짙은 어둠이 내려앉은 새벽이었다.
바다는 쉬지 않고 모래를 쓰다듬으며 적적한 울림을 만들어내었고, 눅눅한 녹음은 설핏설핏 들려오는 야부엉의 울음소리를 벗 삼아 새벽 위에서 노래했다. 그 시간까지 집무실에서 서류들을 들여다보고 있던 성아의 어머니, 지수는, 문득 자신이 읽던 것을 멈추고 잠시 그 자연이 만들어내는 야상곡을 감상하기 위해 고개를 돌렸다.
지상은, 그리하여 윤곽과 고저를 구분할 수 있을 정도의 명암만을 남겨두고, 모두 깜깜한 심해 속으로 가라앉고 있었다.
“…… 갑수야.”
“…….”
그녀의 부름에도 불구하고 이상해꽃은 꿈쩍하지 않았다.
“갑수야, 갑수.”
“…… 구우…….”
잠시 잠이 들었다는 듯, 천천히 고개를 들어 올린 이상해꽃은 입을 허 벌리며 커다란 하품을 내보였다.
그가 몸을 들썩일 때마다 거대한 진동이 울려 퍼졌다. 이상해꽃은 그 좁은 공간에서 몸을 움직이는 것조차 버거운지, 지수를 향해 고개의 방향을 트는 데에도 한참을 걸려 몸을 가눠야 했다.
“갑수, 힘들어?”
“구우우……”
“천천히 해도 돼.”
그 정도의 이해심이 없는 지수도 아니었다. 그녀의 아버지의 파트너였던 이상해꽃은, 이미 지수가 태어날 무렵엔 펄펄한 성년기를 넘기고 있었으므로 지금은 언제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의 고령에 접어든 상태였다. 물론 아직까진 건강에 특별한 적신호가 없었지만, 그래도 그 나이가 되면 기본적으로 몸이 느리고 둔해지는지라. 이상해꽃은 그렇게 한숨을 푹 내쉬며 지수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이제 완전히 자리에서 일어난 지수는, 천장을 향해 기지개를 한 번 쭉 켜고는, 종종걸음으로 이상해꽃에게 달려가 그의 목덜미를 덥석 붙잡았다.
“아앗——! 이때 들어가는 지수 선수의 치근거리기! 갑수는 과연 이 난관을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 구우…….”
이상해꽃은 다시 한번 한숨을 푹 내쉬며, 덩쿨채찍으로 숙면을 방해하는 자신의 조카를 하늘 높이 떼어내었다.
“아하하, 갑수 선수의 덩쿨 채찍! 지수 선수, 그대로 녹다운, 시합 불능입니다!”
그것이 마냥 즐겁다는 듯 피곤한 목소리를 하고서도 소리 내어 웃던 지수는, 결국 자신의 항복을 인정하고 이상해꽃에게 내려달라고 호소했다. 그가 지수를 내려주자, 이제 그녀는 그의 앞발을 베개 삼아 드러누우며 가만히 천장을 들여다보았다.
“갑수.”
“구우.”
이상해꽃은 대꾸조차 귀찮아졌는지 건성으로 답했다.
지수는 아랑곳 않고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나 고민씨 좀.”
“구우우.”
이상해꽃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더 이상은 안된다는 뜻이었다.
그 말에 지수는 투정을 부리듯 이상해씨의 턱주가리를 마구 쓰다듬었다. 그러나 이상해꽃의 태도는 단호했다. 지수는, 최근 들어 회사의 몇 가지 중요한 사업이 동시에 진행되는 터라 벌써 3일째 고민씨로 밤잠을 설치며 잔업을 처리하는 중이었다. 그녀의 건강이 염려된 이상해꽃은 그녀에게 그만 자라는 듯 수면 가루 섞인 분진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야, 치사하게 기술을 쓰는 게 어딨어…… 아아, 안돼…… 처리할 게 얼마나 많은데……”
그러나 그녀의 체력은 더 이상 한계였다.
머지않아 지수는 쌕쌕거리며 옅은 쪽잠에 빠져들었다. 이상해꽃은 아직도 어린애같이 고집을 피우는 그의 철부지 조카를 바라보고는, 그녀가 좀 더 편안한 잠을 잘 수 있도록 달콤한 향기를 가득 뿜어내었다.
그렇게 방 안에는 고요한 평화가 찾아오는가 싶었다.
“……?! 으으…… 뭐야…….”
갑작스럽게 울려 퍼지는 캐스터의 전화 소리에, 지수는 선잠을 화들짝 쫓아내었다.
하시로부터의 전화였다.
“하시?”
캐스터의 발신인을 확인한 지수가 이상해꽃을 바라보며 영문 모를 눈짓을 해 보였다. 그러나 만사가 귀찮은 이상해꽃은 얼른 받으라는 듯 턱을 들어 고갯짓할 뿐이었다.
[접니다, 주인 마님.]
지수는 잠시 헛기침을 하며 목을 가다듬고는, 한없이 낮고 냉랭한 목소리로 전화를 받았다.
“그래, 무슨 일이지?”.
하시가 ‘주인 마님’이란 호칭을 썼다는 것은, 공적인 일이 아니라 사적인 일로 연락을 했다는 뜻이었다. 사업을 위해서라면 하시는 그녀의 ‘양녀’였다. 그러나 그녀가 스스로를 하녀로 자청한 이상, 아무래도 집안에 관련된 일일 확률이 높았다.
[개인적인 일입니다만]
그리고 그런 지수의 예상은 거의 틀리지 않았다.
[업무 중에 죄송합니다.]
“아니, 지금 막 자려고 했어. 용건만 말해.”
[지금 칼로스 채널 틀어보실 수 있으십니까?]
“왜?”
[틀어보시면 알 겁니다.]
“흠.”
지수는 그러고서 서랍 속에서 리모컨을 꺼내어 채널을 돌려 보았다. 머지않아 칼로스 방송국의 채널이 벽면 가득 스크린에 떠올랐고, 그곳에는 배틀을 진행 중인 미르 체육관의 전경이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 무슨 의도지, 하시?”
[지금 배틀을 하고 있는 게 아가씨입니다.]
“…… 그래서?”
[말씀드릴 필요가 있을 것 같아서요.]
“…….”
잠시 뒤, 카메라는 배틀을 기다리는 관중들의 모습을 하나하나 훑으며 지나가기 시작했다.
지수는 거기서 손쉽게 하시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었다. 관중석 안에서까지 꿋꿋하게 메이드복을 차려입은 하시는, 스쳐 지나가는 카메라를 향해 무표정의 브이를 내보이고 있었다.
지수는 급격히 혈압이 오르는 기분이었다.
“…… 어쩐지 너 치고 오래 머문다 했다. 난 또 무슨 일이 수틀린 줄 알고 걱정했더니만, 이 망할 기지배가 땡땡이를 쳐?”
물론 하시는 그녀의 임무를 다 끝마친 상태였지만, 그런 건 아무래도 지수에게 중요하지 않았다.
[오늘 중으로 들어갈 테니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응, 너 삼 개월 감봉.”
[아.]
지수는 그러고서 신경질적으로 전화를 끊었다.
그러고도 잠시, 그녀는 무언가 고민을 하는 듯 잠시 자신의 책상을 붙잡고서 사색에 빠지더니, 이내 투덜거리며 이상해꽃의 등 위에 털썩 다이빙했다.
“딸들이라곤 있는 것들이 하나같이……”
“구우우…….”
“야! 나는 그래도 저 정도로 말 안 듣진 않았어!”
그 말에 이상해꽃이 피식 비웃었다.
얼굴이 발개진 지수는 씩씩거리며 이상해꽃의 옆구리를 간질였다. 그녀는 곧장 그의 덩굴채찍에 붙들려 떼어내 졌지만, 이상해꽃은 그런 지수에게 성아의 모습을 덧대어 바라보며 웃을 뿐이었다.
“하여튼 난 안 봐. 티비 꺼, 갑수.”
지수는 그렇게 말하며 잘 준비를 하듯 방의 불을 껐다.
그러나 이상해꽃이 또다시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는 넝쿨을 이용해 지수를 자신의 옆구리 한쪽에 앉히고는, 조용히 스크린을 가리켰다.
“구우우.”
“아아아, 안 들려. 싫어, 안 봐. 안 볼 거야!”
그러나 타이밍 좋게도 성아의 배틀이 이제 막 시작하고 있었다.
“아아── 진짜! 너네 짰지? 짠 거지?”
어떻게든 배틀이 보기 싫어서 안달이 난 그녀의 투정에도 불구하고 이상해꽃은 기분 좋게 울며 성아를 응원했다. 그의 옆에서 한참이나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떼를 쓰던 지수는, 결국 이상해꽃의 재촉에 못 이겨 시큰둥한 표정으로 자리에 주저앉을 수밖에 없었다.
“구우우…….”
“글쎄, 저년이 시합하는 거야 안 봐도 뻔하지!”
