 전역의 분위기는 하늘에서 끝없이 내리는 눈처럼 차가웠다.
성에 드리운 고요는 그저 눈처럼 차갑기만 한 게 다가 아닌 공포와 두려움으로 얼룩져 있었다.
말이나 마차를 가진 상인들은 일제히 가게 문을 닫은 채 어떻게 하면 도망칠 수 있을까 고민했다.
“지금이라도 탈출 해봐?”
“사방이 포위 됐을 텐데 어떻게 가려고? 애초에 성문을 지키는 보초병들은 어떻게 뚫으려고?”
“어차피 이판사판이야, 얌전히 앉아서 죽을 바에는 시도라도 해봐야지.”
“아서라, 운좋게 나가도 밖에 적들이 가득할 거야, 눈도 이렇게 내려서 말속도도 아 나올 거고.”
탈출할 여력이 없는 평범한 시민들과 가족들 혹은 홀로 집안에 숨었다.
그들은 겁에 질려 있으면서도 서로를 안심시키며 위로를 했다.
“흐, 흐윽, 엄마, 우리 여기서 죽는 거야?”
“아니야, 걱정 마렴, 훌륭하신 영주님하고 용감한 병사 아저씨들이 지켜줄 거야, 우리 기도나 할까?”
“으응, 엄마.”
“그래 장하다 우리 딸.”
그저 살고만 싶은 부유한 귀족들은 마부와 하인들에게 뭐라도 해보라며 다그치는 중이었다.
“지금 탈출을 못한다니! 내가 정녕 네 놈의 목을 쳐야 하겠느냐!”
“주, 죽을 죄를 지었습니다, 나으리, 하지만, 지금 나갔다간 말튼 성의 병사들에게 잡혀 죽을 게 분명합니다!”
“개구멍이나 다른 출구는 없는 거냐?”
“제가 알기론 말튼 성을 나갈 수 있는 출입구는 저기 정문뿐입니다.”
각기 반응은 다르지만, 모두가 겁에 질린 이유는 같았다.
모든 게 끝날 거 같던 전쟁은 멈췄지만, 완전히 끝난 게 아님을 성안의 사람들은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성벽을 둘러싼 만 명이 넘어가는 적의 포위진을 볼 필요도 없는 일이다.
치료소로 실려 가는 병사의 사경을 헤매며 흘리는 말소리, 성벽 위에 선 채 무기를 잡고 있는 병사들의 떨리는 손, 그리고 사라지지 않는 전쟁의 향기.
말튼 성내를 가득 채운 전쟁에 대한 공포 분위기 속 모두가 알고 있는 것이다.
전쟁은 끝나지 않았고 말튼 성에 파멸이 머지않았다는 것을.
전쟁 통이 말튼 성 한 가운 데, 아르실의 앞에서 눈을 치워주던 렘 브란트는 슬그머니 뒤를 돌아보았다.
‘정말, 그 녀석과 함께 안 가는 건가.’
골목길에서 잠깐 봤지만, 그 가온이라는 노예의 상태는 상당히 심각했다.
그토록 피투성이인 아이를 골목길에 그대로 나두면 얼어 죽거나 과다출혈로 죽을 게 분명했다.
비록 노예인데다가 자신에게 험한 말을 한 건방진 놈이지만, 저대로 죽게 나두기에는 조금 안타까운 감이 없지 않아 있었다.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 렘 브란트에게 아르실이 톡 쏘듯이 말했다.
“언제는 그렇게 싫어하더니, 생각해주는 척이야? 안 죽어, 가온은.”
“네, 넷?”
자신의 생각을 읽히자 렘 브란트는 소스라치게 놀라다가도 이내 금세 평정심을 찾았다.
뒤에 있는 꼬마는 남의 생각을 읽는 게 가능한 이방인이다, 이상할 게 없는 일이다.
그러나 자신의 생각을 들킨 것보다 렘 브란트는 아르실의 말에 의구심을 품었다.
“죽지 않는다니요?”
“두 번 말하게 하지 마, 가온은 멀쩡해.”
“머, 멀쩡하다니.”
“내색은 안했지만, 나도 좀 놀랐어, 랠리 숲에서 돌아왔을 때보다 훨씬 심한 상태였는데도 약간의 타박상 외에 내상은 없어, 근데 내가 봤을 땐 분명 성에 도착한 직후일땐 내상도 심했던 거 같은데 부상이 없다는 건…….”