그녀는 굳은 결의에 가득 차 있는 자신의 딸을 바라보며 그렇게 소리칠 뿐이었다.
불이 꺼진 체육관의 안쪽은 정적만이 가득했다.
관객들의 경종을 울리는 웅장한 북소리와, 시트론의 등장을 알리는 위엄 넘치는 배경 음악을 뒤로 한 채, 사방에서 난무하는 스포트라이트의 불빛 성아의 정신을 앗아가고 있었다.
빛무리의 점멸이 점차 고조되었다.
“성아 언니…… 정말 괜찮겠어?”
유리카는 그렇게 말하며 번뜩이는 스포트라이트 한가운데에 섰다.
“미리 말해두는데──”
모든 조명은 성아의 반대쪽으로 머리를 향한 채 격렬히 몸을 떨었고
“우리 오빠는 정말 강하다고──!”
엘리베이터는 허연 연기를 내뿜으며 천천히 입을 벌렸다.
“자, 그럼! 박수로 맞아주세요! 미르 체육관의 관장, 시트론님의 등장입니다!”
“그랴아아아아──!!”
가장 먼저 모습을 드러낸 것은, 필드에 나오자마자 매서운 기세로 털을 곤두세우며 포효하는 럭시오였다.
그녀는 어떠한 전격조차 내뿜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기세 하나로 좌중을 압도하였다. 럭시오의 위협을 마주한 라란티스의 동공이 화악 얇아졌다. 우렁차다기보단 어딘가 귀를 긁게 만드는 신경질적인 울음소리에, 그녀는 그만 뒷목이 뻣뻣해지는 느낌이었다.
“그만. 냉정을 되찾으세요, 럭시오.”
그리고 그런 럭시오를 진정시킨 것은, 다름 아닌 미르 체육관의 관장, 시트론이었다. 그는 마치 방금 막 작업을 하다 온 것처럼 후줄근한 차림을 한 채, 천천히 손을 뻗어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고 있었다.
뒤이어 나타난 에몽가 또한 맑은 웃음소리로 럭시오의 품에 안기려 들었다. 두 사람의 손길에 화들짝 놀란 럭시오는 못내 수줍게 얼굴을 붉혔고, 시트론은 그런 그녀를 뒤로 한 채 천천히 관장석으로 나아가기 시작했다.
그들이 모습을 드러내자, 유리카는 으레 있는 기본 룰 설명을 시작했다.
“지금부터 도전자 성아 님의 미르체육관 배틀을 시작하겠습니다. 쓰러뜨려야 할 포켓몬은 총 두 마리이며, 도전자는 최대 여섯 마리의 포켓몬을 모두 사용하실 수 있습니다. 교체, 도구 사용은 도전자는 자유이며, 관장의 경우 한 번 만 사용하실 수 있습니다.”
유리카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체육관의 모든 조명이 필드를 가리켰다.
성아는 마치 어둠의 바다 한가운데에서 서 있는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녀는 비비용이 들어있는 몬스터볼을 가슴께에 대고 천천히 심호흡했다.
“우리…… 저 바보 독침붕은 나중에 혼내주기로 하자.”
비비용 또한 긴장이 되는지, 별다른 대꾸를 하지 못하고 묵묵히 듣기만 했다.
“비비용, 너한텐 늘 부담을 주는 것 같아서 미안. 그렇지만, 잘 해왔잖아.”
성아는 그렇게 말하며 상대편을 훑어보았다.
안경에 가려 표정을 읽을 수 없는 시트론과, 성아가 마음에 들지 않는지 매서운 눈초리로 으르렁거리는 럭시오, 그리고 장난스런 악동의 미소로 성아네를 내려다보는 에몽가까지.
그녀는 긴장되는 마음을 간신히 집어삼켜야 했다.
“…… 잘 할 수 있을 거야.”
마침내, 심판석의 양쪽으로 유리카와 시트로이드가 그 모습을 드러냈다.
성아는 마지막으로 나직이 중얼거렸다.
“지금까지 그래왔던 것처럼, 앞으로도 계속.”
“그럼—— 타올라라, 볼트 프리즘! 배틀을 시작합니다!!”
“가라! 가서 모든 걸 뽐내렴, 비비용!”
“가세요, 에몽가.”
시트론이 꺼내 든 것은 에몽가였다.
튀어나온 에몽가는 볼을 부풀리며 곧장 자신의 날개막을 펴들었다. 그러자 그의 볼 주변부에서 펑퍼짐한 전류의 줄기가 뿜어져 나왔고, 에몽가는 공중 위로 떠올랐다.
‘전기 비행이라니…… 역시 성가셔…….’
“비비용, 날아!”
그녀가 그렇게 명한 것은 지극히 당연한 수순이었다.
속도 면에서나 화력 면에서나, 에몽가는 비비용을 월등히 능가하고 있었다. 유리한 상성, 우월한 스피드, 그리고 경험의 차이까지.
그런 비비용이 에몽가보다 한 가지 유리한 점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비행’이었다.
성아는 전날에 하시가 설명해주던 것을 떠올렸다.
‘아가씨가 알아야 할 부분은, 에몽가의 비행법이 ‘활강’이라는 거예요.’
하시는 그렇게 말하며 비행과 활강의 차이에 대하여 설명해주었다.
‘쉽게 말해서 고도의 차이가 있어요. 비행에 비하면 활강에는 상승할 수 있는 고도의 한계가 명확하죠. 그리고 비행을 하는 방법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예요. 물론 활강이 비행보다 압도적인 스피드를 보여주는 건 맞지만, 비행 각을 바꾸는 데에는 영 젬병이죠. 예를 들어서, 비비용이 공중에서 고개를 튼다고 생각해봐요. 그냥 이렇게 몸을 옆으로 틀면 되잖아요. 근데 에몽가는 그러려면 크게 한 바퀴를 선회해야 한단 말이죠.’
‘그래, 알겠어. 근데 말야…… 하시, 에몽가가 나온다는 보장이 있어?’
‘이 아가씨가 나를 뭐로 보고.’
그녀는 시트론의 선봉으로 에몽가가 나올 것이라는 점을 예견하고 있었다.
‘아가씨는 벌레 타입 포켓몬 트레이너잖아요. 제가 시트론 님이라면 애꿎은 비행 타입을 냅두고 다른 포켓몬을 쓸 거 같진 않은데요.’
‘그으…… 런가……?’
‘유리카와의 보너스 배틀은, 겉으로 보기엔 볼트 프리즘의 컨텐츠를 채우기 위한 수단이라고 생각하겠지만, 틀렸어요. 그건 시트론과 시트로이드가 상대방의 전략을 미리 분석하기 위한 일종의 ‘경기 실력 유출’이에요. 합법적이지만요.’
그런즉, 하시의 요지는 이러하였다.
‘유리카님과의 배틀에서 독침붕을 내보내세요. 정 안된다 싶어도 서브로는 레디바를 내보내세요. 포인트는, 최소한 비비용이 모습을 드러내는 일이 없어야 한다는 점이에요.’
물론 예상외의 변수로 독침붕이 시합을 거부하는 사태가 벌어졌지만, 결과론적으로는 하시가 원하는 방향대로 배틀이 성사되었었다.
“계속해서 날아, 비비용!”
“역시나……!”
유리카는 명령을 내리는 성아를 바라보며 이미 예상했다는 듯 웃음 지었다.
그러나 성아의 머릿속에서 하시는 다른 말을 하고 있었다.
‘—— 라고, 말하면서 좋아하겠죠. 그쪽에선 분명.’
하시는 그렇게 생각하며 썩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비비용과 에몽가의 배틀이 성사된다면 말이에요, 분명 그쪽은 그렇게 생각할 거예요. 남은 우위는 고도밖에 없으니까.’
성아는 거기에 덧붙여서
‘…… 그리고 비올라 님네 비비용이 그런 식으로 배틀을 하니까?’
‘딩동댕♪’
비비용은 이제 뜨거운 조명과 거의 맞닿을 정도로 높이 솟아 있었다. 관객들은 목이 빠져라 턱을 들고선 그녀의 모습을 올려다보았다.
밝게 일렁이는 조명의 빛은, 마치 내리쬐는 햇볕처럼 따스하게 그녀의 몸을 적시고 있었다.
“준비해, 비비용!”
그 말에 비비용은 양 날개를 화악 펼쳤고
그 자세는 마치, 쾌청의 상태에서 솔라빔을 준비하는 것과 같았다.
‘…… 그래서?’
‘보통이라면 솔라빔이라고 생각한다, 이 말이죠. 아, 정면 승부에선 답이 없으니, 높은 곳에 올라가 일격으로 승부를 보려는 구나. 이렇게 말이에요.’
그 말마따나 시트론은 자신의 에몽가에게 소리치고 있었다.
“솔라빔이에요, 에몽가!”
그러자 에몽가는 천천히 자신의 볼을 부풀리기 시작했다.
‘가능성은 둘이에요. 하나는 전기 공격으로 솔라빔을 쓰기 전에 끝내려 하거나, 다른 하나는 ‘충전’을 통해서 특수방어를 올리려고 하는 거죠.’
“충격에 대비하세요!”
시트론은 그렇게 ‘충전’ 명령을 내렸고
‘그럼?’
‘뭐가 됐든, 아가씨한텐 기회인 거죠.’
“지금이야!”
비비용의 몸에서 쏟아져 나온 것은
‘기회?’
‘상대방에게 완벽하게 상태 이상을 걸 수 있는 기회 말이에요.’
수면가루를 잔뜩 묻힌 고치 덩어리였다.
에몽가가 지상으로 추락하는 것은 한순간이었다.
그것은 모두의 인식을 뛰어넘는, 말 그대로 일순의 순간이었지만, 그러면서도 에몽가는 아주 천천히 추락하고 있었다.
“정신 차리세요, 에몽가──!”
시트론은 떨어지는 그의 모습을 바라보며 무력하게 소리쳤다. 그러나 땅으로 곤두박질친 에몽가는 거칠게 바닥을 나뒹굴며 신음을 내뱉을 뿐이었다.
성아는 착실하게 다음 명령을 내렸다.
“시간이 얼마 없어, 비비용!”
“비유!”
그녀의 두 번째 작전이 시작되고 있었다.
“벌레 타입의 저력을 보여주는 거야!”
성아의 말이 끝나자, 비비용은 급속도로 하강하기 시작했다. 저항을 줄이기 위해 날개도 뒤로 붙인 채 떨어지던 그녀는, 이내 에몽가의 위에 다다르자 다시 날개를 거칠게 펼쳐내며 그의 주위를 맴돌았다.
비비용의 입에서 얇은 실들이 뿜어져 나왔다. 에몽가는 머지않아 거미줄에 붙들린 먹잇감처럼 실로 뒤범벅이 되었고, 그 사실을 확인한 성아는 무너진 펜스를 바라보며 비비용에게 소리쳤다.
“타점이 좀 안 좋으면 어때, 우리한텐 언제나 방법이 있었어!”
그 말에 비비용은 머릿속에서 다홍빛 구체들을 마구 이끌어냈다.
관객들의 함성이 점차 고조되었다.
성아의 앞에서, 그녀와 같은 표정으로 선 비비용의 머리 위에는, 수많은 펜스의 조각들이 사이코키네시스의 힘을 받아 둥실거리고 있었다.
“이기는 거야──! 비비용──!”
비비용은 이를 악물며 고개를 비틀었다.
“스톤샤워──!!”
그러자 그녀의 명령을 받은 수많은 구체들이 일제히 펜스 조각들을 위로 쏘아 올렸다.
하늘 위에서 반짝이던 파편들은, 그 자체로 하나의 유성우가 되어 에몽가를 향해 쏟아지기 시작했다.
“그랴아──!”
럭시오는 경악하듯 쏟아지는 운석우를 향해 소리쳤지만, 떨어지는 돌덩이들은 매정하게도 에몽가의 몸을 마구 뒤덮었다.
에몽가의 짤막한 비명이 그 틈 사이로 새어 나왔다.
효과는 굉장했다.
‘됐어…… 이 정도라면 상대도 어느 정도……!’
그렇게 생각하며 성아는 한숨을 돌렸다.
그러나 그녀의 예상과 달리, 시트론은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안경을 곧추세우며 명령했다.
“일어나세요, 에몽가. 잠에서 깨어나세요.”
“으으…… 에모옹……!”
“바위틈으로 빠져나올 공간은 있습니까?”
에몽가가 긍정의 울음소리를 내보였다.
시트론은 그런 그의 대답에도 어떠한 안도나 염려의 기색을 내보이지 않은 채, 다만 냉정하게 손을 벌려 소리쳤다.
“번뜩이는, 몸의 안쪽으로 계속해서 스파크입니다!”
“……? 저게 무슨 명령이야? 뭔진 모르겠지만, 막아야 돼, 비비용!”
성아가 다급하게 소리쳤다.
“다시 한번 사이코키네시스야!”
그 말에 비비용은 사이코 에너지를 이용하여 에몽가를 덮고 있던 바위 파편들을 일제히 들어 올렸다.
시트론의 안경이 반짝인 것은 그때였다.
“지금입니다!”
“에에모오오옹──!!”
눈을 시리게 하는 새하얀 빛무리가 에몽가의 몸 안쪽에서부터 뿜어져 나왔다.
시트론이 그에게 명령한 것은 플래시였다. 엄청난 양의 눈부심에 성아는 물론 관객들조차 눈을 찡그리며 고개를 비틀어야 했다.
특히나 복안을 가지고 있는 비비용에게는 그 효과가 더욱 심했다.
“아앗!”
“비유우──!”
잠시 혼란에 빠질 정도로 크게 눈을 찌푸린 그녀는, 간신히 하늘에 떠 있는 것만은 유지할 수 있을 정도로 위태롭게 날갯짓했다.
“비윳, 비유우!”
“침착해, 비비용!”
“그게…… 당신들의 약점인가 보군요.”
“뭐?!”
갑작스러운 시트론의 목소리에 성아는 눈살을 찌푸렸다.
그녀는 여전히 그의 표정을 읽을 수가 없었다.
“어떤 순간, 어떤 상황에 부딪히더라도 늘 냉정함을 유지해야 하는 것.”
어느 틈에 빠져나온 에몽가가 비틀거리며 시트론의 눈앞에서 부유하고 있었다.
성아는 당황하여 소리쳤다.
“실, 실을 열로 녹였어?!”
“그게 트레이너라는 겁니다.”
시트론은 손을 뻗어 공중에서 나풀거리는 비비용을 가리켰다.
그러자 에몽가는 몸을 안쪽으로 둥글게 말며 기합을 넣었다. 그녀의 두툼한 꼬리 위로 전기 에너지들이 말리기 시작했다.
“비비용, 시그널빔으로 맞받아칠 준비해!”
성아는 에몽가가 쓰려는 기술이 일렉트릭볼인 줄 알았다. 이제 비비용의 인분들이 전기에 이끌린다는 것을 알았으니, 그녀는 시트론이 전기를 두르고 달려들기보단 거리를 두고 원거리 공격을 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말인즉 성아는 가루들을 이용해 에몽가의 근접 기술을 봉인하려는 속셈이었고
그리고 그런 그녀의 얄팍한 계획은, 시트론에게 진작 간파되고도 남았다.
“꼬리로 치는 겁니다!”
“────?!”
에몽가의 전기 두른 꼬리를 얻어맞은 비비용은, 엄청난 고통에 차마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아래로 내리꽂혔다.
“뭐야 저게…… 뭔 아이언테일도 아니고……!”
“이렇게 하면 비비용의 인분도 꼬리 쪽으로 몰려들 테니 안심이겠죠. 가루 기술의 기본적인 효과는 호흡기를 통해서 발휘되니까요!”
“역시 오빠야! 아무도 예상하지 못하던 기술을 태연하게 만들어버려! 그 점에 전율해! 동경하게 돼!”
“그랴아!”
옆에서 깨방정을 부리는 유리카와 럭시오를 뒤로 한 채, 시트론은 다시 한번 에몽가에게 꼬리로 공격할 것을 명했다.
“비비용, 일단 피해!”
에몽가의 꼬리는 비비용의 코앞을 스쳐 지나갔다.
자신의 몸을 사이코키네시스로 두른 비비용은 황급히 공중 위로 튀어 올라갔고, 목표를 잃은 에몽가의 꼬리는 분개하듯 땅을 내리치며 필드를 산산조각낼 뿐이었다. 솟구치는 흙먼지가 모두의 시야를 가렸다. 정처 없이 허공을 맴도는 비비용은 스스로도 자신의 사이코키네시스를 주체할 수 없어 그 반동으로 입은 내상에 신음했고, 에몽가는 그런 그녀의 울음소리를 쫓아 다시 막무가내로 돌진하기 시작했다. 머지않아 필드는 두 포켓몬의 난잡하기 그지없는 공중전으로 이어졌다.
“비비용!”
“에몽가!”
에몽가가 꼬리를 휘두를 때마다 지저분한 전기의 흐름이 궤적을 그렸다. 번쩍거리는 백광의 타원이 필드 위로 용오름치듯 솟아올랐다. 혼신의 힘을 다해 전류를 피하며 곡예 하던 비비용은 꼬리를 물고 쫓아오는 그의 전격을 시그널빔으로 맞받아쳤고, 휘몰아치는 여러 광선의 조화로 인해 필드는 이제 두 포켓몬의 위치를 분간하기 어려울 지경이었다.
“더 이상 추격전은 무리야! 바람일으키기로 기척을 숨겨!”
성아는 겨우 가라앉으려고 하는 필드의 흙먼지들을 다시 일으켰다.
쫓고 쫓기는 두 포켓몬을 한 번에 집어삼키려는 듯, 뿌연 황운은 그렇게 고개를 일으켰고
“놓치지 마세요, 에몽가!”