아르실의 말을 렘 브란트는 믿기가 힘들었다.
성벽 위에서 렘 브란트 자신 또한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다.
그 어린 노예 꼬마가 홀로 적진 안으로 들어간 것을, 거기서 무사히 나온 것도 아니고 저렇게 피투성이가 되었는데 회복했다니.
궁금증을 이기지 못하고 렘 브란트는 우뚝 멈춰선 채 뒤를 돌아보았다.
렘 브란트의 뒤를 따라가는 아르실은 습관적으로 손가락을 깨물며 작게 중얼거리고 있었다.
“심지어 각인까지 건드린 거 같은데, 저렇게 멀쩡할 수가 있다니, 미르 언니가 사라진 이후로 가온의 몸에 이상이라도 생긴 건가.”
“가. 각인을 건드렸다고요? 제가 알기론 보통 노에가 자신의 각인을 함부로 건드리면 죽는다고 들었는데.”
“맞아, 온 몸에 뿌리내린 신경을 제어하는 미친 마법의 산물, 죽음보다 더한 고통을 준다고 각인을 건드릴 일이 있을 때 노예는 차라리 죽여 달라고 구걸할 정도지.”
“각인을 건드리고도 무사하다니, 그렇다 쳐도 상태가 많이 안 좋아 보이는 데, 지금이라도 데려가는 게…….”
렘 브란트는 말을 하다 말고 급히 입을 다물었다.
자신을 노려보는 아르실의 눈빛에서 살기가 느껴지자 그제야 자신이 무슨 실수를 했는지 깨달았다.
아르실의 밑에서 하인으로 살아가는 자신이 감히 주인의 말에 반박한 것이다.
이번엔 진짜 죽을지도 모른다는 공포에 렘 브란트는 급히 고개를 숙여 사과했다.
“죄, 죄송합니다, 제가 감히 아르실 님의 말에 토를 달았습니다.”
고개 숙여 사과해도 아르실은 별다른 말이 없었다.
평소라면 자신에게 죽고 싶냐는 등의 말을 할 턴데 조용하자 이상함을 느낀 렘 브란트가 살며시 고개를 들었다.
아르실은 렘 브란트를 보고 있지 않았다.
그녀는 고개를 푹 숙인 채 초점 잃은 눈으로 작게 중얼거리고 있다.
“그래, 네 말이 맞아 아무리 좋게 쳐도 지금 가온의 상태는 최악일거야, 그대로 두면 정말 죽을지도 몰라, 여관에 데려가서 좀 더 치료를 해줘야 할 거야.”
말로는 설명하기 힘든 기괴한 눈빛을 한 초점 잃은 아르실의 눈, 그녀가 작게 중얼거리는 말들 사이에는 하운드가 뿜어내는 기운처럼 정체모를 압박감이 새어나왔다.
하운드의 기운이 거대한 설산처럼 웅장하고 거대했다면 아르실의 기운은 마치 사람의 목을 죄는 독사처럼 소름끼치고 껄끄러웠다.
아르실에게 완전히 압도당한 렘 브란트는 숨을 죽인 채 그녀의 말을 잠자코 들었다.
“하지만 가온이 생각을 바꾸기 전까진 데려갈 생각은 없어, 말튼 성이 불타든 다른 모두가 죽든 그건 알 바가 아니야, 내가 정말 싫은 건, 가온 네가 남의 권속이 된 다는 것, 남의 권속, 나에게서 떠난다는 것, 내 것이 아니게 된다는 거니깐, 그건 싫어.”
“…….”
“내가 직접 나서면 까지 미르언니와 너를 떼어냈는데, 너라면 날 재밌게 해줄 거 같았는데, 가온 너라면 언젠간 날……그래 좋아, 정말 네가 내게서 멀어질 거라면, 그럴 바엔 차라리 내 손으로 가온 널…….”
“아르실?”
어느 고운 여성의 목소리가 아르실의 이름을 불렀다.
놀란 렘브란트가 고개를 돌리자 그의 시선에 맑은 눈과 길게 땋은 갈색 머리의 청순해 보이는 여인이 서 있었다.
우아한 실크 드레스를 입은 전과는 달리 지금은 하녀들이 입을법한 작업복을 입은 여성, 시에나는 아르실을 보곤 반갑게 말했다.