에몽가는 필사적으로 그 모래 구름을 해치며 비비용을 찾아다녔다.
“위! 위입니다!”
시트론은 아까처럼 하늘 높이 솟아오르는 비비용을 바라보며 그렇게 외쳤다.
에몽가가 젖먹던 힘을 다해 그녀를 따라 하늘로 향했다.
“벌써?! 비비용, 빨리!”
“내려오는 건 생각하지 말고, 올라갈 수 있는 데까지 올라가세요!”
“왜 이렇게 잘 올라오는 건데!”
그녀의 경악이 무색하게도, 몸을 웅크린 에몽가는 곧장 10만볼트를 쏘아 올렸다.
“안 돼…… 저건 맞으면 끝이야…… 비비용, 준비가 덜 됐으면 일단 피해!”
“10만볼트!!”
“오른쪽으로!”
성아의 지시를 따라 움직인 덕분에, 10만볼트는 비비용의 등허리를 아슬아슬하게 스치고 지나갔다.
그러나 기뻐할 수 있는 것만은 아니었다.
에몽가의 전격은 비비용을 지나고도 한참을 더 올라가, 일직선으로 빛을 내리쬐고 있는 필드의 조명을 완전히 깨부쉈다.
“이런 젠장……!”
그 전기는, 곧장 조명들이 연결된 회로의 안쪽으로 흘러 들어가 그것들을 뜨겁게 달구기 시작했다. 머지않아 가까운 곳에서부터 전등이 하나둘 터지기 시작했고
“비비용!”
그 뾰족한 유리 파편들이 비비용의 날개 등을 향해 맹렬히 쏟아졌다.
필드는 곧장 정전이 일어난 것처럼 새까맣게 물들어 버렸다.
“지금이야──!!”
“비야아──!!”
부들거리던 비비용은 상처에서 오는 고통도 견뎌내며, 맥없이 떨어지는 에몽가를 향해 일직선으로 솔라빔을 퍼부었다.
“에몽가!”
그리하여 필드를 관통하는 그녀의 솔라빔은, 한 줄기의 기둥이 되어 프리즘 타워의 안쪽을 단단히 메워내고 있었다.
필드를 재정비하기 위해선 잠깐의 시간이 필요했다.
상황의 해결을 위해 시트로이드와 프리즘 타워의 몇몇 정비공들이 자리를 비웠다. 그때까지 성아와 시트론은 배틀의 행방도 알지 못한 채 가만히 숨을 고를 뿐이었다.
이윽고 필드 안의 불이 다시 밝았다.
판정을 내려줄 시트로이드를 대신하여, 마이크를 든 유리카가 무거운 목소리로 경기의 승패를 종결지었다.
“에몽가…… 시합 불가능…….”
절망에 빠진 럭시오가 상처 투성이의 에몽가를 바라보며 울분 가득한 표정을 지어 보였고
“비비용 승리……!”
비틀거리며 성아의 눈높이까지 내려앉은 비비용은, 좀체 버티는 것조차 힘들어 보였지만 그럼에도 뿌듯한 표정으로 그녀와 눈을 마주하고 있었다.
유리카의 판정에 잇달아 관객들의 함성이 터져 나왔다.
그 엄청난 환희와 열광의 순간은
“잘했어, 비비용!”
누군가에겐 가슴 깊이 새겨 둘 소중한 추억이었고
“고생하셨습니다, 에몽가.”
누군가에겐 자신을 되짚어 볼 수 있는 소중한 기회였겠지만
“…… …….”
아무렴
“…… 럭시오?”
“흐아아아아──!!”
누군가, 예외인 녀석도 있었다.
그건 누구도 예측하지 못한 돌발상황이었다.
─ 쟤, 쟤 뭐야?!
─ 진정하세요, 럭시오!
그녀는 주인의 목소리를 분간할 일말의 이성조차 분노에 잡아먹힌 상태였다.
“그랴아아아아──!!”
공개적인 자리에서의 패배와 좋아하는 사람의 고통을 단지 ‘포켓몬 리그의 스포츠맨십’이라며 떠넘기기엔 그녀는 아직 너무나도 어렸다.
당황한 라란티스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필드를 좀 더 뚜렷이 노려다 보았고
그보다 더욱 큰 소름을 느끼던 성아는 겁에 질린 표정으로 비비용에게 손짓했다.
─ 사이코키네시스로 떼어내!
그러나 개중에 누구도 달려오는 럭시오가 ‘분노로서’ 미소 짓는 것을 발견하진 못했다.
비비용은 그녀를 막기 위해 사이코키네시스를 길게 내뿜었고
“그아아아아──!!”
럭시오는 그런 에너지 덩어리를
─ 뭐?!
문자 그대로, 깨물어 부쉈다.
악 타입이 가지고 있는 고유의 파동은 에스퍼 타입이 지닌 에너지를 분해, 중화한다. 그러한 원리로 그녀의 입가를 둘러싼 검은 파동이 비비용의 사이코 에너지를 파쇄하고 있었다.
히죽.
그리고 마치 그러한 사실을 성아의 뇌리에 꽂아버리듯, 악랄한 모멸과 괄시의 미소로 대꾸하던 럭시오는 끝끝내 비비용의 날개를 물고선 끌어내렸다.
─ 비야아악!
─ 비비용!
그녀는 거칠게 땅을 구르면서 신음했다.
─ 그만해, 그만하라고!
그러나 성아의 목소리는 안중에도 없다는 듯, 비비용의 양 날개를 앞발로 단단히 짓누른 럭시오는 게걸스럽게 그녀를 괴롭히기 시작했다. 길게 늘어진 그녀의 붉은 침이 비비용의 머리 위로 뚝 뚝 떨어졌다.
럭시오의 투쟁심이 발동하고 있었다.
“그르으으……”
비비용은 이미 전투 불능의 상태에 빠져버렸지만, 럭시오는 트레이너 석에서 아무것도 못 하고 맥없이 소리만 치는 성아를 매섭게 올려다보며 미소지었다. 그녀는 곧이어 쓰러진 비비용의 목덜미를 덥석 물어 올렸다.
“그오오오오────!!”
그러고는, 거칠게 휘몰아치는 전류를 비비용의 몸 안에 직접 꽂아버리며, 그녀는 이미 죽은 사냥감의 시체를 가지고 놀 듯 쓰러진 비비용의 위로 스파크를 꽂아 넣었다.
몇몇 관객들은 차마 그 광경을 못 보겠다는 듯 손으로 눈을 가렸다.
“그만, 그만 하세요, 럭시오!”
“비비용──!!”
술렁이는 관객들과 럭시오의 돌발행동으로 필드의 분위기는 엉망진창이었다.
럭시오가 계속해서 비비용을 가지고 놀려 하자, 다급해진 성아는 몬스터볼로 그녀를 데려오고선 다시 자신의 옆에다 내보내었다.
“비비용, 정신 차려야 돼, 비비용, 비비용…….”
성아는 그녀의 입가로 기력의 조각 가루를 흘려넘기며 상처 입은 그녀의 모습을 훑어보았다. 아름답던 날개가 다 뜯겨져 나가 너덜너덜한 것은 물론이거니와, 벌어진 입에선 고개를 기울여야 간신히 들릴 정도로 희박한 숨소리가 새어 나오고 있었다.
차마, 이루 말할 수 없는 참혹한 모습에 성아는 말도 잇지 못하고 가만히 고개를 떨구었다.
라란티스는, 그녀 또한 매우 분개하여 순간 주먹을 부릅 움켜쥐었으나, 그녀의 옆에서 하시가 진정시킨 덕에 큰 화로 이어지진 않았다. 마음 같아선 그녀는 당장에라도 필드에 내려가 보고 싶었다. 그러나 그녀는, 성아의 허리춤 안에서 무언가 격렬한 움직임을 보이는 것을 포착했기에, 그저 한숨을 내쉬며 가만히 자리에 주저앉을 뿐이었다.
“…… 시이이…….”
성아의 품 안에서
“시야아아아아아──!!”
분노에 휩싸인 독침붕이 맹렬하게 튀어나오고 있었다.
‘핵심은요, 아가씨,’
성아의 머릿속에서, 이어롤과 배틀을 할 때의 하시의 모습이 천천히 떠오르고 있었다.
‘듣고 있어요?’
‘어? 어, 그럼, 듣고 있지.’
‘집중 좀 해주세요. 기껏 설명하고 있는데. 그래서, 핵심은 말이에요, 독침붕의 호흡이 너무 정직하다는 거예요.’
그때까지만 해도 성아는 하시의 말이 깊게 와닿지 않아 몇 번이고 고개를 갸웃거렸댔다.
‘아가씨께서 감을 잃으셨다는 거예요. 핫삼이나 모아머를 떠올려 보세요. 그 아이들과 배틀을 할 때 아가씨가 어떤 호흡을 가지고 있었나.’
그 말에 한참 고민을 하던 성아가 찬찬히 입을 열었다.
‘엇박…… 인가……?’
‘아마도, 글쎄요, 그걸 아가씨께서 ‘엇박’이라고 생각하셨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지금처럼 정직하게 ‘나 공격한다.’ 하고선 돌진하는 방식은 아니었어요.’
‘그렇지만 말야, 모아머나 핫삼은 나랑 합이 잘 맞았었으니까 그런 거지, 독침붕은 지금 내 말도 듣지 않는걸……?’
‘그거야 아가씨 문제죠. 그걸 왜 나한테 꿍시렁댑니까.’
‘하시, 그게 아니라 나는……’
‘아가씨는, 벌레 타입 포켓몬 트레이너잖아요.’
그 말에 잠시 짧은 정적이 일어났다.
‘그래, 나는 벌레 타입 트레이너지.’
잠시 대화의 숨을 고르기 위해 눈을 감았다 뜬 하시가 말을 이었다.
‘방법을 찾으세요. 안되면 계기를 만드세요. 어쨌든, 어찌 되었든, 독침붕이 가지고 있는 그 특유의 저돌적인 성격을 아가씨의 호흡으로 바꾸어 놓는데 집중하세요. 만약 그게 된다면, 독침붕은 꽤 든든한 아군이 될 수 있어요. 즉──’
“즉, 그 분노를 냉정한 적의로 바꿀 수만 있다면…….”
눈을 뜬 성아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독침붕을 바라보았다.
“키샤아아아아────!!”
이미 반 정도 정신이 나간 그는, 비비용을 물리치고 되돌아가 에몽가의 털을 핥아주려는 럭시오에게로 맹렬히 돌진하고 있었다.
그의 기척에 럭시오는 날을 잔뜩 곤두세운 울음소리를 내보였다. 성아는 마치 무언가에 홀린 사람처럼, 약간의 입을 허 하고 벌린 채, 그 둘의 배틀을 넋 놓고 바라보았다.
“그랴아아아아────!!”
먼저 공격에 들어간 것은 럭시오였다. 그녀는 다가오는 독침붕을 견제하기 위해, 날카로운 울음으로 온 사방에 전기를 꽂아버렸다.
그리고 독침붕은, 전진하였다.
“시이잇──!!”
일반적으로 들을 수 있는 ‘목소리’라기 보단, 벌레 타입 특유의 혐오스럽고 귀를 긁게 하는 괴기한 기합으로, 독침붕은 전격의 고통을 감내해가며 럭시오에게로 나아갔다.
“키샤악──!!”
그는 곧장 뾰족한 자신의 팔을 화악 앞으로 내질렀다. 그 끝에선 보기만 해도 역겨운 독액이 흩뿌려지고 있었다.
“그르르으……”
독침붕의 팔을 이빨로 받아낸 럭시오는, 그 둥그런 팔을 타고 위로 미끄러지며 곧장 그의 목덜미를 향해 입을 벌렸다.
“그아아아──!!”
그녀의 송곳니 위로 전기의 흐름이 솟구치자, 독침붕은 위압스럽게 자신의 급소를 향해 입을 벌리는 럭시오의 번뜩이는 얼굴과 마주할 수 있었다.
그는 방어했다. 그러나 반전은 없었다.
이어지는 것은 무는 자와 물리는 자의 섬뜩한 조효. 웬만한 공식 배틀에선 볼 수 없는 도그파이팅이 시작되었다. 독침붕의 목덜미를 제대로 물고 늘어진 럭시오는 계속해서 털을 부풀리며 스파크를 일으켜댔고, 독침붕은 독침붕대로 발악에 가까운 소리를 내지르며 허공 위로 맹독을 분사해댔다. 싸하고 역겨운 냄새가 필드 위를 거세게 뒤흔들었다.
“크륵……”
럭시오에게 빈틈이 생긴 것은 그 순간이었다. 강렬한 악취가 코를 찌르자 무심코 그녀의 턱에 힘이 풀려 버렸고, 틈새를 포착한 독침붕이 양팔을 뻗어 럭시오의 복부를 강렬히 꿰 찔렀다.
“카학……!”
그녀는 순간 숨이 쉬어지지 않는지, 불규칙젹인 호흡을 내뱉으며 벌떡 뒤로 물러섰다.
풀려난 독침붕은 곧장 자리를 박차고 튀어나가며 양팔을 뒤쪽으로 쭈욱 잡아당겼다.
“시이이이──!”
그의 더블니들은 빗나감 없이 럭시오의 상처로 향했다.
“키샤아아──!”
“크흑…… 크아아아……!”
비틀거리며 물러난 럭시오는 그대로 두 번째 더블니들을 맞나 싶었지만, 순간적인 기지로 내디딘 땅의 흙모래를 덥석 움켜쥐어 독침붕의 눈에다 뿌렸다.
“키잇……!”
“그르으……”
그리고는 곧장 스파크를 두른 몸으로 그의 몸통에 돌진하였다.
중심을 잃은 독침붕은 그녀의 아래에 깔렸고, 이후로는 일방적인 구타, 그라운드였다.
럭시오는 또다시 이죽거리기 시작했다. 분노한 독침붕은 양팔을 휘두르며 마구 버둥거렸지만, 그의 양어깨가 럭시오의 앞다리에 붙들린 탓에 아무런 저항도 할 수 없었다.
“기힉, 그랴아아──!!”
그 상황을 즐기기라도 하듯, 잠시 그를 내려다보며 환희의 미소를 지어 보인 럭시오는, 이내 그의 목덜미를 잡아 덥석 물어 올렸다.
“──?!”
방금 전 물린 그곳이었기에, 독침붕은 잔뜩 일그러진 표정으로 고통 섞인 울분을 표출해냈다.
그러나 럭시오는 그런 그를 매정하게 내동댕이쳤다. 여전히 독침붕의 목덜미를 붙든 상태였다. 그녀의 엄청난 악력에 압도당한 독침붕은, 이쪽 땅바닥 저쪽 땅바닥 내팽개쳐지면서 맥없이 신음할 뿐이었다.
“독침붕, 베놈쇼크야!”
정신을 차린 성아가 힘없이 당하고만 있는 그를 바라보며 소리쳤다.
“얼굴 쪽으로 베놈쇼크를 뿜어! 빨리!”
“키샤아아──!!”
그러나 제대로 눈이 돌아간 그는 그녀의 말을 듣지 않았다.
“제발, 제발 내 말 좀 들어 줘 독침붕…… 럭시오의 코에다가……”
성아는 이제 애원하듯 말을 늘어뜨렸고
“독침붕……!”
그런 그녀의 목소리 위로 간신히 정신을 차린 비비용이 입을 열었다.
독침붕의 두 더듬이가 자그마한 그녀의 목소리를 움켜잡기 위해 손을 뻗었다.
“독침붕…… 부탁이야……”
비비용은 혼신의 힘을 다해 한 글자 한 글자를 또박또박 내뱉었다.
“제발 언니 말 좀 들어…….”
그러고는, 그길로 쓰러졌다.
“네 맘을 모르는 게 아니야, 독침붕.”
독침붕은 여전히 럭시오의 입에 붙들려 있었고, 성아는 그런 그를 바라보며 트레이너 석에서 가만히 입을 열고 있었다. 그렇지만, 어째선지 지금 두 사람은, 두 사람 서로만이 느낄 수 있는 하나의 검은 동굴에 들어와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만나고 나서부터 지금까지, 그리고 방금 전까지만 해도 그 동굴은 새까만 심해와 다름이 없었다. 두 사람의 빛은 분명 이어져 있을 진데, 이어져야 할 진데 그러지 못했다.
그러나 그 벽을 허문 것은 비비용이었다. 그녀의 희생으로 두 사람은 지금 서로의 길이 맞닿아 있다는 것을 생생히 체감할 수 있었다.
“네 의견을 무시하려는 것도 아니야, 네 자존심을 꺾으려는 것도 아니야.”
“시이이……”
성아는 어둠 속에서 이어진 빛을 향해 손을 뻗으며, 다만 이렇게 중얼거렸다.
“난 그저 네가 원하는 걸 이뤄주고 싶을 뿐이야.”
그것은 독침붕이 원하던 신체적인 힘이었고, 그가 원하던 진화와 능력일 수도 있었겠지만
복수.
지금의 경우엔, 오로지 복수였다.
“알겠으면 내 명령에 따라.”
두 사람의 분노가 하나가 되는 순간이었다.
“독침붕, 럭시오의 코를 향해 베놈쇼크.”
“시야악!”
독침붕은 몸의 안쪽에서부터 역한 독액을 끌어내었다.
성아의 명령이 아니었다면 쓸 일이 없는 특수 계통의 독액이었다 보니, 그 농축도는 두 사람이 예상한 것 이상이었다. 독의 냄새를 맡은 럭시오는 곧장 구역질하듯 울컥거렸고, 그 틈에 빠져나온 독침붕은 재정비를 위해 성아의 앞에서 숨을 골랐다.
“그러게 진작 좀 말을 듣지 그랬어.”
“시이이…….”