“아르실! 어디 갔나 싶더니 여기 있었구나!”
“가온, 가온, 너도 날 떠날 거야? 정말 떠날 거라면 너를…….”
“아르실? 어디 아픈 거니? 횡설수설 이상한 말만 하고.”
“으응? 넌 뭐야? 넌 뭔데 내 어깨를 잡고 있는 거야?”
시에나를 바라보는 아르실의 표정은 같은 사람을 바라보는 게 아니었다.
지나가다 무심코 밟아 죽인 벌레를 보는 표정이었다.
시에나는 소름끼치는 아르실의 표정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밝게 말했다.
“벌써 날 까먹은 거야? 나 시에나야, 함께 불량아들도 물리치고 가온 간호도 같이 해줬잖아.”
“가온이랑 같이? 가온은 날 떠날 텐데? 너도 떠날 거야?”
“떠나다니?”
“떠날 거지? 너도 날 떠날 거라면…….”
아르실의 표정이 더더욱 차가워짐과 동시에 그녀로부터 뿜어져 나오는 기운이 더 강해졌다.
여차하다간 사람 하나 죽을 거 같음을 느낀 렘 브란트가 시에나를 말리러 가기 전, 시에나는 방긋 웃으며 아르실을 안심시켰다.
“갑자기 무슨 소리야, 가온이 왜 떠나? 가온이 가장 아끼는 사람이 아르실 너라며, 내가 가온에 대해서 잘 알지는 못해도 그럴 애가 아니야.”
“……그럴 애가 아니야?”
“응, 네가 가온을 그렇게 좋아하는 데 가온이 널 왜 싫어하겠어.”
“내가 가온을 좋아해? 그래서 가온도 날 좋아한다고……맞아, 그래, 가온은 날 필요로 해, 그러니 가온은 날 버리지 않을 거야, 가온이라면 어떻게든 해줄 거야.”
시에나의 말에 아르실의 초점 잃은 눈에 조금이나마 생기가 돌아오면서 그녀가 뿜어내던 기운은 눈 녹듯이 사라졌다.
조금은 정신을 차렸는지 아르실은 다소 놀란 눈으로 자신의 어깨를 잡은 시에나를 보며 힘없이 말했다.
“으윽, 머리 아파 죽겠네, 하마터면 완전히 뺏길 뻔했어, 어, 그쪽은 왜 여기에 있어? 아, 아 맞아, 그랬지, 히히, 날 걱정해준 거구나, 언니도 좋은 사람이네, 가온보다는 아니지만.”
“무슨 말을 하는 건지는 모르겠다만, 이럴 땐 보통 앞에 있는 사람이 더 좋다고 해줘야 하는 거 아니야?”
“아무튼 고마워, 나도 가온처럼 잠깐 머리가 이상해졌나봐, 가온을 찾으러 온 거야? 가온은 무사해, 어디 있는 지 알고 싶어?”
“가온이 무사한 건 아르실 네 표정을 봐도 알 거 같네, 가온이 무사해서 다행이지만, 그보다 나 좀 도와줄 수 있어, 아르실? 너의 도움이 필요해.”
시에나는 그 말과 함께 아르실에게 손을 내민 채 정중히 부탁했다.
“지금 치료소에 인력이 너무 부족해, 남을 치료할 수 있는 의사인 아르실 네가 도와주면 좋겠어.”
“내가?”
“그래, 아르실 너처럼 대단한 의사가 필요해, 다친 아저씨를 치료할 때처럼 너의 그 놀랍고도 대단한 의술이 필요해.”
“흠흠, 내 진가를 알아보다니, 내가 좀 대단하지.”
시에나의 사탕발림에 아르실은 입가에 미소를 띠운 채 시에나의 손을 맞잡으며 흔쾌히 승낙했다.
“큼! 원래 아무 부탁이나 받지 않지만, 언니가 날 좀 도와줬으니 이 아르실님이 특별히 도와줄 게! 야 쓰레기! 너도 따라와!”
“아, 알겠습니다.”
아르실의 말 한 마디에 렘 브란트는 고개를 푹 숙인 채 아르실의 뒤에 붙었다.
앞장서서 치료소로 가는 시에나는 뒤에서 따라오는 두 사람을 보곤 싱긋 웃었다.
항상 봐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