성아는 그렇게 씁쓸한 웃음을 자아내며, 그에게 귓속말로 자신의 계획을 함축해서 알려주었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내 말에 무조건 복종하라는 건 아니야. 내 명령을 기반으로 하되, 변칙은 네 자유인 거지.”
그 말에 독침붕이 끄덕였다.
“그 사실만 잘 기억하면, 너도 모아머나 핫삼과 같은 경지에 이를 수 있어.”
“시야아…….”
성아는 그러고서 독침붕의 등을 팡팡 두드렸다.
독침붕은 아프다는 듯 버럭 짜증을 내다가도, 다시 필드를 돌아보며 양팔을 최대한 뒤쪽으로 잡아당겼다.
“자, 독침붕.”
그녀는 다시금 경기의 재개를 알린다는 듯 그렇게 선포했다.
“역으로 시저크로스야!”
그리고 그녀의 말이 끝나자, 독침붕은 등 뒤로 거대한 모래바람을 만들어내며 땅을 박차고 나아갔다.
“크으으……”
“럭시오, 방어해야 합니다. 아무렇게나 전기를 방류하세요!”
콧속을 후벼 파는 고통에 눈마저 잔뜩 찡그린 럭시오는, 시트론의 말을 듣고선 사방으로 아무렇게나 전기를 내뿜었다.
그러나
“지금이야!”
독침붕은 성아의 명령에 따라 거칠게 땅바닥 긁어 올렸다. 세로로 교차한 양팔의 모양대로 필드에 있던 흙먼지들이 하늘 위로 솟구쳤다. 그 모래바람은 곧장 럭시오의 주변부를 뒤덮었고, 그녀의 전격을 효과적으로 분산시켰다.
“가──!”
그리고 독침붕은 그 모래 구름에 비치는 자신의 실루엣을 해치며 나아갔다.
그의 독찌르기는 정확하게 럭시오의 가슴부를 타격했다.
“카학──!!”
“뒤로 빠지세요, 럭시오!”
럭시오는 고개를 푸르륵거리며 뒤로 도약했다.
“따라가──!”
그러나 그보다 더 빠른 속도로, 마치 섬광처럼 일순간에 번뜩이듯 뛰어나간 독침붕은 곧장 착지하는 럭시오의 옆 목을 후려갈겼다.
“저게 뭔?! 럭시오──!”
“뒤로 빠져, 독침붕! 유턴이야!”
그의 돌진은 한 번 더 이루어졌다.
따라가때리기를 맞고서 휘청거리는 럭시오의 모습을 주시하던 독침붕은, 그녀의 옆구리 사이에서 빈틈을 발견하고는 그곳으로 곧장 달려들었다. 럭시오가 그를 물기 위해 고개를 들이밀었다. 그러나 독침붕은 멀찍이 뛰어오르며 성아의 품으로 되돌아갈 뿐이었다.
“그으으으……!”
약이 바싹 오른 럭시오는 누적된 충격으로 침을 질질 흘리면서도 막무가내로 내달렸다.
“럭시오, 진정하세요!”
“그으, 그랴아아아──!!”
스파크라고는 믿기지 않는, 오히려 와일드볼트에 가까운 압도적인 전하량이 그녀를 새하얗게 물들였다.
이어지는 전류들의 난무, 휘말리는 붉은 흙먼지. 이 모든 걸 기다렸다는 듯, 성아와 독침붕은 단전에 기합을 가하고서 탁황색 뇌운으로 몸을 집어 던졌다.
“독침붕의 흔적을 찾으세요, 럭시오!”
럭시오는 그 말에 매섭게 주변을 둘러보며 으르렁거렸다.
빛을 받은 그녀의 두 눈동자가 모래구름 사이에서 번뜩였다. 그 살기등등한 시선을 마주한 좌중은 숨을 죽이고서 필드를 들여다봤다. 독을 품은 그 동공의 끝은 구름을 뚫고 달려오는 독침붕의 실루엣으로 향했고, 럭시오는 히죽이는 미소를 내보이며 완전히 먹잇감을 덮치려는 자세로 콱 앞발을 내디뎠으나
“어이──”
그녀를 기다리고 있던 건, 주먹을 바싹 움켜쥐고 있는 성아와 독침붕─그리고 그들의 앞에 놓인, 독침붕의 분신이었다.
“기다리고 있었어.”
성아는 자신과 눈을 마주친 럭시오를 향해 그렇게 투 내뱉었다.
럭시오의 눈은 당황과 분노로 일그러졌다. 그러나, 그녀가 미처 자신의 화를 표현할 새도 없이, 그녀는 뻗어 나가는 독침붕의 팔을 얻어맞고선 붉은 한숨을 왈칵 쏟아내며 시트론의 앞으로 내동댕이쳐졌다.
“…… 이건…… 비비용의 몫이야…….”
독침붕은 쓰러진 그녀의 머리에다 대고 싸늘하게 말을 내던졌다. 그의 보복이 제대로 들어 먹히는 순간이었다.
“럭시오, 정신 차리세요, 럭시오!”
“그르르으…….”
럭시오는 비틀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머리와 털은 이미 헝클어질 대로 헝클어져 있었고, 온몸은 눌어붙은 피와 먼지투성이였다.
시트론이 그런 그녀에게 좋은 상처약을 뿌려주면서 타일렀다.
“흥분하지 마세요, 럭시오. 당신은 체육관 소속의 포켓몬이 아닙니까.”
그러나 그의 노력은 모두 허사였다. 지금의 럭시오에게는 시트론도 에몽가도 그 무엇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녀의 귀는 완전히 닫혀있었고, 그나마 매섭게 희번덕거리는 그녀의 눈 속에는, 마찬가지로 독침붕에게 회복약을 뿌려주며 그를 독려하는 성아의 모습이 일렁거릴 뿐이었다.
“크아악!”
회복이 충분히 되었다고 생각하던 럭시오는 그렇게 하악거리며 시트론의 손을 위협했다.
공개적인 자리에서 예상치 못한 그녀의 반항에 시트론과 유리카는 난감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럭시오는 그녀를 붙잡는 시트론의 조언도 마다하고 곧장 앞으로 달려나가기 시작했다.
“좀 쉴 틈은 제대로 주란 말야……!”
그녀의 돌진에 당황한 성아도 독침붕을 출격시켰다.
그가 고개를 돌려 자신을 향해 똑바로 달려오자, 럭시오는 눈에 쌍심지를 켜듯 자신의 품 안에서 전류의 방류를 촉진 시켰다. 달려오는 그녀의 갈기는 마치 스파크를 쓸 것처럼 커다랗게 부풀었고, 그렇기에 그녀의 접근을 예상한 독침붕은 방어 대신 맞공격을 준비했다.
그러나 그는 거기서 가드를 올렸어야 했다.
“그오오오──!!”
독침붕의 모습이 흐트러진 것을 확인한 럭시오는, 한순간에 돌진에 제동을 걸고서 허공을 향해 맹렬히 울부짖었다. 그녀의 몸 안에서 웅얼거리던 전류들이 일정한 흐름을 따라 독침붕에게 직격했다.
“독침붕?!”
럭시오의 10만볼트, 충전으로 인해 효과는 더욱 강렬했다.
“시이잇……”
예상치 못한 전류의 습격에 독침붕의 근육은 그 몸을 바싹 움츠렸다. 그는 마치 온몸이 굳은 것처럼 달리던 모습 그대로 무릎을 꿇으며 땅바닥에 나자빠졌고─물론 마비가 걸린 것은 아니었지만─곧장 자세를 고쳐잡지 못해, 이후로 닥칠 럭시오의 공격을 생각하며 이를 악물었다.
그러나 그녀의 공격은 독침붕을 향한 것이 아니었다.
“어…… 어……?”
그녀는 곧장, 땅을 박차고 뛰어올라 무방비 상태의 성아를 향해 날카로운 송곳니를 벌려 보였다.
“럭, 럭시오?! 돌아오세요, 럭시오!!”
“꺄악! 데덴네, 가서 럭시오 말려!”
성아는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그녀의 입안을 올려다보았다.
“피하세요, 성아 선수!”
“어어…… 어……?!”
럭시오의 송곳니가 서슬 퍼런 백광색으로 반짝거리고 있었다.
그녀의 속을 미치도록 간질이는 그 투쟁심은, 그리하여 그녀로 하여금 성아의 목덜미에 날카로운 송곳니를 박아 넣도록 명령하고 있었다.
모두는 눈을 질끈 감았다. 체육관의 포켓몬이 도전자를 공격한다는 유례없는 사태를 직면한 그들은 차라리 눈을 감아 버리는 게 났다고 생각했다. 성아는 여전히 럭시오를 올려다보고 있었으며, 그녀의 송곳니에선 치사량의 전류가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그리고
“꼬맹아.”
객석을 박차고 뛰쳐 내려온 라란티스가
“죽고 싶니?”
마찬가지로 유례없을 정도의 살기를 내뿜으며, 성아의 등을 밀쳐 넘어뜨렸다.
“키힉……?!”
“라란티스?”
럭시오의 표정이 순간 당황으로 일그러졌다.
그녀는 분명 허공에서 성아를 향해 달려들고 있었는데, 마치 혼자서만 다른 시간 개념을 가진 듯, 마하의 속도로 뛰쳐나온 라란티스가 그녀의 입을 막아 세우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천천히 손을 뻗은 그녀는 럭시오의 턱주가리를 한 손으로 붙잡았다. 그러고는 약하게, 아주아주 약한 힘으로 그녀의 콧잔등에─무려─‘딱밤’을 한 대 때려놓았다.
“──?!”
럭시오는 충격으로 인해 뒤로 나동그라졌다.
“그아아아아────!!!”
시트론의 옆도 스쳐 지나가, 그녀는 비명을 내지르기도 전에 객석의 안전 펜스를 무너뜨리고선 버둥거리고 있었다.
불과 1초도 안 된 사이에 일어난 일에 어안이 벙벙한 성아는, 넘어진 상태에서 뒤를 돌아 라란티스를 바라보았다.
“너 뭐 했음?”
“무르으…….”
“…… 엥? 딱밤?”
성아는 무슨 일격기를 맞은 것처럼 나가떨어지는 상대에게 딱밤을 때렸다고 말하는 라란티스를 바라보며, 아무리 그래도 영 적응이 안 된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녀는 자신이 죽을 뻔한 줄도 모르고 곧장 라란티스를 타일렀다.
“에이, 야, 아무리 그래도 시합 중에 객석에서 난입하는 건 안 되지.”
“르읏……!”
“예? 아뇨, 성아 선수, 정당방위를 인정합니다.”
“엇, 그래요?”
유리카는 자신의 럭시오가 저지른 민폐 짓거리에 골머리를 감싸듯 앓는 소리를 내며 그렇게 말하였다.
물론 성아의 투정이 익숙한 라란티스는, 유리카의 도움이 없었더라도 곧잘 그녀의 말을 끊으며 모자를 건네줄 예정이었다.
“…… 이거 주려고 온 거야?”
“무루.”
그럼 인정이지, 성아는 그렇게 웃으며 모자를 제대로 갖춰 썼다
경기에 다시 들어가기 전에, 그녀는 라란티스에게 비비용을 돌봐 줄 것을 부탁했다.
“맡길게.”
성아는 끄덕이는 라란티스를 뒤로 하고서, 긴장된 표정으로 천천히 숨을 고르는 독침붕과 이제 완전히 형체를 잃고서 일그러진 표정을 하고 있는 럭시오를 향하여 걸음을 옮겼다.
“미안해, 언니. 면목 없어.”
럭시오는 일찍이 몸을 일으켜 필드를 노려보았지만, 아직 골을 울리는 고통이 남아있는지 심하게 머리를 흔들고 있었다.
그런 그녀를 대신하여─마이크를 끈─유리카가 성아를 향해 삼삼한 사죄의 말을 건네었다.
“오빠가 요즘 들어서 칼로스 리그를 준비한다고 바빴거든. 그래서 훈련을 소홀히 했더니 언니 레벨에 맞는 럭시오가 저 문제아 하나지 뭐야. 정말 미안.”
“응? 뭐가?”
그러나 성아는 모르는 척, 유리카에게 해맑은 윙크 하나로 대답을 대신했다.
그녀는 유리카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하는 게 아니었다. 당장 눈앞에서 자신에게 등을 보이고 있는 독침붕 또한 말을 안 들었던 건 마찬가지였고, 더군다나 본인은 그 독침붕과 기적 같은 유대를 통해 합을 이끌어내는 중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녀는 생방송에서 이미지 관리를 하고 싶었다.
‘크으, 방금 나 완전 대인배처럼 보였겠지.’
“…… 하아, 그런 생각을 할 거면 좀 표정 관리는 해 가면서 하라고요……. 진짜 저 메가 똥멍청이 아가씨.”
콧구멍을 쌜룩거리는 성아의 모습에 하시는 앓는 소리를 내며 이마를 부여잡았다.
성아는 다시금 배틀을 재개하기 위해 필드 가까이로 나아갔다.
“부탁해.”
유리카는 그렇게 말하며 간절한 눈빛으로 성아를 올려다봤다.
“이제 저 아이를 말릴 사람은 언니밖에 없어.”
“물론, 맡겨달라고!”
비틀거리며 일어난 럭시오는 이제 아주 일그러진 얼굴로 성아를 노려보고 있었다. 마치 그녀의 내면에서 악이 깨어나듯, 그 몸 주변으로 검은 기운들이 스멀거리며 뿜어져 나왔다.
그 광경은 흡사 두 사람의 유대를 시험하기 위한 마지막 관문과도 같았다.
“자, 독침붕! 마지막이야! 최고의 배틀을 해보자!”
호기로운 성아의 기합에 독침붕은 뒤를 돌아보며 소리 없이 끄덕여 보였다.
그의 시야 너머로, 어느새 정신을 차리고선 라란티스의 품에 안긴 비비용이 짤막하게 들어오고 있었다.
“그오오오오──!!”
럭시오가 고개를 쭉 뻗고선 하늘 높이 울부짖었다.
천지를 뒤흔드는 그녀의 멀리짖음은 탁하고 찐득한 살기가 묻어나 있었다.
“흥, 그런 거로 쫄 거 같아? 가, 독침붕! 경쾌하게 가는 거야!”
성아는 하늘 높이 손을 뻗으며 명령했다.
“그림자분신!”
그녀의 명령이 끝나기 무섭게, 울렁거리는 독액 냄새가 삽시간에 필드 전체를 뒤덮었다.
자신의 흔적을 지우기 위해선 독 냄새가 좋겠다고 판단한 독침붕이 뿜어낸 것이었다. 찌그러진 럭시오의 콧등이 심하게 움찔댔다.
“괜찮습니다, 럭시오! 겁먹지 말고 각개격파하는 겁니다!”
그러나 럭시오는 그의 말을 듣지 않고, 자신의 중심에서부터 넓은 전류를 사방으로 펼쳐냈다. 날카롭게 포물선을 그리며 곤두박질치는 전격파가 하나둘 독침붕의 분신들을 없애 나갔다. 얼핏 보면 시트론의 명령보다 그녀의 방법이 훨씬 효율 있어 보이는 듯했지만, 필중이어야 할 전격파는 도리어 갈피를 잡지 못하고 천천히 땅바닥을 더듬으며 나아갈 뿐이었다.
“지금이야!”
성아는 그런 럭시오의 모습을 가리키며 소리쳤다. 그녀의 손가락이 가리키는 방향을 따라 뿜어져 나온 실뭉치는 곧장 럭시오의 몸을 뒤덮었고
“크륵?!”
그녀를 둥글게 에워싸기 시작했다.
“그래서 움직이라는 겁니다, 럭시오!”
“크아아아──!”
“이미 늦었어!”
단단하게 꼬여있는 실뭉치에 발이 걸린 럭시오는 곧장 옆으로 나자빠졌다. 그녀의 다리엔 수만 가닥의 실이 어지럽게 엉켜 있었다.
“맹독이야!”
“시이이……!”
가만히 중얼거리는 그의 시선을 따라, 럭시오의 다리 위로 역한 갈남색의 독성이 스며들고 있었다. 럭시오는 가만히 자리에 고정된 채로, 자신의 체력을 좀먹기 시작하는 그 맹독을 바라보았다.
곧이어 독침붕의 베놈쇼크가 그녀의 옆구리를 강타했다. 별 볼 일 없는 특수 공격에도 불구하고, 지쳐 있는 럭시오에겐 무시할 수 없는 데미지였다.
“구으으…….”
독액을 뒤집어쓴 그녀는 속 안 깊은 곳에서부터 지친 목소리로 기합을 끌어올렸다.
그녀의 반격이 시작되었다.
“──?! 실 끊어, 독침붕!”
“킷?!”
그러나 럭시오의 전격파가 더 빨랐다.
“젠장……!”
독침붕과 럭시오를 이어주고 있는 이 실 자락은, 서로에게 공격을 가할 수 있으면서 동시에 자신이 공격당할 수도 있는 양날의 검이라는 사실을 성아는 순간 간과하고 있었다. 그렇기에 그녀는 다급한 마음으로 독침붕에게 실을 버리라고 명령한 것이었다.
그러나 독침붕의 생각은 달랐다.
“야, 야 임마!”
속을 끓는 신음을 내뱉으며, 그는 가만히 선 채 럭시오의 공격을 정면으로 버텨냈다.
“뭐 하는 짓거리야!”
“시이이──!!”
속 안을 불태워버리는 강렬한 전격에도 불구하고, 독침붕은 꿋꿋하게 실을 놓지 않았다. 성아가 당황스러운 마음에 고래고래 악을 질러 보았다. 그러나 독침붕은, 그런 그녀의 목소리에 끓어오르는 기합으로 맞대꾸할 뿐이었다.
“시야아아아아──!!”
마침내 그는 실 자락에 붙들린 럭시오를 끌어당기며 크게 고갯짓했다.
“럭시오──!!”
그녀는 하늘 높이 떠올라 있었다.
“그랴아아──!!”
럭시오는 다급한 마음에 전기의 출력을 한도까지 올려 보았지만, 독침붕은 끄떡없다는 듯 끈질기게 실을 물고 늘어졌다.
그의 마음을 눈치챈 성아가 회심의 미소를 지어 보였다.
“허…… 그래…… 그래야 벌레 타입 답지……!”
영원할 것 같았던 그녀의 부유는 그 발버둥이 무색하게도 곧장 땅바닥으로 곤두박질쳤고, 독침붕은 방금 전 럭시오가 자신에게 그랬던 것처럼 실을 이용해 그녀를 인정사정없이 온 사방에 때려 박았다.
땅바닥에 내리꽂힌 그녀는 필드를 산산조각내며 무너뜨리고 있었다.
한동안 위압적으로 행사된 독침붕의 공격을 마주한 관객들은, 그것이 말로는 설명할 수 없는 괴력이라고 생각했다. 그 충격은, 그리하여 바닥에 내질러진 럭시오의 몸을 다시 한번 공중으로 띄우기엔 충분한 위력이었다. 독침붕은 한참 전부터 그 반동을 이용해 럭시오를 휘두르고 있었다. 그러다가 마침내 그녀의 호흡이 가늘어지자, 그는 허공을 향해 좀 더 높이 럭시오를 던져 올리고는 실을 놓아버렸다.
“스으으……”
그러고는 곧바로 양어깨의 손을 모아 시저크로스를 준비했다.
성아가 그를 바라보며 뿌듯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가, 독침붕. 이제 너의 시간이야.”
독침붕은 대답 대신 더듬이를 들썩이는 것으로 응수했다.
럭시오는 쏟아지는 헤드라이트의 조명 세례를 받으며 천천히 추락하고 있었고
독침붕은 그런 그녀를 향해 나아갔다.
“안됩니다, 럭시오! 정신 차리세요!”
“샤아아악──!!”
그리고 빗나감 없이, 매정한 그의 팔 끝은 떨어지는 럭시오의 몸을 크로스로 베어 갈랐다.
땅에 떨어진 럭시오는 거의 반 정도 기절한 듯, 마지막으로 묵혀있던 각혈을 크게 토해내고는 그 자리에서 무릎을 꿇었다.
“럭시오──!”
잠시 필드의 열기를 식히는 싸늘한 정적에 관객들이 웅성거렸다. 숨을 고르던 독침붕은 뒤늦게 피로가 몰려오는지 자리에서 비틀거렸고, 심판을 보던 유리카는 럭시오의 의식을 확인하기 위해 필드로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에몽, 에모옹──!”
의식을 차린 에몽가가 그녀를 향해 처절한 울음을 내보였다.
“그만 하세요, 에몽가. 럭시오는 이미……”
“──?! 아니, 독침붕! 아직 끝난 게 아니야!”
그녀의 동향을 가장 먼저 포착한 것은 성아였다.
뒤이어 그녀의 상태를 확인하려던 유리카가 뒤로 물러섰다. “배, 배틀, 재개합니다……!” 그녀는 피투성이로 몸을 일으키는 럭시오에게 경악에 가까운 표정을 지어 보이며 그렇게 외쳤다.
몇몇 관객들은 그녀에게 경외심을 담은 환호를 내주었다.
“그으으……”
“럭시오…… 하지만 당신은……”
럭시오는 더 이상 배틀을 진행할 수 있는 몸이 아니었다.
땀과 먼지로 눌어붙은 털은 일전의 윤기를 잃어버렸고, 터져버린 근육들은 그 몸을 유지하는 것조차 버겁다는 듯 후들거렸다. 말 그대로 만신창이. 벌어진 입에선 침인지 피인지 모를 액체가 흘러내렸고, 동공이 풀린 눈은 마치 죽은 자의 것처럼 초점을 잃고서 뿌연 색을 띠고 있었다.
그럼에도 그녀는 일어섰다.
“그르으으……”
그러고는, 마지막으로 발악하였다.
“그랴아아아──!”
“키샤아아아──!”
그녀의 번개는 하얗다 못해 푸른색을 띠고 있었다. 번뜩이는 스파크가 그녀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자, 눈이 시린 관객들은 게슴츠레 실눈을 뜨며 그녀의 포효를 지켜보았다.
“여기서 결착이야, 독침붕!”
“가세요, 럭시오!”
최후를 짐작한 두 사람은 그렇게 필드의 중앙을 가리키며 소리쳤고
“기가임팩트──!!”
“와일드볼트──!!”
마침내, 두 포켓몬이 필드의 중앙에서 엄청난 기세로 격돌하고 있었다.
몸속 깊숙이 끌어모은 에너지를 응축시킨 독침붕은 뒤쪽으로 곧은 폭발음을 내며 나아갔고, 끓어오르는 번갯불을 갈기 털처럼 휘날리는 럭시오는 번쩍이다 못해 눈이 멀어버릴 정도로 새파란 전격에 몸을 맡기고 있었다.
그리하여 서로의 머리가 맞부딪히는 필드의 중심, 모든 조명과 카메라의 중점이자, 미르 체육관의 배틀을 매듭짓기 위해 내달리는 두 사람의 종점에서
가슴속에 새겨 둔 저마다의 빛무리가 서로 교차하고 있었다.
““고오오오오──!!””
불과 불의 격돌이 이어졌다.
경기장을 휘몰아치는 거세고 짜릿한 기류의 끝과, 자지러지는 관객들의 함성. 최후의 최후, 그러고도 일말의 사력을 다하여 이끌어낸 두 포켓몬의 결착점.
“키힉……”
그 자리에서 무릎을 꿇은 것은
“그르으…….”
독침붕이 아닌 럭시오였다.
그녀의 다리를 타고 올라온 맹독이 온몸에 번져 있었다. 직감적으로 자신의 체력이 쇠한 것을 깨달은 럭시오는, 그럼에도 이를 악물며 한발 더 나아가고자 했지만, 더 이상 몸이 말을 들어주지 않았다. 뻣뻣하게 굳은 자신의 팔다리를 바라보며 그녀가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그으으……”
모든 것이 끝나서야, 비로소 그녀의 눈동자는 평온을 되찾을 수 있었다.
그 속에는 자신을 바라보며 미소 짓는 에몽가의 모습이 천천히 흐려지고 있었다.
[럭시오, 시합 불가능!]
마침내 시합의 종료를 알리는 휘슬이 울렸다.
“비비용, 아직 움직이면……”
“독침붕……!”
라란티스의 만류를 뿌리치고 뛰쳐나온 비비용은, 차마 독침붕이 그녀의 기척을 알아채기도 전에 그를 뒤에서 끌어안았다.
“고마워……!”
[독침붕의 승리!]
그녀의 뺨에선 눈물이 두 줄기 흐르고 있었다.
아까까지의 간드러진 모습은 어디 가고, 얼굴이 벌게져선 바보 같은 웃음을 짓고 있는 독침붕이 그녀를 떼어내기 위해 바둥거려 보았지만, 비비용은 껌딱지처럼 들러붙어선 그 손을 놓지 않고 있었다.
“…… 하아, 젊다는 건 좋은 거구나.”
“이상한 할머니 같은 말 하지 마, 라란티스. 저 나이 땐 다 저렇게 거리낌 없이 포옹하고 그러는 거야.”
그러나 이어지는 광경에 성아는 그 말을 철회해야 했다.
“비, 비비용?!”
“어머, 어머어머, 쟤 좀 봐……. 꽤 하잖아?”
독침붕의 뺨에 이루어진 비비용의 돌발 행동 덕분에, 필드에는 절로 풋풋한 기운이 넘쳐났다.
“…… 호오?”
물론, 표정이 썩어들어가는 성아를 제외한다면.
“미리 말해두는데, 우리 파티에서 사내 연애는 금지돼있단다. 이 요망한 꼬맹이들.”
“어…… 그런 거 있었어?”
“오늘부터 생겼어.”
“뭐야 그게.”
그녀의 심술에 궁시렁거리는 라란티스를 뒤로 한 채, 성아는 천천히 시트론의 볼 속으로 되돌아가는 럭시오를 바라보았다.
곧이어, 자신에게 볼티지 배지를 건네러 다가오는 유리카에게로 시선이 옮겨 가자, 그녀는 저도 모르게 행복감에 젖어 미소를 지어 보였다.
“…… 뭐, 그래. 변변찮았구만.”
[따라서 최종 승자, 도전자 성아!]
“웃어, 독침붕. 우리들의 승리야.”
그리하여 그녀의 호외를 알리는 관객들의 함성이 프리즘 타워를 뚫고 미르시티 방방곡곡에 퍼져 나갈 뿐이었다.
― 벌레 타입 포켓몬 트레이너 하는 소설 10화
사랑은 혼돈의 노예
시즌 1 마침